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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회-2 >
- 기묘한 놈이다.
- 독고귀검은 ‘놈’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놈의 눈은 깊었다. 그런 주제에 처음 맞부딪혔던 공격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물론 그
- 렇다고 해서 놈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놈이 보인 일격의 무게는 마랑철권 이상이었다.
- ‘묵섬광에게 저런 사제가 있었을 줄이야.’
- 아직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느끼기에는 묵섬광과 동등하거나 반 수 정도 앞설지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갑작스레 난입하기는 했지만, 놈의 실력은 이 상황을 완전히
- 뒤집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독고귀검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독고귀검의 애검이 끼이이 끼이이하며 소리를 낸다. 그것은 죽어가는 아이의 신음 섞인 울음처럼 들렸다.
- 이성민은 독고귀검을 보았다. 무공의 고하만 두고 견준다면 이성민의 무공은 아직 독고귀검에게 견줄 수 없다. 그래도 물러설 수가 없기에. 그는 창을 쥐었다. 눈을 한 번 감았
- 다가 뜨고 호흡을 고른다. 단전의 내공은 부족함이 없다. 마음 속에도 미혹은 없다. 결의만이 있을 뿐.
- ‘묘해.’
- 독고귀검이 자세를 갖춘다.
- ‘쉬워야 하는데… 왜 쉬울 것 같지가 않지?’
- 저 끝 모를 눈동자가 그럼 예감을 준다.
- 기다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이성민은 무영탈혼을 숨기지 않았다. 일보무흔이 이성민의 육체를 있던 자리에서 지워버리고 앞으로 달리게 만들었다. 독고귀검은
-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검을 옆으로 뉘여 베었다. 길게 찌른 창을 검이 받아낸다.
- 부딪히는 소리는 없다. 서로가 허초다. 찌른 창은 직선에서 위로 솟구친다. 독고귀검 역시 옆으로 베었던 검을 상체 각도를 틀면서 아래로 내려버렸다.
- 쩌어엉!
- 이번에는 확실히 부딪힌다. 뒤를 보지 않고 몸 전체를 휘두르며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었다. 양 손이 저릿거린다. 이성민은 무릎에 힘을 반쯤 풀었다. 힘에 밀려 뒤로 물러
- 서는 것 같은 모양새, 실상은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다.
- 독고귀검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 광견 같았다. 기억해라. 취걸이 했던 말을. 취걸이 입은 상처를. 잘린 취걸의 팔이 어찌 되었는지를.
-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 그 안에 있는 수십 개의 검기. 베이는 것은 한 번이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잘려나갈 것이다.
- 창을 쏜다. 거리를 유지하여 견제하듯이. 독고귀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연이어 쏘아지는 창 중에서 허와 실을 구분했다.
- ‘모두가 살초로군. 젊어 혈기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후후! 묘한 놈이야.’
- 독고귀검은 씰룩거리는 입술을 붙잡았다. 아직 웃어서는 안 된다. 파직거리며 쏘아진 검기가 창을 걷어 낸다.
- ‘공격일변인 것 같으면서도 신중해. 물러설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 과연… 지금은 네가 유리한 거리지.’
-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검수의 접근을 허용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 반걸음.
- 독고귀검이 나아간 걸음이다. 독고귀검의 몸을 덮고 있던 호신강기가 크게 부풀었다. 육감이 경고를 발한 것은 짧았고, 이성민의 몸은 곧바로 그를 대응했다. 본격적으로 구천무극
- 창이 펼쳐졌다. 낭창거리는 창영이 붉은 파도처럼, 그리고 날카로운 창두가 그 사이를 꿰뚫는다.
- 경고로 느낀 공격은 예리했다. 군더더기 없는 살검이 창두와 격돌한다.
- ‘아니야.’
- 격돌이 아니다. 타고 올라온다. 독고귀검은 늑대가 아니라 뱀이었다. 그의 검이, 검을 쥔 손이 창간을 타고 오르며 목을 노린다. 이성민의 걸음이 변화했다. 뒤로 물러서는 대
- 신에 앞으로.
- 일보무흔. 파악! 독고귀검의 검이 잔상을 베었다. 잔상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져 흩어졌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공격의 예감에 독고귀검은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옆으로 간 것
- 인지. 이형환위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나.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독고귀검은 검을 뿌렸다. 수십 개의 검기가 덮쳐 올 때, 이성민은 팔을 뒤로 빼냈다.
- 숫자에는 숫자로. 수십 개의 검기에 맞서 수십 개의 창을 쏜다.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속에서 독고귀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의 웃음을 베어내듯이 독고귀검은 일
- 검을 뿌린다. 이성민은 창을 빙글 돌렸다. 까아앙! 란의 수법으로 검을 걷어 낸다.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앞으로 밀어냈다.
- 한걸음, 두걸음. 그렇게 이보겁살이 시작된다. 살기와 강기가 뒤엉켜 독고귀검을 향해 폭사했다. 독고귀검은 오른 손에 있던 검을 왼 손으로 던졌다. 허공에서 낚아 챈 검이 칼
- 부림을 만든다. 가닥가닥 끊어진 강기가 공중에서 흩어진다.
- ‘없어?’
- 그 너머에서 독고귀검은 창을 놓쳤다. 아래에서 위로 창이 솟구친다. 복사백탐이다. 검귀를 놀라게 한 초식이었지만 독고귀검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서는 대신에 검을 휘둘
- 렀다. 한 번의 참격에 수십 개의 검기를 담는 것이 독고귀검의 검법이다. 그는 이성민이 보았던 모든 검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쾌검의 소유자였다. 복사백탐이 막힌다. 그를 확
- 인한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옆으로 밀었다. 일보분영. 수십 개로 분영한 이성민이 독고귀검을 둘러싸고 창을 내지른다.
- “하하하!”
- 독고귀검이 크게 웃었다. 독고귀검은 몸을 크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방을 휩쓴 검강이 일보분영의 잔상을 거꾸러트렸다. ‘눈’으로 보이는 수준과는 다르다고. 독고귀검은
- 이성민에 대한 첫인상을 대폭 수정했다. 놈의 창은 까다롭고 예리했으며 걸음은 눈을 어지럽힌다.
- ‘몇 살인지 궁금하군.’
- 펼치는 무공만 본다면 긴 시간 무공을 다듬은 노고수와 다를 것이 없는데. 젊은 창수 중에 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놈이 있었단 말인가? 있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 가 없는데.
- ‘조금 더 싸워보고 싶은데. 시간을 끌다가는 안 되겠어.’
- 마랑철권이 문제다. 백소고와 다시 뒤엉켜 싸우던 마랑철권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백소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머지 않아 결판이 날 것이다. 그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 이다. 마랑철권이 죽고서 백소고와 이성민이 합공한다면 독고귀검도 버틸 수 없을 터이니.
- ‘이런 즐거운 싸움은 흔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
- 독고귀검의 생각이 끊어졌다.
- 그렇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독고귀검의 바로 옆에 있던 살덩이의 벽이 찢어지고, 그 안에서 쏘아진 시커먼 급류가 독고귀검의 몸을 덮쳤다. 설마 이런 공격은 상상도 하지 못
- 했기에 독고귀검은 방어도 하지 못했다.
- 사실 방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독고귀검의 호신강기는 건재하여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고 할 것은. 독고귀검의 호신강기가 그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
- 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 벽을 찢어놓았음에도 공격의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상반신의 반쪽이 날아간 독고귀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다만, 피를 뿌리며 하늘을 날면서. 독고귀검은 흐릿해져 가
- 는 정신을 놓기 전에 생각했다.
- ‘흑룡포…? 소천마? 어째서…’
- 콰당탕! 독고귀검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성민은 멍하니 그런 독고귀검을 보았다. 움찔거리는 독고귀검은 회생이 불가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 백소고와 마랑철권의 싸움이 멈춘다. 마랑철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독고귀검을 내려 보았다. 움찔거리던 독고귀검의 몸이 완전히 정지했다.
- 독고귀검이 죽었다.
- “…소천마…”
-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중얼거린다. 백소고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성민은 멍한 얼굴로 독고귀검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방금 전까지 사나운 쾌검을 날려대던 독고귀검은 더 이
- 상 없었다. 남은 것은 상체의 절반이 으깨진 처참한 시체뿐이었다. 뻣뻣한 목을 움직인다. 이성민은 고개를 돌렸다.
- 독고귀검을 죽인 것은 흐느적거리는 검은 천이었다. 저것을 이성민은 본 적이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에레브리사에서 구입한 정보에서, 이성민은 저것을 본 적
- 이 있었다.
- 그녀는 자신이 찢은 벽의 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독고귀검의 시체를 한 번 힐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감정한 눈을 통해 이성민은 그녀가 ‘진짜’ 위
- 지호연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도플갱어는 손에 쥐고 있던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 놓았다. 이성민은 그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 보았다. 아까 전에 보았던 혈혈노파의 머리였다. 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것
- 을 보아, 저 머리는 혈혈노파 본인의 머리가 아닌 도플갱어의 머리였다. 도플갱어 둘이 같이 있던 길. 그 길에 있었던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혈혈노파의 도플갱어였던 모양
- 이다.
- “소천마… 어째서…!”
-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그는 아직 저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성민과 백소고는 저것이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
- 았기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차라리 위지호연 본인이었다면 상황이 더욱 나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상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도플갱어다. 비록 도플갱어의 힘
- 이 본인과 비교한다면 아주 똑같지는 않다고는 해도,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본래부터 압도적으로 강하던 것이 위지호연이니, 그녀의 도플갱어조차도 초월적인
-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고귀검의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그 독고귀검이… 아마, 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할 독고귀검이. 눈 먼 공격에 대응하지
- 못하고 휘말려 죽지 않았나.
- “…사제.”
- 백소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성민을 불렀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노려 보면서 아랫입술을 빠득 씹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네 개의 길에 골고루 사람들이 나뉘
- 어져 있었는데, 위지호연 본인만 빼고 다 죽었다니. 아마 전생에도 이런 식으로 도플갱어가 벽을 뚫고 다니며 보이던 모든 이들을 죽였던 모양이다.
- ‘그러다가 위지호연 본인이 자신의 도플갱어를 죽였겠지.’
- 그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 말했으리라. 자신이 모두 죽였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위지호연 본인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는 하여도, 그녀의 도플갱어가 그렇게 행동
- 했다면 결국 위지호연이 던전의 모두를 몰살한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소천마!”
- 마랑철권이 거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어째서 독고귀검을…! 그리고 그 머리는 혈혈노파의 것이 아닌가!”
- 마랑철권은 도플갱어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곳까지 오면서 도플갱어와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향해 진심으로 노성을 터트렸다.
- “당신이 우리를 수하로 거두지 않는다 하였어도, 우리는 그대를 주군으로 여겼소. 언젠가 당신이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을 때… 마인인 당신이 이룬 군림천하를 보고 싶었소. 단지
- 그 뿐이었소…!”
- 마랑철권이 씹듯이 내뱉었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서 저벅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백소고와 싸웠을 때 이상의 강렬한 투기를 발하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에게 외
- 쳤다.
- “헌데 어째서…!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어도 독고귀검은 당신을 진심으로 따랐단 말이오!”
- 위지호연은, 도플갱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무감정한 눈으로 마랑철권을 볼 뿐이었다. 그 눈을 보고서 마랑철권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도플갱어에게
- 뛰어들었다. 마랑철권은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위지호연의 괴물같은 강함을, 그녀를 추종하며 따라 온 마랑철권이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죽게 될 것임을 알아도 위지호연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랑철권은 그 자신이 상상했던 결말을 맞이했다. 흑룡포가
- 폭사했고, 마랑철권의 몸이 고깃덩이가 되었다.
- 후두둑 떨어지는 피와 살점을 보면서 이성민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 “사저.”
- “으… 응?”
- “도망치십시오.”
-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렇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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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회-3 >
- “잠깐… 사제. 대체 무슨…!”
- “둘이 덤빈다고 하여 저 괴물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를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았다. 저것은 위지호연이 아니다. 위지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의 강함만을 흉
- 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괴물이다. 위지호연이 가진 강함은 괴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 “하지만… 사제. 왜 나보고 도망치라고 하는 거야? 차라리 함께 싸우는 편이 생존 가능성이 커…!”
-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싶으시다면.”
-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천천히 들었다. 알고 있었다. 백소고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말을 하여도 백소고는 혼자 도망치지 않는다. 이성민이 이곳에 있으니까.
- 이곳에 있는 것이 사제인 이성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백소고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하는 행동에 대해 변명처럼 덧붙이던, ‘착한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 .
- “뒤쪽에 제가 만들어 놓은 구멍이 있습니다.”
-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두 눈을 멀뚱거리며 뜰 뿐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플갱어에게 이성이나 대화 욕구가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만, 이성민은 저 괴물이 다짜고짜
- 공격하지 않아 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그 너머에 취걸과 장득수님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을 데리고 와 주십시오.”
- “하지만 사제는…!”
- “도주한다면 쫓아 올 겁니다. 저희가 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저 괴물이 저희보다 빠르겠지요.”
- 백소고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무영탈혼은 쾌와 환의 극의를 바라보는 보법이며 체술이고 신법이다. 하지만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보여 준 일수는 압도적이었다. 저런 힘을
- 가진 괴물이 느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망치면 쫓아 올 것이고… 잡힐 것이다.
- “사저가 저보다 빠릅니다.”
-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 “그리고, 저는 사저보다 저 괴물을 상대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다가 죽으면…!”
-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저에게 달린 겁니다. 제가 죽게 될 것인지, 말 것인지.”
- 그런 식으로 책임감을 강요한다. 백소고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이성민은 더 이상 백소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무영탈혼의 걸음을 밟으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 우두커니 서있던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반응한다.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리던 흑룡포가 부풀더니 이성민을 휘둘러 치려 들었다. 말이 ‘휘둘러 치다’지, 그 일격에 담긴 위력은 호
- 신강기를 찢고 육체를 으깨 놓을 정도의 거력이었다.
-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호신강기를 전력으로 펼쳤다. 그와 함께 구천무극창을 펼치며 흑룡포의 공격에 대응했다. 꽈아아앙! 부딪힌 것만으로도 양 팔이 박살나는 것 같은 느낌이
- 왔다. 단순한 느낌일 뿐이다.
- ‘버텨… 냈어…!’
- 등 뒤에서 백소고가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이 멀어진다. 그녀도 이해한 것이다. 둘이 함께 싸운다고 해 봐야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을 뿐. 결국에는 사이좋게 몰살
- 이라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조력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생존 가능성이 늘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내가 찢은 구멍까지 가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에 길어 봐야 5분이다.'
- 단순 걸음과 뜀박질이라면 느릴 지도 몰라도, 경공을 펼친다면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혈혈노파가 취걸과 장득수를 죽이고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록 취걸이
- 왼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그 역시 뛰어난 고수였고, 장득수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이성민이 굳이 혈혈노파를 합공하지 않은 것은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
- 지, 혈혈노파를 쓰러트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 ‘이런 저런 변수가 있더라도 10분이면 올 거야.’
- 알고 있다.
- 이러한 예상에 구멍이 가득하다는 것쯤은. 혈혈노파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득수와 취걸이 허무하게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 .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백소고라면 싸움으로 지친 혈혈노파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 그 뒤에는?
- 백소고 혼자서 이곳에 다시 돌아온다면 변하는 것은 없다.
- 그리고 또. 이성민이 백소고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가능성. 그렇게 된다면 백소고는 어떻게 행동할까. 돌아온 그녀가 이성민의 시체를 본다면?
- 취걸과 장득수가 합류한다고 해서, 저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모른다. 모르겠다. 구멍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설마 여기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간 몸을 간신히 지탱한다. 척추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튕기며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달린다. 양 손이 찢어진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 죽고 싶지 않다. 당연한 것 아닌가.
-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고, 버텨야 했다.
- 흑룡포가 다시 이쪽을 덮친다. 결국은 천이기에, 흑룡포가 만들어내는 공격 궤적은 변칙적이었다.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큼직했던 흑룡포가 둘
- 둘 말리더니 날카로운 송곳의 모습이 되어 찔러 온다.
- 떠올려라.
- 2100년.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수행한 시간이다. 그곳에서의 수행은 지루했다. 너무 지루해서 몇 번이나 미쳐버렸을 정도다.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 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 지 알 수단은 없었다.
