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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54. 마왕 살해자 (3)
- [대천사!]
- 마왕 오세는 경악을 넘어 혼절할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 그들에게 있어, <에덴>의 대천사들은 최악의 상성을 가지는 존재.
- 무려 두 명의 대천사의 동시 현현했으니 놀라 나자빠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어째서 대천사가? <에덴>의 천사들은 ‘그 일’ 이후 대부분 죽었을 텐데······!]
- 그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이곳은 1863회차의 세계.
- 가브리엘과 요피엘은 아직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것이다.
- [■댕, 그게 무슨 개소리야?]
-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우리엘의 친구 답게 걸쭉한 욕설. 나는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를 만류했다.
- “가브리엘. 저놈들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습니다. 빨리 처리하죠!”
- [······보채지 마. 건방진 인간 녀석.]
- 태클을 걸 곳이 한 군데 있었지만, 나는 일단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 내 전신으로 가브리엘의 힘이 강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대천사 가브리엘.]
- 쿠구구구구!
- 머리털이 곤두서는 격의 팽창이 느껴졌다.
- 드디어, 가브리엘의 주력 설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 물론 저 ‘좋은 소식’은, 어디까지나 가브리엘이 같은 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
- [겁먹지 마라! 대천사라 봐야 본거지를 잃은 잔당에 불과하다!]
- 마왕 오세가 성좌들을 독려했다.
- 하지만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 치고, 오세의 신형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중이었다.
- 기합을 터뜨린 성좌들이 제각기 성유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 [이것은 정해진 종말에 관한 것.]
- 가브리엘의 설화, 「종말의 계시」가 시작되었다.
- 「뿔이 두 개 달린 숫양을 네가 보았노니, 두 눈 사이에 있던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 내 몸을 감싼 휘광 속에 황금빛 문자열들이 흘렀다.
- 그 문자열들을 따라 내 몸의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 번식기의 숫양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렀다.
- 마왕의 뿔이 자랐던 자리에 새하얀 뿔이 차례로 솟아 올랐다.
- 츠츳, 츠츠츠츠츳!
- [으, 으어어어어······.]
- 그 뿔을 본 것만으로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겁에 질리고 있었다. 몇몇 성좌들은 무력한 화신들처럼 병장기를 떨어트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으아아아아아!]
- 마치,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듯한 부나방처럼.
- 「그는 제 힘으로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제 힘으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 내 등 뒤로 솟구친 여섯 장의 날개가 화려한 섬광을 내뿜자, 설화급 성좌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 쿠과과과과과!
- 그러나 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 내 눈앞에 소환된 단단한 금속이 모든 종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 마치 거신족이나 쓸 법한 무기.
- 하얗게 빛나는 뱀이 자루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그 뱀의 아가리에는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눈부신 창극이 꽂혀 있었다.
-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의 신창(神槍), ‘편애(偏愛)의 천칭(天秤)’이었다.
- 나는 그 창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 일순, 세계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근방의 모든 존재가 저울대에 오르고 있었다. 한쪽은 이쪽 저울대에, 다른 한쪽은 저쪽 저울대에.
-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웃고 있었다.
- 그녀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짚었다.
- 「그는 끔찍스러운 파괴를 자행하면서도, 힘센 이들과 거룩한 백성들을 파멸시키리라.」
- 쿠오오오오오오!
- 창은 눈부신 빛살이 되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빛살을 내던졌다.
- 쿠콰콰콰콰콰콰!
- 그리고 세상의 일부가 지워졌다.
- 하늘에서 나를 공격하던 성좌도, 측면을 노리고 달려들던 녀석도,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녀석도.
-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처럼 소멸했다.
- 남은 것은, 이쪽 저울대 위의 생명체들 뿐.
- 이것이 대천사의 진짜 힘이었다.
- 가브리엘이 영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한 놈 놓쳤어. 꽃잎 한 장으론 한계가 있네.]
- 실제로, 미리 사태를 예견한 마왕 오세는 이미 점이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하위격의 마왕으로는 홀로 대천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그저 두고 보고 있을 요피엘이 아니었다.
- 콰아아아아아아!
- 내 등 뒤에서 생성된 붉은 안개가 창공을 덮으며 오세를 좇았다.
- 그르르르르르.
- 하늘 전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붉은 안개였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작은 병정의 대군(大軍)이었다.
- 일대의 하늘을 붉게 물들인 <에덴>의 503부대.
-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을 따르는 핏빛 정예병들이었다.
- [끄아아아아아악!]
- 피라냐들처럼 달려든 핏빛 안개 사이로 붉은 가시가 솟았다.
-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천국의 병정들이 피의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왕의 화신체가 부스러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가브리엘이 내 발을 움직여 마왕의 파편을 짓밟았다.
- [별 것도 아니네.]
-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출현에 크게 당황합니다.]
- [살아남은 마왕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 [일부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비정상적인 개입에 비난을······.]
- [닥쳐 ■■들아.]
- 등 뒤로 뻗어나왔던 여섯 장의 날개가 무수한 깃털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대천사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 속이 살짝 메슥거렸지만, 생각만큼 몸의 부담은 심하지 않았다. 95번 시나리오에 허락된 개연성이 그만큼 풍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와 맺은 ‘이계의 언약’ 때문일 수도 있었다.
- 어느 쪽이든 내겐 좋은 일이었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런데 내게 현현한 요피엘이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 요피엘이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 [저것도 죽여라.]
- 그곳에,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는 유중혁이 있었다.
-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 [절대악(絕對惡)이다.]
- 오른쪽 눈동자가 따끔, 하는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 [성흔, ‘죄업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 죄업의 눈동자. 대천사 요피엘의 성흔이었다.
- [대상의 ‘죄업’ 수치를 측정합니다.]
