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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2n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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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
  3. < 재회-2 >
  4.  
  5.  
  6.  
  7. 기묘한 놈이다.
  8.  
  9. 독고귀검은 ‘놈’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놈의 눈은 깊었다. 그런 주제에 처음 맞부딪혔던 공격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물론 그
  10.  
  11. 렇다고 해서 놈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놈이 보인 일격의 무게는 마랑철권 이상이었다.
  12.  
  13. ‘묵섬광에게 저런 사제가 있었을 줄이야.’
  14.  
  15. 아직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느끼기에는 묵섬광과 동등하거나 반 수 정도 앞설지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갑작스레 난입하기는 했지만, 놈의 실력은 이 상황을 완전히
  16.  
  17. 뒤집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독고귀검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독고귀검의 애검이 끼이이 끼이이하며 소리를 낸다. 그것은 죽어가는 아이의 신음 섞인 울음처럼 들렸다.
  18.  
  19. 이성민은 독고귀검을 보았다. 무공의 고하만 두고 견준다면 이성민의 무공은 아직 독고귀검에게 견줄 수 없다. 그래도 물러설 수가 없기에. 그는 창을 쥐었다. 눈을 한 번 감았
  20.  
  21. 다가 뜨고 호흡을 고른다. 단전의 내공은 부족함이 없다. 마음 속에도 미혹은 없다. 결의만이 있을 뿐.
  22.  
  23. ‘묘해.’
  24.  
  25. 독고귀검이 자세를 갖춘다.
  26.  
  27. ‘쉬워야 하는데… 왜 쉬울 것 같지가 않지?’
  28.  
  29. 저 끝 모를 눈동자가 그럼 예감을 준다.
  30.  
  31. 기다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이성민은 무영탈혼을 숨기지 않았다. 일보무흔이 이성민의 육체를 있던 자리에서 지워버리고 앞으로 달리게 만들었다. 독고귀검은
  32.  
  33.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검을 옆으로 뉘여 베었다. 길게 찌른 창을 검이 받아낸다.
  34.  
  35. 부딪히는 소리는 없다. 서로가 허초다. 찌른 창은 직선에서 위로 솟구친다. 독고귀검 역시 옆으로 베었던 검을 상체 각도를 틀면서 아래로 내려버렸다.
  36.  
  37. 쩌어엉!
  38.  
  39. 이번에는 확실히 부딪힌다. 뒤를 보지 않고 몸 전체를 휘두르며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었다. 양 손이 저릿거린다. 이성민은 무릎에 힘을 반쯤 풀었다. 힘에 밀려 뒤로 물러
  40.  
  41. 서는 것 같은 모양새, 실상은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다.
  42.  
  43. 독고귀검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 광견 같았다. 기억해라. 취걸이 했던 말을. 취걸이 입은 상처를. 잘린 취걸의 팔이 어찌 되었는지를.
  44.  
  45.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 그 안에 있는 수십 개의 검기. 베이는 것은 한 번이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잘려나갈 것이다.
  46.  
  47. 창을 쏜다. 거리를 유지하여 견제하듯이. 독고귀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연이어 쏘아지는 창 중에서 허와 실을 구분했다.
  48.  
  49. ‘모두가 살초로군. 젊어 혈기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후후! 묘한 놈이야.’
  50.  
  51. 독고귀검은 씰룩거리는 입술을 붙잡았다. 아직 웃어서는 안 된다. 파직거리며 쏘아진 검기가 창을 걷어 낸다.
  52.  
  53. ‘공격일변인 것 같으면서도 신중해. 물러설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 과연… 지금은 네가 유리한 거리지.’
  54.  
  55.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검수의 접근을 허용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56.  
  57. 반걸음.
  58.  
  59. 독고귀검이 나아간 걸음이다. 독고귀검의 몸을 덮고 있던 호신강기가 크게 부풀었다. 육감이 경고를 발한 것은 짧았고, 이성민의 몸은 곧바로 그를 대응했다. 본격적으로 구천무극
  60.  
  61. 창이 펼쳐졌다. 낭창거리는 창영이 붉은 파도처럼, 그리고 날카로운 창두가 그 사이를 꿰뚫는다.
  62.  
  63. 경고로 느낀 공격은 예리했다. 군더더기 없는 살검이 창두와 격돌한다.
  64.  
  65. ‘아니야.’
  66.  
  67. 격돌이 아니다. 타고 올라온다. 독고귀검은 늑대가 아니라 뱀이었다. 그의 검이, 검을 쥔 손이 창간을 타고 오르며 목을 노린다. 이성민의 걸음이 변화했다. 뒤로 물러서는 대
  68.  
  69. 신에 앞으로.
  70.  
  71. 일보무흔. 파악! 독고귀검의 검이 잔상을 베었다. 잔상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져 흩어졌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공격의 예감에 독고귀검은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옆으로 간 것
  72.  
  73. 인지. 이형환위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나.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독고귀검은 검을 뿌렸다. 수십 개의 검기가 덮쳐 올 때, 이성민은 팔을 뒤로 빼냈다.
  74.  
  75. 숫자에는 숫자로. 수십 개의 검기에 맞서 수십 개의 창을 쏜다.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속에서 독고귀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의 웃음을 베어내듯이 독고귀검은 일
  76.  
  77. 검을 뿌린다. 이성민은 창을 빙글 돌렸다. 까아앙! 란의 수법으로 검을 걷어 낸다.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앞으로 밀어냈다.
  78.  
  79. 한걸음, 두걸음. 그렇게 이보겁살이 시작된다. 살기와 강기가 뒤엉켜 독고귀검을 향해 폭사했다. 독고귀검은 오른 손에 있던 검을 왼 손으로 던졌다. 허공에서 낚아 챈 검이 칼
  80.  
  81. 부림을 만든다. 가닥가닥 끊어진 강기가 공중에서 흩어진다.
  82.  
  83. ‘없어?’
  84.  
  85. 그 너머에서 독고귀검은 창을 놓쳤다. 아래에서 위로 창이 솟구친다. 복사백탐이다. 검귀를 놀라게 한 초식이었지만 독고귀검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서는 대신에 검을 휘둘
  86.  
  87. 렀다. 한 번의 참격에 수십 개의 검기를 담는 것이 독고귀검의 검법이다. 그는 이성민이 보았던 모든 검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쾌검의 소유자였다. 복사백탐이 막힌다. 그를 확
  88.  
  89. 인한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옆으로 밀었다. 일보분영. 수십 개로 분영한 이성민이 독고귀검을 둘러싸고 창을 내지른다.
  90.  
  91. “하하하!”
  92.  
  93. 독고귀검이 크게 웃었다. 독고귀검은 몸을 크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방을 휩쓴 검강이 일보분영의 잔상을 거꾸러트렸다. ‘눈’으로 보이는 수준과는 다르다고. 독고귀검은
  94.  
  95. 이성민에 대한 첫인상을 대폭 수정했다. 놈의 창은 까다롭고 예리했으며 걸음은 눈을 어지럽힌다.
  96.  
  97. ‘몇 살인지 궁금하군.’
  98.  
  99. 펼치는 무공만 본다면 긴 시간 무공을 다듬은 노고수와 다를 것이 없는데. 젊은 창수 중에 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놈이 있었단 말인가? 있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100.  
  101. 가 없는데.
  102.  
  103. ‘조금 더 싸워보고 싶은데. 시간을 끌다가는 안 되겠어.’
  104.  
  105. 마랑철권이 문제다. 백소고와 다시 뒤엉켜 싸우던 마랑철권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백소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머지 않아 결판이 날 것이다. 그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106.  
  107. 이다. 마랑철권이 죽고서 백소고와 이성민이 합공한다면 독고귀검도 버틸 수 없을 터이니.
  108.  
  109. ‘이런 즐거운 싸움은 흔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
  110.  
  111. 독고귀검의 생각이 끊어졌다.
  112.  
  113. 그렇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독고귀검의 바로 옆에 있던 살덩이의 벽이 찢어지고, 그 안에서 쏘아진 시커먼 급류가 독고귀검의 몸을 덮쳤다. 설마 이런 공격은 상상도 하지 못
  114.  
  115. 했기에 독고귀검은 방어도 하지 못했다.
  116.  
  117. 사실 방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독고귀검의 호신강기는 건재하여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고 할 것은. 독고귀검의 호신강기가 그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
  118.  
  119. 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120.  
  121. 벽을 찢어놓았음에도 공격의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상반신의 반쪽이 날아간 독고귀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다만, 피를 뿌리며 하늘을 날면서. 독고귀검은 흐릿해져 가
  122.  
  123. 는 정신을 놓기 전에 생각했다.
  124.  
  125. ‘흑룡포…? 소천마? 어째서…’
  126.  
  127. 콰당탕! 독고귀검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성민은 멍하니 그런 독고귀검을 보았다. 움찔거리는 독고귀검은 회생이 불가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128.  
  129. 백소고와 마랑철권의 싸움이 멈춘다. 마랑철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독고귀검을 내려 보았다. 움찔거리던 독고귀검의 몸이 완전히 정지했다.
  130.  
  131. 독고귀검이 죽었다.
  132.  
  133. “…소천마…”
  134.  
  135.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중얼거린다. 백소고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성민은 멍한 얼굴로 독고귀검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방금 전까지 사나운 쾌검을 날려대던 독고귀검은 더 이
  136.  
  137. 상 없었다. 남은 것은 상체의 절반이 으깨진 처참한 시체뿐이었다. 뻣뻣한 목을 움직인다. 이성민은 고개를 돌렸다.
  138.  
  139. 독고귀검을 죽인 것은 흐느적거리는 검은 천이었다. 저것을 이성민은 본 적이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에레브리사에서 구입한 정보에서, 이성민은 저것을 본 적
  140.  
  141. 이 있었다.
  142.  
  143. 그녀는 자신이 찢은 벽의 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독고귀검의 시체를 한 번 힐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감정한 눈을 통해 이성민은 그녀가 ‘진짜’ 위
  144.  
  145. 지호연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46.  
  147. 도플갱어는 손에 쥐고 있던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 놓았다. 이성민은 그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 보았다. 아까 전에 보았던 혈혈노파의 머리였다. 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것
  148.  
  149. 을 보아, 저 머리는 혈혈노파 본인의 머리가 아닌 도플갱어의 머리였다. 도플갱어 둘이 같이 있던 길. 그 길에 있었던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혈혈노파의 도플갱어였던 모양
  150.  
  151. 이다.
  152.  
  153. “소천마… 어째서…!”
  154.  
  155.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그는 아직 저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성민과 백소고는 저것이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
  156.  
  157. 았기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58.  
  159. 차라리 위지호연 본인이었다면 상황이 더욱 나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상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도플갱어다. 비록 도플갱어의 힘
  160.  
  161. 이 본인과 비교한다면 아주 똑같지는 않다고는 해도,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본래부터 압도적으로 강하던 것이 위지호연이니, 그녀의 도플갱어조차도 초월적인
  162.  
  163.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고귀검의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그 독고귀검이… 아마, 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할 독고귀검이. 눈 먼 공격에 대응하지
  164.  
  165. 못하고 휘말려 죽지 않았나.
  166.  
  167. “…사제.”
  168.  
  169. 백소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성민을 불렀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노려 보면서 아랫입술을 빠득 씹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네 개의 길에 골고루 사람들이 나뉘
  170.  
  171. 어져 있었는데, 위지호연 본인만 빼고 다 죽었다니. 아마 전생에도 이런 식으로 도플갱어가 벽을 뚫고 다니며 보이던 모든 이들을 죽였던 모양이다.
  172.  
  173. ‘그러다가 위지호연 본인이 자신의 도플갱어를 죽였겠지.’
  174.  
  175. 그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 말했으리라. 자신이 모두 죽였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위지호연 본인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는 하여도, 그녀의 도플갱어가 그렇게 행동
  176.  
  177. 했다면 결국 위지호연이 던전의 모두를 몰살한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178.  
  179. “소천마!”
  180.  
  181. 마랑철권이 거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182.  
  183.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어째서 독고귀검을…! 그리고 그 머리는 혈혈노파의 것이 아닌가!”
  184.  
  185. 마랑철권은 도플갱어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곳까지 오면서 도플갱어와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향해 진심으로 노성을 터트렸다.
  186.  
  187. “당신이 우리를 수하로 거두지 않는다 하였어도, 우리는 그대를 주군으로 여겼소. 언젠가 당신이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을 때… 마인인 당신이 이룬 군림천하를 보고 싶었소. 단지
  188.  
  189. 그 뿐이었소…!”
  190.  
  191. 마랑철권이 씹듯이 내뱉었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서 저벅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백소고와 싸웠을 때 이상의 강렬한 투기를 발하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에게 외
  192.  
  193. 쳤다.
  194.  
  195. “헌데 어째서…!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어도 독고귀검은 당신을 진심으로 따랐단 말이오!”
  196.  
  197. 위지호연은, 도플갱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무감정한 눈으로 마랑철권을 볼 뿐이었다. 그 눈을 보고서 마랑철권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도플갱어에게
  198.  
  199. 뛰어들었다. 마랑철권은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위지호연의 괴물같은 강함을, 그녀를 추종하며 따라 온 마랑철권이 모를 리가 없었다.
  200.  
  201.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죽게 될 것임을 알아도 위지호연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랑철권은 그 자신이 상상했던 결말을 맞이했다. 흑룡포가
  202.  
  203. 폭사했고, 마랑철권의 몸이 고깃덩이가 되었다.
  204.  
  205. 후두둑 떨어지는 피와 살점을 보면서 이성민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206.  
  207. “사저.”
  208.  
  209. “으… 응?”
  210.  
  211. “도망치십시오.”
  212.  
  213.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렇게 내뱉었다.
  214.  
  215. ======================================
  216. < 재회-3 >
  217.  
  218.  
  219.  
  220. “잠깐… 사제. 대체 무슨…!”
  221.  
  222. “둘이 덤빈다고 하여 저 괴물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223.  
  224.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를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았다. 저것은 위지호연이 아니다. 위지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의 강함만을 흉
  225.  
  226. 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괴물이다. 위지호연이 가진 강함은 괴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227.  
  228. “하지만… 사제. 왜 나보고 도망치라고 하는 거야? 차라리 함께 싸우는 편이 생존 가능성이 커…!”
  229.  
  230.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싶으시다면.”
  231.  
  232.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천천히 들었다. 알고 있었다. 백소고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말을 하여도 백소고는 혼자 도망치지 않는다. 이성민이 이곳에 있으니까.
  233.  
  234. 이곳에 있는 것이 사제인 이성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백소고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하는 행동에 대해 변명처럼 덧붙이던, ‘착한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235.  
  236. .
  237.  
  238. “뒤쪽에 제가 만들어 놓은 구멍이 있습니다.”
  239.  
  240.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두 눈을 멀뚱거리며 뜰 뿐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플갱어에게 이성이나 대화 욕구가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만, 이성민은 저 괴물이 다짜고짜
  241.  
  242. 공격하지 않아 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43.  
  244. “그 너머에 취걸과 장득수님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을 데리고 와 주십시오.”
  245.  
  246. “하지만 사제는…!”
  247.  
  248. “도주한다면 쫓아 올 겁니다. 저희가 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저 괴물이 저희보다 빠르겠지요.”
  249.  
  250. 백소고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무영탈혼은 쾌와 환의 극의를 바라보는 보법이며 체술이고 신법이다. 하지만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보여 준 일수는 압도적이었다. 저런 힘을
  251.  
  252. 가진 괴물이 느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망치면 쫓아 올 것이고… 잡힐 것이다.
  253.  
  254. “사저가 저보다 빠릅니다.”
  255.  
  256.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257.  
  258. “그리고, 저는 사저보다 저 괴물을 상대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259.  
  260. “그러다가 죽으면…!”
  261.  
  262.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저에게 달린 겁니다. 제가 죽게 될 것인지, 말 것인지.”
  263.  
  264. 그런 식으로 책임감을 강요한다. 백소고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이성민은 더 이상 백소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무영탈혼의 걸음을 밟으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265.  
  266. 우두커니 서있던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반응한다.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리던 흑룡포가 부풀더니 이성민을 휘둘러 치려 들었다. 말이 ‘휘둘러 치다’지, 그 일격에 담긴 위력은 호
  267.  
  268. 신강기를 찢고 육체를 으깨 놓을 정도의 거력이었다.
  269.  
  270.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호신강기를 전력으로 펼쳤다. 그와 함께 구천무극창을 펼치며 흑룡포의 공격에 대응했다. 꽈아아앙! 부딪힌 것만으로도 양 팔이 박살나는 것 같은 느낌이
  271.  
  272. 왔다. 단순한 느낌일 뿐이다.
  273.  
  274. ‘버텨… 냈어…!’
  275.  
  276. 등 뒤에서 백소고가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이 멀어진다. 그녀도 이해한 것이다. 둘이 함께 싸운다고 해 봐야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을 뿐. 결국에는 사이좋게 몰살
  277.  
  278. 이라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조력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생존 가능성이 늘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279.  
  280.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내가 찢은 구멍까지 가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에 길어 봐야 5분이다.'
  281.  
  282. 단순 걸음과 뜀박질이라면 느릴 지도 몰라도, 경공을 펼친다면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혈혈노파가 취걸과 장득수를 죽이고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록 취걸이
  283.  
  284. 왼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그 역시 뛰어난 고수였고, 장득수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이성민이 굳이 혈혈노파를 합공하지 않은 것은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
  285.  
  286. 지, 혈혈노파를 쓰러트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287.  
  288. ‘이런 저런 변수가 있더라도 10분이면 올 거야.’
  289.  
  290. 알고 있다.
  291.  
  292. 이러한 예상에 구멍이 가득하다는 것쯤은. 혈혈노파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득수와 취걸이 허무하게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293.  
  294. .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백소고라면 싸움으로 지친 혈혈노파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295.  
  296. 그 뒤에는?
  297.  
  298. 백소고 혼자서 이곳에 다시 돌아온다면 변하는 것은 없다.
  299.  
  300. 그리고 또. 이성민이 백소고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가능성. 그렇게 된다면 백소고는 어떻게 행동할까. 돌아온 그녀가 이성민의 시체를 본다면?
  301.  
  302. 취걸과 장득수가 합류한다고 해서, 저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303.  
  304. 모른다. 모르겠다. 구멍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설마 여기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305.  
  306.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간 몸을 간신히 지탱한다. 척추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튕기며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달린다. 양 손이 찢어진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307.  
  308. 죽고 싶지 않다. 당연한 것 아닌가.
  309.  
  310.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고, 버텨야 했다.
  311.  
  312. 흑룡포가 다시 이쪽을 덮친다. 결국은 천이기에, 흑룡포가 만들어내는 공격 궤적은 변칙적이었다.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큼직했던 흑룡포가 둘
  313.  
  314. 둘 말리더니 날카로운 송곳의 모습이 되어 찔러 온다.
  315.  
  316. 떠올려라.
  317.  
  318. 2100년.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수행한 시간이다. 그곳에서의 수행은 지루했다. 너무 지루해서 몇 번이나 미쳐버렸을 정도다.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 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319.  
  320. 지 알 수단은 없었다.
  321.  
  322. 그 긴 시간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 몸으로 펼칠 수 있는 것, 펼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나뉘어져 있다. 이성민의 정신이 겪었던 무공과 지금의 이성민이 펼칠 수 있는 무공에는
  323.  
  324.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25.  
  326. 떠올려 취해야 할 것은 펼치는 무공이 아니다.
  327.  
  328. 경험이다.
  329.  
  330. 처음에는 심심풀이였다.
  331.  
  332. 상상해 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창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지겨워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면서 무공을 연마했다. 내가 창을 이렇게 찌르면
  333.  
  334. 저쪽이 이렇게 움직이겠지? 아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이 좋을까? 그 회피에서 어떤 공격이 만들어질까. 공격의 형태는? 보법은? 나는 그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335.  
  336. 까. 피해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받아 쳐야 하나? 받아치기에 너무 강하다면?
  337.  
  338. 그럼 죽어야 하나?
  339.  
  340. 옆으로 휘두른 창이 흑룡포와 닿는다. 위력 면에서 이성민의 창은 흑룡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알고 있다. 그러니 힘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정면으로 찌르는 것은 측면에서
  341.  
  342. 약하다. 맞서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힘이라면 흘려 내거나 역이용해라.
  343.  
