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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c 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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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8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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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Episode 54. 마왕 살해자 (3)
  3.  
  4.  
  5. [대천사!]
  6.  
  7. 마왕 오세는 경악을 넘어 혼절할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8.  
  9. 그들에게 있어, <에덴>의 대천사들은 최악의 상성을 가지는 존재.
  10.  
  11. 무려 두 명의 대천사의 동시 현현했으니 놀라 나자빠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2.  
  13. [어째서 대천사가? <에덴>의 천사들은 ‘그 일’ 이후 대부분 죽었을 텐데······!]
  14.  
  15. 그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16.  
  17. 이곳은 1863회차의 세계.
  18.  
  19. 가브리엘과 요피엘은 아직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것이다.
  20.  
  21. [■댕, 그게 무슨 개소리야?]
  22.  
  23.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우리엘의 친구 답게 걸쭉한 욕설. 나는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를 만류했다.
  24.  
  25. “가브리엘. 저놈들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습니다. 빨리 처리하죠!”
  26.  
  27. [······보채지 마. 건방진 인간 녀석.]
  28.  
  29. 태클을 걸 곳이 한 군데 있었지만, 나는 일단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30.  
  31. 내 전신으로 가브리엘의 힘이 강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2.  
  33. [나는 대천사 가브리엘.]
  34.  
  35. 쿠구구구구!
  36.  
  37. 머리털이 곤두서는 격의 팽창이 느껴졌다.
  38.  
  39. 드디어, 가브리엘의 주력 설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40.  
  41.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42.  
  43. 물론 저 ‘좋은 소식’은, 어디까지나 가브리엘이 같은 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
  44.  
  45. [겁먹지 마라! 대천사라 봐야 본거지를 잃은 잔당에 불과하다!]
  46.  
  47. 마왕 오세가 성좌들을 독려했다.
  48.  
  49. 하지만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 치고, 오세의 신형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중이었다.
  50.  
  51. 기합을 터뜨린 성좌들이 제각기 성유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52.  
  53. [이것은 정해진 종말에 관한 것.]
  54.  
  55. 가브리엘의 설화, 「종말의 계시」가 시작되었다.
  56.  
  57. 「뿔이 두 개 달린 숫양을 네가 보았노니, 두 눈 사이에 있던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58.  
  59. 내 몸을 감싼 휘광 속에 황금빛 문자열들이 흘렀다.
  60.  
  61. 그 문자열들을 따라 내 몸의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62.  
  63. 번식기의 숫양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렀다.
  64.  
  65. 마왕의 뿔이 자랐던 자리에 새하얀 뿔이 차례로 솟아 올랐다.
  66.  
  67. 츠츳, 츠츠츠츠츳!
  68.  
  69. [으, 으어어어어······.]
  70.  
  71. 그 뿔을 본 것만으로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겁에 질리고 있었다. 몇몇 성좌들은 무력한 화신들처럼 병장기를 떨어트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72.  
  73. [으아아아아아!]
  74.  
  75. 마치,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듯한 부나방처럼.
  76.  
  77. 「그는 제 힘으로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제 힘으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78.  
  79. 내 등 뒤로 솟구친 여섯 장의 날개가 화려한 섬광을 내뿜자, 설화급 성좌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80.  
  81. 쿠과과과과과!
  82.  
  83. 그러나 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84.  
  85. 내 눈앞에 소환된 단단한 금속이 모든 종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86.  
  87. 마치 거신족이나 쓸 법한 무기.
  88.  
  89. 하얗게 빛나는 뱀이 자루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그 뱀의 아가리에는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눈부신 창극이 꽂혀 있었다.
  90.  
  91.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의 신창(神槍), ‘편애(偏愛)의 천칭(天秤)’이었다.
  92.  
  93. 나는 그 창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94.  
  95. 일순, 세계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6.  
  97. 근방의 모든 존재가 저울대에 오르고 있었다. 한쪽은 이쪽 저울대에, 다른 한쪽은 저쪽 저울대에.
  98.  
  99.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웃고 있었다.
  100.  
  101. 그녀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짚었다.
  102.  
  103. 「그는 끔찍스러운 파괴를 자행하면서도, 힘센 이들과 거룩한 백성들을 파멸시키리라.」
  104.  
  105. 쿠오오오오오오!
  106.  
  107. 창은 눈부신 빛살이 되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빛살을 내던졌다.
  108.  
  109. 쿠콰콰콰콰콰콰!
  110.  
  111. 그리고 세상의 일부가 지워졌다.
  112.  
  113. 하늘에서 나를 공격하던 성좌도, 측면을 노리고 달려들던 녀석도,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녀석도.
  114.  
  115.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처럼 소멸했다.
  116.  
  117. 남은 것은, 이쪽 저울대 위의 생명체들 뿐.
  118.  
  119. 이것이 대천사의 진짜 힘이었다.
  120.  
  121. 가브리엘이 영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22.  
  123. [······한 놈 놓쳤어. 꽃잎 한 장으론 한계가 있네.]
  124.  
  125. 실제로, 미리 사태를 예견한 마왕 오세는 이미 점이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하위격의 마왕으로는 홀로 대천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그저 두고 보고 있을 요피엘이 아니었다.
  126.  
  127. 콰아아아아아아!
  128.  
  129. 내 등 뒤에서 생성된 붉은 안개가 창공을 덮으며 오세를 좇았다.
  130.  
  131. 그르르르르르.
  132.  
  133. 하늘 전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붉은 안개였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작은 병정의 대군(大軍)이었다.
  134.  
  135. 일대의 하늘을 붉게 물들인 <에덴>의 503부대.
  136.  
  137.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을 따르는 핏빛 정예병들이었다.
  138.  
  139. [끄아아아아아악!]
  140.  
  141. 피라냐들처럼 달려든 핏빛 안개 사이로 붉은 가시가 솟았다.
  142.  
  143.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천국의 병정들이 피의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144.  
  145.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왕의 화신체가 부스러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가브리엘이 내 발을 움직여 마왕의 파편을 짓밟았다.
  146.  
  147. [별 것도 아니네.]
  148.  
  149.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출현에 크게 당황합니다.]
  150.  
  151. [살아남은 마왕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152.  
  153. [일부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비정상적인 개입에 비난을······.]
  154.  
  155. [닥쳐 ■■들아.]
  156.  
  157. 등 뒤로 뻗어나왔던 여섯 장의 날개가 무수한 깃털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대천사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158.  
  159. 속이 살짝 메슥거렸지만, 생각만큼 몸의 부담은 심하지 않았다. 95번 시나리오에 허락된 개연성이 그만큼 풍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와 맺은 ‘이계의 언약’ 때문일 수도 있었다.
  160.  
  161. 어느 쪽이든 내겐 좋은 일이었다.
  162.  
  163.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4.  
  165. 그런데 내게 현현한 요피엘이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166.  
  167. 요피엘이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168.  
  169. [저것도 죽여라.]
  170.  
  171. 그곳에,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는 유중혁이 있었다.
  172.  
  173.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174.  
  175.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176.  
  177. [절대악(絕對惡)이다.]
  178.  
  179. 오른쪽 눈동자가 따끔, 하는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80.  
  181. [성흔, ‘죄업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182.  
  183. 죄업의 눈동자. 대천사 요피엘의 성흔이었다.
  184.  
  185. [대상의 ‘죄업’ 수치를 측정합니다.]
  186.  
  187. 세상의 모든 존재에 쌓인 ‘죄업’을 보는 눈.
  188.  
  189. 방금 전까지 유중혁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카만 심연이 드리워져 있었다.
  190.  
  191. [대상의 ‘죄업’을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192.  
  193.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그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득해질 것만 같은, 그런 암흑이었다. 마왕 오세도, 절대악 계통에 속한 다른 성좌들도 그런 죄업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194.  
  195. 요피엘이 말했다.
