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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1
- < -- 북부 -- >
- “저택에서 출발해서 수도 게이트까지 마차로 반나절 정도 소요됩니다. 거기서 북부 게이트까지 이동한 후, 로암까지 마차로 사나흘 남짓 걸립니다.”
- “공작성에서 게이트까지 사흘이면 꽤 멀군요. 보통은 근처이지 않나요?”
- “북부에는 게이트가 5곳뿐입니다. 그나마 로암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 근처는 바위가 많은 거친 땅이라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하지가 않습니다.”
- “5개뿐이라구요? 그 넓은 북부에?”
- “예. 5개뿐입니다.”
- 그래서 수도에서 활동하는 귀족들 중에 북부 출신은 거의 없었다. 왔다갔다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 “근데요. 제롬. 게이트는..내가 알기로 아무나 이용할 수 없을 텐데요. 공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일종의 여행 아닌가요?”
- “엄밀히 따지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실 대부분 그런 이유로만 사용하는 건 아닙니다.
- 수도 게이트의 경우는 비용을 지불하면 사용합니다. 그리고 공작 전하께서 이용하겠다 하시는데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까.”
- “.... 그렇군요.”
- 그녀의 남편은 거물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아직도 확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의 위치는 대개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 왕비라고 반드시 사교계 여왕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모르는 남작의 여식이 사교계 정점에 오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 여자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를 자신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 공작부인이 위세를 부리면 남작부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당연히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했다.
- 꿈속에서 그녀는 백작부인이었다. 메튼 백작 가문은 영지도 있고 나름 이름 있는 가문이었으며 수도 정계에 발을 들인지 꽤 되었다.
- 당연히 루시아보다 낮은 지위 여자들은 사교계에 널렸다. 그래도 루시아는 딱히 그들 대상으로 자존심을 세워 몰아세울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루시아는 메튼 백작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 그래서 루시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도 남편의 지위를 내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즐기게 될까.
- “호위를 포함해 떠날 일행은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의문은 없으신지요?”
- “없어요. 혹시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없나요?”
-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이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 그 날 저녁은 편안한 휴식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전 날에 비하면 온몸에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 그와 밤을 보낸 이후 시작된 하혈이 멈추지를 않았다. 심각한 출혈은 아닌데 자꾸 속옷에 묻어나자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가장 먼저 눈치 챘다.
- “마님.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 그래서 출발 예정 시간에 출발하는 대신 의사가 불려왔다. 여의사가.
- 인상과 풍채, 모두가 넉넉한 나이 지긋한 여의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여의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 여자가 의학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고, 의사가 되었다 해도 실력은 늘 남자에 비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세간에 여자이기 때문에 여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는 의식은 없었다.
- 귀부인 침실은 금남의 지역이지만 의사는 제외였다. 굳이 여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수요가 많지 않고 남자에 밀려난 여자 의사들은 그런대로 생계를 이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만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여의사는 대개 의사인 남편을 따라다니며 돕다가 배워서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가 모두 의사인 경우에는 쓸모가 많았다.
- 오늘 불려온 여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사별하여 현재는 혼자였다. 어쨌든 여의사는 이런 어마어마한 귀족가 저택에 치료를 목적으로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 하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여자를 본 순간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대단히 고압적인 귀부인을 상상했는데 여주인은 마치 소녀 같았다.
-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 침대 위의 귀부인은 조금 발간 얼굴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물쭈물 하다가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하녀를 쳐다보았다.
- 하녀가 눈치껏 귀부인에게 소인이 대신 설명할까요? 여쭈어 허락을 받고 목소리를 낮추어 증상을 설명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하녀의 말을 듣던 여의사 표정이 점차 기묘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흘끔 침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 이제 막 결혼한 새신부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 “마님. 혹시 통증이 있으십니까?”
- “...움직이면 조금..”
- “혹시 달손님 기간하고 겹치는 것은 아닌지요?”
- “그렇지는 않네.”
- “처녀혈은 사람에 따라 달라서 약간 묻어나는 경우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며칠 계속 흐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있다거나, 생리혈처럼 많이 흐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만 두면 멈출 겁니다.
- 심각한 증상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 휴식만 취하시면 길어봤자 사흘이면 괜찮으실 겁니다.
