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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2n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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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
  3. < 던전-2 >
  4.  
  5.  
  6.  
  7. 이성민은 긴장한 얼굴로 마갑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시커먼 색으로 번들거리는 전신 갑옷이었다. 보았던 기억은 있다. 마갑을 얻었던 용병이 항상 마갑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정작 이번 토벌전에서 그 용병은 등급이 너무 낮아 참가하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8.  
  9. 마갑을 얻는다면.
  10.  
  11. 그것은 제나비스로 돌아온 이후로, 쭉 바라던 목표 중 하나였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별 것도 아닌 실력을 가지고 있던 하급 용병이 마갑 하나를 얻고서 절정 고수가 되었다. 인생을 바꿔준 기회. 이전 생에서 이성민은 언제나 그런 기회를 갈망하고 있었다.
  12.  
  13. 기회는 잡았다. 몇 번이나 잡았다. 전생의 돌을 잡은 것도 기회였고, 위지호연과의 만남도 기회였다. 므쉬의 산도, 백소고와의 만남도.
  14.  
  15. 그리고 눈앞에 있는 마갑도. 이성민은 마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16.  
  17. 이성민의 손이 마갑에 닿은 순간. 벽에 걸려 있던 마갑의 가슴팍이 쩍하고 열리더니 이성민의 몸을 집어 삼켰다. 이성민이 당황하여 몇 걸음 물러섰을 때, 시커먼 마갑은 이성민에게 입혀져 있었다.
  18.  
  19. “…어…”
  20.  
  21. 이성민은 몸을 감싼 마갑을 내려 보았다. 저절로 입히기는 했는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성민은 급히 단전의 내공을 확인해 보았다. 내공에 변화는 없었다. 육체적인 변화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점검하고 나서 이성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2.  
  23.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갑옷이 바뀌었나? 아니,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이 갑옷의 기능과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도시로 돌아가, 전문 감정사에게 확인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24.  
  25. “마음에 드나?”
  26.  
  27. 낮은 목소리가 이성민의 귀를 간질였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28.  
  29.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그곳에 서있었다. 이성민은 놀란 소리를 내며 창을 들었다.
  30.  
  31. “마갑 데보나크. 제법 괜찮은 물건이지. 리바운드가 큰 것이 흠이지만.”
  32.  
  33. “…뭐?”
  34.  
  35. 흑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성민이 자세를 잡고 있음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위축된 것은 이성민이었다. 므쉬의 산에서 단련하여 얻은 육감. 그 육감이 이성민에게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36.  
  37. 저것과 싸우지 말라고.
  38.  
  39.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나?”
  40.  
  41. 푹 눌러 쓴 후드의 안쪽에는 시커먼 어둠만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들리는 목소리는 늙수그레한 노인의 것이었다.
  42.  
  43. “그건 꽤 이상한 일인데…”
  44.  
  45. 흑마법사가 중얼거렸다. 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그렇게 내뱉은 흑마법사의 로브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46.  
  47. “불청객은 마음에 안 들지만… 후후! 살다 보니 이런 만남도 있군. 설마 인과율이 비틀어진 혼과 만나게 될 줄이야…”
  48.  
  49. 흑마법사의 중얼거림에 이성민의 몸이 움찔 굳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력으로 펼친 무영탈혼이 잔상을 만들어낸다. 몇 걸음의 거리는 순식간에 0이 되었고, 자색의 기가 휘감긴 창이 흑마법사의 몸을 꿰뚫었다.
  50.  
  51. 쩌어어엉!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저항감과 함께 이성민의 몸이 뒤로 날았다. 역류한 내공이 기혈을 긁으면서 이성민은 검은 피를 토했다. 콰당탕! 책장을 무너트리고서 몇 바퀴 뒹군 이성민은 바닥에 엎어져서 앓는 소리를 냈다.
  52.  
  53. “성급한 행동은 하지 마라. 나는 지금 아주 기분이 좋으니까.”
  54.  
  55. 흑마법사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명치 쪽에 묵직한 무언가가 얹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소란을 들은 것인지 복도 쪽에서 뛰는 소리가 들렸다.
  56.  
  57. “뭐야?!”
  58.  