  196.  
  197. [끝이 보이지 않는 죄업이다. 저렇게 밀도 깊은 죄업은,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죄업을 합쳐도 저 자가 가진 죄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198.  
  199. 나도 안다.
  200.  
  201. 유중혁은 많은 죄를 저질렀다.
  202.  
  203. 많은 사람을 죽였고.
  204.  
  205. 많은 세계를 멸망시켰다.
  206.  
  207. 셀 수조차 없는 원혼들이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208.  
  209. [저 자는 죽어야 한다.]
  210.  
  211. 하지만.
  212.  
  213. “안 됩니다.”
  214.  
  215. 녀석이, 구한 것도 있었다.
  216.  
  217. “죽일 수 없습니다.”
  218.  
  219. 녀석이 망친 모든 것에 비하면 티끌일지 몰라도.
  220.  
  221. 분명, 구해낸 것이 있었다.
  222.  
  223. 츠츠츠츠츳······.
  224.  
  225.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226.  
  227. 그 찌릿찌릿한 시선 속에, 나는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228.  
  229.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지금 죽여서는 안 됩니다.”
  230.  
  231. [······‘구원의 마왕’. 너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서기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232.  
  233. “기왕 살려주신 거, 한 사람 더 살려주시죠.”
  234.  
  235. 드드드드드······.
  236.  
  237. 돌아보자, 유중혁의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238.  
  239. 녀석의 의식이 어떻게든 수면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240.  
  241. 그런 유중혁을 향해 요피엘이 말했다.
  242.  
  243. [그가 깨어난다면 나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244.  
  245. 요피엘이 다시 자신의 안개를 일으키려는 기색이 보였다.
  246.  
  247.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248.  
  249.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뿐인 것 같다.
  250.  
  251. “죽이지 않고도,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252.  
  253. 요피엘의 붉은 안개가 멈칫했다.
  254.  
  255. “그가 본래의 의식을 되찾지 않도록 하고, 의식을 잃은 그를 조종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256.  
  257. [저 자를 속박할 방법이 있단 말이냐? 그대는 대체 무슨 흉계를······.]
  258.  
  259. 요피엘이 다시 한 번 격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브리엘이 나섰다.
  260.  
  261. [요피엘, 내버려둬 봐. 어차피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
  262.  
  263. 요피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264.  
  265. [······만약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면, 바로 놈을 즉살할 것이다.]
  266.  
  267.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68.  
  269. 그리고, 곧장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270.  
  271. “야.”
  272.  
  273. 드드드드드······.
  274.  
  275. 녀석의 몸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276.  
  277. 원작에서 몇 번인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278.  
  279. 아마 몇 분 후면 유중혁의 의식은 깨어나겠지.
  280.  
  281.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282.  
  283.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유중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284.  
  285. 녀석이 내게 그렇게 했듯이.
  286.  
  287. 나보다 체구가 큰 녀석이었기 때문에 들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288.  
  289. “놔, 라.”
  290.  
  291. 이제 거의 수면 근처까지 올라온 유중혁의 의식이 말을 시작했다.
  292.  
  293. 나를 붙잡으려는 듯, 살기로 가득 찬 녀석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294.  
  295. 나는 유중혁이 어떻게 하면 ‘회귀 우울증’에서 깨어날지 알고 있다.
  296.  
  297.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녀석이 어떻게 하면 저 우울의 심해 아래로 더 깊이 가라 앉을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298.  
  299. 유중혁의 손끝을 보던 나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300.  
  301.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302.  
  303. 유중혁의 눈빛이 멍해지더니, 움직이던 손끝이 멈췄다.
  304.  
  305. 「“사부한테 다음 회차라는 게 없다면 좋을텐데.”」
  306.  
  307. “생각해 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308.  
  309.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진다.
  310.  
  311.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312.  
  313. 「“중혁 씨는 살아 있어서 행복해?”」
  314.  
  315.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유중혁의 표정이 무너져 간다.
  316.  
  317.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318.  
  319. “383회차. 마침내 7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을 때. 정말 운 좋게도 그 회차에선 아무도 죽지 않았지.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그때 이현성이 말했었지.”
  320.  
  321. 「“중혁 씨, 저는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322.  
  323. 녀석의 머릿 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324.  
  325. “그리고 498회차······.”
  326.  
  327. 유중혁의 손바닥이 자신의 귀를 막기 위해 움직인다.
  328.  
  329. 평소의 유중혁이었다면 이런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30.  
  331.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332.  
  333. 나는 녀석의 양손을 붙잡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334.  
  335. “그런 일이 열 번.”
  336.  
  337.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338.  
  339. “스무 번.”
  340.  
  341.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유중혁이 겪는 기분을 나 역시 고스란히 느낀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었다.
  342.  
  343. 한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어둠이, 자아를 탐욕스레 삼키는 것이 보였다.
  344.  
  345. “백 번.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어.”
  346.  
  347. 그 모든 세계는 멸망했다.
  348.  
  349. 모든 행복했던 기억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350.  
  351. 무수한 회귀 속에 행복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352.  
  353. 그가 지켜냈던 모든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354.  
  355. “유중혁.”
  356.  
  357. 유중혁의 자아가 까마득한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358.  
  359.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영영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360.  
  361.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362.  
  363. 망연한 얼굴의 유중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364.  
  365. 걱정 마라 유중혁.
  366.  
  367. 남은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368.  
  369. 너는, 그만 쉬어라.
  370.  
  371.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372.  
  373. 공허한 유중혁의 눈동자가, 주인을 잃은 기억을 토하고 있었다.
  374.  
  375.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376.  
  377. 「죽고 싶다.」
  378.  
  379.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380.  
  381.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382.  
  383. 하늘에서 몇 방울인가 비가 떨어졌다. 마왕과 성좌들의 혈향이 묻은, 검은 비였다.
  384.  
  385. 비를 맞은 유중혁의 얼굴에도 새카만 물이 번져 흘렀다. 천천히 낮아진 유중혁의 시야가, 이윽고 나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386.  
  387. 한 인간의 정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고장난 목소리.
  388.  
  389.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유중혁이 더듬거렸다.
  390.  
  391. “내,가······ 어떻게, 해야······ 하, 지?”
  392.  
  393. 나는 유중혁의 두 팔을 놓으며 말했다.
  394.  
  395.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396.  
  397. 유중혁이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398.  
  399. 하지만 나는 녀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400.  
  401. 흐릿한 하늘 위로, 방금 업데이트가 완료된 ‘서브 시나리오’ 창이 띄워져 있었다.
  402.  
  403. +
  404.  
  405.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회귀의 끝 >
  406.  
  407. 클리어 조건 : 유중혁을 죽이시오.
  408.  
  409. +
  410.  
  411. 나는 바닥에 꽂힌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412.  
  413.  
  414. # 288
  415.  
  416. Episode 54. 마왕 살해자 (4)
  417.  
  418.  
  419. 1863회차에 들어온 지도 하루가 지났다.
  420.  
  421. 어젯밤부터 내리던 새카만 비에 광화문 일대가 푹 젖어 있었다.
  422.  
  423. 그르르르르······.
  424.  
  425. 비가 내린 직후부터, 폐건물 사이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괴물들도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426.  
  427. 처음 내가 보았던 코끼리를 닮은 녀석도 있었고, 거대한 문어를 연상시키는 녀석도 있었다. 제일 무시무시했던 것은 대형 건물만한 크기의 아기였다.
  428.  
  429. 갸르르르르······.
  430.  
  431. ‘이계의 신격’들은 종류가 많지만, 모두가 ‘꿈을 먹는 자’나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처럼 네임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름 없는 것들’이라 불리며, 자아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존재한다.
  432.  
  433. 기저귀를 찬 아기가 도시를 불도저처럼 밀어대는 것을 보며, 나는 숨을 죽인 채 숨어 있었다.