- 그 긴 시간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 몸으로 펼칠 수 있는 것, 펼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나뉘어져 있다. 이성민의 정신이 겪었던 무공과 지금의 이성민이 펼칠 수 있는 무공에는
-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떠올려 취해야 할 것은 펼치는 무공이 아니다.
- 경험이다.
- 처음에는 심심풀이였다.
- 상상해 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창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지겨워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면서 무공을 연마했다. 내가 창을 이렇게 찌르면
- 저쪽이 이렇게 움직이겠지? 아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이 좋을까? 그 회피에서 어떤 공격이 만들어질까. 공격의 형태는? 보법은? 나는 그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 까. 피해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받아 쳐야 하나? 받아치기에 너무 강하다면?
- 그럼 죽어야 하나?
- 옆으로 휘두른 창이 흑룡포와 닿는다. 위력 면에서 이성민의 창은 흑룡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알고 있다. 그러니 힘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정면으로 찌르는 것은 측면에서
- 약하다. 맞서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힘이라면 흘려 내거나 역이용해라.
- 위지호연이 가르쳐 준 것들이다. 알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성민은 창을 앞으로 찔렀다. 흑룡포와 닿을 듯 하다가 스친다. 이성민은 창을 찌르면서 몸을 옆
- 으로 돌렸고, 그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흑룡포가 이성민의 몸을 아슬하게 비껴가면서 이성민의 창끝은 도플갱어의 가슴을 노린다.
- 도플갱어에게 감정은 없었다.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다. 단지 눈으로 본 것에 확실하게 대응할 뿐이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의 창두가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흑룡포를
- 움직여 그곳을 방어했다.
- 기억은 선명하다. 2100년 동안 했던 것들. 정신세계의 기억은 결코 엷어지지 않는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아서, 떠올리는 것을 의식해야 할 뿐이지. 쓰지 않는 기억을 꺼내기
- 위해 고심하는 것과 똑같다.
-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한 상상에 푹 빠졌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강할 셈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며 비무하듯이 수행했다
- .
- 상상하는 상대는 항상 바뀌었다. 검, 창, 도끼, 활, 마법사, 주먹, 발 등. 빈곤한 상상력을 총 동원했다. 다행히 시간은 넘치도록 있었다.
- 방어한 흑룡포를 뚫을 수는 없다. 단단한 상대에게는 발경, 그 중에서도 침투경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 수준의 침투경으로 도플갱어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까? 해 봐야지. 창
- 두 끝에 강기가 맺힌다. 회전을 가미한 일격이 흑룡포와 부딪힌다.
- 꽈앙!
-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흑룡포가 뒤로 밀린다. 여전히 도플갱어의 얼굴에 당황은 없다. 꿈틀거리던 흑룡포가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을 덮치려 들었다. 이성민은 창을 고쳐 잡
- 고서 크게 휘둘렀다. 공기가 터지면서 강기가 폭사한다. 흑룡포가 조금 뒤로 밀려났다.
- [알고 있냐?]
- ‘알고 있습니다.’
- 허주가 말을 걸었고,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공격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흑룡포를 휘두르는 것이 공격의 전부였고, 방어나 회피도 그리 뛰어나지는
- 않았다.
- [저 녀석. 무공을 쓰지 않고 있어. 단순무식한 수법만 고수하고 있다.]
- 백소고의 도플갱어는 무영탈혼을 펼쳤는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아니었다.
-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도플갱어는 오리지널을 흉내내는 경향이 있어요. 만약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런 것이라면, 무공을 쓰지 않
- 는 것은 오리지널의 흉내라는 것이겠지요.]
- 무공을 쓰지 않고 단순무식한 수법을 고수하는 것이 위지호연의 흉내라고? 그 의문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흑룡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성민은 행동에 집중했다.
- 분뢰추살. 창영이 흔들리며 수십 개의 찌르기가 도플갱어를 덮친다. 흑룡포가 꿈틀거리더니 분뢰추살을 받아 친다. 거기서 한 걸음 앞서 일보무흔. 도플갱어의 옆으로 파고들면서
- 추혼일살을 찌른다. 휘릭하고 돌아 온 흑룡포가 추혼일살을 막는다. 침투경을 가미했음에도 뚫을 수가 없다.
- ‘복사백탐은?’
-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사라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창이 흑룡포의 사이를 파고들려 했다. 이 역시 먹히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흑룡포가 창끝을 막아낸다. 구천무극창의
- 세 가지 초식으로도 흑룡포를 뚫을 수가 없다.
- ‘사각이 없어.’
- 몸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큰 흑룡포. 길이와 너비마저 자유롭게 변환 된다. 본래 저것은 그리 위력적인 아티펙트는 아니다. 형태를 바꾸고 그를 유지하며 공격과 방어에 자유롭게
- 쓰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내공과 숙련도가 필요하다.
- 구천무극창은 총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태까지 이성민이 사용한 것은 세 개 뿐이었다. 추혼일살, 분뢰추살, 복사백탐. 그 이후의 초식들은 내공 소모도 크고,
- 이성민이 도달한 무공 수준이 그 이상의초식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이성민의 창에 어린 강기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도플갱어가 손을 움직인다. 여전히 도플
- 갱어는 무공을 쓰지 않는다.
- 창이 뒤로 움직이고 다시 앞으로.
- 강기가 폭발했다. 쏘아진 그 일격이 아홉으로 나뉜다. 순수하게 강기로 이루어진 그것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구천무극창의 사초, 구룡살생. 아홉 개
- 의 용이 도플갱어를 집어 삼킨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 천장이 갉혀나간다.
- ㅡ콰콰콰콰! 아홉 마리의 용이 전면을 휩쓸었다. 이성민은 창을 쏘아낸 손을 바르르 떨면서 앞을 보았다.
- 도플갱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 밀려난 살덩이가 지저분하게 달라 붙어 있었다. 피하지 않고 막았다. 구룡살생을 정면으로 받고서… 조금 뒤로 밀려난
- 것이 전부였단 말인가. 이성민은 조금 허탈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 그래. 위지호연의 모습을 흉내낸 놈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
- 이성민은 그런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큭큭 웃었다.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던 도플갱어가 흑룡포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놓은 흑룡포가 힘없이 늘어진다. 저벅거리며 앞으로
- 나오는 도플갱어의 전신을 시커먼 강기가 휘감았다. 그것은 호신강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흉흉했고 거대했다.
- [과연.]
- 허주가 껄껄 웃었다.
- [여태까지는 단순한 장난이었다는 모양이다.]
- 그것은 이성민도 통감했다. 흑룡포를 벗은 도플갱어는 무기와 방어구를 잃었음에도, 방금 전보다 더욱 흉악하게 느껴졌다.
- 도플갱어가 보법을 밟는다. 순식간이었다. 이성민은 시야와 감각 모두에서 도플갱어를 놓쳤다. 육감조차도 도플갱어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 [뒤.]
- 허주가 내뱉어 주지 않았더라면 이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성민은 급히 몸을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 ‘사저, 오면 안 됩…’
- 통증과 함께 공중을 날면서,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이건 진짜 괴물이라고.
- ======================================
- < 재회-4 >
- “…괜찮은 것인가?”
- 장득수는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취걸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
- 이다.
- “저희 셋이서 위지호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누군가는 살아서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취걸의 목소리는 낮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섞였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과 살아야 한다는 갈망이 있었다.
- “저는 백소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죽을 수 없습니다. 개방… 개방을 위해서.”
- 알고 있다. 이것이 결국에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에는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칠 뿐이다. 취걸은 죽은 혈혈노파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저 잔학한 마두조차도 죽기
- 직전에는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다.
- 죽고 싶지 않다. 그것은 모두가 똑같다. 하나 뿐인 삶이기 때문이다.
- “장득수님은 어떠십니까.”
- “…죽고 싶지는… 않지.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살고 싶네.”
- 이제 와서 체면을 따지는 것이 무어가 중요하겠나. 장득수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취걸이 쓴 웃음을 흘렸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둘둘 말린 스크롤을
- 꺼냈다.
- “운이 좋았습니다.”
- 이것은 혈혈노파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이다.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아, 혈혈노파가 던전의 도플갱어 중 하나를 죽이고서 얻은 듯 했다. 백소고가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를 이용
- 해서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을 분석했다.
- ‘던전 탈출.’
- 사용한다면 즉시 던전에서 탈출이 가능한 마법이 새겨져 있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은 셋이었다. 혈혈노파는 죽기 직전까지 이 스크롤에 어떤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알지 못
- 했다.
- “…백소저가 원망할텐데…”
- “책임을 지겠습니다.”
- 취걸이 대답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 앉아 쓰러져 있는 백소고를 보았다. 이성민을, 사제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를 기습적으로 점혈하여 정신을 잃게 만
- 든 것은 취걸이었다.
- ‘나를 원망하십시오.’
- 취걸은 짧게 만났던 이성민을 떠올리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크롤을 찢었다.
- [함께 사용할 인원을 지정해 주십시오.]
-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 대해, 취걸은 장득수와 백소고의 이름을 말했다.
- *
- 아프다.
- 통증을 자각했을 때, 이성민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떤 식의 공격이었는지 분석할 여유는 없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 [정신 차려라! 계속해서 오고 있으니까!]
- 이성민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가 발을 크게 들더니 바닥을 내리 찍었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이 파도처럼 요동치더니 거대한 힘이 이성민을 덮쳤다. 이성민은 이를 악
- 물고서 몸을 날렸다.
- 콰아아앙!
- 방금 전까지 이성민이 있던 자리에 초토화되었다.
- [어떡하지? 어, 어떡해요?]
- 루비아가 불안한 듯 웅웅거리면서 목소리를 낸다. 모른다. 이성민은 급히 창을 휘둘렀다. 꽈앙! 도플갱어가 내지른 장력이 이성민의 창과 부딪혔다. 창을 잡은 왼쪽 손목이 비틀
- 린다. 왼쪽 팔 전체가 찌르르 울리면서 감각이 둔해졌다.
- ‘손이…!’
-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불어넣는다. 오른 손을 중심으로 잡고서 창을 한 바퀴 돌린다. 창준과 창두, 그 두 개가 순차적으로 도플갱어를 덮친다.
- 도플갱어의 얼굴은 무심했다. 오리지널보다는 못한 도플갱어였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흑룡포를 쓰지 않는 것은 도플갱어가, 아니, 위지호연이 상대를 인정했다
- 는 뜻이었다. 즉, 여태까지는 단순히 상대를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었고 앞으로는 상대를 적수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불행이었다. 이성민의 공격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도플갱어의 손에 가로막혔다. 전신에 검은 호신강기를 두른 도플갱어는 움직이는 것만
- 으로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괴의 화신이었다. 비록 그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닐 지라도.
- 벌려 뻗은 손이 커보인다. 가벼운 손목의 흔들림, 그것이 수백의 잔상을 그린다. 변? 환? 허? 실은 어디지?
-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열, 왼쪽으로 일곱…]
- 허주가 뭐라고 말은 했지만 느리다. 듣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응하기에는 위지호연의 공격이 너무 빠르다. 하나에 맞춰 요격하는 것보다는 전체를 막기 위해 창을 돌렸고, 결과적으
- 로는 늦었다. 이성민은 피를 토하면서 뒤로 날아갔다.
- [불편하기 짝이 없군.]
- 허주가 투덜거린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여기서 죽으면 주인님을 만날 수 없는데… 의식 너머에서 루비아가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 “좀… 닥치고 있어 봐.”
-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다.
-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내가 공격의 일부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너는 방금의 일격으로 몸이 폭사했을 거다.]
- 과연. 정면으로 당한 것과 공격에 실린 위압감을 생각하면 의외로 버틸만했다고 생각했는데.
- ‘왜 막아 준 겁니까?’
- [네가 이곳에 죽는다면 나도 난감해지니까. 핏덩이가 된 몸을 빼앗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네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다.]
- 허주가 대답했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이 몸을 일으킨 것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네놈이 도망치라고 보낸 여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
- ‘압니다.’
- 바보도 아니고. 취걸과 장득수를 데리고 오라고 보낸 백소고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음도 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 있다는 것도 안다.
- 백소고가 배신한 것일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 [원망스럽지 않나? 후회스럽지 않나?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 계집을 대신하여 죽을 필요는 없을 터인데. 나는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아. 네놈은 이미 한 번
- 죽음을 겪어 본 자가 아닌가?]
- 몸상태를 추스를 틈도 없었다. 도플갱어가 다시 공격해 온다. 홱하고 뻗은 오른 손, 권拳인가 장掌인가. 아니, 수도? 예리하게 벼려진 강기가 목젖을 노려 온다. 이성민은 오른
- 손 안의 창을 빙글 돌렸다.
- 카가가각!
- 강기와 강기가 서로 맞부딪힌다. 밀린 것은 이성민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지 않고 자세 자체를 바꾼다. 동시에 창을 돌리면서 아래에서 위로 복사백탐을 잇는다.
- 통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이성민의 공격궤도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
- [겪어 보았기에 더욱 잘 알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인지. 설마 이번에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 ‘그럴 리가 없잖아.’
- 대답과 즉시 뛴다. 무영탈혼의 이보겁살. 강기를 폭사시키면서 바로 구천무극창의 사초인 구룡살생을 펼친다. 명확한 살의를 담은 강기의 줄기가 전면을 휩쓴다.
- 방어로 쓰던 흑룡포는 내려놓았다. 도플갱어는 방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용하는 것은 오른 손 뿐. 도플갱어가 흉내 내고 있는 위지호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인정하여 흑
- 룡포를 벗었다. 그렇다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쓰지 않는다. 쓰는 것은 오른 손 뿐이다.
- [대답해라. 네놈은 후회하고 있는가? 그 계집을 원망하고 있는가?]
- ‘나는.’
- 대답을 끊어 내뱉는다. 이보겁살과 구룡살생은 도플갱어가 내지른 일장에 파훼되었다. 흩어진 강기의 파편 속으로 도플갱어가 뛰어 들어온다.
- ‘후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애초에… 사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8년 전에 죽었을 테니까.’
- 무턱대고 들어간 므쉬의 산. 스스로를 과신하여 걸었던 과한 금제. 백소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산에서 죽었을 것이다.
- ‘사저에게 구명 받았다. 사저와 지내면서, 사저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에 왔고 이렇게 남은 거야.’
- [그 계집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냐?]
- ‘개소리하는군.’
- [으하하!]
- 허주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껄껄 크게 웃었다. 루비아는 여전히 신경 사납게 중얼거리고 있었고, 도플갱어의 공격은 매서웠다.
- [조금 마음에 들었다. 네놈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조금 도와줘 보도록 할까.]
- 허주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지금의 이성민이 어찌 할 수
- 없을 수준의 괴물이었다. 헤어지고서 9년. 9년 동안 이 정도인가. 이성민은 피식 웃었다.
- ‘진원진기를 격발시켜도 상대가 안 돼. 도망치기에는… 늦었나? 앞으로 뛰어 볼까?’
- [저만한 적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지.]
- ‘이기는 것은 힘들어. 말했을 텐데. 죽고 싶지는 않다고.’
- [죽지 않아도 된다.]
- 허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성민의 몸을 덮은 마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이성민은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 [매개만 있다면 힘을 끌어오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지!]
- 허주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마갑에서 뿜어진 불길은 이성민의 몸을 덮고 있었으나, 이성민은 그 불꽃에서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다.
- “너… 뭐하는 거냐?”
- [으하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반말을 하는 구나. 뭐, 상관없지. 나는 네놈이 조금 마음에 들었으니까.]
- 도플갱어가 뛴다. 이성민의 구룡살생과 이보겁살과 격돌하여 파훼시켰던 위력적인 장법이 덮쳐온다. 일장을 때렸을 때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이성민을 덮쳤고, 이성민이 대응하기
- 전에 불꽃이 앞으로 나섰다.
- [봐라! 이것이 진짜 괴력난신이다!]
- 허주가 웃는 목소리로 외쳤다. 꽈아아앙! 힘과 힘이 충돌했다. 위지호연의 강기가 애초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사라졌다. 불길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고 앞으로
- 몰아쳤다. 도플갱어는 급히 양 손을 들었다. 가슴 앞으로 모은 손바닥 사이에서 피처럼 붉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공을 던지듯이 앞으로 날렸다. 꽈아아앙! 격이
- 다른 두 힘이 충돌하면서 공간 자체가 뒤흔들렸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 “대체 뭐야…!”
- [이해가 늦군, 미련한 놈! 내 힘의 일부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네놈 혼자서 맞서 봤자 저 반푼이에게 죽어버릴 테니까!]