- 세상의 모든 존재에 쌓인 ‘죄업’을 보는 눈.
- 방금 전까지 유중혁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카만 심연이 드리워져 있었다.
- [대상의 ‘죄업’을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그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득해질 것만 같은, 그런 암흑이었다. 마왕 오세도, 절대악 계통에 속한 다른 성좌들도 그런 죄업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 요피엘이 말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죄업이다. 저렇게 밀도 깊은 죄업은,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죄업을 합쳐도 저 자가 가진 죄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 나도 안다.
- 유중혁은 많은 죄를 저질렀다.
- 많은 사람을 죽였고.
- 많은 세계를 멸망시켰다.
- 셀 수조차 없는 원혼들이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 [저 자는 죽어야 한다.]
- 하지만.
- “안 됩니다.”
- 녀석이, 구한 것도 있었다.
- “죽일 수 없습니다.”
- 녀석이 망친 모든 것에 비하면 티끌일지 몰라도.
- 분명, 구해낸 것이 있었다.
- 츠츠츠츠츳······.
-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 그 찌릿찌릿한 시선 속에, 나는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지금 죽여서는 안 됩니다.”
- [······‘구원의 마왕’. 너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서기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 “기왕 살려주신 거, 한 사람 더 살려주시죠.”
- 드드드드드······.
- 돌아보자, 유중혁의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 녀석의 의식이 어떻게든 수면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 그런 유중혁을 향해 요피엘이 말했다.
- [그가 깨어난다면 나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 요피엘이 다시 자신의 안개를 일으키려는 기색이 보였다.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뿐인 것 같다.
- “죽이지 않고도,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 요피엘의 붉은 안개가 멈칫했다.
- “그가 본래의 의식을 되찾지 않도록 하고, 의식을 잃은 그를 조종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 [저 자를 속박할 방법이 있단 말이냐? 그대는 대체 무슨 흉계를······.]
- 요피엘이 다시 한 번 격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브리엘이 나섰다.
- [요피엘, 내버려둬 봐. 어차피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
- 요피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 [······만약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면, 바로 놈을 즉살할 것이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곧장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 “야.”
- 드드드드드······.
- 녀석의 몸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 원작에서 몇 번인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 아마 몇 분 후면 유중혁의 의식은 깨어나겠지.
-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유중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 녀석이 내게 그렇게 했듯이.
- 나보다 체구가 큰 녀석이었기 때문에 들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 “놔, 라.”
- 이제 거의 수면 근처까지 올라온 유중혁의 의식이 말을 시작했다.
- 나를 붙잡으려는 듯, 살기로 가득 찬 녀석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나는 유중혁이 어떻게 하면 ‘회귀 우울증’에서 깨어날지 알고 있다.
-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녀석이 어떻게 하면 저 우울의 심해 아래로 더 깊이 가라 앉을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 유중혁의 손끝을 보던 나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 유중혁의 눈빛이 멍해지더니, 움직이던 손끝이 멈췄다.
- 「“사부한테 다음 회차라는 게 없다면 좋을텐데.”」
- “생각해 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진다.
-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 「“중혁 씨는 살아 있어서 행복해?”」
-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유중혁의 표정이 무너져 간다.
-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 “383회차. 마침내 7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을 때. 정말 운 좋게도 그 회차에선 아무도 죽지 않았지.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그때 이현성이 말했었지.”
- 「“중혁 씨, 저는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 녀석의 머릿 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 “그리고 498회차······.”
- 유중혁의 손바닥이 자신의 귀를 막기 위해 움직인다.
- 평소의 유중혁이었다면 이런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 나는 녀석의 양손을 붙잡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 “그런 일이 열 번.”
-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 “스무 번.”
-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유중혁이 겪는 기분을 나 역시 고스란히 느낀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었다.
- 한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어둠이, 자아를 탐욕스레 삼키는 것이 보였다.
- “백 번.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어.”
- 그 모든 세계는 멸망했다.
- 모든 행복했던 기억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 무수한 회귀 속에 행복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 그가 지켜냈던 모든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 “유중혁.”
- 유중혁의 자아가 까마득한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영영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 망연한 얼굴의 유중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 걱정 마라 유중혁.
- 남은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 너는, 그만 쉬어라.
-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 공허한 유중혁의 눈동자가, 주인을 잃은 기억을 토하고 있었다.
-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죽고 싶다.」
-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 하늘에서 몇 방울인가 비가 떨어졌다. 마왕과 성좌들의 혈향이 묻은, 검은 비였다.
- 비를 맞은 유중혁의 얼굴에도 새카만 물이 번져 흘렀다. 천천히 낮아진 유중혁의 시야가, 이윽고 나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 한 인간의 정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고장난 목소리.
-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유중혁이 더듬거렸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하, 지?”
- 나는 유중혁의 두 팔을 놓으며 말했다.
-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 유중혁이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하지만 나는 녀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 흐릿한 하늘 위로, 방금 업데이트가 완료된 ‘서브 시나리오’ 창이 띄워져 있었다.
- +
-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회귀의 끝 >
- 클리어 조건 : 유중혁을 죽이시오.
- +
- 나는 바닥에 꽂힌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288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4)
- 1863회차에 들어온 지도 하루가 지났다.
- 어젯밤부터 내리던 새카만 비에 광화문 일대가 푹 젖어 있었다.
- 그르르르르······.
- 비가 내린 직후부터, 폐건물 사이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괴물들도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 처음 내가 보았던 코끼리를 닮은 녀석도 있었고, 거대한 문어를 연상시키는 녀석도 있었다. 제일 무시무시했던 것은 대형 건물만한 크기의 아기였다.
- 갸르르르르······.
- ‘이계의 신격’들은 종류가 많지만, 모두가 ‘꿈을 먹는 자’나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처럼 네임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름 없는 것들’이라 불리며, 자아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존재한다.