  434.  
  435. ······솔직히 기저귀는 저 아기가 아니라 나한테 필요할 것 같았다.
  436.  
  437.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438.  
  439. 힘을 비축하겠다며 대천사들이 잠든 것도 벌써 몇 시간 전.
  440.  
  441. 웬만큼 힘을 회복한 것인지, 코트에 꽂혀 있던 흰 백합이 파르르 떨었다.
  442.  
  443. 가브리엘이었다.
  444.  
  445. “일어나셨습니까?”
  446.  
  447.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448.  
  449. “무슨 선택이요?”
  450.  
  451. [몰라서 물어?]
  452.  
  453.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잖습니까.”
  454.  
  455. 멀리서 뭔가가 퍼거걱,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456.  
  457. 또 뭔가 일이 터졌구나 싶은 순간, 찢겨 나간 코끼리 괴물의 다리가 보였다. 강력한 힘에 의해 찢겨 나간 듯한 흔적. 그 잘린 다리를 질질 끌고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458.  
  459. 이 시나리오의 진짜 괴물, 유중혁이었다.
  460.  
  461. 한숨처럼, 다시 한 번 꽃잎이 흔들렸다.
  462.  
  463. [죽일 것처럼 굴더니······ 그럼 칼은 왜 쥐었던 거냐고.]
  464.  
  465. “혹시나 자살할 수도 있잖아요. 뭐, 지금 상태로 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466.  
  467. 나는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허공에 홰홰 그으며 말했다.
  468.  
  469.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 유중혁을 죽이지 않았다.
  470.  
  471. 가브리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472.  
  473. [우리엘은 이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474.  
  475. “우리엘? 아, 우리엘은 잘 계십니까?”
  476.  
  477. [그런 녀석 내가 알 게 뭐야.]
  478.  
  479.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480.  
  481. 내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또 다른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482.  
  483.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484.  
  485. 까다로운 천사님께서도 깨어나신 모양이었다.
  486.  
  487. 요피엘은 일어나마자마 곧장 사나운 투로 물어왔다.
  488.  
  489. [그자는 계속 살려두기로 한 건가?]
  490.  
  491. 나는 대답 대신 유중혁이 가져온 코끼리 다리를 받아들었다. 살점이 아주 실하게 붙어 있는 다리였다. 분명 설화도 아주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겠지.
  492.  
  493. 나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는 유중혁을 잠시 마주보았다. 요피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494.  
  495. [그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그대가 받은 시나리오는······.]
  496.  
  497. “유중혁을 죽이는 거였지요.”
  498.  
  499.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대천사들을 속이기엔 늦었다.
  500.  
  501. 내가 본 시나리오 창을, 내게 현현했던 그들 또한 보았을 테니까.
  502.  
  503. ―유중혁을 죽이시오.
  504.  
  505. 그것이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내린 시나리오였다.
  506.  
  507. 나는 녀석을 죽여야만 본래의 ‘3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
  508.  
  509. “이미 말씀 드렸지만, 이 시나리오는 있는 그대로 해석해선 곤란합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안한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10.  
  511. 대천사들은 말이 없었다. 나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512.  
  513. 나는 코끼리 다리를 태연히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514.  
  515. “유중혁은 ‘죽음’을 겪을 수 없습니다. 대천사님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516.  
  517. 두 천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518.  
  519. [그게 무슨 뜻이지?]
  520.  
  521. “이 녀석은 ‘회귀자’입니다.”
  522.  
  523. 만약 초반 시나리오였다면, 방금 내가 말한 정보는 필터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지금쯤 ‘회귀자’에 대한 소문은 꽤나 퍼져서 <에덴>의 고위급 성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테니까.
  524.  
  525. 붉은 코스모스 잎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526.  
  527. [······설마?]
  528.  
  529.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530.  
  531. “그는 영원히 생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죽여도 그저 다른 회차로 넘어갈 뿐이니까요.”
  532.  
  533.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534.  
  535. “왜 우리엘이 저 같은 존재를 감시하고 있었을까요?”
  536.  
  537. 말할 수 없는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538.  
  539. 요피엘은 분노를 다스리듯 줄기를 떨며 말했다.
  540.  
  541. [그래서······, 이제부터 어쩌겠다는 거지? 저 자를 죽일 수 없다면 원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다.]
  542.  
  543.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구워진 고깃덩어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544.  
  545.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시간이야 많으니까요.”
  546.  
  547. 내 태연한 반응에 두 송이의 꽃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혹여나 ‘격’을 발현하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는데, 갑자기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548.  
  549. 꾸르르르륵.
  550.  
  551. 내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유중혁도 아닌 것 같았다.
  552.  
  553. ······그렇다면?
  554.  
  555. 고개를 숙이자, 제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두 송이의 꽃이 보였다.
  556.  
  557. “······배 고프세요?”
  558.  
  559. *
  560.  
  561. 쭈우욱.
  562.  
  563. [가브리엘, 언제까지 녀석을 방관할 거지?]
  564.  
  565. 쭈우욱.
  566.  
  567. [방관 안해. 내가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우리엘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죽여버렸을텐데······.]
  568.  
  569. 페트병에 꽂힌 가브리엘이 줄기로 물을 쭉 빨아들이며 답했다. 그녀의 곁에는 요피엘의 코스모스가 마찬가지로 물이 담긴 페트병에 꽂혀 있었다.
  570.  
  571.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을 향해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물었다.
  572.  
  573. [우리엘 녀석, 잘 있을까?]
  574.  
  575. [임무에 집중해라, 가브리엘.]
  576.  
  577. [아니, 걱정되잖아. 우리엘은 혼자 두면 항상 사고를 친다고.]
  578.  
  579. [······그렇군. 너는 사실 우리엘을 좋아하는 건가?]
  580.  
  581. [뭔 헛소리야! ······그보다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어? 언제까지 저 녀석들이랑 같이 붙어 있어야 돼?]
  582.  
  583. 꽃잎을 파들파들 떠는 가브리엘의 모습에 요피엘이 답했다.
  584.  
  585. [방법을 찾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586.  
  587. [왜? 아무리 다른 ‘세계선’이라지만 여기에도 <에덴>은 있을 거 아냐. 이곳의 서기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588.  
  589. [서기관에게서 답신이 없다.]
  590.  
  591. [뭐?]
  592.  
  593. [서기관뿐만 아니라, <에덴>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된다.]
  594.  
  595. <에덴>과 연락이 안 된다······?
  596.  
  597. 아무리 세계선이 바뀌었다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598.  
  599. 시나리오의 제약 때문에 본래 있던 ‘별자리의 맥락’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
  600.  
  601. 답답한 노릇이었다.
  602.  
  603. 한숨을 내쉰 가브리엘이 물을 다시 쭉 빨아들이며 말했다.
  604.  
  605. [뭐야? 몇 시간 전까지 멱살 잡고 싸우더니······.]
  606.  
  607.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608.  
  609. 왜인지 그 광경을 보며 가브리엘은 자신과 우리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
  610.  
  611. ······전우애인가.
  612.  
  613. 아주 잠깐, 가브리엘은 우리엘이 저 녀석들을 왜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614.  
  615. *
  616.  
  617. “흙을 먹어라 유중혁.”
  618.  
  619. 유중혁은 말없이 흙을 먹기 시작했다.
  620.  
  621.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622.  
  623. “먹으란다고 진짜 먹으면 어떡해!”
  624.  
  625. 시험 삼아 시켜본 건데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
  626.  
  627.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28.  
  629. 하지만 ‘회귀 우울증’이 녀석의 자아를 온전히 집어삼킨 탓에, 당분간 유중혁은 저런 바보 상태일 것이다.
  630.  
  631.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632.  
  633. 나는 어쩐지 측은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634.  
  635. “평소에도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3회차 그 자식보다 네가 낫다 인마.”
