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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야. 너, 노 클래스지? 나이도 어려보이고… 그래서 뭐, 내가 널 동정해서 값을 싸게 해줬으면 싶은
- 거냐?”
- “그렇다면 저야 고맙죠.”
- “요 뻔뻔한 놈!”
- 노점상이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기분이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 “나는 말이다. 자기 처지를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놈이 마음에 들어. 질질 짜대는 것보다는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 치는 놈이 좋단 말이다.”
- 노점상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이성민을 향해 활짝 손을 펼치더니, 손가락 세 개를 접어 보였다.
- “2천 에르로 해주마. 그리고… 그것과 같은 투척 단검은 세 개 있다. 세 개 다 구입한다면 5천 에르로
- 해주지.”
- “살게요.”
- 노점상의 말에 이성민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는 이성민을 보면서 노점상이 낄낄거리며
- 웃었다.
- “너. 묘한 꼬마구나. 어린 나이랑 순진한 표정을 제대로 써먹을 줄 알아. 의식하는 거냐?”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뭐, 상관없지. 너는… 단골이 될 것 같군. 다음에 온다면 어느 정도 네 처지에 맞춰서 값을 조정해 주마.”
- 이것은 호의인가? 이성민은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꾸벅 숙이는 와중에 노점상의 속내를 생각해 보았다
- . 고정적인 단골 손님을 만들어두고 싶을 뿐인지, 아니면 정말로 호의를 품는 것인지. 잘 알수가 없었다.
- “저 창은 얼마인가요?”
- 진의를 떠나서, 하나에 3천 에르라는 투척 단검 세 개를 5천 에르에 구입한 것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필요한
- 것은 투척 단검 뿐만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한쪽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길쭉한 창을 가리켰다.
- “3만 에르.”
- 노점상이 대답했다. 이성민은 손을 뻗어 창대를 찹았다. 창대는 나무로 만들었고… 끝에는 금속의 날이 달려 있다
- . 길이는 2미터가 넘는다. 지금의 이성민이 쓰기에는 너무 길다.
- 현재 이성민의 육체 나이는 14세로, 키는 160이 채 안 되었다. 전생처럼 성장한다면, 20살이 되기 전에 키가
- 180까지는 자랄 것이다.
- ‘지금 쓰기에 2미터는… 너무 큰가…’
- 근력도 부족하다. 아마 이 창을 써봤자 제대로 다루기는 힘들 것이다. 경험이 있다고는 해도 육체적 한계는 어쩔
- 수 없는 것이다. 내공이 넉넉한다면 근력도 늘어 창을 제대로 쓸 수 있겠지만, 지금 이성민이 가진 내공은 그리
- 대단하지 않다.
- 하지만 길다면 자르면 되는 일.
- “…싸게는 안 될까요?”
- “네 체격으로는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텐데? 차라리 검을 쓰는 것이 어떠냐. 거, 뭐냐. 무림에서 온 이계인들이
- 곧잘 그러더군. 검이야말로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 “검은 잘 쓸 줄 몰라서…”
- “어쭈. 창은 쓸 줄 안다는 말이냐?”
- “그냥 푹푹 찌르면 되잖아요.”
- 적당히 둘러서 대답했을 뿐이다. 전생에서 창을 사용했었기에, 이성민은 창이라는 무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심오한
-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 “푸하하! 단순해서 좋군. 그래, 3만 에르가 비싸다면 2만 에르로 해주마.”
- 노점상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투척 단검 3개와 창 한 자루, 포션을 매달 수 있는 낡은 가죽 벨트 하나와 다
- 섯 개의 빈 포션 병. 그 모든 것을 3만 에르에 구입했다.
-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죄다 죽은 이계인이 사용한 중고품이라고 하여도, 당장 쓰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특히나
- 포션 수납이 가능한 벨트는 앞으로도 요긴하게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성민은 허리에 감은 벨트의 길이를 조정하
- 고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됐어. 말했잖아, 꼬마야. 앞으로 단골이 될 것 같다고. 독한 놈은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 그렇다면 좋을 텐데. 이성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쓰게 웃었다.
- 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 내공의 부족은 절감하고 있다. 당장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다. 성련단을 손에 넣는다면 상당부분 개선이 가능하
- 겠으나, 성련단이 콜로세움의 상품으로 걸리는 것은 1년 후다. 게다가 콜로세움에서 우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 가지고 있지 않다.
- 여관에서 사냥터까지 향하는 것은 못해도 2시간. 될 수 있는 한 경공을 사용하고, 내공이 고갈되면 뛴다. 해야
- 할 것은 이 나약한 몸뚱이를 단련하는 것이다. 무공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성취가 는다. 근육과 똑같다.
- 북쪽 성문 쪽은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대부분이 이계인이었고, 혹은 이계인을 상대로 물건을 팔고 있는 장
- 사치들이었다.
- 이성민이 이곳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저들은 값을 과하게 바가지 씌운다. 사냥터와 가장 가
- 깝다는 이유 때문에, 이계인들은 바가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건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 “고블린 둥지에 함께 가실 분!”
- “화산파에서 수학한 동포를 찾고 있소!”
- “르에르 학파를 아는 자는 없는가?! 화염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는 없는가!”
- 제각각 각자의 뜻을 담아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함께 사냥터로 갈 동료를 찾는 이들도 있고, 자신과 같은 문파
- 에서 수학한 무림인을 찾는 이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학파의 사람을 찾는 마법사들도 있다.
- 이성민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서 빠르게 북쪽 성문을 향해 갔다. 전생에서, 제나비스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 사냥터로 향했을 때. 이성민도 동료들과 함께 사냥터로 향했었다.
-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성민과 함께 사냥터로 향했던 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처지의 노 클래스였고,
- 몬스터와 싸운다는 현실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망자가 연거푸 발생했고, 이성민은 간신히 목숨을
- 건졌다. 그때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이성민은 일주일 동안 사냥터 쪽으로 가지도 못했었다.
- ‘동료… 있으면 편하지만…’
- 문제는 이곳이 제나비스고, 이성민이 동료로 맺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같은 처지의 노 클래스 뿐이라는 것이다
- . 만약 그들과 함께 사냥터로 향한다면, 이성민은 그들을 보호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무공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성민이 보유한 무공은
- 모두 다 1성. 솔직히 말해서 지금 처지로는 제 앞가림만 하는 것이 고작이란 말이다.
- 무림인이나 마법사들의 동료가 되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솔직히 가망이 없었다.
-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굳이 이성민을 동료로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
- “이름은?”
- 북쪽 성문의 경비원이 이성민을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 “이성민입니다.”
- “증명 패는 가지고 있나?”
- “아직…”
- “뭐, 좋아. 이 도시에서는 그런 것이 있든 말든 크게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후후! 죽지 마라, 꼬마야.”
- 경비원이 이죽거리는 말을 흘려들으면서, 이성민은 성문을 나섰다.
- 거대한 숲이 보였다.
- ======================================
- 노 클래스-5
- 숲에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살아가고 있다. 대화가 불가능한 몬스터도 있고,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도 있
- 다. 사냥으로서의 어려움을 따지자면 전자가 훨씬 쉽다. 지성이 없는만큼 놈들은 본성에 의존하면서, 무식하고 단
- 순하다. 거대한 토끼, 멧돼지 등등.
- 아, 물론 놈들이 ‘진짜’ 토끼고 멧돼지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겼다는 말이다.
- 사냥 자체는 그런 짐승형 몬스터가 쉽지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한다면 지성을 가진 몬스터 쪽이 좋다. 고
- 블린, 오크 등. 상대하는 것이 까다롭기는 하여도, 놈들을 쓰러트린다면 잡다한 부가 수익을 건질 수 있기 때문
- 이다.
- 고블린, 오크의 이빨과 피는 마법적인 재료로서 쓰인다. 놈들의 조악한 장비들은 대장간에 팔아넘긴다면 용돈 정도
- 의 값어치는 벌 수 있다. 운이 좋은 경우, 돈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와 만날 수도 있다. 놈들이 가진 돈이라고
- 해 봐야 그들에게 죽은 희생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 우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성민은 어깨에 걸쳐 들고 있던 창을 양 손으로 잡고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 허리 뒤쪽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았다. 투척용으로 구입한 것이 아닌, 어제 이성민을 등처먹으려 했던 놈을 죽이
- 면서 얻은 단검이다.
- 이성민은 2미터가 넘는 길이를 가진 창대를 자신의 키에 맞게 잘랐다. 단검으로 단단한 창대를 자르는 것은 쉬운
- 일이 아니긴 했지만, 단검으로 톱질을 해대니 잘리기는 잘렸다. 절단면이 거칠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 . 이성민은 자른 창대를 등에 비껴 메고서 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 단검 한 자루. 투척 단검 세 자루. 창 한 자루. 그리고 곤봉 한 자루. 전생에서 처음으로 사냥터에 나섰을 때
- 와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좋은 장비다. 방어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흠이긴 하였지만, 가진 돈이 없으니 어쩔 수
- 없다.
- ‘전생에서는 몽둥이 하나 들고 나왔었지…’
- 세 명의 노 클래스와 동료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사냥터로 향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우선 토끼를 잡아 보자. 이성민은 양 손으로 창을 잡고서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고블린이나 오크
- 에게 싸움을 걸 생각은 없다. 오크는 인간보다 강인하고, 고블린은 인간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독침을 쏘고 무리를
- 짓는 등 까다롭다. 지성 쪽으로 보자면 오크보다 고블린이 낫다.
- 하지만 토끼는 여러모로 쉬운 상대였다. 몸집이 비대하기는 하여도 그래봤자 중형견 정도의 사이즈. 공격법이라고
- 해 봐야 몸통박치기를 하거나 앞니로 물어뜯는 정도다. 긴장하지 않는다면 노 클래스도 몽둥이 하나로 때려잡을 수
- 있는 것이 토끼라는 놈이다.
- 얼마 걷지 않아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회백색의 털을 가진 토끼가 튀어나왔다. 중형견보다는 조금 사이즈가 작다.
- 다 큰 놈이 아니라 어린 놈이다. 현재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에는 최적의 상대였다.
- 토끼가 빨간 눈을 데룩 굴리더니 이성민을 본다. 놈들은 선공을 하지는 않는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주변의
- 풀을 뜯고 몇 번 뛰어다니다가 사라질 것이다.
- 그것이 이성민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이성민은 빠르게 내공을 끌어 올리면서 일뢰주법을 펼쳤다. 일뢰주법은 경신법
- 이면서 보법이기도 하다. 경신법의 기본은 발바닥에서 내공을 내뿜으면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 이성민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14살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몸 전체를 가속시키면
- 서 이성민은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 추혼창법 일식一式, 일격일살一擊一殺. 이성민의 왼 손이 창대를 받친다. 포신砲身이다. 앞으로 쏘아낸 창이 포신
- 역할을 하는 왼 손바닥 위를 미끄러진다. 창이 충분히 앞으로 나아갔을 때에, 이성민의 오른 손이 창의 끄트머리
- 를 팍하고 치면서 밀어냈다.
- 퍼어어억! 창 끝에 꿰뚫린 토끼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일격일살은 가속이 전부인 창술이다. 가장 먼저 몸을 가속
- 시킨다. 창을 받친 왼 손은 포신의 역할을 하고, 창은 포탄이 된다. 오른 손은 공이치기 못의 역할을 한다.
- 일직선으로 쏘아내는 것이 전부인 만큼 변화를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밀어 전진하는 것이 전부이기에 단단한 상대
- 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끼를 상대로는 충분했다.
- ‘손바닥이 쓰려…!’
-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왼 손을 내려 보았다. 창대가 쭉하고 쓸어낸 탓에 손바닥이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리고
- 있었다. 오른 손 역시 마찬가지다. 거친 절단면을 때리면서 밀어낸 탓에 손바?닥이 욱신거린다.
- “일단 굳은살부터 박아 넣어야겠어.”
- 14살의 피부는 너무 여리고 약하다.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화끈거리는 손을 툭툭 털었다.
- 토끼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애초에 지금의 이성민은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공간 마법
- 이 걸린 인벤토리는 제나비스에서도 팔고는 있지만, 지금의 이성민은 꿈에도 꿀 수 없을 정도로 고가에 거래 된다
- . 그렇다고 가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늘은 목표했던 대로 적당히 고블린 몇 마리를 잡는 것에 주력하기로 했
- 다.
- 물론, 적응이 다 된 후에 말이다. 이성민은 숲을 돌아다니면서 혼자 다니는 토끼 몇 마리를 사냥했다.
- 그 과정에서 이성민은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지금의 내공 수준으로는 이류무공인 추혼창법조차 제대로 펼칠 수가
- 없고, 장기전은 꿈에도 못 꾼다. 게다가 몸뚱이도 나약해서 창 몇 번 휘두른 것만으로도 지쳐버린다.
- ‘근력이 너무 부족해. 지구력도 그렇고… 기껏 처음으로 돌아왔는데 전생을 그리워하게 되다니.’
-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옷깃을 찢어 손바닥을 칭칭 휘감았다. 무리해서 창법을 펼친 덕에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
- 르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고작 이 정도 움직인 것으로 지쳐버리다니! 이성민은 제 처지를 실감하
- 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하지만 물도 없고 식량도 없다. 가방이라도 있었으면 아침에 여관을 나서면서 빵이라도 몇 개 챙겨두었을 텐데,
- 가방도 없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걸으면서 천진심법을 운용했다. 제대로 가부좌를 틀고서 운기조식을
- 하는 것보다는 못 하지만, 몸을 격하게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걷기만 하고 있으니 내공이 조금씩 차오른다.
- 숲 속 깊은 곳에 들어갈수록 고블린, 오크의 둥지와 가까워진다. 지금 상태로 둥지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성민은 깊은 숲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 넓은 숲의 지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은 있어서, 이
- 성민은 그것에 의존했다.
- 이성민은 바닥과 나무를 살피면서 걸었다. 이성민의 어깨 높이보다 조금 아래에, 둥그런 원이 그려져 있는 나무를
- 발견했다. 고블린의 영역 표시다.
- 고블린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고는 있지만, 이 숲의 고블린이 모두 한 부족인 것은 아니다. 놈들은 무리를 짓지만
- , 보통 고블린 한 부락의 인구수는 50마리 정도다. 놈들은 다른 고블린 부락과 경쟁하면서 이 숲에서 살아가고
- 있다. 이 근방은… 동그란 원으로 영역 표시를 하는 고블린 부락의 영역이다.
- 이성민은 주변 나무를 살피면서, 이 근처에 표시 된 것은 동그란 원 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이후에는 영역
- 의 최대한 끄트머리까지 이동한 뒤에, 옷소매를 조금 더 찢었다.
- 왼쪽 팔뚝 윗 부분을 살짝 베어냈다. 너무 깊이 베지는 않았다.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자, 이성민은 찢어낸 옷깃
- 에 피를 잔뜩 묻히고서 한쪽 수풀에 던져두었다. 그 뒤에는 창을 내려 놓고서 땅 위에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가
- 핑핑 돌 정도로 한참을 구르자 이성민의 몸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 그 뒤에는 피에 젖은 옷감을 던져둔 곳 근처에 오줌을 쌌다. 바짓단이 젖지 않도록 양 발을 크게 벌려 비틀비틀
- 걸으면서 주변에 오줌을 싼다.
- 이걸로 되었다. 이성민은 다시 옷깃을 찢어 상처를 단단히 동여메고서는, 가까운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 몸뚱이의 근력은 나무를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내공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
- 굵직한 나뭇 가지에 매달려서, 이성민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기다리면 된다. 영역 다툼 중인 고블린들
- 은 비교적 자주 영역을 순찰한다. 영역에 들어 온 먹잇감을 탐색하기 위함도 있고, 다른 부락의 고블린이 들어오
- 지 않았나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 나뭇가지 위에서 버틴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경계를 도는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마리에, 무기는 단검.
- 허리춤에 기다란 막대기를 달고 있다.
- 독침이다.
- 고블린의 신체 능력은 별 것 없다. 놈들이 까다로운 것은 무리를 짓기 때문이고, 교활하기 때문이며, 독을 능숙
- 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 놈들이 다루는 독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닌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마비독이다. 지금의 이성민이 혼자서 세 마리
- 의 고블린을 상대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성이 많았기에, 이성민은 정면 공격은 피할 생각이었다.
- 고블린들이 냄새를 맡는다. 오줌 냄새, 피 냄새, 인간의 냄새. 놈들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이성민이 오줌을 싸갈
- 긴 곳까지 다가왔다. 이성민이 위치한 곳에서는 놈들의 정수리가 훤히 보인다.
- 이성민은 벨트에 꽂아 넣은 투척 단검을 뽑았다. 호흡을 몇 번 고른 뒤에, 이성민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파악!
- 빠르게 던진 단검이 아래로 내리 꽂힌다.
- “퀘엑!”
-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던 고블린의 뒷목에 단검이 꽂힌다. 그것을 확인한 즉시 이성민은 연거푸 단검을 던졌다. 위
- 에서 아래로. 궤적의 흐트러짐 없이 떨어진 단검이 남은 고블린 두 마리의 목을 마저 꿰뚫었다. 이성민은 나뭇가
- 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 제법 높기는 했지만, 내공으로 다리를 보호하니 뛰어 내릴 만 했다. 이성민은 허리 뒤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 는 비틀거리는 고블린들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 세 마리의 고블린이 죽었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고서 놈들의 뒷목에 꽂힌 단검을 뽑아냈다.
- 그 후에는 고블린의 시체를 뒤진다. 놈들이 가지고 있던 단검에는 피가 듬뿍 묻어 있었다. 굳은지 얼마 되지 않
- 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오기 전에 영역을 돌아다니던 무언가를 잡아 죽인 모양이었다. 아마… 노 클래스겠지. 이
- 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놈들의 단검을 챙겼다.
- 단 검 세 자루와 독침을 쏘아내는 대롱 세 개, 독침 서른 개. 그 외에도 독병 세 개. 운이 좋았다. 놈들은 지
- 갑을 가지고 있었다. 죽인 노 클래스에게 빼앗은 것이리라.
- 지갑에는 2만 에르가 들어 있었다. 이성민은 고블린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모두 챙긴 뒤에, 단검을 써서 놈들
- 의 목을 주욱 찢었다. 다섯 개의 포션 병에 고블린의 피를 가득 채웠고, 놈들의 입을 벌려 이빨도 하나하나 뽑아
- 냈다. 가방이 없기 때문에 뽑은 이빨은 주머니에 죄다 쑤셔 넣었다.
- 이것으로 오늘의 사냥은 끝이다.
- ======================================
- 노 클래스-6
- “…허허허!”
- 여관 주인, 잭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성민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이성민이 내 놓은 물건들을
- 보면서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 “이걸 정말로 너 혼자서 다 모아왔다는 거냐?”
- 고블린 세 마리 분의 이빨. 피를 가득 담은 다섯 개의 병. 대롱 두 개와 독침 열 개. 독병 한 개. 남은 대롱
- 과 독침, 독병은 이성민이 갖도록 했다. 이래저래 쓸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잭은 이성민을 내려 보면서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 고블린은 그리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무리를 짓고 독을 쓴다는 것이 귀찮기는 하지만, 숙련된 모험가라면 고블린
- 몇 마리쯤은 우습게 잡아 죽일 수 있다. 몇 십 마리의 고블린이 우글거리는 둥지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 없는 일이지만, 영역 순찰을 도는 고블린을 몇 마리 족치는 것은 쉬운 일이란 말이다.
- 하지만, 그것을 해 낸 것이 14살의 꼬마. 그것도 아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노 클래스라는 것이 잭을 놀라
- 게 했다.
- 잭은 여관업을 하고 있기에, 이 도시에 처음으로 도착하는 이계인들을 몇 번이나 보아왔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 무림인, 마법사 등은 비교적 빠르게 이 세계에 적응한다.
- 하지만 노 클래스는 아니다. 그들은 이런 식의 싸움이라는 것을 제대로 겪어 본 적도 없거니와, 이 세계에서 목
- 숨을 부지하게 해 줄 재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보통… 노 클래스가 이 세계에 적응하는 기간은 한 달 정도다.
-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몬스터를 아무렇지 않게
- 죽이게끔 되는 것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 “…너… 이 도시에 언제 처음 온 거냐?”
- “어제요.”
- 잭의 질문에 이성민은 거짓 없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잭은 기가 질려서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렸다.
- “나이는 열 넷이고?”
- “네.”
- “뭐 따로… 익힌 것은 없고?”
- “…그렇죠.”
- “허허허!”
-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잭이 다시 웃는다. 잭은 이성민이 대체 무엇을 하다가 온 꼬마인 것인지 궁금증이 동했지
- 만, 그것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전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 “값은… 제대로 쳐주마. 허허. 묘한 꼬마가 들어왔어. 노 클래스가 하루 만에 이 세계에 적응하고 몬스터를 잡아
- 오다니…”
- 솔직히, 잭은 이성민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저런 놈이 있었다.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 처지를 자각하고,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사냥터로 뛰쳐나가는 놈들이.
- 보통, 그런 놈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처지를 자각하였다고 해도 몬스터와 싸워 살아남는 것은 별개의 일이기 때문
- 이다.
- 그런데 이 꼬마는 살아서 돌아왔다.
- “숙박비는 반으로 줄여 주마.”
- 공짜는 안 된다. 그것은 잭의 신념과도 같았다.
- “재능을 가진 꼬마와 인연을 만들어두는 것도 좋겠지. 만약 네가 쭉 살아남는다면… 하하! 제나비스까지 소문이
- 들려 올 거물이 될 지도 모르지. 그래, 그때에는 나에게 얻은 은혜는 잊지 마라.”
- 잭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성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성민은 마주 웃어주면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 계단을 오르면서,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 너는 단골이 될 것 같구나.
- 재능을 가진 꼬마.
- 노점상과 잭이 한 말이다. 전생에서의 이성민은 저런 말을 들어 본 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이 도시. 제나비스
- 에서는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저런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다.
- 제나비스는 모든 이계인이 처음으로 도착하게 되는 도시인만큼, 이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확실하게 자각시킨
- 다. 그것은 당장 잭이나 노점상이 이성민을 대한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 재능.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리도 쉽게 호의를 얻을 수 있다.
- ‘재능이라니. 인연도 없던 것을.’
-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에리아에서 살았던 13년의 삶은, 이성민이 자신의 주제를 깨닫게 하
- 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10년 가까이 익혔던 심법은 대성하지도 못했고, 발품을 팔아 익혔던 이류무공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 거쳤던 경
- 지이니 전생에서의 실력까지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성민이 전생에 익혔던 무공
- 들이 ‘깨달음’같은 것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무공들이었기 때문이다.
- 단순한 숙련도만으로 경지가 오르는 것이 이류무공이다. 추혼창법은 철저하게 형形만을 담은 무공이다. 기묘한 초식
- 도 없고 있어 보이는 심득心得따위도 담겨져 있지 않다. 일뢰주법도, 철피강골도, 석파권장도 마찬가지다.
- 경신법이자 보법인 일뢰주법은 경신법으로서의 기본만을 담은 무공이고, 철피강골과 석파권장은 외공外攻이다. 내공
- 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것들에도 심득 같은 것은 담겨져 있지 않다.
- 그것이 이류무공과 일류무공을 나누는 차이다. 일류무공에는 심득을 담는다. 운이 좋다면 심득을 깨치고서 일류의
- 벽을 넘는 것이 가능하다.
- 하지만 이류무공은 아니다. 심득같은 것 없이 철저하게 형만을 담은 무공이기에, 아무리 익혀봤자 가진 무공에서
- 깨치는 것은 없다. 잘 해봐야 일류 수준에 근접하게 될 뿐이다.
- ‘지금은 몸이 너무 약해. 근력도 부족하고 지구력도 부족해. 체력이 붙는다면… 천진심법을 제외한 다른 무공의
- 경지가 빠르게 오르겠지. 하지만 매달려봐야 결국은 이류무공이야…’
- 그것이 이성민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류무공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무공이 가진 한계를 초월하게끔 만드는 재능
- 이 필요하다.
- 하지만 이성민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대종사大宗師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
- 았기에, 타인이 심득을 담아 만든 무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은 천진심법이다. 이것은 일류의 내공심법이다. 매진한다면… 어쩌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 지도 모른다. 심법은 내공의 절대량을 늘리면서 내공의 운용을 능하게 만든다. 천진심법을 수련하여 성과를 거둔다
- 면, 다룰 수 있는 내공이 크게 늘어나고 내공의 운용이 쉬워질 것이다.
- 하지만 심법은 결국 심법일 뿐이다. 한계는 명확하다.
- ‘기회는 있어. 하지만… 아직 멀군. 우선 성련단을 얻어야 해.’
- 이성민은 흙투성이의 옷을 방구석에 던져두고서 숨을 크게 삼켰다. 몸이 조금 뻐근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개의치
- 않고서 바닥에 엎드렸다.
- 우선 매일 팔굽혀펴기를 하기로 했다.
- *잭의 여관에서 투숙하게 되고서, 이성민은 매일매일 사냥터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내공이 허락하는 한 일뢰주법을
- 사용했고, 필요한 물건은 호의를 보였던 노점상- 한스에게서 구입하고, 잭이 처분하지 않는 전리품은 그를 통해서
- 처분했다.
- 사냥터로 향하는 이성민이 주로 노리는 것은 대부분 고블린이었다. 이성민은 몇 번이나 숲을 드나들면서 고블린 부
- 족의 영역을 파악했고, 그 영역 외곽을 돌면서 순찰을 도는 고블린을 사냥했다.
- 피와 이빨은 계속해서 모았다. 방값이 절반으로 줄어든 덕에, 이성민이 잭에게 가져다주는 피와 이빨은 방값을 지
- 불하고도 남게 되었다. 잭은 약간의 수수료를 받기로 하고서 남은 돈은 이성민에게 전해 주었다.
- “아공간 포켓. 있어요?”
- 이성민이 제나비스로 돌아오고서 이주일이 되었을 때. 이성민은 한스의 노점상을 찾아가서 물었다. 아침 공기에 몸
- 을 부르르 떨던 한센은, 크게 하품을 한 번 하더니 이성민을 보았다.
- “있기야 있지.”
- 아공간 포켓은 사냥터를 떠도는 이계인들이나 모험가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다. 공간왜곡 마법이 걸린 그 포켓은
- 적은 부피로도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
- “그래봤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중고에, 걸려 있는 왜곡 마법도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 어디 보자…”
- 한스는 다리 사이에 두고 있던 큼직한 보따리를 열었다. 보따리의 안에는 시커먼 어둠이 가득했다. 이성민은 저
- 보따리가 아공간 포켓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한스의 손이 보따리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잠깐 동안 안을 뒤적거리던 한스가 주먹 만한 포켓을 꺼냈다.
- “중고품이다. 제나비스에서 좀 떨어진 숲을 지나던 중에 주웠지. 시체한테서 말이야. 안에는 대충, 큰 가방 하나
- 정도의 용량이 들어간다. 살 테냐?”
- “얼마인가요?”
- “60만 에르.”
- 한스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아공간 포켓은 그 편리함만큼이나 비싼 값에 거래된다. 공간왜곡 마법으로 물건을
- 담아내는지라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아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식량을 보관하는 것도 가능
- 하다. 이런 저런 전리품을 많이 챙기는 모험가로서는 필수인 아이템이다.
- “비싸네요.”
- “흥정하고 싶냐? 50만 에르까지는 깎아주지.”
- 한스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 현재 이성민의 전재산은 10만 에르가 채 안 된다. 숲을 돌면서 팔만한 것은 죄다 긁어다가 한스나 잭에게 처분하
- 고 있었지만, 숙박비나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다 보니 돈이 잘 모이지 않았다.
- “다음에 살게요. 진짜 돈이 없거든요.”
- “흥정할 생각이… 아닌 모양이군. 왜 물어 본 거냐?”
- “저로서는 아저씨가 물건을 가장 싸게 팔아주는 사람이니까요.”
- 아공간 포켓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은 구입할 여력이 안된다. 그러니, 한스가 아공간 포켓을 얼마에 파는 것인
- 지 알아두고 싶었다.
- 한스는 이성민의 말에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 “…푸하하! 노점상 일은 몇 년이나 했지만, 이런 믿음을 받는 것은 처음이군.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너를
- 시험해 보도록 하마.”
- “…예?”
- 갑작스러운 한스의 말에 이성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한스는 끅끅거리면서 웃더니 말을 계속했다.
- “오크 다섯 마리를 죽여서 놈들의 눈을 뽑아 와라. 네가 성공한다면 이 아공간 포켓을 주지.”
- 그 말에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제나비스로 돌아오고서 이주일이 흘렀지만, 이성민은 아직까지 오크 사냥에는
- 도전하지 않았었다.
- 오크는 고블린보다 상대가 까다롭다. 놈들은 호전적이면서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고블린보다는 지능이 조금
- 떨어지기는 하지만, 오크는 그 부족한 지능을 무시할 정도의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 “…언제까지?”
- “오늘 안에.”
- 한스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 “네가 제나비스에 온 지 이주일이 되었지? 오자마자 바로 다음날부터 사냥터로 향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 너는 꽤 재능이 있는 거야. 상대가 비록 토끼나 고블린이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네가 오크까지 죽인다면, 나는
- 네가 가진 재능이 진짜라고 믿으마.”
- 사실 재능은 아닌데. 그냥 경험일 뿐이지.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를 크게 내색하
- 지는 않았다.
-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 이성민이 머리를 크게 끄덕거렸다.
- ======================================
- 사냥과 전리품-1
- 숲의 초입에 도착하고서, 이성민은 등에 매고 있던 큼직한 가방을 열었다. 여관 주인인 잭의 호의를 받게 되면서
- 공짜로 받은 가방이다. 공간왜곡 마법 같은 것은 걸려 있지 않은 평범한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는 필요한 물건들
- 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 ‘설마 벌써 오크랑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어느 정도 몸이 성장하고 근육이 붙을 때까지 무리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이성민의 육체는 14살이었고,
- 내공은 부족하고, 근력도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 하지만 손바닥에 굳은살은 붙었다. 근력운동을 2주일 했다고 쓸만한 근육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추혼창법을 어느
- 정도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근육은 붙었다.
- 천진심법 2성. 추혼창법 4성. 일뢰주법 2성. 철피강골 2성. 석파권장 2성.
- 현재 이성민의 무공 성취였다. 이류무공인 추혼창법은 전생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빠르게 성장을 거두었지만, 내력도
- 근력도 부족한 탓에 본래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아직 몸이 연약한 탓에 외공인 철피강골과 석파권장은 거의 성
- 취가 오르지 않았고, 내공의 부족으로 일뢰주법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못해도 반년은 수행하고서 오크와 싸워 볼 생각이었다. 이성민은 이미 한 번 죽어 보았
- 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어이없고 허무하게 찾아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 한 번 죽어보았기 때문에 안다. 또 죽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충분히, 서두르지 않고 준비할 생각이었다. 오크에
- 게 죽는다면 허무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 ‘그래도. 아공간 포켓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기회야.’
- 60만 에르짜리의 아공간 포켓은 이성민으로서는 포기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 ‘안에 담은 물건이 부서질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테고.’
- 이성민은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유리 병을 꺼냈다. 그것을 몇 번 흔든 뒤에 병의 입구를 막고 있던 마개를 열었
- 다.
- 시큼한 냄새가 올라온다. 고블린들이 사용하는 독을 베이스로 해서, 이성민이 전생의 경험을 토대로 이 숲에서 구
- 할 수 있는 독초를 통해 개량한 독이다.
- 상대를 마비시키는 것은 똑같다. 다만 그 지속력과 즉발적인 효력이 다르다. 체내로 침투한다면 이 마비 독은 5
- 분도 되지 않아 전신을 마비시킬 수 있다.
- ‘오크에게도 먹혀.’
- 이성민은 전생의 경험을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래 저래 힘이 부족한 시절에는 이런 식의 꼼수라도 쓰면서
- 살아남아야 했다. 이성민은 독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워 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무기에 독을 바르기
- 시작했다.
- 투척 단검 다섯 자루, 단검 한 자루, 창 한 자루. 날 전체에 꼼꼼히 독을 바른다.
- 이것으로 대략적인 준비는 끝났다. 이성민은 각오를 다지고서 몸을 일으켰다.
- 오크의 영역은 이미 파악해 두었다. 이주일 동안 고블린과 토끼, 멧돼지 따위를 열심히 잡기만 한 것은 아니다.
- 정보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
- ‘놈들의 순찰 경로는 파악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
- 오크 다섯 마리. 지금의 이성민에게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차라리 동료를 영입하여 힘을 합치는 편이 낫지
- 않을까?