- 기저귀를 찬 아기가 도시를 불도저처럼 밀어대는 것을 보며, 나는 숨을 죽인 채 숨어 있었다.
- ······솔직히 기저귀는 저 아기가 아니라 나한테 필요할 것 같았다.
-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힘을 비축하겠다며 대천사들이 잠든 것도 벌써 몇 시간 전.
- 웬만큼 힘을 회복한 것인지, 코트에 꽂혀 있던 흰 백합이 파르르 떨었다.
- 가브리엘이었다.
- “일어나셨습니까?”
-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 “무슨 선택이요?”
- [몰라서 물어?]
-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잖습니까.”
- 멀리서 뭔가가 퍼거걱,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또 뭔가 일이 터졌구나 싶은 순간, 찢겨 나간 코끼리 괴물의 다리가 보였다. 강력한 힘에 의해 찢겨 나간 듯한 흔적. 그 잘린 다리를 질질 끌고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이 시나리오의 진짜 괴물, 유중혁이었다.
- 한숨처럼, 다시 한 번 꽃잎이 흔들렸다.
- [죽일 것처럼 굴더니······ 그럼 칼은 왜 쥐었던 거냐고.]
- “혹시나 자살할 수도 있잖아요. 뭐, 지금 상태로 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 나는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허공에 홰홰 그으며 말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 유중혁을 죽이지 않았다.
- 가브리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우리엘은 이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 “우리엘? 아, 우리엘은 잘 계십니까?”
- [그런 녀석 내가 알 게 뭐야.]
-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 내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또 다른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 까다로운 천사님께서도 깨어나신 모양이었다.
- 요피엘은 일어나마자마 곧장 사나운 투로 물어왔다.
- [그자는 계속 살려두기로 한 건가?]
- 나는 대답 대신 유중혁이 가져온 코끼리 다리를 받아들었다. 살점이 아주 실하게 붙어 있는 다리였다. 분명 설화도 아주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겠지.
- 나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는 유중혁을 잠시 마주보았다. 요피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그대가 받은 시나리오는······.]
- “유중혁을 죽이는 거였지요.”
-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대천사들을 속이기엔 늦었다.
- 내가 본 시나리오 창을, 내게 현현했던 그들 또한 보았을 테니까.
- ―유중혁을 죽이시오.
- 그것이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내린 시나리오였다.
- 나는 녀석을 죽여야만 본래의 ‘3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
- “이미 말씀 드렸지만, 이 시나리오는 있는 그대로 해석해선 곤란합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안한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대천사들은 말이 없었다. 나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 나는 코끼리 다리를 태연히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 “유중혁은 ‘죽음’을 겪을 수 없습니다. 대천사님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 두 천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그게 무슨 뜻이지?]
- “이 녀석은 ‘회귀자’입니다.”
- 만약 초반 시나리오였다면, 방금 내가 말한 정보는 필터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지금쯤 ‘회귀자’에 대한 소문은 꽤나 퍼져서 <에덴>의 고위급 성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테니까.
- 붉은 코스모스 잎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설마?]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는 영원히 생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죽여도 그저 다른 회차로 넘어갈 뿐이니까요.”
-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 “왜 우리엘이 저 같은 존재를 감시하고 있었을까요?”
- 말할 수 없는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 요피엘은 분노를 다스리듯 줄기를 떨며 말했다.
- [그래서······, 이제부터 어쩌겠다는 거지? 저 자를 죽일 수 없다면 원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다.]
-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구워진 고깃덩어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시간이야 많으니까요.”
- 내 태연한 반응에 두 송이의 꽃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혹여나 ‘격’을 발현하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는데, 갑자기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 꾸르르르륵.
- 내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유중혁도 아닌 것 같았다.
- ······그렇다면?
- 고개를 숙이자, 제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두 송이의 꽃이 보였다.
- “······배 고프세요?”
- *
- 쭈우욱.
- [가브리엘, 언제까지 녀석을 방관할 거지?]
- 쭈우욱.
- [방관 안해. 내가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우리엘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죽여버렸을텐데······.]
- 페트병에 꽂힌 가브리엘이 줄기로 물을 쭉 빨아들이며 답했다. 그녀의 곁에는 요피엘의 코스모스가 마찬가지로 물이 담긴 페트병에 꽂혀 있었다.
-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을 향해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물었다.
- [우리엘 녀석, 잘 있을까?]
- [임무에 집중해라, 가브리엘.]
- [아니, 걱정되잖아. 우리엘은 혼자 두면 항상 사고를 친다고.]
- [······그렇군. 너는 사실 우리엘을 좋아하는 건가?]
- [뭔 헛소리야! ······그보다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어? 언제까지 저 녀석들이랑 같이 붙어 있어야 돼?]
- 꽃잎을 파들파들 떠는 가브리엘의 모습에 요피엘이 답했다.
- [방법을 찾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 [왜? 아무리 다른 ‘세계선’이라지만 여기에도 <에덴>은 있을 거 아냐. 이곳의 서기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 [서기관에게서 답신이 없다.]
- [뭐?]
- [서기관뿐만 아니라, <에덴>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된다.]
- <에덴>과 연락이 안 된다······?
- 아무리 세계선이 바뀌었다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 시나리오의 제약 때문에 본래 있던 ‘별자리의 맥락’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
- 답답한 노릇이었다.
- 한숨을 내쉰 가브리엘이 물을 다시 쭉 빨아들이며 말했다.
- [뭐야? 몇 시간 전까지 멱살 잡고 싸우더니······.]
-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 왜인지 그 광경을 보며 가브리엘은 자신과 우리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
- ······전우애인가.