- “나를 돕고 있는 거냐…?”
- [그렇다! 네놈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효율이 좋지 않군. 힘은 빌려 주마. 그러니 네가 마음대로 써 보아라.]
- 허주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솟구친 불길이 흩어지더니 이성민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성민은 이해했다. 그때, 잠자는 숲에서 보았던 것은 불꽃 따위가 아니었다
- . 지금 위지호연의 공격을 밀어낸 것 역시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주가 다스리는 거대한 힘 자체였다.
- [요력이다. 본래라면 너희 인간은 다룰 수 없는 힘이지. 하지만 네놈이라면 다룰 수 있을 것이야. 네놈의 심장은 인간보다는 요괴의 것에 가까워 보이니까.]
- 허주의 요력이 몸에 깃들고 심장이 그를 집어 삼킨다. 이성민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노곤하던 전신의 피로감이 사라진다. 욱신거리던 통증도 가셨다. 부러진 늑골과 손목이? 멀
- 쩡하게 움직였다.
- 심장에 깃든 힘을 통해 이성민은 요력의 성질을 이해했다. 이것은 내공도 아니고 마력도 아니었다. 요력은 파괴밖에 모르는 단순하고 무식한 힘이었으며,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인
- 외의 힘이었다. 본래는 공존이 불가한 요력과 내공이 이성민의 몸 안에서 공존한다. 그것은 서로 뒤엉키면서도 섞이지는 않았다. 물과 기름과 같은 두 개의 힘이 전신을 흐르면서
- 이성민은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 [견뎌라!]
- 허주가 외친다. 도플갱어가 뛴다. 놀이상대에서 적으로, 그리고 호적수로 격이 올랐다. 그렇기에 도플갱어는 가진 전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뛰어나간 도플갱어의 몸이 다섯으로 나
- 뉘더니 사방에서 덮쳐 온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실체를 갖춘 본인이었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창을 움직였다.
- 분뢰추살.
- 요력과 내공이 섞인 분뢰추살은 이전에 펼친 분뢰추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달아 터지는 폭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분신이 박살난다. 그 중 본체는 이형환위를 통해 빠져나갔
- 다.
- [뒤!]
- 허주가 위치를 알린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요력은 이성민의 전신 감각을 평소보다 더욱 예리하게 바꿔 놓았다. 이성민은 신음을 삼키고서 몸을 돌렸다. 창을 휘두를 수는 없
- 었다. 방금 전에 펼친 분뢰추살은 끔찍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초식을 펼친 이성민의 양 팔이 제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뼈가 박살나 버렸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박살난 팔이 순식간에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문제다. 등 뒤로 이동한 도플갱어가 이성
- 민의 가슴을 향해 양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보무흔. 이성민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걸음을 마저 뻗기도 전에 이형환위가 펼쳐졌다. 이성민은 그 경악스런 속도에 놀라면서도 몸을 통제했다. 일보무흔에서 두 걸음.
- 이보겁살. 요력과 내공이 뒤섞인 강기가 폭사한다. 도플갱어는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급히 양 손을 들어 방어를 완성했다. 하지만 완전히 버티지 못했다.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 밀려났다.
- 그 순간에 이성민의 양 팔은 재생되었다. 이성민은 숨을 삼키고서 구천무극창을 펼쳤다.
- 구천무극창 오초, 절명섬絶命閃.
- 그것은 소리조차 갖지 않는 극한의 쾌를 담은 찌르기였다.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검귀를 죽인 이상적인 찌르기에 근접한 공격이기도 했다. 정신세계
- 에서는 이미 다시 도달하였었지만, 현실의 육체로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공격이기도 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요력의 보조를 받는 몸뚱이가, 무리한 움직임도 가능하게 만든 몸뚱이가 최속의 찌르기인 절명섬을 완벽하게 펼쳐냈다.
- 노린 것은 가슴 정 중앙.
- 이성민의 창이 도플갱어의 가슴 정 중앙을 꿰뚫었다.
- ======================================
- < 재회-5 >
- 호신강기의 저항감을 뚫는다. 강기와 요력이 뒤섞인 절명섬. 정신세계에서는 쉼 없이 펼칠 수 있던 절명섬은, 이성민의 진짜 육체로는 펼치는 것이 부담스러운 무공 중 하나였다.
- 임독양맥을 뚫으면서 이성민은 초절정 고수가 되었고 환골탈태를 해냈다. 육체는 그 이전의 육체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해졌으나, 구천무극창의 절초들은 그러한 육체로도 부담
- 이 존재하는 신공들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허주가 보태 준 요력의 보조를 받은 이성민의 육체는 정신 세계에서 도달한 무공 수준을 힘겹게나마 펼칠 정도는 되었다.
-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난다. 놈은 피도 토하지 않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감각이 완전히 거세 된 괴물은, 진짜 사람이었다면 죽어버릴 치명상 속에서도 반
- 격을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제 몸의안위를 완전히 도외시한 질 나쁜 동귀어진의 공격이었다.
- ‘팔이…!’
- 절명섬을 펼친 근육이 파열된 것이 느껴진다. 힘이 빠진 손이 창을 놓으려 들었으나, 이성민은 입술을 짓이겨 씹으면서 창을 잡았다. 뻗은 창을 뒤로 회수하면서 무영탈혼을 펼쳐
- 뒤로 물러선다. 가슴에 바람 구멍을 가진 도플갱어가 양 팔을 펼친다.
- 콰콰콰! 그녀를 중심으로 시커먼 강기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인간의 무공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처럼 보였다. 몰아치는 힘의 격류가 사방을 휩쓴다. 이성민은 요력과 강기를 동시
- 에 끌어올리면서 그에 저항했다.
- [놀랍군. 저 계집… 진짜도 아니면서 저만한 힘을 휘두르는가. 저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요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헉하고 숨이 막히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풀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아작난 양 팔이 재생
- 되었다.
- ‘이길 수 있나…?’
- [네가 하기에 따라 달려있지. 나는 너에게 요력을 더해줄 뿐이다. 아니면… 나에게 육체를 넘길 테냐?]
- 허주가 물었다.
- [나에게 육체를 넘긴다면 저깟 반푼이 따위야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저 모습을 한 본인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어. 그럴 테냐?]
- 계속해서 묻는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고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질문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내가 해야 돼.’
- [으하하! 힘을 빌려 쓰는 주제에 네가 하겠다고? 마지막 자존심, 뭐 그런 것이냐?]
- ‘맞아. 내 자존심이야. 내 몸이 너무 약해. 할 수 있는데,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 몸으로는 아직 할 수가 없어.’
-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강함과 위지호연의 강함은 다르겠지.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2100년의 수행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어
- 렴풋하게 보인다. 위지호연이 가지고 있는, 위지호연이 도달한 초월적인 강함이. 저 강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안다. 정신세계에서 수련을 마쳤을 당시의 몸뚱이와 무공을 그대로 펼칠 수 있더라면 이런 식으로 고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
- 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가슴 벅찬 성취감과 달성감을 느끼기도 했다.
- 2100년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 [묘한… 놈이군.]
-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었다. 육체가 없는 허주는 거대한 요력의 덩어리에 혼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한 요력과 혼이 마갑을 거쳐 이성민의 몸
- 안에 깃든 것이 지금이다. 이성민과 반쯤 동화되어 있는 허주는 완전히 빙의하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의 육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으나, 절반 정도의 빙의로도 이성민이 느끼는 감정
- 을 전해 느낄 수는 있었다.
- [좋아. 더 빌려주지.]
-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달성감과 성취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해야 돼’라는 이성민의 대답이 근거 없는 아집이 아님은 알았다.
- [네가 버틸 수 있을까?]
- 그 말은 허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어 애매했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한 힘이 이성민의 몸 안을 가득 채웠다. 단전이 박살나는 것 같았다. 단전을
- 통해 내공을 받아 흘리는 기혈이 찢어지면서 강제로 확장된다. 왼쪽 가슴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내공과 요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통증에 몸을 무디게 할 수는 없었다.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몰아친 강기의 폭풍이 이성민을 휩쓸려 들었
- 다. 이성민은 아찔한 통증 속에서 창을 찾았다. 창은 이미 이성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 구룡살생.
- 아홉의 용과 강기의 폭풍이 부딪혔다. 내공은 이미 바닥이다. 남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씹어 내공을 보충할 필요는 없었다. 내공의 빈자리를 요력이 채운다. 불길한 색으로
- 물든 아홉의 용이 꿈틀거린다. 이윽고 용들은 입을 쩍 벌리면서 강기의 폭풍을 집어 삼켰다.
- 격돌하던 힘과 힘이 사라진 공백. 도플갱어는 살짝 비틀거리더니, 전보다 더한 힘을 내뿜었다. 괴물이 발하는 무위는 이미 인간의 것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었다. 허주가 탄성을
- 질렀고 이성민은 앞으로 걸었다. 손에 있는 창이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힐긋 내려보니 창간은 찌그러져 있었고 창두의 창날은 금이 가있었다.
- ‘보수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 셀게루스에게 한 소리 듣겠군.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단전과 기혈을 활짝 열었다. 통증은 건재했으나 이성민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했다.
- ㅡ후우웅! 자색이 뒤섞인 요력이 창 전체를 휘감았다. 도플갱어의 전신을 덮고 있던 검은 강기가 그녀의 양 손에 어린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이성민은 직감했다. 도플갱어의
- 공격이 아니라, 이성민 본인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검은 심장이 요력을 받아 펌프질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이번 일격으로 끝내지 못한다면.
- 아니. 끝낼 수 있다. 이성민은 그를 확신했다. 확신과 함께 무공을 준비한다. 추혼일살이나 분뢰추살, 복사백탐으로는 무리다. 도플갱어가 끌어올리는 힘은 구룡살생으로 막을 수
- 준이 아니었고 절명섬으로 저 부푼 강기를 뚫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사용하지 못한 무공을 택해야 한다.
- 구천무극창의 육초.
- 그 이상의 무공은 무리다. 정신세계에서도 가혹한 수행과 기나 긴 시간으로도 간신히 도달했던 무공들이다. 지금의 육체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언제 가능할까.
- ‘할 수 있어.’
- 구천무극창 육초. 공도空道.
- 창을 덮고 있던 자색의 강기가 부푼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내질렀다. 그 순간에 도플갱어의 강기가 폭발하여 이성민을 덮쳤다. 그것과 닿는
- 순간 파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공도는 도플갱어의 공격을 모조리 휘감더니 회전을 통해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성민은 손에 전해지는 압박감을 견뎌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 ㅡ꽈아아앙!
- 살덩이로 이루어진 벽들이 모조리 폭발했다. 흩뿌린 파편에 얻어 맞은것만으로도 그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이성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부유감 속에서 길을 찾았다. 창을 내지른
- 곳이 이성민이 가야할 길이었다. 홱하고 날린 몸이 공백의 길을 꿰뚫는다. 그 끝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도플갱어가 서있었다.
- 그 얼굴.
- 퍼어어엉!
- 소리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방으로 튀었던 강기의 파편들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자색과 검은색의 안개가 퍼져 나간다. 무너지는 안개를 보면서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그녀
- 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를 내려 보았다.
- 몸뚱이의 절반이 사라진 도플갱어는 움직이고 싶어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두 눈을 깜박거리는 도플갱어의 시선을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 결국 말은 뱉지 않고 다시 다물었다. 해보았자 의미가 없다. 저것은 위지호연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지호연이 아니니까.
-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꾹 다물면서 손을 보았다. 창은 더 이상 무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쏟아 부은 힘을 창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창을 뒤
- 에 걸쳤다.
- 그러는 사이에 도플갱어의 눈이 감겼다.
- 완전히 죽은 것이다.
- [이겼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 [어떤 기분이냐? 본래라면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를 네 힘이 아닌 내 힘을 빌어 쓰러트린 것이다. 자랑스러우냐?]
- “아무렇지도 않아.”
-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숙였다. 그는 손을 뻗어 도플갱어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공도에 휘말려 사라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남은 사체 속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
- 혔다. 그것은 주먹만한 크기를 가진 광석이었다. 마석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그것을 일단 아공간 포켓 안에 넣었다.
- [준비해라.]
- 허주가 말했다.
- “무슨 준비?”
- [네 몸에 쏟아 넣은 요력을 거둘 것이다. 아마 반동이 심할 것이야.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 요력을 몸으로 받던 중에도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또 있다고? 이성민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정도의 힘을 사용했는데 대가가 없는 것
- 도 이상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 ‘준비 됐어.’
- [하하하!]
- 허주의 웃음소리와 함께, 몸 안에 들어와 있던 허주의 요력이 쭈욱 빨려나갔다. 몸에서 뿜어진 요력은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 속에 깃들었다.
- 정신을 놓을 뻔했다.
- 다양한 고통에 익숙해진 이성민이었지만, 지금의 고통은 여태까지 느껴왔던 고통들은 장난질로 느껴질 만큼 강력했다. 단전과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근육이 터지는 것 같았다
- . 뼈는 얼음이라도 쏟아 넣은 것처럼 시리다가 불로 달구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혈류는 역류하는 것 같았다. 이성민은 입을 쩍 벌리고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 [버틸 만 하냐?]
- 그런 허주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이성민은 한참 동안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허주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정신을 잃는 순간 고
- 통을 견뎌내지 못한 뇌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고통은 끔찍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과도 같던 고통이 끝난다.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몇 번이나 씹은 입술은 피투성이였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
- 으나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괘, 괜찮아요?”
- 주변에는 루비아가 있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가 이성민이 정신을 차리자 황급히 다가왔다.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킨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다가 루비아를 보았다.
- “뭐라도 조금 해주지 그랬습니까?”
- “땀 닦아주고 피 닦아주고 열심히 했거든요?”
- “치유 마법을 펼칠 줄 모르는 겁니까?”
- “할 줄 몰라요.”
-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히 내밀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루비아의 로브는 피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닦을 것이 없어서 입고 있던
- 로브로 몸을 닦아 준 모양이었다.
- “시간은… 얼마나 흘렀습니까?”
- “1시간 정도…”
- 1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리며 창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 “뭐, 뭐하는 거예요?”
- “가야해.”
-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욱신거림이 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뼈가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근육이 아팠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 이성민은 시야 한쪽에 있는 미니맵을 보았다. 도플갱어와 싸우는 도중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던전 안에 남아있는 것은 이성민을 제외하면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확인해야
- 만 했다.
- 이성민은 발을 질질 끌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변이 워낙 엉망이기는 했지만 미니맵 덕분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확인 된 바로는 도플갱어들도 모조리 죽어
- 있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이성민의 행동에 거리낌은 없었다.
- 혈혈노파의 시체가 보였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는 도끼 자국과 장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 “이건…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 루비아가 이성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 “…마법? 어떤 마법?”
- “확실하지는 않은데… 잠깐만요.”
- 루비아를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진들이 펼쳐졌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루비아가 머뭇거리며 이성민을 힐긋거렸다.
- “괜찮습니다.”
- 이성민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이동 마법이 펼쳐졌어요. 아마 던전 밖으로 이동하는 마법이었겠죠.”
- 백소고와 장득수, 취걸이 그 정도의 고등 마법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스크롤일 것이다.
-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 “아… 네. 탈출 마법으로 이동한 사람은 셋이에요. 정확히 누가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알겠습니다.”
- 그것으로 충분하다.
- 백소고는 죽지 않았다. 취걸, 장득수와 함께 던전을 벗어났다. 그러면 된다. 만족할 수 있다. 백소고를 살리기 위해 이 던전에 들어왔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어서 지금까
- 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것을 이루었다.
- “…그러면…”
-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이성민을 보고서 루비아가 당황하며 달라붙었다.
- “어, 어디로 가는 건가요?”
- “앞으로.”
- 이성민은 몸의 통증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 “앞으로 가야합니다.”
- 미니맵을 본다.
- 던전의 끝에 노란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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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회-6 >
- “…대단… 하군…”
- 죽어가는 목소리. 위지호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 보았다. 인간이 아닌 괴물이 위지호연을 올려 보고 있었다. 양 팔은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었고 하반신은 아예 존재
- 하지 않았다.
- 강했다. 위지호연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것을 인정했다. 여태까지 위지호연이 에리아에 살아 온 9년 간, 저기 죽어가는 괴물만큼 위지호연을 힘겹게 한 상대는 존재하지
- 않았다. 저 이름모를 괴물은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미 몇 년 전에 아버지 천마의 무위를 뛰어넘은 위지호연으로서도 진심이자 전력으로 상대에 임해야 할 정도였
- 다.