  59. 문 앞으로 뛰어 온 용병들의 몸이 굳었다. 그들은 방 한 가운데에서 엎어져 있는 이성민과, 우두커니 서있는 흑마법사를 보고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늦게 달려 온 베른이 고함을 질렀다.
  60.  
  61. “흑마법사!”
  62.  
  63. “불청객들.”
  64.  
  65. 흑마법사가 중얼거렸다. 흑마법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베른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로브의 소매 안으로 보인 흑마법사의 손을 보고서 베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66.  
  67. “리, 리치…!”
  68.  
  69. “쉿.”
  70.  
  71. 후드의 안쪽에서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 아닌 새하얀 뼈였다. 그 끝에서 시커먼 빛이 번뜩이더니, 일직선으로 쏘아진 죽음이 베른을 노렸다.
  72.  
  73. 퍼어엉! 베른의 근처에 있던 제온이 급히 주먹을 휘둘렀다. 거리를 격하고 쏘아진 백보신권이 흑마법사의 공격과 부딪혔다. 흑마법사는 혀를 끌끌차면서 중얼거렸다.
  74.  
  75. “소림의 백보신권이로군. 그래. 네가 베헨게르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제온이라는 놈이구나.”
  76.  
  77. “…날 아나?”
  78.  
  79. 제온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흑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80.  
  81. 드러난 것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 뭉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둥글게 뭉친 어둠의 안쪽에는 눈으로 보이는 시퍼런 빛 한 쌍이 흔들리고 있었다.
  82.  
  83. 리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들어 보았다. 마법사가 영생을 얻는 대신에 육체와 영혼을 포기하여 태어나는 몬스터. 그렇다. 리치는 몬스터로 분류된다. 그것도 최악의 몬스터라고 꼽힐 정도로 강력한 괴물이다. 리치는 대마법사에 준하는 마법 실력과 더불어 육체와 영혼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거대한 마나를 휘두른다. 거기에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과 인간다운 사고까지 하고 있으니 최악의 몬스터라고 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84.  
  85. “본래라면 너희는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게야.”
  86.  
  87. 리치가 중얼거렸다. 졸지에 제온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셈이 된 베른은 하얗게 질린체 뒷걸음질 쳤다. 마법사인 베른은 리치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88.  
  89. “하지만 오늘은 아니지. 희생양을 납치해 올 수고를 덜게 되었어. 본래는 오우거 키메라를 쓸 생각이었다만…”
  90.  
  91. 리치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리치의 발밑에서 솟구친 어둠이 리치의 손을 휘감았다. 베른이 급히 캐스팅에 들어갔다. 베른이 무슨 마법을 펼치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92.  
  93. 베른은 리치보다 느렸다.
  94.  
  95. 콰아아앙! 어둠이 쏘아졌다. 뭣모르고 앞에 서있던 용병 중 하나가 어둠에 휩쓸렸다. S급 용병. 그런 용병이 허무하게 죽었다. 어둠이 희미해졌을 때 남은 것은 살점이 모조리 타버려 뼈밖에 남지 않은 시체였다.
  96.  
  97. “도, 도망쳐!”
  98.  
  99. 베른이 고함을 질렀다. 뒤늦게 완성 된 마법이 리치를 향해 폭발했다. 시뻘건 불꽃의 파도가 리치를 덮쳤다. 리치는 웃는 소리를 내면서 뼈로 만들어진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100.  
  101. “주제를 모르는 구나.”
  102.  
  103. 영창조차 외우지 않았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강력한 실드가 베른의 마법을 막아냈다. 당미숙이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돌려 뛰었다. 하지만 당미숙은 도망치지 못했다. 땅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당미숙의 몸뚱이를 둘로 나누어 버렸다.
  104.  
  105.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본래라면 너희는 이곳에 오지도 못했다고.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오게끔 만든 것이다.”
  106.  
  107. 리치가 중얼거렸다. 제온이 앞으로 뛰었다. 그는 도망치는 것보다는 리치와 싸우는 것을 택했다. 리치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제온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있는 S급 용병들 전원이 리치를 향해 덤볐다.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108.  