- 아주 잠깐, 가브리엘은 우리엘이 저 녀석들을 왜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
- “흙을 먹어라 유중혁.”
- 유중혁은 말없이 흙을 먹기 시작했다.
-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먹으란다고 진짜 먹으면 어떡해!”
- 시험 삼아 시켜본 건데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
-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하지만 ‘회귀 우울증’이 녀석의 자아를 온전히 집어삼킨 탓에, 당분간 유중혁은 저런 바보 상태일 것이다.
-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나는 어쩐지 측은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평소에도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3회차 그 자식보다 네가 낫다 인마.”
- “······.”
- “······흙 뱉어.”
- 흙을 뱉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내가 아는 또 다른 유중혁을 떠올렸다.
- 그 녀석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다.
- 또 회귀한다고 발광하고 있지 않으면 좋을 텐데.
- 유상아에게 이것저것 맡겨 놨으니, 잘 되길 바랄 뿐이다.
- “이제 저기 누워 좀 쉬어라 유중혁 1863호.”
- 내 말에 유중혁이 폐건물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멀리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 95번 시나리오의 노을도, 여전히 노을이었다.
- 희붐하게 흩어지는 아지랑이를 보며, 기이하게도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끔찍한 시나리오에서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 「김독 자는 유중 혁 을죽 여 야해」
- ······아니까 보채지 좀 마라.
- 다행히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준 시나리오에는 기한이 없었다.
- 문득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미련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만 쉬라니까.”
-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유중혁이 곤히 눈을 감았다.
- 아마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 어쩌면, 지금 저 수면이 유중혁에겐 제대로 된 ‘첫 잠’인지도 모른다.
- 모든 기억에서 해방된, 제대로 된 첫 잠.
- 유중혁이 완전히 잠든 후,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 폰의 바탕 화면에는 늘 그랬듯 ‘멸살법’의 텍본이 있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txt
- ······뭐지?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건 ‘3차 수정본’이었을 텐데?
- 순간 소름이 돋았다.
- 설마 내가 ‘원작’의 회차로 돌아왔기 때문인가?
- 그래서, 수정본이 아니라 원작의 내용으로 텍본이 바뀐 건가?
- 나는 혼란한 마음으로 일단 파일을 열었다.
- 파일은, 내가 알고 있던 ‘멸살법’의 원작 그대로였다.
-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 앞으로의 일들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우선 이 회차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화면을 1863회차로 넘겨, 모든 정보를 꼼꼼히 읽어 나갔다.
- 「54번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을 잃었고」
-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 「67번 시나리오에서 이설화가 사망했으며」
- 잃고, 잃고, 또 잃어갈 뿐인 이야기를.
- 「78번 시나리오에서 이지혜가 죽었다.」
- 이 회차의 유중혁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 사실 이번 회차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 유중혁의 모든 회차는 그가 홀로 남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 마지막까지 와서도, 결국 같은 삶이 되었을 뿐이다.
- “······불쌍한 놈.”
- 나는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모른다.
-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멸살법’이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것.
- ······만약, 내가 3회차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떨까.
- 이곳에 남아서, 마지막 회차의 유중혁을 도와 시나리오를 클리어 한다면.
-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 독 자그 건’」
- 알아.
- 「그 래」
-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놀아나는 일이라는 걸.
- 아마도 ‘은밀한 모략가’는 이것까지 예상하고 내게 시나리오를 준 것일 터다. 시나리오에 제한 시간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 이곳의 유중혁을 죽이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든가.
- 아니면, 이곳의 유중혁과 함께 시나리오의 결(結)을 보라고.
- 정말 ‘이계의 신격’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 우스운 것은 내가 정말로 그 제안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 만약 여기서 ‘결’을 본다면······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결말은 볼 수 없겠지.
- 그렇다고 여기서 놈을 죽인다면,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유중혁을 죽이려면 결국 유중혁의 회귀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놈의 배후성은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알지조차 못하는 존재였다.
-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멸살법’의 스크롤을 내렸다.
-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 [성좌, ‘물병자리의 백합’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 멀리서, 페트병에 꽂힌 두 송이의 꽃이 진동하고 있었다.
- 감각이 강한 경종을 울렸다.
- ······설마 ‘이계의 신격’인가?
- “여기 숨어 있었군, 유중혁.”
-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려는 순간,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 지금 등을 돌리면 죽는다.
- 너무나 분명하게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성좌인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은신술.
- 분명,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존재였다.
- 이런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고?
- “넌 뭐야? 유중혁의 동료냐?”
-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 적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 천천히, 나는 고개를 돌렸다.
- 등 뒤에 익숙한 외형의 여인이 서 있었다.
- 한순간 머릿속이 패닉으로 덮였다.
- ······대체 어떻게?
-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인물은, 이 ‘회차’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뭐, 알 필요 없지. 어차피 죽일 거니까.”
- 하얗게 웃는 해상제독 이지혜가, 나를 향해 쌍룡검을 겨누고 있었다.
- # 289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5)
- “섬멸해라, 쌍룡검.”
- 이지혜의 말과 함께, 두 자루의 검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푸른 색의 용을 닮은 강기가 내 목줄기를 뜯기 위해 날아들고 있었다.
- 쌍룡검(雙龍劍).
- 충무공의 성유물이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명검이 빛을 뿜었다. 경지에 오른 [검도]의 궤적을 보며,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 “어쭈, 작아져? 어디서 굴러먹다 온 화신이야?”
- 해상제독 이지혜.
-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그녀는, 명실상부한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하나다.
-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 내가 기억하는 ‘원작’이 맞다면, 1863회차의 이지혜는 오래 전에 죽었다.
-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지혜는 대체 뭐란 말인가.
- 나는 쌍룡검의 궤적이 닿지 않을 고도까지 단번에 날아오르며 외쳤다.