- “필멸자… 그들 중에서도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늘…”
- “넌 강했다.”
-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조금의 피로를 느끼면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강적이기는 하였으나, 긴 싸움을 통해 위지호연이 흘린 것은 피가 아닌 땀이었고 고통
- 이 아닌 조금의 피로감 뿐이었다.
- 그를 알기에 괴물은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 “보이는 구나.”
- 괴물이 눈을 반개했다. 시뻘건 안광을 줄줄 흘리던 눈은 이제는 끝 모를 깊이를 가지고 위지호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 “네가 가진 운명.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될, 패왕의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를 벗어나 군림하게 될 운명이 보여.”
- “무슨 말이냐.”
- “천재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네가 타고난 재능은 운명조차 뒤틀었구나… 흐흐! 이러니 내가 인간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이래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 . 나도 결국은 이곳에 묶여 있는 망령일 뿐이니… 자아. 거두어라. 너에게 거두어진다면 오히려 영광일 터이니.”
- 그 말을 들으면서 위지호연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힘이 몸을 일으켰다. 괴물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 소리 없이 죽음이 피어났
- 다. 던전의 최종에 존재했던 괴물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고, 그것은 허공을 맴돌다가 위지호연에게 스며들었다. 위지호연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몸 안에 깃드는 힘을 의식했다.
- 그것은 의지 없는 힘의 덩어리였고, 자연스레 위지호연의 천마신공의 흐름에 맡겨져 그녀가 가진 힘의 일부가 되었다.
- 위지호연은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이 가로막던 곳의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위지호연은 손을 뻗었다. 흑룡포가 대신하여 앞으로 날아가 문을 열었다.
- 문의 안쪽에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많았다. 위지호연은 허리춤에 매인 아공간 포켓을 열었다. 그 막대한 금은보화들이
- 모조리 위지호연의 아공간 포켓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보물창고의 끝에 도착했다. 공중 위에 검은 색의 천이 떠있었다. 위지호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움찔거
- 리던 천이 위지호연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그것은 위지호연의 몸 전체를 덮더니 착 달라붙는 의복이 되었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 입은 것 같지가 않았다. 위지호연은 이 옷이야말
- 로 이 던전에서 주어지는 가장 뛰어난 보상임을 깨달았다.
- “제법 재미있었어.”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지난 손이 위지호연의 가슴에 닿았다.
- “던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렵다기 보다는 재미있더군. 마지막 녀석은 굉장히 강했어. 아마 예전의 나였더라면 이길 수 없었을 거야.”
- 정말로 그랬을까?
- “나는 바보가 아니야. 이 던전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했어. 나는… 너와 똑같이 생긴, 구천무극창을 사용하는 네가 아닌 너와 만났었다. 너는 재미있는 상대였어. 내가
- 가르친 무공이었지만 직접 상대를 해보니 의외인 점이 많더군. 워낙에 잘 만들어진 무공이었으니까 말이야.”
-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는 부러진 창에 몸을 기대고서 위지호연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위지호연은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것이 이성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 “너도 이 던전을 목적으로 온 것이냐. 하지만 조금 늦었군. 이 던전의 마지막 괴물을 쓰러트린 것은 나거든.”
- 위지호연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양보해줄 생각은 없다. 이 던전을 공략한 것은 위지호연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위지호연이 취하게 되었다.
- “하지만 네가 달라고 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어. 우리는 친구니까. 안 그래?”
- “…아니. 주지 않아도 괜찮아.”
- “이제야 말을 하는 군.”
- 위지호연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위지호연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피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하고 있었어.”
- “하하! 멍청한 녀석. 9년이나 흘렀다. 9년이 흘러서 만나게 된 거야. 9년 동안 나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 한 마디도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냐?”
- “생각은… 했었지.”
- 생각해 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 뿐이다. 위지호연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응시했다.
- “너는 누구를 만났지?”
- “…너.”
- “나인가. 그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 뒤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었거든. 그래도 살아남았군. 나를 쓰러트렸다는 것이겠지?”
- “힘들었어.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 “하지만 죽지는 않았지. 9년… 서로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떠냐?”
- “의미는 많았지. 고생도 많이 했고.”
- “너는 강해졌어.”
- “만족은 안 돼.”
-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는 부러진 창을 내려 보았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싸웠을 때를 떠올린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허주의 도움. 요력의 보조가
- 있었기 때문에 정신세계에서 도달한 무위를 재현할 수 있었다.
- “어째서?”
- “너는 나보다 더 강하니까.”
- “하하! 알고 보면 너도 욕심은 참 많다니까. 나보다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냐?”
- “지금은.”
- “지금은… 이라는 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인가?”
- “세상은 넓으니까.”
- “좋은 일이야. 확실히 9년 전과는 다르군. 그때의 너는 제대로 된 목표라는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기껏 죽음에서 돌아왔음에도 뭔가
- 대단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
- “그게 싫었어.”
- “그래서 변했다는 거냐?”
-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해.”
- “아직인 모양이군.”
- 위지호연이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몸을 돌린 그녀는 성큼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이성민은 가까워지는 위지호연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 많다. 이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되었다. 지금의 이성민은 아직 위지호연과 대등한 위치에 서지도 않았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성
- 취를 자랑스레 말할 만큼의 수준도 되지 않았다.
- 이성민은 그것을 ‘싫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백소고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므쉬의 산에 있었을 적과 비교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얼마나 뛰어나졌는지
- . 결과적으로 백소고에게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만족했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으니까.
- 그렇다면 위지호연은?
- ‘아직은 안 돼.’
-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지금 위지호연에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었을 때. 위지호연이 보이는 반응이 어떨 것인지 두렵다. 단순한 칭찬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정 받고
- 싶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두고 친구라고 했다. 이성민도 위지호연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된다. 친구니까, 그러니까.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위지호연에게 부끄러울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 위지
- 호연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 “약속했던 날까지는 아직 1년이 남았나.”
- “응.”
- “약속 장소는 기억하고 있어. 날짜도. 계속… 생각했거든. 너랑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너는 어떤 모습이 되었고, 너는
-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 “…너는 많이 변했어.”
- “너도 마찬가지야. 아, 그래. 기회가 된다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 내 가슴은 어때?”
- “뭐?”
- 9년 전과 똑같았다. 위지호연은 대뜸 뜬금없는 이야기를 물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성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 온 위지호연이 자신의 가슴
- 에 손을 올렸다.
- “네가 아는 전생에 비해서 그리 커지지 않은 것 같은데. 네 취향은 어떠냐? 조금 더 큰 편이 좋은가?”
- “…어… 내 대답이 중요한 건가?”
- “기왕이면 네가 좋은 쪽이 나도 좋으니까 말이야.”
- “딱히 상관은 없다고 보는데…”
-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풍유환을 먹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 아, 너는 뭔지 모르려나? 풍유환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가슴이 확실하게 커진다고 하더군. 부작용도 없
- 고. 그런데 막상 가슴을 키우면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서…”
-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진심으로 위지호연의 가슴이 크건 말건 이성민은 신경쓰지 않았다. 가슴 크기라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위지호연이 히죽 웃었다.
- “나와 함께 갈 테냐?”
- 위지호연이 물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 “나를 추종한답시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이 많아. 귀찮은 놈들이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기대를 품고 나를 대하고 있어.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 않아.”
- 독고귀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를 죽인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덤벼들던, 마랑철권의 고함과 함께.
- “나는 타인에게 기대받는 것이 싫어. 마교에 있었을 적에도 그랬으니까. 그들이 멋대로 기대하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어떻게’ 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 역겹다.”
-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거야.”
- “알아. 내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멋대로 기대를 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네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괜찮아. 나 역시 너
- 에게 기대하고 있으니까.”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눈은 9년 전에 제나비스에서 보았던 눈과 똑같았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를 품은 눈이다.
- “너와 함께 다닌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많은 것을 해왔지만, 너랑 함께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런 예감이 든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 “…미안해.”
- 이성민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 “아직, 나는 그럴 수가 없어.”
-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싫은 것이냐?”
- “아니. 그건 아니야. 단지… 그래. 나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아.”
- “욕심이 많아.”
-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더니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에 얹었다.
- “나는 지금의 너로도 충분히 좋아.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졌어.”
- “나 스스로 만족을 못하는 거야. 나는 더 할 수 있어. 더 먼 곳을 보고 왔으니까, 더 나아갈 수 있어.”
- “하하!”
- 이성민의 말에 위지호연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이성민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의 말에 강한 집념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위지호연을 기쁘게 만들
- 었다. 적어도 9년 전의 이성민은 저런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변하기 마련이다. 위지호연은 변해버린 이성민을 가까이서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 “그렇다면 1년 후에 다시 보도록 하자.”
- 약속했던 그곳에서. 위지호연이 덧붙였다.
-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갈 거야. 네가 더 갈 수 있듯이, 나도 더 갈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데 1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강할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 안목이 높아져 있겠지. 나는 지금의 너를 이곳에서 봐 버렸으니까.”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고서 이성민의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이성민을 지나쳤다. 이성민은 배웅의 말을 전하기 위해 위지호연을 돌아 보았다.
- “1년 후에 보자.”
- “그래.”
-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말을 듣고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이성민에게 보이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미묘한 가슴의 떨림을 즐겁게 받아 들였다. 9년
- 전의 기억이 났다. 처음 제나비스의분수대 앞에서 소환되었을 때. 뭔지 몰라 멀뚱히 서있던 중에 느꼈던 시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고 위지호연은 그것이 좋았다. 처음으로 갖
- 게 된 또래 친구. 단지 그것뿐인데도, 위지호연은 여태까지 살아 온 평생 중에서 제나비스에서 살았던 짧은 시절에 많은 향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 ‘욕심이 나. 하지만 참을 거야.’
- 위지호연은 아래로 내린 손을 쥐었다 피면서 생각했다.
-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 그래서는 미움 받게 될 지도 모르니까. 위지호연은 하나 뿐인, 유일한 친구의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아직 하고 싶
- 은 말은 많다. 나누고 싶은 대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않다. 때도 아직 되지 않았다.
- 1년 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 하자.
- ‘그러고 보니 이 말은 하지 못했어.’
- 문을 나서면서, 위지호연은 뒤늦은 생각을 했다.
- ‘보고 싶었다는 말.’
- 그 말도 가슴에 묻는다.
-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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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주-1 >
- “아아아악!”
- 백소고는 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점혈은 행동의 자유를 앗아가 버렸다. 장득수는 그런 백소고를 보면 안절부절
- 했고, 취걸은 우울한 얼굴로 백소고를 응시했다.
- “대체 왜!”
- 백소고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보았다. 취걸은 백소고의 시선을 받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백
- 소고가 기다리지 않고 내뱉었다.
- “왜 나를 데리고 나온 건가요?!”
- 너무 비명을 질러 쉬어버린 목소리는, 평소의 백소고의 목소리와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았다.
- “사제가, 내 사제. 하나 뿐인… 내 사제를. 나는 사제를 구해야 해요. 사제가 나를 대신해서 그 괴물과 맞닥트렸는데! 사제, 내 사제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괴물과 맞섰다
- 고요. 당신들과 함께 사제를 구하러 가겠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 더듬거리며 뱉은 백소고의 말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명확했고 들끓는 감정은 노골적이었다. 원망을 듣는 것이 당연하지. 눈치없는 장득수도 그를 알고서 침묵했다. 그는
- 변명하는 대신에 눈을 감고서 머리를 숙였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취걸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취걸은 백소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해서는 안 되었다.
-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은 취걸이다. 기습으로 백소고를 점혈하고,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며 놀란 장득수를 설득하고, 혈혈노파에게서 취한 스크롤을 사용해 던전을 탈출한 것도 취
- 걸이다. 스크롤은 성능이 뛰어났다. 그들은 많은 거리를 격하고서, 도시 크론의 개방 본파로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 크론은 던전과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는 도시였으며, 개방의 본파 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초 장거리 텔레포트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마
- 법이다. 대마법사라고 추앙받는 이들조차 도시 단위의 텔레포트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던전에서 얻은 스크롤은 통상적인 상식과는 아득하게 벗어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 어
- 마어마한 거리의 텔레포트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 “…우선. 진정하십시오.”
- 취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해 봤자 백소고가 진정하지 않을 것임은 취걸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백소고는 그 말에 눈을 부릅 뜨고서 취걸을 노려 보았다.
- “우선. 백소저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은 크론에 있는 개방 본파입니다. 이곳에서 그 던전까지 돌아가려면 백소저가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도 한달은 걸릴 겁니다.”
- “마법을…”
- “우리가 이곳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던전에서의 스크롤 덕분이었습니다. 그 어떤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백소저가 원하는 시간 안에 백소저를 그 던전 앞으로 이동시
- 켜 줄 수는 없을 겁니다.”
- “왜 도망친 거죠…?!”
- 백소고는 이를 악물고서 내뱉었다. 몸이 점혈되지만 않았으면 백소고는 현실이 어떻고 간에 이 던전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크론의 모든 마법사 길드를 돌아다니며 텔레포트
- 를 부탁하던가.
- “말하지 않았습니까.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 취걸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 셋. 거기에 백소저의 사저인 귀창이 힘을 합친다고 하여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 “해보지도 않았잖아요…!”
- “해보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나는… 백소저. 나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건 장득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그렇다면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나요.”
-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취걸은 그런 백소고의 시선을 아프게 느꼈다. 백소고를 알고서, 백소고를 연모하고. 그런 시간 동안 취걸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저런 시선을 받아
-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했다. 그럴 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 “…왜죠?”
- “나는 백소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 그 말에 백소고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잠깐 동안 취걸을 보던 백소고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잠시 뒤에, 백소고는 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 “비겁하군요.”
- 탄식어린 목소리였다.
- “비겁하고, 비겁하고… 너무… 비겁해요. 이것이 무림맹인가요. 이것이 협의俠義인가요? 위지호연을 감시하면서 위지호연을 따라 던전에 들어간 것은,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 . 그녀가 던전에서 강한 힘을 얻고 정말로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우리는 막지 못했어요. 아니, 막지 않았죠.”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위지호연과 싸우다 죽는 것이 협의라는 겁니까?”
- “적어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협의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 “그건 만용입니다. 백소저. 위지호연에게 도전하여 죽는 것은 협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더 많은 협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 “…사제.”
-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내 사제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도… 협의인가요?”
- “…일부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터무니없는 말이다. 위선.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득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취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귀창은 영웅이었습니다.”
-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 “…그러면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 “…점혈을 풀어주세요.”
-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말이 위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요?”
-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 “나는 이상을 위해 무림맹에 들어왔어요.”
- “백소저가 위하는 이상은 뭡니까? 이 세상. 매일매일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놈들이 소환되는 이 세상에서 악을 근절하겠다는 것? 그건 불가
- 능합니다.”
- 백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기로 얼룩진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아프게 느끼면서, 취걸은 계속해서 말했다. 말해야만 했다.
- “누구나…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상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 타협하는 겁니다. 현실을 알고 있으니까.”
- “그만두겠어요.”
- 알고 있다. 이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이라는 것은 이상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벅차다. 그러니 타협하는 것이다.
- “나도 알아요. 내가 바라는 이상이 터무니없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무림맹에 들어온 것은, 이곳이 내 이상과 그나마 맞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
- 요.”
- “…내 의견이 무림맹 전체의 의견은 아닙니다.”
- “점혈을 풀어주세요.”
- 백소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취걸은 입을 다물고 백소고에게 다가와 그녀의 점혈을 풀어 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 선 백소고는 숨을 크게 내뱉으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 그리고는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손을 휘둘러 취걸의 뺨을 갈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취걸의 머리가 홱하고 돌아갔다.
- “어,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 백소고가 내뱉었다.
- “역겨워서.”
- 취걸은 방을 나서는 백소고를 잡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았다. 단순한 따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취걸은 쿡쿡 웃으면서 물었다.
- “차인걸까요?”
- 나사가 반쯤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 *
- 위지호연이 보물창고를 빠져나가면서 던전은 완전히 닫혔다. 그와 함께 이성민도 자연스레 던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위지호연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
- 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휘둘릴 수는 없었다. 1년은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의 여관에 들어오고서, 이성민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 아프다.
- 이성민은 숨을 몰아 쉬면서 팔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쥐 죽은 듯이 누워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성민은 낡은 천장을 올려 보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곱씹었다.