  344. 위지호연이 가르쳐 준 것들이다. 알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성민은 창을 앞으로 찔렀다. 흑룡포와 닿을 듯 하다가 스친다. 이성민은 창을 찌르면서 몸을 옆
  345.  
  346. 으로 돌렸고, 그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흑룡포가 이성민의 몸을 아슬하게 비껴가면서 이성민의 창끝은 도플갱어의 가슴을 노린다.
  347.  
  348. 도플갱어에게 감정은 없었다.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다. 단지 눈으로 본 것에 확실하게 대응할 뿐이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의 창두가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흑룡포를
  349.  
  350. 움직여 그곳을 방어했다.
  351.  
  352. 기억은 선명하다. 2100년 동안 했던 것들. 정신세계의 기억은 결코 엷어지지 않는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아서, 떠올리는 것을 의식해야 할 뿐이지. 쓰지 않는 기억을 꺼내기
  353.  
  354. 위해 고심하는 것과 똑같다.
  355.  
  356.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한 상상에 푹 빠졌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강할 셈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며 비무하듯이 수행했다
  357.  
  358. .
  359.  
  360. 상상하는 상대는 항상 바뀌었다. 검, 창, 도끼, 활, 마법사, 주먹, 발 등. 빈곤한 상상력을 총 동원했다. 다행히 시간은 넘치도록 있었다.
  361.  
  362. 방어한 흑룡포를 뚫을 수는 없다. 단단한 상대에게는 발경, 그 중에서도 침투경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 수준의 침투경으로 도플갱어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까? 해 봐야지. 창
  363.  
  364. 두 끝에 강기가 맺힌다. 회전을 가미한 일격이 흑룡포와 부딪힌다.
  365.  
  366. 꽈앙!
  367.  
  368.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흑룡포가 뒤로 밀린다. 여전히 도플갱어의 얼굴에 당황은 없다. 꿈틀거리던 흑룡포가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을 덮치려 들었다. 이성민은 창을 고쳐 잡
  369.  
  370. 고서 크게 휘둘렀다. 공기가 터지면서 강기가 폭사한다. 흑룡포가 조금 뒤로 밀려났다.
  371.  
  372. [알고 있냐?]
  373.  
  374. ‘알고 있습니다.’
  375.  
  376. 허주가 말을 걸었고,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공격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흑룡포를 휘두르는 것이 공격의 전부였고, 방어나 회피도 그리 뛰어나지는
  377.  
  378. 않았다.
  379.  
  380. [저 녀석. 무공을 쓰지 않고 있어. 단순무식한 수법만 고수하고 있다.]
  381.  
  382. 백소고의 도플갱어는 무영탈혼을 펼쳤는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아니었다.
  383.  
  384.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도플갱어는 오리지널을 흉내내는 경향이 있어요. 만약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런 것이라면, 무공을 쓰지 않
  385.  
  386. 는 것은 오리지널의 흉내라는 것이겠지요.]
  387.  
  388. 무공을 쓰지 않고 단순무식한 수법을 고수하는 것이 위지호연의 흉내라고? 그 의문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흑룡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성민은 행동에 집중했다.
  389.  
  390. 분뢰추살. 창영이 흔들리며 수십 개의 찌르기가 도플갱어를 덮친다. 흑룡포가 꿈틀거리더니 분뢰추살을 받아 친다. 거기서 한 걸음 앞서 일보무흔. 도플갱어의 옆으로 파고들면서
  391.  
  392. 추혼일살을 찌른다. 휘릭하고 돌아 온 흑룡포가 추혼일살을 막는다. 침투경을 가미했음에도 뚫을 수가 없다.
  393.  
  394. ‘복사백탐은?’
  395.  
  396.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사라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창이 흑룡포의 사이를 파고들려 했다. 이 역시 먹히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흑룡포가 창끝을 막아낸다. 구천무극창의
  397.  
  398. 세 가지 초식으로도 흑룡포를 뚫을 수가 없다.
  399.  
  400. ‘사각이 없어.’
  401.  
  402. 몸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큰 흑룡포. 길이와 너비마저 자유롭게 변환 된다. 본래 저것은 그리 위력적인 아티펙트는 아니다. 형태를 바꾸고 그를 유지하며 공격과 방어에 자유롭게
  403.  
  404. 쓰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내공과 숙련도가 필요하다.
  405.  
  406. 구천무극창은 총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태까지 이성민이 사용한 것은 세 개 뿐이었다. 추혼일살, 분뢰추살, 복사백탐. 그 이후의 초식들은 내공 소모도 크고,
  407.  
  408. 이성민이 도달한 무공 수준이 그 이상의초식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409.  
  410.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이성민의 창에 어린 강기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도플갱어가 손을 움직인다. 여전히 도플
  411.  
  412. 갱어는 무공을 쓰지 않는다.
  413.  
  414. 창이 뒤로 움직이고 다시 앞으로.
  415.  
  416. 강기가 폭발했다. 쏘아진 그 일격이 아홉으로 나뉜다. 순수하게 강기로 이루어진 그것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구천무극창의 사초, 구룡살생. 아홉 개
  417.  
  418. 의 용이 도플갱어를 집어 삼킨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 천장이 갉혀나간다.
  419.  
  420. ㅡ콰콰콰콰! 아홉 마리의 용이 전면을 휩쓸었다. 이성민은 창을 쏘아낸 손을 바르르 떨면서 앞을 보았다.
  421.  
  422. 도플갱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 밀려난 살덩이가 지저분하게 달라 붙어 있었다. 피하지 않고 막았다. 구룡살생을 정면으로 받고서… 조금 뒤로 밀려난
  423.  
  424. 것이 전부였단 말인가. 이성민은 조금 허탈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425.  
  426. 그래. 위지호연의 모습을 흉내낸 놈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
  427.  
  428. 이성민은 그런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큭큭 웃었다.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던 도플갱어가 흑룡포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놓은 흑룡포가 힘없이 늘어진다. 저벅거리며 앞으로
  429.  
  430. 나오는 도플갱어의 전신을 시커먼 강기가 휘감았다. 그것은 호신강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흉흉했고 거대했다.
  431.  
  432. [과연.]
  433.  
  434. 허주가 껄껄 웃었다.
  435.  
  436. [여태까지는 단순한 장난이었다는 모양이다.]
  437.  
  438. 그것은 이성민도 통감했다. 흑룡포를 벗은 도플갱어는 무기와 방어구를 잃었음에도, 방금 전보다 더욱 흉악하게 느껴졌다.
  439.  
  440. 도플갱어가 보법을 밟는다. 순식간이었다. 이성민은 시야와 감각 모두에서 도플갱어를 놓쳤다. 육감조차도 도플갱어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441.  
  442. [뒤.]
  443.  
  444. 허주가 내뱉어 주지 않았더라면 이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성민은 급히 몸을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445.  
  446. ‘사저, 오면 안 됩…’
  447.  
  448. 통증과 함께 공중을 날면서,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449.  
  450. 이건 진짜 괴물이라고.
  451.  
  452. ======================================
  453. < 재회-4 >
  454.  
  455.  
  456.  
  457. “…괜찮은 것인가?”
  458.  
  459. 장득수는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취걸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
  460.  
  461. 이다.
  462.  
  463. “저희 셋이서 위지호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464.  
  465.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466.  
  467.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누군가는 살아서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468.  
  469. 취걸의 목소리는 낮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섞였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과 살아야 한다는 갈망이 있었다.
  470.  
  471. “저는 백소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죽을 수 없습니다. 개방… 개방을 위해서.”
  472.  
  473. 알고 있다. 이것이 결국에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에는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칠 뿐이다. 취걸은 죽은 혈혈노파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저 잔학한 마두조차도 죽기
  474.  
  475. 직전에는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다.
  476.  
  477. 죽고 싶지 않다. 그것은 모두가 똑같다. 하나 뿐인 삶이기 때문이다.
  478.  
  479. “장득수님은 어떠십니까.”
  480.  
  481. “…죽고 싶지는… 않지.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살고 싶네.”
  482.  
  483. 이제 와서 체면을 따지는 것이 무어가 중요하겠나. 장득수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취걸이 쓴 웃음을 흘렸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둘둘 말린 스크롤을
  484.  
  485. 꺼냈다.
  486.  
  487. “운이 좋았습니다.”
  488.  
  489. 이것은 혈혈노파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이다.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아, 혈혈노파가 던전의 도플갱어 중 하나를 죽이고서 얻은 듯 했다. 백소고가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를 이용
  490.  
  491. 해서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을 분석했다.
  492.  
  493. ‘던전 탈출.’
  494.  
  495. 사용한다면 즉시 던전에서 탈출이 가능한 마법이 새겨져 있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은 셋이었다. 혈혈노파는 죽기 직전까지 이 스크롤에 어떤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알지 못
  496.  
  497. 했다.
  498.  
  499. “…백소저가 원망할텐데…”
  500.  
  501. “책임을 지겠습니다.”
  502.  
  503. 취걸이 대답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 앉아 쓰러져 있는 백소고를 보았다. 이성민을, 사제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를 기습적으로 점혈하여 정신을 잃게 만
  504.  
  505. 든 것은 취걸이었다.
  506.  
  507. ‘나를 원망하십시오.’
  508.  
  509. 취걸은 짧게 만났던 이성민을 떠올리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크롤을 찢었다.
  510.  
  511. [함께 사용할 인원을 지정해 주십시오.]
  512.  
  513.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 대해, 취걸은 장득수와 백소고의 이름을 말했다.
  514.  
  515. *
  516.  
  517. 아프다.
  518.  
  519. 통증을 자각했을 때, 이성민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떤 식의 공격이었는지 분석할 여유는 없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520.  
  521. [정신 차려라! 계속해서 오고 있으니까!]
  522.  
  523. 이성민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가 발을 크게 들더니 바닥을 내리 찍었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이 파도처럼 요동치더니 거대한 힘이 이성민을 덮쳤다. 이성민은 이를 악
  524.  
  525. 물고서 몸을 날렸다.
  526.  
  527. 콰아아앙!
  528.  
  529. 방금 전까지 이성민이 있던 자리에 초토화되었다.
  530.  
  531. [어떡하지? 어, 어떡해요?]
  532.  
  533. 루비아가 불안한 듯 웅웅거리면서 목소리를 낸다. 모른다. 이성민은 급히 창을 휘둘렀다. 꽈앙! 도플갱어가 내지른 장력이 이성민의 창과 부딪혔다. 창을 잡은 왼쪽 손목이 비틀
  534.  
  535. 린다. 왼쪽 팔 전체가 찌르르 울리면서 감각이 둔해졌다.
  536.  
  537. ‘손이…!’
  538.  
  539.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불어넣는다. 오른 손을 중심으로 잡고서 창을 한 바퀴 돌린다. 창준과 창두, 그 두 개가 순차적으로 도플갱어를 덮친다.
  540.  
  541. 도플갱어의 얼굴은 무심했다. 오리지널보다는 못한 도플갱어였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흑룡포를 쓰지 않는 것은 도플갱어가, 아니, 위지호연이 상대를 인정했다
  542.  
  543. 는 뜻이었다. 즉, 여태까지는 단순히 상대를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었고 앞으로는 상대를 적수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544.  
  545.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불행이었다. 이성민의 공격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도플갱어의 손에 가로막혔다. 전신에 검은 호신강기를 두른 도플갱어는 움직이는 것만
  546.  
  547. 으로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괴의 화신이었다. 비록 그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닐 지라도.
  548.  
  549. 벌려 뻗은 손이 커보인다. 가벼운 손목의 흔들림, 그것이 수백의 잔상을 그린다. 변? 환? 허? 실은 어디지?
  550.  
  551.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열, 왼쪽으로 일곱…]
  552.  
  553. 허주가 뭐라고 말은 했지만 느리다. 듣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응하기에는 위지호연의 공격이 너무 빠르다. 하나에 맞춰 요격하는 것보다는 전체를 막기 위해 창을 돌렸고, 결과적으
  554.  
  555. 로는 늦었다. 이성민은 피를 토하면서 뒤로 날아갔다.
  556.  
  557. [불편하기 짝이 없군.]
  558.  
  559. 허주가 투덜거린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여기서 죽으면 주인님을 만날 수 없는데… 의식 너머에서 루비아가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560.  
  561. “좀… 닥치고 있어 봐.”
  562.  
  563.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다.
  564.  
  565.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내가 공격의 일부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너는 방금의 일격으로 몸이 폭사했을 거다.]
  566.  
  567. 과연. 정면으로 당한 것과 공격에 실린 위압감을 생각하면 의외로 버틸만했다고 생각했는데.
  568.  
  569. ‘왜 막아 준 겁니까?’
  570.  
  571. [네가 이곳에 죽는다면 나도 난감해지니까. 핏덩이가 된 몸을 빼앗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네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다.]
  572.  
  573. 허주가 대답했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이 몸을 일으킨 것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574.  
  575.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네놈이 도망치라고 보낸 여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
  576.  
  577. ‘압니다.’
  578.  
  579. 바보도 아니고. 취걸과 장득수를 데리고 오라고 보낸 백소고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음도 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580.  
  581. 있다는 것도 안다.
  582.  
  583. 백소고가 배신한 것일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584.  
  585. [원망스럽지 않나? 후회스럽지 않나?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 계집을 대신하여 죽을 필요는 없을 터인데. 나는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아. 네놈은 이미 한 번
  586.  
  587. 죽음을 겪어 본 자가 아닌가?]
  588.  
  589. 몸상태를 추스를 틈도 없었다. 도플갱어가 다시 공격해 온다. 홱하고 뻗은 오른 손, 권拳인가 장掌인가. 아니, 수도? 예리하게 벼려진 강기가 목젖을 노려 온다. 이성민은 오른
  590.  
  591. 손 안의 창을 빙글 돌렸다.
  592.  
  593. 카가가각!
  594.  
  595. 강기와 강기가 서로 맞부딪힌다. 밀린 것은 이성민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지 않고 자세 자체를 바꾼다. 동시에 창을 돌리면서 아래에서 위로 복사백탐을 잇는다.
  596.  
  597. 통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이성민의 공격궤도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
  598.  
  599. [겪어 보았기에 더욱 잘 알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인지. 설마 이번에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600.  
  601. ‘그럴 리가 없잖아.’
  602.  
  603. 대답과 즉시 뛴다. 무영탈혼의 이보겁살. 강기를 폭사시키면서 바로 구천무극창의 사초인 구룡살생을 펼친다. 명확한 살의를 담은 강기의 줄기가 전면을 휩쓴다.
  604.  
  605. 방어로 쓰던 흑룡포는 내려놓았다. 도플갱어는 방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용하는 것은 오른 손 뿐. 도플갱어가 흉내 내고 있는 위지호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인정하여 흑
  606.  
  607. 룡포를 벗었다. 그렇다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쓰지 않는다. 쓰는 것은 오른 손 뿐이다.
  608.  
  609. [대답해라. 네놈은 후회하고 있는가? 그 계집을 원망하고 있는가?]
  610.  
  611. ‘나는.’
  612.  
  613. 대답을 끊어 내뱉는다. 이보겁살과 구룡살생은 도플갱어가 내지른 일장에 파훼되었다. 흩어진 강기의 파편 속으로 도플갱어가 뛰어 들어온다.
  614.  
  615. ‘후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애초에… 사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8년 전에 죽었을 테니까.’
  616.  
  617. 무턱대고 들어간 므쉬의 산. 스스로를 과신하여 걸었던 과한 금제. 백소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산에서 죽었을 것이다.
  618.  
  619. ‘사저에게 구명 받았다. 사저와 지내면서, 사저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에 왔고 이렇게 남은 거야.’
  620.  
  621. [그 계집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냐?]
  622.  
  623. ‘개소리하는군.’
  624.  
  625. [으하하!]
  626.  
  627. 허주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껄껄 크게 웃었다. 루비아는 여전히 신경 사납게 중얼거리고 있었고, 도플갱어의 공격은 매서웠다.
  628.  
  629. [조금 마음에 들었다. 네놈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조금 도와줘 보도록 할까.]
  630.  
  631. 허주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지금의 이성민이 어찌 할 수
  632.  
  633. 없을 수준의 괴물이었다. 헤어지고서 9년. 9년 동안 이 정도인가. 이성민은 피식 웃었다.
  634.  
  635. ‘진원진기를 격발시켜도 상대가 안 돼. 도망치기에는… 늦었나? 앞으로 뛰어 볼까?’
  636.  
  637. [저만한 적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지.]
  638.  
  639. ‘이기는 것은 힘들어. 말했을 텐데. 죽고 싶지는 않다고.’
  640.  
  641. [죽지 않아도 된다.]
  642.  
  643. 허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성민의 몸을 덮은 마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이성민은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644.  
  645. [매개만 있다면 힘을 끌어오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지!]
  646.  
  647. 허주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마갑에서 뿜어진 불길은 이성민의 몸을 덮고 있었으나, 이성민은 그 불꽃에서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다.
  648.  
  649. “너… 뭐하는 거냐?”
  650.  
  651. [으하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반말을 하는 구나. 뭐, 상관없지. 나는 네놈이 조금 마음에 들었으니까.]
  652.  
  653. 도플갱어가 뛴다. 이성민의 구룡살생과 이보겁살과 격돌하여 파훼시켰던 위력적인 장법이 덮쳐온다. 일장을 때렸을 때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이성민을 덮쳤고, 이성민이 대응하기
  654.  
  655. 전에 불꽃이 앞으로 나섰다.
  656.  
  657. [봐라! 이것이 진짜 괴력난신이다!]
  658.  
  659. 허주가 웃는 목소리로 외쳤다. 꽈아아앙! 힘과 힘이 충돌했다. 위지호연의 강기가 애초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사라졌다. 불길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고 앞으로
  660.  
  661. 몰아쳤다. 도플갱어는 급히 양 손을 들었다. 가슴 앞으로 모은 손바닥 사이에서 피처럼 붉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공을 던지듯이 앞으로 날렸다. 꽈아아앙! 격이
  662.  
  663. 다른 두 힘이 충돌하면서 공간 자체가 뒤흔들렸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664.  
  665. “대체 뭐야…!”
  666.  
  667. [이해가 늦군, 미련한 놈! 내 힘의 일부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네놈 혼자서 맞서 봤자 저 반푼이에게 죽어버릴 테니까!]
  668.  
  669. “나를 돕고 있는 거냐…?”
  670.  
  671. [그렇다! 네놈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효율이 좋지 않군. 힘은 빌려 주마. 그러니 네가 마음대로 써 보아라.]
  672.  
  673. 허주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솟구친 불길이 흩어지더니 이성민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성민은 이해했다. 그때, 잠자는 숲에서 보았던 것은 불꽃 따위가 아니었다
  674.  
  675. . 지금 위지호연의 공격을 밀어낸 것 역시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주가 다스리는 거대한 힘 자체였다.
  676.  
  677. [요력이다. 본래라면 너희 인간은 다룰 수 없는 힘이지. 하지만 네놈이라면 다룰 수 있을 것이야. 네놈의 심장은 인간보다는 요괴의 것에 가까워 보이니까.]
  678.  
  679. 허주의 요력이 몸에 깃들고 심장이 그를 집어 삼킨다. 이성민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노곤하던 전신의 피로감이 사라진다. 욱신거리던 통증도 가셨다. 부러진 늑골과 손목이? 멀
  680.  
  681. 쩡하게 움직였다.
  682.  
  683. 심장에 깃든 힘을 통해 이성민은 요력의 성질을 이해했다. 이것은 내공도 아니고 마력도 아니었다. 요력은 파괴밖에 모르는 단순하고 무식한 힘이었으며,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인
  684.  
  685. 외의 힘이었다. 본래는 공존이 불가한 요력과 내공이 이성민의 몸 안에서 공존한다. 그것은 서로 뒤엉키면서도 섞이지는 않았다. 물과 기름과 같은 두 개의 힘이 전신을 흐르면서
  686.  
  687. 이성민은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688.  
  689. [견뎌라!]
  690.  
  691. 허주가 외친다. 도플갱어가 뛴다. 놀이상대에서 적으로, 그리고 호적수로 격이 올랐다. 그렇기에 도플갱어는 가진 전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뛰어나간 도플갱어의 몸이 다섯으로 나
  692.  
  693. 뉘더니 사방에서 덮쳐 온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실체를 갖춘 본인이었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창을 움직였다.
  694.  
  695. 분뢰추살.
  696.  
  697. 요력과 내공이 섞인 분뢰추살은 이전에 펼친 분뢰추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달아 터지는 폭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분신이 박살난다. 그 중 본체는 이형환위를 통해 빠져나갔
  698.  