- ”
- 의사를 말을 들으면서 루시아는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놔두면 괜찮을 것을 괜히 의사를 불렀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 말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아, 하지만 출혈이 멈추고, 최소한 움직여도 아프지 않을 때 까지는 교합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성의 생식기는 무척 연약해서 자칫 잘못하면 크게 탈이 나지요.”
- “어차피...”
- 어차피 뭐? 그가 없으니 할 일 없다고? 그럼 그가 있으면 어쩐다는 건데? 루시아는 저 혼자 묻고 대답하며 점점 더 낯이 뜨거워졌다.
- “아..아무튼 알았네. 되었으니 가보시게. 수고했네.”
- “딱히 약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 처방을 마치고 루시아 침실을 나오는 여의사를 제롬이 따로 불렀다.
-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 제롬은 유능한 집사였다. 공작이 여의사를 언급하자마자 재빠르게 실력 좋은 여의사를 수소문했다. 그나마 수도에는 여의사가 꽤 있는 편이지만 영지로 내려가면 쓸만한 실력을 갖춘 여의사는 찾기 힘들었다.
- 그는 결코 주인의 한 마디를 그냥 들어 넘기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 몇 배는 더 수고롭고 일이 늘어나지만 집사가 천직인 제롬은 전혀 힘들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공작이 굳이 여의사에게 마님을 보이라고 말한 것을 대수롭게 넘기지 않았다.
- 로암에서 기다리고 있을 대를 이어 공작가 주치의 필립은 남자였다. 필립이 마님을 진찰하는 상황을 어쩐지 공작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의 촉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제롬은 안나에게 마님 주치의를 제안했다.
- 안나는 어제 잠깐 저택을 방문해서 제롬의 제안을 받았고, 오늘은 환자를 봐 달라기에 다시 방문했다.
- “수도를 영영 떠나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셨지요.”
- “예. 몇 년 안으로는 다시 수도로 오게 될 겁니다.”
-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안나는 갑자기 정든 곳을 떠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혼자 몸이고 이런 대귀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안 받는 건 더도 없는 기회였다. 제롬은 예의 바른 미소로 활짝 웃었다.
- “타란 공작가의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안나.”
- 거의 침대에서 쉬며 시간을 보냈더니 이틀이 더 지날 무렵 하혈은 완전히 멈추었고, 몸 상태도 확실히 좋아졌다. 움직이면 다리 안쪽이 조금 얼얼한 느낌은 있었지만 뛰지만 않으면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출발을 앞두고 가장 느긋한 사람은 루시아였고, 루시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주했다. 특히 빠뜨린 것이 없나 두 번 세 번 점검하는 제롬이 가장 바빴다.
- 제롬이 가장 중요하게 체크하는 것은 이동하는 동안의 식량과 비상약, 마님의 편의를 위한 물품들이었다. 여정을 함께 할 사람들은 총 14인이었다.
- 루시아와 하녀 둘, 제롬, 안나, 벙어리 3형제를 포함한 하인 5명, 기사 4명. 제롬은 떠나기 전 응접실에서 마지막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루시아에게 기사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루시아가 허락하자 제롬은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 루시아는 어쩌면 기사들 중에 로이 크로틴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아침나절에 잠깐 봤던 그 맹렬하게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어딨냐고 찾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의문은 접어두었다.
- 기사 4명 중 1명만 스물 중반 남짓으로 어린 편이었고, 다른 셋은 그보다 네다섯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모두 문가 근처에 서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 응접실 안쪽 소파에 앉아 있는 루시아와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 “제롬. 혹시 기사들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 “그건 아닙니다만. 마님께 혹시라도 위협적으로 보일까봐 그렇습니다.”
- 기사들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데다가 갑주까지 걸치면 더 커보였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라 기사를 처음 접하는 여자는 겁을 먹기 쉬웠다. 혹시나 마님께서 두려워할까봐 취한 조치였다.
- “괜찮아요. 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세요. 그래도 얼굴 정도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지요. 만약의 경우 날 지켜줄 사람들인데 그 때도 이렇게 떨어져 있을 수는 없죠.” 루시아는 기사의 큰 키와 덩치가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처음부터 타란
-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 덩치와 키가 그 사람의 성품을 좌우하지 않는다고 꿈속에서 배웠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기사들의 무기나 갑옷을 수리하는 작은 공방을 운영한 적 있었다.