-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이성민은 그림자를 내려 보면서 네블을 불렀다.
- “예.”
- 네블이 솟구쳤다. 그는 피로에 절은 이성민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네블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 “묵섬광에 대한 정보를 구해 주십시오.”
-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 “알겠습니다. 정보 길드를 통해 수소문해보도록 하죠. 그 외에… 다른 요구는 없으십니까?”
- 네블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은 창으로 향했다. 새로 받은지 얼마 안 된 것인데 형편없는 꼴로 변해 있었다. 네블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 “이거야 원… 셀게루스님이 화를 낼 겁니다. 마이스터가 공 들여 만든 무기가 저렇게 박살날 줄이야. 드래곤이라도 잡으신 겁니까?”
- “그럴리가요.”
- “농담입니다. 상대가 드래곤이었다면 이성민님은 이미 죽었겠죠. 원하신다면 셀게루스님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 “…아, 그 전에.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성민이 꺼낸 것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리면서 얻은, 주먹만한 크기의 광석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네블의 눈이 동그랗게
- 떠졌다.
-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 네블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려운 요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네블에게 광석을 건네 주었다. 주의깊은 눈으로 광석을 살피던 네블이 감탄을 터트렸다.
- “맙소사. 이걸 대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 “…뭐길래 그럽니까?”
- “이건 오리하르콘입니다.”
- 네블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오리하르콘이라는 금속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에리아에 존재하는 무수
- 히 많은 광물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희귀한 광물이었다.
- “저는 대장장이가 아니기에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지만, 제가 판단하건데 이 오리하르콘은 불순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은 최상품입니다. 판매하신다면 성채 몇 개는 구입하실 수
- 있을 겁니다.”
- “그렇습니까?”
- 놀라기는 했지만 그 정도. 이성민은 마음을 진정 시켰다. 전생에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광물이었지만, 지금은 이성민의 소유가 되었다. 놀랄 것도
- 없다.
- “마침 잘 되었군요. 쓰던 창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셀게루스님에게 오리하르콘을 드려 무기 제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 “바로 연결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 “예.”
- 이성민의 대답에 네블이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민의 앞이 쩍하고 벌어지더니 셀게루스의 공방과 연결되었다.
- “오리하르콘이라고?!”
- 얼굴을 보자 마자 셀게루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셀게루스의 얼굴에는 평소의 권태로움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들여 보았다.
- “정말이야? 오리하르콘, 그것도 제련되지 않은 원석을 가지고 있다고?”
- “아… 예.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제가 가진 창이…”
- “그건 상관없어!”
- 셀게루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민은 셀게루스가 그렇게 큰 목소리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버렸다.
- “줘봐. 일단 내가 직접 봐야겠어.”
- “아… 예.”
- 이성민은 곁에 나타난 네블에게 오리하르콘 광석을 넘겨주었다. 네블을 통해 오리하르콘을 넘겨 받은 셀게루스는 크게 뜬 눈으로 오리하르콘을 훑어보면서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 “그러니까… 그걸로 창의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크기가 충분하지 않기는 하지만 가능할지…”
- “모르는 소리 마.”
- 이성민의 말에 셀게루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양 손으로 오리하크론 광석을 잡더니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주먹만한 오리하르콘이 크게 부풀었다.
- “이 정도로 불순물이 없는 오리하르콘이라면 창 한 자루는 거뜬해. 오히려 만들고도 남을걸.”
- “그렇다면 남은 오리하르콘은 제작 보수로 하죠.”
- 이성민이 별 생각없이 그렇게 말하자, 셀게루스가 눈을 크게 뜨고 이성민을 보았다.
- “너 미쳤어?”
- “…예?”
- “남은 것을 보수로 하자고? 뭔 말도 안 되는…! 너는 진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모든 대장장이가 보수 없이 제작을 맡으려 들 거야. 오리하르콘은 그만큼
- 희귀한 금속이라고.”
- “그렇다고 공짜로 부탁하기에는…”
- “아니, 됐어. 보수는 필요 없어. 나도 제련되지 않은 오리하르콘을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차라리 창 말고 보조 무기를 만드는 것은 어때?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 단검 몇 자루는 더 만들 수 있을 거야.”
- “그렇다면… 그것으로 부탁…”
- [아니. 단검 말고 차라리 이 갑옷을 보수해라.]
- 이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허주가 끼어들었다.
- [이 갑옷도 매개로 쓸 정도는 되지만, 내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아. 오리하르콘은 마력 반응이 뛰어나니까 내 힘도 이전보다 잘 받아낼 수 있겠지.]
- “…단검 말고. 이 갑옷을 오리하르콘으로 보수할 수 있을까요?”
- “전부다 하는 것은 무리인데…?”
- [상관없다고 말해라.]
- “상관없습니다.”
- 오리하르콘 단검을 가지고 있어 봐야 쓸 곳도 없다. 쓰지도 않는 단검을 가지고 있느니, 허주의 말대로 오리하르콘을 통해 마갑을 보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런데. 당신이 들어 있는데 마갑을 제련해도 되는 겁니까?’
- [잠깐 동안 거처를 옮기면 된다. 저 반쪽짜리 창도 미스릴을 쓴 것이니, 내 혼을 잠깐은 담을 수 있겠지.]
- 이성민은 셀게루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창을 잡았다.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뻗어져 창 속으로 스며들었다.
- [됐다.]
- 창이 웅웅거린다. 이성민은 마갑을 벗어 네블에게 건네 주었다.
- “…묘한 존재를 사역하고 계시군요.”
- [사역이라니, 새끼가 뒤질려고.]
- 허주가 으르렁거렸지만 네블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성민은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서 네블에게 부탁했다.
- “허주에 대한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 “허주…?”
- “네. 몇 백 년 전에 이름을 날린 요괴라고 하더군요.”
- “알겠습니다. 묵섬광에 대한 정보와 함께 전해드리지요.”
- 그것으로 에레브리사와의 거래는 끝났다. 이성민은 창을 내려 놓고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 “…피곤해.”
-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 ======================================
- < 허주-2 >
- 나른한 감각 속에서 이성민은 눈을 떴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어렵잖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 ‘꿈?’
- 자각몽을 꾸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므쉬의 산에서 꿈의 시련을 받았을 때, 악몽 속에서 이성민은 숱하게 자각몽을 꾸었었다. 그 시절에 꾸었던 꿈들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몸서리
- 쳐질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다. 흔히들 자각몽이라고 한다면 꿈속에서 바라던 대로 꿈이 바뀌는, 그런 것을 기대하겠지만 이성민이 겪었던 자각몽은 그런 편리한 것들이 아니었다.
-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 보았다.
- “일어났나?”
- 목소리.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악몽과는 다르다. 보통의 꿈과도 다르다. 감각적인 면에서는 데니르의 권능을 통해 들어갔던 정신세계와 닮아 있었다
- .
- 목소리의 주인은 허주였다.
- 그는 흔들리는 요력을 몸뚱이로 삼고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몸 전체가 그랬다.
-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냐?”
-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왜 자신의 꿈 속에 허주가 있는 것인가 궁금하였지만, 우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 허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 . 이윽고 그것은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허주는 이성민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거한이 되었다. 손은 머리 하나는 우습게 손으로 감싸 으깰 수 있을
- 만큼 컸다.
-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처럼 생겼군.”
-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평했다. 대요괴라고 하기에 뿔과 이빨, 손톱을 가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본 허주의 본 모습은 키와 덩치가 크다는 것을
- 제외하고서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 “요괴는 인간과 닮아 있으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요괴는 몬스터가 아닌 아인이다.”
- “오크같은?”
- “그런 저열한 놈들과 비교하지는 마라.”
- 허주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팔을 붕붕 돌렸다.
- “진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몸뚱이를 갖게 되니 기분은 좋군.”
-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냐?”
- “시험 삼아서 해 보았다. 네놈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네놈과 영적으로 연결되었거든. 그래서 할 수 있나 해 보았는데… 네놈이 잠들어 있는 중에는 꿈에 개입할 수 있더군. 육체
- 를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 “해보기는 한 모양이군.”
-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패해버렸어. 네놈에게 어린 가호는 나의 힘으로도 뚫을 수가 없더구나. 잠자는 숲에서는 네놈의 정신력을 뚫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신력이
-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버렸어.
- 어지간한 존재라면 네놈의 정신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 짚이는 것이 있었다. 프레스칸의 정신 마법은 이성민의 가호를 뚫지 못했다.
- “그래서. 볼 일은 끝났나? 그렇다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자고 싶거든.”
-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 이리 와라. 허주가 이성민에게 손짓했다.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허주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 “뭐냐?”
- “말하지 않았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고.”
- “그러니까 뭔데.”
- “네놈. 뭐하는 놈이냐?”
- 허주가 곧바로 질문했다.
- “네놈에게 요력을 빌려 주었을 때. 그때의 나는 네놈과 영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면서, 네놈의 감정의 일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 반푼이 괴물과 싸웠을 때 네놈이 느끼던
- 감정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인간같지 않던 계집과 대했을 때의 네놈의 감정도.”
- “마음대로 읽어대는군.”
- “느껴졌을 뿐이다.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야.”
- “정확히 뭘 듣고 싶다는 거냐?”
- “네놈이 여태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네놈과 그 계집의 관계. 네놈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 “듣고 싶은 것이 참 많으시군. 내가 왜 그것을 말해줘야 하는 거냐?”
- “네놈과 앞으로 제법 오랫동안 지내야 할 텐데 서로에 대해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나? 그리고 네놈은 나에게 빚이 있어.”
- “빚?”
-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 반푼이와 싸우던 중에 죽었을 것이다.”
- 안다. 그때 허주가 요력을 보태주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 이성민이 이 몸뚱이로 펼칠 수 있는 구천무극창은 사초인 구룡살생까지가
- 한계였고, 무영탈혼은 삼식인 이 보겁살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의 무공은 알고 있고 정신세계에서 펼쳐 본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의 몸으로는 온전히 펼칠 수가 없었다.
- 사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성민의 몸은 환골탈태를 거친 완전한 초절정 무인의 것이다. 구천무극창과 무영탈혼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고 해도 초절정의 몸뚱이로
- 펼치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
- 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성민이 가진 내공은 여타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 펼칠 수 없는 이유는, 무공의 수준이 높다 보다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심득이 겪은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육체가 따르지 못한다. 요력의
- 보조를 받았을 때에는 구천무극창의 육초인 공도까지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지금의 몸뚱이로 공도를 펼치려 들었다가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 “…내가 마음에 들어서 도와줬다는 것 아니었나?”
-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나?”
- “말해서 뭐하자고.”
- “부끄러운가?”
- “그것도 조금 있기는 해.”
- “새끼. 비싸게도 구는 군. 네놈, 알고는 있냐? 네놈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어.”
- “그건 또 무슨 말이냐?”
- “자기 궁금한 것만 챙겨 들으려는 이기적인 새끼야. 알고 싶거든 이 어르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거라.”
-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허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주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키지 않을
-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허주가 말한, ‘문제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 어차피 허주는 이성민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길 것은 없었다. 이성민은 허주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나비스에서 위지호연과 만나고, 위지호
- 연과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되어 무슨 약속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와 만나고, 수행 끝에 므쉬의 산에서 내려온 점. 베헨게르에서 있었던 일들. 프레스칸과 검
- 은 심장, 아이네. 소림에서의 수행과 화산… 데니르까지.
-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허주는 바닥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허주는, 이성민의 말이 끝나자 바로 입을 열었다.
- “마법은 왜 안 쓰는 거냐?”
- “…어?”
- 대뜸 말한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하고 말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이성민은 상태창을 띄웠다.
- “아.”
- 잊고 있었다. 므쉬의 산에서, 이성민은 스칼렛에게 몇 가지의 마법을 배웠었다.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스트렝스, 헤이스트. 사실상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버틸 수
- 있었던 것은 저 네 가지 마법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 “네놈에게서 마법의 느낌이 나. 정확히 무슨 마법을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보조 마법을 몇 가지.”
- “버프 종류냐?”
- “그것도 있는데…”
- “이 병신 새끼. 그런 것들을 배워놓고서 왜 안 쓰는 거야? 무공이랑 마법을 같이 병행하면 뒈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 허주가 신랄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 언제였더라? 정신세계에서의 수행에서는 무공만 죽어라 사용했고, 그
- 기억을 그대로 갖게 되면서 마법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 “공격 마법과 무공을 병행한다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이 될 지도 몰라도, 보조 마법이라면 무공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 해 보기는 했냐?”
- “옛날에는…”
- “병신 새끼.”
- 허주가 이죽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네놈이 꽤 마음에 들었다.”
- “…왜?”
- “우직한 멍청이는 좋아하거든.”
- 허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까놓고 말하지. 여기서 1년이 더 흐른다고 해서 네놈이 그, 위지호연이니 소천마니 하는 계집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 “나도 알아.”
- “신의 시련은 까다롭지. 정신 세계에서 2100년을 수행했다고? 큭큭! 어쩐지, 네놈이 가진 재능 이상의 무공을 쓰더니… 부족한 재능을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보충했구나. 2100
- 년 동안 그 지랄을 해서 고작해야 그 정도라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만.”
- “무시당할 정도로 약한가?”
- “인간 이상의 힘임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이들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 허주가 단언하여 내뱉었다.
- “그 계집은 인간을 초월해가고 있다. 네놈이 정녕 그 계집과 동등하게 되고 싶거든 너 역시 그렇게 되어야겠지. 정신세계예서의 무위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하여도 부족해.”
- “…그건 어쩔 방법이 없지.”
- “인간이 아니게 될 방법은 많다.”
- 허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시선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 “가장 쉬운 방법은 흡혈귀가 되는 것이다. 혹은 라이칸슬로프가 되던가. 놈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가장 흔한 놈들이지. 방법도 어렵지는 않아.”
- “그러고 싶지는 않아.”
- 흡혈귀, 라는 말에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고집이냐?”
-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럴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할 뿐이지.”
- “크크! 나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흡혈귀나 라이칸슬로프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거든. 네가 흡혈귀가 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든 모체에게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 귀찮은 제약들이 생겨나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 “요괴가 되는 방법도 있다.”
- 허주의 눈이 빛났다.
- “요괴라는 것은 몬스터와 아인 둘 모두에 속하는 존재다. 인간이 요괴로 변한 것도 있고, 그냥 태어난 놈들도 있고, 요괴와 요괴가 떡을 쳐서 태어난 놈들도 있지.”
- “…나보고 요괴가 되라는 거냐?”
-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지. 요력은 너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애초에 네놈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괴물의 것이야. 그것을 중심으로 두고 내 요력으로 인해 변이한다면,
- 아주 재밌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허주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여태까지 인간으로 살았는데, 대뜸 인간이 아닌 요괴가 되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 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 “뭐.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네놈이 마음에 드니 알려주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나쁘지 않은 기회임을 알거라. 이 어르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니까.”
- 허주는 그 말을 남기고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민은 꿈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멋대로 남의 꿈에 들어오고선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군.”
-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이성민의 의식은 멀어졌다.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성민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밀어냈다. 근처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에 시선을 내리니, 침대 아래에서 루비아가 웅크리고서 잠을
-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잊고 있었군.”
-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루비아의 몸을 들어다가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귀가 어두운 것인지 루비아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는 않았
- 다. 근처에 세워 놓은, 허주가 깃든 창이 웅웅거렸다.
- [오늘은 뭘 할 거냐?]
-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 포션을 연달아 먹어두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문제가 많았다. 이성민은 허주를 무시하고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아공간 포켓에서 쪼개 놓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꺼냈다.
- 먹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허주가 말했었다. 이성민은 우선 대환단의 반쪽을 입에 넣었다. 내공은 운기조식 없이 그대로 단전에 쌓였다. 단전은 며칠 전과 비교해서
- 굉장히 커져 있었다. 소림 최고의 비전 영약인 대환단을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성민은 단전의 크기를 확인하고서 마석도 흡수했다.
- ‘왜 던전에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겠군.’
- 마석으로 인해 증진된 내력을 확인하고서 이성민은 혀를 내둘렀다. 이성민이야 마석의 이점에 크게 구애되지 않지만, 정제 과정 없이 그 즉시 힘의 증진을 얻는 다는 것은 대단한
- 일이었다. 마석이 증진시킨 내공의양은 대환단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효율 좋은 마석뿐만이 아니라, 마이스터 대장장이가 눈을 뒤집을 정도로 순도 높은
- 오리하르콘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던전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당연했다.