-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동료를 구한다면 보상을 나눠야 돼.’
- 한스가 아공간 포켓이라는 보상에 대해 입을 다물어 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동료와 힘을 합쳐서 오크 다섯 마
- 리를 잡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성민이 개인적으로 받은 아공간 포켓이라는 보상에 대해
- 놈들이 지랄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 이 숲만 하더라도 하루에 몇 십 몇 백 명이나 되는 이계인들이 드나든다. 숲 안으로 들어온 이계인들은 어지간해
- 서는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든다.
- 불신不信 때문이다.
- 이성민도 그랬다. 인연?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쪽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상대방 또한 그렇게 생각하리라
- 는 보장은 없다. 이쪽이 상대방에게 호의를 준다고 해서 그 호의가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단 말이다.
-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나, 힘이 없는 지금 같은 때에는.
- “취익!”
- 오크가 걷는다. 놈들의 장비는 조악하기 짝이 없다. 이 빠진 손도끼를 들고, 갑옷은 걸치지 않았다. 누더기같은
- 천으로 몸을 대충 감고 있을 뿐이다. 다른 지역의 오크 중에는 그럴싸한 장비를 걸친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제
- 나비스의 오크는 그 정도로 단련되지 않았다.
- 그래봤자 고블린 따위랑 경쟁하고 있는 놈들이다. 지성도 크게 떨어지고 육체적인 강인함 밖에 없는 놈들이다.
- 그럼에도 위험하다. 놈들은 지성이 떨어지는 만큼 본능적이고 감각이 고블린보다 예민하며, 고블린보다 강하다. 이
- 성민은 고블린을 홀렸을 때처럼 적당한 매복처에 체취를 듬뿍 뿌려 두었다.
- 하지만 상처를 만들지는 않았다. 놈들의 후각은 고블린보다 예민하다. 괜히 상처를 만들었다가는, 놈들이 피 냄새
- 를 맡고 이성민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 기습. 이성민은 그것을 선택했다.
-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함정이라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 몸으로 준비할
- 수 있는 함정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은 없다.
- 이런 저런 방법을 떠올려 보았지만, 기습이 최적이었다. 이성민은 호흡을 삼켰다. 위에서의 기습은 안 된다.
- 이성민은 고블린의 것보다 강력한 마비독과, 고블린이 사용하는 독침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으로 쏘아내는 침으
- 로 꿰뚫을 수 있을 정도고 오크의 가죽이 얇지 않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단검을 던지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 이성민의 근력과 내공을 더하여도, 전력을 다해 던져도
- 단검으로 놈들의 가죽을 뚫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 “냄새. 냄새가 난다.”
- 외곽 순찰을 도는 오크는 다섯 마리. 한스가 요구한 숫자와 딱 맞았다. 아마, 한스도 이성민이 외곽 순찰을 도는
- 오크를 노릴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스는 숲을 드나들면서 시체를 뒤지면서 물건을 구해다가 팔고 있다. 오크
- 나 고블린의 순찰 경로쯤이야 꿰고 있겠지.
- ‘다섯… 나누고 싶다면 나누고 싶은데.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
- 오크들이 상체를 숙이고 큼직한 코를 킁킁거린다. 이성민이 오줌을 쏴 갈긴 자리였다.
- 지금?
- 아니, 아직.
- 이성민은 벌레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온 몸에 흙을 발랐고 땅까지 얇게 파서 착 달라붙었다. 호흡은 최대한
- 줄였다. 흙투성이의 얼굴 한 복판에서 부릅 뜬 두 눈만이 때를 노리고 번들거렸다.
- “인간 냄새다.”
- “인간. 어디에 있지?”
- “시체가 없다. 피도 없다…”
- 오크들이 중얼거린다. 지금이다. 이성민은 손에 꽉 쥐고 있던 돌멩이를 냅다 위로 집어 던졌다. 호선을 그리면서
- 날아간 돌멩이가 오크들의 뒤편으로 떨어진다. 그 소리에 오크들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 오크들이 머리를 돌린 즉시 이성민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기합 대신에 크게 숨을 삼켰고, 창 대신에 단검을
- 쥐었다. 일뢰주법까지 사용하면서 뛰어나간 이성민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오크의 등짝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 “취이익!”
- 오크가 비명을 지른다. 손목이 뻐근할 정도로 힘을 넣어 찔렀다. 단검이 깊이 박혀 피가 튄다. 하지만 치명상은
- 아니다. 두꺼운 거죽을 뚫고서 간신히 박힌 것이 고작이다.
- 이성민은 미련 없이 단검을 놓았다. 뽑으려 들지도 않았다. 독은… 스며들었다. 단검에 듬뿍 바른 독은 놈의 몸
- 안에 도는 피와 함께 전신으로 퍼질 것이다.
- ‘남은 것은 넷.’
- “인간!”
- “죽인다!”
- 오크들이 고함을 지른다. 놈들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전법같은 것 없이 냅다 뛰어 올 뿐이지만, 놈들의 흉악
- 한 면상과 굵직한 체구 덕분에 그 박력이 대단했다.
- “후욱!”
- 이성민은 호흡을 크게 내뱉으면서 투척용 단검 두 개를 꺼냈다. 일뢰주법이 펼쳐진다. 파악! 이성민의 몸이 옆으
- 로 뛰었다. 이성민은 머리 위를 내리 찍는 도끼를 피하고서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 콰아악! 이성민이 되는대로 휘두른 단검이 오크의 어깨에 박힌다. 노리는 것은 치명상이 아니다. 단순한 상처 정
- 도면 충분하다. 박아 넣은 단검을 놓고서 이성민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 “쥐새끼!”
- 오크가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크게 휘두른다. 내력따위는 실리지 않았어도, 오크의 근력은 성인 남성을 뛰어 넘는
- 다. 이 빠진 날… 맞는다면 베어지는 것이 아니라 뼈가 박살나겠지. 현재 이성민의 외공 수준으로는 저 공격을 일
- 격도 버틸 수가 없다.
- ‘맞으면 안 돼…!’
- 이성민은 필사적이었다. 아직 오크는 셋이나 남았고, 놈들은 14살 꼬마 정도는 산체로 팔다리를 뜯어낼 수 있을
- 정도의 근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가슴팍을 스친 도끼에 섬뜩함을 느끼면서 냅다 땅 위를 굴렀다.
- 데굴데굴. 이성민은 바닥을 구르면서 왼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
- 으키더니 오크를 향해 단검을 집어 던졌다.
- “크륵!”
- 내력을 실어 던지지 않았다. 오크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도끼를 휘둘러 이성민의 단검을 막아 냈다. 그것이
- 면 충분하다. 이성민은 창을 재빨리 뽑아내고서 일격일살을 펼쳤다. 빠아악! 오크의 텅 빈 가슴팍에 이성민의 창
- 이 꽂혔다.
- “쿠륵!”
- 오크의 입에서 피가 튀긴다. 이성민은 양 손에 힘을 주어 창을 뽑아냈다. 불쾌한 감각과 함께 창이 뽑힌다. 아니
- , 차라리 놓는 것이 나았다. 근처에 있던 오크가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의 머리 위로 도끼를 내리 찍었기 때문
- 이다.
- “크윽!”
- 이성민은 다급히 창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빠아악! 도끼에 얻어 맞은 창대가 반으로 뚝 부러졌다.
- “개새끼야!”
- 이성민은 부러진 창이 아까워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면서도 이성민은 오크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 추혼창법 이식二式, 역류살逆流殺. 아래로 내렸던 창끝이 위로 치솟는다. 창대가 부러지긴 하였지만, 이성민은 부
- 러진 창으로 거리를 잡고서 그것을 검처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파아악! 뒤로 물러서는 것이 늦었던 오크의
- 턱끝이 창에 스친다.
- ‘이미 한 번 독을 사용했어. 부족해…!’
- 오크의 몸에 한 번 박혔던 창이다. 독이 부족하다. 이성민은 왼 손에 쥐고 있던 부러진 창대를 꽉 쥐었다. 도끼
- 가 무딘 탓에 절단면이 거칠다. 그것이 이성민에게는 다행이었다.
- “케륵!”
- 있는 힘을 다해 오크의 목에 창대를 박아 넣었다. 오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직 한 마리 남았다.
- 조금 지치기는 하였지만, 한 마리의 오크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거친 숨을 몰아
-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비 독에 당한 오크 넷은 바닥에 널브러져 움찔거리고 있었고, 창대에 목이 꿰인 오
- 크는 죽었다.
- “…지친다.”
- 카악, 퉤! 이성민은 끈적한 침을 뱉어 내면서 투덜거렸다. 못해먹을 짓이었다. 여러 가지로 여력이 부족한 상태
- 에서 무리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말이다.
- “…그래도.”
- 가슴 벅찬 뿌듯함이 느껴졌다. 오크 다섯 마리를 잡았다. 전생에서, 이 시절의 이성민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한
- 일을 한 것이다. 이성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움찔거리는 오크들을 향해 다가갔다.
- 눈깔을 뽑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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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과 전리품-2
- “진짜구먼.”
- 시킨 것은 한스 본인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진짜로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4살의 꼬마에게 오크
- 다섯 마리를 잡아 오라고 시켰다. 무공을 익힌 놈도 아니고, 마법을 익힌 놈도 아니다. 노 클래스, 14살의 꼬
- 마다.
- 그 꼬마가 오크 눈깔 열 개를 들고 왔다.
- “죽을 뻔 했어요.”
- 이성민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매복하느라 흙투성이였던 상태에서 땀을 뻘뻘 흘린 탓에, 얼굴에는 흙이 지저분하게
- 번져 있었다. 피 냄새와 땀 냄새, 흙냄새가 뒤섞여 악취가 풍긴다.
- “어디서 주워온 것은 아니겠지?”
- “오크 눈깔을 어디서 주워요.”
- “오크 시체는 발견할 수도 있잖아.”
- “그냥 아공간 포켓 주기 싫은 거죠?”
- 이성민이 눈을 흘기면서 묻자 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한스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아니, 그건 아니야. 주기로 했으니까 줘야지.”
- 한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보따리에서 아공간 포켓을 꺼냈다.
- “자. 60만 에르짜리의 아공간 포켓이다.”
- 이성민은 번개처럼 출수하여 한스에게서 아공간 포켓을 받았다. 이성민은 환히 웃으면서 아공간 포켓을 주머니에 쑤
- 셔 넣었다.
- “고맙습니다!”
- “웃으니까 좀 애 같네.”
- 한스가 피식 웃으면서 이죽거렸다.
- “애 같다는게 무슨 말이에요? 애 맞는데.”
- “퍽이나. 야, 내가 널 본지도 2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말이야… 너 같은 애 늙은이는 처음 본다. 대체 뭐하다가
- 왔길래 정신머리가 그렇게 삭았어?”
- 정확한 평가였다. 이성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 “푸하하!”
- 한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린애인 척 하는 것도 힘들다니까.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에 가방 입구
- 에 튀어 나와있든 도끼 다섯 자루를 꺼내 한스의 앞에 내려 놓았다.
- “이거나 구입해 주세요.”
- “이 뻔뻔한 새끼야. 이걸 어디다 쓰라고 나한테 사달라는 거야? 날은 다 빠졌고, 자루도 부러지기 직전이구만.”
- “쇠만 뽑아서 대장간에 팔면 되잖아요.”
-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철을 어떤 병신 대장장이가 사겠어?”
- “에이 그래도… 무거운데 고생해서 들고 왔는데…”
- “그건 니 사정이고요. 아무튼 이건 안 산다.”
- 한스가 제법 호의를 가진 듯 하여 시도해 본 것인데. 쓰레기를 사 줄 정도의 의리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 풀이 죽은 척 양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꼴깞 떨지말고.”
- 한스가 투덜거렸다.
- “근데 너. 용병이 될 생각은 없냐?”
- 이성민이 늘어트렸던 어깨를 위로 들었을 때, 한스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 “…용병이요?”
- “그래.”
- 용병. 그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의 이성민도 용병 길드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
- 다.
- 용병은 노 클래스가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용병이 된다면 여러 가지 편의성이 늘어난다. 수
- 수료가 때이기는 하지만 전리품의 거래를 용병 길드의 창구를 통해 쉽게 할 수 있었으며, 어지간한 도시 정도는
- 용병패를 통해 출입할 수 있게 된다.
- ‘의뢰’를 받는 것도 쉽다. 모든 도시에는 기본적으로 용병 길드가 존재한다. 용병 등급에 따라 수주할 수 있는
- 의뢰가 갈리기는 하지만, 용병이 된다면 의뢰를 수행하면서 돈을 벌고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 “…아직은 용병이 될 생각이 없어요.”
-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대답했다.
- 전생에서, 이성민은 C급의 용병이었다. 그리 대단한 위치는 아니다. 용병 길드에서 가장 많은 용병이 C급이기 때
- 문이다.
- C급. 그것은 노 클래스가 용병 길드에 들어가 오를 수 있는 한계이기도 했다. 기연을 얻는다면 모를까, 전생의
- 이성민처럼 무난하게 살아 온 노 클래스라면 용병 길드에서 아무리 악을 써 봤자 C급 위로는 오를 수 없다.
- ‘지금 당장 가입한다고 해도 F급 정도겠지.’
- 용병의 최하 등급은 G다. 전생에서의 이성민도 G급에서 시작했고, 간신히 C급 까지 올랐다. 거기에 같은 등급이
- 라고 해도 격차가 꽤 많이 나뉜다. C+, C, C-로 한다면, 이성민은 딱 C급이었다.
-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성민은 지금 자신이 용병 길드에 들어가 봤자 큰 이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 알고 있었다. 용병 길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운 곳이다. 그런 주제에 아래로 떨어지는
- 것은 쉽다. 의뢰 몇 개를 말아먹는다면 용병 등급이 한 단계 떨어져 버린다.
- 차라리 충분히 힘을 축적하고서 용병 길드에 입단하는 것이 낫다. G급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D급에서 시작하는 것
- 이 훨씬 낫다. 현재 이성민이 노리는 최하 등급은 D였다. D급 용병의 실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용병이 될 생각이
- 없었다.
- “흠. 뭐, 싫다면 권하지는 않겠다만.”
- 한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성민을 힐긋 보았다.
- “용병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이런 저런 편리함이 늘거든.”
- “그러겠죠.”
- 이미 알고 있다. 이성민은 한스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몸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지독했다.
- “저기. 이만 가봐도 될까요?”
- “받을 건 다 받고 가는 구만. 애교 없는 꼬마 같으니.”
- “남자한테 애교 받으면 좋아요?”
- “싫지. 가라, 가.”
- 한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성민은 한스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이고서 내려 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는
- 총총걸음으로 한스에게서 멀어졌다.
- “야! 쓰레기 가지고 가!”
- 등 뒤에서 한스가 고함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 *“너, 냄새 나.”
- 여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딜을 맞았다.
- 새하얀 뺨에 주근깨가 살짝 뿌려진 소녀가 이성민을 보고서 코를 쥐어 잡았다. 제 몸에 악취가 나고 있다는 것은
- 이성민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그는 소녀의 질책에 변명은 하지 않았다.
- “알아.”
- “우씨. 너 또 반말했어!”
- 소녀가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소녀의 이름은 루라.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잭의 딸이다.
- “한 살 차이인데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르면서 존댓말쓰는 것도 웃기잖아.”
- “뭐가 웃겨? 너는 나보다 어리잖아. 동생이란 말이야.”
- “누나가 누나다워야 누나지.”
-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루라의 나이는 열다섯. 이성민보다 한 살 많았다.
- 하지만 이성민은 도저히 루라를 향해 ‘누나’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이성민의 겉은 14살 소년이지만, 알맹이는
- 27살 먹은 총각이다. 15살의 여자애한테 누나라니! 그것은 이성민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 “잭 아저씨는?”
- “아빠는 주방에 계셔. 오늘 저녁은 버섯 스튜랑 닭다리 구이야. 맛있겠지?”
- 루라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잭의 요리 솜씨는 제법 뛰어난 축이었다. 현재 이성민이 하루를 살아가는 낙은 굳
- 이 꼽자면 두 개였다. 하나는 무공의 진전 속도. 다른 하나는 잭이 차려주는 저녁.
- 항상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이성민은 방금 내놓은 따뜻한 아침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의 아침은 딱딱
- 하게 굳은 호밀 빵으로 이주일 동안 고정되었고, 점심 역시 아침에 여관을 빠져나오면서 챙겨 둔 호밀 빵으로 대
- 신하고 있었다.
- “오늘 아침은 뭐였어?”
- “구운 빵이랑 계란후라이, 찐 감자.”
- “맛있었겠네.”
- “우리 아빠는 요리 잘 하니까. 너도 조금 늦게 나가면 같이 아침 먹을 수 있잖아.”
- 테이블 위에 앉은 루라가 다리를 까닥거리면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 이른 아침에 나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른 아침일수록 숲에는 경쟁자들이 적다. 제나비스와 가장 가까운 사
- 냥터인 숲에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계인들이 매일매일 드나들고 있다. 느지막이 나간다면 그들과
- 숲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고,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 그것을 감수하느니, 마른 호밀 빵으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면서 숲에서 빨리 볼일을 봐두는 편이 낫다.
- ‘그래도 내일부터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냥할 수 있겠어.’
- 아공간 포켓을 얻었으니 숲에서 먹을 식량도 챙겨갈 수 있다. 우유가 혹시 뙤약볕에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챙기
- 지 않았었는데, 내일부터는 우유를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 우유는 중요했다. 현재 이성민의 몸뚱이는 성장기를 맞고 있어서, 균형잡힌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전생의 육체처럼
-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 “너는 왜 매일매일 숲에 가서 싸우는 거야? 매번 그렇게 냄새나는 꼴로 돌아오는 주제에.”
- 루라가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심심한 모양이었다. 잭의 여관은 숲과 떨어진 곳에 있는지라 손님이 그리 많지 않
- 았고, 곧잘 오는 손님이라고 해 봐야 투숙객이 아니라 식사를 하기 위해 오는 잭의 단골들이 대부분이었다.
- 당연히, 그 중에서는 루라의 또래는 없다. 루라로서는 이성민이 오랜만에 생긴 또래 친구인 것이다.
- “나는 이계인이니까. 살아가려면 몬스터를 잡아서 돈을 벌어야 해.”
- “누구를 바보로 알아? 이계인이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 취직하면 되잖아
- !”
- 루라가 쏘아붙였다. 그 말에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루라의 말이 맞다. 이계인이 이 빌어먹을 세계, 에리아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전생의 이성민처럼
- 몬스터를 잡아다가 용병이 되는 것은 무수히 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 이계인. 특히나 힘을 갖지 못한 노 클래스들 중에서는, 처지 개선을 포기하고서 취직 활동을 벌이는 이계인들도
- 많다.
- “우리 여관에 취직하는 것은 어때? 우리 아빠, 네가 꽤 마음에 든 것 같던데.”
- “요리도 할 줄 모르고 청소도 할 줄 몰라.”
- 거짓말이다. 이성민은 허드렛일에 굉장히 능숙했다. 처음 용병이 되었을 때, 소속된 용병단에서 온갖 종류의 허드
- 렛일을 짬 당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죽었는데 기껏 전생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로 얻은 삶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싶지는 않
- 았다.
-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하려고?”
- “안 죽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 “흥.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 “당연히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 오늘도 죽을 뻔 했는걸.”
- “이해가 안 돼. 목숨 걸고 사는 것보다는 여관 일이나 배우면서 편히 사는게 낫잖아.”
- 루라가 발을 휘저으면서 투덜거렸다. 어쩌면, 루라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전생을 알고 있기 때문에
- , 지금 하는 노력들이 부질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 “저녁 다 되면 불러 줘.”
- 이성민은 그 말을 남기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 부질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민은 다시 시작해서 살아가 보고 싶었다.
- 전생보다 나은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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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지호연-1
- 소천마 위지호연.
- 이성민이 전생에서 살았을 적에 수도 없이 들었던 이름. 이성민과 비슷한 시기에 이계인으로 소환되었고, 제나비스
- 에 함께 있었으며… 이성민보다 먼저 제나비스를 떠난 무림인.
- 제나비스를 떠난 위지호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면서 에리아에서 살아갔는지는 모른다. 소문은 몇 번 주워 들었으나,
- 그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었다.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죽기 직전까지 에리아에서 살아남았고, 에리아에서 이름을 떨치
- 고 있었다. 에리아에는 마교 출신의 무림인들이 많다. 마교의 소교주 출신도 많지는 않았지만 위지호연 하나는 아
- 니었다.
- 그럼에도 위지호연은 그가 가진 별호였던 ‘소천마’를 에리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아 넣었다.
- 13년이라는 시간. 이성민이 G급 용병에서 시작해서 C급으로 올라가는 시간 동안, 위지호연은 루키에서 정점에 가
- 까운 존재가 되었다.
- 소문은 무던히 들었지만, 이성민은 위지호연이라는 거인을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제나비스에서 지낸 시기를 공유하
- 였다고는 해도, 제나비스는 넓은 도시다. 그 당시에 이성민과 위지호연은 서있는 위치가 달랐고, 이성민이 위지호
- 연보다 한 달 먼저 제나비스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제나비스에 도착했던 위지호연은 그 시점에서부터 이성민보
- 다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 그것은 13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민은 거북이보다 조금 빠른, 아니, 거북이와 마찬가지… 어쩌면 거
- 북이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성민이 13년 동안 이룩한 성장은 처음 제나비스에 도착했던 위
- 지호연보다 못할 것이다.
- 열등감을 품을 상대도 아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차이가 난다. 다른 세계도 아니고, 다른 별도 아니고, 다
- 른 차원의 사람이다.
- 하지만 궁금했다.
- 그것은 변덕과도 같은 호기심이었다. 거인의 처음을 보고 싶다는 대단치 않은 욕구였다. 매일매일 숲으로 향하는
- 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이제는 습관과도 같은 일과였지만, 오늘의 이성민은 그것을 과감하게 접어 두었다.
- “오늘은 숲에 안 가는 거냐?”
- 오전 11시. 이성민이 홀로 내려오자 잭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성민이 이 여관에서 지낸지 한 달. 그
- 한 달 동안 이성민은 매일매일 숲으로 향했었다.
- “네.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것 같아서요.”
- “별 일이구먼. 루라가 쉬라고 쉬라고 말을 해도 듣지를 않더니.”
- 잭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숲에 안 가면. 오늘은 계속 방에서 쉴 생각이냐?”
- “아뇨. 잠깐 나갔다가 오려구요.”
- 여관을 나선 이성민은 일뢰주법을 펼쳐 제나비스의 중앙 광장으로 달렸다. 한 달 간 틈이 날 때마다 천진심법을
- 운용하고 일뢰주법을 사용한 덕에 내공은 꽤 늘어 있었다.
- 이계인이 소환되는 요일같은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간격으로 소환되는 경우도 있고, 며칠에 한 번, 심할
- 때는 몇 달 에 한 번 소환되는 경우도 있다.
-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이계인이 처음으로 소환되는 것은 제나비스의 중앙 광장이며, 시간은 정오다. 한
- 달 전의 이성민도 정오의 중앙 광장에서 소환되었다.
- ‘어떻게 생겼을까?’
- 이성민은 호기심을 억누르면서 침을 삼켰다. 아직 정오는 되지 않았다. 정오가 된다면 중앙 광장의 종이 울린다.
- 이성민은 근처의 분수대에 앉아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 동경.
- 소천마라는 별호와 위지호연이라는 이름은, 전생에서부터 이성민으로 하여금 동경심을 품게 만들었던 이름이다. 에
- 리아에서 살았던 대부분의 이계인들이 그럴 것이다. 특히나 처지는 물론이고 생존조차 힘든 노 클래스라면 더더욱.
- 이성민도 그런 면에서는 다른 노 클래스와 똑같았다.
- 그래서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 소환된 위지호연의 모습을.
- 데앵, 데앵, 데앵.
- 종이 울린다. 시간이 되었다.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광장 중앙을 바라보았다.
- 한 소년이 그곳에 서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 소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마냥 우두커니
- 서있었다.
-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은 새카만 무복이었다. 옷차림에서부터 자신의 출신지를 밝히는 모습이다. 이성민은 마른침을
- 꿀꺽 삼키고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 소년은 잠깐 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
- 리아의 소환은 갑작스럽기 짝이 없다. 이 세계는 소환된 이계인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 눈을 깜박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거리가 제법 멀어서
-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 소천마 위지호연. 그는… 이성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만 본다면 이성민보다 어
- 려 보일 정도였다.
- ‘위지호연이 몇 살이었지…?’
-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위지호연의 경이적인 힘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몇 번이나 들었지만, 정작 위지호연이 몇 살이
- 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성민은 분수대에 앉아 위지호연을 쳐다보았고, 위지호연은 주변을 둘러보기만 할 뿐 특
- 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도 위지호연을 한 번 힐긋거리기만 할 뿐, 그에게 다가가거나
- 말을 걸지는 않았다. 제나비스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이계인이 소환되는 것은 이미 일상의 일부였고, 특별히 관심을
- 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뭔가… 비범한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 주변을 살피기만 할 뿐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위지호연을 보면서, 이성민은 마음속으로 실망하고 있었다.
- 전생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거인의 이름. 시작부터가 비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의외로 위지호연은 그런 비
- 범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 ‘뭐, 그렇겠지. 갑자기 소환된 것은 피차 똑같으니까…’
-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구경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거인의 시작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이
- 성민은 만족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과 평생 인연이 없을 인간이다. 앞으로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전생에서 들었던
- 소문처럼 에리아를 살아가면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 이성민은? 전생보다는 나은,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지. 이성민은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몸을
- 돌렸다.
- “이봐.”
- 몸을 돌린 이성민이 걸음을 뻗기도 전이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성민의 몸이 흠칫 놀라 굳는다.
- “왜 나를 보고 있었느냐?”
- 어린 아이의 목소리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 이성민은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서 뒤를 돌아 보았
- 다.
- 어느새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뒤에 서있었다. 키는… 이성민이랑 비슷했다. 이성민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위지호연의
- 얼굴을 응시했다. 위지호연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 “대답하라. 왜 나를 보고 있었느냐?”
- 위지호연이 답을 재촉한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민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
- 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위지호연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 “무엇을 그리 놀라고 있는 게냐?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구나.”
- “아… 그, 그게…”
-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왜 나를 보고 있었느냐?”
- 다시 한 번, 위지호연이 답을 재촉했다.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다. 이성민은 더듬거리면서 말을 내뱉었다.
- “그… 그게. 갑자기 소환된 모습에 놀라서…”
- “소환?”
- 위지호연이 그 단어에 반응했다.
- “아무래도 너는 이 사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소환이라는 것은 또 뭐냐. 이곳은 어디이지? 나
- 는 내 방에서 아침 연공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이곳은 또 어디이고?”
- 위지호연이 연거푸 질문했다. 이성민을 보는 위지호연의 눈은, 이성민이 질문에 대답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 눈이었다.
-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 이성민은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의 상황을 냉철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우선,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거짓말
- 을 할 생각은 없었다. 위지호연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다.
- “…그게… 그러니까…”
- 이성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성민은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숨기지 않고서 위지호연에게 알려주었
- 다. 이 세계가 어디이고, 왜 이곳에 소환된 것인지.
-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이야기하는 동안 가만히 이성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도 위지호연은 따로
- 질문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이성민이 말을 시작하자 더 이상 재촉하지도 않았다.
- “놀랍군.”
- 이성민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위지호연은 덤덤한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내뱉었다. 놀랍군. 그렇게 말한 주제에
- 위지호연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 ‘이 새끼 대체 뭐야?’
- 그쯤 되니 오히려 이성민이 당황하게 된다. 대체 뭐하는 놈이냐.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경험이 많은 것도 아
- 닐 텐데.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은 빌어먹을 에리아의 ‘소환’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 갑자기 눈을 떠보니 전혀
- 다른 세상에 와 있다. 그것을 어떤 미친놈이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한단 말인가?
- “…내 말을 믿는 거예요?”
- “중원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지
- 않느냐.”
- 위지호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그는 손을 들어 근처를 지나는 제나비스의 주민을 가리켰다.
- “색목인色目人. 넓은 중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인종이 아니지. 그런데… 이곳에는 색목인이 아주 많구나. 대
- 부분의 사람들이 색목인이야. 눈 검고 머리 검은 너와 내가, 마치 별 세계의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다.”
-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사람을 가리켰던 손을 들어 건물을 가리켰다.
- “건물들도 그렇다. 저런 형태의 건물은 처음 보는군. 그래… 그런가. 이곳이 ‘에리아’라는 세계로구나.”
- 위지호연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납득했다.
- “그리고 이 상태창이라는 것. 네 말대로구나. 내뱉지 않고 생각해 보았을 뿐인데. 흐음… 이름은 위지호연… 직업
- 은 무림인? 하하! 이거 참 재미있군.”
- 위지호연이 웃음을 터트린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알려준 대로 머릿속에서 익히고 있는 무공의 구결들을 떠올렸다.
- “스킬창… 채워지는 구나. 그래. 이런 것들을 실제로 보았는데, 어찌 네 말을 의심하겠느냐?”
- “아… 예에…”
-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아니, 적응력의 차이인가? 뭐가 어찌 되었든 처음 제나비스에 도착했던 이성민의 반응과는
- 전혀 다르다. 당시의 이성민은 상황을 알게 되고서 펑펑 울었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집으로 보내달라고.
- 하지만 위지호연은 웃는다.
- “너. 이름이 뭐냐.”
- 위지호연이 이성민을 향해 질문했다.
- “…이성민.”
- “나이는?”
- “열 넷.”
- “나는 위지호연이다. 나이는 열 셋이고.”
- 한 살 어렸구나. 이성민은 입을 반쯤 벌리고 위지호연을 바라보았다.
-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세계… 에리아.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몬스터라고 불리는 괴물을 잡아야 한다고
- ? 좋아, 좋구나. 후후! 수행이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아주 잘 되었어.”
- 위지호연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어댔다. 이성민은 그런 위지호연을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서 바라보았고, 위지호
- 연?은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자, 가자.”
- “…예? 어딜 가요?”
- “으음. 우선 이것부터 터놓아야겠군.”
- 위지호연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이성민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내리고선 뒷짐을 지었다.
- “나는 마교의 소교주로서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추앙을 받았지. 하지만 이곳 에리아에는 마교가 없다.
- 그렇다는 것은, 나 역시 마교의 소교주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 13살의 어린애가 늘어놓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에리아에서의 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너는 오늘부터 나의 친구가 되었다.”
- 위지호연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서 말한다. 그 말을 이성민은 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가 없으니 소교주에서
-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왠 친구란 말인가? 이게 뭔 개같은 논리인가?
- “…어… 왜 나랑 당신이 친구가 되는 거죠…?”
- “…응? 그 말은 이해하기 힘들군. 비슷한 나이 또래라면 모두가 친구가 되는 것 아닌가? 하물며 너와 나는 이러
- 한 만남, 이러한 인연으로 엮이게 되었다. 당연히 친구가 되는 것 아닌가?”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묻는다. 이성민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소천마 위지호연. 13살의 그가 대체 어떤 꼬마였는지.
- 위지호연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 “어… 네. 그렇죠. 친구… 친구요.”
- “그래.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친구다. 그런데 왜 경어를 쓰는 것이냐. 친구끼리는 반말을 하는 것 아닌가?”
- “아… 어… 그래…”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하는 말에 이성민은 질린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 27살 먹고서 13살 꼬마와 친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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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지호연-2
- 앞장 서서 북쪽 성문으로 향하면서, 이성민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소천마 위지호연. 앞으로 에리아에서 살아가면서, 그 이름을 만천하에 떨치게 될 거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
- 친구’라는 애매모호한 관계. 위지호연이 그 관계에 대해 얼마나 진심일지는 모르겠지만, 위지호연과 인연을 맺는다
- 는 것은 전생의 이성민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 ‘친구. …친구라…’
- 그 단어를 생각하면서 이성민은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전생의 이성민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었다. 노
- 클래스로 살았던 13년은 이성민에게 지독한 인간불신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 같은 처지의 노 클래스들은 서로를 믿는다기보다는 얼마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서로 뺏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
- 다. 인간이라는 것은 심술궂기 짝이 없어서, 비슷한 처지였다가 자신보다 잘 나가게 되는 놈을 도저히 내버려두지
- 못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보고서 하하 쪼갤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 전생의 이성민은 뭔가 대단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런 것들조차도 다른 놈들에게 뜯겨 왔었다. 그렇기에,
- 이성민은 친구라는 단어에 대해서 좋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너. 무공을 익혔다고 했었지.”