- “알겠습니다. 마님.”
- 기사들이 몇 걸음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제롬이 그들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해당하는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중 리더라고 소개된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기사가 말했다.
- “마님. 호위 때문에 마님께 불편을 드리지는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님께서는 한 가지만 숙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경우, 헤바 경 옆에서 결코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 리더 기사가 말한 헤바 경의 이름은 딘 헤바. 4명 기사 중 가장 어려보이는 남자였다.
- “어째서요? 왜 리더인 경이 아닌, 헤바 경 곁에 있으라는 거지요?”
- “그건 이 중 헤바 경이 가장 뛰어난 실력의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헤바 경은 타란 기사단 7조의 조장이면서 공작 전하의 정예 기사 중 하나입니다.”
- “이해할 수 없네요. 기사들이 조를 짜서 움직일 때 리더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 순으로 맡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 기사들이 묘한 눈으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건 기사들의 문서화된 법이 아닌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내규나 마찬가지여서 기사들 사정에 좀 밝아야 알만한 규칙이었다.
- “그건..헤바 경이..”
- 리더 기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딘이 직접 나섰다.
-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전 귀족도,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평민 출신 기사입니다.”
- “그래서요?”
- 그걸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한 딘은 오히려 루시아가 되묻자 다소 당황했다.
- “그러니까..혹시 마님께서 불편해 하실 수 있으니.”
- “그러니까. 평민 출신인 기사가 날 호위하는 기사들 리더로 있는 상황을 내가 불쾌해 할지도 몰라서 그랬다는 말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 “실력은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죠. 난 기사들의 규칙을 깨고 싶지 않아요. 리더는 경이 맡아주세요.”
- 딘이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아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 “예. 마님.”
- 아까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였다. 기사들을 내보내고 제롬이 놀라움을 표했다.
- “마님께서 기사들 규칙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은 마님께서 여정 동안 기사들을 불편해 하실까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헤바 경은 나이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기사입니다. 견습기사 기간 없이 바로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 “어머나. 그건 검술 시합이나 마상 시합에서 우승했을 경우에나 가능하잖아요.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졌군요. 놀라워요. 겉으로 보기에는 참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요.”
- “마님께서 더 놀랍습니다. 참 잘 아시는군요.”
- 루시아는 살짝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방을 운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경험은 루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메튼 백작은 뚱뚱해서 덩치 있어 보여도 키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루시아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져서 늘 그 자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공방을 운영하며 기사들과 자주 접하자 메튼 백작보다 훨씬 더 큰 덩치와 키, 때로는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
- 들이 메튼 백작과 비교할 수 없이 순수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쓰레기 같은 놈들도 있었고, 수리비를 외상으로 달아놓고 떼어먹는 놈도 있었지만 때로는 다른 기사가 그런 놈을 잡아다 주기도 했다.
- 같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도 용병과는 천지차이로 달랐다. 기사는 용병과 달리 검을 다루는 자신의 운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 마무리까지 아름다웠으면 참 좋았겠지만. 공방은 남자한테 홀려 홀랑 날렸다. 처음에는 기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대로 된 기사도 아니었다.
-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고용 파기된 자유기사였다. 기사의 수치라며 다른 기사들이 분노에 차서 결국은 잡아다 주었지만 돈은 거의 되찾지 못했다.
- 사지 멀쩡하고 잘 생긴 기사가 들이댈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몸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애정을 베푸는 남자의 사랑을 순수하므로 진짜라고 착각했다.
- “크로틴 경은 함께 가지 않나요?”
- 제롬 표정이 일순간 좋지 않게 굳어졌다.
- “그 자..크로틴 경은 어찌...”
- “며칠 전 아침에 저택에 들어오는 것을 얼핏 보았어요. 그래서 난 함께 가는 줄 알았지요.”
- “아닙니다. 크로틴 경은 명을 받아 태자 전하 호위 중입니다.”
- “크로틴 경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 “...그런 사감이라기 보다는..좀 골치가 아픕니다.”
- 제롬이 말하는 골치의 의미를 어쩐지 알겠다. 괴팍하고 제멋대로 보이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왜 ‘미친개’라고 불렸는지 감이 잡혔다. 루시아가 상상했던 그런 의미와는 아무래도 조금은 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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