- ‘그러고 보니 항룡십팔장도 있었지.’
- 이성민은 항룡십팔장의 비급을 아공간 포켓에서 꺼냈다. 이것을 어떻게 처분할까. 에레브리사를 통해 판매할까 싶기도 하였지만, 백보신권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가격을
-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개방 쪽에 가져다줄까.’
- 물론 당장은 아니다. 우선 에레브리사를 통해 의뢰한 백소고와 허주에 관련 된 정보를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프레스칸을 추격해야만 했고, ‘북쪽으로도 가야해.’
- 불영대사에게 깃든 신령이 말했던 북쪽에도 볼 일이 있다. 겨울까지 가야 하니 아직은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개방에 들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운용하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이성민은 단전의 바닥에 있는 기묘한 힘의 존재를 의식했다. 내공과 섞이지 않고 혼자 고여 있는 그 힘은 요력
- 이었다.
- ‘이건 또 뭐야?’
- 이성민은 운기조식을 멈추고 허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허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 [내 잔재로군. 네놈과 내가 영적으로 연결 된 흔적이다.]
- ‘거슬리는데. 치울 수는 없나?’
- [내버려 둬라.]
- ‘이 요력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 [몸뚱이에 괴물의 심장을 박고 있으면서 별 시답잖은 것을 걱정하는 군. 아무 문제 없으니까 그냥 둬.]
- 허주의 대답에 이성민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자하신공에 몰입하면서 이성민은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호흡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고
- 자하신공의 자색 기운이 주변을 떠돌았다.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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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주-3 >
- 루비아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루비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 “잘 잤습니까?”
- “…바닥에서 잤던 것 같은데.”
- “거슬려서 옮겼습니다.”
- “말 참 예쁘게 하시네요. 나는 걱정 되서 당신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곁에서 보고 있었는데.”
- “걱정할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 “죽기 직전까지 가고, 아프다고 뒹굴면서 비명까지 질렀던 사람이.”
- “비명은 안 질렀습니다.”
- “소리 없는 비명은 질렀었죠. 어쨌든, 걱정 되서 보고 있었다고요.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자는 것 같아서 마법으로 몸도 씻겨 드렸고.”
- 루비아가 쏘아 붙였다. 어쩐지. 피곤하고 힘들어서 씻지도 않고 바로 곯아 떨어졌는데 몸이 깨끗하더라니.
- “서비스가 좋으시군요.”
- “냄새가 심했거든요.”
- 루비아가 코를 부여잡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하고서 벽에 걸쳐 세워 놓은 창을 들었다.
- “어디를 가는 거예요?”
- “몸이 꽤 나아져서. 바깥에서 몸이나 좀 풀어야겠습니다.”
- “그냥 푹 쉬는게 어때요?”
- “걱정해 주는 겁니까?”
- “그러면 안 되나요? 나는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그랬다가는 저희 주인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
-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인데.”
- 이성민은 엔비루스를 떠올리면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루비아는 조금 기가 죽은 것인지 고양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 “…반드시 찾아오실 거예요.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저를 남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 “그럴 리가… 없잖아요.”
- 대답하는 루비아의 목소리에 확신은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해도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겪은, 죽음
- 이 코앞까지 다가 온 사건들은 루비아가 가진 맹목적인 신뢰를 조금 흩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엔비루스에게서 만들어져 엔비루스를 위해 살아왔다.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 만, 그녀가 엔비루스와 함께 겪었던 위험들은 그녀를 사역하는 강력한 주인을 위협하기에는 나약한 것들이었다.
- 하지만 지금 엔비루스는 곁에 없다. 죽을 뻔 했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 “장난으로 한 말입니다.”
- 이성민은 우울하게 젖어가는 루비아의 얼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나한테 인도하지도 않았겠지요.”
- “…하지만 나는 죽을 뻔 했어요.”
- “‘우리’가 죽을 뻔 했죠. 결국 죽지 않았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안 죽을 겁니다.”
- 루비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녀의 눈을 보고서 어깨를 으쓱거리고선 밖으로 나갔다.
- 이성민이 급하게 숙박한 여관은 이 마을에서 유일한 여관으로, 굉장히 낡은 건물이었다. 마을의 규모는 제법 크기는 했지만,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은 언제나
- 위험이 인접해 있다. 도시 성주의 관리를 떠난 곳이기 때문에 치안도 좋지 않다.
- 1층은 지저분한 술집이자 식당이었다. 부랑자와 다를 것 없는 몰골을 한 자들이 모여들어 싸구려 술과 음식을 대낮부터 퍼먹고 있었고, 용병처럼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이성민은
- 그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아침이자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따라 내려 온 루비아가 이성민의 곁에 붙어 앉았다.
- “…냄새.”
- 루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나온 음식의 맛도 그저 그랬다. 깨작거리며 하는 식사가 끝나가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발을 질질 끌면서
- 이성민 쪽으로 다가왔다.
-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구료.”
- 입을 열때마다 악취가 풍긴다. 루비아가 질색하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이성민은 시선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얼굴에 시커먼 반점을 박고 있는 늙은 거지가 이성민을 보고 있었
- 다.
- “적선이라도…?”
- “개방입니까?”
- 이성민이 대뜸 물었다. 애초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지는 악취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웃었다.
- “그러는 그대는 귀창이쇼?”
-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낮았다. 여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이성민은 거지를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 “개방과 악연을 맺은 적은 없는데.”
- “끌끌! 어린 대협은 뭔가를 오해하고 계시구료. 그냥, 이 작은 마을에 범상치 않은 고수가 있기에 호기심에 물어보았을 뿐인데.”
- “맞습니다.”
- 조금 늦게 대답했다.
- “내가 귀창입니다. 뭐 문제가 됩니까?”
- “이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던전이 열렸고, 소천마 위지호연이 그 던전을 닫았다고 하더구려.”
- “소문이 빠르군.”
- “끌끌! 마법이 참 편리하지 않소?”
- “뭘 묻고 싶은 겁니까?”
- “우리 개방의 어린 영웅이 그 던전에서 왼 팔이 잘려 간신히 살아 나왔소. 초절정 고수인 역발산 장득수와 묵섬광 백소고도 함께 그 던전에서 빠져나왔지. 문제는 그 영웅들이
-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친 것이 고작이라, 던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마지막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오.”
- 그 말에 이성민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안도했다. 백소고가 무사히 던전에 나왔다는 것이 이성민을 안도하게 한 것이다.
- “무엇이 궁금한 겁니까.”
- “귀창. 그대는 어떻게 살아나온 것이오?”
- 거지가 묻는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 거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 보았다. 잠시 뒤에 이성민의 입이 열렸다.
- “살아나올 만한 짓을 하였으니까 살아나왔겠지.”
- “흐흐! 이 늙은 거지가 그대를 불쾌하게 한 것인가?”
- “아니. 그건 아니오. 그냥 제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 “어떤 이유로?”
-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물으십시오.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 그 말에 거지가 입을 다물었다. 이성민은 작은 짜증을 느꼈다. 애초에 그는 정파 무림맹이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위지
- 호연이 대단한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들은 멋대로 위지호연을 악으로 규정짓고서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들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장득수가 떠들어대
- 던 말을 통해 파악했다.
-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소이까?”
- “못 봤습니다.”
- 그러니 거짓말을 했다.
- “던전은 끔찍했고, 나는 살아남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위지호연 본인과는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중에 던전이 닫혔고, 그곳에서 강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 그것이 전부입니다.”
- 이성민의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인지 거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침묵했다. 잠시 뒤에 거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 “협조 해 주셔서 고맙소.”
- “아, 그리고.”
- 이성민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 주었다.
- “적선.”
- “…끌끌! 복 많이 받으십쇼.”
- 거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몸을 돌렸다. 이성민은 떠나가는 거지의 등을 보면서 한숨을 삼켰다.
- ‘이런 식으로 또 얽히게 되는 군.’
- 인연이라는 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결국 얽히게 되는 법이다. 식당 전체를 본다. 구석에 처박힌 부랑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개방이겠지.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
- 지만 개방이 까다로운 것은 고수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숫자’ 때문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거지가 있다. 다른 문파들은 색목인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지만, 개방은
-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나 받아들인다.
- 이성민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정도 이 마을에 묵으면서 몸을 점검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시자의 존재가 거슬린다. 이성민은 숙박료를 지불하고서
- 바로 여관을 나왔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없었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 “우선 북쪽으로 방향을 잡을 겁니다.”
- 그곳까지 가면서 얻은 정보들에 대해 정리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는 자그마한 빛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성민이 두른 망토 안으로 몸을 숨
- 겼다.
- 서두르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추격자의 기미는 없었다. 하지만 감각에 무언가가 거슬렸다. 등에 걸친 허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 [마법이군.]
- ‘개방이 마법도 쓰나?’
- [나야 모르지. 하지만 감시가 붙은 것은 확실해. 어쩔 테냐?]
- ‘내버려 둔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더 귀찮게 굴 거야.’
- 개방 쪽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던전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이 그들이 신경쓸 만한 이유가 되나? 아니면 위지호연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개방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개방이 얼마나 집요한 존재들인지는 이성민도 소문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 ‘설마 취걸. 그 놈이 혈혈노파에게 던져두고 갔던 것 때문에 속 좁게 구는 것은 아니겠지.’
- 따지고 보면 제대로 버림 받은 것은 이쪽인데 말이야.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걸었다.
- ‘새’는 그런 이성민의 뒤를 쫒고 있었다. 이성민이 아직 경공을 펼치지 않아 추격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새의 눈은 지상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이성민의 움직임을
- 살폈고, 새가 본 것은 그 새를 사역하고 있는 마법사에게 전해진다.
- 그리고 마법사가 전해 본 풍경은 마법을 통해 계속해서 전달 되어, 먼 곳에 떨어진 크론까지 전해진다. 타임 딜레이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득하게 떨어진 거리를 무시하고서
- 볼 수 있다는 것은 무공에게는 불가능한, 마법만이 가능한 경이였다.
- “살아 있었군.”
- 취걸은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마법사 길드의 중추와 협력을 맺은 개방은 에리아 전역에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렇게 실시간으로, 지속적으로
- 감시 받는 대상은 많지 않다. 취걸은 개방 소방주라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이성민의 위치를 확인하고 감시 대상으로 골랐다.
-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는 소천마 위지호연의 도플갱어. 도플갱어가 본인보다는 크게 약하다고는 하나, 소천마 본인이 가진 강함을 생각한다면 도플갱어 역시 압도적인 힘을
-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취걸은.
-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왼 팔이 잘린 큰 부상을 입었고, 장득수 역시 혈혈노파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그것은 백소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귀창의
- 실력은 추측이 되지 않았고, 무리한 싸움을 벌였다가는 전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도주를 택했다. 취걸이 판단하기에는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 그곳에서 귀창이 죽었더라면 취걸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소고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노라고.
- 비록 당신은 그를 납득하지 못하여 나의 뺨을 갈겼지만, 결국에는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이라고.
-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 취걸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백소고는 떠났다. 그녀는 무림맹 쪽에 일방적으로 맹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였고, 무림맹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서 이 도시 크
- 론을 떠났다. 크론을 떠난 백소고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감시대상으로는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마음에 안 들어.’
- 취걸은 수정구를 내려 보았다. 반토막 난 창을 등에 걸친 이성민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왜 자신의 사제를 버린 것이냐고, 그렇게 부르짖던 백소고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그
- 래서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의 모습이 마치.
- “질투라는 것은 추하군.”
- 취걸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
- 마을과 거리를 둔 시점에서 이성민은 경공을 펼쳤다. 단순히 경공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경공의 속도가 오른 시점에서 헤이스트를 펼친다.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마력을 사용해
- 야 하지만, 스킬로 익힌 마법은 편리하기 짝이 없다. 내공이 지속적으로 소모되면서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진다.
- ‘웃.’
- 순식간에 더해진 속도에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곧바로 적응했다. 이성민은 보이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뛰어넘으면서 헤이스트와 무영탈혼의 결합이 만들어낸 속도에 몸을 맡겼다.
- ‘장기적으로 펼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아.’
- 이성민이 보유한 내공이 많기는 하지만, 무영탈혼과 헤이스트의 내공 소모가 워낙에 컸다. 내공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이성민은 한참을 달리다가 멈추었다.
- ‘실전에서 써먹으면 좋겠군.’
-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짐으로서 의외성을 줄 수 있다. 창법에 녹여내기에는 시행착오가 제법 필요해보였고, 헤이스트 뿐만이 아니라 스트렝스까지 가미한다면 익숙해지는 것에 꽤
-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감시의 기척은 없다. 아마 감시 마법이 이성민이 달리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뒤처진 모양이었다.
- “나오셔도 됩니다.”
- 이성민이 말이 끝나자 그림자 속에서 네블이 몸을 꺼냈다. 그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 “요구하신 정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 네블이 수정구를 꺼내며 말했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수정구를 받았다.
- ======================================
- < 허주-4 >
- 정보를 전해 듣고서, 이성민은 회색으로 변한 수정구를 바스라트렸다. 그 가루를 바람에 흩날리고서 이성민은 생각에 잠겼다.
- 백소고는 살아 있다. 개방의 늙은 거지에게 전해 들어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에레브리사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들었다.
- ‘사저가 무림맹을 탈퇴했다고?’
- 탈퇴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무림맹 탈퇴를 선언한 백소고는 도시 크론을 떠나 남하하고 있다고 했다. 에리아는 워낙에 땅덩이가 넓어 방향만 두고서는 어디로 가는 것
- 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크론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향한다면…
- ‘나를 걱정하는 거야.’
- 크론에서 던전까지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 던전에서의 스크롤을 사용해 순식간에 크론으로 텔레포트 하기는 했던 모양이지만, 보통의 방법으로 크론에서 던전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 몇 달이 걸린다. 백소고가 밥먹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며 내공 회복 포션을 물처럼 마셔 경공을 펼친다고 가정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다.
- “혹시 묵섬광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 “어려운 일은 아니죠.”
- 네블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디에 있건 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네블을 보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에게는 ‘거리’라는 개념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 했다.
- “저를 묵섬광이 있는 곳까지 이동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 “그건 불가능합니다.”
- 혹시나 해서 했던 질문이었지만, 기대 대로 네블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저희는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민 회원님은 아닙니다. 저희와 같은 방법으로 공간이동을 하셨다가는 공간 간의 격류를 견디지 못해 육체가 박살날 겁니다.”
- 네블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대해 충고를 했다.
- “장거리 텔레포트 스트롤을 구해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리 편리한 도구는 아닙니다. 보통은 지정해 둔 좌표로만 이동하는 것이 고작이니까요. 게다가 그런 스크롤은 굉장히
- 비쌉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고가인 이유는 이동하는 ‘시간’을 구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죠.”
- “…그렇다면 편지 배달 정도는?”
- “그거야 무리는 없죠. 제가 직접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 네블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중개 길드라는 에레브리사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중개인들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장 중개인이라는 자들은 공
- 간이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이성민으로서도 네블의 강함은 추측조차 되지 않는다.
-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 “중개 길드입니다.”
- 이성민의 질문에 네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 “종이와 펜을 받을 수 있을까요.”
- “드리죠.”
- 네블이 손을 까닥하고 움직였다. 이윽고 그는 공간의 틈 안에 손을 집어넣고서 얇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 “빌려주는 겁니까?”
- “…그냥 드리죠.”
- 이성민은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종이에 펜촉을 대고서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는 괜찮으니까 안심하라고?
- 이렇게 편지로 생사를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고, 무사히 살아나왔습니다.
- 사저도 목숨을 건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저. 저는 사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저를 위해 그 던전에 간 것이었고, 사저가 살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 그러니 제 걱정도, 죄책감도 가지지 말아주십시오.
-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 여기까지 쓰고서. 이성민은 펜을 멈추었다. 백소고에게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도 되는 것일까? 알린다면 백소고의 성격상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렇게 두어도 되는
- 것일까. 이성민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북쪽이다. 그곳에서 또 어떤 사건과 위험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결국.
- 이성민은 백소고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백소고를 만나고 싶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아직… 백소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했다. 많이 늘었구
- 나. 강해졌구나. 그런 말들. 이성민은 펜을 내려놓았다.
- ‘나중에.’
- 우선은 북쪽으로 가야 한다.
- “너. 대단한 놈이었군.”
- 네블을 돌려보내고서, 이성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공과 헤이스트를 병행하면서 그 속도에 익숙해지려 했고,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서. 달리는 것도 수행으로 삼았
- 다.