- 이성민보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위지호연이 말을 걸었다.
- “예… 아니, 응.”
- 말을 놓으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그것이 영 껄끄러웠다. 전생에서 질리도록 들었던 ‘소천마’라는 별호가
- 머릿속을 계속해서 떠돌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왜 경공을 쓰지 않는 것이지?”
- 위지호연의 말에 이성민이 머리를 돌려 뒤를 보았다. 위지호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경공을 써서 달린
- 다면 걷는 것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 “그게… 내 내공이 변변치 않아서.”
-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공을 익혔다. 그것에 대해서는 위지호연에게 미리 밝혀 두었다. 고서점을 뒤
- 지다가 몇 가지 무공을 익히게 되었다고. 아직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그런 설명
- 에 별다른 위화감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 “아. 그렇군. 너는 무림인이 아니었지.”
- 위지호연이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 “무공을 접한지 이제 한 달이 되었다고 하였나? 영약도 안 먹었을 테니… 내공이 적을 만도 해.”
- 이 새끼 지금 놀리는 건가? 가슴 한 구석을 송곳으로 쿡 찌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한 번 펼쳐라도 보는 것이 어떤가?”
- 위지호연이 권했다. 이성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바로 일뢰주법을 펼쳐 앞으로 뛰어나갔
- 다.
- 지금의 이성민이 가진 내공으로는, 일뢰주법을 전력으로 펼칠 수 있는 시간은 10분 정도다. 본래에는 사냥터에서
- 사용할 내공을 남기기 위해 적당히 여유를 두고서 경공을 사용하였었지만, 지금의 이성민은 가진 내공을 모조리 긁
- 어모아 일뢰주법을 펼쳤다. 풍경이 휙휙 지나가면서 머리가 뒤로 날린다.
- “…허억! 허억!”
- 내공이 바닥을 보일 때쯤, 이성민은 뛰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무릎에 손을 얹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
- 이 땀으로 축축했고 다리가 뻐근했다. 텅 빈 단전이 휑하니 느껴졌다.
- “흐음.”
- 이성민은 퍼뜩 머리를 들어 앞을 보았다. 땀을 줄줄 흘리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위지호연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
- 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는 이성민보다 몇 걸음 앞 쪽에 있었다.
- “그리 좋은 경공법은 아니군.”
- 위지호연이 품평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이성민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 ‘당연하지, 새끼야. 일뢰주법은 좋게 쳐줘봐야 이류 무공이라고.’
- 그 부족함을 내공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민은 숨을 헥헥거리다가 숙였던 상체를 들었다. 머리가
- 핑 돌았다.
- “이곳이 마교였더라면 영약이라도 하나 주었을 텐데.”
-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성민에게 다가갔다. 마교에서 전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성민은 그런 시답
- 잖은 생각을 하면서 다가오는 위지호연을 보았다. 물론 생각만 그렇게 했다. 마교에서 전생했더라면 위지호연과 친
- 구가 되는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손을 줘 보게.”
- 이성민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손목을 한 번 더듬더니, 이성민의 기혈에 내공을 불어 넣어
- 주었다. 텅 비었던 단전이 순식간에 차오른다.
- “단전이 작군. 천진심법… 이라고 했었나? 도가道家가의 심법인 모양이야. 이것도… 그리 좋은 심법은 아니군.”
- “…크흠.”
- 개 같은 새끼! 이성민은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위지호연은 별 생각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이성민에게 있어
- 서는 둔탁한 일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도가의 심법은 성장이 느리지만 안정적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
-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이성민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이성민은 뚱한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열었다.
- “고마워.”
- “대단한 것도 아닌데. 감사를 들을 일도 아니야.”
- 위지호연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 “성문은 저쪽인가?”
- 경공을 써서 10분이나 달린 탓에 북쪽 성벽까지는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위지호연은 멀찍이 보이는 성벽을 손으
- 로 가리켰고,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 “먼저 가지. 따라오게.”
- 그 말을 남기고서 위지호연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앞으로 뛰어나간 것이다. 이
- 성민은 멀찍이 보이는 위지호연의 등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 “씨팔. 나도 마교 소교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아?”
-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위지호연의 뒤를 따라 일뢰주법을 펼쳤다.
- *“맷돼지, 토끼…”
- 위지호연은 뒷짐을 지고서 숲 속을 걸었다. 그는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가 흘러 넘쳤고, 이성민은 똥 씹은
- 얼굴을 하고서 위지호연의 곁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 “몬스터라는 것과 짐승은 다르다… 라고 했었지?”
- “응. 놈들은 짐승처럼 생긴 몬스터야.”
- 숲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이성민과 위지호연은 몬스터와 조우하지 못했다.
- “놈들은 맛있나?”
- 뒷짐을 지고서 걷던 위지호연이 물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의 말문이 막혔다. 맛있냐고? 먹어 본 적은 없다. 숲에
- 서 출현하는 토끼나 멧돼지는 잡식성이지만, 놈들이 처먹는 ‘잡식’에는 인육도 포함된다.
- 그렇다 보니 이성민은 놈들을 먹는 것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제나비스에 있었을 적에는.
- “…아마 맛은 없을 거야. 놈들은 근육이 너무 많거든.”
- “먹어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 “그건… 그렇지.”
- “그렇다면 이 기회에 한 번 먹어보자. 내 얼마 되지 않는 취미 중 하나가 식도락이다.”
- 위지호연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소천마의 취미가 식도락이었구나. 이것은 전생에서는 알지 못했던 정보다. 그
- 리고 참 쓸 곳이 없는 정보이기도 했다.
- “뭔가 있군.”
- 위지호연이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있기는 뭐가 있단 말인가? 이성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 이 흔들거리더니 거대한 토끼가 하나 튀어나왔다.
- “저것이 네가 말한 그 토끼인가. 참 크구나.”
- “어…”
- 위지호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두 눈 가득 흥미를 띄우고서 토끼를 응시했다. 토끼는 두 귀를
- 쫑긋거리면서 위지호연을 보고 있었다. 위지호연의 입이 열렸다.
- “고놈 참 맛있게 생겼군.”
- “뭐?”
- 이성민이 되물은 순간, 위지호연이 출수했다. 길게 뻗은 검지 손가락이 앞으로 향했을 때, 토끼의 이마에 구멍이
- 뚫렸다. 피슉! 상처에서 뒤늦게 피가 뿜어지고, 토끼가 비틀거리다가 땅 위에 엎어졌다.
- 대체 뭘 한 거야? 이성민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위지호연을 바라보았다. 머리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 있다. 위지호연이 손을 뻗은 순간 탄지공이 펼쳐졌고, 토끼의 머리가 무형의 공격에 꿰여버렸다.
- 탄지공이라니! 전생에서 이성민은 13년 간 무공수련을 하였지만 창에 내공을 두르는 것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
- 데 탄지공이라니!
- ‘내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살았던 13년이 13살 먹은 애새끼만도 못하구나!’
- 그쯤 되니 울고 싶다. 위지호연의 명성은 전생에도 질리도록 들어보았지만, 13살 먹은 위지호연의 실력을 바로
- 옆에서 보고 있으니 가슴이 서럽다.
- “먹어 볼까.”
- “…나중에, 나중에…”
- 이성민은 한탄을 삼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위지호연은 입맛을 쩝 다시면서도 이성민의 말을 들었다. 이성민은
- 비틀거리며 토끼를 향해 다가가,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들었다.
- “다리 하나면 배가 차겠군.”
- 위지호연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고, 이성민은 말없이 토끼 다리를 큼직하게 썰었다. 그리고는 아공간 포켓을
- 꺼내 그 안에 토끼 고기를 집어 넣었다.
- “그건 또 뭔가?”
- 위지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위지호연이 감탄성을 흘렸다
- .
- “그것 참 신기한 도구로군.”
- 토끼 다리를 집어 넣고 나서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성민도 아공간 포켓에서 창을 꺼냈다. 오늘은 매일 습관
- 처럼 하던 사냥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기왕 숲에 오게 되었으니 고블린이나 몇 마리 잡아서 이빨과 피를 뽑
- 아 둘 생각이었다.
- “너는 창을 쓰는가?”
- “응.”
- “창은 좋은 무기지. 다른 무기에 비해서 비교적 입문하기 쉬우니까.”
- “…너는 무슨 무기를 쓰지?”
- “배우기는 하였지만, 쓰지는 않는다. 본교의 교주와 소교주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천마신공은 고금제일의 무학이며
- , 그를 익힌다면 육체가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지.”
- “그런 주제에 무기술은 왜 배운 거야?”
-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다.”
- 위지호연의 얼굴이 근엄하게 변했다.
- “장병에서 시작해서 단병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법이다.”
- 13살 먹은 꼬마가 하는 말이다. 빌어먹을 재능충. 누구는 13년 동안 창을 휘두르고서도 이 모양인데, 재능충은
- 13살에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안다고 말하는 구나.
- “네가 익힌 창법은 무엇인가?”
- “추혼창법.”
- “내가 살았던 중원 무림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창법이 있었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무공이었다.”
- 위지호연이 살았던 무림의 추혼창법이 이성민이 익힌 추혼창법과 꼭 같은 무공인 것은 아니다. 당장 에리아에는 무
- 당파 출신의 무림인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펼치는 무당의 절기는 모두가 다르다.
- “추혼창법, 추혼검법, 추혼도법… 무림인들은 추혼이라는 말을 왜이리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통점이 뭔지
- 아나? 추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무공이 죄다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이야.”
- 그렇게 말하는 위지호연의 얼굴에는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성
- 민은 괜시리 또 우울해졌다.
- ‘나쁜 성격은 아닌데…’
-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성민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 앞으로 걸었다. 이성민은 평소에
- 기억하고 있던 대로 고블린의 영역으로 향했다.
- 물론, 매번 똑같은 영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 숲에서 이성민이 지정해 둔 포인트는 여덟 곳이다. 매번 같은
- 포인트에서 정찰 나온 고블린을 잡았다가는, 아무리 고블린들이 멍청하다고 하여도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 챌 것이다.
- 일주일 정도는 매복하고서 고블린을 끌어들이고, 기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준을 졸업했다.
- 보다 적극적으로 몸을 키우고 창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성민은 고블린을 상대로는 정면승부를 하고 있었다.
- “뀌엑!”
- 기묘한 일이었다. 영역으로 향하던 중에 토끼와 멧돼지와 줄곧 마주쳤는데, 토끼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뒤 안 가리
- 고 덤벼드는 멧돼지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친다. 이성민은 후다닥 도망치는 멧돼지의 엉덩이를 보면서 한숨을 푹
- 내쉬었다.
- 위지호연 때문이다. 이성민은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지만, 위지호연이 흘려대는 살기가 몬스터들을 도망치게 하고
- 있었다.
- “슬슬 고블린의 영역인데.”
- “네가 말했던 녹색 피부의 난쟁이가 고블린이라고 했었지. 네가 잡을 테냐?”
- 위지호연이 물었고,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창을 꺼내기는 하였지만, 뒤따르는 위지호연이 몬스터를 쫒아내주
- 고 있는 덕에 이성민은 아직 꺼낸 창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 “끼익!”
- 고블린의 영역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 순찰병과 마주쳤다. 세 마리의 고블린이 이성민과 위지호연을
- 보고서 울음을 흘린다.
- “참 흉측하게도 생겼군.”
- 위지호연이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창을 들고서 자세를 잡았다. 위지호연은 나서지 않을 모양이었다.
- ‘소천마 앞에서 창술을 펼치게 될 줄이야.’
- 고블린과 마주하고 있다는 상황보다는, 위지호연이 보고 있다는 것이 이성민을 긴장시켰다. 이성민은 신중하게 발을
- 끌면서 고블린들을 살폈다. 놈들은 독침을 꺼내지 않고서 위협적으로 단검을 쉭쉭거리며 휘둘렀다.
- 그 순간. 이성민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일뢰주법을 펼치면서 속도를 실어 창을 내질렀다. 퍼어억! 가까이
- 있던 고블린의 가슴에 창이 꽂힌다. 이성민은 내질렀던 창을 회수하고서 창을 잡은 손의 간격을 줄였다.
- 빠아악! 휘두른 창이 고블린의 머리를 때리고, 그대로 몸을 비틀어 다른 쪽에 서있던 고블린의 몸에 창을 찍는다
- . 고블린 세 마리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 “…후우!”
- 깔끔했다.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면서 히죽 웃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창을 휘둘렀고 천진심법을 운
- 용했다. 근육도 꽤 붙었으니 한 달 전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추혼창법의 운용이 좋아졌다.
- “흠.”
- 이성민의 등 뒤에서 위지호연이 턱을 어루만졌다.
- “형편없군.”
- 팩트가 칼날이 되어 이성민의 가슴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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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지호연-3
- “…뭐라고?”
- 이성민의 음성이 뾰족하게 솟았다. 그는 홱하고 몸을 돌려 위지호연 쪽을 돌아보았다. 위지호연은 심드렁한 얼굴을
- 하고서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 “대체 뭐가 형편없다는 거야?”
-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인지,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위지호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전생하고서 무골을 얻었
- 다. 천진심법도 배웠고 매일 무공을 수련했다. 대단치도 않은 경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 노력을 했다.
- 그 노력에 대한 평가가 형편없다니.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고서 위지호연을 노려보았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면서 입을 열었다.
-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
- 우선, 위지호연은 그를 지적했다.
- “창은 길다. 창술의 묘용은 그 길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온다.”
- 위지호연이 손을 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이성민이 쥐고 있는 창을 가리켰다.
- “하지만 너는 굳이 고블린에게 파고들려고 하더군.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신법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다
- 섯 걸음. 다섯 걸음만 움직였더라면, 네 창은 저 고블린이라는 놈들에게 닿을 수 있었다.”
- “…위력이 부족한 걸 어쩌라는…”
- “진정 그런가?”
- 위지호연이 웃음을 흘렸다.
- “저 놈들은 외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네 창이 무딘 것도 아니었다. 네 근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하여도
- 일점을 찌른다면 꿰뚫을 수 있다. 그것이 창이라는 무기다.”
- 이성민은 반박하지 않고서 위지호연의 말을 들었다. 이성민에게 저런 말을 해주는 것은 위지호연이 처음이었다. 전
- 생에서도 창을 쓰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성민에게 창법에 대해서 알려주지는 않았었다.
- “물론 창의 쓰임새가 찌르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휘둘러 치는 것도 가능하고 찍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창을 그렇게 쓴다는 것이 군더더기가 많다는 것이야.”
- 이성민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형편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위지호연이 하나하나 지적
- 하니 반발심이 쏙하고 들어간다.
- “하지만. 군더더기가 넘치기는 하여도 실용적이기는 하군. 자세도 그만하면 되었고… 날만 쓰는 것이 아니라 창대
- 도 사용한다는 점은 칭찬해 줄 만 해. 군더더기가 많은 것은 독학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 위지호연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평가를 내렸다.
- “재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스킬이니 뭐니…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한 달 동안
- 스승 없이 무공을 배웠다는 것 아닌가? 그것을 감안한다면 훌륭하지.”
- 아니. 13년 동안 했는데. 이성민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 “…돌아가자…”
-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고블린의 이빨을 하나한 뽑고 피를 유리병에 담는 이성민을 향
- 해 위지호연이 다가왔다.
- “돌아가자고? 어디로?”
- “나는… 내가 묵는 여관으로 가야지.”
-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봐?”
- “너를 따라가면 되는 건가?”
- 위지호연이 웃으면서 물었다. 그 말에 이성민의 입이 쩍하니 벌어졌다.
- “…나를 따라 온다고?”
- “이건 어떠냐? 네가 나의 숙식비를 대 준다면, 내가 너에게 무공을 알려주마.”
- 그 말에 이성민의 정신이 확하고 뜨였다.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이성민이 벼르고 있
- 던 투기장의 성련단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큰 기연이었다.
- “무, 무공을 알려주겠다고?”
- “아. 천마신공은 안 된다. 이건 마교의 교주와 소교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이니까. 이곳에 마교는 없지만… 그렇
- 다고 하여도 천마신공을 가르쳐 줄 수는 없지.”
- 그런 절세신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 물론. 가르쳐 준다면 감사합니다하고 배우겠지만.
- “후후! 대단한 기연이지 않느냐. 설마 싫다고 할 셈이냐?”
- “아, 아니.”
-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더 이상 위지호연은 주는 것 없이 미운 13살의 꼬맹이가 아니었다. 이성민이 보기에
- 는 위지호연이 마치 신처럼 보였다.
- 신이 숟가락에 밥을 떠서, 이성민보고 먹으라고 입 안으로 밀어 넣어주고 있었다.
- *“걘 또 누구야?”
- 식탁을 닦고 있던 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위지호연을 데리고서 여관으로 돌아 온 이성민은, 멋쩍은
-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 “오늘 소환 된 이계인이야.”
- “위지호연이라고 한다.”
- 위지호연은 루라를 향해 대뜸 말을 놓았다. 이성민보고 누나라 부르라면서 닦달을 하던 루라였지만, 그녀는 위지호
- 연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입을 헤- 벌리고만 있었다.
- 그럴 만도 했다. 이성민이야 크게 모난 곳 없고 크게 잘난 곳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위지호연은 다르다.
- ‘무공도 잘났고, 배경도 잘났고, 재능도 잘났고, 얼굴까지 잘나다니.’
- 세상 참 불공평하다니까. 이성민은 투덜거림을 삼켰다. 13살의 위지호연은 장래성이 기대되는 미남이었다. 아직
- 나이가 어려 체격이 작고 남자다움은 없었지만, 저대로 5년만 지나도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이 될 것이다.
- “입은 꼴을 보니 무림인이로군.”
- 주방에서 걸어 나온 잭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성민을 힐긋 보더니 말했다.
- “이 여관에서 묵게 할 생각이냐?”
- “아, 예. 방값은 제가 내는 것으로 하고요.”
- “뭐 상관없지. 방은 많으니까.”
- 이성민이 내야 하는 금액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이성민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 현재 이성민은 이 여관에 장기간 숙식하는 것으로 1만 에르를 내고 있었다. 본래 이 여관의 숙박비는 2만 에르였
- 지만, 여관 주인인 잭이 이성민에게 호의를 가진 덕에 절반의 숙박비만 받는 것이다.
- “숙박비는 2만 에르다. 네 것까지 포함한다면 3만 에르로군. 그래도, 뭐. 네 얼굴을 봐서 2만 5천 에르로 해
- 주마.”
- “감사합니다!”
- 잭이 선심을 쓰자 이성민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뒤에는 위지호연을 데리고서 방으로 올라갔
- 다. 마침 이성민의 옆방이 비었기 때문에, 위지호연이 그 방을 쓰기로 했다.
- “우선. 네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알아야겠어.”
- 위지호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이성민의 방에 함께 들어왔다. 그는 침대 위에 털썩 앉더니 이성민의
- 얼굴을 응시했다.
- “우건 네가 익힌 무공을 말해 봐라.”
- “…심법으로 천진심법. 신법으로 일뢰주법. 외공으로 석파권장과 철피강골. 창법으로 추혼창법.”
- “외공은 뭐 그렇다고 치고. 천진심법의 구결은?”
- 위지호연의 요구에 이성민은 침대 매트리스를 위로 들춰, 그 아래에 숨겨 두었던 천진심법을 꺼냈다. 위지호연은
- 이성민에게서 천진심법을 받아 책장을 넘겼다. 잠깐 동안 천진심법의 구결을 확인하던 위지호연이 혀를 끌끌 찼다.
- “역시. 대단할 것은 없는 심법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심법과 병행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인데… 흐음.”
- 위지호연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 “너는 어떤 무공을 익히고 싶으냐?”
- 위지호연이 물었다.
- “나는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 모두 다 익힌 것은 아니지만 구결은 외우고 있어. 모두가 절정 이상의 무공이니,
- 뭘 가르치든 지금의 너한테는 도움이 될게다.”
- “…으음…”
- 이 기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이성민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 우선 심법을 보강하고 싶었다. 당장 이성민이 익히고 있는 천진심법은 전생에 익혔던 영능심법보다 나은 심법이었지
- 만, 위지호연이 더 나은 심법을 가르쳐 준다면 얼마든지 갈아탈 용의가 있었다.
- ‘창법… 은… 아니야. 당장 부족한 것은 내공이니까.’
- 다행히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성민은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위지호연을 보았다.
- “심법을 배우고 싶어.”
- “그럴 줄 알았다.”
- 위지호연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 “네가 익힌 천진심법은 그리 대단한 심법이 아니야. 고작해야 일류의 심법이고, 내 머릿속에는 그보다 나은 심법
- 이 몇 십 개는 있다. 일류 무공과 절정 무공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
- “…심득?”
- “오답은 아니지만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군. 심득이라는 것은… 참 애매한 것이지. 일류 무공과 절정 무공의 차이
- 는 ‘친절함’이다. 몇 십, 몇 백 년 동안 뛰어난 기재들에 의해 보완되어 완성된 것이 절정 무공이다. 나중에
- 익히는 놈이 보다 쉽게, 보다 빠르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친절함이 가득 들어가 있지.”
- 그 말은 이성민도 공감할 수 있었다.
- “자하신공紫霞神攻이면 되겠군. 천마신공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자하신공 역시 신공이라 불릴 값어치는 하는 무공
- 이다. 내공이 쌓이는 속도도 빠르고, 꾸준히 익힌다면 검기지경劍氣之境까지도 무난히 입문할 수가 있어.”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하신공의 구결을 불러주었다. 잠자코 듣던 이성민이 대뜸 손을 치켜 들었다.
- “왜 그러냐?”
- “…못 외우겠어. 적어주면 안 될까…?”
- 이성민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위지호연이 끌끌 혀를 찼다.
- “암기력이 부족하군.”
-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위지호연은 이성민에게서 펜과 수첩을 건네받더니 자하신공의 구결을 적어 주었다.
- “왜 창법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은 거냐?”
- 자하신공의 구결을 적으면서, 위지호연이 물었다.
- “나에게 부족한 것은 내공이니까.”
- “마치 창법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하는 군.”
- “부족하기는 하지만… 지금 익히고 있는 창법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데. 이보다 나은 것을 배운다고 하여도 소
- 화해 낼 자신이 없어.”
- “그것은 현명하구나. 네가 창을 휘두르는 것은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지금 네 수준에서 더 나은 창법을 배워봤
- 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뿐이야.”
- 팩트로 얻어맞으니 너무 아팠다. 한 시간 동안 자하신공의 구결을 적던 위지호연이 드디어 펜을 내려놓았다. 이성
- 민은 위지호연이 건넨 수첩을 양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 ‘…다른 무공도 알려달라고 할까?’
- 자하신공의 구결을 읽으려는 순간, 이성민의 마음속에 그런 욕심이 일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위
- 지호연은 이성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자하신공. 이것은 천진심법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 신공절학이다.
- 만약 에리아에 자하신공의 무공서가 떠돈다면, 그를 욕심내는 자들에 의해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런 절세신공을
- 위지호연은 숙박비 따위를 대가로 하여 넘긴 것이다.
- 위지호연과 이성민의 눈이 마주쳤다. 안 된다. 13년 간 눈칫밥을 먹어 오면서 쌓았던 이성민의 눈치가, 더 이상
-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 주었다.
- “…고마워.”
- “나로서는 받은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다. 뭐. 생애 처음 생긴 친구니까 덤도 넉넉하게 쳐 주었
- 지만.”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 “만약 네가 나한테 다른 것을 더 요구하였더라면, 나는 너에게 실망했을 거야.”
- 위지호연이 덧붙였다.
- “그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 ======================================
- 사냥꾼-1
- 비교적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 위지호연은 마교의 소교주에 걸 맞는 교육을 받아 왔다.
- 기억하고 있는 것은 책장이다. 무공서가 가득 꽂힌 책장. 무언가를 읽고 쓰고 기억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점부터,
- 위지호연은 거대한 무공 서고 안에서 살게 되었다. 위지호연의 아버지이자 마교의 정점에 선 위대한 교주는, 자신
- 의 하나 뿐인 자식에게 애정을 주기 보다는 가혹한 교육을 강요했다.
- 읽고, 외우고, 읽고, 외우고. 그것을 끝없이 반복했다. 기틀을 다진다는 명목 아래에 장난감이 아닌 무기를 쥐었
- 고, 익숙함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죽이는 행위를 교육 받았다. 처음에는 벌레, 그 다음에는 쥐, 토끼… 그리고
- 사람까지.
- 가끔, 아버지인 교주가 찾아왔다. 교주는 위지호연의 무공을 봐주었고, 위지호연에게 영약을 먹였다. 교주가 원하
- 는 것은 사랑스러운 자식이 아닌, 천하를 오시할 수 있을 차기 마교의 교주였다.
- 위지호연은 그런 교주의 바람에 걸맞게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교주가 제공한 절세적인 영약과 마교가 가진 절세신
- 공들, 그리고 위지호연이 타고난 천재적인 자질이 어울러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10살이 되고 나서야 위지호연은 서고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부터 위지호연은 살인에 익숙했고,
- 마교가 가지고 있는 고금제일의 무학인 천마신공을 익힐 기반을 마련한 상태였다.
- 그 후로 3년. 위지호연은 차기 교주가 되기 위해 천마신공을 수련했다. 위지호연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은
- 그것이 전부였다. 위지호연의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위지호연의 주변에 있었던 것은 신과 다름없는 교주와, 명
- 령에 복종하는 시비들뿐이었다.
- ‘친구.’
- 그것은 위지호연에게 있어서 낯설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살아오면서 친구라는 것을 곁에 둔 적은 없었다. 거대한
- 마교의 안에서 위지호연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첫 친구.’
- 위지호연은 창밖을 내려 보았다. 중원 무림에서라면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을 녀석이다. 아니, 애초에 마주칠 일이
- 없었을 것이다.
-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이 세계에는 마교가 없다. 신과 같던 교주도 없다. 위지호연을 억압하던 것들은 아무
-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에리아’라는 세상이다.
- 그렇기에 위지호연은 마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위지호연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가 조심
- 스레 바라왔던 자유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 돌아가고 싶지 않다. 위지호연이 에리아에 소환되고서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잠들기 위해 누우면서. 잠
- 들고 눈이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하는 걱정을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 안심했다.
- “…안타깝군.”
- 위지호연은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는 풀어 헤친 머리를 틀어 올려 묶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 “재능이 없어.”
- 위지호연은 창밖을 내려 보면서 중얼거렸다.
- 여관 뒤뜰에서는 이성민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 자하신공은 마교가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무공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세신공이다. 천마신공과는 비교가 안 되
- 지만, 자하신공 하나를 제대로 익힌다면 한 지역의 패주로 군림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 하지만 모든 신공절학이 그러하듯, 자하신공 역시 천재를 위한 무공이다. 위지호연이 말했었다. 일류무공과 절정무
- 공의 차이는 친절함에 있다고.
- 하지만 그 친절함이라는 것은 범인凡人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신공절학을 익혀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이들은
- 모두가 어린 시절 천재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던 이들이다.
- 절정무공이 내포하고 있는 친절함보다 더한 것이 신공절학이고, 자하신공 역시 그것에 포함된다. 천재를 위한 무공
- . 천재라면 그 친절함을 친절함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범인에게는 아니다.
- 위지호연이 보는 이성민은 천재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 그것은 이성민도 잘 알고 있었다.
- 한 달 동안 자하신공을 익혔다. 스킬로서 익힌 구결은 머릿속에 확실히 박혀 있었고, 매번 그것을 외우면서 운기
- 조식을 했다.
- 처음에는 기대를 품었다. 신공절학을 익히게 되었으니,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전생에서 이성민은
- 신공절학을 익혔던 적이 없다. 그가 익혔던 것은 이류 내공심법인 영능심법이었다.
- 그 기대가 박살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류 내공심법인 영능심법도 13년을 매달렸는데 8성에 그쳤다. 자하신공… 이것은
- 틀림없는 신공절학이었지만
- 이성민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 ‘나는 천재가 아니야.’
- 이성민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하신공의 내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지쳤던 근육이 숨을 돌리고 호흡이
- 안정된다.
- 자하신공의 성취는 이성민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뎠다. 친절함… 그 친절함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불친절함이었
- 다. 그는 천재가 아니었기에, 자하신공이 가진 천재를 위한 친절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자하신공을 수련하는 한 편, 이성민은 추혼창법에 매달렸다. 자하신공이 이성민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한들, 추
- 혼창법은 자하신공과 결합되어 큰 진전을 보았다. 여전히 내공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자하신공의 내공조율은 영능심
- 법이나 천진심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 “내공을 늘릴 방법은 없는 거야?”
- 이성민은 숨을 돌리면서 물었다. 방에서 내려 와 그늘가에 앉아 있던 위지호연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 “영약.”
- 위지호연이 대답했다.
- “내공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싶다면 영약을 먹는 것이 가장 빠르지.”
-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것은 이성민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서 질문했던 것 뿐이다
- .
- “내공을 올리는 것에 영약 외의 편법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세계에 기가 무척이나 풍부하다는 것이야.
- 보통 내공의 크기를 말하는 것에 ‘갑자’라는 단어를 쓴다. 1갑자의 내공. 즉, 60년 분의 내공이라는 것이지.”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 “1갑자의 내공을 얻기 위해서는 60년 동안 내공수련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 이 상승의 내공심법이고 영약이지.”
- 결국은 성련단을 얻는 것을 목표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련단을 먹어서 얻을 수 있는 내공이 얼마나 될지는
- 모르겠지만, 먹는다면 내공이 부족한 지금의 처지를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늘도 숲으로 갈 것이냐?”
- 위지호연이 묻는다. 이성민은 담벽에 걸어 두었던 수건을 들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아냈다.
- “응.”
- “돈을 벌어야 하니까?”
- “응. 너는 안 갈 거지?”
- 처음의 위지호연은 사냥터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위지호연은 사냥터
- 에 흥미를 잃었다.
- 사냥터라고 해 봐야 숲이고, 출현하는 것은 토끼와 맷돼지 따위. 가끔은 곰.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고블린과
- 오우거의 영역이 나온다.
- 하지만 이성민이 주로 다니는 것은 고블린의 영역이었다?. 지금이라면 오크 쪽도 건드릴 수 있을 법 하였지만,
- 이성민은 당장은 크게 무리하지 않고 있었다.
- 숲으로 향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이성민의 일과 중 하나였지만, 위지호연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도 일주일이나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것에 위지호연은 질려 버렸다.
- 대신에 위지호연은 다른 것에 취미를 붙였다. 이성민이 숲으로 사냥을 간 동안, 위지호연은 제나비스를 돌아다녔다
- .
- “오늘도 도서관에 갈 생각이다.”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지갑에서 1만 에르를 꺼냈다
- .
- “지난번에 준 건 다 쓴 거냐?”
- “사흘이나 지났는데 당연하지.”
- 위지호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몬스터를 잡지 않는 위지호연 대신에, 이성민이 위지호연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
-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위지호연이 매일 무공을 봐주는 것만 해도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큰 도움이
- 되었기 때문이다.
- 위지호연을 내버려 두고서, 이성민은 잭의 여관을 떠났다. 그리고 일뢰주법을 펼쳐 사냥터로 뛰어갔다. 자하신공의
- 성취가 더디긴 하여도 내공은 확실히 늘었다. 그것보다는, 내공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한 달 전에는
- 10분 전력질주하는 것으로 내공이 바닥났지만, 이제는 적당히 여유를 가지는 것도 가능했다.
- 그렇다고 잭의 여관에서 사냥터까지 멈추지 않고 경공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시체.
- 이성민은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숲에서 시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숲의 초입은 조금 덜하지
- 만, 숲이 깊어짐에 따라 시체의 출현 빈도는 늘어난다.
- 발견되는 시체의 대부분은 노 클래스의 것이다. 무림인과 마법사는 고블린과 오크들을 상대로 제 한 몸을 지킬 여
- 력을 갖추고 있고, 그들은 제나비스에서 길게 머무르지 않는다. 제나비스에서 머물러 봤자 푼돈밖에 만질 수 없다
- 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이상, 거렁뱅이 같은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제나비스를 떠나 더
- 큰 도시로 향해야 한다. 제나비스 근처에서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를 때려잡아 봐야 벌 수 있는 돈은 별 볼 일 없
- 기 때문이다.
- 하지만 노 클래스는 다르다. 사실 이것은 노 클래스에게 있어서는 잔혹한 악순환이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떠날
- 힘을 비축할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제나비스에 긴 시간 머무르면서 졸업을 위한 준비를 갖춘다.
- 돈을 긁어모아 무공서를 구입하고, 마법을 익히고. 혹은 단순히 체술을 연마하던가.