- “이지혜, 멈춰! 난 네 적이 아니야!”
- “······뭐야, 날 알아? 하긴,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 뻔뻔한 말을 중얼거린 녀석이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했다.
- 나는 그 기술이 뭔지 알고 있었다.
- 순살(瞬殺).
- ‘멸살법’에서 손꼽히는 대인 기술 중 하나이자, 그 어떤 상대든 일검에 격살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스킬.
- “벌레처럼 작아졌다고 내가 못 벨 것 같아?”
- 귀살이 일렁이는 이지혜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 스슷.
- 이지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내 목을 노리는 감각이 일었고, 바로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 “유중혁!”
- 집채만한 그림자가 눈앞을 덮는가 싶더니, 철과 철이 부딪치는 강렬한 파찰음이 울려 퍼졌다.
- 내 옆을 막아선 유중혁과, 그 유중혁을 향해 쌍룡검을 들이댄 이지혜.
- 까가가가각!
- 저 단단한 [진천패도]의 칼날에 작은 흠집이 나 있었다.
- 순살은 그만큼 강력한 기술이었다.
- 상대가 유중혁만 아니라면 말이다.
- 고오오오오!
- 1863회차의 유중혁은 누구보다 살인 기계에 가깝다.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고, 죽이겠다 마음먹은 상대는 반드시 격살한다.
- 초월의 격을 발한 유중혁이 검을 휘둘렀고, 힘의 격차에서 밀려난 이지혜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패도를 쥔 유중혁의 신형이 이지혜를 쫓아 낙하했다.
- “유중혁! 멈춰!”
- 나는 지상에서 터져나오는 굉음을 향해 외쳤다.
- 뿌연 먼지 사이로 쓰러진 이지혜와 검을 내리치는 유중혁이 보였다. 멈추라는 내 말에도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근처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밀려들고 있었다.
- ‘회귀 우울증’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 “죽이지 마! 걔 죽이면 안돼!”
- 어째서 이지혜가 살아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 적어도 유중혁이, 그녀를 죽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먼지 속에서 일어난 이지혜가 이를 갈며 외쳤다.
- “무슨 뻘짓이지? 덤벼 패왕! 이번에야말로 개작살을 내줄 테니까!”
- 아무래도 이지혜와 유중혁의 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 ‘이지혜’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물며 적이 되었다고?
- “잠깐만! 너도 멈춰 이지혜! 우린 싸울 생각 없다고!”
- 내 말에도 이지혜는 멈추지 않았다. 내 명령 때문인지 유중혁의 움직임은 한결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 파스슷!
- 이지혜의 칼날에 베인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튀었다.
- 아무래도 ‘회귀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그렇다고 공격 명령을 내리면 아까처럼 이지혜에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고······ 제기랄.
- 나는 전인화를 유지한 채 유중혁의 어깨에 올라타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 “멈추라고 자식아! 유중혁은 네 사부잖아!”
- “사부? 뭔 개소리야? 이딴 괴물 사부로 둔 적 없어.”
- 이지혜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 “내 사부는 훨씬 더 멋있는 사람이야.”
- 이지혜의 칼날에서 오색의 아우라가 흘렀다.
- 나는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 무슨 공격을 하든, 방향이라도 알면 피하기라도 쉬울 테니까.
-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 ······유중혁의 이해도가 낮은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 이지혜가 그렇게 복잡한 인간은 아닐 텐데.
-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혜’가 맞다면······.
- [등장인물 ‘이지혜’가 성흔 ‘칼의 노래 Lv.10’를 발동합니다!]
- ······기어코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 그러면 이쪽에도 생각은 있다.
-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강하게 움켜쥐며 성흔을 발동했다.
- [성흔, ‘칼의 노래 Lv.5’를 발동합니다!]
- 내 칼날에서 솟아난 오색의 빛을 확인한 이지혜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어차피 이 ‘성흔’은 확률 싸움.
- 어디, 누가 더 운이 좋은지 보자고.
- 선수는 이지혜였다.
- 허공에 떠오른 문자열이 움직이며 충무공의 글귀가 흘러나왔다.
- 「초 10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 빙고.
- 이지혜의 안색이 구겨지는 것이 보인다.
- ‘칼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충무공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킬.
- 재수가 없으면, 아무 효과도 발동되지 않는다.
-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 「28일. 맑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 내 칼날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 눈이 휘둥그레진 이지혜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 [성좌, ‘해상전신’이 경악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 자신의 옷깃에 붙은 불을 꺼뜨린 이지혜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 “너 뭐야! 어떻게 내 배후성의 성흔을 쓰는 거지?”
- “궁금하면 대화를 하자고.”
- “팔다리 정도는 잘려야 똑바로 대답을 할 모양이네.”
- 내 공격이 성질을 돋운 모양인지, 이지혜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 “어떤 배후성의 잡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믿고 나대다간 큰 코 다칠 거야.”
- 이지혜가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을 뽑았다.
- 놀랍게도, 나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 지금껏 내가 읽었던 그 어떤 회차에서도, 이지혜가 저 ‘사인참사검’을 손에 쥔 기억은 없었다.
- “북두성군이여! 힘을 주소서!”
- 이지혜의 외침에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빛났다.
- 북두성군은 원래 총 일곱 명. 하지만 후반 시나리오로 들어서며 몇 명이 죽은 탓인지 빛나는 별은 네 개뿐이었다.
- 기이이이잉!
- 눈부신 빛을 쏟아내는 사인참사검이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 이지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뻔했다.
- 사인참사검은 성좌와 화신체의 링크를 베어, 아주 잠깐 그 연을 끊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 그런데 나를 본 이지혜의 표정이 괴이했다.
- “너······ 링크가 없어?”
- 당연히 없지.