- [이제야 알았냐?]
- 허주가 으스대며 말했다. 네블이 전한 정보에는 허주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 허주가 활동한 것은 400년도 전이었다. 그 이전부터 허주는 존재하고 있었고, 에리아의 남쪽 지역에서 악몽처럼 군림해 온 요괴 두령이 바로 허주였다.
- “그래봤자 육체도 잃고 봉인되었으면서.”
- [나를 봉인하겠답시고 덤빈 놈의 쪽수가 수 만이었다. 마법사에 무림인, 기사, 정령사 등. 당시 한가락 하는 놈들은 모조리 날 토벌하려고 들었어.]
- “왜 도망치지 않았던 거지?”
-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 허주의 대답은 빨랐다.
- “…그것이 전부냐?”
- [전부지.]
- “듣자 하니 진짜 대단했던 모양인데. 왕은 아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진짜 왕처럼 군림했다 하고. 남쪽의 원주민들 중에서는 아직도 너를 신앙하는 부족도 있다고 해.”
-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 이해를 벗어난 경이를 보면 신앙을 품어. 하늘을 가르는 번개를 보고서 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이다.]
- 그렇게 말하는 허주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남쪽으로 가자. 내 보물을 주기로 말했었으니까.]
- “네 부하들은 다 어디 갔지?”
- [죽었다.]
- 허주가 대답했다. 그 이후로 허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옛날이야기를 들추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성민도 더 이상 물을 생각은 없었다.
- ‘남쪽이라.’
- 그쪽은 가본 적이 없다. 사실 지금 향하고 있는 북쪽도 가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해서 북쪽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흔히 ‘북쪽’ 하면 떠올리는 것
- 은 대도시인 트라비아다. 과거 혈천마
- 백무선이 군림하던 곳이지만, 위지호연이 백무선의 팔을 자르면서 트라비아는 아귀다툼의 장이 되었다. 본래 마두들이 득세하던 곳에서 혈천마가 찍어 누르던 것이었는데, 혈천마가
- 힘을 잃고 모욕당하면서 마두들이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 ‘무림인 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들도 넘친다던데. 인외도 돌아다니고.’
- 어쩌면 그곳에서 프레스칸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였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프레스칸을 찾으러 들 것도 없이, 그에게 검은 심장에 대해 물어볼
- 수 있을 테니까.
- *
- 남자의 출현은 기묘하고 갑작스러웠다. 백소고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네블을 경계어린 시선으로 응시했고, 네블은 양 손을 들어
- 보이면서 백소고에게 말을 걸었다.
-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 “…드래곤?”
- 백소고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네블이 눈을 멀뚱히 뜨더니 곧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런 오해는 처음 들어 보는 군요!”
- 네블은 웃음기를 채 잠재우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면전에서 저런 웃음을 들었음에도 백소고는 딱히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다. 사실 백소고가 네블을 ‘드래곤’이라고 오해
- 할 만큼, 그의 출현은 놀라웠다.
-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쩍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대마법사나 사용할 수 있다는 텔레포트나 블링크와는 격이 달라 보였고, 백소고는 네블의 존재를 제대로
- 인식조차 못하며 강함조차 엿보지 못하고 있었다.
-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어버렸네요. 드래곤, 드래곤이라… 그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요.”
-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백소고에게 다가왔다. 백소고는 네블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적의를 내비치며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네블은 걷던 걸음의 속도를 죽이지 않았다.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냥… 심부름꾼일 뿐이죠.”
-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슈트 자켓 안쪽에서 꺼낸 것은 잘 접힌 편지봉투였다.
- “이성민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 “…네?”
- 백소고의 표정이 돌변했다.
- “이성민님이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 당장 손을 뻗어 저 편지를 낚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백소고는 그것을 인내했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삼키면서 끌어 올렸던 위협을 갈무리했다. 백색의 호신강기가 흩어졌다.
- ‘강제로 빼앗으려 했어도… 빼앗을 수 있었을까?’
- 백소고는 뭇내 그런 의문을 품었다. 백소고가 위협을 잠재우자 네블은 빙긋 웃더니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백소고에게 편지를 건넨 후, 네블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
- 간의 틈 사이로 사라졌다. 백소고는 한동안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 “…살아있었어.”
- 단순한 편지다.
-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는 하여도, 백소고는 믿고 있었다. 필적 같은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블의 존재가 백소고가 느끼는 신뢰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 백소고는 편지를 소중하게 끌어 안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살아있어… 사제가 살아있어.”
- 가슴 깊이 느끼는 안도의 끝에서, 백소고는 자그마한 의문을 느꼈다.
- ‘어떻게 살아 나온 거야?’
- 당연스러운 의문이었다.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어디에 있다, 어디로 향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라도 적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백소고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 ‘내가 더 강했다면… 사제가 시간을 벌겠다고 나설 필요도 없었을 거야.’
-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몇 년 만에 본 하나 뿐인 사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거두었다. 불과 일 년 전에 보았을 때만 하여도 초절정에 입문하지도 못하
- 였었는데, 던전에서 보았던 사제는 백소고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 어디로 갈 것인지 정했다.
- 백소고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편지는 잘 접어서 품 안에 넣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산’이 있는 곳을 보면서. 백소고는 이성민과 헤어지
- 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도망치라고 했던 말.
- “…그건 내가 했어야 할 말이야.”
- 백소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므쉬의 산 쪽으로 향했다.
- *
- 트라비아를 목적지로 두기는 했지만 크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아직 겨울까지는 시간 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이놈의 노숙.”
- 루비아가 불평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모닥불에 사냥한 고기를 구우다가 루비아의 불평을 듣고 그녀 쪽을 흘겨 보았다.
- “불만도 많으시군요.”
- “기왕 잘 거면 지붕 아래가 좋고 침대가 좋잖아요.”
- “엔비루스는 노숙한 적 없습니까?”
- “주인님은 노숙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하셨죠. 언제나 마법으로 멋진 집을 지어 놓고서 그곳에서 주무셨다고요.”
- “귀찮은 인간이로군.”
- “무슨 말이에요?”
- “지붕 없는 곳의 바닥에서 자도 잠은 잘 옵니다.”
-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해 주면서 통으로 구운 토끼의 다리를 부욱 찢어 루비아에게 건네 주었다. 불만이 많은 주제에 루비아는 건네는 것은 잘 받아 먹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토끼
- 의 다리를 잡고서 입을 벌려 물어뜯었다.
- “언제까지 노숙할 셈이죠?”
- “트라비아에 도착할 때까지.”
- “여태까지 한 달을 노숙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트라비아까지는 세 달은 더 가야 할 텐데요.”
- “압니다.”
- “세 달 동안 노숙하시겠다고?”
-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밥이야 사냥으로 구하면 되는 거고, 아공간 포켓에 보존식도 여분이 많습니다.”
- “그 외에 생필품은 어쩌시려고?”
- “다 방법이 있지요.”
- “어쩌다가 당신 같은 사람이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된 것인지.”
- 루비아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루비아를 보았다.
- “알고 있었습니까?”
- “애초에 숨기지도 않았잖아요?”
- 루비아가 되물었다. 그렇게 하는 말에 반박할 말은 없었다. 루비아와 허주를 신경쓰지 않고 네블을 불러댄 것은 이성민 쪽이었으니까.
- [나도 안다.]
- 허주가 웅웅거렸다. 내심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허주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네블을 보고 아무 놀람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 ‘의외로 역사가 깊은 모양이군.’
- 400년 전에 활동했던 허주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 시기에도 에레브리사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 ‘너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이었나?’
- [제안은 받았지만 거절했지.]
- “…엔비루스는 에레브레사의 회원입니까?”
- “물론이죠.”
- 루비아가 기운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루비아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 허주와 루비아. 둘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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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주-5 >
- “중개 길드죠.”
- 이상한 걸 물어보네. 루비아가 덧붙여 중얼거렸다.
-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봅니까?”
- 이성민은 오히려 면박을 주면서 익은 고기를 물어뜯었다. 루비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기를 야금야금 먹었다.
- “에레브리사가 중개 길드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 “…뭐. 그들이 여러 가지로 신비롭고 괴상한 집단이기는 하죠.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용병 길드는 길드 안에 용병단이 나뉘어져 있고, 마법사 길드는 길드 안에 학파와 마탑이
- 나뉘어져 있어요. 그것은 대부분의 길드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죠. 하지만 정보 길드는 아니에요.”
- 그것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다. 정보 길드는 크고 작은 것을 따지자면 수십 수백 개나 존재한다. 특히 대도시에는 정보만을 취급하는 길드만 해도 대여섯 개는 존재하고 있
- 다. 게다가 ‘정보’를 취급하는 것은 정보 길드 뿐만이 아니다. 도시 내에 존재하는 도적 길드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고, 무림 문파 중에서는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여러 문파
- 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다.
- “에레브리사는 목적과 사상이 다른 ‘모든’ 정보 길드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어요. 그것 뿐 만이 아니죠. 상인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다양한 상인 조합들과 개인 상인들이
- 보유한 모든 물건들도 종합해서 거래를 주선해주죠. 이것은 고위 귀족이나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 이성민은 묵묵히 루비아의 말을 들었다. 에레브리사는 단순한 중개 길드가 아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집단들을 저렇게 종합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대한 땅덩이에 존재
- 하는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 [폭력이다.]
- 허주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은 거리와 공간을 무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절대로 인간은 아닌 존재들이야. 경이적이고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 권력도 지위도 의미가 없다. 아무리 경호가 출중하더라도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 목을 딸 수 있는 것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이라는 놈들이다.]
- “…그런 능력을 가진 자들이 왜 중개 길드 따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지?”
- [400년 전.]
- 허주가 내뱉었다.
- [당시의 이 어르신은 악명이 꽤 높았다. 요괴라는 것은 그런 존재야. 본성이 악명을 불러오지. 모든 인간이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
- 간은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 요괴도 그렇다. 요괴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흉폭하고 이기적인 놈들이라 사고를 많이 치지. 이 어르신도 그랬고.]
- 그러니 토벌 당한 것이다.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전해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400년 전에 남쪽 지역에서 군림한 허주는 경외 받는 대요괴였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토벌된 것은
- 아니다. 그만한 악행을 벌였기에 토벌 된 것이다.
- [장담하건데, 그때의 에리아에서 나보다 강한 존재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드래곤조차 이 어르신을 어찌 하지 못했지!]
- 그건 조금 오버한 것 같은데. 이성민은 내심 그런 생각을 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 [그런데 말이다. 이 어르신을 찾아 왔던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나조차도 쉬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런 놈이 대뜸 찾아와 자기들은 중개 길드인데, 나를
- 회원으로 받고 싶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 그래서 물어봤다.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중개 길드 따위를 하는 것이고, 왜 나를 회원으로 받고 싶은 것이냐고.]
- “…그래서?”
-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변수’라고 말이야.]
- “그게 뭐냐?”
- [존재 자체가 세상 전체에 변수가 될 만한 존재.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어르신의 강함은 그를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
- 원권을 제안한 것이라고 하더군. 바꿔 말하자면, 에레브리사라는 놈들은 세상에서 변수가 될 만한 존재들을 회원으로 두고서 지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놈들이 그를 통해 무엇
- 을 획책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므쉬의 산에서 에레브리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이성민에게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다. 당시의 이성민은 단순히 그것을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
- 각했었는데,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 [놈들은 기묘하다. 그래서 내가 놈들의 회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뭔지도 알 수 없는 놈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거든.]
- “편리하기는 한데.”
- [아마 그 소천마라는 계집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일 것이다.]
- 허주가 덧붙였다.
- [그 정도의 강함과 성장력을 본다면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그런데… 이게 참 웃긴 말이란 말이야. 왜 변수라는 거지? 정해져 있는 상황도 아닌데 왜 변수라는 단어를 붙인
- 것일까? 무엇에 대한 변수라는 것이지?]
- 허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성민도 그에 대한 의문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따위는 없었다. 네블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네블이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 .
-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군요.”
-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이성민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네블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었다.
- “…부르지는 않았는데?”
- “셀게루스님의 작업이 끝나서, 그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 “마침 잘 되었군요.”
- 이성민은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쯥 빨아내면서 네블을 바라보았다.
- “에레브리사는 무엇입니까?”
- “중개 길드지요. …그 이상의 것을 알려드리기는 힘듭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알려 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힘으로 질문하여 대답을 얻을 상대도 아니다.
- “까다로우시군요.”
- “그렇다고 해서 회원님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맹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공간을 갈랐다. 그 너머에는 셀게루스가 서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꾀죄죄한 몰골을 한 셀게루스는, 피로가 누적된 것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
- 고 뺨이 조금 파여 있었다.
- “분위기가 왜 그래?”
- 셀게루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고 네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던 셀게루스가 입술을 벌려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 “뭐. 내가 알바는 아니지. 네가 주문했던 것들이 완성됐어. 형태는 지난번에 만들었던 창을 따랐고.”
- 네블이 셀게루스 쪽으로 이동해 창과 마갑을 받아 왔다. 방금 전까지는 에레브리사에 대한 의문이 뒤섞여 기분이 심란했으나, 네블이 받아 온 창을 본 순간. 이성민의 마음속에서
- 그런 심란함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만큼 셀게루스가 만든 창은, 이성민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 “오리하르콘은.”
- 셀게루스가 입을 열었다.
- “절대로 부서지지 않아. …라고 얼간이들이 떠드는데. 그건 틀린 말이야. 이 세상에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어. 그렇다고 해서 오리하르콘이 무른 것은 아니지. 견고
- 함을 본다면 오리하르콘만한 금속은 몇 존재하지 않아. 드래곤의 비늘이나 뼈 이상의 강도를 가진 것이 오리하르콘이지.”
-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창을 건네받았다. 길이는 이전에 쓰던 창보다 길어졌다. 처음 그 창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서 이성민의 몸이 커진 탓이다.
- ‘가벼워.’
- 하지만 무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성민은 창간을 잡고서 가볍게 힘을 줘 보았다. 휘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 “완전히 파괴되면 방법이 없지만, 그 이외의 손상은 마력…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내공을 불어 넣는 것으로 수복이 돼. 날을 세우거나 보수할 필요도 없어. 땅에 파묻고 천 년
- 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리하르콘이야.”
-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은 많지 않습니다. 드워프 대장장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고, 드워프를 제외한 대장장이 중에서는 마이스터의 칭호를 가진 셀게루스님만이
-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지요.”
- 네블이 덧붙였다. 대놓고 띄워주고 있음에도 셀게루스는 자부심 따위는 내비치지 않았다.
- “그럼 뭐해? 다크 엘프라고 제대로 취급도 해주지 않는데.”
- 오히려 그렇게 투덜거린 뒤에, 셀게루스가 말을 덧붙였다.
- “오리하르콘은 마력이나 내공을 미스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받아들이기도 해. 직접 써보면 무슨 느낌인지 감이 올 거야. 그리고 갑옷도.”
- 셀게루스가 손을 뻗어 마갑을 가리켰다.
- “창을 만들고도 오리하르콘이 꽤 많이 남아서, 갑옷의 가변 마법이 새겨진 핵을 중심으로 해서 오리하르콘을 삽입했어. 덧씌우는 정도에 그쳤지만 대부분의 마법에 대해서는 안티
- 매직이 기능할 거야. 하지만 너무 신뢰하지는 마. 인챈트로 새겨 넣은 안티 매직은 아니니까.”
- “인챈트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 “안 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오리하르콘은 뛰어난 금속인 만큼 인챈트 난이도도 높아. 대마법사 급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내지. 그리고 인챈트라는 것은 금속의
- 질을 떨어트려. 오리하르콘 정도의 소재라면 인챈트를 넣는 것이 오히려 손해야.”
- 그 쪽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셀게루스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셀게루스는 크게 숨을 내뱉고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장담하건데, 그건 내 대장장이 인생 중에 최고의 역작이라고 할 만 해. 소재도 내가 여태까지 만져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좋았고. 네가 드래곤과 싸우려 들지 않는 한 부숴지
- 는 일은 없을 거야.”
- “…감사합니다.”
- “감사는 무슨. 이름은 안 붙였으니까, 붙이고 싶거든 네가 붙이도록 해. 나는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 셀게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 버렸다. 네블은 열어 놓은 공간을 닫고서 웃는 얼굴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 “마음에 드십니까?”
- “네.”