- 단기간에 되는 것은 아니다. 전생에서의 이성민도 제나비스에서 3년 동안 살았었다.
- ‘이건… 인간이 한 짓이군.’
- 고블린의 영역까지는 아직 거리가 조금 남았다. 이성민은 몸을 낮춰 시체를 살펴보았다. 시체는 둘. 상흔은… 칼
- 인가. 일단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 ‘무기도 없고. 품속을 뒤졌어. 고블린 정찰병이 여기까지 나왔을 리도 없고… 사람이야.’
-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이성민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이 시기였던가? 이성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 전생에서. 제나비스에는 잠깐 동안 ‘노 클래스 사냥’이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 노 클래스 사냥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 일주일 정도쯤이었을 것이다. 고블린의 영역까지 진입한 노
- 클래스들을, ‘누군가’가 사냥했다.
- 목적은 노 클래스가 가지고 있는 돈과 장비였다. 노 클래스 사냥을 벌인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노
- 클래스만을 집요하게 노리면서 희생자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장비를 빼앗았다.
- “쯧.”
- 이성민은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켰다. 전생에서 노 클래스 사냥이 벌어졌을 때, 이성민은 고블린 영역까지는 진출
- 하지도 못했었다.
- ‘재수가 없어.’
- 우선 이 자리를 피한다. 시체의 피가 아직 굳지 않았다.
- 바스락.
-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밝은 귀.’ 두 달 동안 숲에서 몬스터를 처 잡으면서 얻은 스킬로, 숲 안에서
- 청각의 강화를 얻게 되는 스킬이다.
- ‘재수가…’
- 없다.
- 이성민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 ======================================
- 사냥꾼-2
- 달린다.
-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밝은 귀 스킬로 들었던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소리의 주인에 대한 확신은 없
- 다. 어쩌면 이 숲에서 질리게 보았던 토끼, 혹은 맷돼지… 그런 놈들일지도 모른다.
- 그게 뭔 대수냐. 시체를 보았다. 노 클래스 사냥의 희생양이 된 시체를 봤단 말이다. 이성민은 스스로를 과신하
- 지는 않았다. 자신감이란 것도 쥐뿔이라도 가진 놈이나 품는 것이다.
- 등 뒤에서 소리가 가까워진다. 몬스터의 소리는 아니다. 토끼가 뛰는 소리, 멧돼지가 뛰는 소리. 그 둘 중 무엇
- 과도 닮지 않았다. 발이… 가볍다. 고블린도 아니고 오크도 아니다. 가벼우면서도 빠른, 점점 다가오는.
- 인간. 이건… 경공인가? 달려 나가는 이성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냥 뛰는 속
- 도라면 이성민이 펼치는 일뢰주법을 쫓을 수가 없다.
- ‘노 클래스 사냥을 하던 놈이 무림인이었나?’
- 좋지 않아. 재수가 없다. 어느 순간, ‘쉭’하는 소리가 났다. 뛰는 소리가 아니다. 이건…
- 출수다. 이성민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뛰던 가속이 붙어 이성민의 몸이 부웅 날았고, 쐐액! 뒤에서 쫓아
- 오던 놈이 던진 단검이 이성민의 몸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콰당탕! 급하게 낙법을 펼치기는 했지만, 몸을
-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고서 땅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 “후욱!”
- 이성민은 거칠어진 숨을 내뱉고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무림인이었군.”
-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 그는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수수깡처럼 마른 몸을 한 사내였다. 양 뺨이 움푹 들어가고 눈 밑이 시커멓게 죽
- 었다.
- “그렇게 안 보였는데…”
- 잘 못 골랐어. 남자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 ‘뭐하는 새끼야…?’
- 이성민은 겁에 질린 표정을 연기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성민은 스스로에게 냉정함을 강요했다. 도망치는
- 것은… 무리다.
-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다.
- 사냥꾼의 경공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다. 놈의 경공이 뛰어난 편이었다면 암기 따위는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 오히려 뛰어서 제압하였겠지. 암기에 자신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성민은 단검을 던지는 소리를 ‘들었고’,
- 날아 온 단검을 ‘피했다.’
- ‘삼류三流야.’
- 이성민이 겪었던 전생. 일주일 동안 고블린 영역을 떠돌면서 노 클래스를 사냥했던 사냥꾼이 고작해야 삼류 무인이
- 라니.
- 하지만 삼류라고 해서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충동적인 살의도 칼 한 자루 쥔다면 살인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이
- 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도 나약하다.
- 삼류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 죽이는 기술을 제대로 배운 놈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는다.
- 무기를 휘두르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는다. 무공이라는 것은 결국 효율 좋은 살인법일 뿐이다.
- 몬스터와 싸우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도 않고,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당연한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 노 클래스다. 그런 노 클래스들에게 있어서… 무기를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는 삼류 무인
- 은 악귀와도 같은 존재다.
- 하지만 이성민에게는 아니다.
- ‘삼류… 할 수 있을까?’
- 이성민은 천천히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성민을 보던 사냥꾼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 .
- “뭐하자는 거냐?”
- “저,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 이성민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울상을 지었고, 14살의 어린 모습은 그런 표정이 썩 잘 어울렸다.
-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그는 허리에 걸고 있던 검을 뽑았다.
- “누가 죽고 싶어 하겠어?”
- 부웅. 사냥꾼이 검을 한 번 휘두른다. 칼날이 허공을 베는 소리가 크게 났다. 상대를 위협하는 소리다. 이성민은
- 꿀꺽, 소리내어서 침을 삼켰다. 이 역시 들으라고 하는 행위였다.
- “사, 살려 주신다면.”
- 이성민은 허리춤에 매 두었던 아공간 포켓을 들어 올렸다. 사냥꾼의 눈이 가늘어졌다.
- “이걸… 드릴게요.”
- “뭐냐 그건.”
- 사냥꾼이 물었다.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을 열었다. 이성민은 사냥꾼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아공간 포켓 안에 손을
- 집어넣었다.
- 이성민이 꺼낸 것은 조립식의 장창이었다. 오크와의 싸움에서 창이 부러져 새로 구입한 창이다. 철컥! 이성민은
- 사냥꾼이 보는 앞에서 창을 조립했다.
- “…그게 대체 뭐야?”
- 사냥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강팍한 얼굴에 놀람의 감정이 짙다. 사냥꾼을 놀라게 한 것은 조립식 장창이 아닌
- , 저것을 꺼낸 아공간 포켓이었다. 고작해야 주먹 두 개를 붙여 놓은 것 같은 크기인데, 저 안에서 창이 튀어나
- 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 “아공간 포켓이라는 거예요. 이걸 드릴 테니까…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 “너를 죽이고서 뺏으면 되는 일 아닌가?”
- 새끼. 생각하는 방식이 존나 합리적이네.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은 풀지 않았다.
- 아공간 포켓을 못 알아봤다. 놈은…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공간 포켓의 원리
- 인 ‘마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 “이, 이 포켓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제가 죽는다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아요.”
-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 “사실이라구요…!”
- 이성민이 울상을 지으면서 외친다. 사냥꾼은 이성민의 말의 진의여부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이성민이 추측하였듯
- , 그는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이 세계가 어떤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대강 이해를 하였고, 몬스터를 잡는
- 것보다 무능력한 인간을 잡아 놈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이 근처를 떠돌면서
- 약해 보이는 놈들을 습격해 죽였다.
- 그것이 전부다. 마법? 뭐냐 그건.
- “…이쪽으로 가지고 와.”
- 사냥꾼이 턱을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 “창은 내려 놓고.”
- 사냥꾼이 덧붙였다. 역시나, 그러시겠지. 이성민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창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 여기까지는 이성민의 노림수였다. 아공간 포켓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냥꾼의 관심을 끈다. 그 안에서 창을
- 꺼내 아공간 포켓의 능력을 증명한다.
- 그리고 창을 보여주었다.
- 무기인 창을.
- “가까이 와.”
- 사냥꾼이 명령했다. 이성민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14살의 어린 모습을 하고
- 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은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 먼저 꼬리를 말았다.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 대가로 아공간 포켓을 주겠다고 했다. 무기인 창도 바닥에
- 내려놓았다.
- 그렇게 방심을 유도했다.
- 할 수 있을까?
-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냉정을 되뇌고 있지만 수가 틀린다면 이쪽이 죽는다. 도주가 불가능한 이상 이성민이
-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정면승부? 안 된다. 이성민은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다. 자하신공의 성취는 아직 1성이
- 고, 익히고 있는 외공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내공? 부족하다. 제대로 창을 들고 싸운다면… 조금은 버티겠지.
- 하지만 이길 수는 없다.
- 전생에서 이성민의 경지는 이류. 상대는 삼류. 만약 전생의 몸뚱이를 들고 왔더라면 이런 수작질을 부릴 것도 없
- 이, 정면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성민의 육체는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근력을 키웠다고는 해도
- 성인 남성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 차이를 내공으로 커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삼류 무인이라고 해도 지금의 이
- 성민보다는 내공이 많을 것이다. 그야 그럴 것이, 지금의 이성민은 내공심법에 입문한지 두달밖에 안 되었기 때문
- 이다.
- 그 대신에. 이성민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13년 동안 살아 온 경험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굉장히 요긴했다. 어
- 린 아이의 외견은 거짓말을 능숙하게끔 만들어준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는 방심하게 된다.
-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성민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 “잠깐. 거기서 던져.”
- 사냥꾼이 내뱉었다. 놈도 아주 등신은 아니었다. 이성민이 단순한 노 클래스였다면 사냥꾼이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
- 이다.
- ‘처음부터 도망치지 말 것을 그랬나? 아냐. 지금 와서 생각해 봐야 늦었지.’
-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고서 왼 손으로 아공간 포켓을 들었다. 오른 손은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아공간 포켓을 휙
- 던졌다.
- 조금 높게.
- 그리고 조금 옆으로.
- 사냥꾼이 반응했다. 그는 오른 손을 위로 크게 들었고,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대각선 방향으로 던진 아공간
- 포켓을 잡기 위해서였다. 놈이 그렇게 움직였을 때, 아래로 내렸던 이성민의 오른 손은 허리에 감은 벨트에 가있
- 었다. 투척용 단검이 이성민의 손에 쥐어졌다.
- 파악! 단검이 앞으로 쏘아졌다. 아공간 포켓을 잡던 사냥꾼이 흠칫 놀라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단검이 사냥꾼의
- 허리를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이성민의 단전에서 내공이 끓었다. 자하신공이 운용되었다.
- 파악! 이성민은 일뢰주법을 펼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사냥꾼은 무너진 자세를 잡느라 검을 휘두를 여유가 없었다
- . 이성민은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사냥꾼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 “이 개새…!”
- 사냥꾼이 고함을 질렀다. 지르려 했다. 놈의 품 안으로 파고 든 이성민은 망설임없이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 “크악!”
- 사냥꾼이 비명을 지른다. 놈은 급히 걸음을 뒤로 물리는 것으로 치명상을 피했지만, 이성민이 휘두른 단검은 놈의
- 복부를 얇게 베고 나갔다.
- “죽어!”
- 사냥꾼이 악을 썼다. 놈은 복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오른손에 잡고 있던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이성민은
-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앞으로 바짝 붙였다.
- 이 거리. 뒤로 피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검이라는 무기는 아무리 팔의 자세를 바꿔 보았자
- 가슴 앞에 바짝 붙은 것은 베어낼 수 없는 무기다. 칼을 바꿔 쥐어 내리 찍는다면 모를까.
- 삼류무인이라는 것은 이런 놈들이다. 능동적이지 못하다. 임기응변이 부족하다. 당황을 추스르지 못한다. 상대를
-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
- 푸욱.
- 힘을 주어 찌른 단검이 놈의 왼쪽 가슴에 꽂힌다. 늑골 사이를 파고들고서 들어간 단검은 그 안에서 힘차게 뛰던
- 심장을 꿰뚫었다. 사냥꾼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놈의 턱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왔고, 목구멍을 타고 올라 온 피
- 가 턱을 타고서 흘러 내렸다.
- “으… 으어어…”
- “…후우.”
- 이성민은 삼켰던 호흡을 내뱉으면서 단검을 뽑았다. 왼 손으로 사냥꾼의 가슴을 밀쳐 뒤로 넘어트린다.
- 땅 위에 누운 놈이 움찔거리다가 추욱 처졌다. 이성민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사
- 냥꾼의 품을 뒤졌다.
- “…새끼. 많이도 해 처먹었네.”
- 21만 에르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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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1
- 생각해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 전생에서 제나비스의 노 클래스들을 일주일 동안 학살하던 사냥꾼이 고작 삼류 무인이었다니. 이성민은 피거품을 물
- 고 죽어 있는 사냥꾼을 내려 보았다. 놈의 이름은 모른다. 앞으로 평생 알 일도 없을 것이다. 싸워 본 소감은…
- ‘자칫하면 내가 죽었어.’
- 그것이 이성민의 현실이었다. 과거로 회귀했다. 위지호연과의 만남을 통해 신공절학인 자하신공을 배웠다. 그럼에도
- … 이성민은 삼류 무인을 죽이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하신공이라는 신공절학을 익혔어도 없던 재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신공절학을 받
- 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이성민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빌어먹을.”
- 이성민은 욕설을 내뱉으며 손에 묻은 피를 사냥꾼의 옷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뒈진 사냥꾼은 이성민이 던졌던 아
- 공간 포켓을 꽉 잡고 있었다.
-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을 챙기고서, 사냥꾼이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크기가 커서 아공간 포켓에는 집어 넣을
- 수 없었다. 이성민은 검을 챙기고, 사냥꾼의 품을 한 번 뒤져 보았다.
- 21만 에르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무공 비급이라도 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었는데, 그런 것도 없
- 었다.
- ‘하긴. 무공 비급이 있어봤자 뭐해. 내 코가 석자인데…’
- 자하신공 하나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심득 없이 형만을 추구하는 추혼창법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 . 여기서 무공 몇 개를 더 익힌다면… 체 할 것이다.
- 이성민은 사냥꾼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서 숲을 떠났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런 것
- 쯤은 이미 전생에서 익숙해 졌다.
- 이성민이라고 해서 상대를 무조건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들고, 놈을 죽여야만
- 해결이 가능한 사태라면. 죽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씁쓸한 기분이… 길다. 제나비스의 노 클래스가 얼마나 나약한지 제대로 실감을 해버렸
- 다. 고작 저 정도 수준의 삼류 무인에게 대체 몇 십 명이 죽었던가.
- ‘사냥꾼이 활동했던 것은 일주일. 그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었지.’
- 아마… 죽었을 것이다. 이번처럼, 뭣 모르고 무림인이나 마법사를 건드렸거나. 아니면 노 클래스답지 않은 노 클
- 래스를 건드렸거나. 사실 전생에서 사냥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이성민이 알 바는 아니었다.
- 이번 생에서 사냥꾼은 죽었다. 노 클래스 사냥은 끝났다.
- “묘한 검을 가지고 왔구나.”
- 노점상인 잭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성민에게 건네 받은 검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사냥꾼이 가지고 있던 검은
- 노골적으로 무림의 것임을 주장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 “무림인이 숲에서 죽는 일은 드문데…”
- “무림에서 온 놈이라고 다 강한 것은 아니잖아요.”
- “그렇지. 삼류니 이류니, 그런 놈들도 오니까.”
- 잭은 검의 출처에 대해서는 딱히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값은 잘 쳐줬다.
- “최근에 너랑 붙어 다니던 꼬마 있잖아.”
- “…예? 아, 호연이요?”
- “그래. 그 꼬마… 대체 정체가 뭐냐?”
- 잭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위지호연에 대한 이야기는 왜 묻는 걸까?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떠보이면서 머리를
- 갸웃거렸다.
- “호연이는 왜요?”
- “아니. 가끔 광장에서 보곤 하는데… 대체 뭘 하는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무 것도 안하고 분수대 쪽에
- 앉아 있다가, 갑자기 주변을 서성거리고…”
- 잭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 “이상하게 나는 그 꼬마가 영 불편하단 말이지. 그… 뭐라고 해야 되나. 본능적인… 그래. 그런 거야. 본능적으
- 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거 뭐냐… 감? 그래, 감인가?”
- 잭은 스스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우스워져 헛웃음을 흘렸다. 13살의 익지도 않은 꼬마가 본능적으로 껄끄럽다니.
- 하지만 잭은 자신의 감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이나 죽을 뻔
- 했던 것을 그 감 덕분에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다.
- “걔가 뭘 하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 이성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일주일 전부터 위지호연과는 따로 움직이고 있었고, 위지호연에게 용돈도 주고 있다.
- 하지만 위지호연이 제나비스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 전생에서의 위지호연은 제나비스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제나비스를 떠난 위지호연이 어디로 간 것인지는 모른다
- . 당시의 이성민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 용병이 되고 나서 위지호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당시 이성민의 나이는 18살이었고, 제나비스에서 가장 가까운
- 도시인 브론느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 그 시점에서 위지호연은 1년 전부터 소천마라는 별호를 떨치고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
- 다. 위지호연은 3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전생에서의 이성민은 제나비스에서 3년을 살았고, 제
- 나비스를 떠나 브론느에 도착해 1년 후에 용병이 되었다. 제나비스에 소환된지 한 달 만에 제나비스를 떠난 위지
- 호연은 3년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갑자기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 3년의 공백. 전생의 위지호연은 3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위지호연이 제나비스에 소환된지 한 달이 조금 넘었
- 다. 전생처럼 흘러간다면… 위지호연은 전생에서 그리 했듯이 제나비스를 떠날 것이다.
- ‘하지만 전생의 위지호연과 지금의 위지호연은 달라.’
-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겪은 사건이 달라졌다. 전생의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만나지 않았다. 전
- 생의 위지호연이 이성민을 만나지 않고, 제나비스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이성민도 기억
- 하고 있었다.
- 그 한 달. 위지호연은 제나비스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고블린 부락 네 개가 전멸했고 오크 부락 세 개가 전멸했
- 다. 워낙에 번식성이 높은 놈들이기는 하여도, 일곱 개나 되는 부락이 전멸한 것은 숲의 균형을 일그러트리기에
- 충분한 사건이었다.
- 하지만 지금 생의 위지호연은 전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위지호연이 숲에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근
- 일주일은 숲에 가지 않았지만, 그 전의 3주 동안은 위지호연도 이성민과 함께 숲에 갔다.
- 가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성민이 몬스터와 싸우는 동안 위지호연은 나무 밑에 붙어 있
- 는 버섯을 구경하거나, 꽃을 보거나… 돌아다니는 벌레 따위를 보았다. 가끔은 이성민의 동작을 지적해주기도 했다
- .
- “왔어?”
- 여관에 돌아왔을 때, 위지호연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위지호연은 여관 안으로 들어오는 이성민에게 빙긋 웃음을
- 지어 보였다.
- “오늘은 일찍 왔네?”
- “너도.”
- 이성민은 이른 새벽에 일어난다. 일어난 즉시 자하신공을 수련하고, 충분히 되었다 싶으면 여관 뒤뜰로 나가서 창
- 을 휘두른다. 그 뒤에는 숲으로 가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점심이 조금 넘어서 돌아온다. 그 뒤에는 다시 수련의
- 반복이다.
- 오늘의 이성민은 점심이 넘기 전에 돌아왔다. 사냥꾼을 죽임으로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굳이 몬스터를
- 사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평소에는 저녁 즈음에 돌아왔잖아.”
- “오늘로 도서관의 책을 모두 다 봤거든.”
- 위지호연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소천마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었을 때, 이성민이 위지호연에게 가진 이미지는
- 냉혈한 마인魔人이었다.
- 그런데 정작 위지호연과 함께 지내보니, 소천마라는 별호가 그리 어울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표정도 풍
- 부했고 웃음이 많았다. 팩트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을 보니 싸가지가 조금 많이 없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위지
- 호연은 기본적인 개념은 탑재하고 있었다. 적어도 루라나 한스같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굉장히 친절했기 때문이다
- .
- “그런데, 너.”
- 오늘의 점심은 두툼한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였다. 루라가 접시에 샌드위치를 담아서 가지고 왔다. 위지호연은 무어
- 라 말을 하려다가, 루라가 곁에 다가온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사람을 죽였구나.”
- 잠깐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루라가 주방으로 돌아갔다. 위지호연은 루라가 곁을 떠나자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 하고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이프를 들어 샌드위치를 자르려던 이성민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 “…응?”
- “피 냄새가 나. 사람의 피 냄새.”
- 위지호연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코끝을 톡 쳤다. 그러면서 이를 보여주며 웃는다.
- “사람의 피 냄새는 익숙하거든. 어린 시절 숱하게 죽이다 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지.”
- “피 냄새가 그냥 피 냄새지 뭐.”
- “아니, 달라. 왜 죽였나?”
- “…”
- 이성민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샌드위치를 마저 썰었다.
- “삼류무인이었어. 나를 죽이려 들길래…”
- “삼류무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이로군. 자하신공을 익혔으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 “정면승부는 못했어.”
- “내공이 부족하니까.”
- 위지호연이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냅킨을 들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다.
- “너는 특이해.”
- 위지호연의 눈이 빛났다.
- “네가 사냥을 나가는 동안, 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름대로 이 도시를, 이 세상을 이해하려 해 보았다. 노
- 클래스의 처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 대부분의 노 클래스는… 비참하더군.”
- “그렇지.”
- “이해할 수 있다. 벌레라면 모를까, 작은 짐승 하나 죽이는 것에도 각오를 품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야. 그런 각
- 오 없이 무언가를 죽일 수 있다면 어딘가 망가진 인간이겠지.”
- 위지호연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어린시절부터 살인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던히 다른 무언가를 죽이
- 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숙해는 것이 아니라 마모되는 것이다.
- “그런데 너는 특이해. 두 달… 되었다고 했었지. 듣자 하니 너는 이 세계에 소환되고 바로 다음날부터 숲으로 들
- 어갔고, 그곳에서 몬스터를 사냥했다더군.”
- “…그게 뭐가 이상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걸.”
- “하하! 다른 노 클래스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거야. 자기
- 목숨을 걸고, 다른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
- 그것이 노 클래스와 무림인, 마법사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무림인은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익숙하
- 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이리저리 포장해 봐야 결국에는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마법사라고 하면 공방에 틀어박혀 마법만 연구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하기 쉽
- 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놈들이 연구하고 익힌 마법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모기 하나 잡는 것만큼 쉽
- 게 만들어준다. 그에 비해서 노 클래스는 어떤가? 기술도 없고 각오도 없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힘
- 든 것이다.
- “네 나이는 14살. 살인 같은 것에 익숙한 것이 힘든 나이야. 살인은커녕 작은 동물 하나 죽이는 것도 힘든 나
- 이란 말이야. 그런데 너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지.”
- “내가 살아야 하니까.”
- “좋아. 그렇다면 다른 의문을 꺼내 보지.”
- 위지호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새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노려 보면서
-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 넣었다.
- “너는 재능이 없어.”
- “커흡!”
- 대뜸 날아온 팩트가 묵직하게 명치에 꽂힌다. 목구멍 안쪽으로 넘기던 샌드위치가 걸렸다. 이성민은 켁켁거리면서
- 급히 우유를 들이켰다.
-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너는 재능이 없는데… 창을 휘두르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 듯 해. 군더더기가 많기는
- 하지만, 뭐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없이 가능하단 말이다.”
-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두 달. 네가 에리아에 소환되고서 지난 시간. 그 두 달 만에 이룩했다고 하기에는 창법의 실력이 제법 대단하단
- 말이다. 창법 뿐만이 아니지. 내공을 다루는 것도 제법 익숙해. 신법이나 보법을 펼칠 때의 발재간도 제법 깔끔
- 하고. 알고 있나? 범인凡人이 보법과 신법을 익혀 펼친다면 가장 먼저 발이 꼬인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에도
-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지.”
- 이성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도 처음에 일뢰주법을 익혔을 때, 발이 꼬이는 것을 잡느라 오지게 고생을 했기
- 때문이다.
- “보법이 꼬이질 않고 익숙해. 쓰는 창법은 이류의 무공이지만 실전적으로 제법 잘 다듬었어. 고작 두 달 만에?
- 그런 주제에 재능은 없지. 이게 대체 뭐야?”
- 위지호연이 웃는다. 보법? 익숙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10년 동안 써온 것인데. 창법? 마찬가지다. 10년 동안
- 휘둘렀고, 용병 짓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다듬었다.
- “이상하단 말이야. 정말… 이상해. 너.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
- 위지호연의 시선이 이성민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성민은 놀란 속을 진정시키고서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았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이렇게 하나하나 짚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 군. 나는 거짓말쟁이를 좋아하지 않아.”
- “…누구나 비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야. 억지로 캐내려 하는 쪽이 나쁜 것 아냐?”
- 이성민이 투덜거렸다. 한스가 말했었다. 위지호연이 거북하다고. 본능적인, 그런 감 때문에. 이성민은 한스의 그
- 런 말에 동감했다. 지금의 위지호연은 대하는 것이 굉장히 껄끄러웠다. 13살 꼬마 대가리가 뭐 저리 잘 돌아간단
- 말인가. 그냥 그렇다고 치면 될 것을.
- ‘그렇게 느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 이성민은 한숨을 삼키면서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 위지호연의 의심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 이성민이 회귀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위지호연이 믿고 자시고를 문제로, 이성민
- 의 납득 여부가 문제다.
- “비밀이라. 그래. 누구나 비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지. 나도 그렇고.”
- 위지호연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 “그러면 이건 어때? 내 비밀을 하나 알려주지.”
- “네가 말해주는 비밀이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 “이해타산 적이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내 비밀과 함께 다른 것도 더해주지. 창법? 보법? 어느 쪽이든 좋아
- .”
- “…있어봐야 나는 쓸 수가 없어. 네가 두들겨 팼듯이,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 “내가 언제 널 두들겨 팼다는 것이냐?”
- “언어도 폭력이지.”
- 이성민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위지호연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 “이상한 말을 하는 군.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네가 그 이류 무공인 추혼창법을 대성해 봐야 절정 수준의 창
- 법과는 비교가 안 돼. 장기적으로 본다면 좋은 창법을 익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 “내공이 부족해서 제대로 쓸 수도 없을 걸.”
- “비싸게도 구는군.”
- “그만큼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 “좋아. 그렇다면 내 2할의 내공을 너에게 주마.”
- 위지호연이 내뱉었다. 그 말에 이성민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내공이라는 것이 저렇게 쉽게 주고 말고 할 것도
-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하면서 비밀을 듣고 싶어하는 위지호연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체 왜 그렇게까지 듣고 싶어 하는 거냐?”
- “궁금하니까. 너는 내 하나 뿐인 친구야. 친구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이상한가?”
-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 “너와 나의 친구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탓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는 궁금해. 그래서. 어쩔 테냐?”
- 위지호연이 재촉했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머뭇거렸다. 창법과 내공. 그리고 위지호연의 비밀. 이건 세상에 다시
- 없을 기연이었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 “…좋아. 그 대신에, 나랑 약속해라. 내 비밀을 듣고 나서…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 “내가 널 왜 죽인다는 것이지?”
- “약속이나 해.”
- “좋아. 약속하지. 나는 절대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앞으로 네가 무슨 말을 하듯, 어떤 일이 벌어지
- 듯.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너는 내 친구니까.”
- 위지호연이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조금의 죄악감을 느꼈다.
- “알았어.”
- “내가 먼저 말하지.”
- 이성민이 입을 열려던 찰나, 위지호연이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 “나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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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2
- “…?”
-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위지호연을 바라보았다. 이성민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위지
- 호연의 얼굴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 “…뭐라고?”
- “나는 여자라고.”
- 위지호연이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이성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위지호연은
- , 자기가 여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 “말도 안 돼!”
- 이성민이 빽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란에 주방에 있던 잭과 루라가 머리를 쏙 내민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 . 위지호연은 주방을 향해 예의바르게 그렇게 말해두고서, 이성민을 돌아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떡하자는 것이냐?”
- “아니! 놀라니까 소리를 지르는 것이지!”
- “흠, 하긴 그렇겠군.”
- 이성민의 대답에 위지호연이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 무덤덤한 반응에 이성민은 할 말을 잊었다. 그는 전생의 기억
- 을 짚어 보았다. 소천마 위지호연. 위지호연이 여자라는 소문은 없었다. 아니, 전생의 기억은 제쳐두고서도. 이
- 성민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위지호연을 바라보았다.
- 높은 콧대. 가늘고 긴 속눈썹. 커다란 눈망울. 새하얀 피부. 체격이 작기는 하지만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
- 각했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르게 보인다.
- “…지, 진짜로?”
- “진짜로. 내가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아니면 방에 가서 내가 바지라도 벗어 줘야 믿겠느냐?”
- 위지호연이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짚이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 위지호연은 예쁘장하게 생겼다. 저대로 큰다면 꽃미남이 되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여자라
- 고 생각하니… 다르게 보인다.
- ‘그러고 보니 같이 목욕한 적도 없었어.’
- 이 여관은 공동 욕탕을 쓴다. 이성민은 사냥과 수련을 끝내고 잠들기 전에 항상 목욕을 했지만, 위지호연은 이성
- 민과 함께 목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천마
- 위지호연은 생각보다 지저분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 “가슴이 안 나왔는데…”
- “붕대를 감고 있다.”
- 위지호연이 무복의 앞 섬을 살짝 들춰 보이면서 말했다. 과연, 가슴을 칭칭 감고 있는 새하얀 붕대가 보였다.
- “아직 많이 튀어나오지 않았거든. 앞으로 더 커질지는 모르겠다만… 기왕이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가슴에 살
- 덩이를 달고 있자니 영 거북살스러워.”
- “…말도 안 돼…”
- 이성민이 다시 중얼거렸다. 위지호연이 사실은 여자였다니.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남장을 한 거지?”
- “위대하신 교주께서 그것을 바라였다. 나는 천재적인 자질과 무공을 익히기에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없는 무골을
- 타고났지만, 안타깝게도 여자였지. 교주께서는 내 자질과 무골이 아까우셨던 모양이야.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남자
- 로 살라고 강요하셨었지.”
- 아마, 그것이 교주이자 아버지에게 들었던 첫 번째 명령이었을 거야. 위지호연이 덧붙이면서 웃었다.
- “하지만 이 세계에는 마교가 없지. 위대하신 교주님도 없고. 내가 남자로 지낼 이유가 없어. 그래도… 13년을
- 남자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버릴 수가 없더군. 아마 앞으로도 남장은 할 거야. 이 가슴이 붕대로 가려지지 않
- 을 정도로 커지지 않는 한은 말이지.”
- 그랬으면 좋겠군.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위지호연을 바라보았고,
-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시선을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 “이게 내가 가진 비밀이다. 너의 비밀은 뭐지?”
- “…으음…”
-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여자, 여자라고… 소천마 위지호연이 여자라고. 이성민은 흐려진 이성을 어떻게
- 든 붙잡았다.
- “…나는…”
- 저런 말을 듣고서 말해주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릴 수도 없다. 이성민은 한숨을 삼키면서 말했다.
- “나는 회귀자回歸者다.”
- “뭔 개소리냐?”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묻는다. 그 말이 가슴에 조금 얹히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참을 인자를
- 그리면서 위지호연의 말을 넘겼다.
- 이야기를 해주었다. 회귀한 사실에 대해서. 전생의 돌이라는 것을 손에 넣었고, 죽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 . 위지호연은 뭔 개소리냐고 말한 주제에 정작 이성민이 제대로 설명을 하자, 가만히 이성민의 말을 들었다.
- “그렇군.”
- 이야기가 끝나고서, 위지호연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 “믿기 힘든 일이지만 믿을 수밖에. 이 세계도 그렇고, 마법이나 뭐… 그런 것들. 믿을 수밖에 없어. 중원에서라
- 면 개소리로 치부하겠지만, 여기서는 다르구나.”
-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그, 아니, 그녀는 잠깐 동안 허공을 올려 보았다.
- “전생에서의 나는 어땠느냐?”
- “…뭐?”
- “전생에서도 내가 있었을 것 아니냐. 나는 어땠지?”
- “어떠고 자시고…”
- 이성민은 전생의 기억에 남아 있는 위지호연의 모습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전생에서 위지호연과
- 직접 마주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위지호연에 얽혔던 소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그렇군. 잘 살고 있었던 모양이군. 적어도 13년 동안 나는 죽지 않았다는 말이구나.”
- “그렇… 겠지.”
- “그리고 계속해서 남장을 하고 있었고.”
- 위지호연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 “아마. 13년이 흐른 뒤여도 내 가슴은 그리 커지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건 다행이군.”