- 나는 지금 화신체와 본체가 하나인 상태다.
-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 경악한 이지혜가 한 걸음을 물러났다.
-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 나는 품속에서 이지혜의 손에 쥐어진 것과 똑같은 검을 꺼냈다.
- 기이이이잉!
-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 나는 눈부신 광휘를 뽐내는 [사인참사검]을 굳게 쥔 채 유중혁의 어깨에서 도약했다. 방심한 이지혜가 눈을 크게 뜬 순간, [바람의 길]의 궤적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 츠츠츠츠츠츳!
- 터지는 스파크의 폭음 속에 이지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 “아아아악!”
- 그녀를 수호하던 해상전신의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 나는 이를 악문 채 물러섰다.
-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분노를 토합니다!]
- ······얕았다.
- 잠깐이나마 ‘해상전신’과의 링크를 끊어 이지혜를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았다.
- 하얗게 탈색된 이지혜의 눈동자.
- 95번 시나리오에 이르러, 설화급 성좌에 오른 충무공이 내 눈앞에 현신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의 물가를 확인했다.
- 만약 여기서 ‘유령 함대’의 본선이 소환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 콰콰콰콰콰!
- 청계천의 지류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스파크와 함께 유령함대의 환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 빌어먹을.
- 나는 반사적으로 뒤쪽의 페트병, 정확히는 그 안에 꽂혀 있던 꽃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대천사의 힘을 빌려야 하나?
- 그녀들이 힘을 빌려줄기는 할까?
- 눈앞의 이지혜는, 적어도 ‘악’은 아닐텐데.
- “충무공. 그만 멈추십시오.”
- 진중한 사내의 목소리.
-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곰 같은 사내의 손이 이지혜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 [성좌, ‘해상전신’이 노여워합니다!]
- [성좌, ‘강철의 주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 성좌들끼리의 으르렁거리는 기싸움.
-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충무공이었다.
- 유령함대의 환영이 하나둘 사라지자, 힘이 풀린 이지혜가 바닥에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런 이지혜의 앞으로 사내가 나섰다.
- “그쪽 분도 거기까지 하시죠.”
- 나는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 정말 오늘은 몇 번이나 놀라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 “무슨 짓이야, 현성 아저씨! 저 자식 유중혁 편이라고!”
- “아직 제대로 알아본 게 아니잖아.”
- 25번 시나리오든, 95번 시나리오든.
- 3회차든, 1863회차든······.
- 이현성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이현성이었다.
-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김독자입니다.”
-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현성의 이마에도 굵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 꽉 짜인 강철 같은 근육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흔이 있었다.
-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이현성 또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으니까.
- 이현성이 말했다.
- “김독자 씨. 우리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기 있는 ‘유중혁’이 필요할 뿐입니다.”
- 사람 좋은 미소였지만, 나는 미소의 이면에 깔린 침착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 이현성 역시 아흔 네 개나 되는 시나리오를 헤쳐온 것은 마찬가지. 내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한다면, 이현성은 이지혜보다 더 철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 나는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 “왜 유중혁이 필요한 겁니까?”
-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열쇠를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 95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는 이현성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 “당신들 그룹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 “예?”
- “95번 시나리오까지 왔다면, 당신들도 그룹이 있을 텐데요.”
- “아, 그룹이라면 저랑 지혜가 전부······.”
-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한다면, 앞으로 당신의 말은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 이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 “리더는 누굽니까? 이현성 씨 당신인가요?”
- 이현성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 역시, 몇 회차가 지나든 감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하지 못한 사내다.
- “그건······.”
- 흐려지는 말 꼬리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 이현성과 이지혜는 그룹이 있고, 리더는 그들이 아니다.
-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가 아니다.
- 확실한 가설이 서자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 될 것 같았다.
- 유중혁에 대한 내 이해도가 이상하게 낮았던 이유도.
- 죽었어야 할 이지혜와 이현성이 살아 있었던 이유도.
-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
- 원작에서는 활약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이 ‘회차’에 있는 것이다.
- “유중혁을 원한다면, 나를 당신들의 리더에게 안내해주십시오.”
- 그러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과 유중혁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야 뭐 보다시피 약골이고, 유중혁은······ 지금이라면 안전합니다. 제 말을 꽤 잘 듣거든요.”
- “뭔 개수작이야! 저 자식이 누구 말을 듣는다고······!”
- 유중혁에 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지혜가 악을 썼다.
- 이현성 역시 불신 가득한 눈빛이었다.
- “김독자 씨, 당신은 유중혁의 동료입니까?”
- ······동료라.
- “그렇습니다.”
- “······솔직히 믿을 수 없군요. 유중혁에겐 어떤 동료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증거를 보여드리죠. 유중혁.”
-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 “검을 집어 넣어.”
- 유중혁이 거대한 [진천패도]를 고분고분 집어 넣었다.
-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떨며 외쳤다.
- “겨우 그 정도로······!”
- “유중혁, 이리와.”
- 유중혁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질겁한 이지혜가 이현성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 “현성 아저씨! 조심해! 저러다가 분명 공격할 거―”
- “유중혁, 앉아.”
- 유중혁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 이지혜와 이현성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 하긴, 놀랍기도 할 것이다.
- 그들이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제 처맞은 게 꽤 아팠으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 무슨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 “또 뭐 시켜볼 일 있으십니까? 흙이라도 먹여 볼까요?”
-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손을 번쩍 든 이지혜가 뭐라 외치려는 순간, 이현성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저를 따라오시죠.”
- *
- 본거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다만, 도중에 나타난 ‘이름 없는 것들’로 인해 시간은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폐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계의 신격들을 피해다닌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 멀리서, 그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 “저곳입니다.”
-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와 똑같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내와 마주쳤다.