  699. 다.
  700.  
  701. [뒤!]
  702.  
  703. 허주가 위치를 알린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요력은 이성민의 전신 감각을 평소보다 더욱 예리하게 바꿔 놓았다. 이성민은 신음을 삼키고서 몸을 돌렸다. 창을 휘두를 수는 없
  704.  
  705. 었다. 방금 전에 펼친 분뢰추살은 끔찍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초식을 펼친 이성민의 양 팔이 제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뼈가 박살나 버렸기 때문이다.
  706.  
  707.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박살난 팔이 순식간에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문제다. 등 뒤로 이동한 도플갱어가 이성
  708.  
  709. 민의 가슴을 향해 양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710.  
  711. 일보무흔. 이성민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걸음을 마저 뻗기도 전에 이형환위가 펼쳐졌다. 이성민은 그 경악스런 속도에 놀라면서도 몸을 통제했다. 일보무흔에서 두 걸음.
  712.  
  713. 이보겁살. 요력과 내공이 뒤섞인 강기가 폭사한다. 도플갱어는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급히 양 손을 들어 방어를 완성했다. 하지만 완전히 버티지 못했다.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714.  
  715. 밀려났다.
  716.  
  717. 그 순간에 이성민의 양 팔은 재생되었다. 이성민은 숨을 삼키고서 구천무극창을 펼쳤다.
  718.  
  719. 구천무극창 오초, 절명섬絶命閃.
  720.  
  721. 그것은 소리조차 갖지 않는 극한의 쾌를 담은 찌르기였다.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검귀를 죽인 이상적인 찌르기에 근접한 공격이기도 했다. 정신세계
  722.  
  723. 에서는 이미 다시 도달하였었지만, 현실의 육체로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공격이기도 했다.
  724.  
  725.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요력의 보조를 받는 몸뚱이가, 무리한 움직임도 가능하게 만든 몸뚱이가 최속의 찌르기인 절명섬을 완벽하게 펼쳐냈다.
  726.  
  727. 노린 것은 가슴 정 중앙.
  728.  
  729. 이성민의 창이 도플갱어의 가슴 정 중앙을 꿰뚫었다.
  730.  
  731. ======================================
  732. < 재회-5 >
  733.  
  734.  
  735.  
  736. 호신강기의 저항감을 뚫는다. 강기와 요력이 뒤섞인 절명섬. 정신세계에서는 쉼 없이 펼칠 수 있던 절명섬은, 이성민의 진짜 육체로는 펼치는 것이 부담스러운 무공 중 하나였다.
  737.  
  738. 임독양맥을 뚫으면서 이성민은 초절정 고수가 되었고 환골탈태를 해냈다. 육체는 그 이전의 육체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해졌으나, 구천무극창의 절초들은 그러한 육체로도 부담
  739.  
  740. 이 존재하는 신공들이었다.
  741.  
  742.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허주가 보태 준 요력의 보조를 받은 이성민의 육체는 정신 세계에서 도달한 무공 수준을 힘겹게나마 펼칠 정도는 되었다.
  743.  
  744.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난다. 놈은 피도 토하지 않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감각이 완전히 거세 된 괴물은, 진짜 사람이었다면 죽어버릴 치명상 속에서도 반
  745.  
  746. 격을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제 몸의안위를 완전히 도외시한 질 나쁜 동귀어진의 공격이었다.
  747.  
  748. ‘팔이…!’
  749.  
  750. 절명섬을 펼친 근육이 파열된 것이 느껴진다. 힘이 빠진 손이 창을 놓으려 들었으나, 이성민은 입술을 짓이겨 씹으면서 창을 잡았다. 뻗은 창을 뒤로 회수하면서 무영탈혼을 펼쳐
  751.  
  752. 뒤로 물러선다. 가슴에 바람 구멍을 가진 도플갱어가 양 팔을 펼친다.
  753.  
  754. 콰콰콰! 그녀를 중심으로 시커먼 강기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인간의 무공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처럼 보였다. 몰아치는 힘의 격류가 사방을 휩쓴다. 이성민은 요력과 강기를 동시
  755.  
  756. 에 끌어올리면서 그에 저항했다.
  757.  
  758. [놀랍군. 저 계집… 진짜도 아니면서 저만한 힘을 휘두르는가. 저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759.  
  760.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요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헉하고 숨이 막히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풀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아작난 양 팔이 재생
  761.  
  762. 되었다.
  763.  
  764. ‘이길 수 있나…?’
  765.  
  766. [네가 하기에 따라 달려있지. 나는 너에게 요력을 더해줄 뿐이다. 아니면… 나에게 육체를 넘길 테냐?]
  767.  
  768. 허주가 물었다.
  769.  
  770. [나에게 육체를 넘긴다면 저깟 반푼이 따위야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저 모습을 한 본인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어. 그럴 테냐?]
  771.  
  772. 계속해서 묻는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고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질문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773.  
  774.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775.  
  776. ‘내가 해야 돼.’
  777.  
  778. [으하하! 힘을 빌려 쓰는 주제에 네가 하겠다고? 마지막 자존심, 뭐 그런 것이냐?]
  779.  
  780. ‘맞아. 내 자존심이야. 내 몸이 너무 약해. 할 수 있는데,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 몸으로는 아직 할 수가 없어.’
  781.  
  782.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강함과 위지호연의 강함은 다르겠지.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2100년의 수행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어
  783.  
  784. 렴풋하게 보인다. 위지호연이 가지고 있는, 위지호연이 도달한 초월적인 강함이. 저 강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785.  
  786.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안다. 정신세계에서 수련을 마쳤을 당시의 몸뚱이와 무공을 그대로 펼칠 수 있더라면 이런 식으로 고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
  787.  
  788. 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가슴 벅찬 성취감과 달성감을 느끼기도 했다.
  789.  
  790. 2100년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791.  
  792. [묘한… 놈이군.]
  793.  
  794.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었다. 육체가 없는 허주는 거대한 요력의 덩어리에 혼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한 요력과 혼이 마갑을 거쳐 이성민의 몸
  795.  
  796. 안에 깃든 것이 지금이다. 이성민과 반쯤 동화되어 있는 허주는 완전히 빙의하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의 육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으나, 절반 정도의 빙의로도 이성민이 느끼는 감정
  797.  
  798. 을 전해 느낄 수는 있었다.
  799.  
  800. [좋아. 더 빌려주지.]
  801.  
  802.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달성감과 성취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해야 돼’라는 이성민의 대답이 근거 없는 아집이 아님은 알았다.
  803.  
  804. [네가 버틸 수 있을까?]
  805.  
  806. 그 말은 허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어 애매했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한 힘이 이성민의 몸 안을 가득 채웠다. 단전이 박살나는 것 같았다. 단전을
  807.  
  808. 통해 내공을 받아 흘리는 기혈이 찢어지면서 강제로 확장된다. 왼쪽 가슴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내공과 요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809.  
  810.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통증에 몸을 무디게 할 수는 없었다.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몰아친 강기의 폭풍이 이성민을 휩쓸려 들었
  811.  
  812. 다. 이성민은 아찔한 통증 속에서 창을 찾았다. 창은 이미 이성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813.  
  814. 구룡살생.
  815.  
  816. 아홉의 용과 강기의 폭풍이 부딪혔다. 내공은 이미 바닥이다. 남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씹어 내공을 보충할 필요는 없었다. 내공의 빈자리를 요력이 채운다. 불길한 색으로
  817.  
  818. 물든 아홉의 용이 꿈틀거린다. 이윽고 용들은 입을 쩍 벌리면서 강기의 폭풍을 집어 삼켰다.
  819.  
  820. 격돌하던 힘과 힘이 사라진 공백. 도플갱어는 살짝 비틀거리더니, 전보다 더한 힘을 내뿜었다. 괴물이 발하는 무위는 이미 인간의 것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었다. 허주가 탄성을
  821.  
  822. 질렀고 이성민은 앞으로 걸었다. 손에 있는 창이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힐긋 내려보니 창간은 찌그러져 있었고 창두의 창날은 금이 가있었다.
  823.  
  824. ‘보수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825.  
  826. 셀게루스에게 한 소리 듣겠군.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단전과 기혈을 활짝 열었다. 통증은 건재했으나 이성민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했다.
  827.  
  828. ㅡ후우웅! 자색이 뒤섞인 요력이 창 전체를 휘감았다. 도플갱어의 전신을 덮고 있던 검은 강기가 그녀의 양 손에 어린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이성민은 직감했다. 도플갱어의
  829.  
  830. 공격이 아니라, 이성민 본인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검은 심장이 요력을 받아 펌프질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이번 일격으로 끝내지 못한다면.
  831.  
  832. 아니. 끝낼 수 있다. 이성민은 그를 확신했다. 확신과 함께 무공을 준비한다. 추혼일살이나 분뢰추살, 복사백탐으로는 무리다. 도플갱어가 끌어올리는 힘은 구룡살생으로 막을 수
  833.  
  834. 준이 아니었고 절명섬으로 저 부푼 강기를 뚫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사용하지 못한 무공을 택해야 한다.
  835.  
  836. 구천무극창의 육초.
  837.  
  838. 그 이상의 무공은 무리다. 정신세계에서도 가혹한 수행과 기나 긴 시간으로도 간신히 도달했던 무공들이다. 지금의 육체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언제 가능할까.
  839.  
  840. ‘할 수 있어.’
  841.  
  842. 구천무극창 육초. 공도空道.
  843.  
  844. 창을 덮고 있던 자색의 강기가 부푼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내질렀다. 그 순간에 도플갱어의 강기가 폭발하여 이성민을 덮쳤다. 그것과 닿는
  845.  
  846. 순간 파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공도는 도플갱어의 공격을 모조리 휘감더니 회전을 통해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성민은 손에 전해지는 압박감을 견뎌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847.  
  848. ㅡ꽈아아앙!
  849.  
  850. 살덩이로 이루어진 벽들이 모조리 폭발했다. 흩뿌린 파편에 얻어 맞은것만으로도 그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이성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부유감 속에서 길을 찾았다. 창을 내지른
  851.  
  852. 곳이 이성민이 가야할 길이었다. 홱하고 날린 몸이 공백의 길을 꿰뚫는다. 그 끝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도플갱어가 서있었다.
  853.  
  854. 그 얼굴.
  855.  
  856. 퍼어어엉!
  857.  
  858. 소리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방으로 튀었던 강기의 파편들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자색과 검은색의 안개가 퍼져 나간다. 무너지는 안개를 보면서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그녀
  859.  
  860. 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를 내려 보았다.
  861.  
  862. 몸뚱이의 절반이 사라진 도플갱어는 움직이고 싶어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두 눈을 깜박거리는 도플갱어의 시선을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863.  
  864. 결국 말은 뱉지 않고 다시 다물었다. 해보았자 의미가 없다. 저것은 위지호연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지호연이 아니니까.
  865.  
  866.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꾹 다물면서 손을 보았다. 창은 더 이상 무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쏟아 부은 힘을 창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창을 뒤
  867.  
  868. 에 걸쳤다.
  869.  
  870. 그러는 사이에 도플갱어의 눈이 감겼다.
  871.  
  872. 완전히 죽은 것이다.
  873.  
  874. [이겼군.]
  875.  
  876. 허주가 중얼거렸다.
  877.  
  878. [어떤 기분이냐? 본래라면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를 네 힘이 아닌 내 힘을 빌어 쓰러트린 것이다. 자랑스러우냐?]
  879.  
  880. “아무렇지도 않아.”
  881.  
  882.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숙였다. 그는 손을 뻗어 도플갱어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공도에 휘말려 사라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남은 사체 속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
  883.  
  884. 혔다. 그것은 주먹만한 크기를 가진 광석이었다. 마석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그것을 일단 아공간 포켓 안에 넣었다.
  885.  
  886. [준비해라.]
  887.  
  888. 허주가 말했다.
  889.  
  890. “무슨 준비?”
  891.  
  892. [네 몸에 쏟아 넣은 요력을 거둘 것이다. 아마 반동이 심할 것이야.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893.  
  894. 요력을 몸으로 받던 중에도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또 있다고? 이성민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정도의 힘을 사용했는데 대가가 없는 것
  895.  
  896. 도 이상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897.  
  898. ‘준비 됐어.’
  899.  
  900. [하하하!]
  901.  
  902. 허주의 웃음소리와 함께, 몸 안에 들어와 있던 허주의 요력이 쭈욱 빨려나갔다. 몸에서 뿜어진 요력은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 속에 깃들었다.
  903.  
  904. 정신을 놓을 뻔했다.
  905.  
  906. 다양한 고통에 익숙해진 이성민이었지만, 지금의 고통은 여태까지 느껴왔던 고통들은 장난질로 느껴질 만큼 강력했다. 단전과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근육이 터지는 것 같았다
  907.  
  908. . 뼈는 얼음이라도 쏟아 넣은 것처럼 시리다가 불로 달구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혈류는 역류하는 것 같았다. 이성민은 입을 쩍 벌리고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909.  
  910. [버틸 만 하냐?]
  911.  
  912. 그런 허주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이성민은 한참 동안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허주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정신을 잃는 순간 고
  913.  
  914. 통을 견뎌내지 못한 뇌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고통은 끔찍했다.
  915.  
  916.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과도 같던 고통이 끝난다.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몇 번이나 씹은 입술은 피투성이였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
  917.  
  918. 으나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919.  
  920. “괘, 괜찮아요?”
  921.  
  922. 주변에는 루비아가 있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가 이성민이 정신을 차리자 황급히 다가왔다.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킨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다가 루비아를 보았다.
  923.  
  924. “뭐라도 조금 해주지 그랬습니까?”
  925.  
  926. “땀 닦아주고 피 닦아주고 열심히 했거든요?”
  927.  
  928. “치유 마법을 펼칠 줄 모르는 겁니까?”
  929.  
  930. “할 줄 몰라요.”
  931.  
  932.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히 내밀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루비아의 로브는 피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닦을 것이 없어서 입고 있던
  933.  
  934. 로브로 몸을 닦아 준 모양이었다.
  935.  
  936. “시간은… 얼마나 흘렀습니까?”
  937.  
  938. “1시간 정도…”
  939.  
  940. 1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리며 창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941.  
  942. “뭐, 뭐하는 거예요?”
  943.  
  944. “가야해.”
  945.  
  946.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욱신거림이 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뼈가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근육이 아팠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947.  
  948. 이성민은 시야 한쪽에 있는 미니맵을 보았다. 도플갱어와 싸우는 도중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던전 안에 남아있는 것은 이성민을 제외하면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확인해야
  949.  
  950. 만 했다.
  951.  
  952. 이성민은 발을 질질 끌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변이 워낙 엉망이기는 했지만 미니맵 덕분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확인 된 바로는 도플갱어들도 모조리 죽어
  953.  
  954. 있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이성민의 행동에 거리낌은 없었다.
  955.  
  956. 혈혈노파의 시체가 보였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는 도끼 자국과 장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957.  
  958. “이건…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959.  
  960. 루비아가 이성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961.  
  962. “…마법? 어떤 마법?”
  963.  
  964. “확실하지는 않은데… 잠깐만요.”
  965.  
  966. 루비아를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진들이 펼쳐졌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루비아가 머뭇거리며 이성민을 힐긋거렸다.
  967.  
  968. “괜찮습니다.”
  969.  
  970. 이성민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971.  
  972. “…이동 마법이 펼쳐졌어요. 아마 던전 밖으로 이동하는 마법이었겠죠.”
  973.  
  974. 백소고와 장득수, 취걸이 그 정도의 고등 마법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스크롤일 것이다.
  975.  
  976.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977.  
  978. “아… 네. 탈출 마법으로 이동한 사람은 셋이에요. 정확히 누가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979.  
  980. “알겠습니다.”
  981.  
  982. 그것으로 충분하다.
  983.  
  984. 백소고는 죽지 않았다. 취걸, 장득수와 함께 던전을 벗어났다. 그러면 된다. 만족할 수 있다. 백소고를 살리기 위해 이 던전에 들어왔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어서 지금까
  985.  
  986. 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87.  
  988. 그것을 이루었다.
  989.  
  990. “…그러면…”
  991.  
  992.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이성민을 보고서 루비아가 당황하며 달라붙었다.
  993.  
  994. “어, 어디로 가는 건가요?”
  995.  
  996. “앞으로.”
  997.  
  998. 이성민은 몸의 통증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999.  
  1000. “앞으로 가야합니다.”
  1001.  
  1002. 미니맵을 본다.
  1003.  
  1004. 던전의 끝에 노란 점이 있었다.
  1005.  
  1006. ======================================
  1007. < 재회-6 >
  1008.  
  1009.  
  1010.  
  1011. “…대단… 하군…”
  1012.  
  1013. 죽어가는 목소리. 위지호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 보았다. 인간이 아닌 괴물이 위지호연을 올려 보고 있었다. 양 팔은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었고 하반신은 아예 존재
  1014.  
  1015. 하지 않았다.
  1016.  
  1017. 강했다. 위지호연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것을 인정했다. 여태까지 위지호연이 에리아에 살아 온 9년 간, 저기 죽어가는 괴물만큼 위지호연을 힘겹게 한 상대는 존재하지
  1018.  
  1019. 않았다. 저 이름모를 괴물은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미 몇 년 전에 아버지 천마의 무위를 뛰어넘은 위지호연으로서도 진심이자 전력으로 상대에 임해야 할 정도였
  1020.  
  1021. 다.
  1022.  
  1023. “필멸자… 그들 중에서도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늘…”
  1024.  
  1025. “넌 강했다.”
  1026.  
  1027.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조금의 피로를 느끼면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강적이기는 하였으나, 긴 싸움을 통해 위지호연이 흘린 것은 피가 아닌 땀이었고 고통
  1028.  
  1029. 이 아닌 조금의 피로감 뿐이었다.
  1030.  
  1031. 그를 알기에 괴물은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1032.  
  1033. “보이는 구나.”
  1034.  
  1035. 괴물이 눈을 반개했다. 시뻘건 안광을 줄줄 흘리던 눈은 이제는 끝 모를 깊이를 가지고 위지호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1036.  
  1037. “네가 가진 운명.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될, 패왕의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를 벗어나 군림하게 될 운명이 보여.”
  1038.  
  1039. “무슨 말이냐.”
  1040.  
  1041. “천재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네가 타고난 재능은 운명조차 뒤틀었구나… 흐흐! 이러니 내가 인간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이래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1042.  
  1043. . 나도 결국은 이곳에 묶여 있는 망령일 뿐이니… 자아. 거두어라. 너에게 거두어진다면 오히려 영광일 터이니.”
  1044.  
  1045. 그 말을 들으면서 위지호연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힘이 몸을 일으켰다. 괴물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 소리 없이 죽음이 피어났
  1046.  
  1047. 다. 던전의 최종에 존재했던 괴물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고, 그것은 허공을 맴돌다가 위지호연에게 스며들었다. 위지호연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몸 안에 깃드는 힘을 의식했다.
  1048.  
  1049. 그것은 의지 없는 힘의 덩어리였고, 자연스레 위지호연의 천마신공의 흐름에 맡겨져 그녀가 가진 힘의 일부가 되었다.
  1050. 위지호연은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이 가로막던 곳의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위지호연은 손을 뻗었다. 흑룡포가 대신하여 앞으로 날아가 문을 열었다.
  1051.  
  1052. 문의 안쪽에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많았다. 위지호연은 허리춤에 매인 아공간 포켓을 열었다. 그 막대한 금은보화들이
  1053.  
  1054. 모조리 위지호연의 아공간 포켓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보물창고의 끝에 도착했다. 공중 위에 검은 색의 천이 떠있었다. 위지호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움찔거
  1055.  
  1056. 리던 천이 위지호연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그것은 위지호연의 몸 전체를 덮더니 착 달라붙는 의복이 되었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 입은 것 같지가 않았다. 위지호연은 이 옷이야말
  1057.  
  1058. 로 이 던전에서 주어지는 가장 뛰어난 보상임을 깨달았다.
  1059.  
  1060. “제법 재미있었어.”
  1061.  
  1062.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지난 손이 위지호연의 가슴에 닿았다.
  1063.  
  1064. “던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렵다기 보다는 재미있더군. 마지막 녀석은 굉장히 강했어. 아마 예전의 나였더라면 이길 수 없었을 거야.”
  1065.  
  1066. 정말로 그랬을까?
  1067.  