-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진담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 “하지만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 왜 나한테, 죽이지 말아달라는 말을 한 것이냐?”
- “…너와 내 만남 따위는 인연이나 우연 같은 것이 아니었어. 나는 네가… 그, 소천마 위지호연의 처음을 보고 싶
- 었다. 그래서 네가 소환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광장에 있었고, 너를 보고 있었던 거야.”
- “아, 그렇군. 그 만남이 거짓이었으니까. 내가 이용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분개하여 너를 때려 죽일 것이라
- 고 생각한 것이냐?”
- 정곡이었다. 이성민은 대답 대신에 침묵했다.
- “그것 참 이상한 생각이구나.”
- 위지호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 “생각해 보거라.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나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지. 그런 너에게 흥미를 느껴
- 먼저 다가간 것은 나다. 먼저 친구가 되자고 한 것도 나다. 너에게 자하신공을 가르치고 무공에 조언을 해 준 것
- ? 하하! 그것도 내 쪽에서 먼저 그리 하겠다고 한 것 아니냐. 너는 나한테 아무 것도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 내 쪽에서 먼저 너한테 그리 말했을 뿐이다.”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위지호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 “너는 잔걱정이 많구나.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어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그런 성격인 것인가.”
- “둘 다.”
- “흐흥. 어찌 되었든,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오히려 너에게 더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 죽어서 처음으로
- 되돌아왔다… 흥미로운 일이고, 내가 품었던 너의 모순에 대해서도 납득이 가는 군. 13년. 아니, 무공을 배운
- 시간은 10년인가? 10년이면 익숙해 질 만도 하지. 10년을 붙들고 있어서 아직도 그 수준이라는 것은 안타깝지
- 만.”
- “이런 씨발.”
- 위지호연의 중얼거림에 이성민은 욕설을 내뱉었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팩트 공격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 “네 말에 따르면, 네가 겪은 전생에서의 나는. 제나비스에 소환되고서 한 달 만에 이 도시를 떠나고, 3년 동안
- 잠적했다는 말이구나.”
- “응.”
- “3년 동안 내가 무엇을 했을까?”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그 위지호연과 지금의 내가 같은 인물은 아닐거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방향이나… 원하는 것은 같겠지.
- 아마 그 3년 동안, 나는 그리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이곳 저곳 여행을 했겠지.”
- “여행?”
- “위지호연이라는 인간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였던 것은 자유다. 마교라는, 교주라는. 그런 억압에서의 자유. 나는
- 이 세계로 소환된 것이 기쁘다. 내가 바라였던 자유를 얻었으니까.”
- 그것은 위지호연의 진심이었다.
- “지금도 그래. 나는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거든. 일주일 동안 이 도시를 떠돌았다. 자유를 만끽했지. 하지만 이
- 도시도 좁아. 더 많은 것을 보고 싶고 많은 것을 겪고 싶다.”
- “…떠나겠다는 거냐?”
- “조만간 떠날 생각이었지. 그런데… 너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
- 위지호연이 이성민을 향해 물었다.
- “너는 이미 한 번 이 세계에서 살았다. 13년간 살았고, 죽었지. 기연을 얻어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
- 는 이 인생에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 위지호연의 질문에 이성민은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주제였다.
- “전생에서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 기억을 토대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
- “…전생보다 나은 삶.”
- “일주일 동안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다. 노 클래스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숲으로 사냥을
- 가는 것은 아니더구나.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다른 노동을 하고 있더군. 그렇게 살 생각은 없냐?”
- “…아깝잖아.”
- 이성민이 투덜거렸다.
-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전생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정보는 죄다 메모해 놨어.”
- “탐욕스럽군. 뭐,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냐. 전생보다 나은 삶? 애
- 매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무언가 목적은 없나?”
- “그런건… 모르겠어.”
- 이성민은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 “전생의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만을 생각했다. 네가 틈 날 때마다 말하는 것처럼, 나는 재능이 부족
- 해.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다. 재수없게 죽어서… 다시 살아났지만. 솔직히 목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 없다. 그냥, 전생과 비슷하게 살겠지.”
- “그렇군.”
- 위지호연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딱히 이성민의 방향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 위지호연의 나이는 고작해야 13살이고, 이성민은 27살이다. 13살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도 우습지 않
- 은가.
- “그런데 너. 나랑… 계속해서 친구를 하겠다는 거냐?”
- “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애초에 정신 연령이…”
-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결국 계속 반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 “위로 가자.”
- 위지호연이 몸을 일으켰다. 이성민은 앞서 걷는 위지호연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위지호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 생각해 보면 위지호연의 방에 들어와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 “구천무극창九天武極槍을 전수해주마.”
- 위지호연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큼은 일대종사였다. 위지호연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성민을
- 응시했다.
-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 “그냥 의자 가져다가 앉아라. 친구인데 무슨.”
- 위지호연이 투덜거리자, 이성민은 의자를 끌어 와 위지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 “내가 기억하고 있는 창법 중에서는 이게 제일이다. 일백 년 전에 창왕槍王이라 불리던, 창이라는 무기로 천하를
- 오시했던 무인이 쓰던 무공이지. 이름부터가 광오하지 않느냐. 구천에서 제일가는 창이라 하여 구천무극창. 그만큼
- 대단한 창법이기는 하지.”
- “너무 어려운 무공은 내가 못 익혀.”
- “나도 안다. 네 재능은 하찮으니까. 자하신공이 그러하듯, 구천무극창 역시 신공절학이다. 네 재능으로 건드렸다
- 가는 평생 가도 못 익힐 것이야.”
- “재능 없는 것은 알겠는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나?”
- “사실인 것을 어찌 하겠느냐.”
- 위지호연의 되묻는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 “그러니 네게 맞춰서 개량을 해주마. 제법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이것은 네가 그대로 익히는 것보다는 뜯어
- 고친 것을 익히는 것이 나을게야.”
- “…할 수 있다는 거냐?”
- “나는 천재다.”
- 위지호연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 “마교의 교주께서도 인정한 사실이지.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도 아니고, 진입장벽을 조금 낮추는 선에서… 그 외
- 에 쓸만 한 창법을 조금 섞는 식이라면 개량할 수 있다. 그래봐야 처음에만 조금 익히기 쉬운 것이지, 근본적인
- 것은 바꿀 수 없어. 구천무극창을 만든 창왕 역시 절대적인 무인이었고 또 천재였으니까.”
- 그렇다고는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무공을 개량하겠다니. 그만큼 위지호연이 이성민과는 태생이 다른
- 천재라는 것이다.
- “이름은 구천무극창 성민식晟敏式으로 하자.”
- “대체 왜?”
- “너를 위해 맞춘 창법이니 네 이름을 넣어야지. 구천무극창 성민식. 좋지 않으냐?”
- “그게 좋다고?”
- “꼬우면 네가 만들어라.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드니까.”
- 위지호연이 강짜를 부렸다. 이성민은 뭐라고 반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수고를 감수하고서 만들어주겠다는데, 이
- 름이 불만족스럽다고 불만을 터트리기에는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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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3
- “그럼, 창법은 이것으로 되었다 치고.”
-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대뜸 손을 내밀었다.
- “내 내공의 2할. 너에게 주마.”
- 별 것도 아닌 것을 건네주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이성민은 그것은 어투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위지호연이 가진 2할의 내공. 그것의 양이 얼마나 될지는 이성민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공이라는 것이 이렇게
- 쉽고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에 대해서 이성민은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내공이라는 것은 성질이 모두가 다르다. 사내의 내공이라면 양기를 띄고 여자의 내공이라면 음기를 띈다. 그런 가
- 장 기본 되는 양분兩分부터 하여, 익히는 내공 심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바뀐다. 도가의 심법을 익힌다
- 면 도가의 내공을, 불도의 심법을 익힌다면 불도의 내공을 갖는다.
- “나는 자하신공을 익혔는데. 네 내공을 받아도 되는 거야?”
-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 이성민의 질문에 위지호연이 흐뭇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 “보통이라면 절대로, 타인에게 내공을 전해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가장 순수한 진원진기라면 받고 주는 것이
- 가능이야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효율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야. 진원진기라는 것은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에
- ,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줄기 때문이다.”
- 일단 진원진기를 넘길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 “흡성대법 같은 사법邪法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효율 면에서는 좋지 않지. 타인의 내공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 있다는 것은 굉장한 강점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지. 불순물이 너무 많이 쌓이거든. 주화입
- 마에 빠지기 딱 좋거든.”
- 위지호연이 내밀고 있던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뻗어, 이성민의 손목을 잡았다.
- “천마신공이 왜 고금제일의 신공절학이며, 역대 교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인지. 그 이유를 아느냐?”
- “내가 어떻게 알아.”
- “당연히 모르겠지. 쉽게 말하자면, 천마신공은… 모든 내공심법이 가지고 있는, ‘정제’의 과정을 거치지
- 않는다.”
- “…뭐?”
- 그 말에 이성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삼류와 이류의 것이었다고는 해도, 이성민 역시 내공심법을 익혔다.
- ‘정제’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 내공심법의 기본은 호흡을 통해 자연지기를 몸 안으로 들이고, 그것을 구결에 따라 ‘내공’으로 정제하는 것이다.
- 그렇게 정제 된 내공이 단전에 쌓인다.
- 그것은 삼류나 절정이나 똑같이 가지는 내공심법의 기본이다. 당장 이성민이 익히고 있는 자하신공만 하더라도 신공
- 절학의 반열에 드는 내공심법이었지만, 정제의 과정은 포함되어 있다. 내공을 정제하고 쌓는 과정이 축약되고 받아
- 들이는 내공의 양과 속도가 다른 심법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뿐이다.
- 그런데 정제의 과정이 없는 내공심법이라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호흡을 할 때마다 대기 중에 가득한 자연지
- 기가 그대로 단전으로 쌓인다는 말이다.
- “천마신공은 호흡으로 들어 온 자연지기를 그대로 단전에 쌓는 심법이다. 고금제일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내공심법이
- 지. 하지만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것만은 아니야. 천마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특별한 체질을 타고나야만
- 하거든.”
-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손목을 주물거리면서 잠깐 동안 침묵했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이 짚은 기혈을 통해 그녀가 불어
- 넣은 기운이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 “혈도는… 깨끗하진 않군. 불순물이 꽤 쌓여 있어. 14살은 무공을 익히기에 그리 빠른 나이는 아니니까. 오히려
- 조금 늦은 감이 있지.”
- 어쩔 수 없었다. 골격개조시술을 받아 하급 무골을 얻기는 하였지만, 뼈의 형태는 바꾸었어도 혈도까지 청소할 수
- 는 없었다.
- “단전의 크기도 작아. 이건 어쩔 수 없지. 내공이 적으니까. 자아, 그래서… 내가 가진 2할의 내공을 너에게
- 줄 것인데. 이건 말은 쉬워도 실상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야. 받는 쪽이나 주는 쪽이나 말이지.”
- “…위험한 것은 아니겠지?”
- “그리 위험하지는 않아. 다만, 내가 주는 2할의 내공에서 얼마나 건질지는 순전히 네 역량에 따라 달려 있지.
- 자하신공을 운용해라.”
- 위지호연이 이성민의 손을 놓았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서 자하신공을 운용하기
- 시작했다. 단전에 쌓인 쥐꼬리만큼이나 적은 내공이 꿈틀거리면서 기혈을 흐른다.
- 위지호연은 운기조식에 들어간 이성민의 뒤에 섰다. 그녀는 몇 번 호흡을 고르더니, 이성민의 기혈에 오른 손을
- 짚었다. 천마신공이 운용되었다.
- “소리 내지 마라.”
- 위지호연이 경고했다. 이성민은 두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오직 자하신공의 구결만을 생각하고 외우면서 자하신공
- 을 운용했다. 그리고, 이성민의 기혈을 통해 거대한 내공의 덩어리가 유입되었다. 그것은 정제를 거치지 않은 순
- 수하기 짝이 없는 자연지기였다.
- 위지호연이 불어넣는 자연지기는 영약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영약이라는 것도 기의 덩어리라는 것은 똑같지
- 만, 그 역시 정제 과정에서는 불순물이 섞인다. 그것을 내공심법을 통해 다시 한 번 정제하는 과정에서 기의 손
- 실은 제법 많이 일어난다.
- 하지만 위지호연이 불어넣는 내공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위지호연이 불어넣는 내공을
-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이성민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기혈을 통해 들어 온 위지호연의 내공은 이성민의 전신을 맴돌았다. 이성민은 그
- 내공의 흐름을 붙잡기 위해 계속해서 자하신공을 운용했다.
- “후우!”
-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기혈에 대고 있던 손을 때어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드물게 피로감이
- 맴돌고 있었다. 위지호연은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투덜거렸다.
- “이건 대단한 기연이다. 알고 있느냐?”
- 이성민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기혈을 흐르는 위지호연의 내공을 단전으로 인도하는 것으로만도 벅찼기 때문이다.
-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성민은 눈을 떴다.
- “…아아!”
- 이성민이 가장 먼저 내뱉은 것은 탄성이었다. 단전이 가득 찼다. 이러한 충만감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다.
- ‘이 내공이 고작해야 2할이라고?’
- 탄성 뒤에는 어이가 없었다. 위지호연이 불어넣은 2할의 내공은… 전생에서 이성민이 10년 동안 쌓아 온 내공보다
-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 “얼마나 취했느냐?”
- “어… 한… 절 반쯤?”
- “거짓말. 네 자하신공의 수준을 보면 반도 못 건졌을 거야. 그래도 너무 속상해 하지는 말아라. 기혈에 스며든
- 내공이니, 꾸준히 자하신공을 운용하다보면 단전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야.”
- 피곤하군. 위지호연은 투덜거리면서 침대에 털썩 앉았다. 2할이나 되는 내공을 한 번에 소모하였으니, 위지호연이
- 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 “친구니까.”
- 위지호연이 대답했다.
- “너무 크게 생각하지는 마라. 그러니까, 이건… 나의 단순한 자기만족일 뿐이다. 너한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 것도 아니니,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 자기만족. 위지호연은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이 굉장히 그럴 듯하다고 느꼈다. 위지호연이 이성민에게 품고 있는 호
- 의는 자기만족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 “피곤하구나.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부터는 구천무극창을 뜯어 고쳐야겠어.”
- “…뭐라도 도와줄까?”
- “네가? 나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를 도와주고싶다면, 추혼창법의 구결이나 적어두고 가거라. 그것은 구
- 천무극창 성민식에 접목할 테니까.”
- “꼭 성민식을 붙여야 되는 거냐?”
- “내 마음이다.”
- 위지호연의 대답에 이성민은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성민은 방에서 수첩과 펜을 가져와 추혼창법의 구결
- 을 적어 위지호연에게 넘겨주었다. 위지호연은 그것을 대충 한 번 훑어보고서 투덜거렸다.
- “이런 것도 무공이라니…”
- 신공절학을 잔뜩 접하고 가진 재능이 하늘에 닿아 있는 위지호연이 보기에는, 추혼창법은 무공이라고 할 수도 없는
- 모양이었다.
- “…고마워.”
- 이성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위지호연에게 머리를 숙였다. 위지호연은 머리를 숙인 이성민의 뒤통수를 노
- 려보더니, 대뜸 손을 들어 이성민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따악! 둔탁한 통증에 이성민이 비명을 질렀다.
- “악!”
- “머리 숙이지 마.”
- 위지호연이 내뱉었다.
- “너랑 나는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머리 숙이지 마.”
- “머리 좀 숙일 수도 있지…”
- “나는 싫다.”
- 위지호연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 한가하다면 뒤뜰로 가서 창이라도 휘둘러라.”
- “너는?”
- “나는 바빠. 구천무극창을 뜯어 고치는 것만 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거다.”
- “…제나비스를 떠나지 않을 생각인가?”
- 이성민이 물었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래 이 시점에서 위지호연은 제나비스
- 를 떠난다.
-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느냐.”
- “나 때문이잖아.”
- “맞아. 너 때문이지.”
- 위지호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오늘 너에게 회귀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너에게 이별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안
- 에 이 도시를 떠났겠지.”
- 전생과 똑같다. 위지호연은 전생과 다른 사건을 겪었지만, 결국 위지호연이라는 ‘인간’은 이 도시에서 한 달 이
- 상 살아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 “이미 한 번 죽어서 이곳에 다시 온 것 아니냐. 이번에도 어이 없이 죽게 된다면, 네 처지도 비참하고 참 억울
-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나도 조금 도와주마. 네가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 이성민은 멍한 얼굴로 위지호연을 보았다. 뭐냐, 이 밑도 끝도 없는 호의는. 친구라서? 정말로, 그 단순하기 짝
- 이 없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것인가.
-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저런 태도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라고 해 봐야 얕은 인연. 우연이라고 할 수도
- 없는 일이다.
- 이성민이 위지호연의 저런 호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살다 죽은 13년간의 전생에서, 이
- 성민의 곁에는 친구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료… 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죽었을 뿐이다.
- 이성민이라고 해서 그들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들이 죽지 않도록 무언가 도
- 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개소리다. 당장 이성민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다. 두 달이 넘게 지난 지금
- 의 시점에서, 이미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 “표정이 왜 그러냐?”
- “…그냥, 고마워서.”
- 이성민은 한숨을 삼키면서 중얼거렸다.
- 위지호연과의 만남은, 이성민이 전생을 포함해 살아 온 평생에서 으뜸가는 기연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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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 의뢰-1
- 내공이 크게 늘어난 것에 대한 체감은 확실했다. 위지호연에게서 2할의 내공을 전해 받은 후로, 이성민이 잭의
- 여관에서 북쪽 성문까지 쉬지 않고 경공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 지금의 이성민은 이류무인이라고 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부족하던 내공은 위지호연 덕분에 보충이 되었고, 자하신공
- 을 익히게 되면서 ‘미래’라는 것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민의 부족한 재능으로 자하신공의 성취를 얼마까
- 지 올리게 될 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미래를 도모하며 희망이라는 것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하신공 뿐만이 아니다. 위지호연이 뜯어 고치면서 다듬고 있는 구천무극창까지 전수받게 된다면, 신공절학을 두
- 개나 익히게 되었으니 이성민은 ‘절대고수’라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게 된다.
- 물론 두 개나 되는 신공절학을 익혔다고 해서 반드시 절대고수가 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천재 중의 천재만이
- 향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 ‘전생보다는 낫지.’
- 이류무공을 10년 동안 익혔고, C급 용병에 이류무사로 마무리 지었던 삶에 비하자면 지금의 삶은 얼마나 희망찬
- 가. 쥐뿔도 없는 재능이 걸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성장 발판은 충분히 마련했다. 노 클래스의 성장력과 하급무골
- 의 성장 보정치로 인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성장이 가능할 것이다.
- “소협.”
- 평소처럼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 북쪽 성문을 지나려던 찰나였다. 누군가가 이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이성민은 멈칫
- 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재빠르게 눈을 움직여 청년의 옷차림
- 을 살펴보았다. 청년은 무복을 입었다. 말투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청년은 무림인이었다. 이성민은 청년의 허리
- 에 걸린 검을 힐긋 보면서 대답했다.
- “네?”
- “소협은 무림인이지요?”
-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저 청년은 이 세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잠깐
- 동안 고민했다.
- 이성민은 노 클래스다. 무공을 익히고 사용하고는 있지만, 상태창에서 이성민의 직업란은 노 클래스로 표시되어 있
- 다. 그 외에 새로운 직업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문파나 길드 같은 곳에 가입해야 한다.
- 지금의 이성민은 아직 문파나 길드 같은 곳에 가입하지 않았다.
- “네.”
- 하지만 이성민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노 클래스가 무공을 익히고 내공의 양도 제법 된다는 것이 말이 안 되
- 기 때문이다. 위지호연에게 이미 한 번 지적당했으니,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조심해 둘 생각이었다.
- “오오, 역시 그렇군. 경신법이 능숙한 듯 하여 눈 여겨 보았었소. 혹 괜찮으다면, 어느 문파에서 수학하였는지
- 들을 수 있겠소이까?”
- 청년이 반색하면서 물었다. 자연스럽게 칭찬을 하면서 탐색을 내포한 질문이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 대답했다.
- “그것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이 중원 무림이 아니라고 한 들, 제가 수학한 문파에 대해서 함부로는 발설
-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이성민은 살짝 굳은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런 시선을 보냈다.
- 이성민의 말에 청년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 “그렇군. 내가 너무 무례한 질문을 한 것 같소.”
- 청년은 그렇게 말하면서 포권을 취했다.
- “내 이름은 운희룡이라 하오. 중원에 있었을 적에는 난파검難破劍이라는 별호로 불렸지.”
-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별호는 없습니다.”
- “그렇소? 소협의 무공은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준수한 편인데…”
- “가문에서 나가본 적이 없기에…”
- 이성먼이 말끝을 흐렸다. 전생에 보고 들은 경험 덕에 무림인 흉내는 어느 정도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 정도의 수준이다. 너무 깊은 이야기로 가자면 금세 밑천이 드러날 것이다.
- “그런데. 난파검 대협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 “하하! 대협이라니. 그리 불릴 만큼 대단한 놈도 아니외다. 그냥 난파검이라 불러주면 족하오.”
- 난파검이고 뭐고, 이렇게 띄워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운희룡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 “다름이 아니오라, 혹 괜찮다면 소협의 도움을 받고 싶어 말을 걸게 되었소.”
- “제 도움을?”
- “흐음, 그러니까…”
- 운희룡은 턱을 어루만지면서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뒤에, 운희룡이 말을 이었다.
- 이런 저런 잡설이 붙기는 했지만, 운희룡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운희룡은 동료들과 함께 오크 부락을 토벌하는
-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도움이 될 만한 동료를 구하는 중이었다.
- “소협 정도의 실력이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부탁하는 것이오.”
- 운희룡의 목소리에 열정이 실렸다.
- “오크. 그 걸어 다니는 돼지같은 놈들의 부락을 토벌한다면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오. 내 동료 중에는
- 용병 길드에 적을 둔 이도 있는데, 이 일은 용병 길드에서 정식으로 걸린 의뢰라오. 용병 길드 쪽에서 대형 아공
- 간 포켓도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으니 전리품도 넉넉히 챙길 수 있소이다. 또한 의뢰에 성공한다면 보수도 받을 수
- 있고, 그 역시 공평하게 배분할 것이오.”
- 이성민이 관심을 보이자, 운희룡이 직접적으로 설득을 위해 나섰다. 용병 길드에서 내건 오크 부락 토벌 의뢰.
- 대형 아공간 포켓도 지원해 준다는 것을 보면, 제나비스의 용병 길드에서도 이 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는
- 뜻이다.
- “몇 명입니까?”
- “나를 포함해서 셋이오. 자잘한 짐꾼도 있고. 소협이 힘을 보태준다면 넷이 되겠지.”
- “모두 무림인인 겁니까?”
- “나를 포함해서 셋이 무림인이고, 한 명은 마법사라오.”
- “짐꾼이라는 것은…?”
- “노 클래스지. 그들은 별 도움이 안 되오. 하지만 짐꾼으로서는 제법 쓸만 할 것이오.”
- 운희룡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별 도움이 안 된다. 냉혹하다 싶기는 하였지만 정확한 평가였
- 다.
- “…으음…”
- 이성민은 고민했다. 오크 부락 토벌. 이성민 혼자서라면 절대로 도전하지 않을 일이지만, 무림인 셋에 마법사 하
- 나라면 성공 가능성은 충분했다.
- 제나비스의 오크는 그리 강하지 않다. 다른 지역의 오크들은 삼류나 이류의 무인과 대적이 가능할 만큼 강력한 개
- 체도 몇 있기는 하지만, 제나비스의 오크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보다는 육체적으로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 사람 죽이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무림인의 상대는 아니다.
- 거기에 마법사가 더해진다면?
- 이성민은 마법을 직접 배운 적은 없었지만, 마법이 갖는 강력함은 잘 알고 있었다. 급이 낮은 마법사라고 하여도
- 충분한 시간과 조건만 갖춰진다면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무림인 셋이 앞을 막아주는 상황에서, 마법사가
- 제대로 힘을 쓴다면 오크 부락 쯤은 어렵잖게 쓸어버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 “보상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용병 길드는 이 일의 보상으로 200만 에르를 약속했소.”
- 전생에 용병이었기에, 이성민은 용병 길드의 생리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모든 도시에는 용병 길드가
- 존재하고 있다. 제나비스의 용병 길드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다른 도시의 용병 길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하
- 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나비스 근방에 출현하는 몬스터는 개체적으로 나약하고, 제나비스에 처음 도
- 착하는 이계인들은 제나비스에 오랫동안 체류하지 않는다. 제나비스에 몇 년이고 체류하는 것은 대부분이 노 클래스
- 뿐이다.
- 그렇다 보니 용병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제나비스의 용병 길드에서 오크 부락 토벌로 200만 에르
- 를 걸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본다면 200만 에르는 그리 많은 돈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용병
- 길드라는 것이 그렇다.
- 언제나 그들이 내거는 보수는 짜다.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짜단 말이다.
- ‘그래도 전리품을 매각한다면…’
- 오크 놈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 중에 건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지도 모르겠지만, 오크라는 것은 고블린과 마
- 찬가지로 마법 재료로서 쓰임새가 꽤 많은 놈들이다. 부락 하나의 전리품을 모두 처분한다면, 용병 길드에서의 수
- 수료를 때고서라도 150만 에르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총 보수 350만 에르. 배분 비율이 어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성민에게 못해도 50만 에르 이상은 떨어질 것
- 이다.
- "…배분 비율에 대해 아십니까?"
- "인원수 대로 나눌 것이오."
- 운희룡이 대답했다. 이성민은 다시 침묵했다. 50만 에르. 제나비스에서 이 정도로 굵직한 의뢰를 노 클래스로 맞
- 닥트리기는 힘들다. 어떻게 해야할까. 위험성은 있다. 그 위험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들을 믿을 수 있는가에
- 대한 것이었고, 이성민은 생면부지의 타인인 운희룡을 믿을 생각은 없었다.
- 이것을 기회로 봐야 할까, 위험으로 봐야 할까.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가?
- “좋습니다.”
- 이리 저리 수지타산을 해보던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사실 당장 돈이 급한 것은 아니다. 매일 숲으로 들어
- 가서 하루를 살아가는 최소 자금 이상은 벌어들이고 있고, 잡다한 부수입도 챙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두고
-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돈은 많을수록 좋다. 그것은 전생이고 현생이고 간에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였다. 이성민은 언제
- 까지고 제나비스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10달 뒤에 있는 노 클래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해서, 성련단
- 을 받는다면 곧바로 제나비스를 떠날 생각이었다.
- 여행자금을 모아둬야 한다. 제나비스를 떠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장비도 마련해야 할 테니 목돈을 모을 기회가 있다
- 면 챙겨 둘 생각이었다.
- ‘게다가 지금의 나는 용병 길드에 가입할 수는 없으니까.’
- 노 클래스 파이트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노 클래스 외에 직업은 갖춰선 안 된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일단 용병
- 길드에 들어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노 클래스 파이트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이성민은 용병이 될 수는 없었다.
- “잘 생각했소이다.”
- 이성민의 대답에 운희룡의 얼굴이 환해졌다.
-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것이 좋다 생각하는데, 어떻소이까? 이미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소.”
- “지금 바로 가자는 말입니까?”
- 이성민이 놀란 얼굴을 하고서 되물었다.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희룡은 이성민의 물
- 음에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 “하하! 그래봤자 두 발로 걷는 돼지들일 뿐. 소협이 걱정할 것은 없소.”
- 그런 주제에 왜 도와달라고 한 건데? 이성민은 운희룡이 내비치는 자신감이 조금 탐탁치 않게 여겨지긴 했지만,
-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버리고 튀어야지.’
- 제 한 몸 뺄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 이성민은 운희룡을 따라 성문 밖으로 나왔다. 성문 밖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의 도중에, 운희룡의 동료들이 기다
- 리고 있었다.
- “너무 어린 것 아니오?”
- 그렇게 말하는 놈은 얼굴은 삭았는데 키가 작았다. 이성민과 비교해도 머리 반 개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 “경신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소. 이 소협은 나이는 어려도 출중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오
- .”
- 운희룡이 두둔하고 나섰다. 이성민은 슬쩍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취했다.
-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별호는 없습니다.”
- “…흠. 소원후小猿? 도상량이라고 한다.”
- 작은 원숭이라니. 도상량은 참 별호처럼 생긴 놈이었다.
- “흑비도黑匕刀 왕패라고 한다.”
- 이어 소개한 놈은 새카만 무복을 입은 놈이었다. 무기는 따로 들지 않았는데, 별호를 보아 비도 같은 암기를 주
- 로 쓰는 모양이었다.
- “레니르라고 해. 벨라스 학파에서 배웠는데… 어차피 넌 벨라스 학파가 뭔지도 모르겠지?”
- 자주색 로브를 입은 여자 마법사가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모른다. 무공이라는 것은 구파일방이니 하며 다른
- 무림 출신이어도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이 있곤 하는데, 마법 학파라는 것은 종류가 너무 다양했기 때문이다.
- “…저 쪽 분들은?”
- 이성민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서있는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 “저들은 그저 짐꾼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 운희룡이 대답했다. 그들은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척 보기에도 이성민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에리아
- 에서는 나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 에리아에서는 힘 있는 놈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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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 의뢰-2
- 용병이라는 것은 기회주의자다. 선택지를 앞에 두고서 어떤 선택을 해야 더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가. 용병의
- 가치관이라는 것은 그런 식이다.
- 또한, 그들은 동료를 믿지 않는다. 의뢰의 보수라는 것은 생존자의 수에 따라 정산 비율이 바뀌는데, 그 보수를
- 독점하기 위해 상대를 죽인다는 생각을 가진 용병은 한 둘이 아니다.
- 용병 출신인 이성민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운희룡, 왕패, 도상량, 레니르. 토벌 의뢰를 제안한 일행. 이성
- 민은 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제나비스에서 맞닥트리기 힘든 보수에 끌려 함께 오크 부락 토벌을 하기로는 하였지
- 만, 그렇다고 이성민이 저들을 동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 '틈이 보인다면.'
- 혹은 저들의 태도가 돌변한다면.
- 어느 쪽이든 배신할 수 있다. 그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넷, 이성민은 하나. 머릿수의 차이는 틀림
- 없는 사실이고, 저것은 이성민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 넣는다. 이성민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 그럼에도 따라 나선 것은.
- 오크의 부락은 숲 속 깊이 들어가야 나온다. 놈들의 부락은 고블린의 부락보다 더욱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숲
- 에 들어가고서 반나절은 걸어야 한다.
- 사실 신법을 쓴다면 보다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겠지만, 운희룡이나 도상량, 왕패는 신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 이유는 이성민도 짐작이 가능했다.
- 저들은 그리 뛰어난 고수가 아니다. 일행의 리더 격을 맡은 운희룡의 수준이 가장 나았지만, 그런 운희룡도 이류
- 수준을 간신히 웃도는 정도로 보였다. 내공의 양도 넉넉하지 않고, 복잡한 숲 속을 신법으로 달리는 것도 그리
- 능하지 않다.
- 그렇기에 일행은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다. 전투를 위한 내공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 그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이성민은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일행의 리더격으로 행동하는 것이 운희룡이라는
- 것도 그런 정보 중 하나였다.
- 그 외의 정보. 이 의뢰를 물고 온 용병 길드의 소속원은 소원후 도상량이다. 도상량의 용병 등급까지는 알 수 없
- 었지만, 이성민은 도상량이 D급에서 E급 정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류의 수준으로 받을 수 있는 등급은 저 정
- 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 전생의 이성민 역시 이류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C급 용병이었다. 이성민이 C급 용병이 될 수 있었던
- 것은 순수한 실력 때문이 아닌 경력 때문이었다. 경력이 일천한 도상량은 높아봐야 D급일 것이다.
- 벨라스 학파의 마법사인 레니르 역시 용병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도상량과 터놓고 말을 하는 것을 보아, 아마
- 둘은 같은 등급인 모양이었다.
- 흑비도 왕패는 말이 적은 놈이었다. 그는 첫 소개 이후로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그리 많은 정보를 캘 수는 없었
- 다. 하지만 리더인 운희룡이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왕패와 운희룡은 이번 일 이전부터 면식이 있어 보였다.
- 짐꾼으로 따라 온 노 클래스 둘.
- 그들은 자기 소개를 하지도 않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뒤를 따라 걷기만 했다. 짐꾼이라
- 는 이름에 맞게 그들은 등 뒤에 큼직한 배낭을 메고 있었다. 아공간 포켓에 채 담지 못한 전리품들을 담기 위한
- 가방처럼 보였다.