  636.  
  637. “······.”
  638.  
  639. “······흙 뱉어.”
  640.  
  641. 흙을 뱉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내가 아는 또 다른 유중혁을 떠올렸다.
  642.  
  643. 그 녀석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다.
  644.  
  645. 또 회귀한다고 발광하고 있지 않으면 좋을 텐데.
  646.  
  647. 유상아에게 이것저것 맡겨 놨으니, 잘 되길 바랄 뿐이다.
  648.  
  649. “이제 저기 누워 좀 쉬어라 유중혁 1863호.”
  650.  
  651. 내 말에 유중혁이 폐건물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652.  
  653. 멀리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654.  
  655. 95번 시나리오의 노을도, 여전히 노을이었다.
  656.  
  657. 희붐하게 흩어지는 아지랑이를 보며, 기이하게도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끔찍한 시나리오에서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658.  
  659. 「김독 자는 유중 혁 을죽 여 야해」
  660.  
  661. ······아니까 보채지 좀 마라.
  662.  
  663. 다행히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준 시나리오에는 기한이 없었다.
  664.  
  665. 문득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미련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666.  
  667. “그만 쉬라니까.”
  668.  
  669.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유중혁이 곤히 눈을 감았다.
  670.  
  671. 아마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672.  
  673. 어쩌면, 지금 저 수면이 유중혁에겐 제대로 된 ‘첫 잠’인지도 모른다.
  674.  
  675. 모든 기억에서 해방된, 제대로 된 첫 잠.
  676.  
  677. 유중혁이 완전히 잠든 후,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678.  
  679. 폰의 바탕 화면에는 늘 그랬듯 ‘멸살법’의 텍본이 있었다.
  680.  
  681.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682.  
  683.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txt
  684.  
  685. ······뭐지?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건 ‘3차 수정본’이었을 텐데?
  686.  
  687. 순간 소름이 돋았다.
  688.  
  689. 설마 내가 ‘원작’의 회차로 돌아왔기 때문인가?
  690.  
  691. 그래서, 수정본이 아니라 원작의 내용으로 텍본이 바뀐 건가?
  692.  
  693. 나는 혼란한 마음으로 일단 파일을 열었다.
  694.  
  695. 파일은, 내가 알고 있던 ‘멸살법’의 원작 그대로였다.
  696.  
  697.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698.  
  699. 앞으로의 일들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우선 이 회차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화면을 1863회차로 넘겨, 모든 정보를 꼼꼼히 읽어 나갔다.
  700.  
  701. 「54번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을 잃었고」
  702.  
  703.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704.  
  705. 「67번 시나리오에서 이설화가 사망했으며」
  706.  
  707. 잃고, 잃고, 또 잃어갈 뿐인 이야기를.
  708.  
  709. 「78번 시나리오에서 이지혜가 죽었다.」
  710.  
  711. 이 회차의 유중혁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712.  
  713. 사실 이번 회차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714.  
  715. 유중혁의 모든 회차는 그가 홀로 남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716.  
  717. 마지막까지 와서도, 결국 같은 삶이 되었을 뿐이다.
  718.  
  719. “······불쌍한 놈.”
  720.  
  721. 나는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모른다.
  722.  
  723.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멸살법’이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것.
  724.  
  725. ······만약, 내가 3회차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떨까.
  726.  
  727. 이곳에 남아서, 마지막 회차의 유중혁을 도와 시나리오를 클리어 한다면.
  728.  
  729.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 독 자그 건’」
  730.  
  731. 알아.
  732.  
  733. 「그 래」
  734.  
  735.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놀아나는 일이라는 걸.
  736.  
  737. 아마도 ‘은밀한 모략가’는 이것까지 예상하고 내게 시나리오를 준 것일 터다. 시나리오에 제한 시간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738.  
  739. 이곳의 유중혁을 죽이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든가.
  740.  
  741. 아니면, 이곳의 유중혁과 함께 시나리오의 결(結)을 보라고.
  742.  
  743. 정말 ‘이계의 신격’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744.  
  745. 우스운 것은 내가 정말로 그 제안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746.  
  747. 만약 여기서 ‘결’을 본다면······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결말은 볼 수 없겠지.
  748.  
  749. 그렇다고 여기서 놈을 죽인다면,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750.  
  751.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유중혁을 죽이려면 결국 유중혁의 회귀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놈의 배후성은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알지조차 못하는 존재였다.
  752.  
  753.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754.  
  755.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멸살법’의 스크롤을 내렸다.
  756.  
  757.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758.  
  759. [성좌, ‘물병자리의 백합’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760.  
  761. 멀리서, 페트병에 꽂힌 두 송이의 꽃이 진동하고 있었다.
  762.  
  763. 감각이 강한 경종을 울렸다.
  764.  
  765. ······설마 ‘이계의 신격’인가?
  766.  
  767. “여기 숨어 있었군, 유중혁.”
  768.  
  769.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려는 순간,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770.  
  771. 지금 등을 돌리면 죽는다.
  772.  
  773. 너무나 분명하게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774.  
  775. 성좌인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은신술.
  776.  
  777. 분명,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존재였다.
  778.  
  779. 이런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고?
  780.  
  781. “넌 뭐야? 유중혁의 동료냐?”
  782.  
  783.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784.  
  785.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786.  
  787. 적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 천천히, 나는 고개를 돌렸다.
  788.  
  789. 등 뒤에 익숙한 외형의 여인이 서 있었다.
  790.  
  791. 한순간 머릿속이 패닉으로 덮였다.
  792.  
  793. ······대체 어떻게?
  794.  
  795.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796.  
  797.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인물은, 이 ‘회차’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98.  
  799. “뭐, 알 필요 없지. 어차피 죽일 거니까.”
  800.  
  801. 하얗게 웃는 해상제독 이지혜가, 나를 향해 쌍룡검을 겨누고 있었다.
  802.  
  803.  
  804. # 289
  805.  
  806. Episode 54. 마왕 살해자 (5)
  807.  
  808.  
  809. “섬멸해라, 쌍룡검.”
  810.  
  811. 이지혜의 말과 함께, 두 자루의 검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푸른 색의 용을 닮은 강기가 내 목줄기를 뜯기 위해 날아들고 있었다.
  812.  
  813. 쌍룡검(雙龍劍).
  814.  
  815. 충무공의 성유물이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명검이 빛을 뿜었다. 경지에 오른 [검도]의 궤적을 보며,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816.  
  817. “어쭈, 작아져? 어디서 굴러먹다 온 화신이야?”
  818.  
  819. 해상제독 이지혜.
  820.  
  821.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그녀는, 명실상부한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하나다.
  822.  
  823.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824.  
  825. 내가 기억하는 ‘원작’이 맞다면, 1863회차의 이지혜는 오래 전에 죽었다.
  826.  
  827.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지혜는 대체 뭐란 말인가.
  828.  
  829. 나는 쌍룡검의 궤적이 닿지 않을 고도까지 단번에 날아오르며 외쳤다.
  830.  
  831. “이지혜, 멈춰! 난 네 적이 아니야!”
  832.  
  833. “······뭐야, 날 알아? 하긴,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834.  
  835. 뻔뻔한 말을 중얼거린 녀석이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했다.
  836.  
  837. 나는 그 기술이 뭔지 알고 있었다.
  838.  
  839. 순살(瞬殺).
  840.  
  841. ‘멸살법’에서 손꼽히는 대인 기술 중 하나이자, 그 어떤 상대든 일검에 격살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스킬.
  842.  
  843. “벌레처럼 작아졌다고 내가 못 벨 것 같아?”
  844.  
  845. 귀살이 일렁이는 이지혜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846.  
  847. 스슷.
  848.  
  849. 이지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내 목을 노리는 감각이 일었고, 바로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850.  
  851. 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852.  
  853. “유중혁!”
  854.  