  109. 가장 먼저 뛰어든 제온의 백보신권이 리치를 덮쳤다. 리치는 여전히 수인을 맺고 있었고 실드는 건재했다.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실드가 흔들린다. 제온은 자세를 잡고서 연달아 주먹을 뻗었고, 그럴 때마다 쏘아진 무형의 권격이 실드를 흔들었다.
  110.  
  111. 리치에게 조급함은 없었다. 놈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마치 맹수가 잡아 놓은 먹잇감의 재롱을 보는 것 같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리치의 뒤를 덮쳤다.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맹렬한 회전을 만들었다. 제온의 앞이라 무공을 숨기겠다는 생각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112.  
  113. “넌 가만히 있어라.”
  114.  
  115. 이성민의 창이 리치의 실드와 닿은 순간, 리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공간이 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성민의 창은 실드의 위를 미끌어졌다. 궤도가 강제로 틀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리치는 공간 왜곡 마법을 펼쳐 이성민의 공격을 흘려버린 것이다.
  116.  
  117. “너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가치 있는 혼을 잃을 수는 없지.”
  118.  
  119. 리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수인을 바꾸었다. 그 와중에도 제온을 비롯한 다른 용병들은 리치의 실드를 뚫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리치는 그것을 무시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공격들이었기 때문이다. 리치는 다른 용병들 전원보다 이성민을 신경 쓰고 있었다.
  120.  
  121. 파바박! 바닥에서 솟구친 시커먼 사슬이 이성민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이성민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122.  
  123. “그렇게 얌전히 있거라.”
  124.  
  125. 리치가 웃으며 말했다. 이성민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꽉 죄이는 사슬은 이성민의 몸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성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26.  
  127. 그렇게 베른이 죽었다. 펑, 하고 터진 폭발이 희미해 졌을 때 상반신이 사라진 베른의 다리가 뒤로 넘어갔다. 리치의 실드는 여전히 깨지지 않았고,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릴 때마다 시체가 늘어났다.
  128.  
  129. 이성민은 바닥에 엎어져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130.  
  131. 지독한 무력감과 공포 속에서 타인의 죽음을 보았다. 시간은 마치 멈춘 것처럼, 아니, 느려진 것처럼. 그렇게 흘렀다. 왜 내가 이곳에 엎어져 있는가. 왜 나는 이리도 무력한가. 이성민의 몸이 덜덜 떨렸다. 므쉬의 산을 내려왔을 때, 이성민은 자기 자신이 이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매미는 되지 않았어도, 매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함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132.  
  133. 현실은 어떤가.
  134.  
  135. 현실은 이렇다.
  136.  
  137. 이성민은 차가운 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저항하고 싶었어도 저항은 불가능했다. 리치는 괴물이었다. 대마법사라는 존재가 얼마큼의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성민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SS급 용병인 제온이 리치에게 농락당하고, 마찬가지로 SS급 용병에 대마법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베른은 이미 죽었다.
  138.  
  139. 그리고
  140.  
  141. 전투는 끝났다. 살아남은 것은 제온과 S급 용병 셋.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이성민과 마찬가지로 검은 사슬에 묶여 있었다.
  142.  
  143. “이 정도면 충분하지. SS급 용병이라… 오우거 키메라보다 낫군.”
  144.  
  145. 리치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치는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를 신경쓰지 않고서 손을 움직였다. 이성민과 제온, 2명의 용병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146.  
  147. “자, 가자.”
  148.  
  149. 리치가 양 팔을 휘저었다.
  150.  
  151. “앞으로는 매일이 즐거울 게야.”
  152.  
  153. 그리 말하며 웃는 리치의 목소리는 소름끼쳤다.
  154.  
  155. 두근.
  156.  
  157. 두근두근.
  158.  
  159. 지하 깊은 곳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160.  
  161.  
  162. ======================================
  163. < 심장-1 >
  164.  
  165.  
  166.  
  167. “조금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단다.”
  168.  
  169. 리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개소리를 늘어놓았고, 리치의 개소리는 그가 미리 말해 준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조금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170.  
  171. 사슬에 결박 된 이성민은 벽을 등에 맞대고 있었다. 사지를 붙잡은 사슬은 내공을 아무리 끌어 내 보아도 뜯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172.  