- “허억… 헉…”
- “크흑! 후욱!”
- 등 뒤에서 노 클래스들이 헉헉거린다. 당연한 일이었다. 숲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면도 고르지 못 하
- 고 나무 그늘 사이로 내려오는 태양빛은 뜨겁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도 땀을 흘리는데, 커다란 가방까지 메고
- 있는 노 클래스들이 버틸리는 만무했다.
-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뒤를 힐긋 돌아보면서 그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너
- 무 뒤로 쳐진다면 윽박을 질러댈 뿐이다.
- “조금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 결국에 이성민이 그런 의견을 냈다.
- “저들을 신경썼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쳐지게 될 겁니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저희도 꽤 오래 걸어 지치게 된
-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도 그렇군.”
- 운희룡이 동의했다. 그늘 가 쪽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노 클래스들이 근처에 주저 앉아 호흡을 골
- 랐다.
- “둔한 것들.”
- 도상량이 투덜거렸다. 그런 도상량의 곁에는 레니르가 무릎을 모으고서 앉았다. 레니르는 로브의 안쪽에서 자그마한
-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만한 크기의 그것은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아공간 포켓과 비슷한 사이즈였다.
- ‘저게 이번에 용병단에서 지원해 주었다는 아공간 포켓인가?’
- 대형 아공간 포켓이라고 했다. 크기는 작아도, 저 포켓에 걸려 있는 공간 왜곡 마법은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것
- 과 비교가 안 될 것이다.
- 레니르가 아공간 포켓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내 나누어줬고, 노 클래스들은 알아서 챙겨 온 육포 따위를 씹었다
- .
- 이성민은 레니르에게 받은 빵을 뜯었다. 빵은 방금 구운 것처럼 따뜻하고 폭신했다. 노 클래스들이 씹고 있는 건
- 조한 육포와는 비교가 안 된다.
- “…저들도 용병 길드 소속입니까?”
- “응?”
- 레니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성민은 레니르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시선으로 노 클래스들을 가리켰다
- .
- “아아. 쟤들? 응, 맞아. 용병 길드 소속이지만 용병은 아니지만.”
- 레니르가 대답해 주었다.
- 견습 용병.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단독으로 의뢰를 수행할 수 없는 용병을 말한다. 사실 용병이라고 할 수도 없
- 다. 견습 용병에게는 용병 등급도 주어지지 않고, 용병 길드의 소속원으로서 받을 수 있는 혜택도 거의 없다.
- 견습 용병의 존재 의의는, 쉽게 말하자면 용병 길드에서 쉽고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일꾼이라는 것에 있다.
- 이런 의뢰에서 짐꾼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길드 내에서 잡일을 시키기도 한다.
- ‘용병 길드에 지원했지만 등급을 받을 실력이 안 되었겠지. 그래서 견습 용병이 된 거야.’
- 등급이 낮은 용병은 길드 내에서 대우가 좋지 않다. 애초에 등급을 갖지 않은 견습 용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 시도 때도 없이 욕을 처먹고 구타와 갈굼을 받는다.
- 전생에서 이성민은 최하 등급인 G급 용병에서 시작했다. 그런데도 구타와 갈굼을 일상처럼 받았다. 용병들의 거친
- 말투와 손찌검은 이성민이 매일매일 자살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지독했다.
- G급 용병인 이성민도 그런 갈굼을 받았는데, 등급조차 갖지 않은 견습 용병이 받는 압박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 이성민은 혀를 차면서 두 명의 견습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 견습 용병이 이래저래 열악한 직업이기는 하여도, 최소한의 숙식은 보장된다. 아마 저들도 그것을 바라고서 견습
- 용병이 된 것이리라.
- “부락의 오크는 몇 마리 정도입니까?”
- “대충 50마리 쯤.”
- 도상량이 대답했다. 본래 오크와 고블린은 번식력이 굉장히 강한 놈들이다. 일반적인 오크와 고블린의 부락에는 몇
- 백 마리가 뒤엉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 하지만 제나비스의 오크와 고블린 부락은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다. 많아봐야 50마리 선이다.
-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오크란 놈들은 멍청하고 둔하거든.”
- 도상량이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성민은 저런 과한 자신감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저렇게 처음부터 자신감에
- 차 있는 놈들 중 실속이 있는 놈은 그리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휴식을 끝내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곳부터는 오크의 영역이다. 이성민도 몇 번인가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
- 다.
- “정면으로 갈 겁니까?”
- “그럴 생각이오만.”
- 운희룡이 내뱉은 대답을 듣고서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희룡의 대답도 그러했지만, 용병 길드 소속이라는
- 도상량이나 레니르도 그런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 ‘미친새끼들. 뭔 깡이야?’
- “…너무 무모하지 않겠소이까?”
- 이성민이 슬며시 의견을 냈다. 마음 같아서는 쌍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무엇이 무모하다는 것이오?”
- “한 마리의 오크가 여러분보다 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 그것은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놈들의 숫자는 50이나
- 되지 않습니까?”
- 이성민은 최대한 말씨를 고르게 하면서 다른 넷을 설득하려 들었다.
- “놈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면서 인해전술을 펼친다면 저희는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 “소협은 신중하군.”
- 운희룡이 웃으면서 말했다. 칭찬하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는 크게
-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 “오크라는 놈들이 숫자가 많기는 해도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리 대단하지 못하다. 놈들은 무공을 쓸 수 있는 것도
- 아니고 내공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 “맞아. 앞에서 시간만 끌어 준다면 내 마법으로 다 잡을 수 있어.”
- 병신들. 저따위 대가리를 가지고 용병이라니. 오크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도상량은 뭐 그렇다고 쳐도, 레니르가
- 저렇게 말하는 것은 제법 의외였다. 아무래도 레니르는 실전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고, 학파 내에서 마법만 익힌
- 경험 부족의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 “저는 오크와 제법 많이 싸워 보았습니다. 도상량 대협이 말한 것처럼 오크는 그리 대단한 놈들이 아닙니다. 하
- 지만 놈들은 무리를 짓고 있고 무식한 만큼 용감합니다. 놈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면 최악의 사태를 겪게 될 지도
- 모릅니다.”
- 이성민은 그렇게 내뱉고 나서 레니르를 보았다.
- “만약 우리가 돌파 된다면 레니르님도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너 뒤진다고. 이성민은 그런 뉘앙스를 내고 싶었던 것을 최대한 참았다.
- “…으음.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 운희룡이 슬며시 운을 띄웠다. 도상량과 레니르는 경험 부족이고, 운희룡이나 왕패는 오크라는 몬스터에게 그리 익
- 숙하지 않다. 결국 경험이 가장 많은 이성민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 “…우선, 레니르님. 제 견식이 일천해서 그러온데, 벨라스 학파의 마법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 “…벨라스 학파는 바람 마법을 전문적으로 다뤄. 그렇기는 한데… 내가 쓸 줄 아는 마법 종류가 그리 많지는 않거
- 든?”
- 레니르가 민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역시나. 이성민은 내심 납득했다. 체격도 좋지 않은 레니르가 무림
- 인들이 숲을 가로지르는 속도를 쫒아왔다. 다 큰 성인 남자인 견습 용병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
- 쉬는데, 레니르는 멀쩡했다.
- 레니르가 바람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힌 마법사라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마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쉽게 처죽일
- 수 있는 만큼 편리한 기술이다.
- “…좋습니다.”
- 이성민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성민이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이 이성민을 바라
- 보았다.
- “오크들을 나오게 합시다.”
- 여러 가지 방법을 떠올려 보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반드시 이리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성민이 괜히
- G급에서 C급 용병까지 올라갔던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용병 생활을 한 경험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 “오크는 자기 영역에 대한 개념이 명확한 몬스터입니다. 우선… 레니르님이 놈들의 부락 근처에서 마법을 써서,
- 놈들의 마을 쪽으로 ‘냄새’를 날려 주십시오.”
- “냄새?”
- “네. 인간의 체취 말입니다. 인간의 체취를 맡게 된다면 순찰병들이 냄새의 근원을 사냥하기 위해 마을을 나오게
- 될 겁니다.”
- “그럼 내가 위험한 것 아냐?”
- 레니르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내뱉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듣고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 “몇몇이 매복하고 있다가 레니르님 쪽으로 가는 오크들을 덮칠 겁니다. 그 사이에 레니르님은 공격 마법을 준비해
- 서 오크들과의 전투를 도와주십시오.”
- “그것으로 끝이오?”
- “아닙니다. 저희는 두 번에 걸쳐 오크들을 마을에서 끌어낼 겁니다.”
- 이성민은 레니르와 도상량을 바라보았다.
- “신호탄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이것 말하는 건가?”
- 도상량이 품 안에서 손바닥만한 막대기를 꺼냈다. 용병 길드에서 용병들에게 제공하는 신호탄이다. 막대기의 위를
- 덮은 뚜껑을 뜯어내고 안쪽과 마찰시킨다면 불이 붙어, 붉은색 연기를 뿜어낸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타겟을 발견했
- 을 때에 사용하는 물건이다.
- “놈들의 마을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사용할 겁니다. 연기가 뿜어지는 것을 확인한다면 오크들이 경계하여 마을
- 밖으로 나올 겁니다. 여러분은 오크의 순찰부대가 숲 밖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레니르님과 함께 놈들을
- 끌어내 주십시오.”
- “소협 혼자서 가겠다는 것이오?”
- “교전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곧 합류할 테니까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 “…으음…”
- 운희룡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그는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 “두 번에 걸쳐 오크들을 끌어낸다면, 우리도 둘로 나누는 것이 낫겠지. 소협. 내가 소협과 함께 가겠소.”
- “…그렇다면 저야 감사하지요.”
- 이성민은 운희룡의 배려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이성민과 운희룡, 그리고 짐꾼 역할
- 을 한 견습 용병 하나가 신호탄을 사용하여 오크들을 끌어낸다. 레니르와 도상량, 왕패, 다른 견습 용병이 마을
- 근처에서 오크들을 끌어낸다.
- “자, 우리도 서두릅시다.”
- 운희룡이 도상량에게서 신호탄을 받고서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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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 의뢰-3
- “당신. 이름이 뭡니까?”
- 운희룡과 함께 이동하던 중에, 이성민은 뒤를 따라오는 견습 용병을 향해 질문했다.
- 반나절 정도 함께 행동하고 있었지만, 이성민은 저 견습 용병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했다. 그나마 들은 목소리
- 조차 지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고작이었다.
- “예? 저… 말입니까?”
- 견습 용병이 화들짝 놀라 이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뻘뻘 흘린 땀과 흙먼지 따위로 굉장히 지저분했다.
- 그 지저분함 너머로 잔주름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라기 보다는 고생의 흔적과 같은 잔주름이었다.
- “당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 이성민이 되물었다. 운희룡은 견습 용병에게 말을 거는 이성민을 힐긋 보기는 했지만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 성민은 머뭇거리는 견습 용병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 “이름 밝히는 것이 뭐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까?”
- “아… 죄송합니다.”
- “죄송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용병 길드 소속도 아니고.”
- 잔뜩 기가 죽어 있는 것을 보니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운희룡이나 레니르, 둘 중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갈
- 궈 댄 모양이다. 어쩌면 둘이 함께 했을 수도 있고. 사실 둘 뿐만이 아니라, 용병 길드에서도 주구장창 갈굼을
- 받았을 것이다.
- “그래서. 당신 이름이 대체 뭡니까?”
- “브… 브라스라고 합니다.”
- 브라스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브라스가 보이는 소극적인 모습에 짧게 혀를 찼다. 그리 보기 좋
- 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G급 용병이던 때의 이성민도 저랬기 때문이다.
- “브라스. 솔직하게 말해서, 오크들이 몰려 올 때 당신을 보호해 줄 자신은 없습니다.”
- 그 말에 브라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선택하십시오. 도망치던가, 아니면 따라오던가.”
- 이성민이 논하는 것은 현실이었다. 현재 이성민의 무위는 이류에서 일류 사이를 오가고 있다. 오크들과의 싸움에서
- 제 몸 하나를 뺄 자신은 있었지만, 브라스를 보호하면서 싸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 ‘운희룡이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 운희룡은 이성민과 브라스의 대화에는 아예 신경을 끄고 있었다. 이성민이 느낀 운희룡에 대한 첫인상은 친절하고
- 호의적이었지만, 그런 첫인상이라는 것은 으레 상대적인 법이다. 이성민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였다고 해서,
- 운희룡이라는 인간이 친절하고 호의적인 인간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 “도망… 치라니…”
- 브라스가 머뭇거렸다. 선택하랍시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브라스가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
- 다. 물론, 브라스가 도망친다고 해도 이성민은 브라스를 잡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도망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숲 안에서 사는 것은 말도 안 되고, 결국에는 제노미아로 돌아가야 한다. 문
- 제는 브라스에게 제노미아로 돌아갈 수 있을 만한 실력도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운이 좋아 돌아간다고 해도, 용
- 병 길드에는 또 뭐라고 변명할 텐가?
- “도망… 칠 수는 없습니다.”
- 당연히 그렇겠지. 무사히 제나비스에 돌아간다고 해도 용병 길드에서 온갖 구박을 받을 테니까. 이성민이 브라스의
- 선택을 알면서도 선택하라고 권한 것은, “그렇다면. 죽게 되어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 스스로에 대한 위안거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따라오겠다고 말한 것은 브라스다. 이성민은 선택의
- 자유를 주었다. 비록, 답이 뻔한 선택문이었다고는 하여도.
- 운이 좋았다. 도중에 오크 순찰병을 마주치지 않았다. 운희룡과 이성민, 브라스는 오크 마을과 제법 떨어진 곳에
- 도착했다. 이성민은 도상량에게 받아 온 신호탄을 꺼냈다.
- 이성민도 전생에서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았던 것이다. 드넓은 사냥터에서 흩어지게 되었을 때, 신호탄은 굉장히 유
- 용하게 사용된다. 탐색하던 것을 발견하였을 때, 몬스터를 끌어낼 때, 도움을 요청할 때, 그리고.
- 죽어갈 때.
- 죽어갈 때 신호탄을 터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체를 수습해 달라는 의미다. 이성민의 경우에는 죽어가던 중에
- 신호탄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발견되지 않은 던전에 들
- 어가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신호탄을 쏴도 누구 하나 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 ‘괜히 다른 용병이 오는 것은 아니겠지.’
- 그렇게까지 인격적인 놈은 없을 것 같았다. 같은 동료로 시작한 것이라면 모를까, 넓은 숲에서 누군가가 쏘아낸
- 신호탄을 보고서 도와주러 올 만큼 용병이란 족속들은 인격자가 아니다.
- 새빨간 연기가 위로 뿜어졌다.
- “과연 오크 놈들이 이곳으로 올 것 같소이까?”
- 운희룡이 물었다. 솟구치는 연기를 보고 있던 이성민이 머리를 돌려 운희룡을 보았다.
- “옵… 올 겁니다.”
- 확언하려다가 애매한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성민이야 전생의 경험을 통해 오크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
- 었지만, 운희룡의 눈에 비춰지는 이성민은 다를 테니까.
- 오크는 영역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다. 제 영역 안에서 이상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그를 확인하기 위해 온다. 놈들
- 은 사고방식이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쏘아내는 신호탄이 놈들을 꾀어내려는 함정이라는 생각 따위는
- 하지 않을 것이다.
- ‘인원만 충분하다면 함정이라도 파둘 텐데.’
- 셋이서 오크들을 곤란하게 만들 만한 함정을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한참이 걸릴 것이
- 고, 그렇게 늑장을 부리다가 밤이라도 되어버린다면 진퇴양난에 빠져 버린다.
- 만약 시간 적인 여유가 제법 있어서 함정을 파는 것에 성공한다고 치자. 그리 함으로서 발생한 체력 손실은 어찌
- 할 텐가?
- “숨읍시다.”
- 붉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것을 확인하고서, 이성민이 말했다. 이성민은 품 안에서 아공간 포켓을 꺼냈다.
- “그건…?”
- 운희룡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성민도 아공간 포켓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
- 다.
- “우연히 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해 주고서 아공간 포켓에서 큼직한 물통을 꺼냈다. 그리고는 흙바닥 위에 물을 콸콸 부었다.
- 충분히 물과 섞인 흙이 진흙이 되었다.
-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 “진흙을 몸에 발라 냄새를 가릴 겁니다.”
- “오오. 좋은 생각이오.”
- 운희룡이 탄성을 터트렸다. 이성민은 먼저 진흙탕 위를 뒹굴어 전신에 진흙을 뭍혔다. 그 뒤에는 브라스가 진흙탕
- 위를 뒹굴었고, 마지막으로는 운희룡이 전신에 진흙을 펴발랐다.
- “소협은 나이와는 다르게 굉장히 경험이 많은 듯 하오.”
-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 “훌륭한 스승님이시로군.”
- 운희룡은 이성민이 품 안에 넣은 아공간 포켓을 한 번 힐긋거리고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운희룡의 그런 시선을 기
- 억해 두었다.
- 바닥에 납작 엎드린 브라스의 몸이 바르르 떨린다. 겁에 질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성민은 그런 브라스를 무시하고
- 서 아공간 포켓에서 꺼낸 창을 조립해 옆에 내려 놓았다.
- “소협은 창을 쓰는 것이오?”
- “예.”
- “그렇군.”
- 운희룡은 그 질문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이성민은 경계심을 끌어 올리고서 호흡을 낮추었다. 이성
- 민과 운희룡의 사이에는 브라스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이성민의 의도대로였다.
- 이성민은 운희룡을 믿지 않는다.
- 운희룡이 아공간 포켓을 보던 시선은 이성민이 잘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탐욕. 운희룡의 시선에는 진한 탐욕이
- 담겨 있었다. 저런 눈을 가진 놈을 믿어서는 안 된다.
- “크륵!”
- 소리가 들린다.
- 십여 마리의 오크들이 경계를 갖추고서 신호탄의 연기가 뿜어지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수풀 너머에서 엎
- 드려 있는 이성민은 다가오는 오크들의 장비를 확인했다. 다들 체격이 건장하고 조악하나마 무기를 갖추고 있다.
- 부락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젊은 오크들이다.
- ‘부락의 오크는 50마리 정도라고 했었지. 절반은 여자와 늙고 어린 놈들이라고 한다면… 꽤 많이들 나왔군.’
- 오크는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사회다. 여성 오크는 전사가 아닌 씨받이의 역할이다. 여성 오크들은 싸움도 제대로
- 하지 못한다.
- 늙은 오크들도 마찬가지다. 오크는 빠르게 성장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젊은 육체를 유지하지만, 그 뒤에는 빠르게
- 노화가 찾아온다. 오크들에게 노인공경 따위는 없다. 효성孝誠도 없다. 늙은 오크는 마을의 머릿수만 채우는 잉여
- 인력이면서, 가혹한 상황에서 쓰이는 비상식량이다.
- 오크는 같은 오크도 포식하는 야만적인 종족이다.
- ‘빈집털이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마을에 여성 오크와 늙은 오크만 남아 있어도 일이 굉장히 쉬울 거야.’
- 젊은 오크들이 십여 마리나 나온 만큼 부담이 커지기는 했지만, 일단 끌어냈으니 작전은 성공이다. 용병 길드의
- 의뢰는 오크 부락의 전멸이다.
- “가죠.”
- “잠깐.”
- 운희룡이 이성민을 제지했다.
- “짐꾼을 먼저 내보내는 것이 어떻소?”
- “…예?”
- “짐꾼을 먼저 내보내 시선을 끌고, 그 뒤에 우리가 덮치는 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 운희룡의 제안은 인정은 없었어도 이성적이었다. 브라스를 내보낸다면, 당연히 오크들은 브라스를 죽여버릴 것이다.
- 그러는 와중에 놈들의 신경이 분산될 것이고, 이성민과 운희룡이 그 틈을 덮친다면 놈들을 빠르게 전멸시킬 수 있
- 을 것이다.
- 브라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브라스의 입술이 덜덜 떨린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브라스는
-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다가 온 운희룡의 손이 브라스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 “…”
- 이성민은 침묵했다. 그는 이 상황에서 브라스의 목숨을 챙겨 줄 의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 고 해서 브라스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것에 무작정 동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결국에는 이성민도 노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 “이쪽이 효율적이잖소.”
- “차라리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 이성민이 말했다. 그 말에 브라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고, 운희룡은 이성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 시선을 받으면서 이성민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운희룡이 결코 호인好人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그리 하시오.”
- 운희룡이 말했다. 이성민은 브라스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호흡을 삼켰다. 오크 전사의 숫자는 열 셋.
- 할 수 있을까?
- 해야 한다.
- 괜한 오지랖, 괜한 선심. 아니, 이 경우에는 동정인가. 뭐 거창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친분이 있는 것도
- 아니다. 같은 노 클래스니까, 그것이 전부다.
- 지켜 줄 의리는 없다.
- 말은 그렇게 했었어도, 만약에 싸우던 도중에 브라스가 오크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이성민은 브라스를 도와주었을
- 것이다.
- 이성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 이성민이 수풀을 뚫고 뛰쳐나간다. 자하신공이 내공을 끓인다. 단전 속의 내공이 부글부글 끓다가 전신으로 퍼져
- 나간다. 사실은 이렇다. 이성민이 위지호연에게 내공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브라스를 도우려 들지 않았을 것이
- 다. 이성민이 베풀 수 있는 호의라는 것은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 선에서 베푸는 호의.
- 호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먼저 나서고, 먼저 실력을 보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
- 오크들이 수풀 너머에서 튀어 나온 이성민을 돌아 보았을 때, 일뢰주법을 펼친 이성민은 이미 가까운 오크의 목을
- 창으로 꿰뚫고 있었다. 오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이성민은 박힌 창대를 팔의 움직임만으로 회수하
- 고서, 근처에 있던 오크의 머리를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빠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두개골이 박살났다
- .
- “퀴에엑!”
- “쿠엑! 쿠아악!”
- 오크들이 괴성을 지른다. 이성민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서 자세를 잡았다. 오크들은 대뜸 튀어나온 이성민을 향
- 해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아무리 놈들이 지능이 모자라 멍청하다고는 해도,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이성민이 순
- 식간에 오크 둘을 죽인 이성민에게 무턱대고 덤빌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
- 오크들이 슬금거리며 다가온다. 선두에 선 놈들은 젊고 용맹한 놈들이었다. 놈들은 이성민에 대한 살의를내비치면서
- 송곳니를 내보이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꽉 쥔 무기가 위협적으로 앞으로 내밀어진다.
- 이성민은 창을 양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창은 길이가 길다. 길이가 길다는 것은, 충분한 거리가 있다면 상대를
-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그것이 창술의 기본이다. 이 거리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유지하는가
- .
- 창법의 묘리는 간단하다. 상대가 거리를 파고 들어오기 전에 상대를 죽이면 된다.
- 그것은 위지호연의 설명이었다. 말은 쉽지만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위지호연이 간단하다, 라고 말한 것은 이성
- 민에게 있어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성민과 위지호연의 재능은 하늘과 땅 차이다.
- “크아아!”
- 오크가 뛰쳐 나간다. 이성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창을 잡은 이성민의 양 팔에 힘이 들어갔다.
- 추혼창법 삼식三式, 분뢰격分雷擊.
- 퍼퍼퍽! 달려들던 오크 세 마리의 가슴을 창이 꿰뚫는다. 근력이 부족했다. 아니, 타이밍인가. 내공의 부족함이
- 라기보다는 육체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가슴은 꿰뚫고 회수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마지막 한 놈의 가슴
- 은 완전히 꿰뚫지 못했다.
- '그것'을 의도했다. 미숙한 창법. 그 의도를 내비치는 상대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운희룡이었다. 펼친 초식에
- 따라 무공의 고하를 확인하게끔 보여준 것이다. 그것으로 운희룡에게 '인상'을 남겨 준다.
- 그것을 활용할 기회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이성민은 어느 쪽이든 좋았다.
- 추혼창법의 일식, 일격일살을 펼친다. 창대를 잡은 손을 미끌어 트리면서 몸을 가속시키고, 왼 손바닥으로 창대를
- 후려친다. 빠아악! 반쯤 박혔던 창이 아예 오크의 몸을 꿰뚫었다.
- ‘다섯 죽였어. 남은 것은…’
- 여덟. 이성민의 등 뒤의 수풀이 흔들렸다.
- “도와주겠소!”
- 운희룡. 저 얄미운 새끼가 호기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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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 의뢰-4
- “소협은 고수로군!”
- 운희룡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면서 운희룡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전투는 끝났다. 열 셋의
- 오크는 이성민과 운희룡에 의해 모조리 도륙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 “감사합니다.”
- 이성민은 창에 달라붙은 살점과 핏물을 떨쳐내면서 대답했다. 수풀 너머에서 몸을 낮춰 숨어 있던 브라스가 엉금엉
- 금 기어 나왔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크들의 시체를 보았고, “우읍!”
- 구토감을 느낀 것인지 입을 틀어막았다. 운희룡은 혀를 끌끌 차면서 브라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 “저리도 심약해서야. 이보게! 토악질은 그만하고 여기 와서 시체나 담게. 그러니까… 눈깔을 뽑아 오라고 하였던
- 가?”
- “예, 예에…”
- 먹은 것을 죄다 게워 낸 브라스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용병 길드에서 지원해 준 대형 아공간 포켓이 있었다면,
- 이곳에서 죽은 오크들을 죄다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공간 포켓은 도상량과 레니르 쪽이 가지고
- 있다.
- 브라스가 단검을 꺼냈다. 그는 덜덜 떨면서 오크들의 시체 쪽으로 다가가더니, 오크의 머리를 붙잡고서 눈깔을 후
- 벼 파내기 시작했다. 오크의 눈깔에 가치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저것은 용병 길드에게 제출할 증거품으로 쓰인
- 다.
- “도와드리겠습니다.”
- 브라스의 손길이 답답했기에, 이성민이 나섰다.
- “혹시 남는 단검 있으십니까?”
- “아, 예. 여기 있습니다.”
- 이성민은 능숙하게 오크의 눈깔을 뽑아냈고, 브라스는 이성민이 뽑아 낸 눈깔들을 급히 받아다가 가방에 집어넣었다
- . 멀찍이서 그를 보고 있던 운희룡이 말을 걸었다.
- “소협은 의義롭구려.”
-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 이성민은 대충 대답하고서 손에 묻은 피를 입은 옷에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도상량과 레니르, 왕패 쪽이 일을 마친다면 신호탄을 쏘아낼 것이다.
- 신호탄이 쏘아졌다.
- “소협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많이 다른 듯 하오. 신중하고, 경험도 많은 듯 해.”
-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 “훌륭한 스승님이오. 아마 소협이 그대로 성장한다면, 분명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오.”
- 신호탄이 쏘아진 곳으로 향하면서, 운희룡과 이성민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성민은 운희룡의 뒤에서 걸었다.
-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하, 느낀 그대로 말하는 것 뿐인데 무엇을. 자, 빨리 갑시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 거리가 제법 되기는 했지만 서두른 덕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연기의 근원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 보인 것은 오크의 시체들이었다. 열댓 마리의 오크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 “그쪽은 어떻게 되었수?”
- 바위에 걸터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던 도상량이 말을 걸었다. 그는 제법 지친 모양새였다. 도상량의 곁에는 레니르
- 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 역시 안색이 창백한 것이 제법 무리를 많이 한 듯 했다.
- “다 잡았소이다.”
- 운희룡이 대답했다. 대답하는 중에, 운희룡은 왕패와 한 번 눈을 맞추었다. 운희룡의 뒤쪽에 선 이성민은 왕패의
-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패가 한쪽 눈을 찡그렸는데, 그것은 마치 무언가의 신호인 것처럼 보였다
- .
- ‘…이것 봐라?’
- 뭔가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저런 방식을 취하는 것은, 운희룡이나 왕패가 전음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 아니기 때문이었다.
- 물론 확신은 없다. 단순히, 왕패가 한쪽 눈이 간지러워서 눈을 찡그린 것일수도 있다.
- 하지만 이성민은 그렇게 쉽게 넘기지는 않았다. 의심은 준비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니까.
- 우선, 관계도를 떠올려 본다. 도상량과 레니르는 같은 용병 길드 소속이다. 오크 토벌의 의뢰를 들고 온 것도 그
- 둘이고, 용병 길드에 소속된 이상 가지고 온 의뢰는 어떻게든 토벌해야 한다.
- 견습 용병인 브라스와 다른 한 명도 처지는 똑같다. 그들 역시 용병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
- 하지만 운희룡과 왕패는? 용병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상량이 의뢰를 함게 수행할
- 동료를 구하고 있던 중에 운희룡과 왕패가 지원했다던 모양이다.
- ‘운희룡과 왕패는 서로 알던 사이야.’
-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심을 확신으로 발전시킬 단계는 아니지만, 이성민은 ‘의심이 간다’는 사실 자체만은
- 확실하게 염두에 두었다. 문제는, 놈들이 무엇을 노리느냐다.
- “자. 그러면 부락에 남은 잔당들을 청소하러 갑시다.”
- 운희룡이 기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상량과 레니르는 아직 피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했지만, 머리를 끄
- 덕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 “막상 싸워보니,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놈들이었어.”
- ‘새끼. 센척 조지네.’
- 도상량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고작 열 댓 마리의 오크들을 상대로 싸웠으면서도 지쳤다
- . 마법사인 레니르가 준비 시간을 갖추고 싸웠는데도 지쳤다는 것을 볼 때,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오크 부락에
- 쳐들어갔다면 몰살 당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하지만 그럴 걱정은 사라졌다. 두 번에 걸쳐 오크 전사들을 끌어낸 덕분에, 오크 부락에는 전사가 거의 남지 않
- 았을 것이다. 늙은 오크와 암컷 오크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고, 그나마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오크
- 들이다.
- “도상량 대협의 말이 맞소이다. 오크란 놈들, 싸워 보니 별 것도 아니었소.”
- 운희룡이 말을 받았다.
- “쓸모 없을 정도로 말이오.”
- 운희룡이 덧붙였다. 그 순간이었다. 양 팔을 아래로 내리고서 걷고 있던 왕패의 손이 위로 치솟았다. 슈왁! 왕패
- 의 소매가 크게 흔들리더니, 시커먼 색의 비도가 쏘아졌다.
- “악!”
- 레니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가슴에 깊이 박힌 비도를 보고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니르
- 가 입을 벌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고, 왈칵 솟은 피가 입에서 흘렀다.
- “어?”
- 레니르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도상량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순간이었다. 운희룡이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을
- 뽑더니 도상량에게 달려들었다.
- 까앙! 운희룡이 휘두른 검과 이성민의 창이 부딪혔다. 졸지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도상량?이 엉거주춤하니 뒤로
- 물러섰고, 이성민은 손아귀에 느껴지는 저항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 “방해하는 군.”
- 운희룡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은 하였지만, 운희룡은 설마 이성민이 이렇게 빨리 대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 했다는 표정이었다.
- ‘이럴 줄 알았다. 씨발새끼.’
- 이성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운희룡과 왕패의 태도가 심상치 않고, 뭔가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 길래 경계하고 있
- 었기에 망정이지, 넋 놓고 있었다면 대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 “우, 운대협. 이게 대체 무슨…?”
- 병신 같은 새끼. 이성민은 등 뒤에서 머뭇거리는 도상량을 한심하게 여겼다. 레니르가 공격당해 뒈졌는데도 아직도
-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 “그냥 편히 가시오.”
- 운희룡이 대답했고, 왕패가 움직였다. 슈왁! 왕패가 던진 비도가 도상량에게 날아갔다. 흠칫 놀란 도상량이 급히
- 몸을 비튼다. 왕패가 던진 비도가 도상량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이놈들!”
- 그제 서야 도상량이 상황을 파악하고서 노성을 터트렸다. 도상량은 맨 손으로 왕패에게 달려들었다. 도상량은 무기
- 를 쓰지 않는다. 권각술과 외공을 함께 익힌 모양이었다.
- “이유라도 물읍시다.”
- 그렇게 묻는 이성민의 태도에는 희미한 여유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도상량과 왕패. 둘의 실력은 고만고만해 보였지
- 만, 지친 도상량과는 다르게 왕패는 꽤 멀쩡해 보였다. 그것은 둘이 사용하는 무공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 . 멀찍이서 비도만 휙휙 던지는 왕패와는 다르게, 도상량은 맨 몸으로 오크에게 덤벼들어 싸웠다. 체력 손실을
- 본다면 도상량이 왕패보다 더 큰 것이 당연했다.