- # 290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6)
- “여, 이지혜.”
- 전형적인 양아치 말투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 녀석의 어깨에서 흔들리는 백색의 코트는, 틀림없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 그러니까, 내 것과 같은 코트였다.
-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 ······설마 저 녀석이 리더라고?
- 밀려오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반사적으로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지만, 바보가 된 유중혁이 내 충격을 공유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 나는 다시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둘둘 붕대를 감고, 등은 반쯤 문에 기댄 채 새하얀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큭큭 웃는 사내.
- 「김 독자는 멍청 이이 다」
-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리더일 리가 없다.
- 애초에 저 ‘코트’는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못 구할 것도 없고.
-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김남운.”
- “어.”
- “나 아는 척하지 말랬지. 들어가야 되니까 저리 꺼져.”
- “어, 어······.”
- 이지혜의 말에 김남운이 머쓱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런 김남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 “그리고 사부 코트 그만 훔쳐 입어. 진짜 죽여버린다 너.”
- “······너도 한 번 입어 볼래?”
- 이지혜가 문을 쾅 박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지혜의 모습에 압도된 듯, 눈이 풀린 김남운이 이지혜의 뒷모습을 좇았다.
-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얘들 관계가 그랬지.
- 새삼 여러 가지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 이지혜에 이현성, 거기다 김남운이라······.
-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 이 회차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김남운이 나를 보며 말했다.
- “뭐야 넌? ······그 코트 내 거랑 같은데?”
-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 지하철에서 머리가 터져 죽었던 김남운.
- 만약, 그때의 김남운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 “어이 군인, 이 인간은 뭔······ 우왁 씨바! 유중혁이잖아!”
- 내 뒤쪽에 있던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이빨을 드러냅니다!]
- 망상악귀 김남운.
- 이번 회차에서, 심연의 흑염룡은 자신의 본래 화신을 찾아갔다.
- 자신을 향한 적의에 유중혁이 고개를 들자, 김남운이 움찔하며 말했다.
- “존나 멋있는 건 여전하군······ 싸우러 온 거냐, 유중혁?”
- 감춘 한쪽 손을 바들바들 떠는 김남운은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 흉악해지려는 기류를 막아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 “남운아, 이분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 “뭐? 그럼 뭐하러 온 건데?”
- “그건······.”
-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건물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 “잠깐만요! 김독자 씨!”
- 뒤쪽에서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얼른 이 건물의 내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 내 생각이 맞다면······.
- 이 건물은, 초반 회차의 유중혁이 구상했던 바로 그 ‘건물’이다.
-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탁 트인 거대한 실내였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자재 창고만한 크기. 옆에 있던 커다란 문에서 환자들을 실은 침대차가 우르르 밀려왔다. 하나 같이 응급 환자들이었다.
- “거기 놀지 말고 환자들 이쪽으로 옮기세요!”
- 나는 얼떨결에 환자들이 실린 침대를 함께 밀었다.
- 하얀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 “설화 팩! 설화 팩 가져와!”
- “이 환자 알러지 있으니까 동물 관련된 설화는 안돼!”
- 모두 훈련된 의료 스킬을 가진 자들이었다.
- 그들을 이끄는 것은 작은 무테 안경을 쓴 여인이었다.
- 여인은 배와 허벅지가 꿰뚫린 환자의 상세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 “이 환자 어디서 다친 거죠?”
-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회차에 따라 ‘독희’ 또는 ‘의선’으로 불리는 여인.
- 어떤 회차에서는 십악이지만, 어떤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연인이었던 사람.
- 내가 하얀 코트를 입고 있어서 같은 의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 나는 환자의 상세를 보며 대답했다.
- “······아마 ‘이름 없는 것들’에게 당한 것 같군요. 상처 부위의 오염도로 보아 촉수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 “확실히······ 음?”
- 나를 보던 이설화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등장인물 ‘이설화’가 당신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 “······당신 누구죠?”
- 누구라고 해야 할까.
- 아니, 누구라고 말하면 그녀가 알아 들을까.
- “거기 아저씨, 뭐해? 빨리 따라와! 유중혁 잘 데리고!”
- 멍한 얼굴의 이설화를 남겨두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이지혜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 건물의 내벽은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건물 전체의 구조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 1층의 응급실 정문으로 끊임없이 환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 이계의 신격, 또는 다른 성좌들과 맞서다 중상을 입은 화신들.
-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저런 비극은 일상이 된다.
- 나는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 건물의 외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이 보였다.
- 연기를 내뿜는 성운들의 설화병기(說話兵器)들과 잠든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위쪽에는, 창공을 덮은 새카만 수정구가 있었다.
- [묵시룡의 봉인구(封印球)]
- 저 봉인구가 바로, 이 95번 시나리오의 핵심이자 목표였다.
- 흩어진 다섯 개의 열쇠를 획득해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 ‘묵시룡’이 풀려나면 이 지구에는 멸망이 찾아오고, 시나리오를 완수한 이들은 자동으로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게 된다.
- 그런데 이 1863회차는 내가 아는 1863회차와는 너무 달랐다.
- ―강서 쪽에 1급 괴수종이 등장했습니다!
- 건물을 울리는 전파음.
- 계단을 올라가자, 환한 패널로 빛나는 상황실의 정경이 얼핏 보였다.
- ―서초에 파견 중인 인원들은 빠르게 철수하기 바랍니다! 염화(炎火)의 대천사가 등장했습니다!
- ―노원 쪽 성검 ‘아스칼론’ 발견! 현재 ‘이름 없는 것들’ 십여 개체와 교전 중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 무수한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인물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파마 머리.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헤드셋을 머리에 쓴 소년.
- ······아니, 더 이상 소년이 아니구나.