  173.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고 싶었지. 아, 물론 남자도 아이를 만들 수 있지만 말이야.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174.  
  175. 대체 뭔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성민은 대답도 질문도 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입술을 벌리고 싶어도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런 마법이었다.
  176.  
  177. “이런 저런 마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말이야. 타고난 성별은 어찌 바꿀 수가 없었어.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무성으로 태어난 드래곤의 폴리모프 마법뿐이고, 인간은 폴리모프를 쓸 수가 없다. 왠지 아느냐. 인과율 때문이지.”
  178.  
  179. 인과율, 인과율.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성민의 강제적인 침묵 속에서 리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180.  
  181. “결국 나는 마법의 한계에 절망해 버렸지. 그래서 리치가 되었다. 내 혼과 육체를 바쳐 강제적인 영생을 얻는 저주. 하지만 뭐, 만족했다. 마도의 길은 끝이 없고 나는 꽤 오랫동안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거든.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 그것은 두렵지만 즐거운 일이란다. 열중하는 것은 좋지. 아주 즐거워.”
  182.  
  183. 리치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제온과 다른 S급 용병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구속된 그들은 다른 방에 던져졌고, 리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이성민만은 리치와 함께 이 방으로 왔다.
  184.  
  185. “긴 세월 마도의 길을 걸었고, 인간이었을 적 갈구하던 나의 바람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육체를 잃었으니까. 설령 여자가 되는 마법을 완성한다고 해도 나는 쓸 수가 없게 되었지. 크크크! 이리 말하니 모순이로군.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단다.”
  186.  
  187. 한참을 웃던 리치가 이성민을 보았다. 뭉쳐진 어둠 너머로 보이는 푸른 안광에 감정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성민은 리치의 목소리에 실린 광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188.  
  189. “내가 낳을 수 없어도, 아이를 만들 방법은 있으니까.”
  190.  
  191. 이성민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다.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이고. 입술을 벌려 보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마법의 구속은 너무나 강력했다. SS급 용병이었던 제온과 베른을 우습게 상대하던 리치다. 놈의 이름은 모르지만, 리치가 보여 준 압도적인 힘은 상식의 궤를 아득하게 넘어 있었다.
  192.  
  193. “키메라는 매력적인 연구 주제란다.”
  194.  
  195. 광기에 절은 목소리는 이해할 수 없는 포근함과 상냥함이 어려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성민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고, 그런 느낌의 와중에도 리치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이 향하는 대상은 이성민이 아님은 분명했다.
  196.  
  197.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소재로 하여 전혀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내가 인간이었을 적부터 갈망했던 것을 충족하지. 비록 내 몸에서 낳는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말이야. 뭐. 다를 것은 없지 않느냐. 내가 만들어낸 생명이라면 내가 낳은 자식인 것이지.”
  198.  
  199. 리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바닥을 가득 덮은 마법진은, 마법을 잘 모르는 이성민이 보아도 불길함이 느껴졌다.
  200.  
  201. “인과율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이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모두가 필연적인 인과율에 휘둘리게 되지.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초월의 편린과 닿았다는 뜻이란다.”
  202.  
  203. 리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벽에 결박 된 이성민은 리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김종현이 해주었던 경고가 이성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김종현의 말이 맞았다. 이성민은 이 던전에 와서는 아니되었다.
  204.  
  205. “오늘은 아주 좋은 날이구나. 그리고 아주… 운이 좋은 날이기도 해. 예전에 보았던, 너와 비슷하게 인과율이 비틀어진 놈은 내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괴물이었는데…”
  206.  
  207. 리치의 말에 이성민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성민은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발악하면서 입술을 움직였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전음조차도 막힌 탓에 의문은 이성민의 입 안만 맴돌았다.
  208.  
  209. “네 혼을 제물로 바친다면 나의 비원은 완성에 가까워지겠지.”
  210.  
  211. 리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 손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리치가 외는 주문은 이 세상의, 에리아의 언어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욱신거리고 눈앞이 일그러진다.
  212.  
  213. 비명이라도 원 없이 지르고 싶었으나 막힌 입술은 야속할 정도로 무거워 열리지 않았다.
  214.  
