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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3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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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받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래서 더 많이 만들어지기를 소망하였기 때문에, 저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는 어떠한 실천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기 때문에, 그 실천은 당연히 CinephileDiary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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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민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소위 "예술영화 상영관"으로 불리우는 극장들의 열악한 IT 환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바일 환경으로의 변화에 대한 대응은 차치하고 네이버 카페 등을 통해 상영정보만 겨우 홍보하는 극장들도 많았습니다. 아트플러스와 같은 이들 극장들의 네트워크는 잘 알려지지 않아 서울아트시네마에 종종 영화를 보러다닌다는 친구조차 다른 상영관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회사 생활이 늘 바쁜 직장인들은 영화 잡지나 영화 관련 사이트들을 꼼꼼히 챙겨보고 상영 일정을 기억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 다음에야, 어떤 영화를 보아야 할지 결정하기도 힘들고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짧은 상영기간 탓에 영화 볼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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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CinephileDiary는 이러한 어려움들에 주목했고 이런 종류의 어려움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획되고 개발되었습니다.(물론 그 의도에 맞게 개발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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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애초 시작할 때부터 CinephileDiary가 뭔가 대단한 결과를 내놓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시작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작은 노력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또 다른 노력들이 시도되기를 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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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하지만 각 극장들로부터 CinephileDiary의 캘린더에 해당 극장 상영정보를 입력받는 협조 요청부터 외면을 받았습니다.(차마 부탁할 엄두를 못 낸 곳들도 있습니다.) 거절의 이유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원 상영관을 늘리며 서비스를 확대했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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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문제는 CinephileDiary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저의 노력이 혹시 아무런 의미없는 헛된 것은 아닐까,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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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무엇보다 상영관을 중심으로 한 기획 자체가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저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여러 극장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느낀 바 그들은 영화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CinephileDiary가 특별히 극장을 지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CinephileDiary의 상영관들은 목적과 성격, 운영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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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어떤 극장은 그저 특정한 취향의 관객들에게 "소비"되는 영화를 상영합니다. 소비시장의 크기가 다를 뿐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숱하게 상영되는 영화들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영화들이 비판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애써 CinephileDiary를 개발하고 꼬박꼬박 상영정보를 입력하는 수고를 제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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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많은 극장들은 제가 생각하는 윤리에 비추어 볼 때 별로 윤리적이지도 못합니다. 어차피 보러 올 관객들은 어떻게 하든 영화를 보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관객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별다른 영화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고, 편리한 방법으로 상영정보를 제공할 생각도, 관객들이 상영관에서 편안하게 영화를 체험하고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관객들과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또한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비정규직 직원을 고용해 적당히 처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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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영화에 대한 앱을 만들고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자체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좋아하지만 다수로부터 외면받는 영화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영화가 영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외면받는(혹은 미움을 받기도 하는) 이유는 소위 "영화를 볼 줄 모르는" 관객들에게만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영화 또한 관객들에게 불친절합니다. 영화를 공부하거나 영화에 관심이 많아 일정한 지식을 갖춘 관객들 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만들어 놓고, 이를 지지하지 않는 관객들과 다짜고짜 논쟁을 벌입니다. 시네필이 영화 자체로는 훌륭하지 못하지만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감독을 격려하는 것처럼, 아직 시네필 영화를 지지하지 않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친절하는 태도와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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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저의 편견일 수도, 그른 소견일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기획이 잘못되었기에 시간이 지나도 크게 나아질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CinephileDiary를 멈추어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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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언젠가될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만일 영화를 사랑하는 저의 두 번째 실천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은 영화를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것입니다. 시네필들에 의해 좋은 영화가 발견되고 그 영화가 왜 좋은지, 왜 지지받아야 하는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되고, 결과적으로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CinephileDiary를 통해 배운 저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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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비록 많은 이유들로 실망을 하고 좌절을 했지만, CinephileDiary에 대한 많은 시네필들의 반응은 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고, 시네필들의 격려 덕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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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CinephileDiary를 사랑해 주신 시네필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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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개발자 정승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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