- “저희를 의심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의 편의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 네블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 “…저는 이성민 회원님의 담당 중개인입니다. 회원님의 전속이죠. 비록 제가 에레브리사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에레브리사의 방침보다 회원님을 우선할 수도
- 있습니다.”
- 아까의 질문 같은 것에는 아니지만. 네블은 그렇게 덧붙인 뒤에 꾸벅 머리를 숙였다.
- “다음에 불러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네블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네블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주가 투덜거렸다.
- [저 녀석 호모인가?]
- “뭔 말을 씨발…”
- 허주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성민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 [취향은 다양한 법이다. 네 얼굴이 못난 편은 아니니,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 “개소리 좀 하지 마.”
- [어찌 되었든. 호의를 품은 조력자를 곁에 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태도가 애매한 놈이기는 하지만.]
- 허주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마갑을 입어 보았다. 상체를 감싼 마갑은 이전보다 착용감이 훌륭했다. 거기에 내공을 불어넣으니, 마갑이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 전
- 체를 감싼다. 이성민은 마갑이 덮은 몸을 움직여 보면서 내심 감탄을 흘렸다.
- ‘편해.’
- 이전의 마갑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맨 몸과 비교한다면 저항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몸을 움
- 직이는 것에 저항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민의 근력을 생각한다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 거기에 호신강기를 일으켜 본다. 콰아아! 순식간에 솟구친 호신강기가 이성민의 몸 전체를 덮었다. 그것은 마치 자색의 불꽃이 몸을 집어삼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성민은 기
- 겁하고서 내공의 출력을 줄였다.
- “내공이 오리하르콘을 거치면서 증폭된 거예요.”
- 루비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 “그것이 오리하르콘이 최고의 소재라고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죠. 적은 내공이나 마력으로 그 이상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 확실히 그랬다. 이전의 마갑을 입고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을 때에는 이 정도로 출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내친 김에 이성민은 창을 잡았다. 창간을 꽉 잡고 내공을 불어 넣자,
- 곧바로 자색의 강기가 창 전체를 뒤덮었다. 오리하르콘을 덧칠한 마갑과는 다르게 창은 오리하르콘 통짜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강기를 뽑아내는 효율이 호신강기보다 훨씬 뛰어났
- 다.
- [몸뚱이로 안 되면 기물의 도움을 받아야지.]
- ‘비꼬는 거냐?’
- [성격이 배배 꼬인 새끼로군. 기물을 쓰는 것이 부끄럽냐?]
- ‘그건 아니지만.’
- [구라 치지 마라.]
- 허주가 낄낄 웃으며 쏘아 붙였다.
- [가진 것을 제대로 쓰는 것도 중요한 것이?야. 네놈의 심장이나 갑옷, 무기. 모든 것들이 결국 네 것이니까. 안 쓰겠답시고 묵히면서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말고 잘 써라.
- 잘.]
- 허주가 충고하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들으면서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몸 안에 박혀있는 검은 심장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싫지는
- 않았다. 결국 이 심장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프레스칸을 만나야 하는 거야.’
- 써먹으려고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 ======================================
- < 프레데터-1 >
-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 바깥에는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 섞인 북쪽의 바람은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살결조차 베어낼 정도로 날카로워 매섭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그 바람에
- 대한 대비책인지 두꺼워 보이는 로브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 “어서 옵쇼.”
- 여관에 손님은 없었다. 벽난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여관 주인은 눈치 빠르게도 머리를 일으켰다. 그는 오른 손으로는 졸리 눈을 부비면서 왼 손으로는 어깨를
- 끌어안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일단 문을 조금 닫는 것이 어떻수?”
- 열고 들어 온 문은 바깥바람에 요동치고 있었다. 이성민은 손을 들어 문을 밀어 닫아버렸다.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는 것을 보고 여관 주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 “사냥꾼은 아닌 모양이군.”
- 여관 주인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뒤로 넘겼다. 여관 주인은 하얗게 질린 이성민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 “커피를 드릴까? 아니면 뜨거운 물? 우유? 스프도 있기는 한데.”
- “스프로 주십시오.”
- “저는 우유가 좋아요.”
- 이성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루비아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주문했다. 여관 주인은 루비아의 머리 위에 솟아나 있는 고양이 귀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수인이라니. 이 근방에서는 보기 힘든데. 노예 상인이쇼?”
- “아닙니다.”
- 이성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루비아는 여관 주인이 한 말에 조금 마음이 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발작하지는 않았다. 수인이라는 존재는 그렇다. 엘프야 워낙에 보기 드물
- 고, 긴 세월을 살아가는데다가 정령과 마나의 사랑을 받는다. 모든 엘프는 뛰어난 정령사고 마법사며 궁수고 검사다. 모든 부호들이 엘프 노예를 갖는 것을 꿈꾸지만, 엘프를 노
- 예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하지만 수인은 다르다. 그들은 엘프보다 약하다. 엘프보다 숫자도 많다. 비교적 노예로 삼기 쉬운데다가 복종심을 끌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편도 아니다. 그 ‘어렵지 않다’는
- 것이 가학적인 폭력을 통해 강제로 박아 넣는 것일 뿐이지.
- “우선 여기 앉아 계시고.”
- 여관 주인은 벽난로 앞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 “뜨거운 스프와 우유. 곧 가져다 드릴 테니 기다리고 계쇼.”
- 여관 주인은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비아가 후다닥 벽난로 앞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서 숨을 내뱉었다.
- “따지고 보면 난 수인이 아니지만요.”
- 벗은 로브를 대충 뒤에 던져두고서 루비아가 쫑알거렸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곁에 와 의자에 앉았다.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만들어낸 사역마다. 수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것은
- 어디까지나 엔비루스의 취향일 뿐이지, 루비아가 수인인 것은 아니다.
- “굳이 여관으로 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 “갑자기 바람이 강해졌잖아요.”
- “당신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도 저는 바람 쌩쌩 부는 곳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아요.”
- 이성민은 한서불침을 이루었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여관에 들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루비아가 강경하게 주장한 탓에 이 여관에 들르게 되었다.
- “머지않아 트라비아에 도착할 거예요. 트라비아는 혈천마가 군림하기 이전부터 사마외도와 흑마법사, 그리고 인외의 땅이었죠. 솔직히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인데.”
- “어쩔 수 없습니다.”
-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로브를 벗었다.
- “북쪽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혈천마라는 누름돌은 무게를 잃었고, 힘을 가진 마인들은 군림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트라비아의 치
- 안은 엉망이 되었고.”
- 이곳까지 오면서, 네블을 통해 트라비아의 사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전해 들었다. 혈천마가 트라비아에 군림했을 적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적어도 그는 정도를 아는 존재
- 였기 때문이다.
- 하지만 혈천마가 위지호연에게 패한 이후.
- 무인이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혈천마는 트라비아에 군림할 정도의 거인이었으나, 팔이 잘리고 혈천맹이 와해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트라비
- 아에 법은 없다는 것이다. 성주는 트라비아를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고 트라비아를 떠나 별장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치안이 사라진 트라비아는 온갖 범죄가 들끓어대고 있었다.
-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림맹도 그쪽을 주시하고 있답니다.”
- “…신령이라고 했었죠? 북쪽,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 인연이 있다면 귀인과 만나게 된다.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에.”
-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그런 진위 여부도 확실치 않은 말을 따라 이 멀고 위험한 곳까지 오다니.”
- [애매하지는 않아.]
-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허주가 루비아에게 쏘아 붙였다.
- [신령이라는 것은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르고 꿍꿍이도 알 수 없는 존재긴 하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놈들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보통은 그렇게 된다.]
- “그 말조차 애매하네요.”
- [원래 그 새끼들이 그런 놈들이야. 놈들은… 운명을 엿보지. 아예 북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북쪽에 온 이상 신령이 말한 ‘만남’은 반드시 일어난다.]
-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이성민도 긴가민가하기는 했다. 북쪽에서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이 한 두 군데도 아니고,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라고 해 봐야 언제인지도 모른다. 이곳까
- 지 오기 한참 전에 루비아가 왜 트라비아로 가는 것이냐고 캐묻기에 대답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그냥 가면 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여 대책 없이 이곳까지 오기는 했
- 다.
- “어디로들 가쇼?”
- 큼직한 머그컵 두 개를 들고 온 여관 주인이 물었다. 루비아는 양 손으로 머그컵을 받고서 후후 입 바람을 불며 우유를 마셨다.
- “트라비아로 갑니다.”
- “저런.”
- 이성민의 대답에 여관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 군. 왜. 당신들도 그곳에서 이름이라도 떨치고 싶은 거요?”
- “그건 아닙니다만.”
- “뭐, 내가 오지랖을 떨만한 입장은 아니지. 조심들 하쇼. 특히 그쪽 수인 아가씨.”
- 여관 주인이 턱짓으로 루비아를 가리켰다.
- “트라비아는 법이 존재하지 않게 된 곳이야. 색마도 많고 인신공양을 하는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많다더군. 도시 안에 들어간다면 위험이 엮어 올 지도 몰라.”
-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 루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입에 들어 온 스프를 우물거렸다. 잠시 뒤에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 “안 어울리게 친절하시군요.”
- “응?”
- “독을 탄 스프를 주는 것치고는 말입니다. 꼴같잖은 위선이야. 아니면 기만인가?”
-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들고 있던 머그컵을 벽난로의 불길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 말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변했다.
- “…이거야 원.”
- 여관 주인이 투덜거렸다. 만독불침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조잡한 독은 이성민의 몸을 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입맛이 더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이성민은
- 입술을 우물거리며 퉤하고 침을 뱉었다.
- “도, 독?”
- 루비아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발이 풀린 것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치명적인 독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당신이 마신 것은.”
- 수인은 판매가치가 있는 상품이다. 여관 주인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 “사정은 무슨 사정…!”
- 루비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이성민의 말대로 루비아가 복용한 것은 치명적인 독은 아니었다. 단순히 몸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
- 다. 이성민은 숨을 헐떡거리는 루비아를 힐긋 보고서 여관 주인에게 손을 뻗었다.
- “해약은 없습니까?”
- “주면 살려줄 텐가?”
- “거래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죽이고 몸을 뒤져 해약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나는 지금 당장 해약을 구할 방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 에레브리사의 네블을 소환해 해약을 구입하겠다고 하면 된다. 치명적인 독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 “…그렇군.”
- 여관 주인은 빠르게 포기했다. 마실 것에 독을 타고, 그것이 실패한 이상 칼자루는 저들에게 있다.
- “이 일을 하면서 보는 눈은 꽤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 여관 주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 이성민 쪽으로 내밀었다.
- “안심하쇼.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좆 되보라는 심정으로 독약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 하지만 이성민은 그 약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루비아가 그런 이성민을 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뭐, 뭐하는 거에요? 왜 약을…”
- “뭔지도 알 수 없는 약을 주사할 수는 없죠.”
- “진짜 해독제인데…”
- “그렇다고 마냥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오기 싫다는 나를 이 여관으로 데리고 온 것은 루비아님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독도 아니니 그냥 잠깐 앉아 계십시오.”
- “이 개새끼야…!”
- 루비아가 욕설을 외쳤지만 이성민은 듣지 않았다. 그는 여관 주인을 올려 보면서 물었다.
-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 “…수인은 돈이 되니까.”
- “그게 전부입니까?”
- “…이 근방은 귀랑문의 영역이요. 매달 할당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트라비아가 그 모양 그 꼴이 되면서 오는 손님이 없어졌지.”
- “그래서 수인을 팔아 돈을 장만하려고 했다?”
- “이해해 주쇼.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 “악의 없는 사람에게 해를 주면서 제 보신을 하려 했는데. 그것을 이해해 달라? 이거 참 이기적인 분이시군.”
- 이성민은 웃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살기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 “이런 식으로 몇 명을 넘겼습니까?”
- “이번이 처음…”
- “거짓말이군.”
- 이성민이 뱉은 말에 여관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우물쭈물하던 여관 주인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순간.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주인의 머리가
- 터졌다. 이성민은 쓰러진 시체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루비아를 부축해 몸을 일으켰다.
-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 하기는…!”
- “독약일지도 몰라서,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됐어요!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니깐.”
- 루비아는 그렇게 내뱉고서 이성민의 몸을 밀쳤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루비아를 보면서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의자를 끌어다가 루비아를 앉혔다.
- [위에 인기척이 있다.]
- 허주가 웅웅거렸다.
- [손님은 아닌 것 같고. 네가 죽인 남자의 가족인 것 같군.]
- “저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았겠지.”
- [죄책감은 없나 보군.]
- “느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독에 당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루비아님은 팔려서 성노리개가 되거나 마법실험의 제물이 되었겠지.”
- “엿 같은 이야기 하지 마세요.”
- 루비아가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천장을 올려 보았다. 인기척은 이성민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러 가지는 않았다.
-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놈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 “내가 자비라도 베풀었어야 했다는 거냐. 내가 용서해 주었다고 해서 저 남자가 개심했을까?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가족이 살겠다고 다른 이들에게 독을 먹일지도 모르는데?”
- [그럴 지도 모르지. 개심했을 지도 모르고.]
- “확률이 반반이라고 해서 내가 자비를 베풀 이유는 되지 않아.”
- [여기서 저 남자를 죽여 앞으로의 일을 방지하는 것이 네놈의 협의라는 것이냐?]
- “협의는 무슨. 그런 대단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그냥 자비를 베풀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대요괴라는 놈이 이제 와서 인정에
- 눈이라도 뜬 거냐?”
- [으하하하! 그럴 리가.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너라는 놈이 어떤 인간인지 말이야. 위에 있는 놈들은 어쩔 테냐? 저 녀석들도 따지고 보면 저 남자의 공모자 아닌가?]
- “나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내가 찾아가서 죽일 이유는 없지.”
- 이성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루비아를 보았다. 루비아는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이성민에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비가 풀린 루비아가 몸을
- 일으켰다.
- “이놈의 고양이 귀를 숨길 수도 없고.”
- “우선 몸이나 숨기십시오. 귀찮은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으니까.”
- “…이거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마력 소모가 얼마나 큰데.”
- “지금 마력이 없는 거도 아니잖습니까?”
-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빛의 구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성민은 루비아가 벗어 놓은 로브를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고, 자신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위에서 발소리가
- 들려온다. 괜히 마주쳐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은 여관을 나섰다.
- “마을에 괜히 왔어.”
- [그거 참 죄송하네요. 제가 들어가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 “알면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바람은 여관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매서워져 있었다. 이성민은 로브 모자를 뒤집어쓰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 바람 소리 너머에서 그런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 그런 외침도 함께. 이성민은 뒤를 힐긋 보았다. 열린 문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직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 부릅 뜬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 나올 때 챙긴 것인지, 소년은 식칼을 들고 있었다. 소년이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에게 덤비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고 세찬 바람에 균형을 잃어 그 자리에
- 나뒹굴었다.
- [저런.]
- 허주가 혀를 찼다. 소년이 악 받친 고함을 지르며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뒤늦게 문으로 나온 중년 여자가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이성민이 죽인 남자의 부인이자
- 소년의 어머니인 듯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이성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 “죽여 버리겠어!”
- 소년의 원독어린 고함을 무시하고 이성민은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을을 가로지른다. 시선이 느껴졌다.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이쪽을 살피는 경계의 시선이었다. 바람소리 너머로 늑
- 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 늑대의 울음소리는 이성민이 나간 걸음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 “이거 참.”
-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눈발 섞인 바람은 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바람 소리에 역한 짐승의 노린내가 섞였다. 그 즉시 이성민은 아공간
- 포켓에 손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꺼낸 창이 앞으로 향한다. 쩌엉! 큼직한 소리가 났지만 이성민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것은 눈발에 몸을 숨기고 공
- 격을 감행한 놈이었다.
- “고수구나!”
-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떨어진 놈이 양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전신에 눈발을 달고 있는 놈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 “웬 개 냄새가…”
- [라이칸슬로프로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개 냄새’라고 한 말에 남자의 눈이 뒤집어졌다.
- “늑대다!”
- 그 외침과 함께 남자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근육이 우락부락 커지고 전신에 털이 돋는다. 이성민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퍼억! 순식간에 뻗은
- 찌르기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 “커헉!”
- “덤빌 거면 변신부터 하고 오지 그랬어.”
-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찌른 창에 강기를 불어 넣었다.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창이 몰려오는 내공에 반응하고 강기를 증폭시켰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몸뚱
- 이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 “병신도 아니고.”
- 이성민은 창을 등에 걸치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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