  215. 길게 이어지던 주문이 완성되었다. 마법진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대신에 싸늘한 냉기가 방 안을 집어 삼켰다. 내뱉는 호흡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이성민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216.  
  217. 그것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둠이 뭉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새하얀 안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형태인가 싶었을 때에 그것은 남자가 되었고, 다시 여자가 되었다. 이성민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끝없이 모습을 바꾸었고, 그 불길한 천변만화에 이성민의 정신은 뒤흔들렸다.
  218.  
  219. 공포.
  220.  
  221. 이성민은 공포를 느꼈다. 공포가 낯선 것은 아니다. 여태까지 공포는 몇 번이나 느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공포는, 여태까지 느꼈던 공포와는 근본이 달랐다. 나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무언가. 저 뭔지 알 수 없는 존재는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공포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222.  
  223. “바치겠나이다.”
  224.  
  225. 양 팔을 들어 올린 리치가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상식을 벗어난 위력을 과시했던 리치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낮추며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226.  
  227. 존재의 시선이 이성민에게 향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했을 때, 이성민은 자신의 머리가 터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성민이 느끼는 두통은 머리가 터져버렸다는 착각이 현실이기를 바랄 정도로 끔찍했다.
  228.  
  229. “…예?”
  230.  
  231. 잠시 뒤에, 리치가 놀란 소리를 냈다.
  232.  
  233. “자, 잠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언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체 왜…?”
  234.  
  235. 머리가 아프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세포 하나하나가 공포에 얼어붙었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죽는다.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저것의 시선만으로도 이성민은 죽음을 상상했다.
  236.  
  237. “그런… 말도 안 되는…”
  238.  
  239. 리치가 허망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을 보고 있던 존재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허억, 하고. 이성민은 숨을 크게 삼켰다. 쿵, 쿵. 너무 느리게 뛰다가 멈춰가던 심장이 다시 뛰는 소리를 낸다. 이성민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240.  
  241. “아니… 아, 아닙니다. 다른 제물은 바치겠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242.  
  243. 흑마법사가 허둥거렸다. 그는 급히 소매의 안쪽을 뒤지더니 큼직한 보석을 꺼냈다. 흑마법사가 보석을 제단 위에 올려 두자, 존재의 시선이 그 보석을 내려 보았다. 어둠이, 안개가, 보석을 집어 삼켰다.
  244.  
  245. 그리고 존재는 희미하게 변하여 사라졌다. 바닥에 그려졌던 마법진이 완전히 사라졌다. 리치는 허공을 멍하니 올려 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246.  
  247. “제물을… 거부했다고?”
  248.  
  249. 리치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을 허공을 올려 보던 리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리치는 몸을 돌려 이성민을 노려 보더니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250.  
  251. “너… 대체 뭐냐?”
  252.  
  253. 그것은 오히려 이성민이 묻고 싶은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254.  
  255. “인과율이 비틀려졌다고 해도 제물로서의 가치는 있을 터… 아니… 오히려 인과율이 비틀렸기에 더더욱 제물로서 중할 텐데. 대체 왜 제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지?”
  256.  
  257. 리치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치가 비틀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활짝 펼친 리치의 손이 이성민에게 향했다. 벽에 결박되어 있던 이성민의 몸이 천천히 리치를 향해 날아왔다.
  258.  
  259. “네 모든 것을 보여라!”
  260.  
  261. 리치가 고함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빛을 발했다. 보이지 않는 마법이 이성민의 정신을 덮쳤다. 강력한 정신 금제에 기억을 강제적으로 뽑아내는 마법이었다. 효율은 좋았지만 상대를 백치로 만든다는 부작용이 존재하는 마법이었다.
  262.  
  263. 개미가 뇌피질 위를 기어 다닌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성민의 몸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이성민의 눈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마법을 통해 강제적으로 기억을 읽고 정신이 제압되면서, 이성민의 정신이 붕괴되려는 징조였다.
  264.  
  265. 그랬어야만 했다.
  266.  
  267. “카아아악!”
  268.  
  269. 리치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더니 크게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성민의 눈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덜덜 떨던 리치는 손을 들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 잡으려 했다. 그것은 리치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느끼는 두통이었다.
  270.  