  1068. “나는 바보가 아니야. 이 던전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했어. 나는… 너와 똑같이 생긴, 구천무극창을 사용하는 네가 아닌 너와 만났었다. 너는 재미있는 상대였어. 내가
  1069.  
  1070. 가르친 무공이었지만 직접 상대를 해보니 의외인 점이 많더군. 워낙에 잘 만들어진 무공이었으니까 말이야.”
  1071.  
  1072.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1073.  
  1074. 그는 부러진 창에 몸을 기대고서 위지호연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위지호연은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것이 이성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1075.  
  1076. “너도 이 던전을 목적으로 온 것이냐. 하지만 조금 늦었군. 이 던전의 마지막 괴물을 쓰러트린 것은 나거든.”
  1077.  
  1078. 위지호연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양보해줄 생각은 없다. 이 던전을 공략한 것은 위지호연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위지호연이 취하게 되었다.
  1079.  
  1080. “하지만 네가 달라고 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어. 우리는 친구니까. 안 그래?”
  1081.  
  1082. “…아니. 주지 않아도 괜찮아.”
  1083.  
  1084. “이제야 말을 하는 군.”
  1085.  
  1086. 위지호연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위지호연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피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1087.  
  1088.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하고 있었어.”
  1089.  
  1090. “하하! 멍청한 녀석. 9년이나 흘렀다. 9년이 흘러서 만나게 된 거야. 9년 동안 나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 한 마디도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냐?”
  1091.  
  1092. “생각은… 했었지.”
  1093.  
  1094. 생각해 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 뿐이다. 위지호연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응시했다.
  1095.  
  1096. “너는 누구를 만났지?”
  1097.  
  1098. “…너.”
  1099.  
  1100. “나인가. 그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 뒤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었거든. 그래도 살아남았군. 나를 쓰러트렸다는 것이겠지?”
  1101.  
  1102. “힘들었어.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1103.  
  1104. “하지만 죽지는 않았지. 9년… 서로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떠냐?”
  1105.  
  1106. “의미는 많았지. 고생도 많이 했고.”
  1107.  
  1108. “너는 강해졌어.”
  1109.  
  1110. “만족은 안 돼.”
  1111.  
  1112.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는 부러진 창을 내려 보았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싸웠을 때를 떠올린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허주의 도움. 요력의 보조가
  1113.  
  1114. 있었기 때문에 정신세계에서 도달한 무위를 재현할 수 있었다.
  1115.  
  1116. “어째서?”
  1117.  
  1118. “너는 나보다 더 강하니까.”
  1119.  
  1120. “하하! 알고 보면 너도 욕심은 참 많다니까. 나보다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냐?”
  1121.  
  1122. “지금은.”
  1123.  
  1124. “지금은… 이라는 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인가?”
  1125.  
  1126. “세상은 넓으니까.”
  1127.  
  1128. “좋은 일이야. 확실히 9년 전과는 다르군. 그때의 너는 제대로 된 목표라는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기껏 죽음에서 돌아왔음에도 뭔가
  1129.  
  1130. 대단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
  1131.  
  1132. “그게 싫었어.”
  1133.  
  1134. “그래서 변했다는 거냐?”
  1135.  
  1136.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해.”
  1137.  
  1138. “아직인 모양이군.”
  1139.  
  1140. 위지호연이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몸을 돌린 그녀는 성큼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이성민은 가까워지는 위지호연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1141.  
  1142. 많다. 이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되었다. 지금의 이성민은 아직 위지호연과 대등한 위치에 서지도 않았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성
  1143.  
  1144. 취를 자랑스레 말할 만큼의 수준도 되지 않았다.
  1145.  
  1146. 이성민은 그것을 ‘싫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백소고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므쉬의 산에 있었을 적과 비교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얼마나 뛰어나졌는지
  1147.  
  1148. . 결과적으로 백소고에게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만족했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으니까.
  1149.  
  1150. 그렇다면 위지호연은?
  1151.  
  1152. ‘아직은 안 돼.’
  1153.  
  1154.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지금 위지호연에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었을 때. 위지호연이 보이는 반응이 어떨 것인지 두렵다. 단순한 칭찬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정 받고
  1155.  
  1156. 싶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두고 친구라고 했다. 이성민도 위지호연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157.  
  1158.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된다. 친구니까, 그러니까.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위지호연에게 부끄러울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 위지
  1159.  
  1160. 호연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1161.  
  1162. “약속했던 날까지는 아직 1년이 남았나.”
  1163.  
  1164. “응.”
  1165.  
  1166. “약속 장소는 기억하고 있어. 날짜도. 계속… 생각했거든. 너랑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너는 어떤 모습이 되었고, 너는
  1167.  
  1168.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1169.  
  1170. “…너는 많이 변했어.”
  1171.  
  1172. “너도 마찬가지야. 아, 그래. 기회가 된다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 내 가슴은 어때?”
  1173.  
  1174. “뭐?”
  1175.  
  1176. 9년 전과 똑같았다. 위지호연은 대뜸 뜬금없는 이야기를 물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성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 온 위지호연이 자신의 가슴
  1177.  
  1178. 에 손을 올렸다.
  1179.  
  1180. “네가 아는 전생에 비해서 그리 커지지 않은 것 같은데. 네 취향은 어떠냐? 조금 더 큰 편이 좋은가?”
  1181.  
  1182. “…어… 내 대답이 중요한 건가?”
  1183.  
  1184. “기왕이면 네가 좋은 쪽이 나도 좋으니까 말이야.”
  1185.  
  1186. “딱히 상관은 없다고 보는데…”
  1187.  
  1188.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풍유환을 먹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 아, 너는 뭔지 모르려나? 풍유환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가슴이 확실하게 커진다고 하더군. 부작용도 없
  1189.  
  1190. 고. 그런데 막상 가슴을 키우면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서…”
  1191.  
  1192.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1193.  
  1194. 진심으로 위지호연의 가슴이 크건 말건 이성민은 신경쓰지 않았다. 가슴 크기라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위지호연이 히죽 웃었다.
  1195.  
  1196. “나와 함께 갈 테냐?”
  1197.  
  1198. 위지호연이 물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1199.  
  1200. “나를 추종한답시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이 많아. 귀찮은 놈들이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기대를 품고 나를 대하고 있어.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1201.  
  1202. 않아.”
  1203.  
  1204. 독고귀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를 죽인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덤벼들던, 마랑철권의 고함과 함께.
  1205.  
  1206. “나는 타인에게 기대받는 것이 싫어. 마교에 있었을 적에도 그랬으니까. 그들이 멋대로 기대하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어떻게’ 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 역겹다.”
  1207.  
  1208.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거야.”
  1209.  
  1210. “알아. 내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멋대로 기대를 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네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괜찮아. 나 역시 너
  1211.  
  1212. 에게 기대하고 있으니까.”
  1213.  
  1214.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눈은 9년 전에 제나비스에서 보았던 눈과 똑같았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를 품은 눈이다.
  1215.  
  1216. “너와 함께 다닌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많은 것을 해왔지만, 너랑 함께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런 예감이 든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1217.  
  1218. “…미안해.”
  1219.  
  1220. 이성민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1221.  
  1222. “아직, 나는 그럴 수가 없어.”
  1223.  
  1224.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싫은 것이냐?”
  1225.  
  1226. “아니. 그건 아니야. 단지… 그래. 나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아.”
  1227.  
  1228. “욕심이 많아.”
  1229.  
  1230.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더니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에 얹었다.
  1231.  
  1232. “나는 지금의 너로도 충분히 좋아.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졌어.”
  1233.  
  1234. “나 스스로 만족을 못하는 거야. 나는 더 할 수 있어. 더 먼 곳을 보고 왔으니까, 더 나아갈 수 있어.”
  1235.  
  1236. “하하!”
  1237.  
  1238. 이성민의 말에 위지호연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이성민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의 말에 강한 집념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위지호연을 기쁘게 만들
  1239.  
  1240. 었다. 적어도 9년 전의 이성민은 저런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변하기 마련이다. 위지호연은 변해버린 이성민을 가까이서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1241.  
  1242. “그렇다면 1년 후에 다시 보도록 하자.”
  1243.  
  1244. 약속했던 그곳에서. 위지호연이 덧붙였다.
  1245.  
  1246.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갈 거야. 네가 더 갈 수 있듯이, 나도 더 갈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데 1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강할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1247.  
  1248. 안목이 높아져 있겠지. 나는 지금의 너를 이곳에서 봐 버렸으니까.”
  1249.  
  1250.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고서 이성민의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이성민을 지나쳤다. 이성민은 배웅의 말을 전하기 위해 위지호연을 돌아 보았다.
  1251.  
  1252. “1년 후에 보자.”
  1253.  
  1254. “그래.”
  1255.  
  1256.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말을 듣고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이성민에게 보이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미묘한 가슴의 떨림을 즐겁게 받아 들였다. 9년
  1257.  
  1258. 전의 기억이 났다. 처음 제나비스의분수대 앞에서 소환되었을 때. 뭔지 몰라 멀뚱히 서있던 중에 느꼈던 시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고 위지호연은 그것이 좋았다. 처음으로 갖
  1259.  
  1260. 게 된 또래 친구. 단지 그것뿐인데도, 위지호연은 여태까지 살아 온 평생 중에서 제나비스에서 살았던 짧은 시절에 많은 향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1261.  
  1262. ‘욕심이 나. 하지만 참을 거야.’
  1263.  
  1264. 위지호연은 아래로 내린 손을 쥐었다 피면서 생각했다.
  1265.  
  1266.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 그래서는 미움 받게 될 지도 모르니까. 위지호연은 하나 뿐인, 유일한 친구의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아직 하고 싶
  1267.  
  1268. 은 말은 많다. 나누고 싶은 대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않다. 때도 아직 되지 않았다.
  1269.  
  1270. 1년 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 하자.
  1271.  
  1272. ‘그러고 보니 이 말은 하지 못했어.’
  1273.  
  1274. 문을 나서면서, 위지호연은 뒤늦은 생각을 했다.
  1275.  
  1276. ‘보고 싶었다는 말.’
  1277.  
  1278. 그 말도 가슴에 묻는다.
  1279.  
  1280.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 테니까.
  1281.  
  1282. ======================================
  1283. < 허주-1 >
  1284.  
  1285.  
  1286.  
  1287. “아아아악!”
  1288.  
  1289. 백소고는 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점혈은 행동의 자유를 앗아가 버렸다. 장득수는 그런 백소고를 보면 안절부절
  1290.  
  1291. 했고, 취걸은 우울한 얼굴로 백소고를 응시했다.
  1292.  
  1293. “대체 왜!”
  1294.  
  1295. 백소고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보았다. 취걸은 백소고의 시선을 받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백
  1296.  
  1297. 소고가 기다리지 않고 내뱉었다.
  1298.  
  1299. “왜 나를 데리고 나온 건가요?!”
  1300.  
  1301. 너무 비명을 질러 쉬어버린 목소리는, 평소의 백소고의 목소리와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았다.
  1302.  
  1303. “사제가, 내 사제. 하나 뿐인… 내 사제를. 나는 사제를 구해야 해요. 사제가 나를 대신해서 그 괴물과 맞닥트렸는데! 사제, 내 사제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괴물과 맞섰다
  1304.  
  1305. 고요. 당신들과 함께 사제를 구하러 가겠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1306.  
  1307. 더듬거리며 뱉은 백소고의 말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명확했고 들끓는 감정은 노골적이었다. 원망을 듣는 것이 당연하지. 눈치없는 장득수도 그를 알고서 침묵했다. 그는
  1308.  
  1309. 변명하는 대신에 눈을 감고서 머리를 숙였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10.  
  1311. 하지만 취걸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취걸은 백소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해서는 안 되었다.
  1312.  
  1313.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은 취걸이다. 기습으로 백소고를 점혈하고,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며 놀란 장득수를 설득하고, 혈혈노파에게서 취한 스크롤을 사용해 던전을 탈출한 것도 취
  1314.  
  1315. 걸이다. 스크롤은 성능이 뛰어났다. 그들은 많은 거리를 격하고서, 도시 크론의 개방 본파로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1316.  
  1317. 크론은 던전과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는 도시였으며, 개방의 본파 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초 장거리 텔레포트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마
  1318.  
  1319. 법이다. 대마법사라고 추앙받는 이들조차 도시 단위의 텔레포트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던전에서 얻은 스크롤은 통상적인 상식과는 아득하게 벗어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 어
  1320.  
  1321. 마어마한 거리의 텔레포트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322.  
  1323. “…우선. 진정하십시오.”
  1324.  
  1325. 취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해 봤자 백소고가 진정하지 않을 것임은 취걸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백소고는 그 말에 눈을 부릅 뜨고서 취걸을 노려 보았다.
  1326.  
  1327. “우선. 백소저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은 크론에 있는 개방 본파입니다. 이곳에서 그 던전까지 돌아가려면 백소저가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도 한달은 걸릴 겁니다.”
  1328.  
  1329. “마법을…”
  1330.  
  1331. “우리가 이곳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던전에서의 스크롤 덕분이었습니다. 그 어떤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백소저가 원하는 시간 안에 백소저를 그 던전 앞으로 이동시
  1332.  
  1333. 켜 줄 수는 없을 겁니다.”
  1334.  
  1335. “왜 도망친 거죠…?!”
  1336.  
  1337. 백소고는 이를 악물고서 내뱉었다. 몸이 점혈되지만 않았으면 백소고는 현실이 어떻고 간에 이 던전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크론의 모든 마법사 길드를 돌아다니며 텔레포트
  1338.  
  1339. 를 부탁하던가.
  1340.  
  1341. “말하지 않았습니까.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1342.  
  1343. 취걸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1344.  
  1345. “우리 셋. 거기에 백소저의 사저인 귀창이 힘을 합친다고 하여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1346.  
  1347. “해보지도 않았잖아요…!”
  1348.  
  1349. “해보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나는… 백소저. 나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건 장득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50.  
  1351. “그렇다면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나요.”
  1352.  
  1353.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취걸은 그런 백소고의 시선을 아프게 느꼈다. 백소고를 알고서, 백소고를 연모하고. 그런 시간 동안 취걸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저런 시선을 받아
  1354.  
  1355.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했다. 그럴 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1356.  
  1357.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1358.  
  1359. “…왜죠?”
  1360.  
  1361. “나는 백소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1362.  
  1363. 그 말에 백소고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잠깐 동안 취걸을 보던 백소고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잠시 뒤에, 백소고는 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1364.  
  1365. “비겁하군요.”
  1366.  
  1367. 탄식어린 목소리였다.
  1368.  
  1369. “비겁하고, 비겁하고… 너무… 비겁해요. 이것이 무림맹인가요. 이것이 협의俠義인가요? 위지호연을 감시하면서 위지호연을 따라 던전에 들어간 것은,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1370.  
  1371. . 그녀가 던전에서 강한 힘을 얻고 정말로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우리는 막지 못했어요. 아니, 막지 않았죠.”
  1372.  
  1373.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위지호연과 싸우다 죽는 것이 협의라는 겁니까?”
  1374.  
  1375. “적어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협의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1376.  
  1377. “그건 만용입니다. 백소저. 위지호연에게 도전하여 죽는 것은 협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더 많은 협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1378.  
  1379. “…사제.”
  1380.  
  1381.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382.  
  1383. “내 사제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도… 협의인가요?”
  1384.  
  1385. “…일부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1386.  
  1387. 터무니없는 말이다. 위선.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득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취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1388.  
  1389. “귀창은 영웅이었습니다.”
  1390.  
  1391.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1392.  
  1393. “…그러면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1394.  
  1395. “…점혈을 풀어주세요.”
  1396.  
  1397.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1398.  
  1399.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말이 위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요?”
  1400.  
  1401.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1402.  
  1403. “나는 이상을 위해 무림맹에 들어왔어요.”
  1404.  
  1405. “백소저가 위하는 이상은 뭡니까? 이 세상. 매일매일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놈들이 소환되는 이 세상에서 악을 근절하겠다는 것? 그건 불가
  1406.  
  1407. 능합니다.”
  1408.  
  1409. 백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기로 얼룩진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아프게 느끼면서, 취걸은 계속해서 말했다. 말해야만 했다.
  1410.  
  1411. “누구나…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상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 타협하는 겁니다. 현실을 알고 있으니까.”
  1412.  
  1413. “그만두겠어요.”
  1414.  
  1415. 알고 있다. 이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이라는 것은 이상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벅차다. 그러니 타협하는 것이다.
  1416.  
  1417. “나도 알아요. 내가 바라는 이상이 터무니없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무림맹에 들어온 것은, 이곳이 내 이상과 그나마 맞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
  1418.  
  1419. 요.”
  1420.  
  1421. “…내 의견이 무림맹 전체의 의견은 아닙니다.”
  1422.  
  1423. “점혈을 풀어주세요.”
  1424.  
  1425. 백소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취걸은 입을 다물고 백소고에게 다가와 그녀의 점혈을 풀어 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 선 백소고는 숨을 크게 내뱉으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1426.  
  1427. 그리고는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손을 휘둘러 취걸의 뺨을 갈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취걸의 머리가 홱하고 돌아갔다.
  1428.  
  1429. “어, 어디로 가는 것인가?”
  1430.  
  1431.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1432.  
  1433. 백소고가 내뱉었다.
  1434.  
  1435. “역겨워서.”
  1436.  
  1437. 취걸은 방을 나서는 백소고를 잡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았다. 단순한 따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취걸은 쿡쿡 웃으면서 물었다.
  1438.  
  1439. “차인걸까요?”
  1440.  
  1441. 나사가 반쯤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1442.  
  1443. *
  1444.  
  1445. 위지호연이 보물창고를 빠져나가면서 던전은 완전히 닫혔다. 그와 함께 이성민도 자연스레 던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위지호연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
  1446.  
  1447. 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휘둘릴 수는 없었다. 1년은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1448.  
  1449.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의 여관에 들어오고서, 이성민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1450.  
  1451. 아프다.
  1452.  
  1453. 이성민은 숨을 몰아 쉬면서 팔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쥐 죽은 듯이 누워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성민은 낡은 천장을 올려 보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곱씹었다.
  1454.  
  1455.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이성민은 그림자를 내려 보면서 네블을 불렀다.
  1456.  
  1457. “예.”
  1458.  
  1459. 네블이 솟구쳤다. 그는 피로에 절은 이성민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네블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1460.  
  1461. “묵섬광에 대한 정보를 구해 주십시오.”
  1462.  
  1463.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1464.  
  1465.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1466.  
  1467. “알겠습니다. 정보 길드를 통해 수소문해보도록 하죠. 그 외에… 다른 요구는 없으십니까?”
  1468.  
  1469. 네블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은 창으로 향했다. 새로 받은지 얼마 안 된 것인데 형편없는 꼴로 변해 있었다. 네블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1470.  
  1471. “이거야 원… 셀게루스님이 화를 낼 겁니다. 마이스터가 공 들여 만든 무기가 저렇게 박살날 줄이야. 드래곤이라도 잡으신 겁니까?”
  1472.  
  1473. “그럴리가요.”
  1474.  
  1475. “농담입니다. 상대가 드래곤이었다면 이성민님은 이미 죽었겠죠. 원하신다면 셀게루스님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1476.  
  1477. “…아, 그 전에.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1478.  
  1479.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성민이 꺼낸 것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리면서 얻은, 주먹만한 크기의 광석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네블의 눈이 동그랗게
  1480.  
  1481. 떠졌다.
  1482.  
  1483.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1484.  
  1485. 네블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려운 요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네블에게 광석을 건네 주었다. 주의깊은 눈으로 광석을 살피던 네블이 감탄을 터트렸다.
  1486.  
  1487. “맙소사. 이걸 대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1488.  
  1489. “…뭐길래 그럽니까?”
  1490.  
  1491. “이건 오리하르콘입니다.”
  1492.  
  1493. 네블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오리하르콘이라는 금속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에리아에 존재하는 무수
  1494.  
  1495. 히 많은 광물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희귀한 광물이었다.
  1496.  
  1497. “저는 대장장이가 아니기에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지만, 제가 판단하건데 이 오리하르콘은 불순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은 최상품입니다. 판매하신다면 성채 몇 개는 구입하실 수
  1498.  
  1499. 있을 겁니다.”
  1500.  
  1501. “그렇습니까?”
  1502.  
  1503. 놀라기는 했지만 그 정도. 이성민은 마음을 진정 시켰다. 전생에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광물이었지만, 지금은 이성민의 소유가 되었다. 놀랄 것도
  1504.  