  855. 집채만한 그림자가 눈앞을 덮는가 싶더니, 철과 철이 부딪치는 강렬한 파찰음이 울려 퍼졌다.
  856.  
  857. 내 옆을 막아선 유중혁과, 그 유중혁을 향해 쌍룡검을 들이댄 이지혜.
  858.  
  859. 까가가가각!
  860.  
  861. 저 단단한 [진천패도]의 칼날에 작은 흠집이 나 있었다.
  862.  
  863. 순살은 그만큼 강력한 기술이었다.
  864.  
  865. 상대가 유중혁만 아니라면 말이다.
  866.  
  867. 고오오오오!
  868.  
  869. 1863회차의 유중혁은 누구보다 살인 기계에 가깝다.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고, 죽이겠다 마음먹은 상대는 반드시 격살한다.
  870.  
  871. 초월의 격을 발한 유중혁이 검을 휘둘렀고, 힘의 격차에서 밀려난 이지혜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패도를 쥔 유중혁의 신형이 이지혜를 쫓아 낙하했다.
  872.  
  873. “유중혁! 멈춰!”
  874.  
  875. 나는 지상에서 터져나오는 굉음을 향해 외쳤다.
  876.  
  877. 뿌연 먼지 사이로 쓰러진 이지혜와 검을 내리치는 유중혁이 보였다. 멈추라는 내 말에도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근처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밀려들고 있었다.
  878.  
  879. ‘회귀 우울증’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880.  
  881.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882.  
  883.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884.  
  885. “죽이지 마! 걔 죽이면 안돼!”
  886.  
  887. 어째서 이지혜가 살아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888.  
  889.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890.  
  891. 적어도 유중혁이, 그녀를 죽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892.  
  893. 먼지 속에서 일어난 이지혜가 이를 갈며 외쳤다.
  894.  
  895. “무슨 뻘짓이지? 덤벼 패왕! 이번에야말로 개작살을 내줄 테니까!”
  896.  
  897. 아무래도 이지혜와 유중혁의 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898.  
  899.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900.  
  901. 그 ‘이지혜’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물며 적이 되었다고?
  902.  
  903. “잠깐만! 너도 멈춰 이지혜! 우린 싸울 생각 없다고!”
  904.  
  905. 내 말에도 이지혜는 멈추지 않았다. 내 명령 때문인지 유중혁의 움직임은 한결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906.  
  907. 파스슷!
  908.  
  909. 이지혜의 칼날에 베인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튀었다.
  910.  
  911. 아무래도 ‘회귀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912.  
  913. 그렇다고 공격 명령을 내리면 아까처럼 이지혜에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고······ 제기랄.
  914.  
  915. 나는 전인화를 유지한 채 유중혁의 어깨에 올라타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916.  
  917. “멈추라고 자식아! 유중혁은 네 사부잖아!”
  918.  
  919. “사부? 뭔 개소리야? 이딴 괴물 사부로 둔 적 없어.”
  920.  
  921. 이지혜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922.  
  923. “내 사부는 훨씬 더 멋있는 사람이야.”
  924.  
  925. 이지혜의 칼날에서 오색의 아우라가 흘렀다.
  926.  
  927. 나는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928.  
  929. 무슨 공격을 하든, 방향이라도 알면 피하기라도 쉬울 테니까.
  930.  
  931.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932.  
  933. ······유중혁의 이해도가 낮은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934.  
  935. 이지혜가 그렇게 복잡한 인간은 아닐 텐데.
  936.  
  937.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혜’가 맞다면······.
  938.  
  939. [등장인물 ‘이지혜’가 성흔 ‘칼의 노래 Lv.10’를 발동합니다!]
  940.  
  941. ······기어코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942.  
  943. 그러면 이쪽에도 생각은 있다.
  944.  
  945.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강하게 움켜쥐며 성흔을 발동했다.
  946.  
  947. [성흔, ‘칼의 노래 Lv.5’를 발동합니다!]
  948.  
  949. 내 칼날에서 솟아난 오색의 빛을 확인한 이지혜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950.  
  951.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952.  
  953. 어차피 이 ‘성흔’은 확률 싸움.
  954.  
  955. 어디, 누가 더 운이 좋은지 보자고.
  956.  
  957. 선수는 이지혜였다.
  958.  
  959. 허공에 떠오른 문자열이 움직이며 충무공의 글귀가 흘러나왔다.
  960.  
  961. 「초 10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962.  
  963. 빙고.
  964.  
  965. 이지혜의 안색이 구겨지는 것이 보인다.
  966.  
  967. ‘칼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충무공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킬.
  968.  
  969. 재수가 없으면, 아무 효과도 발동되지 않는다.
  970.  
  971.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972.  
  973. 「28일. 맑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974.  
  975. 내 칼날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976.  
  977. 눈이 휘둥그레진 이지혜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978.  
  979. [성좌, ‘해상전신’이 경악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980.  
  981. 자신의 옷깃에 붙은 불을 꺼뜨린 이지혜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982.  
  983. “너 뭐야! 어떻게 내 배후성의 성흔을 쓰는 거지?”
  984.  
  985. “궁금하면 대화를 하자고.”
  986.  
  987. “팔다리 정도는 잘려야 똑바로 대답을 할 모양이네.”
  988.  
  989. 내 공격이 성질을 돋운 모양인지, 이지혜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990.  
  991. “어떤 배후성의 잡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믿고 나대다간 큰 코 다칠 거야.”
  992.  
  993. 이지혜가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을 뽑았다.
  994.  
  995. 놀랍게도, 나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996.  
  997.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998.  
  999. 지금껏 내가 읽었던 그 어떤 회차에서도, 이지혜가 저 ‘사인참사검’을 손에 쥔 기억은 없었다.
  1000.  
  1001. “북두성군이여! 힘을 주소서!”
  1002.  
  1003. 이지혜의 외침에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빛났다.
  1004.  
  1005. 북두성군은 원래 총 일곱 명. 하지만 후반 시나리오로 들어서며 몇 명이 죽은 탓인지 빛나는 별은 네 개뿐이었다.
  1006.  
  1007. 기이이이잉!
  1008.  
  1009. 눈부신 빛을 쏟아내는 사인참사검이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1010.  
  1011. 이지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뻔했다.
  1012.  
  1013. 사인참사검은 성좌와 화신체의 링크를 베어, 아주 잠깐 그 연을 끊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1014.  
  1015. 그런데 나를 본 이지혜의 표정이 괴이했다.
  1016.  
  1017. “너······ 링크가 없어?”
  1018.  
  1019. 당연히 없지.
  1020.  
  1021. 나는 지금 화신체와 본체가 하나인 상태다.
  1022.  
  1023.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1024.  
  1025. 경악한 이지혜가 한 걸음을 물러났다.
  1026.  
  1027.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1028.  
  1029. 나는 품속에서 이지혜의 손에 쥐어진 것과 똑같은 검을 꺼냈다.
  1030.  
  1031. 기이이이잉!
  1032.  
  1033.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1034.  
  1035. 나는 눈부신 광휘를 뽐내는 [사인참사검]을 굳게 쥔 채 유중혁의 어깨에서 도약했다. 방심한 이지혜가 눈을 크게 뜬 순간, [바람의 길]의 궤적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1036.  
  1037. 츠츠츠츠츠츳!
  1038.  
  1039. 터지는 스파크의 폭음 속에 이지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1040.  
  1041. “아아아악!”
  1042.  
  1043. 그녀를 수호하던 해상전신의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1044.  
  1045. 나는 이를 악문 채 물러섰다.
  1046.  
  1047.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분노를 토합니다!]
  1048.  
  1049. ······얕았다.
  1050.  
  1051. 잠깐이나마 ‘해상전신’과의 링크를 끊어 이지혜를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았다.
  1052.  
  1053. 하얗게 탈색된 이지혜의 눈동자.