  271. “아… 아으으으! 크으으으!”
  272.  
  273. 주저앉은 리치가 비명을 지른다. 리치의 정신이 뒤흔들리면서 이성민의 몸을 주박하고 있던 마법이 소멸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이성민은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한참을 신음하던 리치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이성민과의 거리를 벌렸다. 정신이 반쯤 나간 리치는 이성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다만 도망치고 싶었다. 리치는 그 감정과 충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느끼는 대로, 도망칠 뿐이었다. 리치의 몸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274.  
  275.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성민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276.  
  277. “…뭐… 뭐야?”
  278.  
  279.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몸을 주박하고 있던 마법은 사라졌다. 리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것이지? 이성민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 리치는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리치가 손을 뻗고… 그 다음. 그 다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렬한 두통을 느낀 순간 견디지 못하고 잠깐 기절했던가.
  280.  
  281. 내가 기절한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이성민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키면서 벽에 손을 짚었다. 방의 구석에는 셀게루스에게 받았던 창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성민은 자신의 창을 챙기고서 닫힌 문을 향해 다가갔다.
  282.  
  283. 흑마법사가 어디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284.  
  285. ======================================
  286. < 심장-2 >
  287.  
  288.  
  289.  
  290.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저 인간은 위험하다. 100년 이상 살아 온 리치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291.  
  292. ‘마법 반사… 아니… 그런 종류가 아니야. 애초에 그런 가호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내 공격이 통하지 않았어야 해.’
  293.  
  294. 리치는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벽을 짚었다. 리치라는 몬스터에게 있어서 육체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고 있다. 애초에 리치가 리치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육체와 혼을 계약한 마신에게 바치면서 얻은 ‘라이프 포스 배슬’이다. 라이프 포스 배슬만 건재하다면 이깟 몸뚱이 따위 언제든지 재구성할 수 있다.
  295.  
  296. 즉, 리치에게 있어서 육체의 데미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데미지는 이야기가 다르다. 리치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공격법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 공격.
  297.  
  298. ‘그 놈… 대체 정체가 뭐지…?’
  299.  
  300. 마법이 반사되었다. 단순히 반사된 것이 아니다. 되돌아 온 마법은… 리치의 정신을 붕괴시킬 정도로 치명적이고 강력했다. 숨겨 둔 라이프 포스 배슬에도 데미지가 전해졌을 정도다.
  301.  
  302. ‘다른 마법은 반사하지 못했어. 그런데… 놈의 기억을 읽고 복종시키는 마법은 반사되었다. 뭐지? 대체 무슨 가호인 거냐…?’
  303.  
  304. 수상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치와 계약한 공포의 마왕은 저 인간의 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받을 수 없다. 마왕은 그렇게 말했고, 덕분에 리치는 애지중지하는 마력석을 바쳐 공포의 마왕을 소환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305.  
  306.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307.  
  308. 리치는 격분하여 내뱉으면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반사된 정신 데미지로 인해 운신이 힘들고 마법을 펼치는 것도 무리였다. 설마 인간에게, 그것도 고작해야 절정고수 수준의 인간에게 이런 꼴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309.  
  310. ‘우선 잃은 마력을 보충해야 해…’
  311.  
  312. 리치는 로브를 질질 끌면서 걸었다. 이성민에게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리치가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313.  
  314. 리치는 제온을 비롯한 S급 용병들을 던져둔 곳으로 향했다. 공방의 위치보다 깊은 곳. 이곳에서 리치는, 리치가 되어가면서까지 이루고 싶어 했던 비원을 연구하고 있었다.
  315.  
  316. 두 개의 심장.
  317.  
  318. 리치는 공중에 떠있는 두 개의 심장을 올려 보았다. 키메라의 연구는 종의 궁극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서로 다른 종을 섞어 궁극에 가까운 인위적인 생명을 만든다. 그렇게 해서 탄생되는 것이 키메라다.
  319.  
  320. 오우거 키메라를 만든 것은, 두 발로 걷는 육지 몬스터 중에 궁극에 가까운 종이 오우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선 보기도 흉했고, 그리 통제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치가 만들고 싶었던 생명은 보다 아름답고, 보다 강한 것이었다.
  321.  