- 나는 어쩐지 먹먹한 심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 내가 살았던 회차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그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 빠르게 전력 계산을 끝낸 한동훈의 손끝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 ―노원 쪽은 민지원 씨의 화랑대와 차상경 씨의 미륵불(彌勒佛)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 ―올림포스 쪽의 화신들이 선점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 ―성검 ‘아스칼론’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 메시지로 오가는 익숙한 이름들.
- 민지원과 차상경.
- 각각 ‘매금지존’과 ‘외눈 미륵’을 성좌로 두고 있던 그들도, 95번 시나리오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 “뭘 그렇게 훔쳐 봐?”
- 곁에서 나를 감시하던 이지혜가 쿡 찌르듯 말했다.
-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 “······생각했던 것보다 놀라워서.”
-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코를 쓱 문질렀다.
- “뭐, 우리 사부가 좀 대단하긴 하지. 모두 사부 덕분이야. 그 사람이 혼자 해낸 거니까.”
- 이지혜, 이현성, 이설화, 민지원, 차상경, 한동훈······ 거기다 저 ‘김남운’까지.
- 원작의 1863회차에서는 죽어야 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 뿐만 아니라 무장의 수준도 높았고, 세력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았던 3회차보다 높은 수준······ 아니, 내가 줄곧 바라던 정도의 수준이었다.
-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1863회차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 일어났어야 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류는 투쟁하고 있었다.
- 유중혁은, 아직 그 어떤 동료도 잃지 않았다.
- 어쩌면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아도, 여기서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 이지혜가 말했다.
- “우린 사부와 함께 시나리오의 끝까지 갈 거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고 섬뜩한 감각이 가슴 어귀를 스쳤다.
- 분명 저 풍경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 단 한 가지를 빼면 말이다.
- 돌아 보자,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 나는 유중혁이 저 광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 슬퍼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 “너흰 왜 유중혁을 싫어하는 거지?”
- “그 놈은 나쁜 놈이니까.”
- “왜 나쁜 놈인데?”
-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 “몰라.”
- “사람도 함부로 죽이고, 자기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으니까.”
- 모두 맞는 말이었다.
- 나는 물었다.
- “그게 전부야?”
-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 맞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 하지만······.
- 「김독자는 생각했다. ‘너는 왜 유중혁이 그래야 했는지 모르잖아.’」
-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 이것은 이지혜의 잘못이 아니었다.
-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 오히려 모두가 너무나 잘 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났다.
- “네가 말하는 ‘사부’는 대체 누구지?”
- “건물의 최상층에 있어. 저기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
-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 유중혁이 나를 따라오자, 이지혜가 칼을 빼들며 말했다.
- “유중혁은 여기 두고 가.”
- 예상했던 일이었다.
- 나는 텅 빈 표정의 유중혁과 이지혜를 번갈아 보았다.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유중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 “유중혁, 행복한 생각하면서 기다려. 알겠지?”
- 유중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네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장 불행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 “너 지금 뭐하는 거야?”
-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느꼈는지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 나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야! 대답하라니까! 방금 유중혁한테 한 말 뭔 뜻인데!”
- 이지혜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는 잘 알겠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소중함은 곧 약점이다.
- “궁금하면 걔 한 번 건드려 보든가. 나라면 안 그러겠지만.”
-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 3, 4, 5······.
- 살짝 무거워지는 중력과 함께, 건물의 층수가 바뀌고 있었다.
- 숫자가 바뀌는 만큼 내 머릿속도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 누굴까.
- 가능성이 있는 후보는 몇 있었다.
- 앞으로의 미래 정보를 읽을 수 있기에, 미래 개변이 가능한 이들.
- 안나 크로프트나, 특정 성운의 소수 성좌들.
- 하지만 그들 중 누구라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원작에 속한 존재.
-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작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9, 10, 11······.
-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 나 말고, 원작 밖의 존재가 또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상한 점은 있었다.
- 설령 원작 밖의 존재가 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것도 나와 닮은 방식으로······ 순간 발끝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 ······설마?
- 다른 회차에도 유중혁은 있었다.
-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 띵.
- 엘리베이터의 알람음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멸살법’의 수정본에 따르면, 유중혁의 다른 회차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몇 회차를 거쳐도, ‘나’는 없었다. 있었더라면, 수정본의 이야기 자체가 달라졌을테니까.
- 그러니 이 너머의 존재는 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남겼던 말이었다.
-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 ─문이 열립니다.
- 문이 열리자, 호텔의 스위트 룸을 연상시키는 방이 나타났다.
- 불이 꺼진 어둑한 방이었다.
-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 새카만 의자 위에 앉은 인형(人形)이 보였다.
- “흠······ 당신이 이현성이 말한 그 사람이구나.”
-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은은한 불이 켜졌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이었다. 새하얀 광택을 자랑하는 검. 나는 그 검을 잘 알고 있었다.
-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으니까.
- 내가 물끄러미 그 검을 보고 있자, 의자에 앉은 인물이 말했다.
- “좋은 검이지. 이름 그대로, 진짜 안 부러지거든.”
- “알아. 나도 쓰고 있으니까.”
- “그래?”
- 의자의 인물은 검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 나는 반가면의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 시나리오의 풍파를 겪으며 조금 변하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본래라면 먹히지 않아야 할 스킬이었다.
- 이 녀석에겐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사용해 본 것은 왜일까.
-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어쩌면, 발동하지 않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 눈앞에 줄줄이 떠오르는 정보들을 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 지금 내가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 “좋아, 너는 어디서 나타난 누구지? 나는 김독자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 처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멸살법’의 존재를 아는 여자.
- 애초에 이만한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 ······하지만 어떻게?
-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가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 이 여자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그녀가 아니다.
- 희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단발을 보며, 나는 물었다.
- “너는 한수영의 ‘아바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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