  1054.  
  1055. 95번 시나리오에 이르러, 설화급 성좌에 오른 충무공이 내 눈앞에 현신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의 물가를 확인했다.
  1056.  
  1057. 만약 여기서 ‘유령 함대’의 본선이 소환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1058.  
  1059. 콰콰콰콰콰!
  1060.  
  1061. 청계천의 지류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스파크와 함께 유령함대의 환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1062.  
  1063. 빌어먹을.
  1064.  
  1065. 나는 반사적으로 뒤쪽의 페트병, 정확히는 그 안에 꽂혀 있던 꽃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1066.  
  1067. 대천사의 힘을 빌려야 하나?
  1068.  
  1069. 그녀들이 힘을 빌려줄기는 할까?
  1070.  
  1071. 눈앞의 이지혜는, 적어도 ‘악’은 아닐텐데.
  1072.  
  1073. “충무공. 그만 멈추십시오.”
  1074.  
  1075. 진중한 사내의 목소리.
  1076.  
  1077.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곰 같은 사내의 손이 이지혜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1078.  
  1079. [성좌, ‘해상전신’이 노여워합니다!]
  1080.  
  1081. [성좌, ‘강철의 주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1082.  
  1083. 성좌들끼리의 으르렁거리는 기싸움.
  1084.  
  1085.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충무공이었다.
  1086.  
  1087. 유령함대의 환영이 하나둘 사라지자, 힘이 풀린 이지혜가 바닥에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런 이지혜의 앞으로 사내가 나섰다.
  1088.  
  1089. “그쪽 분도 거기까지 하시죠.”
  1090.  
  1091. 나는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1092.  
  1093. 정말 오늘은 몇 번이나 놀라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1094.  
  1095. “무슨 짓이야, 현성 아저씨! 저 자식 유중혁 편이라고!”
  1096.  
  1097. “아직 제대로 알아본 게 아니잖아.”
  1098.  
  1099. 25번 시나리오든, 95번 시나리오든.
  1100.  
  1101. 3회차든, 1863회차든······.
  1102.  
  1103. 이현성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이현성이었다.
  1104.  
  1105.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1106.  
  1107.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1108.  
  1109. “······김독자입니다.”
  1110.  
  1111.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현성의 이마에도 굵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1112.  
  1113. 꽉 짜인 강철 같은 근육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흔이 있었다.
  1114.  
  1115.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1116.  
  1117.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이현성 또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1118.  
  1119.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으니까.
  1120.  
  1121. 이현성이 말했다.
  1122.  
  1123. “김독자 씨. 우리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기 있는 ‘유중혁’이 필요할 뿐입니다.”
  1124.  
  1125. 사람 좋은 미소였지만, 나는 미소의 이면에 깔린 침착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1126.  
  1127. 이현성 역시 아흔 네 개나 되는 시나리오를 헤쳐온 것은 마찬가지. 내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한다면, 이현성은 이지혜보다 더 철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1128.  
  1129. 나는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1130.  
  1131. “왜 유중혁이 필요한 겁니까?”
  1132.  
  1133.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열쇠를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1134.  
  1135. 95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는 이현성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136.  
  1137.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1138.  
  1139. “당신들 그룹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1140.  
  1141. “예?”
  1142.  
  1143. “95번 시나리오까지 왔다면, 당신들도 그룹이 있을 텐데요.”
  1144.  
  1145. “아, 그룹이라면 저랑 지혜가 전부······.”
  1146.  
  1147.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한다면, 앞으로 당신의 말은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1148.  
  1149. 이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1150.  
  1151.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1152.  
  1153. “리더는 누굽니까? 이현성 씨 당신인가요?”
  1154.  
  1155. 이현성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1156.  
  1157. 역시, 몇 회차가 지나든 감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하지 못한 사내다.
  1158.  
  1159. “그건······.”
  1160.  
  1161. 흐려지는 말 꼬리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1162.  
  1163. 이현성과 이지혜는 그룹이 있고, 리더는 그들이 아니다.
  1164.  
  1165.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가 아니다.
  1166.  
  1167. 확실한 가설이 서자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1168.  
  1169.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 될 것 같았다.
  1170.  
  1171. 유중혁에 대한 내 이해도가 이상하게 낮았던 이유도.
  1172.  
  1173. 죽었어야 할 이지혜와 이현성이 살아 있었던 이유도.
  1174.  
  1175.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
  1176.  
  1177. 원작에서는 활약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이 ‘회차’에 있는 것이다.
  1178.  
  1179. “유중혁을 원한다면, 나를 당신들의 리더에게 안내해주십시오.”
  1180.  
  1181. 그러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1182.  
  1183.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과 유중혁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1184.  
  1185.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야 뭐 보다시피 약골이고, 유중혁은······ 지금이라면 안전합니다. 제 말을 꽤 잘 듣거든요.”
  1186.  
  1187. “뭔 개수작이야! 저 자식이 누구 말을 듣는다고······!”
  1188.  
  1189. 유중혁에 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지혜가 악을 썼다.
  1190.  
  1191. 이현성 역시 불신 가득한 눈빛이었다.
  1192.  
  1193. “김독자 씨, 당신은 유중혁의 동료입니까?”
  1194.  
  1195. ······동료라.
  1196.  
  1197. “그렇습니다.”
  1198.  
  1199. “······솔직히 믿을 수 없군요. 유중혁에겐 어떤 동료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1200.  
  1201. “증거를 보여드리죠. 유중혁.”
  1202.  
  1203.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1204.  
  1205. “검을 집어 넣어.”
  1206.  
  1207. 유중혁이 거대한 [진천패도]를 고분고분 집어 넣었다.
  1208.  
  1209.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떨며 외쳤다.
  1210.  
  1211. “겨우 그 정도로······!”
  1212.  
  1213. “유중혁, 이리와.”
  1214.  
  1215. 유중혁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질겁한 이지혜가 이현성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1216.  
  1217. “현성 아저씨! 조심해! 저러다가 분명 공격할 거―”
  1218.  
  1219. “유중혁, 앉아.”
  1220.  
  1221. 유중혁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1222.  
  1223. 이지혜와 이현성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1224.  
  1225. 하긴, 놀랍기도 할 것이다.
  1226.  
  1227. 그들이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제 처맞은 게 꽤 아팠으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1228.  
  1229. 무슨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1230.  
  1231. “또 뭐 시켜볼 일 있으십니까? 흙이라도 먹여 볼까요?”
  1232.  
  1233.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손을 번쩍 든 이지혜가 뭐라 외치려는 순간, 이현성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1234.  
  1235. “······저를 따라오시죠.”
  1236.  
  1237. *
  1238.  
  1239. 본거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240.  
  1241. 다만, 도중에 나타난 ‘이름 없는 것들’로 인해 시간은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폐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계의 신격들을 피해다닌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1242.  
  1243. 멀리서, 그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1244.  
  1245. “저곳입니다.”
  1246.  
  1247.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와 똑같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내와 마주쳤다.
  1248.  
  1249.  
  1250. # 290
  1251.  
  1252. Episode 54. 마왕 살해자 (6)
  1253.  
  1254.  
  1255. “여, 이지혜.”
  1256.  
  1257. 전형적인 양아치 말투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 녀석의 어깨에서 흔들리는 백색의 코트는, 틀림없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1258.  
  1259. 그러니까, 내 것과 같은 코트였다.
  1260.  
  1261.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1262.  
  1263.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1264.  
  1265.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1266.  
  1267. ······설마 저 녀석이 리더라고?
  1268.  
  1269. 밀려오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반사적으로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지만, 바보가 된 유중혁이 내 충격을 공유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1270.  
  1271. 나는 다시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둘둘 붕대를 감고, 등은 반쯤 문에 기댄 채 새하얀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큭큭 웃는 사내.
  1272.  