  322. 저 심장이야말로 리치가 바라여 해온 연구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흠이랄 것은, 저 심장을 담을 만한 육체의 준비가 미흡하다는 점이었다. 본래는 공포의 마왕에게 인과율이 비틀린 혼을 바치고, 그 대가로 미흡한 육체를 완전하게 하여 심장을 이식할 생각이었다.
  323.  
  324. 하지만 실패했다. 제물이 거부당하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다. 심장을 올려 보던 리치는 빠득 이를 갈았다. 상관없다. 그 뭔지 모를 인간은 건드리고 싶지 않지만, 우선 손상된 마력을 보충한 뒤에 심장을 가지고서 이 자리를 떠난다. 리치는 널브러진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325.  
  326. “귀여운 놈. 잠든 척 하기는.”
  327.  
  328. 리치가 끌끌거리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 말에 쓰러져 있던 제온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정신 데미지로 인해 걸어두었던 마법이 풀렸다. 다른 용병들은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수준이 나은 제온은 이미 정신을 차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329.  
  330. “틈이라도 보아 기습하려고 했느냐? 아서라, 아서. 내가 만전이 아니라고 하여도 너 까짓 놈은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 수 있으니.”
  331.  
  332. 리치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절한 척 하고 있던 제온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리치는 제온을 무시하고서 수인을 맺었다. 제온의 주변에 널브러져있던 용병들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333.  
  334. “귀찮아… 아주 귀찮아.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분명 앞으로는 즐거운 매일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필멸자는 겪지 않은 미래를 확정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335.  
  336. 리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용병들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았다. 이윽고 그들은 비쩍 마른 미라와 같은 몰골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을 보며 제온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337.  
  338.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339.  
  340. “응? 아니, 너는 아니야.”
  341.  
  342.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니 살 것만 같았다. 리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제온을 바라보았다.
  343.  
  344. “너는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할 생각이다. 그래. 너 정도의 혼이라면…”
  345.  
  346. “프레스칸.”
  347.  
  348. 리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리치를 보고 있던 제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프레스칸. 리치의 이름이다. 부르르 몸을 떨던 리치가 머리를 돌렸다.
  349.  
  350. 우두커니 선 남자가 리치를 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서있던 리치는 남자가 저곳에 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것은 제온도 마찬가지였다. 저 남자는… 마치 유령처럼, 저 자리에서 솟구쳐 나왔다.
  351.  
  352. “이제야 찾았군. 설마 이런 곳에 처박혀 있을 줄이야…”
  353.  
  354. 남자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남자를 보는 리치, 프레스칸은 당황과 경악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355.  
  356. “로… 로이드…”
  357.  
  358. “잊지는 않은 모양이군.”
  359.  
  360. 로이드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는 천천히 프레스칸에게 다가가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361.  
  362. “10년만인가. 10년 동안 너를 찾아다녔지.”
  363.  
  364. “이… 질긴 놈…! 아직도 내 뒤를 쫓고 있던 게냐?!”
  365.  
  366. “맞아. 지루한 추격이었지. 그런데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10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약해진 것 같은데.”
  367.  
  368. 프레스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오늘, 이곳에 로이드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빌어먹게도 얄궂은 운명이다.
  369.  
  370.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여기서 널 죽여 봤자, 나는 네가 라이프 포스 배슬을 숨겨 둔 장소를 모른다. 그렇다면 또 지루한 추격을 해야 겠군. 우선 이곳에 있는 너를 죽인 뒤에 말이야.”
  371.  
  372. 로이드가 성큼거리며 발을 뻗었다. 로이드를 보는 제온은 거대한 위압감을 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절정의 벽을 뚫고 초절정의 벽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제온이었지만, 프레스칸을 향해 다가가는 로이드가 발하는 위압감은 제온이 감히 거스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373.  
  374. “이… 빌어먹을…!”
  375.  
  376. 프레스칸은 고함을 지르면서 수인을 맺었다. 그 즉시 시커먼 마력이 프레스칸의 발아래에서 솟구쳤다. 로이드는 프레스칸이 펼치는 마법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마찬가지로 로이드가 수인을 맺었고, 로이드를 덮치던 검은 마력이 환한 금색의 빛에 밀려났다.