  1505. 없다.
  1506.  
  1507. “마침 잘 되었군요. 쓰던 창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셀게루스님에게 오리하르콘을 드려 무기 제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1508.  
  1509. “바로 연결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1510.  
  1511. “예.”
  1512.  
  1513. 이성민의 대답에 네블이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민의 앞이 쩍하고 벌어지더니 셀게루스의 공방과 연결되었다.
  1514.  
  1515. “오리하르콘이라고?!”
  1516.  
  1517. 얼굴을 보자 마자 셀게루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셀게루스의 얼굴에는 평소의 권태로움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들여 보았다.
  1518.  
  1519. “정말이야? 오리하르콘, 그것도 제련되지 않은 원석을 가지고 있다고?”
  1520.  
  1521. “아… 예.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제가 가진 창이…”
  1522.  
  1523. “그건 상관없어!”
  1524.  
  1525. 셀게루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민은 셀게루스가 그렇게 큰 목소리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버렸다.
  1526.  
  1527. “줘봐. 일단 내가 직접 봐야겠어.”
  1528.  
  1529. “아… 예.”
  1530.  
  1531. 이성민은 곁에 나타난 네블에게 오리하르콘 광석을 넘겨주었다. 네블을 통해 오리하르콘을 넘겨 받은 셀게루스는 크게 뜬 눈으로 오리하르콘을 훑어보면서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1532.  
  1533. “그러니까… 그걸로 창의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크기가 충분하지 않기는 하지만 가능할지…”
  1534.  
  1535. “모르는 소리 마.”
  1536.  
  1537. 이성민의 말에 셀게루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양 손으로 오리하크론 광석을 잡더니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주먹만한 오리하르콘이 크게 부풀었다.
  1538.  
  1539. “이 정도로 불순물이 없는 오리하르콘이라면 창 한 자루는 거뜬해. 오히려 만들고도 남을걸.”
  1540.  
  1541. “그렇다면 남은 오리하르콘은 제작 보수로 하죠.”
  1542.  
  1543. 이성민이 별 생각없이 그렇게 말하자, 셀게루스가 눈을 크게 뜨고 이성민을 보았다.
  1544.  
  1545. “너 미쳤어?”
  1546.  
  1547. “…예?”
  1548.  
  1549. “남은 것을 보수로 하자고? 뭔 말도 안 되는…! 너는 진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모든 대장장이가 보수 없이 제작을 맡으려 들 거야. 오리하르콘은 그만큼
  1550.  
  1551. 희귀한 금속이라고.”
  1552.  
  1553. “그렇다고 공짜로 부탁하기에는…”
  1554.  
  1555. “아니, 됐어. 보수는 필요 없어. 나도 제련되지 않은 오리하르콘을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차라리 창 말고 보조 무기를 만드는 것은 어때?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1556.  
  1557. 단검 몇 자루는 더 만들 수 있을 거야.”
  1558.  
  1559. “그렇다면… 그것으로 부탁…”
  1560.  
  1561. [아니. 단검 말고 차라리 이 갑옷을 보수해라.]
  1562.  
  1563. 이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허주가 끼어들었다.
  1564.  
  1565. [이 갑옷도 매개로 쓸 정도는 되지만, 내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아. 오리하르콘은 마력 반응이 뛰어나니까 내 힘도 이전보다 잘 받아낼 수 있겠지.]
  1566.  
  1567. “…단검 말고. 이 갑옷을 오리하르콘으로 보수할 수 있을까요?”
  1568.  
  1569. “전부다 하는 것은 무리인데…?”
  1570.  
  1571. [상관없다고 말해라.]
  1572.  
  1573. “상관없습니다.”
  1574.  
  1575. 오리하르콘 단검을 가지고 있어 봐야 쓸 곳도 없다. 쓰지도 않는 단검을 가지고 있느니, 허주의 말대로 오리하르콘을 통해 마갑을 보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576.  
  1577. ‘그런데. 당신이 들어 있는데 마갑을 제련해도 되는 겁니까?’
  1578.  
  1579. [잠깐 동안 거처를 옮기면 된다. 저 반쪽짜리 창도 미스릴을 쓴 것이니, 내 혼을 잠깐은 담을 수 있겠지.]
  1580.  
  1581. 이성민은 셀게루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창을 잡았다.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뻗어져 창 속으로 스며들었다.
  1582.  
  1583. [됐다.]
  1584.  
  1585. 창이 웅웅거린다. 이성민은 마갑을 벗어 네블에게 건네 주었다.
  1586.  
  1587. “…묘한 존재를 사역하고 계시군요.”
  1588.  
  1589. [사역이라니, 새끼가 뒤질려고.]
  1590.  
  1591. 허주가 으르렁거렸지만 네블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성민은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서 네블에게 부탁했다.
  1592.  
  1593. “허주에 대한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1594.  
  1595. “허주…?”
  1596.  
  1597. “네. 몇 백 년 전에 이름을 날린 요괴라고 하더군요.”
  1598.  
  1599. “알겠습니다. 묵섬광에 대한 정보와 함께 전해드리지요.”
  1600.  
  1601. 그것으로 에레브리사와의 거래는 끝났다. 이성민은 창을 내려 놓고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1602.  
  1603. “…피곤해.”
  1604.  
  1605.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1606.  
  1607.  
  1608.  
  1609. ======================================
  1610. < 허주-2 >
  1611.  
  1612.  
  1613.  
  1614. 나른한 감각 속에서 이성민은 눈을 떴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어렵잖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1615.  
  1616. ‘꿈?’
  1617.  
  1618. 자각몽을 꾸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므쉬의 산에서 꿈의 시련을 받았을 때, 악몽 속에서 이성민은 숱하게 자각몽을 꾸었었다. 그 시절에 꾸었던 꿈들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몸서리
  1619.  
  1620. 쳐질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다. 흔히들 자각몽이라고 한다면 꿈속에서 바라던 대로 꿈이 바뀌는, 그런 것을 기대하겠지만 이성민이 겪었던 자각몽은 그런 편리한 것들이 아니었다.
  1621.  
  1622.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 보았다.
  1623.  
  1624. “일어났나?”
  1625.  
  1626. 목소리.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악몽과는 다르다. 보통의 꿈과도 다르다. 감각적인 면에서는 데니르의 권능을 통해 들어갔던 정신세계와 닮아 있었다
  1627.  
  1628. .
  1629.  
  1630. 목소리의 주인은 허주였다.
  1631.  
  1632. 그는 흔들리는 요력을 몸뚱이로 삼고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몸 전체가 그랬다.
  1633.  
  1634.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1635.  
  1636.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냐?”
  1637.  
  1638.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왜 자신의 꿈 속에 허주가 있는 것인가 궁금하였지만, 우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 허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1639.  
  1640. . 이윽고 그것은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허주는 이성민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거한이 되었다. 손은 머리 하나는 우습게 손으로 감싸 으깰 수 있을
  1641.  
  1642. 만큼 컸다.
  1643.  
  1644.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처럼 생겼군.”
  1645.  
  1646.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평했다. 대요괴라고 하기에 뿔과 이빨, 손톱을 가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본 허주의 본 모습은 키와 덩치가 크다는 것을
  1647.  
  1648. 제외하고서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1649.  
  1650. “요괴는 인간과 닮아 있으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요괴는 몬스터가 아닌 아인이다.”
  1651.  
  1652. “오크같은?”
  1653.  
  1654. “그런 저열한 놈들과 비교하지는 마라.”
  1655.  
  1656. 허주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팔을 붕붕 돌렸다.
  1657.  
  1658. “진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몸뚱이를 갖게 되니 기분은 좋군.”
  1659.  
  1660.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냐?”
  1661.  
  1662. “시험 삼아서 해 보았다. 네놈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네놈과 영적으로 연결되었거든. 그래서 할 수 있나 해 보았는데… 네놈이 잠들어 있는 중에는 꿈에 개입할 수 있더군. 육체
  1663.  
  1664. 를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1665.  
  1666. “해보기는 한 모양이군.”
  1667.  
  1668.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패해버렸어. 네놈에게 어린 가호는 나의 힘으로도 뚫을 수가 없더구나. 잠자는 숲에서는 네놈의 정신력을 뚫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신력이
  1669.  
  1670.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버렸어.
  1671.  
  1672. 어지간한 존재라면 네놈의 정신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1673.  
  1674. 짚이는 것이 있었다. 프레스칸의 정신 마법은 이성민의 가호를 뚫지 못했다.
  1675.  
  1676. “그래서. 볼 일은 끝났나? 그렇다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자고 싶거든.”
  1677.  
  1678.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1679.  
  1680. 이리 와라. 허주가 이성민에게 손짓했다.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허주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1681.  
  1682. “뭐냐?”
  1683.  
  1684. “말하지 않았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고.”
  1685.  
  1686. “그러니까 뭔데.”
  1687.  
  1688. “네놈. 뭐하는 놈이냐?”
  1689.  
  1690. 허주가 곧바로 질문했다.
  1691.  
  1692. “네놈에게 요력을 빌려 주었을 때. 그때의 나는 네놈과 영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면서, 네놈의 감정의 일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 반푼이 괴물과 싸웠을 때 네놈이 느끼던
  1693.  
  1694. 감정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인간같지 않던 계집과 대했을 때의 네놈의 감정도.”
  1695.  
  1696. “마음대로 읽어대는군.”
  1697.  
  1698. “느껴졌을 뿐이다.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야.”
  1699.  
  1700. “정확히 뭘 듣고 싶다는 거냐?”
  1701.  
  1702. “네놈이 여태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네놈과 그 계집의 관계. 네놈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1703.  
  1704. “듣고 싶은 것이 참 많으시군. 내가 왜 그것을 말해줘야 하는 거냐?”
  1705.  
  1706. “네놈과 앞으로 제법 오랫동안 지내야 할 텐데 서로에 대해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나? 그리고 네놈은 나에게 빚이 있어.”
  1707.  
  1708. “빚?”
  1709.  
  1710.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 반푼이와 싸우던 중에 죽었을 것이다.”
  1711.  
  1712. 안다. 그때 허주가 요력을 보태주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 이성민이 이 몸뚱이로 펼칠 수 있는 구천무극창은 사초인 구룡살생까지가
  1713.  
  1714. 한계였고, 무영탈혼은 삼식인 이 보겁살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의 무공은 알고 있고 정신세계에서 펼쳐 본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의 몸으로는 온전히 펼칠 수가 없었다.
  1715.  
  1716. 사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성민의 몸은 환골탈태를 거친 완전한 초절정 무인의 것이다. 구천무극창과 무영탈혼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고 해도 초절정의 몸뚱이로
  1717.  
  1718. 펼치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
  1719.  
  1720. 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성민이 가진 내공은 여타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1721.  
  1722. 펼칠 수 없는 이유는, 무공의 수준이 높다 보다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심득이 겪은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육체가 따르지 못한다. 요력의
  1723.  
  1724. 보조를 받았을 때에는 구천무극창의 육초인 공도까지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지금의 몸뚱이로 공도를 펼치려 들었다가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1725.  
  1726. “…내가 마음에 들어서 도와줬다는 것 아니었나?”
  1727.  
  1728.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나?”
  1729.  
  1730. “말해서 뭐하자고.”
  1731.  
  1732. “부끄러운가?”
  1733.  
  1734. “그것도 조금 있기는 해.”
  1735.  
  1736. “새끼. 비싸게도 구는 군. 네놈, 알고는 있냐? 네놈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어.”
  1737.  
  1738. “그건 또 무슨 말이냐?”
  1739.  
  1740. “자기 궁금한 것만 챙겨 들으려는 이기적인 새끼야. 알고 싶거든 이 어르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거라.”
  1741.  
  1742.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허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주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키지 않을
  1743.  
  1744.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허주가 말한, ‘문제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1745.  
  1746. 어차피 허주는 이성민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길 것은 없었다. 이성민은 허주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나비스에서 위지호연과 만나고, 위지호
  1747.  
  1748. 연과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되어 무슨 약속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와 만나고, 수행 끝에 므쉬의 산에서 내려온 점. 베헨게르에서 있었던 일들. 프레스칸과 검
  1749.  
  1750. 은 심장, 아이네. 소림에서의 수행과 화산… 데니르까지.
  1751.  
  1752.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허주는 바닥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허주는, 이성민의 말이 끝나자 바로 입을 열었다.
  1753.  
  1754. “마법은 왜 안 쓰는 거냐?”
  1755.  
  1756. “…어?”
  1757.  
  1758. 대뜸 말한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하고 말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이성민은 상태창을 띄웠다.
  1759.  
  1760. “아.”
  1761.  
  1762. 잊고 있었다. 므쉬의 산에서, 이성민은 스칼렛에게 몇 가지의 마법을 배웠었다.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스트렝스, 헤이스트. 사실상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버틸 수
  1763.  
  1764. 있었던 것은 저 네 가지 마법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1765.  
  1766. “네놈에게서 마법의 느낌이 나. 정확히 무슨 마법을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767.  
  1768. “…보조 마법을 몇 가지.”
  1769.  
  1770. “버프 종류냐?”
  1771.  
  1772. “그것도 있는데…”
  1773.  
  1774. “이 병신 새끼. 그런 것들을 배워놓고서 왜 안 쓰는 거야? 무공이랑 마법을 같이 병행하면 뒈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1775.  
  1776. 허주가 신랄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 언제였더라? 정신세계에서의 수행에서는 무공만 죽어라 사용했고, 그
  1777.  
  1778. 기억을 그대로 갖게 되면서 마법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1779.  
  1780. “공격 마법과 무공을 병행한다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이 될 지도 몰라도, 보조 마법이라면 무공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 해 보기는 했냐?”
  1781.  
  1782. “옛날에는…”
  1783.  
  1784. “병신 새끼.”
  1785.  
  1786. 허주가 이죽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1787.  
  1788.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네놈이 꽤 마음에 들었다.”
  1789.  
  1790. “…왜?”
  1791.  
  1792. “우직한 멍청이는 좋아하거든.”
  1793.  
  1794. 허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795.  
  1796. “까놓고 말하지. 여기서 1년이 더 흐른다고 해서 네놈이 그, 위지호연이니 소천마니 하는 계집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1797.  
  1798. “나도 알아.”
  1799.  
  1800. “신의 시련은 까다롭지. 정신 세계에서 2100년을 수행했다고? 큭큭! 어쩐지, 네놈이 가진 재능 이상의 무공을 쓰더니… 부족한 재능을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보충했구나. 2100
  1801.  
  1802. 년 동안 그 지랄을 해서 고작해야 그 정도라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만.”
  1803.  
  1804. “무시당할 정도로 약한가?”
  1805.  
  1806. “인간 이상의 힘임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이들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1807.  
  1808. 허주가 단언하여 내뱉었다.
  1809.  
  1810. “그 계집은 인간을 초월해가고 있다. 네놈이 정녕 그 계집과 동등하게 되고 싶거든 너 역시 그렇게 되어야겠지. 정신세계예서의 무위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하여도 부족해.”
  1811.  
  1812. “…그건 어쩔 방법이 없지.”
  1813.  
  1814. “인간이 아니게 될 방법은 많다.”
  1815.  
  1816. 허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시선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1817.  
  1818. “가장 쉬운 방법은 흡혈귀가 되는 것이다. 혹은 라이칸슬로프가 되던가. 놈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가장 흔한 놈들이지. 방법도 어렵지는 않아.”
  1819.  
  1820. “그러고 싶지는 않아.”
  1821.  
  1822. 흡혈귀, 라는 말에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1823.  
  1824.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고집이냐?”
  1825.  
  1826.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럴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할 뿐이지.”
  1827.  
  1828. “크크! 나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흡혈귀나 라이칸슬로프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거든. 네가 흡혈귀가 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든 모체에게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1829.  
  1830. 귀찮은 제약들이 생겨나지.”
  1831.  
  1832.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1833.  
  1834. “요괴가 되는 방법도 있다.”
  1835.  
  1836. 허주의 눈이 빛났다.
  1837.  
  1838. “요괴라는 것은 몬스터와 아인 둘 모두에 속하는 존재다. 인간이 요괴로 변한 것도 있고, 그냥 태어난 놈들도 있고, 요괴와 요괴가 떡을 쳐서 태어난 놈들도 있지.”
  1839.  
  1840. “…나보고 요괴가 되라는 거냐?”
  1841.  
  1842.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지. 요력은 너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애초에 네놈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괴물의 것이야. 그것을 중심으로 두고 내 요력으로 인해 변이한다면,
  1843.  
  1844. 아주 재밌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845.  
  1846. 허주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여태까지 인간으로 살았는데, 대뜸 인간이 아닌 요괴가 되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1847.  
  1848. 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1849.  
  1850. “뭐.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네놈이 마음에 드니 알려주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나쁘지 않은 기회임을 알거라. 이 어르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니까.”
  1851.  
  1852. 허주는 그 말을 남기고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민은 꿈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1853.  
  1854. “멋대로 남의 꿈에 들어오고선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군.”
  1855.  
  1856.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이성민의 의식은 멀어졌다.
  1857.  
  1858.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성민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밀어냈다. 근처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에 시선을 내리니, 침대 아래에서 루비아가 웅크리고서 잠을
  1859.  
  1860.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1861.  
  1862. “잊고 있었군.”
  1863.  
  1864.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루비아의 몸을 들어다가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귀가 어두운 것인지 루비아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는 않았
  1865.  
  1866. 다. 근처에 세워 놓은, 허주가 깃든 창이 웅웅거렸다.
  1867.  
  1868. [오늘은 뭘 할 거냐?]
  1869.  
  1870.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1871.  
  1872. 포션을 연달아 먹어두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문제가 많았다. 이성민은 허주를 무시하고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아공간 포켓에서 쪼개 놓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꺼냈다.
  1873.  
  1874. 먹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허주가 말했었다. 이성민은 우선 대환단의 반쪽을 입에 넣었다. 내공은 운기조식 없이 그대로 단전에 쌓였다. 단전은 며칠 전과 비교해서
  1875.  
  1876. 굉장히 커져 있었다. 소림 최고의 비전 영약인 대환단을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성민은 단전의 크기를 확인하고서 마석도 흡수했다.
  1877.  
  1878. ‘왜 던전에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겠군.’
  1879.  
  1880. 마석으로 인해 증진된 내력을 확인하고서 이성민은 혀를 내둘렀다. 이성민이야 마석의 이점에 크게 구애되지 않지만, 정제 과정 없이 그 즉시 힘의 증진을 얻는 다는 것은 대단한
  1881.  
  1882. 일이었다. 마석이 증진시킨 내공의양은 대환단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효율 좋은 마석뿐만이 아니라, 마이스터 대장장이가 눈을 뒤집을 정도로 순도 높은
  1883.  
  1884. 오리하르콘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던전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당연했다.
  1885.  
  1886. ‘그러고 보니 항룡십팔장도 있었지.’
  1887.  
  1888. 이성민은 항룡십팔장의 비급을 아공간 포켓에서 꺼냈다. 이것을 어떻게 처분할까. 에레브리사를 통해 판매할까 싶기도 하였지만, 백보신권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가격을
  1889.  
  1890.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891.  
  1892. ‘개방 쪽에 가져다줄까.’
  1893.  
  1894. 물론 당장은 아니다. 우선 에레브리사를 통해 의뢰한 백소고와 허주에 관련 된 정보를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프레스칸을 추격해야만 했고, ‘북쪽으로도 가야해.’
  1895.  
  1896. 불영대사에게 깃든 신령이 말했던 북쪽에도 볼 일이 있다. 겨울까지 가야 하니 아직은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개방에 들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1897.  
  1898.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운용하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이성민은 단전의 바닥에 있는 기묘한 힘의 존재를 의식했다. 내공과 섞이지 않고 혼자 고여 있는 그 힘은 요력
  1899.  
  1900. 이었다.
  1901.  
  1902. ‘이건 또 뭐야?’
  1903.  
  1904. 이성민은 운기조식을 멈추고 허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허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1905.  
  1906. [내 잔재로군. 네놈과 내가 영적으로 연결 된 흔적이다.]
  1907.  
  1908. ‘거슬리는데. 치울 수는 없나?’
  1909.  
  1910. [내버려 둬라.]
  1911.  
  1912. ‘이 요력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1913.  
  1914. [몸뚱이에 괴물의 심장을 박고 있으면서 별 시답잖은 것을 걱정하는 군. 아무 문제 없으니까 그냥 둬.]