- 하지만 도상량은 왕패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비도를 던지는 것으로 체력을 보존한 왕패. 체력을 잃은 도상
- 량. 그 차이를 만든 것처럼, 둘이 사용하는 무공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 “별 것 아니오.”
- 운희룡이 중얼거렸다. 그는 경계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슬며시 발을 뒤로 끌었다. 운희룡은 이성민과 함께 행동하
- 면서 이성민의 실력을 보았었다. 나이는 어리다고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
- 는 레니르 대신에 이성민을 죽이고 시작하고 싶었다. 그럴 틈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 “저들이 용병 길드에서 지원 받은 아공간 포켓. 그것만 팔아도 수백만 에르를 벌 수 있을 것이오.”
- “그러겠지.”
- 역시 그건가. 처음에는 용병 길드의 의뢰금을 독차지하려는 것인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의뢰를 받
- 은 도상량이나 레니르가 죽는다면, 왕패와 운희룡이 오크 마을을 토벌했다고 용병 길드에 증거를 제시해 봤자 의뢰
- 금은 받을 수 없다.
- 결국, 운희룡과 왕패가 일행의 뒤통수를 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고 한다면 용병 길드에서 지원해 준 대형 아
- 공간 포켓 뿐이다. 운희룡의 말이 맞다. 저 정도 성능의 아공간 포켓이라면, 장물로 팔아 넘겨도 수백만 에르는
-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등신 새끼들. 뻘짓하고 있네.”
- 이성민이 비웃음을 지으면서 이죽거렸다. 대뜸 바뀐 이성민의 말투에 운희룡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뭐?”
- “뻘짓하고 있다고, 개 병신 새끼들아. 용병 길드가 지원한 아공간 포켓을 팔아 넘긴다고? 하하! 무식하면 용감하
- 다더니, 딱 그 꼴이야.”
- 이성민은 진심으로 비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과 동시에, 이성민은 운희룡의 뻘짓에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용병
- 길드의 보수를 나눌 때의 정산 비율이 파격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 “이 븅신 새끼야. 그렇게 쉽게 팔 수 있는 것이라면 용병 길드가 왜 아공간 포켓을 쉽게 지원해 주겠냐? 어?
- 왜 용병들이 지원 받은 아공간 포켓을 들고 안 튀겠어?”
- 전생에서 이성민은 용병이었다. 그렇기에, 용병 길드의 지원품을 들고튀거나 팔아넘기는 것이 얼마나 병신 같은 일
- 인지 잘 알고 있었다.
- “튀면 뒤져. 병신 새끼야.”
- 용병 길드는 호구도 아니고, 병신도 아니다. 대형 아공간 포켓 같은 고가의 물건을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 그것을 ‘반드시’ 회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용병 길드의 지원품은 최상급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다. 들고 도망친다면, 그 즉시 용병 길드의 추적자가
- 붙는다.
- “네 실력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이류. 일류는 넘볼 수도 없지. 아냐? 네 수준이면 용병 길드에서 잘 해봐야
- C급이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네가 그걸 들고튀면. A급 이상의 용병들이 추적자로 붙는다.”
- 용병 길드의 등급은 직관적인 힘의 척도다. 이류 수준의 실력이라면 아무리 뛰어나 봐야 결국에는 이류. C급에
- 머무른다. 간혹 경험이 뛰어난 이류 수준의 용병이 B급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C급
- 이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보통의 B급 용병은 일류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유별나게 실력이 뛰어난 일류의 무인이 A급의 등급을 받는
- 다.
- “S급 용병은 절정고수다. 너 정도의 실력으로 절정 고수의 추격에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푸하하! 팔아넘긴다
- 고? 니미, 지랄하고 있네. 너희는 다음 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숲에서 뒈질거다.”
- “…이 새끼…!”
- 이성민의 이죽거림을 들은 운희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던 경어를 집어 치웠다.
- “왜, 씨발놈아. 팩트로 처 맞으니까 아프지?”
- 꾸욱. 창대를 잡은 이성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악! 운희룡이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는 보법을 밟으면서 이
- 성민과의 거리를 좁히려 들었고,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펄쩍 뛰듯이 뒤로 물러섰다.
- 자하신공의 내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
- 토벌 의뢰-5
- 자동차에 시동을 건 것처럼.
- 쿠르르릉! 이성민의 단전에서 솟구친 자하신공의 내공이 기혈로 퍼져 나간다. 이성민은 눈을 번뜩거리며 운희룡의
- 움직임을 보았다. 운희룡은 이성민이 즉각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 운희룡의 행동이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운희룡과 왕패는
- 레니르를 죽였다.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말 해 봐야 용병 길드를 납득시킬 수
- 는 없다.
- 살인멸구殺人滅口.
- 운희룡과 왕패는 그것을 선택했다. 용병 길드의 추적 마법 때문에 아공간 포켓은 챙길 수 없겠지만, 그래도 잡다
- 한 전리품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것이다.
- 운희룡은 이성민이 사용했던 아공간 포켓을 떠올렸다. 공간 확장 마법의 수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팔아넘긴다면
- 제법 돈이 될 것이다.
- “으아아앗!”
- 등 뒤에서는 왕패와 도상량이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둘 중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이성민과 운희룡 둘 중 하
- 나가 크게 불리해 진다.
- 그것이 운희룡을 초조하게끔 만들었다. 이성민은 몸을 돌리고 있어 도상량과 왕패의 싸움을 보지 못했지만, 운희룡
- 은 그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패는 비도술을 주로 사용하는데, 비도는 암습 같은 것에는 좋아도 저런 식의
- 정면 승부에서는 이점이랄 것이 없다. 쥐고 휘두르려 해도 길이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 게다가 비도라는 것은 한 번 던지면 끝이다. 진정한 비도의 고수들은 던진 비도를 회수하는 제각각의 방법을 가지
- 고 있고, 저런 식의 정면 승부와 근접전에서 사용할 다양한 수법을 가지고 있겠지만. 왕패는 그런 고수가 아니었
- 다. 왕패는 좋게 쳐줘봐야 이류의 실력이다.
- 왕패가 처음 기습에서 도상량을 쓰러트리지 못한 것. 이미 그 순간에 승부가 갈린 것이다. 지금의 왕패가 할 수
- 있는 것은, 운희룡이 얼른 이성민을 죽이고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기대하며 버티는 것 뿐이었다.
- ‘도상량이 유리해.’
-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비도술을 쓰는 놈이 첫 비도를 맞추지 못했다
- 면 이미 끝난 것이다. 절정 이상의 실력을 가진 비도술의 고수라면 모를까. 왕패의 역량이라면 버티는 것이 고작
- 이겠지.
- ‘초조함.’
- 운희룡의 표정을 본다. 짐작만 하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직접 보고 있는 운희룡은 굉장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 마
- 음이 흔들리는 것을 잡지 못한다.
- 그것이 먼저 나서게 만든다.
- “하앗!”
- 운희룡이 덤벼들었다. 거리는 일곱 걸음 남짓. 운희룡이 휘두른 검이 이성민에게 닿기 위해서는 네 걸음은 이동해
- 야 한다.
- 이성민이 전생만큼의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운희룡의 거리 바깥에서 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 성민은 아직 몸이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
- 그렇다고는 해도, ‘창’이라는 병기가 가지는 이점은 취할 수 있다.
- 운희룡의 자세를 본다. 그것에서 운희룡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예측한다. 휘두름. 운희룡의 팔이 붕 들려 옆
- 으로 옮겨지고, 거기서부터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 이성민은 발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창을 쏘아냈다.
- “헛!”
- 운희룡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러선다. 이성민은 기세를 잡은 즉시 재빠르게 창을 잡은 손의 위치를 옮기면서 발을
- 끌었다. 쉬쉬쉭! 이성민에게서 창이 몇 번이고 쏘아졌다.
- 운희룡은 검을 휘두르지 못한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면서 이성민의 공격을 피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성민의
- 창술은 위지호연에게는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는 충분히 먹힌다.
- ‘기교’적인 이야기다. 그 기교를 제하고서도 이성민은 운희룡을 압도할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하신공은 효
- 율좋게, 내공의 폭발을 만들어낸다. 단전에서 폭발한 내공은 기혈을 돌면서 육체에 힘을 불어 넣는다. 그 강인함
- 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공의 정순함과 크기. 본래 이성민의 내공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위지호연 덕분에 개선되었
- 다.
- 까아앙! 운희룡이 급히 휘두른 검이 이성민의 창대와 부딪친다. 운희룡으로서는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것을 타개하
- 기 위해 무리를 한 것이었다. 이성민은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창을 단단히 붙잡았다. 운희룡은 창백한 얼굴을 하
- 고서 급히 이성민에게 뛰어 들었다. 그는 검을 잡은 오른 팔을 앞으로 내밀고서, 이성민에게 찌르기를 감행했다.
- 그 순간에.
- 이성민은 창을 앞으로 쏘아내면서, 양 손의 힘을 풀었다. 힘이 실린 창이 이성민의 손바닥을 빠져나간다. 검을
- 찌르려던 운희룡의 눈이 크게 뜨인다. 그는 설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성민이 창을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 못했기 때문이다.
- 운희룡은 급히 몸을 비틀었다. 창을 앞으로 던지고서 뛰어 든 이성민은 등허리의 단검을 뽑았다.
- 괜히 브라스에게 단검을 빌렸던 것이 아니다. 이성민은 단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진 단검을 사용할 수 없는 이
- 유가 있었다.
- “읏!”
- 운희룡이 상체를 크게 옆으로 기울였다. 이성민이 휘두른 단검은 운희룡의 팔뚝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운희
- 룡은 그 즉시 반격에 나서기 위해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 “…허억!”
- 운희룡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을 잡은 운희룡의 손이 덜덜 떨리더니, 손에 힘이 풀려 검을 놓았다.
- “네… 네놈… 대체 무슨…”
- “독. 병신아.”
- 이성민은 숨을 내뱉고서 대답했다. 등허리의 단검에는 강력한 마비 독을 발라 놓았다. 경지에 오른 내공 고수라면
- 억제할 수 있겠지만, 운희룡의 수준으로는 꿈도 못 꾼다.
- 이성민은 던졌던 창을 주워 들고서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운희룡에게 다가갔다.
- “자… 잠깐… 소협… 제발…”
- “닥쳐.”
- 이성민은 창을 빙글 돌렸다. 빠아악! 내리 찍은 창이 운희룡의 어깨 관절을 박살냈다. 운희룡이 입을 벌려 비명
- 을 질렀다. 이성민은 그런 식으로 운희룡의 양 어깨와 무릎 관절을 박살내고서야 손속을 멈추었다.
- 죽일까 싶기도 하였지만, 일단은 살려두어 용병 길드로 데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뒤에는 용병 길드에서
- 알아서 해줄 것이다.
- “끝났나?”
-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상량이 지친 얼굴로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도상량의 근처에는 왕패가 피떡이 된
-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더니, 그 사이에 도상량이 왕패를 때려
- 죽여 놓은 것이다.
- “예.”
- “…대단하군. 어리다고 무시했었는데… 나보다 강한 것 같아.”
- “겸손이 과하십니다.”
- 이성민은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고, 도상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상량은 우울한 눈으로 레니르의 시체를 바
- 라보았다.
- “…오크 부락은 어찌 할 텐가?”
- “조금 쉬고서 정리하러 갑시다.”
- 이성민이 대답했다.
- “저희 둘 뿐이라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을 오크 전사들은 이미 대부분 죽어버렸으니까요
- .”
- “…그래. 그렇게 하지.”
- 그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도상량은 이성민에게 질려버렸다. 나이가 열 넷이라고 했는데 뭐 저리 냉정하단 말인가.
- 반나절도 안 되는 인연이라고 하였어도, 같이 떠들던 동료 중 한 명이 죽고 둘에게서 배신당했는데.
- “운희룡. 이 새끼는 용병 길드로 데려갈 겁니다.”
- “…그래.”
- “레니르님과 왕패, 저 새끼의 시체는 레니르님이 가지고 있던 아공간 포켓에 넣어두죠. 아, 그리고 이 주변의 오
- 크 시체들도 넣어두고. 브라스. 당신이 운희룡 이 새끼가 개 수작 못 부리게 좀 봐주고 계십쇼.”
- “예, 예? 아… 네. 알겠습니다.”
- “너무 쫄 것 없습니다. 이 새끼 팔다리 관절 아작내 놓았으니, 마비독의 지속이 끝나도 애벌레마냥 꿈틀거리는
- 것밖에 못해요.”
- “으… 으으으…”
- 그 말을 증명하듯이, 바닥에 엎어진 운희룡이 꿈틀거렸다. 도상량은 어이가 없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 “너. 정말로 14살이냐?”
- “예.”
- 이성민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 *이성민과 도상량이 부락의 남은 오크들을 모두 해치웠을 때,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마을에 불을 질러
- 놓겠지만, 용병 길드에서 그런 요구까지는 하지 않았기에 마을은 내버려 두었다.
- ‘얼마나 갈지 모르겠군.’
- 이성민은 피비린내에 익숙해진 코끝을 벅벅 문지르면서 생각했다. 이 마을의 오크를 모조리 죽여 놓기는 했지만,
- 머지않아 근처 영역의 오크들이 이 마을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서 이주해 올 것이다. 오크의 번식력은 굉장히 빠르
- 다. 머지않아 이 마을은 다시 오크의 마을이 될 것이다.
- 이성민은 그것까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용병 길드가, 혹은 이 숲에서 사냥하며 살아가는 사냥꾼들이 알아서
- 할 일이기 때문이다.
- “돌아가지. 해가 저물고 있어… 서둘러야 겠군.”
- 아공간 포켓에 오크 시체들을 채워 넣은 도상량이 입을 열었다. 이성민은 도상량과 함께 브라스 쪽으로 돌아왔다.
- 브라스는 아직까지 긴장이 가시지 않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입에 천뭉치가 물린 운희룡이 꿈틀거리
- 고 있었다.
- “새끼. 똥 지렸네.”
- 도상량이 투덜거렸다. 그는 악취를 풍기는 운희룡의 엉덩이를 힐긋 보면서 침을 뱉었다.
- 브라스와 다른 견습 용병이 운희룡을 부축했고, 넷은 숲을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중간부터는 이성민과 도상량이 운
- 희룡을 부축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숲에서 나가기 위함이었다.
- “보고는 바로 하러 갈 겁니까?”
- 드디어 숲을 빠져나왔다. 이성민의 질문에 도상량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리해서 움직인 덕
- 에 상당히 지치긴 하였지만, 보고를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 용병 길드는 북쪽 성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1층은 주점과 식당을 겸하고 있었고, 2층부터는 길드의 사
- 무를 본다.
- “너는 적당히 뭐라도 먹고 있어라.”
- “식사는 제 숙소에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 이성민이 냉큼 대답했다. 위지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저어…”
- 도상량이 운희룡을 데리고서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브라스가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른 견습 용병을 힐긋
- 본 뒤에, 이성민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 “…여러가지로 감사합니다.”
- “왜 나한테 감사하다는 겁니까?”
- 이성민이 물었다.
- “그… 이성민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오크들에게 죽었을 겁니다. 그 때 살아남았다고 해도… 운희룡이나 왕패에게
- 죽었겠지요.”
- “저한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성민은 잠깐 고민해 보았다.
- 브라스에게 천진심법을 전해 주면 어떨까?
- 자하신공을 익히게 되면서 이성민은 천진심법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천진심법이 적힌 책은 아직 가지고
- 있다.
- ‘아니. 그만두자.’
- 브라스의 나이는 서른이 다 되어 간다. 지금 와서 천진심법에 입문해 봤자…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 이 세계로 온 노 클래스들이 겪는 대부분의 말로이기도 했다. 대단한 기연이라도 만나지 않는 한 팔자를 피기는
- 힘들다. 특히나, 브라스처럼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심하다.
- “성민아.”
- 도상량이 2층에서 내려왔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상량은 이성민에게 친한 척을 했다.
- “위에 좀 다녀와라.”
- “예? 무슨 일입니까?”
- “그게…”
- 도상량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지부장님이 네 얼굴 좀 보잔다.”
- ======================================
- 목적-1
- 제나비스의 용병 길드 지부장.
- 전생에서 이성민은 제나비스 용병 길드에 들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럴 수준도 안 되었고 그럴 생각도 하지
- 않았다. 이성민이 용병 길드를 찾아가, 정식 용병이 되었던 것은 제나비스를 떠난 후였다.
- ‘역시나.’
-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도상량이 단순히 의뢰 보고를 올린 것이라면 모를까, 이번 의뢰에는 잡음이 끼어 있었
- 다. 오크 부락 토벌. 제나비스의 용병 길드 수준으로는 굉장히 굵직한 의뢰다.
- 그리고 잡음.
- 단순 보고로 치부되지 않고 길드 지부장까지 올라갔을 테고, 지부장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 14살.
- 무림인.
- 무림인이라면 에리아에서는 흔할 것도 없다. 당장 도상량만 해도 무림인이다.
- 하지만 용병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무림인은 흔하지 않다.
- “어리군.”
- 지부장실로 들어왔을 때, 이성민은 가장 먼저 그런 평가를 들었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찌든 담배 냄새가 났다.
- 책상 너머에 앉은 것은 거구의 근육에 걸맞지 않게 두꺼운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였다.
- “제나비스 용병 길드의 지부장, 독스라고 한다.”
- “…이성민입니다.”
- 이성민은 일단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독스는 이성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 “여러가지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우선 하나 물어보지. 왜 거짓말을 하였나?”
- “…예?”
- “자네는 무림인이 아니잖나.”
- 독스는 콧잔등에 걸처져 있던 안경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 “아티펙트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나?”
- “…대충은.”
- 마법이 걸려 있는 아이템을 칭하는 말이 아티펙트다.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아공간 포켓이 가장 대표적인 아티펙트
- 라고 할 수 있다.
- “이 안경도 그런 종류지. 쓰고 있다면 상대의 직업을 알 수가 있어. 자네의 직업은… 노 클래스로군. 믿기 힘든
- 이야기인걸.”
- 독스가 중얼거렸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들켰다면 들킨 것이다. 이런 일
- 하나하나로 감정 조절하지 못하고 당황해서는 안 된다.
- “노 클래스가 무공을 익혔다… 뭐. 믿기 힘든 이야기는 아니야. 최근에 노 클래스들에게 유행하고 있지 않나. 무
- 병 접골원에서의 골격 개조 수술. 거기서 무골을 얻고 무공을 익히는 것도 가능이야 하겠지.”
- “…잘 아시는군요.”
-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 “왜 거짓말을 했나?”
-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 이성민이 대답했다. 독스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 “그야 그렇겠지. 사실 나도 그렇거든. 자네. 제나비스에 온 지 몇 달이나 되었지?”
- “…지금 저를 심문하는 겁니까? 제가 심문 받을 잘못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 “아, 그렇군. 그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네. 내가 자네를 심문할 처지는 아니지. 자네도 내 심문을 받을 처지는 아
- 니고.”
- 독스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독스의 거구를 보면 의외인 것 같기는 하였어도, 이성민에게는
- 아니었다. 모든 용병이 지랄 맞은 것은 아니다. 물론 높은 확률로 지랄 맞기는 하지만, 도시 용병 길드의 지부장
- 을 맡고 있는 정도라면 굉장한 상식인이라는 뜻이다.
- ‘길드에 소속된 용병단 단장들 중에는 개새끼가 많지만.’
- 과거의 경험이다. 이성민 역시 용병이었다.
- “자네가 거짓말을 한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을 뿐이야. 뭐… 납득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일세. 자, 그
- 것은 무시하도록 하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 독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책상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흰색 종이 봉투를 꺼냈다.
- “오크 부락의 토벌에 대한 보수는 200만 에르. 그런데… 트러블이 얽혀 버렸지. 생존자는 둘. 견습 용병들에게
- 는 10만 에르씩 주고서, 180만 에르를 자네와 도상량이 나누기로 했어. 도상량이 그러더군. 자네 덕분에 오크
- 부락 토벌에 성공할 수 있었고, 병신 둘을 죽일 수 있었다고.”
-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도상량이 그렇게 말했을 줄이야. 솔직히 이성민은 도상량이 이 일에 대해서 자신의 공을
- 강조할 줄 알았다.
- “도상량도 동의했네. 자네에게 100만 에르를 주고, 도상량이 80만 에르를 받기로 했어. 또한, 전리품에 대한
- 분배 말인데… 판매 수수료를 때어도 60만 에르는 나올 걸세. 이것도 자네가 40만 에르를 받게.”
- “…그렇게까지 해주셔도 되는 겁니까?”
- “나야 상관없지. 도상량이 그렇게 말한 것을.”
- 독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 “예?”
- 이성민이 모르는 척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하였어도, 이성민은 독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을 부른 것인지
- 잘 알고 있었다.
- “자네. 용병이 될 생각은 없나?”
- 이것이다.
- “도상량이 말하더군. 자네는 이류에서 일류 사이에 있는, 일류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건 굉장히 놀
- 라운 일이야. 자네가 무림인이 아니라 노 클래스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지.”
- 독스가 내려놓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 “특히, 자네는 굉장히 어려. 아마 이대로 성장한다면 무난하게 일류의 영역에 진입할 것이고, 노력과 재능 여부
- 에 따라 절정 고수가 될 수도 있겠지.”
- “…그렇… 습니까?”
- 이성민이 슬며시 대답했다. 아마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이성민이 회귀자라는 것을 모르는 독스의 눈에 비
- 춰지는 이성민은 대단한 천재일 것이다. 비록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는 하여도.
- “자네가 용병이 된다면, 우선 자네에게 D급을 배정해 주도록 하지. 의뢰 몇 개를 수행한다면 C급까지는 당연히
- 올라갈 것이고, 일류의 경지에 오른다면 B급도 될 것이야. 어떤가?”
- 독스가 권했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침묵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D급 용병이 된다면 의뢰를 달성하지 않아
- 도 먹고 살만한 월급이 나온다.
- “…제안은 감사하지만…”
- 하지만 이성민은 거부했다. 아직은 용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노리는 것은 반 년 뒤에 있을 노 클래스 파이
- 트에 걸리는 우승 상품, 성령단이다. 그것을 먹고 내공의 증진을 얻어야 확실하게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다. 용
- 병이 된다면 노 클래스 파이트에 출전할 수 없다.
- “아쉽군.”
- 이성민이 거절하자, 독스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서 이성민에게 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 .
-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 “…감사합니다.”
- 이성민은 받은 돈을 품 안에 넣었다. 독스는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이답지 않군.”
- “예?”
- “14살답지 않아. 하긴, 사건은 사람을 바뀌게 하는 법이지. 나 같아도 어린 나이에 에리아에 소환되었다면 돌아
- 버렸을 거야.”
- 독스는 그런 식으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쓰게 웃어주면서 용병 길드를 나왔다.
- ‘빨리 나이를 먹던가 해야지.’
- 다른 것은 다 그렇다고 쳐도, 어린 아이인 척 연기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 잭의 여관에 들어섰을 때, 투정을 들었다. 위지호연이었다. 그녀는 식탁 쪽에 앉아서 뚱한 얼굴로 이성민을 보고
- 있었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앞에 놓인 접시에 식은 음식이 담긴 것을 눈여겨 보았다.
- “왜 먼저 안 먹었어?”
- “친구가 있는데 왜 혼자 밥을 먹어?”
- “먹을 수도 있지…”
- 친구가 있으면 혼자 밥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괴상한 논리에 대해 잔뜩 반론해주고
- 싶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은 꾹 눌러 참았다.
- “피 냄새가 나.”
- 이성민이 위지호연의 앞에 앉았다. 위지호연은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중얼거렸다.
- “사람을 죽였군. 무슨 일이 있었지?”
- “별 것 아니야.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하기에.”
- “그래?”
- 위지호연은 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식은 빵을 들어 찢었고, 마찬가지로 식은 스프에 빵을
- 찍어 입에 넣었다.
- “생각해 봤다.”
- 루라가 이성민에게 저녁 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이성민이 포크를 들었을 때, 위지호연의 입이 열렸다.
- “구천무극창을 너에게 맞게 뜯어 고치는 것에는 넉넉잡아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다. 그것을 너에게 전수해 주고,
- 네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다 싶으면… 나는 떠난다.”
- 포크를 움직이던 이성민의 손이 멈췄다.
- “…그래?”
- “왜. 아쉬우냐?”
- “…말리고 싶지는 않아.”
- 이성민이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전생의 위지호연은 제나비스에서 한 달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위지호연이
- 그 이상 제나비스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이성민 때문이다.
- “생각해 봤다.”
- 위지호연이 다시 말했다.
- “너에게는 목적이 있지. 성령단이라는 영약을 얻는 것이 당장 네 목적이다. 그 이후에 너는 제나비스를 떠나겠지
- . 그때까지. 내가 너를 기다렸다가, 같이 떠나는 것을 어떨까 하고.”
- 이성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위지호연이 그 다음에 할 말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왜. 라고 생각하느냐?”
- “내가 도움이 안 될테니까.”
-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정답이었다. 이성민은 약하다. 재능이 없다. 반면에 위지호연은
- 어떤가. 그녀는 천재이며, 천재를 완성시키기 위한 신공절학들을 익히고 있다.
- “틀렸다.”
- 위지호연이 대답했다. 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 “나는 네 그런 면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
- 위지호연이 내뱉었다.
- “…무슨 말이지?”
- “열등감.”
- 위지호연이 내뱉은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말은 칼날이었다. 이성민의 대답은 위지호연에게 있어서는 오답
- 이었으나, 위지호연의 말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정답이 되었다. ‘열등감’이라는 말은 이성민의 가슴을 헤집었고 그
- 의 감정을 묵직하게 내려오게 만들었다.
- “도움이 안 되어서? 내가 그래서 너를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왜 그렇게 생각하지?”
- “내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 “그래. 너는 약하지. 나와 함께 다닌다면, 나는 너를 지켜야만 할 거야. 하지만 그게 내가 너를 두고 가는 이
- 유인 것은 아니야.”
- 위지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꿰뚫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였다.
- “내가 곁에 있다면, 너는 성장하지 못한다.”
- 이성민이 위지호연과 함께 다니게 된다면, 이성민이 겪게 되는 곤란은 위지호연이 대신 해결해 주게 될 것이다.
- “네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네 발목을 붙잡고 있구나. 좋지 않은 일이야. 그 역겨운 열등감이
- 자기비하를 만들고 너 자신을 마모시킨다.”
-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 “확실하게 알아라. 네가 친구로 삼은 것은 마교의 소천마 위지호연이다.”
- 위지호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확실하게 이성민의 감정에 파고들어왔다.
- “네가 익힌 자하신공은 손에 꼽히는 신공절학이며, 네가 익히게 될 구천무극창 역시 내가 살았던 중원무림에서 제
- 일가는 창법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무공이다. 그런 구천무극창을, 내가, 너를 위해서 뜯어 고치고 있는 것이고.”
- “…내 재능이 일천하다고 했던 것은 언제나 너였다. 네가 가르치는 무공이 아무리 수준이 높다고 해서, 내가 그것
- 을 제대로 소화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 “해봤느냐?”
- 위지호연이 물었다.
- “네 전생의 기억이 말하더냐?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렇게 확답을 주더냐?”
- “…희망을 가져서 배신당하는 것보다는 주제파악을…”
- “그게 열등감이다.”
- “너는 모르겠지. 천재니까.”
- 이성민이 비꼬듯 말했다.
- “천재가 어떻게 천재가 아닌 자를 이해할 수 있겠나?”
- “맞다. 나는 천재이기에, 너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 위지호연은 그에 대해서는 인정하였다.
-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서 열등감에 찌들어 징징거리는 네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내가 무책임하다고 보느
- 냐?”
- “응.”
- “제대로 보았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 씨발년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위지호연을 노려보았다.
- “전생과 똑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너는 처음부터 시작했고, 네가 살았던 전생과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 살고 있지 않느냐.”
-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야.”
- “아니. 인간은 변한다.”
-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말을 즉시 부인했다.
- “나 역시 변했다. 전생이라고 할 것도 없어. 나는 마교 소교주였던 시절에서 변했다. 이곳에서 겪은 몇 달이 나
- 를 변하게 하였지.”
- 이성민은 마교의 소교주였던 시절의 위지호연을 모른다. 하지만 에리아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의 위지호연은 알고 있
- 었다.
- “네 전생은 13년을 살고 죽었어도, 이번 생에서는 다를 지도 모르는 것이다. 전생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고,
- 전생의 네가 겪었던 것과 지금의 네가 겪는 것은 또 다르다. 겪는 것이 다른데 어찌 같은 결과가 나오겠느냐.”
- 이성민의 입이 닫혔다. 반론할 수가 없었다. 13살의 위지호연이 하는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재능.”
- 위지호연의 머리를 흔들었다.
-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도. 열등감에 찌든 상태로는 아무 것도 못해. 우선.
- 너는.”
- 위지호연이 손을 들어 이성민을 가리켰다.
- “목적이라는 것이 필요해. 지난번에도 말했었지. 너는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 “그랬었지.”
- “그때 너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전생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고. 그래, 그건 참 쉽지. 지금 당장 네가 뭘 하
- 던 살아도 전생보다는 나을 거야. 그런데. 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겠지.”
- 정답이었다. 만족하지 못한다. 구체적인 목적이라는 것이 없어도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
- 고, 어떤 기회가 생길지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성민은 더더욱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 “기회라는 것을 얻어서 힘을 얻는다. 하지만 정작, 그 힘으로 너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고 있지. 사실 이런
- 것 아니냐? 너는 마음 한 구석에서,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야.”
- 이성민의 입이 반론을 위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 “물론. 너는 생각처럼 되기 위해서 노력하겠지. 애매한 목적의식을 가진 상태로 말이야. 그러니 너에게 제대로
- 된, 확실한 목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이냐?”
-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그 질문에, 위지호연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 “나.”
- 위지호연이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를 목적으로 삼아라.”
-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 ======================================
- 목적-2
-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성민은 입술을 꾹 다물고 위지호연을 노려보았다. 위지호연은 당당한 얼굴 표
- 정을 하고서 말을 계속했다.
- “네 전생에서의 나는 13년 동안 살아남았고, 유명해 졌다고 하였었지. 그렇다면 충분하지 않으냐. 최소한 앞으로
- 13년은 난 죽지 않아.”
- “그건 모르는 거지.”
- “아니.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지. 기껏 얻은 자유를 13년만 즐길 생각은 없다. 나는 오래, 오래 살 것이
- 야.”
- 위지호연의 말은 암시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한 염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서, 위지호연은 다시 이성민을 보
- 았다.
- “너는 지금 정처 없이 바다를 떠다니는 조각배와 같다. 목적지 없이 부는 바람 따라, 흐르는 바다 따라 항해하고
- 있을 뿐이지. 아니, 그것을 항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건 표류다.”
- 부정하기 힘들었다. 목적의식이 희미하다는 것은 이성민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
- 면 그는 목적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13년간 살았던 전생은 이성민에게 경험을 주었지만,
- 동시에 한계도 주었다.
- 현실을 알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성민에게는 한계가 된 것이다. 이성민은 재능이 없다. 그것을 알고 있
- 다. 10년 무공을 익혀서 이류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넋 놓고 표류하고 있으니 제대로 앞으로 향할 수가 없는 것이야. 그러니 목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 목적이.”
-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위지호연은… 전생에서 이성민이 들어 보았던 이계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도 좋았다.
- 이성민이 평생을 무공을 수련해도 위지호연의 발끝을 따라갈 수 있을까 의문일 정도로 말이다.
- 그것이 이성민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 “내가 너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내가 너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잖…”
- “해봤느냐?”
- 위지호연이 내뱉었다.
- “제발. 해?보지도 않고서 말하지 마라.”
- “너야말로 너무 무책임한 말을 하지 마. 나는 안 돼. 못 해. 재능이 없으니까. 너랑 나는 스타트 라인이 다르
- 단 말이다. 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았지. 영약도 많이 처먹었을 것이고 신공절학이
- 널린 곳에서 살았을 거야. 그렇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것 아니냐. 소천마 위지호연.”
- 이성민의 말에 독기가 담겼다. 그것은. 이성민이 부정하고, 외면하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위지호연이라는 인
- 간의 본질이었다.
- “하지만 난 아니야.”
-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고찰이기도 했다.
- “나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랬지. 아무 것도 없이, 맨 손으로, 아무 재능도 없이, 그렇게 이 세계
- 로 소환되었다. 전생의 너는 한 달 만에 이 도시를 졸업하고 떠났지. 나는 3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다. 토끼
- 와 멧돼지 따위에게 각오를 다졌고 고블린에게는 목숨을 걸었고 오크는 두려워 피해 다녔다. 그렇게 3년을 살아
- 도시를 떠났고, 새로운 도시에서는 용병이 되어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지.”