  1273. 「김 독자는 멍청 이이 다」
  1274.  
  1275.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리더일 리가 없다.
  1276.  
  1277. 애초에 저 ‘코트’는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못 구할 것도 없고.
  1278.  
  1279.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1280.  
  1281. “김남운.”
  1282.  
  1283. “어.”
  1284.  
  1285. “나 아는 척하지 말랬지. 들어가야 되니까 저리 꺼져.”
  1286.  
  1287. “어, 어······.”
  1288.  
  1289. 이지혜의 말에 김남운이 머쓱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런 김남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1290.  
  1291. “그리고 사부 코트 그만 훔쳐 입어. 진짜 죽여버린다 너.”
  1292.  
  1293. “······너도 한 번 입어 볼래?”
  1294.  
  1295. 이지혜가 문을 쾅 박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지혜의 모습에 압도된 듯, 눈이 풀린 김남운이 이지혜의 뒷모습을 좇았다.
  1296.  
  1297.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얘들 관계가 그랬지.
  1298.  
  1299. 새삼 여러 가지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1300.  
  1301. 이지혜에 이현성, 거기다 김남운이라······.
  1302.  
  1303.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1304.  
  1305. 이 회차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306.  
  1307.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김남운이 나를 보며 말했다.
  1308.  
  1309. “뭐야 넌? ······그 코트 내 거랑 같은데?”
  1310.  
  1311.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1312.  
  1313.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1314.  
  1315. 지하철에서 머리가 터져 죽었던 김남운.
  1316.  
  1317. 만약, 그때의 김남운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1318.  
  1319. “어이 군인, 이 인간은 뭔······ 우왁 씨바! 유중혁이잖아!”
  1320.  
  1321. 내 뒤쪽에 있던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1322.  
  1323.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이빨을 드러냅니다!]
  1324.  
  1325. 망상악귀 김남운.
  1326.  
  1327. 이번 회차에서, 심연의 흑염룡은 자신의 본래 화신을 찾아갔다.
  1328.  
  1329. 자신을 향한 적의에 유중혁이 고개를 들자, 김남운이 움찔하며 말했다.
  1330.  
  1331. “존나 멋있는 건 여전하군······ 싸우러 온 거냐, 유중혁?”
  1332.  
  1333. 감춘 한쪽 손을 바들바들 떠는 김남운은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1334.  
  1335. 흉악해지려는 기류를 막아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1336.  
  1337. “남운아, 이분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1338.  
  1339. “뭐? 그럼 뭐하러 온 건데?”
  1340.  
  1341. “그건······.”
  1342.  
  1343.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건물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1344.  
  1345. “잠깐만요! 김독자 씨!”
  1346.  
  1347. 뒤쪽에서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얼른 이 건물의 내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1348.  
  1349. 내 생각이 맞다면······.
  1350.  
  1351. 이 건물은, 초반 회차의 유중혁이 구상했던 바로 그 ‘건물’이다.
  1352.  
  1353.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탁 트인 거대한 실내였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자재 창고만한 크기. 옆에 있던 커다란 문에서 환자들을 실은 침대차가 우르르 밀려왔다. 하나 같이 응급 환자들이었다.
  1354.  
  1355. “거기 놀지 말고 환자들 이쪽으로 옮기세요!”
  1356.  
  1357. 나는 얼떨결에 환자들이 실린 침대를 함께 밀었다.
  1358.  
  1359. 하얀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1360.  
  1361. “설화 팩! 설화 팩 가져와!”
  1362.  
  1363. “이 환자 알러지 있으니까 동물 관련된 설화는 안돼!”
  1364.  
  1365. 모두 훈련된 의료 스킬을 가진 자들이었다.
  1366.  
  1367. 그들을 이끄는 것은 작은 무테 안경을 쓴 여인이었다.
  1368.  
  1369. 여인은 배와 허벅지가 꿰뚫린 환자의 상세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1370.  
  1371. “이 환자 어디서 다친 거죠?”
  1372.  
  1373.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1374.  
  1375. 회차에 따라 ‘독희’ 또는 ‘의선’으로 불리는 여인.
  1376.  
  1377. 어떤 회차에서는 십악이지만, 어떤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연인이었던 사람.
  1378.  
  1379. 내가 하얀 코트를 입고 있어서 같은 의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1380.  
  1381. 나는 환자의 상세를 보며 대답했다.
  1382.  
  1383. “······아마 ‘이름 없는 것들’에게 당한 것 같군요. 상처 부위의 오염도로 보아 촉수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1384.  
  1385. “확실히······ 음?”
  1386.  
  1387. 나를 보던 이설화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1388.  
  1389. [등장인물 ‘이설화’가 당신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1390.  
  1391. “······당신 누구죠?”
  1392.  
  1393. 누구라고 해야 할까.
  1394.  
  1395. 아니, 누구라고 말하면 그녀가 알아 들을까.
  1396.  
  1397. “거기 아저씨, 뭐해? 빨리 따라와! 유중혁 잘 데리고!”
  1398.  
  1399. 멍한 얼굴의 이설화를 남겨두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이지혜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1400.  
  1401. 건물의 내벽은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건물 전체의 구조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1402.  
  1403. 1층의 응급실 정문으로 끊임없이 환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1404.  
  1405. 이계의 신격, 또는 다른 성좌들과 맞서다 중상을 입은 화신들.
  1406.  
  1407.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408.  
  1409.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저런 비극은 일상이 된다.
  1410.  
  1411. 나는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1412.  
  1413. 건물의 외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이 보였다.
  1414.  
  1415. 연기를 내뿜는 성운들의 설화병기(說話兵器)들과 잠든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위쪽에는, 창공을 덮은 새카만 수정구가 있었다.
  1416.  
  1417. [묵시룡의 봉인구(封印球)]
  1418.  
  1419. 저 봉인구가 바로, 이 95번 시나리오의 핵심이자 목표였다.
  1420.  
  1421. 흩어진 다섯 개의 열쇠를 획득해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1422.  
  1423. ‘묵시룡’이 풀려나면 이 지구에는 멸망이 찾아오고, 시나리오를 완수한 이들은 자동으로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게 된다.
  1424.  
  1425. 그런데 이 1863회차는 내가 아는 1863회차와는 너무 달랐다.
  1426.  
  1427. ―강서 쪽에 1급 괴수종이 등장했습니다!
  1428.  
  1429. 건물을 울리는 전파음.
  1430.  
  1431. 계단을 올라가자, 환한 패널로 빛나는 상황실의 정경이 얼핏 보였다.
  1432.  
  1433. ―서초에 파견 중인 인원들은 빠르게 철수하기 바랍니다! 염화(炎火)의 대천사가 등장했습니다!
  1434.  
  1435. ―노원 쪽 성검 ‘아스칼론’ 발견! 현재 ‘이름 없는 것들’ 십여 개체와 교전 중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1436.  
  1437. 무수한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인물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파마 머리.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헤드셋을 머리에 쓴 소년.
  1438.  
  1439. ······아니, 더 이상 소년이 아니구나.
  1440.  
  1441. 나는 어쩐지 먹먹한 심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1442.  
  1443.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1444.  
  1445. 내가 살았던 회차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그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1446.  
  1447. 빠르게 전력 계산을 끝낸 한동훈의 손끝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1448.  
  1449. ―노원 쪽은 민지원 씨의 화랑대와 차상경 씨의 미륵불(彌勒佛)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1450.  
  1451. ―올림포스 쪽의 화신들이 선점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1452.  
  1453. ―성검 ‘아스칼론’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1454.  
  1455. 메시지로 오가는 익숙한 이름들.
  1456.  
  1457. 민지원과 차상경.
  1458.  
  1459. 각각 ‘매금지존’과 ‘외눈 미륵’을 성좌로 두고 있던 그들도, 95번 시나리오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1460.  
  1461. “뭘 그렇게 훔쳐 봐?”