  1915.  
  1916. 허주의 대답에 이성민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자하신공에 몰입하면서 이성민은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호흡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고
  1917.  
  1918. 자하신공의 자색 기운이 주변을 떠돌았다.
  1919.  
  1920.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1921.  
  1922. ======================================
  1923. < 허주-3 >
  1924.  
  1925.  
  1926.  
  1927. 루비아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루비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1928.  
  1929. “잘 잤습니까?”
  1930.  
  1931. “…바닥에서 잤던 것 같은데.”
  1932.  
  1933. “거슬려서 옮겼습니다.”
  1934.  
  1935. “말 참 예쁘게 하시네요. 나는 걱정 되서 당신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곁에서 보고 있었는데.”
  1936.  
  1937. “걱정할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1938.  
  1939. “죽기 직전까지 가고, 아프다고 뒹굴면서 비명까지 질렀던 사람이.”
  1940.  
  1941. “비명은 안 질렀습니다.”
  1942.  
  1943. “소리 없는 비명은 질렀었죠. 어쨌든, 걱정 되서 보고 있었다고요.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자는 것 같아서 마법으로 몸도 씻겨 드렸고.”
  1944.  
  1945. 루비아가 쏘아 붙였다. 어쩐지. 피곤하고 힘들어서 씻지도 않고 바로 곯아 떨어졌는데 몸이 깨끗하더라니.
  1946.  
  1947. “서비스가 좋으시군요.”
  1948.  
  1949. “냄새가 심했거든요.”
  1950.  
  1951. 루비아가 코를 부여잡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하고서 벽에 걸쳐 세워 놓은 창을 들었다.
  1952.  
  1953. “어디를 가는 거예요?”
  1954.  
  1955. “몸이 꽤 나아져서. 바깥에서 몸이나 좀 풀어야겠습니다.”
  1956.  
  1957. “그냥 푹 쉬는게 어때요?”
  1958.  
  1959. “걱정해 주는 겁니까?”
  1960.  
  1961. “그러면 안 되나요? 나는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그랬다가는 저희 주인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
  1962.  
  1963.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인데.”
  1964.  
  1965. 이성민은 엔비루스를 떠올리면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루비아는 조금 기가 죽은 것인지 고양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1966.  
  1967. “…반드시 찾아오실 거예요.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저를 남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1968.  
  1969.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1970.  
  1971. “그럴 리가… 없잖아요.”
  1972.  
  1973. 대답하는 루비아의 목소리에 확신은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해도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겪은, 죽음
  1974.  
  1975. 이 코앞까지 다가 온 사건들은 루비아가 가진 맹목적인 신뢰를 조금 흩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엔비루스에게서 만들어져 엔비루스를 위해 살아왔다.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1976.  
  1977. 만, 그녀가 엔비루스와 함께 겪었던 위험들은 그녀를 사역하는 강력한 주인을 위협하기에는 나약한 것들이었다.
  1978.  
  1979. 하지만 지금 엔비루스는 곁에 없다. 죽을 뻔 했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1980.  
  1981. “장난으로 한 말입니다.”
  1982.  
  1983. 이성민은 우울하게 젖어가는 루비아의 얼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1984.  
  1985.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나한테 인도하지도 않았겠지요.”
  1986.  
  1987. “…하지만 나는 죽을 뻔 했어요.”
  1988.  
  1989. “‘우리’가 죽을 뻔 했죠. 결국 죽지 않았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안 죽을 겁니다.”
  1990.  
  1991. 루비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녀의 눈을 보고서 어깨를 으쓱거리고선 밖으로 나갔다.
  1992.  
  1993. 이성민이 급하게 숙박한 여관은 이 마을에서 유일한 여관으로, 굉장히 낡은 건물이었다. 마을의 규모는 제법 크기는 했지만,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은 언제나
  1994.  
  1995. 위험이 인접해 있다. 도시 성주의 관리를 떠난 곳이기 때문에 치안도 좋지 않다.
  1996.  
  1997. 1층은 지저분한 술집이자 식당이었다. 부랑자와 다를 것 없는 몰골을 한 자들이 모여들어 싸구려 술과 음식을 대낮부터 퍼먹고 있었고, 용병처럼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이성민은
  1998.  
  1999. 그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아침이자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따라 내려 온 루비아가 이성민의 곁에 붙어 앉았다.
  2000.  
  2001. “…냄새.”
  2002.  
  2003. 루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나온 음식의 맛도 그저 그랬다. 깨작거리며 하는 식사가 끝나가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발을 질질 끌면서
  2004.  
  2005. 이성민 쪽으로 다가왔다.
  2006.  
  2007.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구료.”
  2008.  
  2009. 입을 열때마다 악취가 풍긴다. 루비아가 질색하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이성민은 시선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얼굴에 시커먼 반점을 박고 있는 늙은 거지가 이성민을 보고 있었
  2010.  
  2011. 다.
  2012.  
  2013. “적선이라도…?”
  2014.  
  2015. “개방입니까?”
  2016.  
  2017. 이성민이 대뜸 물었다. 애초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지는 악취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웃었다.
  2018.  
  2019. “그러는 그대는 귀창이쇼?”
  2020.  
  2021.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낮았다. 여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이성민은 거지를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2022.  
  2023. “개방과 악연을 맺은 적은 없는데.”
  2024.  
  2025. “끌끌! 어린 대협은 뭔가를 오해하고 계시구료. 그냥, 이 작은 마을에 범상치 않은 고수가 있기에 호기심에 물어보았을 뿐인데.”
  2026.  
  2027. “맞습니다.”
  2028.  
  2029. 조금 늦게 대답했다.
  2030.  
  2031. “내가 귀창입니다. 뭐 문제가 됩니까?”
  2032.  
  2033. “이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던전이 열렸고, 소천마 위지호연이 그 던전을 닫았다고 하더구려.”
  2034.  
  2035. “소문이 빠르군.”
  2036.  
  2037. “끌끌! 마법이 참 편리하지 않소?”
  2038.  
  2039. “뭘 묻고 싶은 겁니까?”
  2040.  
  2041. “우리 개방의 어린 영웅이 그 던전에서 왼 팔이 잘려 간신히 살아 나왔소. 초절정 고수인 역발산 장득수와 묵섬광 백소고도 함께 그 던전에서 빠져나왔지. 문제는 그 영웅들이
  2042.  
  2043.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친 것이 고작이라, 던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마지막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오.”
  2044.  
  2045. 그 말에 이성민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안도했다. 백소고가 무사히 던전에 나왔다는 것이 이성민을 안도하게 한 것이다.
  2046.  
  2047. “무엇이 궁금한 겁니까.”
  2048.  
  2049. “귀창. 그대는 어떻게 살아나온 것이오?”
  2050.  
  2051. 거지가 묻는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 거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 보았다. 잠시 뒤에 이성민의 입이 열렸다.
  2052.  
  2053. “살아나올 만한 짓을 하였으니까 살아나왔겠지.”
  2054.  
  2055. “흐흐! 이 늙은 거지가 그대를 불쾌하게 한 것인가?”
  2056.  
  2057. “아니. 그건 아니오. 그냥 제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2058.  
  2059. “어떤 이유로?”
  2060.  
  2061.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물으십시오.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2062.  
  2063. 그 말에 거지가 입을 다물었다. 이성민은 작은 짜증을 느꼈다. 애초에 그는 정파 무림맹이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위지
  2064.  
  2065. 호연이 대단한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들은 멋대로 위지호연을 악으로 규정짓고서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들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장득수가 떠들어대
  2066.  
  2067. 던 말을 통해 파악했다.
  2068.  
  2069.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소이까?”
  2070.  
  2071. “못 봤습니다.”
  2072.  
  2073. 그러니 거짓말을 했다.
  2074.  
  2075. “던전은 끔찍했고, 나는 살아남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위지호연 본인과는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중에 던전이 닫혔고, 그곳에서 강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2076.  
  2077. 그것이 전부입니다.”
  2078.  
  2079. 이성민의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인지 거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침묵했다. 잠시 뒤에 거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2080.  
  2081. “협조 해 주셔서 고맙소.”
  2082.  
  2083. “아, 그리고.”
  2084.  
  2085. 이성민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 주었다.
  2086.  
  2087. “적선.”
  2088.  
  2089. “…끌끌! 복 많이 받으십쇼.”
  2090.  
  2091. 거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몸을 돌렸다. 이성민은 떠나가는 거지의 등을 보면서 한숨을 삼켰다.
  2092.  
  2093. ‘이런 식으로 또 얽히게 되는 군.’
  2094.  
  2095. 인연이라는 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결국 얽히게 되는 법이다. 식당 전체를 본다. 구석에 처박힌 부랑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개방이겠지.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
  2096.  
  2097. 지만 개방이 까다로운 것은 고수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숫자’ 때문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거지가 있다. 다른 문파들은 색목인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지만, 개방은
  2098.  
  2099.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나 받아들인다.
  2100.  
  2101. 이성민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정도 이 마을에 묵으면서 몸을 점검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시자의 존재가 거슬린다. 이성민은 숙박료를 지불하고서
  2102.  
  2103. 바로 여관을 나왔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없었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2104.  
  2105.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2106.  
  2107. “우선 북쪽으로 방향을 잡을 겁니다.”
  2108.  
  2109. 그곳까지 가면서 얻은 정보들에 대해 정리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는 자그마한 빛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성민이 두른 망토 안으로 몸을 숨
  2110.  
  2111. 겼다.
  2112.  
  2113. 서두르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추격자의 기미는 없었다. 하지만 감각에 무언가가 거슬렸다. 등에 걸친 허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2114.  
  2115. [마법이군.]
  2116.  
  2117. ‘개방이 마법도 쓰나?’
  2118.  
  2119. [나야 모르지. 하지만 감시가 붙은 것은 확실해. 어쩔 테냐?]
  2120.  
  2121. ‘내버려 둔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더 귀찮게 굴 거야.’
  2122.  
  2123. 개방 쪽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던전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이 그들이 신경쓸 만한 이유가 되나? 아니면 위지호연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2124.  
  2125.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개방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개방이 얼마나 집요한 존재들인지는 이성민도 소문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2126.  
  2127. ‘설마 취걸. 그 놈이 혈혈노파에게 던져두고 갔던 것 때문에 속 좁게 구는 것은 아니겠지.’
  2128.  
  2129. 따지고 보면 제대로 버림 받은 것은 이쪽인데 말이야.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걸었다.
  2130.  
  2131. ‘새’는 그런 이성민의 뒤를 쫒고 있었다. 이성민이 아직 경공을 펼치지 않아 추격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새의 눈은 지상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이성민의 움직임을
  2132.  
  2133. 살폈고, 새가 본 것은 그 새를 사역하고 있는 마법사에게 전해진다.
  2134.  
  2135. 그리고 마법사가 전해 본 풍경은 마법을 통해 계속해서 전달 되어, 먼 곳에 떨어진 크론까지 전해진다. 타임 딜레이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득하게 떨어진 거리를 무시하고서
  2136.  
  2137. 볼 수 있다는 것은 무공에게는 불가능한, 마법만이 가능한 경이였다.
  2138.  
  2139. “살아 있었군.”
  2140.  
  2141. 취걸은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마법사 길드의 중추와 협력을 맺은 개방은 에리아 전역에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렇게 실시간으로, 지속적으로
  2142.  
  2143. 감시 받는 대상은 많지 않다. 취걸은 개방 소방주라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이성민의 위치를 확인하고 감시 대상으로 골랐다.
  2144.  
  2145.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146.  
  2147.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는 소천마 위지호연의 도플갱어. 도플갱어가 본인보다는 크게 약하다고는 하나, 소천마 본인이 가진 강함을 생각한다면 도플갱어 역시 압도적인 힘을
  2148.  
  2149. 가지고 있을 것이다.
  2150.  
  2151. 취걸은.
  2152.  
  2153.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왼 팔이 잘린 큰 부상을 입었고, 장득수 역시 혈혈노파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그것은 백소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귀창의
  2154.  
  2155. 실력은 추측이 되지 않았고, 무리한 싸움을 벌였다가는 전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도주를 택했다. 취걸이 판단하기에는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2156.  
  2157. 그곳에서 귀창이 죽었더라면 취걸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소고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노라고.
  2158.  
  2159. 비록 당신은 그를 납득하지 못하여 나의 뺨을 갈겼지만, 결국에는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이라고.
  2160.  
  2161.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2162.  
  2163. 취걸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백소고는 떠났다. 그녀는 무림맹 쪽에 일방적으로 맹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였고, 무림맹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서 이 도시 크
  2164.  
  2165. 론을 떠났다. 크론을 떠난 백소고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감시대상으로는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2166.  
  2167. ‘마음에 안 들어.’
  2168.  
  2169. 취걸은 수정구를 내려 보았다. 반토막 난 창을 등에 걸친 이성민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왜 자신의 사제를 버린 것이냐고, 그렇게 부르짖던 백소고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그
  2170.  
  2171. 래서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의 모습이 마치.
  2172.  
  2173. “질투라는 것은 추하군.”
  2174.  
  2175. 취걸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2176.  
  2177. *
  2178.  
  2179. 마을과 거리를 둔 시점에서 이성민은 경공을 펼쳤다. 단순히 경공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경공의 속도가 오른 시점에서 헤이스트를 펼친다.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마력을 사용해
  2180.  
  2181. 야 하지만, 스킬로 익힌 마법은 편리하기 짝이 없다. 내공이 지속적으로 소모되면서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진다.
  2182.  
  2183. ‘웃.’
  2184.  
  2185. 순식간에 더해진 속도에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곧바로 적응했다. 이성민은 보이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뛰어넘으면서 헤이스트와 무영탈혼의 결합이 만들어낸 속도에 몸을 맡겼다.
  2186.  
  2187. ‘장기적으로 펼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아.’
  2188.  
  2189. 이성민이 보유한 내공이 많기는 하지만, 무영탈혼과 헤이스트의 내공 소모가 워낙에 컸다. 내공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이성민은 한참을 달리다가 멈추었다.
  2190.  
  2191. ‘실전에서 써먹으면 좋겠군.’
  2192.  
  2193.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짐으로서 의외성을 줄 수 있다. 창법에 녹여내기에는 시행착오가 제법 필요해보였고, 헤이스트 뿐만이 아니라 스트렝스까지 가미한다면 익숙해지는 것에 꽤
  2194.  
  2195.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2196.  
  2197.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2198.  
  2199.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감시의 기척은 없다. 아마 감시 마법이 이성민이 달리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뒤처진 모양이었다.
  2200.  
  2201. “나오셔도 됩니다.”
  2202.  
  2203. 이성민이 말이 끝나자 그림자 속에서 네블이 몸을 꺼냈다. 그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2204.  
  2205. “요구하신 정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2206.  
  2207. 네블이 수정구를 꺼내며 말했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수정구를 받았다.
  2208.  
  2209. ======================================
  2210. < 허주-4 >
  2211.  
  2212.  
  2213.  
  2214. 정보를 전해 듣고서, 이성민은 회색으로 변한 수정구를 바스라트렸다. 그 가루를 바람에 흩날리고서 이성민은 생각에 잠겼다.
  2215.  
  2216. 백소고는 살아 있다. 개방의 늙은 거지에게 전해 들어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에레브리사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들었다.
  2217.  
  2218. ‘사저가 무림맹을 탈퇴했다고?’
  2219.  
  2220. 탈퇴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무림맹 탈퇴를 선언한 백소고는 도시 크론을 떠나 남하하고 있다고 했다. 에리아는 워낙에 땅덩이가 넓어 방향만 두고서는 어디로 가는 것
  2221.  
  2222. 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크론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향한다면…
  2223.  
  2224. ‘나를 걱정하는 거야.’
  2225.  
  2226. 크론에서 던전까지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 던전에서의 스크롤을 사용해 순식간에 크론으로 텔레포트 하기는 했던 모양이지만, 보통의 방법으로 크론에서 던전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2227.  
  2228. 몇 달이 걸린다. 백소고가 밥먹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며 내공 회복 포션을 물처럼 마셔 경공을 펼친다고 가정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다.
  2229.  
  2230. “혹시 묵섬광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2231.  
  2232. “어려운 일은 아니죠.”
  2233.  
  2234. 네블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디에 있건 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네블을 보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에게는 ‘거리’라는 개념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 했다.
  2235.  
  2236. “저를 묵섬광이 있는 곳까지 이동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2237.  
  2238. “그건 불가능합니다.”
  2239.  
  2240. 혹시나 해서 했던 질문이었지만, 기대 대로 네블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2241.  
  2242. “저희는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민 회원님은 아닙니다. 저희와 같은 방법으로 공간이동을 하셨다가는 공간 간의 격류를 견디지 못해 육체가 박살날 겁니다.”
  2243.  
  2244. 네블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대해 충고를 했다.
  2245.  
  2246. “장거리 텔레포트 스트롤을 구해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리 편리한 도구는 아닙니다. 보통은 지정해 둔 좌표로만 이동하는 것이 고작이니까요. 게다가 그런 스크롤은 굉장히
  2247.  
  2248. 비쌉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고가인 이유는 이동하는 ‘시간’을 구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죠.”
  2249.  
  2250. “…그렇다면 편지 배달 정도는?”
  2251.  
  2252. “그거야 무리는 없죠. 제가 직접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2253.  
  2254. 네블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중개 길드라는 에레브리사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중개인들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장 중개인이라는 자들은 공
  2255.  
  2256. 간이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2257.  
  2258.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이성민으로서도 네블의 강함은 추측조차 되지 않는다.
  2259.  
  2260.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2261.  
  2262. “중개 길드입니다.”
  2263.  
  2264. 이성민의 질문에 네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2265.  
  2266. “종이와 펜을 받을 수 있을까요.”
  2267.  
  2268. “드리죠.”
  2269.  
  2270. 네블이 손을 까닥하고 움직였다. 이윽고 그는 공간의 틈 안에 손을 집어넣고서 얇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2271.  
  2272. “빌려주는 겁니까?”
  2273.  
  2274. “…그냥 드리죠.”
  2275.  
  2276. 이성민은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종이에 펜촉을 대고서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는 괜찮으니까 안심하라고?
  2277.  
  2278. 이렇게 편지로 생사를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2279.  
  2280.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고, 무사히 살아나왔습니다.
  2281.  
  2282. 사저도 목숨을 건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저. 저는 사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저를 위해 그 던전에 간 것이었고, 사저가 살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2283.  
  2284. 그러니 제 걱정도, 죄책감도 가지지 말아주십시오.
  2285.  
  2286.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2287.  
  2288. 여기까지 쓰고서. 이성민은 펜을 멈추었다. 백소고에게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도 되는 것일까? 알린다면 백소고의 성격상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렇게 두어도 되는
  2289.  
  2290. 것일까. 이성민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북쪽이다. 그곳에서 또 어떤 사건과 위험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2291.  
  2292. 결국.
  2293.  
  2294. 이성민은 백소고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백소고를 만나고 싶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아직… 백소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했다. 많이 늘었구
  2295.  
  2296. 나. 강해졌구나. 그런 말들. 이성민은 펜을 내려놓았다.
  2297.  
  2298. ‘나중에.’
  2299.  
  2300. 우선은 북쪽으로 가야 한다.
  2301.  
  2302. “너. 대단한 놈이었군.”
  2303.  
  2304. 네블을 돌려보내고서, 이성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공과 헤이스트를 병행하면서 그 속도에 익숙해지려 했고,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서. 달리는 것도 수행으로 삼았
  2305.  
  2306. 다.
  2307.  
  2308. [이제야 알았냐?]
  2309.  
  2310. 허주가 으스대며 말했다. 네블이 전한 정보에는 허주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2311.  
  2312. 허주가 활동한 것은 400년도 전이었다. 그 이전부터 허주는 존재하고 있었고, 에리아의 남쪽 지역에서 악몽처럼 군림해 온 요괴 두령이 바로 허주였다.
  2313.  
  2314. “그래봤자 육체도 잃고 봉인되었으면서.”
  2315.  
  2316. [나를 봉인하겠답시고 덤빈 놈의 쪽수가 수 만이었다. 마법사에 무림인, 기사, 정령사 등. 당시 한가락 하는 놈들은 모조리 날 토벌하려고 들었어.]
  2317.  
  2318. “왜 도망치지 않았던 거지?”
  2319.  
  2320.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2321.  
  2322. 허주의 대답은 빨랐다.
  2323.  
  2324. “…그것이 전부냐?”
  2325.  