- 위지호연은 반론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이성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게 나다. 13년을 살아 이류 무인. C급 용병. 그러다가… 죽었고. 지금 다시 시작했지. 그런 내가…”
- “지금의 너는 이류 무인이다.”
- 위지호연이 입을 열었다.
- “13년을 살아 이류 무인이었던 너는, 다시 시작하면서 세 달 만에 이류 무인이 되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 천재로 태어났고, 많은 지원을 받았지. 하지만 지금의 너는 어떠냐. 자하신공을 익혔다. 내 2할의 내공을 전해
- 받았다. 창술도 익히게 될 것이다.”
- 위지호연이 손을 내저었다.
- “이것으로 부족하냐? 그렇다면 더 주지. 무엇을 가르쳐줄까. 외공을 원하나? 아니면 보법을? 권법은 어떻고 장법
- 은 어떠냐. 말해라.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르쳐 주마.”
- “…원하지 않아.”
- 이성민이 대답했다. 창법에 자하신공.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 익힐 자신도 없다.
- “너 역시 기연을 얻은 것은 똑같다.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다고 하여도, 너는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
- 에 필사적이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아. …기껏 다시 살게 된 두 번째 삶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것은 아깝지 않으
- 냐.”
- 위지호연은 한숨을 내쉬면서 곁에 둔 컵을 들었다. 그녀는 그 안에 담긴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하긴. 이건 내 오지랖일지도 모르겠군. 괜한 참견이야. 네가 사는 삶인데, 내가 멋대로 목적따위를 만들어 줄
- 필요는 없지.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 “닥쳐.”
- 이성민이 내뱉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위지호연이 내뱉은 말들은 모조리 이성민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
- 성민이 말을 끊고 들어오자 위지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렇게 화가 난 것이냐? 내가 제대로 사과를…”
- “그래. 화났다. 13살 먹은 애새끼한테 이런… 훈수를 들을 줄이야.”
- 자존심은 상했다. 당연한 말이다.
- 하지만 진정으로 화가 난 것은, “목적으로 삼아주지.”
- 이성민이 위지호연을 노려 보았다. 이성민이 진정으로 화난 것은, 위지호연의 말에 거의 대꾸하지 못했던 자기 자
- 신이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부들거리고 있던 자신이었다.
- “너를 목적으로 삼고서, 네가 떠난다고 해도 무공을 수련하겠다. 그리고 나중에 널 만난다면 네 가슴에 창을
- 꽂…”
-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내가 죽잖느냐. 그리고 친구끼리 그러면 어떡하느냐?”
- 위지호연이 즉시 반론했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바꾸었다.
- “…그럼… 어… 널 쓰러트리는 것으로…”
- “흠. 비무라면 상관없겠지. 기대하고 있으마.”
- 그제 서야 위지호연은 납득하고서 활짝 웃었다. 이성민은 그렇게 웃는 위지호연의 얼굴을 잠깐 동안 멍하니 바라보
- 았다.
- ‘이런 미친.’
- 13살 여자애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다니. 이건 조금 위험한 것이 아닌가? 이성민은 시선을 돌려 위
- 지호연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을 피했다.
- 그 후로 이성민은 숲으로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돈은 충분히 있었다. 용병 길드에서 받은 보수 덕에
- 지갑 사정은 풍족해졌고, 노 클래스 사냥꾼을 죽이면서 취한 돈도 있었다. 나중에 여비로 쓰기 위해 꼬박꼬박 모
- 아두었던 돈도 있다.
- “너는 의외로 기본기가 허술해. 제대로 가르쳐 준 스승이 없기 때문이겠지.”
- 이성민이 숲으로 나가지 않자, 위지호연도 적극적으로 이성민의 지도에 나섰다. 그녀는 오후에는 구천무극창을 뜯어
- 고치고 오전에는 이성민에게 창술에 대해 지도했다.
- “검이 만병지왕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검 쓰는 놈들이 허영심에 차서 지껄이는 소리일 뿐이다. 무공 좀 익힌
- 놈이라면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지. 창이 만병지왕에 어울리는 무기라고. 창을 상대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거든
- .”
- 휘익! 위지호연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가볍게 휘둘렀다.
- “그러니 기본기를 다지는 것이 좋다.”
- 그 말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기가 허술한 것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사실이다. 이성민
- 은 다른 누구에게 창을 배운 것이 아니라, 추혼창법의 내용과 실전을 통해 창술을 익힌 것이기 때문이다.
- “중원의 창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끝의 날붙이 부분이 창두槍頭. 창 아래의 수실이 창영槍纓. 막대 부분이 창간
- 槍杆. 창두의 반대쪽의 짧은 쇠붙이가 창준 槍?.”
- 부웅! 위지호연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창두 아래의 붉은 수실이 궤적에 따라 낭창거린다.
- “창영은 단순한 장식이면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기도 한다. 봐라.”
- 위지호연이 창을 연거푸 휘둘렀다. 붉은 창영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일직선인 창과는 다르게 창영은 흐느적거린다.
- 그 진한 붉은 색은 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끌게 만들었다.
- “창을 제대로 다루고 싶다면 창의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창두를 쓰듯이 창준을 써라. 창영으로 현혹시켜라.
- 창간을 잡은 손의 위치를 바꾸면서 거리를 조절해라.”
- 이성민은 멍하니 머리를 끄덕거렸다. 몇 번인가 창을 휘두르던 위지호연이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 “중원 창술 찌르기의 기본기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이것들은 태극창太極槍이나 양가창楊家槍 같은 고명한 창법에서
- 도 기본으로 삼으며, 심지어는 팔극권八極拳에서도 쓰인다. 만류귀종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것은 모든 무武에 응
- 용할 수 있는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니. 그것이 란欄, 나拿, 찰?이다.”
- 란은 외전外傳이고 나는 내전內傳이다. 란의 외전은 공격을 바깥으로 튕겨내며 나의 내전은 공격을 안으로 휘감는다
- .
- “중요한 것은 양 팔만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 팔로 써서는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 찰은 찌른다.
- “창의 길이는 그만큼의 위력을 만들어낸다. 창간을 바꿔 잡아라. 창간의 중간만 쓴다면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
- 아.”
- “…응.”
- “하지만 란나찰이 창이라는 무기 전체의 기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찌르기니까. 창은 찌르기
- 외에 다양한 공격법이 있어. 창은 둔기이기도 하니까.”
- 위지호연은 그 이후로 몇 가지 동작을 더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 뒤에는 이성민에게 창을 넘겨주더니, 몇 걸음
- 뒤로 물러서서 뒷짐을 졌다.
- “해 봐라.”
- “…뭐?”
- “보여주지 않았느냐. 해 봐라.”
- “내가 한 번 보고서 완벽하게 따라할 수 있었으면 재능 없다고 징징 댔겠냐?”
- “내가 언제 너한테 완벽하게 해 보라고 했느냐?”
- 이성민의 대답에 위지호연이 투덜거렸다.
- “그냥 해 보란 말이다. 해 봐야 알 것 아니냐.”
- 이성민은 창을 들었다. 그 순간, 위지호연이 말했다.
- “내공은 쓰지 마라.”
- 이성민은 내공을 끌어내지 않고서 위지호연이 가르쳤던 창의 기본기를 펼쳤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위지호연이 말
- 했다.
- “다시.”
- 그 이후로.
- 다시, 다시, 다시. 위지호연은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했고, 이성민은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내공을 쓰지 않는
- 다. 덕분에 이성민의 몸은 금세 지쳐 땀을 흘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 “다시.”
- “…언제까지…?”
- “손에 익을 때까지.”
- “그게 몇 번 한다고 되겠냐…!”
- “그러니까 계속 해야지.”
- 위지호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 “앞으로 매일, 그것만 연습하도록 해라.”
- 그 말에서,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성민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도 다시 창을 휘둘렀다.
-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내공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의 힘만으로 창을 휘두른다. 창이라고 해서 가벼운 것은
- 아니었고, 기본기라고 해서 그리 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 “쓰러져서는 안 돼. 정 힘들어 못하겠다 싶으면 쉬어라. 여유가 있다면 더 휘두르고.”
- 그 말은 마치 이성민의 근성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그 누구
- 도 아닌 이성민 본인이다. 열 번 쯤 더 동작을 반복했을 때, 이성민은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호흡은 가쁘고
- 팔다리가… 아니, 전신이 욱신거린다. 물을 마시고 싶었고 앉아 쉬고 싶었다. 그늘 가에서 바람을 맞고 싶었다.
- 그늘 쪽에 앉아 있는 위지호연의 얼굴이 보인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었다.
- 더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힘들어 죽을 것 같았지만,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다면 앞으로 몇 번은 더 휘두를 수
- 있을 것 같았다.
- 그래서 더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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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3
- 한 달.
- 위지호연은 한 달 안에 구천무극창을 뜯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었지만, 그 말처럼 되지는 않았다. 구천무
- 극창은 신공절학이었다. 창법만을 꼽자면 위지호연이 살았던 중원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공이었다.
- 아무리 위지호연이 천재이고, 수많은 신공절학을 접했다고 하여도 한 달 만에 구천무극창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 일이었다. 비록 그 고침이 구천무극창의 초식 초반의 난해함을 풀이하고 추혼창법의 초식과 융화시키는 것 정도라고
- 는 해도, 이어지는 구결과 끼워 맞추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천재성이 요구된다.
- 약속했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위지호연은 구천무극창을 완전히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위지호연은 서두르
- 지 않았다.
- “생각보다 진행이 더뎌. 조금 더 오래 있어야 할 것 같다.”
- “나 때문에 붙잡혀 있는 것 아냐?”
- “내가 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다. 네가 책임감 따위를 느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러지 좀 마.”
- 위지호연이 이성민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 “넌 자기 자신에게 너무 비관적이야.”
- “사람 성격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만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 10년 동안 용병 길드에서 갈굼을 받다 보면 이렇게 된다. 위지호연은 평생 모르는 기분이겠지만. 이성민은 투덜
- 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휴식 시간은 끝이다.
-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성민의 몸은 부쩍 성장했다. 내공을 거의 쓰지 않고 창법을 휘두르는 것이 반복된 만큼
- 근육이 붙었고 체력이 늘었다. 그렇다고 자하신공에 소홀한 것도 아니다.
- ‘사냥’이라는 일과가 줄어든 대신에, 이성민은 자기 자신의 단련에 매진했다. 위지호연은 구천무극창을 고치는 것
- 외에 다른 시간은 이성민을 가르치는 것에 매달렸다.
- 이성민의 창술은 한 달이라는 시간 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몬스
- 터를 상대로 단련하였기에 이성민의 창술은 기본기보다는 실전성에 치우쳐져 있었다.
- “발경이라는 것은 사실 내공을 쓰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어. 애초에 발경이라는 것은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
- 이니까. 거기에 내공을 더함으로서 위력을 증폭시키는 것뿐이지.”
- “말로 하면 모른다.”
- “그럼 맞아 볼 테냐?”
- 위지호연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면서 물었다. 그 말에 이성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쉬익! 찰로 뻗은 창이 허
- 공을 꿰뚫었다.
- “발경도 종류가 다양하지. 거리에 따라 암경暗勁에 척경尺勁. 거기서 또 방법에 따라서 나뉘는데… 그것까지 하나
- 하나 설명해 준다면 끝이 없다. 중원 무공 중에서 발경을 가장 제대로 이해하고 파고들어 알린 것은 무당의 시조
- 인 장삼봉이다. 이미 오래 전에 뒈진 인물이지만.”
- 위지호연이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옆에 두었던 그녀의 창을 잡아 들었다.
- “탄경, 전사경, 십자경 등등. 발경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발경의 목적은 간단하지. 적은 힘으로 강한
- 힘을 내는 것이야. 근육의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사용해서 힘을 내는 것이 곧 발경이다. 몸의 탄력,
- 회전, 상대의 힘. 그것들을 이용하는 것을 기본전제로 깔고서, 내공의 도움으로 위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것
- 이지.”
- 이성민은 일단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보고 위지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이해한 척 하지 말아라. 내가 헷갈린다.”
- “그래. 하나도 모르겠다.”
- “그러면 배워야지. …란 나 찰에도 발경을 섞어야 해. 그래야 기대 이상의 위력이 나온다.”
- 그렇게 말하고서, 위지호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어이가 없어. 이 세계는 말이 안 돼.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모르면서 무공을 사용하다니!”
- 요즘 들어서 위지호연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위지호연에게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성민은 그녀에
- 게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그것은 무공이라기 보다는 무공을 쓰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상식, 그런 류에 들어가
- 는 기술들이었다.
- “점혈도 모르고 금나수도 몰라. 혈도도 모르는 놈이 무공을 쓴다니…”
- “안 배웠는데 어떻게 아냐?”
- “말을 말아야지.”
- 위지호연이 투덜거렸다. 이성민은 뚱한 얼굴을 하고서 위지호연이 가르쳐 준 발경의 동작을 연습했다. 그러다가 문
- 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질문했다.
- “전음은 어떻게 쓰는 것이지?”
- [이렇게.]
- 위지호연이 전음을 보냈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창을 휘두르는 것을 멈췄다.
- “바로 할 수 있으면 내가 천재였겠지.”
- “하긴 그래. 너는 천재가 아니지.”
- 위지호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 “하지만 둔재도 아니야.”
- “뭐?”
- “둔재는 아니라고. 천재가 아닌 것처럼 둔재도 아니야. 범재… 보다는 조금 나을 지도 모르겠군.”
-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팔짱을 꼈다.
- “너는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는 남에게 배우는 것이 더 잘 맞는다는 느낌이다.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겠지.”
- 위지호연의 말에 이성민의 얼굴이 멍해졌다. 맞다. 이성민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제대로 배워 본 적은
- 없다.
- “뭐 어쨌든. 전음은 내공으로 말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 “그게 뭔 병신 같은 소리야. 내공으로 어떻게 말을 해?”
- “어휴…”
- 이성민의 투덜거림에 위지호연은 전음의 사용법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그를 바탕으로 이성민은 전음을 시도
- 해 보았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아직 내공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이었다.
- 그런 식으로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혈도에 대해 배웠고 점혈법에 대해 배웠다. 발경이나
- 금나수에 대해서도 배웠다. 자하신공을 운용할 때에도 위지호연이 곁에 붙어 내공인도법에 대해 조언을 해 주었다.
- 사실 위지호연이 구천무극창을 한 달 안에 완성하지 못한 것에는 이성민을 가르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
- 유도 컸다. 자하신공의 대주천을 끝낸 이성민이 눈을 떴다.
-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 이성민이 물었다. 이성민이 자하신공을 돌리는 동안, 위지호연은 침대 구석 쪽에 앉아서 구천무극창의 구결을 풀이
- 하고 있었다. 위지호연이 이성민을 돌아 보았다.
- “몰라서 묻는 것이냐? 그야 당연히…”
- “친구니까, 라는 대답 말고.”
- “네가 비명횡사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 위지호연이 대답을 바꾸었다.
- “나를 목적으로 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주제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잡놈에게 비명
- 횡사하게 둘 수는 없지.”
- “오지랖이냐?”
- “걱정이라고 해라.”
- 위지호연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서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렸다.
- “…그리고 나로서도 크게 후회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나는 조만간 떠나게 될 테니까.”
- “…후회라니. 무슨 후회를 말하는 거냐.”
- “너는 내 첫 친구다.”
- 위지호연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런 눈을 할 때의 위지호연은, 그녀 스스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잘
- 알 수가 없었지만. 시선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만 같았다.
- “만남 자체가 우연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너는 내가, 처음으로 가지게 된 친구다. 그러
- 니 위해주고 싶은 것이다.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다. 전생에서 소천마라 불리던 거인 위지호연은, 저런 인간이었다. 사실은 남자가 아닌 여
- 자였고, 마교의 소교주라는 배경을 가진 주제에 배려심이 제법 깊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근본적인 무언가가
- 결여되어 있기는 하였어도 한 번 품은 사람은 끝까지 품으려고 들었다.
- “앞으로 한 달. 한 달이다. 처음 말했던 시간보다 두 배가 더 걸렸지만… 그 후에 나는 떠난다.”
- “…어디로 갈 셈이냐?”
- “모른다. 그냥… 당분간은 정착하지 않고서 떠돌 생각이다. 전생의 내가 그리했듯이 말이지.”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고선, 이성민을 보았다.
- “너는 어찌 할 셈이냐?”
- “나? 나는… 성령단을 얻은 뒤에는, 제나비스 옆의 도시로 갈 생각이야.”
- 베헨게르. 숲을 지나고서도 사흘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도시다. 전생에서의 이성민은 베헨게르의 용병 길드에
- 들어가 용병이 되었다.
- “그렇군. 그렇다면 언제 만날까.”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 “한 달 뒤에 내가 이 도시를 떠난다면, 나는 전생의 내가 그러했듯이 몇 년은 떠돌 것이다. 그 뒤에는 마음 내
- 키는 대로 어딘가에 정착하겠지. 전생의 너와 나는 네가 13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
- “서로의 위치가 달랐으니까.”
- “10년 뒤는 어떠냐.”
- 위지호연이 말했다.
- “13년 이후로 할까 하였지만, 그 뒤의 일은 너도 모른다고 하니 그보다 빨리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10년
- 뒤에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지. 장소는 네가 정해라. 나는 지리 따위는 알지 못한다.”
- “루베스.”
- 이성민이 생각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 “에리아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 중 하나다. …거기서 만나면 될 것 같아.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 “3월 14일.”
- 잠깐 고민하던 위지호연이 입을 열었다.
- “내 생일이다. 잊을 일은 없겠지. 너도 기억해 둬라. 10년 뒤의 3월 14일. 루베스라는 도시에서 너와 나는
- 다시 만나는 거야.”
- 그렇게 10년 뒤의 만남 약속이 정해졌다. 동시에, 그 약속은 이성민에게 하나의 목적을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 10년 동안 절대로 죽지 않는다. 위지호연을 만날 때까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냥 살아남기만 해서
- 는 안 된다.
- 위지호연을 목적으로 잡은 이상, 그녀에게 가까워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류 정도의 수준으로는 위지호연
- 의 발끝까지도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상까지. 전생의 이성민이 결코 넘보지 못했던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
- 다.
- 다시 시작한 생에서, 이성민은 여러 가지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 하나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확실하게 잡는 것이다. 제나비스의 무골, 고서점의 천진심법,
- 토너먼트의 성령단.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몇 가지 더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다.
- 두 번째는 살아남는 것.
- 세 번째는 위지호연이다. 위지호연보다 강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너무 다르고, 타고난
- 것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 그래도, 위지호연보다 강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 이주일이 더 흘렀을 때. 위지호연은 구천무극창 성민식을 완성했다. 본래의 구천무극창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이성
- 민이 익숙한 추혼창법의 초식을 초반에 섞어 넣었다.
- 구천무극창 성민식을 완성하였지만, 위지호연은 떠나지 않았다.
- “한 달 뒤에 떠난다고 하였으니까. 앞으로 이주일 동안은 너에게 구천무극창 성민식을 지도해 주마.”
- 그렇게 이주일 동안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구천무극창 성민식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그렇게 이주일이 지나고, 이
- 성민과 위지호연은 잭의 여관 뒤뜰에 마주 섰다. 위지호연은 오늘 제나비스를 떠난다. 여비는 10만 에르. 그것도
- 이성민이 빌려 준 것이다. 차림새는 단출했다. 처음 소환되었을 때 입은 무복에, 잭이 챙겨 준 가방. 가방 안에
- 는 여정 도중에 먹을 육포 따위가 들어 있다. 무기는 없다. 애초에 위지호연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 “20초를 양보해 주마.”
- 위지호연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비무를 하자. 먼저 권했던 것은 위지호연이었다. 이성민은 그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 .
- 결과 따위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의 이성민이 아무리 발악을 한다고 해도, 위지호연을 상대로 절대로 이길 수는
- 없다. 20초를 양보해 준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성민이 몇 백 번 창을 찌른다고 하여도 위지호
- 연을 상처입힐 수는 없을 것이다.
- 알면서도, 이성민은 이 자리에 섰다.
- 목적으로 삼은 위지호연의 실력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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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4
- 창.
- 전생에서도, 지금도. 이성민이 선택한 무기는 창이었다. 처음 창을 쥔 이유는… 안전해 보여서. 멀리서, 졸렬하게
- 휙휙 찌르면 될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 칼을 휘두르는 것은 무서워서, 그래서 창을 선택했었다.
- 이유는 그리 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창이 좋았다. 오래 사용해서, 손에 익어서. 손에 익으면 익을수록 창이라
- 는 무기의 난해함에 숨이 막혀왔지만, 이번 생에서도 이성민은 창을 선택했다. 창 이외의 무기는 생각할 수가 없
- 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무기를 쥐어 손에 익힐 자신도 없었고, 이류 무공이라고는 해도 추혼창법을 포기하고 싶
- 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 고집이다.
- 회귀하게 되면서, 내공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성민이 가지고 온 것은 13년 간 에리아에서 살아남았던 경험이었고
- , 창술에 대한 이해도였다. 이성민은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은, 이성민이라는 인간이 13년 동안
-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생존해 온 증거였다.
- 14살의 육체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창술을 제대로 펼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것도 이제는 익숙해 졌다. 내공?
- 자하신공과 위지호연에게 받은 2할의 내공 덕에, 지금의 이성민은 전생에 지녔던 내공보다 오히려 많은 내공을 가
- 지게 되었다.
- 거기에 창술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에게 부족한 기본기를 지도해 주었다. 창술 뿐 만이
- 아니라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 새로 시작하게 된 이 삶에서, 이성민이 얻은 가장 큰 기연은. 위지호연과 만난 것임이 틀림없었다.
- 위지호연은 이성민에게 자하신공을 알려주었다. 2할의 내공을 전해주었다. 구천무극창을 알려주었다. 그 외에 많은
- 것들을 알려 주었다.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기억 중에서, 위지호연만큼 이성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 아무도 없었다. 위지호연은 자신의 가르침에 큰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 위지호연은 뛰어난 스승이었다. 만약, 위지호연이 허락했다면.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구배지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 그녀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러나 위지호연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친구니까. 그것이 위지호연이 말한 이유였다.
- ‘20초.’
- 위지호연이 양보해 준 초수. 이성민이 20번의 공격을 마칠 때까지, 위지호연은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위지호연
- 이 할 수 있는 것은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것뿐이다. 의미 없다. 비슷한 실력이거나, 살짝 떨어지는 실력 정도라
- 면 20초수의 양보를 통해 상대의 목을 취하거나 승패를 가릴 수도 있겠지.
- 하지만 이성민과 위지호연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그 정도가 아니다. 압도적인, 그런 차이가 둘 사이에 존재하
- 고 있다. 그것을 앎에도 이성민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의미가 없는 공격. 절대로 위지호연에게 닿지 않을
- 공격.
- 뭔 대수냐.
- ‘첫 초식은 뭐로 하지?’
- 무엇으로 선공을 가해야 할까. 어차피 위지호연에게는 닿지 않겠지만, 이성민은 신중을 기했다. 그는 최선을 다할
- 생각이었다. 위지호연을 죽일 생각으로.
- 추혼창법의 초식은 셋이다.
- 일식 일격일살.
- 이식 역류살.
- 삼식 분뢰격.
- 모두가 그리 복잡한 초식은 아니다. 추혼창법의 그런 세 개의 초식은, 위지호연이 고친 구천무극창 성민식에 그대
- 로 녹아 있다.
- 초식의 난해함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구천무극창 성민식을 만든 것은 위지호연이기에, 이성민이 사용하는 초식
- 들에 대해서는 모두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성민은 천천히 발을 끌었다. 위지호연은 뒷짐을 진 자세에서
- 오른 손만 들어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 이른 새벽이었고, 바람은 조금 쌀쌀했다.
- 근처 나무의 참새가 짹하고 울었다.
- 쉬익! 이성민의 손에서 창이 쏘아졌다. 위지호연이 가르쳤던 란 나 찰 중에서 찰이었다. 아니, 단순한 ‘찰’이
- 아니다. 이 일격은 구천무극창 성민식의 일초一招였다.
- 추혼일살追魂一殺. 맹렬한 회전을 담은 그 일격은 이성민의 전신에서 끌어 온 탄력과 내공의 증폭을 받았다. 발경
- 법과 내공의 도움을 받은 일격은 순식간에 위지호연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 타악! 위지호연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는 가슴 근처까지 올렸던 오른 손을 가볍게 휘저어 이성민의 추혼일살을 파
- 훼했다.
- “다음.”
-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는 예상했던 바이니까. 이성민의 발이 움직였다.
- 앞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창이 닿는 거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다.
- ‘아, 이건.’
- 호흡을 끊어내면서 창을 쏘아낸다. 찌르고, 휘둘러 치고. 위지호연이 가르쳤던 기본기에 충실했고 구천무극창 성민
- 식의 구결을 충실히 따랐다. 기본기와 실전성이 더해진 창법은 이미 이류의 수준을 넘었다고 해도 좋겠지만, 위지
- 호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오른손만 움직인다. 위지호연의 눈은 이성민이 창을 휘두
- 르는 것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궤적을 확인하고 도달점을 예지한다. 그렇게 방어가 완성된다. 위지호연의 손은 열
- 세 살 여자아이의 손에 설맞게 작았으나, 이성민이 전력으로 쏘아낸 창두의 날카로운 쇠붙이는 위지호연의 손에 생
- 채기하나 내지 못한다.
- 그런 차이다. 무공에 입문한지 반년도 안 된 이성민. 위지호연과의 만남으로 내공에 큰 진전을 거두었다고는 하여
- 도, 좋게 쳐줘봐야 일류. 반면에 위지호연은 어떤가. 천재적인 자질을 타고난 그녀는 그 자질에 걸맞게 어린 시
- 절부터 다양한 영약과 무공을 접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다고 하여도, 위지호연의 무공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이성
- 민이 살고 기억한 시간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다.
- 그래서 결과가 뻔하다는 것이다.
- “…졌다.”
-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중얼거렸다. 위지호연이 양보해 준 20초. 이성민은 그 20초를, 그 자신이 생각할 수
- 있는 한 최선의 공격들을 거듭했다.
- “잘했어.”
- 땀을 뻘뻘 흘리며 지쳐있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위지호연은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 손을
- 툭툭 털면서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 양보한 20초 동안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 20번의 공격을 감행했으나, 그 모든 공격은 위지호연의 오른 손에 쳐내
- 졌다.
- 20초가 끝났을 때, 위지호연이 움직였다. 그녀의 접근은 보법을 쓴 것이겠지.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접근을 읽지
- 못했다. 다만, 아주… 얕게 느낄 수는 있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 “마지막 판단은 좋았어. 덕분에 일초를 더 사용했으니까.”
- 막무가내로 찌른 창의 궤적에 위지호연의 신형이 걸렸다. 그를 피하기 위해 위지호연은 일초를 더 사용했다. 위지
- 호연은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거리는 이성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방긋 웃었다.
- “넌 눈치가 좋아.”
- 그것은 위지호연이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었다.
- “경험을 떠나서, 이것은 타고났다고 봐도 좋을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짐작하려 하고, 짐작하였다면 그것은 이
- 미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언젠가, 그것은 네가 가진 뛰어난 무기가 될 것이다. 10년 뒤가 기대되는 군.”
- “…하지만 졌어.”
- “당연하지. 나는 소천마 위지호연이다. 여기서 패배할 리가 없지.”
- 위지호연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뭔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몇 달 동안 머물렀던 도시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 그
- 녀에게 해방감을 준 것일까. 반면에 이성민은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 ‘아쉬워.’
- 이성민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이렇게까지 길게 터놓고 지낸 사람은 한 명도 없
- 었다. 전생의 이성민은 친구라는 것도 없었고, 동료의식도 희미했다. ‘용병 동료’는 있었지만, 노 클래스 출신이
- 라는 것으로 다양한 개고생과 지랄을 겪어 온 이성민은 같은 용병들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 애초에 그런 동료관계에 신뢰라는 것은 없었다. 우정은 말할 것도 없다.
- 하지만 위지호연은 달랐다. 이해타산적이었던 이성민과 비교하자면 위지호연은 순수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만나
- 고 겪은 인간군상 중에서 유별난 축이었고, 위지호연이 이성민이 첫 친구라고 하였듯이 이성민에게도 위지호연은 첫
- 친구였다.
- 그래서 아쉬움을 느낀다. 위지호연과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 설마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기에,
- 이성민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 “표정이 왜 그렇지?”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벅벅 문질러 닦았
- 다.
- “아쉬워서 그래.”
- “그래? 나랑 똑같군.”
- 위지호연이 풋하고 웃었다. 그녀는 소매를 흔들면서 몸을 돌렸다. 나무 아래에 던져 둔 가방을 들어 올리면서,
- 위지호연은 말을 이었다.
- “너랑 헤어지는 것은 아쉬워.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너와 함께 다니고 싶을 정도야.”
-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했을 텐데.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고.”
- “이해하고 있어. 그냥, 투정을 부려 봤을 뿐이다.”
- “하하! 따지고 본다면 네 정신 연령은 27살 아닌가? 27살 먹은 놈이 13살인 나에게 투정이라… 상상해 보니
- 조금 역겹군.”
- 역겹다니. 말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아니, 위지호연은 항상 저랬다. 가끔 말이 너무 직설적으로 나온다. 그것
- 도 너무 독하고 심하게.
- “아쉽지만 헤어져야 해.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듯이,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리고. 헤어짐으로서 10년
- 뒤를 기대할 수 있게 되지.”
- “…기대?”
- “그래. 나는 아주 기대 돼. 방금 전의 비무… 쉬웠다. 너무 쉬웠어. 하지만 나는 네 실력에 만족했다. 내가 가
- 르치면서 너에게 기대한 만큼 너는 해 주었거든. 특히나 마지막의 일수는 상당히 좋았다.”
- “우연이었을 뿐이다.”
- “그 일수를 우연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후후! 10년 뒤가 기대 돼. 뭐, 그때도 내가 이
- 기겠지만.”
- 위지호연이 웃는 소리를 내면서 가방을 들어 등에 매었다. 이성민은 뚱한 얼굴을 하고서 서있는 위지호연을 바라보
- 았다.
- “아쉬워하지 마. 10년 뒤에 만날 수 있으니까.”
- “10년은 길어.”
- “갑자기 투정을 부리는 군. 왜. 나랑 교접이라도 하고 싶어졌느냐?”
- 위지호연이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눈을 끔벅거리면서 위지호연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이성민
- 은 위지호연이 말한 ‘교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 “교… 뭐?”
- “흠. 부끄러운 단어를 반복시키게 하는 군. 그러니까, 나와 아이를 만들고 싶어졌냐 이 말이다.”
- 위지호연이 턱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풀이해 주었다. 이성민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 “뭐, 뭐?”
- “아니면 말고. 하긴.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군. 아니. 그렇지도 않나?”
-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위지호연은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이성민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 그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어린 놈의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어!”
- “하하! 농담이다, 농담. 친구 사이라면 해도 되는 농담 아닌가?”
- “안 돼!”
- “그래? 그건 몰랐군. 친구가 있던 적은 처음이라서.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지.”
- 위지호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등에 맨 가방을 한 번 흔들고서 이성민에게 다가갔다.
- “뭐. 하지만 너라면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해. 너는 보고 있으면 제법 재미있거든. 그래… 10년 동
- 안 그 생각이나 하고 있거라. 10년 동안 내 유방이 얼마나 커질지.”
- “안 해!”
- “왜? 생각한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 나도 궁금하거든. 네가 살았던 전생에서의 나는 남자로 알
- 려져 있었다지? 그렇다면 이대로 가도 젖가슴은 크게 자라지 않는다는 말인데… 후후! 젖가슴을 키워 널 만나는
- 것도 꽤 재미있을 듯 해. 네가 깜짝 놀랄 테니까.”
- “미친…”
- 이성민이 할 말을 잊어 욕설을 중얼거렸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지나치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 “10년 뒤에 보자. 루베스의 중앙광장, 3월 14일. 기억하고 있으마.”
- “…그래.”
- “죽지 마라.”
- 위지호연이 지나가는 말처럼 그 말을 남겼다. 이성민은 그 말을 가장 깊이 받아들였다.
- “안 죽어.”
-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관 뒤뜰을 나서는 위지호연의 등이 보였다.
- “절대 안 죽어.”
-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이.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렇게 위지호연은 떠났다.
- 10년 뒤의 만남을 기약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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