  1462.  
  1463. 곁에서 나를 감시하던 이지혜가 쿡 찌르듯 말했다.
  1464.  
  1465.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1466.  
  1467. “······생각했던 것보다 놀라워서.”
  1468.  
  1469.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코를 쓱 문질렀다.
  1470.  
  1471. “뭐, 우리 사부가 좀 대단하긴 하지. 모두 사부 덕분이야. 그 사람이 혼자 해낸 거니까.”
  1472.  
  1473. 이지혜, 이현성, 이설화, 민지원, 차상경, 한동훈······ 거기다 저 ‘김남운’까지.
  1474.  
  1475. 원작의 1863회차에서는 죽어야 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1476.  
  1477. 뿐만 아니라 무장의 수준도 높았고, 세력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1478.  
  1479.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았던 3회차보다 높은 수준······ 아니, 내가 줄곧 바라던 정도의 수준이었다.
  1480.  
  1481.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1482.  
  1483.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1863회차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1484.  
  1485. 일어났어야 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류는 투쟁하고 있었다.
  1486.  
  1487. 유중혁은, 아직 그 어떤 동료도 잃지 않았다.
  1488.  
  1489. 어쩌면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아도, 여기서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1490.  
  1491. 이지혜가 말했다.
  1492.  
  1493. “우린 사부와 함께 시나리오의 끝까지 갈 거야.”
  1494.  
  1495.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고 섬뜩한 감각이 가슴 어귀를 스쳤다.
  1496.  
  1497. 분명 저 풍경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1498.  
  1499. 단 한 가지를 빼면 말이다.
  1500.  
  1501. 돌아 보자,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1502.  
  1503. 나는 유중혁이 저 광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1504.  
  1505. 슬퍼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1506.  
  1507.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1508.  
  1509. “너흰 왜 유중혁을 싫어하는 거지?”
  1510.  
  1511. “그 놈은 나쁜 놈이니까.”
  1512.  
  1513. “왜 나쁜 놈인데?”
  1514.  
  1515.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1516.  
  1517. “몰라.”
  1518.  
  1519. “사람도 함부로 죽이고, 자기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으니까.”
  1520.  
  1521. 모두 맞는 말이었다.
  1522.  
  1523. 나는 물었다.
  1524.  
  1525. “그게 전부야?”
  1526.  
  1527.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1528.  
  1529. 맞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1530.  
  1531. 하지만······.
  1532.  
  1533. 「김독자는 생각했다. ‘너는 왜 유중혁이 그래야 했는지 모르잖아.’」
  1534.  
  1535.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1536.  
  1537. 이것은 이지혜의 잘못이 아니었다.
  1538.  
  1539.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1540.  
  1541. 오히려 모두가 너무나 잘 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났다.
  1542.  
  1543. “네가 말하는 ‘사부’는 대체 누구지?”
  1544.  
  1545. “건물의 최상층에 있어. 저기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
  1546.  
  1547.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1548.  
  1549. 유중혁이 나를 따라오자, 이지혜가 칼을 빼들며 말했다.
  1550.  
  1551. “유중혁은 여기 두고 가.”
  1552.  
  1553. 예상했던 일이었다.
  1554.  
  1555. 나는 텅 빈 표정의 유중혁과 이지혜를 번갈아 보았다.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1556.  
  1557.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유중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1558.  
  1559. “유중혁, 행복한 생각하면서 기다려. 알겠지?”
  1560.  
  1561. 유중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562.  
  1563.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네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장 불행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1564.  
  1565. “너 지금 뭐하는 거야?”
  1566.  
  1567.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느꼈는지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1568.  
  1569. 나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570.  
  1571. “야! 대답하라니까! 방금 유중혁한테 한 말 뭔 뜻인데!”
  1572.  
  1573. 이지혜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는 잘 알겠다.
  1574.  
  1575. 그리고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소중함은 곧 약점이다.
  1576.  
  1577. “궁금하면 걔 한 번 건드려 보든가. 나라면 안 그러겠지만.”
  1578.  
  1579.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1580.  
  1581. 3, 4, 5······.
  1582.  
  1583. 살짝 무거워지는 중력과 함께, 건물의 층수가 바뀌고 있었다.
  1584.  
  1585. 숫자가 바뀌는 만큼 내 머릿속도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1586.  
  1587. 누굴까.
  1588.  
  1589. 가능성이 있는 후보는 몇 있었다.
  1590.  
  1591. 앞으로의 미래 정보를 읽을 수 있기에, 미래 개변이 가능한 이들.
  1592.  
  1593. 안나 크로프트나, 특정 성운의 소수 성좌들.
  1594.  
  1595. 하지만 그들 중 누구라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596.  
  1597.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원작에 속한 존재.
  1598.  
  1599.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작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1600.  
  1601. 9, 10, 11······.
  1602.  
  1603.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1604.  
  1605. 나 말고, 원작 밖의 존재가 또 있는 것이다.
  1606.  
  1607.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상한 점은 있었다.
  1608.  
  1609. 설령 원작 밖의 존재가 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것도 나와 닮은 방식으로······ 순간 발끝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1610.  
  1611. ······설마?
  1612.  
  1613. 다른 회차에도 유중혁은 있었다.
  1614.  
  1615.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1616.  
  1617. 띵.
  1618.  
  1619. 엘리베이터의 알람음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1620.  
  1621. ‘멸살법’의 수정본에 따르면, 유중혁의 다른 회차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몇 회차를 거쳐도, ‘나’는 없었다. 있었더라면, 수정본의 이야기 자체가 달라졌을테니까.
  1622.  
  1623. 그러니 이 너머의 존재는 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1624.  
  1625.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남겼던 말이었다.
  1626.  
  1627.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1628.  
  1629. ─문이 열립니다.
  1630.  
  1631. 문이 열리자, 호텔의 스위트 룸을 연상시키는 방이 나타났다.
  1632.  
  1633. 불이 꺼진 어둑한 방이었다.
  1634.  
  1635.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 새카만 의자 위에 앉은 인형(人形)이 보였다.
  1636.  
  1637. “흠······ 당신이 이현성이 말한 그 사람이구나.”
  1638.  
  1639.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은은한 불이 켜졌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이었다. 새하얀 광택을 자랑하는 검. 나는 그 검을 잘 알고 있었다.
  1640.  
  1641.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으니까.
  1642.  
  1643. 내가 물끄러미 그 검을 보고 있자, 의자에 앉은 인물이 말했다.
  1644.  
  1645. “좋은 검이지. 이름 그대로, 진짜 안 부러지거든.”
  1646.  
  1647. “알아. 나도 쓰고 있으니까.”
  1648.  
  1649. “그래?”
  1650.  
  1651. 의자의 인물은 검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1652.  
  1653. 나는 반가면의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1654.  
  1655. 시나리오의 풍파를 겪으며 조금 변하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1656.  
  1657.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1658.  
  1659. 본래라면 먹히지 않아야 할 스킬이었다.
  1660.  
  1661. 이 녀석에겐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1662.  
  1663.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사용해 본 것은 왜일까.
  1664.  
  1665.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1666.  
  1667. 어쩌면, 발동하지 않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1668.  
  1669. 눈앞에 줄줄이 떠오르는 정보들을 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1670.  
  1671.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1672.  
  1673. 지금 내가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1674.  
  1675. “좋아, 너는 어디서 나타난 누구지? 나는 김독자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1676.  
  1677. 처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1678.  
  1679.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멸살법’의 존재를 아는 여자.
  1680.  
  1681. 애초에 이만한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1682.  
  1683. ······하지만 어떻게?
  1684.  
  1685.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가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1686.  
  1687. 이 여자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그녀가 아니다.
  1688.  
  1689. 희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단발을 보며, 나는 물었다.
  1690.  
  1691. “너는 한수영의 ‘아바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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