  2326. [전부지.]
  2327.  
  2328. “듣자 하니 진짜 대단했던 모양인데. 왕은 아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진짜 왕처럼 군림했다 하고. 남쪽의 원주민들 중에서는 아직도 너를 신앙하는 부족도 있다고 해.”
  2329.  
  2330.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 이해를 벗어난 경이를 보면 신앙을 품어. 하늘을 가르는 번개를 보고서 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이다.]
  2331.  
  2332. 그렇게 말하는 허주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2333.  
  2334.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남쪽으로 가자. 내 보물을 주기로 말했었으니까.]
  2335.  
  2336. “네 부하들은 다 어디 갔지?”
  2337.  
  2338. [죽었다.]
  2339.  
  2340. 허주가 대답했다. 그 이후로 허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옛날이야기를 들추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성민도 더 이상 물을 생각은 없었다.
  2341.  
  2342. ‘남쪽이라.’
  2343.  
  2344. 그쪽은 가본 적이 없다. 사실 지금 향하고 있는 북쪽도 가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해서 북쪽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흔히 ‘북쪽’ 하면 떠올리는 것
  2345.  
  2346. 은 대도시인 트라비아다. 과거 혈천마
  2347.  
  2348. 백무선이 군림하던 곳이지만, 위지호연이 백무선의 팔을 자르면서 트라비아는 아귀다툼의 장이 되었다. 본래 마두들이 득세하던 곳에서 혈천마가 찍어 누르던 것이었는데, 혈천마가
  2349.  
  2350. 힘을 잃고 모욕당하면서 마두들이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2351.  
  2352. ‘무림인 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들도 넘친다던데. 인외도 돌아다니고.’
  2353.  
  2354. 어쩌면 그곳에서 프레스칸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였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프레스칸을 찾으러 들 것도 없이, 그에게 검은 심장에 대해 물어볼
  2355.  
  2356. 수 있을 테니까.
  2357.  
  2358. *
  2359.  
  2360. 남자의 출현은 기묘하고 갑작스러웠다. 백소고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네블을 경계어린 시선으로 응시했고, 네블은 양 손을 들어
  2361.  
  2362. 보이면서 백소고에게 말을 걸었다.
  2363.  
  2364.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2365.  
  2366. “…드래곤?”
  2367.  
  2368. 백소고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네블이 눈을 멀뚱히 뜨더니 곧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2369.  
  2370. “그런 오해는 처음 들어 보는 군요!”
  2371.  
  2372. 네블은 웃음기를 채 잠재우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면전에서 저런 웃음을 들었음에도 백소고는 딱히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다. 사실 백소고가 네블을 ‘드래곤’이라고 오해
  2373.  
  2374. 할 만큼, 그의 출현은 놀라웠다.
  2375.  
  2376.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쩍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대마법사나 사용할 수 있다는 텔레포트나 블링크와는 격이 달라 보였고, 백소고는 네블의 존재를 제대로
  2377.  
  2378. 인식조차 못하며 강함조차 엿보지 못하고 있었다.
  2379.  
  2380.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어버렸네요. 드래곤, 드래곤이라… 그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요.”
  2381.  
  2382.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백소고에게 다가왔다. 백소고는 네블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적의를 내비치며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네블은 걷던 걸음의 속도를 죽이지 않았다.
  2383.  
  2384.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냥… 심부름꾼일 뿐이죠.”
  2385.  
  2386.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슈트 자켓 안쪽에서 꺼낸 것은 잘 접힌 편지봉투였다.
  2387.  
  2388. “이성민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2389.  
  2390. “…네?”
  2391.  
  2392. 백소고의 표정이 돌변했다.
  2393.  
  2394. “이성민님이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2395.  
  2396. 당장 손을 뻗어 저 편지를 낚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백소고는 그것을 인내했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삼키면서 끌어 올렸던 위협을 갈무리했다. 백색의 호신강기가 흩어졌다.
  2397.  
  2398. ‘강제로 빼앗으려 했어도… 빼앗을 수 있었을까?’
  2399.  
  2400. 백소고는 뭇내 그런 의문을 품었다. 백소고가 위협을 잠재우자 네블은 빙긋 웃더니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백소고에게 편지를 건넨 후, 네블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
  2401.  
  2402. 간의 틈 사이로 사라졌다. 백소고는 한동안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2403.  
  2404. “…살아있었어.”
  2405.  
  2406. 단순한 편지다.
  2407.  
  2408.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는 하여도, 백소고는 믿고 있었다. 필적 같은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블의 존재가 백소고가 느끼는 신뢰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2409.  
  2410. 백소고는 편지를 소중하게 끌어 안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411.  
  2412. “살아있어… 사제가 살아있어.”
  2413.  
  2414. 가슴 깊이 느끼는 안도의 끝에서, 백소고는 자그마한 의문을 느꼈다.
  2415.  
  2416. ‘어떻게 살아 나온 거야?’
  2417.  
  2418. 당연스러운 의문이었다.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어디에 있다, 어디로 향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라도 적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백소고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2419.  
  2420. ‘내가 더 강했다면… 사제가 시간을 벌겠다고 나설 필요도 없었을 거야.’
  2421.  
  2422.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몇 년 만에 본 하나 뿐인 사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거두었다. 불과 일 년 전에 보았을 때만 하여도 초절정에 입문하지도 못하
  2423.  
  2424. 였었는데, 던전에서 보았던 사제는 백소고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2425.  
  2426. 어디로 갈 것인지 정했다.
  2427.  
  2428. 백소고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편지는 잘 접어서 품 안에 넣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산’이 있는 곳을 보면서. 백소고는 이성민과 헤어지
  2429.  
  2430. 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2431.  
  2432. 도망치라고 했던 말.
  2433.  
  2434. “…그건 내가 했어야 할 말이야.”
  2435.  
  2436. 백소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므쉬의 산 쪽으로 향했다.
  2437.  
  2438. *
  2439.  
  2440. 트라비아를 목적지로 두기는 했지만 크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아직 겨울까지는 시간 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441.  
  2442. “이놈의 노숙.”
  2443.  
  2444. 루비아가 불평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모닥불에 사냥한 고기를 구우다가 루비아의 불평을 듣고 그녀 쪽을 흘겨 보았다.
  2445.  
  2446. “불만도 많으시군요.”
  2447.  
  2448. “기왕 잘 거면 지붕 아래가 좋고 침대가 좋잖아요.”
  2449.  
  2450. “엔비루스는 노숙한 적 없습니까?”
  2451.  
  2452. “주인님은 노숙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하셨죠. 언제나 마법으로 멋진 집을 지어 놓고서 그곳에서 주무셨다고요.”
  2453.  
  2454. “귀찮은 인간이로군.”
  2455.  
  2456. “무슨 말이에요?”
  2457.  
  2458. “지붕 없는 곳의 바닥에서 자도 잠은 잘 옵니다.”
  2459.  
  2460.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해 주면서 통으로 구운 토끼의 다리를 부욱 찢어 루비아에게 건네 주었다. 불만이 많은 주제에 루비아는 건네는 것은 잘 받아 먹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토끼
  2461.  
  2462. 의 다리를 잡고서 입을 벌려 물어뜯었다.
  2463.  
  2464. “언제까지 노숙할 셈이죠?”
  2465.  
  2466. “트라비아에 도착할 때까지.”
  2467.  
  2468. “여태까지 한 달을 노숙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트라비아까지는 세 달은 더 가야 할 텐데요.”
  2469.  
  2470. “압니다.”
  2471.  
  2472. “세 달 동안 노숙하시겠다고?”
  2473.  
  2474.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밥이야 사냥으로 구하면 되는 거고, 아공간 포켓에 보존식도 여분이 많습니다.”
  2475.  
  2476. “그 외에 생필품은 어쩌시려고?”
  2477.  
  2478. “다 방법이 있지요.”
  2479.  
  2480. “어쩌다가 당신 같은 사람이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된 것인지.”
  2481.  
  2482. 루비아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루비아를 보았다.
  2483.  
  2484. “알고 있었습니까?”
  2485.  
  2486. “애초에 숨기지도 않았잖아요?”
  2487.  
  2488. 루비아가 되물었다. 그렇게 하는 말에 반박할 말은 없었다. 루비아와 허주를 신경쓰지 않고 네블을 불러댄 것은 이성민 쪽이었으니까.
  2489.  
  2490. [나도 안다.]
  2491.  
  2492. 허주가 웅웅거렸다. 내심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허주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네블을 보고 아무 놀람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2493.  
  2494. ‘의외로 역사가 깊은 모양이군.’
  2495.  
  2496. 400년 전에 활동했던 허주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 시기에도 에레브리사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2497.  
  2498. ‘너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이었나?’
  2499.  
  2500. [제안은 받았지만 거절했지.]
  2501.  
  2502. “…엔비루스는 에레브레사의 회원입니까?”
  2503.  
  2504. “물론이죠.”
  2505.  
  2506. 루비아가 기운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루비아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2507.  
  2508.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2509.  
  2510. 허주와 루비아. 둘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2511.  
  2512.  
  2513.  
  2514. ======================================
  2515. < 허주-5 >
  2516.  
  2517.  
  2518.  
  2519. “중개 길드죠.”
  2520.  
  2521. 이상한 걸 물어보네. 루비아가 덧붙여 중얼거렸다.
  2522.  
  2523.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봅니까?”
  2524.  
  2525. 이성민은 오히려 면박을 주면서 익은 고기를 물어뜯었다. 루비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기를 야금야금 먹었다.
  2526.  
  2527. “에레브리사가 중개 길드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2528.  
  2529. “…뭐. 그들이 여러 가지로 신비롭고 괴상한 집단이기는 하죠.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용병 길드는 길드 안에 용병단이 나뉘어져 있고, 마법사 길드는 길드 안에 학파와 마탑이
  2530.  
  2531. 나뉘어져 있어요. 그것은 대부분의 길드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죠. 하지만 정보 길드는 아니에요.”
  2532.  
  2533. 그것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다. 정보 길드는 크고 작은 것을 따지자면 수십 수백 개나 존재한다. 특히 대도시에는 정보만을 취급하는 길드만 해도 대여섯 개는 존재하고 있
  2534.  
  2535. 다. 게다가 ‘정보’를 취급하는 것은 정보 길드 뿐만이 아니다. 도시 내에 존재하는 도적 길드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고, 무림 문파 중에서는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여러 문파
  2536.  
  2537. 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다.
  2538.  
  2539. “에레브리사는 목적과 사상이 다른 ‘모든’ 정보 길드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어요. 그것 뿐 만이 아니죠. 상인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다양한 상인 조합들과 개인 상인들이
  2540.  
  2541. 보유한 모든 물건들도 종합해서 거래를 주선해주죠. 이것은 고위 귀족이나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2542.  
  2543. 이성민은 묵묵히 루비아의 말을 들었다. 에레브리사는 단순한 중개 길드가 아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집단들을 저렇게 종합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대한 땅덩이에 존재
  2544.  
  2545. 하는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2546.  
  2547. [폭력이다.]
  2548.  
  2549. 허주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2550.  
  2551.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은 거리와 공간을 무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절대로 인간은 아닌 존재들이야. 경이적이고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2552.  
  2553. 권력도 지위도 의미가 없다. 아무리 경호가 출중하더라도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 목을 딸 수 있는 것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이라는 놈들이다.]
  2554.  
  2555. “…그런 능력을 가진 자들이 왜 중개 길드 따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지?”
  2556.  
  2557. [400년 전.]
  2558.  
  2559. 허주가 내뱉었다.
  2560.  
  2561. [당시의 이 어르신은 악명이 꽤 높았다. 요괴라는 것은 그런 존재야. 본성이 악명을 불러오지. 모든 인간이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
  2562.  
  2563. 간은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 요괴도 그렇다. 요괴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흉폭하고 이기적인 놈들이라 사고를 많이 치지. 이 어르신도 그랬고.]
  2564.  
  2565. 그러니 토벌 당한 것이다.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전해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400년 전에 남쪽 지역에서 군림한 허주는 경외 받는 대요괴였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토벌된 것은
  2566.  
  2567. 아니다. 그만한 악행을 벌였기에 토벌 된 것이다.
  2568.  
  2569. [장담하건데, 그때의 에리아에서 나보다 강한 존재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드래곤조차 이 어르신을 어찌 하지 못했지!]
  2570.  
  2571. 그건 조금 오버한 것 같은데. 이성민은 내심 그런 생각을 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2572.  
  2573. [그런데 말이다. 이 어르신을 찾아 왔던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나조차도 쉬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런 놈이 대뜸 찾아와 자기들은 중개 길드인데, 나를
  2574.  
  2575. 회원으로 받고 싶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 그래서 물어봤다.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중개 길드 따위를 하는 것이고, 왜 나를 회원으로 받고 싶은 것이냐고.]
  2576.  
  2577. “…그래서?”
  2578.  
  2579.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변수’라고 말이야.]
  2580.  
  2581. “그게 뭐냐?”
  2582.  
  2583. [존재 자체가 세상 전체에 변수가 될 만한 존재.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어르신의 강함은 그를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
  2584.  
  2585. 원권을 제안한 것이라고 하더군. 바꿔 말하자면, 에레브리사라는 놈들은 세상에서 변수가 될 만한 존재들을 회원으로 두고서 지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놈들이 그를 통해 무엇
  2586.  
  2587. 을 획책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588.  
  2589. 므쉬의 산에서 에레브리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이성민에게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다. 당시의 이성민은 단순히 그것을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
  2590.  
  2591. 각했었는데,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2592.  
  2593. [놈들은 기묘하다. 그래서 내가 놈들의 회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뭔지도 알 수 없는 놈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거든.]
  2594.  
  2595. “편리하기는 한데.”
  2596.  
  2597. [아마 그 소천마라는 계집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일 것이다.]
  2598.  
  2599. 허주가 덧붙였다.
  2600.  
  2601. [그 정도의 강함과 성장력을 본다면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그런데… 이게 참 웃긴 말이란 말이야. 왜 변수라는 거지? 정해져 있는 상황도 아닌데 왜 변수라는 단어를 붙인
  2602.  
  2603. 것일까? 무엇에 대한 변수라는 것이지?]
  2604.  
  2605. 허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성민도 그에 대한 의문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따위는 없었다. 네블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네블이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2606.  
  2607. .
  2608.  
  2609.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군요.”
  2610.  
  2611.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2612.  
  2613. 이성민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네블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었다.
  2614.  
  2615. “…부르지는 않았는데?”
  2616.  
  2617. “셀게루스님의 작업이 끝나서, 그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2618.  
  2619. “마침 잘 되었군요.”
  2620.  
  2621. 이성민은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쯥 빨아내면서 네블을 바라보았다.
  2622.  
  2623. “에레브리사는 무엇입니까?”
  2624.  
  2625. “중개 길드지요. …그 이상의 것을 알려드리기는 힘듭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2626.  
  2627.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알려 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힘으로 질문하여 대답을 얻을 상대도 아니다.
  2628.  
  2629. “까다로우시군요.”
  2630.  
  2631. “그렇다고 해서 회원님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맹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2632.  
  2633.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공간을 갈랐다. 그 너머에는 셀게루스가 서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꾀죄죄한 몰골을 한 셀게루스는, 피로가 누적된 것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
  2634.  
  2635. 고 뺨이 조금 파여 있었다.
  2636.  
  2637. “분위기가 왜 그래?”
  2638.  
  2639. 셀게루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고 네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던 셀게루스가 입술을 벌려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2640.  
  2641. “뭐. 내가 알바는 아니지. 네가 주문했던 것들이 완성됐어. 형태는 지난번에 만들었던 창을 따랐고.”
  2642.  
  2643. 네블이 셀게루스 쪽으로 이동해 창과 마갑을 받아 왔다. 방금 전까지는 에레브리사에 대한 의문이 뒤섞여 기분이 심란했으나, 네블이 받아 온 창을 본 순간. 이성민의 마음속에서
  2644.  
  2645. 그런 심란함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만큼 셀게루스가 만든 창은, 이성민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2646.  
  2647. “오리하르콘은.”
  2648.  
  2649. 셀게루스가 입을 열었다.
  2650.  
  2651. “절대로 부서지지 않아. …라고 얼간이들이 떠드는데. 그건 틀린 말이야. 이 세상에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어. 그렇다고 해서 오리하르콘이 무른 것은 아니지. 견고
  2652.  
  2653. 함을 본다면 오리하르콘만한 금속은 몇 존재하지 않아. 드래곤의 비늘이나 뼈 이상의 강도를 가진 것이 오리하르콘이지.”
  2654.  
  2655.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창을 건네받았다. 길이는 이전에 쓰던 창보다 길어졌다. 처음 그 창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서 이성민의 몸이 커진 탓이다.
  2656.  
  2657. ‘가벼워.’
  2658.  
  2659. 하지만 무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성민은 창간을 잡고서 가볍게 힘을 줘 보았다. 휘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2660.  
  2661. “완전히 파괴되면 방법이 없지만, 그 이외의 손상은 마력…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내공을 불어 넣는 것으로 수복이 돼. 날을 세우거나 보수할 필요도 없어. 땅에 파묻고 천 년
  2662.  
  2663. 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리하르콘이야.”
  2664.  
  2665.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은 많지 않습니다. 드워프 대장장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고, 드워프를 제외한 대장장이 중에서는 마이스터의 칭호를 가진 셀게루스님만이
  2666.  
  2667.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지요.”
  2668.  
  2669. 네블이 덧붙였다. 대놓고 띄워주고 있음에도 셀게루스는 자부심 따위는 내비치지 않았다.
  2670.  
  2671. “그럼 뭐해? 다크 엘프라고 제대로 취급도 해주지 않는데.”
  2672.  
  2673. 오히려 그렇게 투덜거린 뒤에, 셀게루스가 말을 덧붙였다.
  2674.  
  2675. “오리하르콘은 마력이나 내공을 미스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받아들이기도 해. 직접 써보면 무슨 느낌인지 감이 올 거야. 그리고 갑옷도.”
  2676.  
  2677. 셀게루스가 손을 뻗어 마갑을 가리켰다.
  2678.  
  2679. “창을 만들고도 오리하르콘이 꽤 많이 남아서, 갑옷의 가변 마법이 새겨진 핵을 중심으로 해서 오리하르콘을 삽입했어. 덧씌우는 정도에 그쳤지만 대부분의 마법에 대해서는 안티
  2680.  
  2681. 매직이 기능할 거야. 하지만 너무 신뢰하지는 마. 인챈트로 새겨 넣은 안티 매직은 아니니까.”
  2682.  
  2683. “인챈트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2684.  
  2685. “안 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오리하르콘은 뛰어난 금속인 만큼 인챈트 난이도도 높아. 대마법사 급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내지. 그리고 인챈트라는 것은 금속의
  2686.  
  2687. 질을 떨어트려. 오리하르콘 정도의 소재라면 인챈트를 넣는 것이 오히려 손해야.”
  2688.  
  2689. 그 쪽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셀게루스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셀게루스는 크게 숨을 내뱉고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2690.  
  2691. “…장담하건데, 그건 내 대장장이 인생 중에 최고의 역작이라고 할 만 해. 소재도 내가 여태까지 만져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좋았고. 네가 드래곤과 싸우려 들지 않는 한 부숴지
  2692.  
  2693. 는 일은 없을 거야.”
  2694.  
  2695. “…감사합니다.”
  2696.  
  2697. “감사는 무슨. 이름은 안 붙였으니까, 붙이고 싶거든 네가 붙이도록 해. 나는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2698.  
  2699. 셀게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 버렸다. 네블은 열어 놓은 공간을 닫고서 웃는 얼굴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2700.  
  2701. “마음에 드십니까?”
  2702.  
  2703. “네.”
  2704.  
  2705. “저희를 의심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의 편의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706.  
  2707. 네블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2708.  
  2709. “…저는 이성민 회원님의 담당 중개인입니다. 회원님의 전속이죠. 비록 제가 에레브리사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에레브리사의 방침보다 회원님을 우선할 수도
  2710.  
  2711. 있습니다.”
  2712.  
  2713. 아까의 질문 같은 것에는 아니지만. 네블은 그렇게 덧붙인 뒤에 꾸벅 머리를 숙였다.
  2714.  
  2715. “다음에 불러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716.  
  2717. 네블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네블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주가 투덜거렸다.
  2718.  
  2719. [저 녀석 호모인가?]
  2720.  
  2721. “뭔 말을 씨발…”
  2722.  
  2723. 허주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성민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2724.  
  2725. [취향은 다양한 법이다. 네 얼굴이 못난 편은 아니니,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2726.  
  2727. “개소리 좀 하지 마.”
  2728.  
  2729. [어찌 되었든. 호의를 품은 조력자를 곁에 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태도가 애매한 놈이기는 하지만.]
  2730.  
  2731. 허주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마갑을 입어 보았다. 상체를 감싼 마갑은 이전보다 착용감이 훌륭했다. 거기에 내공을 불어넣으니, 마갑이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 전
  2732.  
  2733. 체를 감싼다. 이성민은 마갑이 덮은 몸을 움직여 보면서 내심 감탄을 흘렸다.
  2734.  
  2735. ‘편해.’
  2736.  
  2737. 이전의 마갑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맨 몸과 비교한다면 저항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몸을 움
  2738.  
  2739. 직이는 것에 저항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민의 근력을 생각한다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2740.  
  2741. 거기에 호신강기를 일으켜 본다. 콰아아! 순식간에 솟구친 호신강기가 이성민의 몸 전체를 덮었다. 그것은 마치 자색의 불꽃이 몸을 집어삼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성민은 기
  2742.  
  2743. 겁하고서 내공의 출력을 줄였다.
  2744.  
  2745. “내공이 오리하르콘을 거치면서 증폭된 거예요.”
  2746.  
  2747. 루비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2748.  
  2749. “그것이 오리하르콘이 최고의 소재라고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죠. 적은 내공이나 마력으로 그 이상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2750.  
  2751. 확실히 그랬다. 이전의 마갑을 입고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을 때에는 이 정도로 출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내친 김에 이성민은 창을 잡았다. 창간을 꽉 잡고 내공을 불어 넣자,
  2752.  
  2753. 곧바로 자색의 강기가 창 전체를 뒤덮었다. 오리하르콘을 덧칠한 마갑과는 다르게 창은 오리하르콘 통짜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강기를 뽑아내는 효율이 호신강기보다 훨씬 뛰어났
  2754.  
  2755. 다.
  2756.  
  2757. [몸뚱이로 안 되면 기물의 도움을 받아야지.]
  2758.  
  2759. ‘비꼬는 거냐?’
  2760.  
  2761. [성격이 배배 꼬인 새끼로군. 기물을 쓰는 것이 부끄럽냐?]
  2762.  
  2763. ‘그건 아니지만.’
  2764.  
  2765. [구라 치지 마라.]
  2766.  
  2767. 허주가 낄낄 웃으며 쏘아 붙였다.
  2768.  
  2769. [가진 것을 제대로 쓰는 것도 중요한 것이?야. 네놈의 심장이나 갑옷, 무기. 모든 것들이 결국 네 것이니까. 안 쓰겠답시고 묵히면서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말고 잘 써라.
  2770.  
  2771. 잘.]
  2772.  
  2773. 허주가 충고하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들으면서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몸 안에 박혀있는 검은 심장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싫지는
  2774.  
  2775. 않았다. 결국 이 심장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2776.  
  2777. ‘그래서 프레스칸을 만나야 하는 거야.’
  2778.  
  2779. 써먹으려고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2780.  
  2781. ======================================
  2782. < 프레데터-1 >
  2783.  
  2784.  
  2785.  
  2786.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2787.  
  2788. 바깥에는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 섞인 북쪽의 바람은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살결조차 베어낼 정도로 날카로워 매섭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그 바람에
  2789.  
  2790. 대한 대비책인지 두꺼워 보이는 로브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2791.  
  2792. “어서 옵쇼.”
  2793.  
  2794. 여관에 손님은 없었다. 벽난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여관 주인은 눈치 빠르게도 머리를 일으켰다. 그는 오른 손으로는 졸리 눈을 부비면서 왼 손으로는 어깨를
  2795.  
  2796. 끌어안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2797.  
  2798. “일단 문을 조금 닫는 것이 어떻수?”
  2799.  
  2800. 열고 들어 온 문은 바깥바람에 요동치고 있었다. 이성민은 손을 들어 문을 밀어 닫아버렸다.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는 것을 보고 여관 주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2801.  
  2802. “사냥꾼은 아닌 모양이군.”
  2803.  
  2804. 여관 주인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뒤로 넘겼다. 여관 주인은 하얗게 질린 이성민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2805.  
  2806. “커피를 드릴까? 아니면 뜨거운 물? 우유? 스프도 있기는 한데.”
  2807.  
  2808. “스프로 주십시오.”
  2809.  
  2810. “저는 우유가 좋아요.”
  2811.  
  2812. 이성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루비아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주문했다. 여관 주인은 루비아의 머리 위에 솟아나 있는 고양이 귀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2813.  
  2814. “수인이라니. 이 근방에서는 보기 힘든데. 노예 상인이쇼?”
  2815.  
  2816. “아닙니다.”
  2817.  
  2818. 이성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루비아는 여관 주인이 한 말에 조금 마음이 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발작하지는 않았다. 수인이라는 존재는 그렇다. 엘프야 워낙에 보기 드물
  2819.  
  2820. 고, 긴 세월을 살아가는데다가 정령과 마나의 사랑을 받는다. 모든 엘프는 뛰어난 정령사고 마법사며 궁수고 검사다. 모든 부호들이 엘프 노예를 갖는 것을 꿈꾸지만, 엘프를 노
  2821.  
  2822. 예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823.  
  2824. 하지만 수인은 다르다. 그들은 엘프보다 약하다. 엘프보다 숫자도 많다. 비교적 노예로 삼기 쉬운데다가 복종심을 끌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편도 아니다. 그 ‘어렵지 않다’는
  2825.  
  2826. 것이 가학적인 폭력을 통해 강제로 박아 넣는 것일 뿐이지.
  2827.  
  2828. “우선 여기 앉아 계시고.”
  2829.  
  2830. 여관 주인은 벽난로 앞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2831.  
  2832. “뜨거운 스프와 우유. 곧 가져다 드릴 테니 기다리고 계쇼.”
  2833.  
  2834. 여관 주인은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비아가 후다닥 벽난로 앞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서 숨을 내뱉었다.
  2835.  
  2836. “따지고 보면 난 수인이 아니지만요.”
  2837.  
  2838. 벗은 로브를 대충 뒤에 던져두고서 루비아가 쫑알거렸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곁에 와 의자에 앉았다.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만들어낸 사역마다. 수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것은
  2839.  
  2840. 어디까지나 엔비루스의 취향일 뿐이지, 루비아가 수인인 것은 아니다.
  2841.  
  2842. “굳이 여관으로 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2843.  
  2844. “갑자기 바람이 강해졌잖아요.”
  2845.  
  2846. “당신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2847.  
  2848. “그래도 저는 바람 쌩쌩 부는 곳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아요.”
  2849.  
  2850. 이성민은 한서불침을 이루었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여관에 들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루비아가 강경하게 주장한 탓에 이 여관에 들르게 되었다.
  2851.  
  2852. “머지않아 트라비아에 도착할 거예요. 트라비아는 혈천마가 군림하기 이전부터 사마외도와 흑마법사, 그리고 인외의 땅이었죠. 솔직히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인데.”
  2853.  
  2854. “어쩔 수 없습니다.”
  2855.  
  2856.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로브를 벗었다.
  2857.  
  2858. “북쪽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혈천마라는 누름돌은 무게를 잃었고, 힘을 가진 마인들은 군림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트라비아의 치
  2859.  
  2860. 안은 엉망이 되었고.”
  2861.  
  2862. 이곳까지 오면서, 네블을 통해 트라비아의 사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전해 들었다. 혈천마가 트라비아에 군림했을 적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적어도 그는 정도를 아는 존재
  2863.  
  2864. 였기 때문이다.
  2865.  
  2866. 하지만 혈천마가 위지호연에게 패한 이후.
  2867.  
  2868. 무인이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혈천마는 트라비아에 군림할 정도의 거인이었으나, 팔이 잘리고 혈천맹이 와해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트라비
  2869.  
  2870. 아에 법은 없다는 것이다. 성주는 트라비아를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고 트라비아를 떠나 별장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치안이 사라진 트라비아는 온갖 범죄가 들끓어대고 있었다.
  2871.  
  2872.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림맹도 그쪽을 주시하고 있답니다.”
  2873.  
  2874. “…신령이라고 했었죠? 북쪽,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 인연이 있다면 귀인과 만나게 된다.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에.”
  2875.  
  2876.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2877.  
  2878.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그런 진위 여부도 확실치 않은 말을 따라 이 멀고 위험한 곳까지 오다니.”
  2879.  
  2880. [애매하지는 않아.]
  2881.  
  2882.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허주가 루비아에게 쏘아 붙였다.
  2883.  
  2884. [신령이라는 것은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르고 꿍꿍이도 알 수 없는 존재긴 하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놈들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보통은 그렇게 된다.]
  2885.  
  2886. “그 말조차 애매하네요.”
  2887.  
  2888. [원래 그 새끼들이 그런 놈들이야. 놈들은… 운명을 엿보지. 아예 북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북쪽에 온 이상 신령이 말한 ‘만남’은 반드시 일어난다.]
  2889.  
  2890.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이성민도 긴가민가하기는 했다. 북쪽에서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이 한 두 군데도 아니고,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라고 해 봐야 언제인지도 모른다. 이곳까
  2891.  
  2892. 지 오기 한참 전에 루비아가 왜 트라비아로 가는 것이냐고 캐묻기에 대답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그냥 가면 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여 대책 없이 이곳까지 오기는 했
  2893.  
  2894. 다.
  2895.  
  2896. “어디로들 가쇼?”
  2897.  
  2898. 큼직한 머그컵 두 개를 들고 온 여관 주인이 물었다. 루비아는 양 손으로 머그컵을 받고서 후후 입 바람을 불며 우유를 마셨다.
  2899.  
  2900. “트라비아로 갑니다.”
  2901.  
  2902. “저런.”
  2903.  
  2904. 이성민의 대답에 여관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2905.  
  2906.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 군. 왜. 당신들도 그곳에서 이름이라도 떨치고 싶은 거요?”
  2907.  
  2908. “그건 아닙니다만.”
  2909.  
  2910. “뭐, 내가 오지랖을 떨만한 입장은 아니지. 조심들 하쇼. 특히 그쪽 수인 아가씨.”
  2911.  
  2912. 여관 주인이 턱짓으로 루비아를 가리켰다.
  2913.  
  2914. “트라비아는 법이 존재하지 않게 된 곳이야. 색마도 많고 인신공양을 하는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많다더군. 도시 안에 들어간다면 위험이 엮어 올 지도 몰라.”
  2915.  
  2916.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2917.  
  2918. 루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입에 들어 온 스프를 우물거렸다. 잠시 뒤에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2919.  
  2920. “안 어울리게 친절하시군요.”
  2921.  
  2922. “응?”
  2923.  
  2924. “독을 탄 스프를 주는 것치고는 말입니다. 꼴같잖은 위선이야. 아니면 기만인가?”
  2925.  
  2926.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들고 있던 머그컵을 벽난로의 불길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 말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변했다.
  2927.  
  2928. “…이거야 원.”
  2929.  
  2930. 여관 주인이 투덜거렸다. 만독불침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조잡한 독은 이성민의 몸을 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입맛이 더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이성민은
  2931.  
  2932. 입술을 우물거리며 퉤하고 침을 뱉었다.
  2933.  
  2934. “도, 독?”
  2935.  
  2936. 루비아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발이 풀린 것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2937.  
  2938. “치명적인 독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당신이 마신 것은.”
  2939.  
  2940. 수인은 판매가치가 있는 상품이다. 여관 주인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2941.  
  2942.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2943.  
  2944. “사정은 무슨 사정…!”
  2945.  
  2946. 루비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이성민의 말대로 루비아가 복용한 것은 치명적인 독은 아니었다. 단순히 몸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
  2947.  
  2948. 다. 이성민은 숨을 헐떡거리는 루비아를 힐긋 보고서 여관 주인에게 손을 뻗었다.
  2949.  
  2950. “해약은 없습니까?”
  2951.  
  2952. “주면 살려줄 텐가?”
  2953.  
  2954. “거래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죽이고 몸을 뒤져 해약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나는 지금 당장 해약을 구할 방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2955.  
  2956. 에레브리사의 네블을 소환해 해약을 구입하겠다고 하면 된다. 치명적인 독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2957.  
  2958. “…그렇군.”
  2959.  
  2960. 여관 주인은 빠르게 포기했다. 마실 것에 독을 타고, 그것이 실패한 이상 칼자루는 저들에게 있다.
  2961.  
  2962. “이 일을 하면서 보는 눈은 꽤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2963.  
  2964. 여관 주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 이성민 쪽으로 내밀었다.
  2965.  
  2966. “안심하쇼.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좆 되보라는 심정으로 독약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2967.  
  2968. 하지만 이성민은 그 약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루비아가 그런 이성민을 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969.  
  2970. “뭐, 뭐하는 거에요? 왜 약을…”
  2971.  
  2972. “뭔지도 알 수 없는 약을 주사할 수는 없죠.”
  2973.  
  2974. “진짜 해독제인데…”
  2975.  
  2976. “그렇다고 마냥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오기 싫다는 나를 이 여관으로 데리고 온 것은 루비아님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독도 아니니 그냥 잠깐 앉아 계십시오.”
  2977.  
  2978. “이 개새끼야…!”
  2979.  
  2980. 루비아가 욕설을 외쳤지만 이성민은 듣지 않았다. 그는 여관 주인을 올려 보면서 물었다.
  2981.  
  2982.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2983.  
  2984. “…수인은 돈이 되니까.”
  2985.  
  2986. “그게 전부입니까?”
  2987.  
  2988. “…이 근방은 귀랑문의 영역이요. 매달 할당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트라비아가 그 모양 그 꼴이 되면서 오는 손님이 없어졌지.”
  2989.  
  2990. “그래서 수인을 팔아 돈을 장만하려고 했다?”
  2991.  
  2992. “이해해 주쇼.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2993.  
  2994. “악의 없는 사람에게 해를 주면서 제 보신을 하려 했는데. 그것을 이해해 달라? 이거 참 이기적인 분이시군.”
  2995.  
  2996. 이성민은 웃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살기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2997.  
  2998. “이런 식으로 몇 명을 넘겼습니까?”
  2999.  
  3000. “이번이 처음…”
  3001.  
  3002. “거짓말이군.”
  3003.  
  3004. 이성민이 뱉은 말에 여관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우물쭈물하던 여관 주인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순간.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주인의 머리가
  3005.  
  3006. 터졌다. 이성민은 쓰러진 시체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루비아를 부축해 몸을 일으켰다.
  3007.  
  3008.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 하기는…!”
  3009.  
  3010. “독약일지도 몰라서,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3011.  
  3012. “됐어요!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니깐.”
  3013.  
  3014. 루비아는 그렇게 내뱉고서 이성민의 몸을 밀쳤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루비아를 보면서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의자를 끌어다가 루비아를 앉혔다.
  3015.  
  3016. [위에 인기척이 있다.]
  3017.  
  3018. 허주가 웅웅거렸다.
  3019.  
  3020. [손님은 아닌 것 같고. 네가 죽인 남자의 가족인 것 같군.]
  3021.  
  3022. “저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았겠지.”
  3023.  
  3024. [죄책감은 없나 보군.]
  3025.  
  3026. “느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독에 당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루비아님은 팔려서 성노리개가 되거나 마법실험의 제물이 되었겠지.”
  3027.  
  3028. “엿 같은 이야기 하지 마세요.”
  3029.  
  3030. 루비아가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천장을 올려 보았다. 인기척은 이성민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러 가지는 않았다.
  3031.  
  3032.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놈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3033.  
  3034. “내가 자비라도 베풀었어야 했다는 거냐. 내가 용서해 주었다고 해서 저 남자가 개심했을까?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가족이 살겠다고 다른 이들에게 독을 먹일지도 모르는데?”
  3035.  
  3036. [그럴 지도 모르지. 개심했을 지도 모르고.]
  3037.  
  3038. “확률이 반반이라고 해서 내가 자비를 베풀 이유는 되지 않아.”
  3039.  
  3040. [여기서 저 남자를 죽여 앞으로의 일을 방지하는 것이 네놈의 협의라는 것이냐?]
  3041.  
  3042. “협의는 무슨. 그런 대단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그냥 자비를 베풀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대요괴라는 놈이 이제 와서 인정에
  3043.  
  3044. 눈이라도 뜬 거냐?”
  3045.  
  3046. [으하하하! 그럴 리가.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너라는 놈이 어떤 인간인지 말이야. 위에 있는 놈들은 어쩔 테냐? 저 녀석들도 따지고 보면 저 남자의 공모자 아닌가?]
  3047.  
  3048. “나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내가 찾아가서 죽일 이유는 없지.”
  3049.  
  3050. 이성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루비아를 보았다. 루비아는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이성민에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비가 풀린 루비아가 몸을
  3051.  
  3052. 일으켰다.
  3053.  
  3054. “이놈의 고양이 귀를 숨길 수도 없고.”
  3055.  
  3056. “우선 몸이나 숨기십시오. 귀찮은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으니까.”
  3057.  
  3058. “…이거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마력 소모가 얼마나 큰데.”
  3059.  
  3060. “지금 마력이 없는 거도 아니잖습니까?”
  3061.  
  3062.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빛의 구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성민은 루비아가 벗어 놓은 로브를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고, 자신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위에서 발소리가
  3063.  
  3064. 들려온다. 괜히 마주쳐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은 여관을 나섰다.
  3065.  
  3066. “마을에 괜히 왔어.”
  3067.  
  3068. [그거 참 죄송하네요. 제가 들어가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3069.  
  3070. “알면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3071.  
  3072.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바람은 여관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매서워져 있었다. 이성민은 로브 모자를 뒤집어쓰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3073.  
  3074. 바람 소리 너머에서 그런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 그런 외침도 함께. 이성민은 뒤를 힐긋 보았다. 열린 문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직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3075.  
  3076. 부릅 뜬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3077.  
  3078. 나올 때 챙긴 것인지, 소년은 식칼을 들고 있었다. 소년이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에게 덤비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고 세찬 바람에 균형을 잃어 그 자리에
  3079.  
  3080. 나뒹굴었다.
  3081.  
  3082. [저런.]
  3083.  
  3084. 허주가 혀를 찼다. 소년이 악 받친 고함을 지르며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뒤늦게 문으로 나온 중년 여자가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이성민이 죽인 남자의 부인이자
  3085.  
  3086. 소년의 어머니인 듯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이성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3087.  
  3088. “죽여 버리겠어!”
  3089.  
  3090. 소년의 원독어린 고함을 무시하고 이성민은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을을 가로지른다. 시선이 느껴졌다.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이쪽을 살피는 경계의 시선이었다. 바람소리 너머로 늑
  3091.  
  3092. 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3093.  
  3094.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3095.  
  3096. 늑대의 울음소리는 이성민이 나간 걸음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3097.  
  3098. “이거 참.”
  3099.  
  3100.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눈발 섞인 바람은 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바람 소리에 역한 짐승의 노린내가 섞였다. 그 즉시 이성민은 아공간
  3101.  
  3102. 포켓에 손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꺼낸 창이 앞으로 향한다. 쩌엉! 큼직한 소리가 났지만 이성민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것은 눈발에 몸을 숨기고 공
  3103.  
  3104. 격을 감행한 놈이었다.
  3105.  
  3106. “고수구나!”
  3107.  
  3108.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떨어진 놈이 양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전신에 눈발을 달고 있는 놈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3109.  
  3110. “웬 개 냄새가…”
  3111.  
  3112. [라이칸슬로프로군.]
  3113.  
  3114. 허주가 중얼거렸다. ‘개 냄새’라고 한 말에 남자의 눈이 뒤집어졌다.
  3115.  
  3116. “늑대다!”
  3117.  
  3118. 그 외침과 함께 남자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근육이 우락부락 커지고 전신에 털이 돋는다. 이성민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퍼억! 순식간에 뻗은
  3119.  
  3120. 찌르기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3121.  
  3122. “커헉!”
  3123.  
  3124. “덤빌 거면 변신부터 하고 오지 그랬어.”
  3125.  
  3126.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찌른 창에 강기를 불어 넣었다.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창이 몰려오는 내공에 반응하고 강기를 증폭시켰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몸뚱
  3127.  
  3128. 이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3129.  
  3130. “병신도 아니고.”
  3131.  
  3132. 이성민은 창을 등에 걸치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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