  377.  
  378. “만전의 너도 나를 상대할 수 없을 텐데. 약해진 지금 상태에서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379.  
  380. “이… 괴물 자식!”
  381.  
  382. “누가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것인지 모르겠군.”
  383.  
  384. 로이드가 이죽거렸다. 로이드가 발하는 금색의 빛은 어둑한 공동을 환하게 밝혔다. 주춤거리며 물러 선 프레스칸은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로이드와 싸우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육체를 잃은 뒤에, 라이프 포스 배슬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차라리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프레스칸은 망설임없이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385.  
  386.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개의 심장. 저것은 프레스칸이 리치가 되면서까지 도달하고 싶어했던 비원의 극의다. 결국 프레스칸은 입술을 씹으면서 외쳤다.
  387.  
  388. “눈을 떠라!”
  389.  
  390. 그 외침에 심장이 고동 소리를 발했다. 하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내더니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로이드는 흠칫 놀라 허공을 올려 보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기에 내버려 두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박동하는 심장이 내뿜는 마력과 불길함은 로이드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391.  
  392. “너… 대체 뭘…!”
  393.  
  394. “보아라!”
  395.  
  396. 프레스칸이 부르짖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지만, 프레스칸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비원의 극의를 보며 깊은 경외를 느꼈다. 휘몰아치던 마력이 육체가 되었다. 로이드는 급히 수인을 맺어 심장을 향해 마법을 쏘아냈으나, 로이드의 마법은 심장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소멸해 버렸다.
  397.  
  398. 육체가 완성되었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온 것은 장성하지 않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심장이 발하던 불길한 마력은 소녀의 몸 안에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다.
  399.  
  400. “너… 대체… 뭘 만든 거냐…?”
  401.  
  402. 로이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질문에 프레스칸이 양 팔을 크게 펼치며 외쳤다.
  403.  
  404. “궁극의 존재!”
  405.  
  406. 그 외침에 답해주는 것처럼, 소녀가 눈을 떴다. 기세좋게 외치기는 했지만 심장도 육체도 아직은 미완성이다. 게다가 급하게 불어넣은 탓에 조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급박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407.  
  408. ‘남은 하나를 완전하게 만들면 돼. 우선 지금 상황을…’
  409.  
  410. 그런데.
  411.  
  412. 상태가 이상하다. 소녀는 멀뚱히 서있기만 할 뿐, 그 외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소녀의 등을 보고 있던 프레스칸이 급히 외쳤다.
  413.  
  414. “저 놈을 죽여!”
  415.  
  416.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올려 볼 뿐이었다. 높은 허공에서 남은 하나의 심장은 침묵하고 있었다. 경계 어린 눈으로 소녀를 보던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이것은 로이드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417.  
  418. 로이드가 수인의 형태를 바꾸었다. 콰아아아! 금색의 물결이 소녀를 덮쳤다. 멍하니 심장을 올려 보고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파아앙! 소녀를 덮치던 로이드의 마법이 그대로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현상이 마나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로이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419.  
  420. ‘디스펠? 아니, 말도 안 돼. 내 마법을 디스펠했다고? 영창도 없이?!’
  421.  
  422. “좋아!”
  423.  
  424. 프레스칸이 쾌재를 불렀다. 그 외침에 소녀가 머리를 돌렸다. 프레스칸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을 보고서 흠칫 굳어버렸다. 그 무감정한 눈에는 살의가 담겨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감정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봉제 인형처럼 생기 없는 눈동자를 보면서 프레스칸은 뒷걸음질 쳤다.
  425.  
  426. “뭐… 뭐냐. 나는 네 주인, 아니, 아버지야!”
  427.  
  428. “알고 있어요.”
  429.  
  430. 급히 외친 말에 소녀가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눈동자에는 아주 순간이나마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신에. 소녀의 눈이 제온에게 향했다.
  431.  
  432. “저건 괜찮죠?”
  433.  
  434. “…응?”
  435.  
  436. “나는 배가 고파요.”
  437.  
  438. 소녀가 중얼거렸다. 프레스칸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이었다.
  439.  
  440.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새 소녀는 제온의 앞에 있었고, 소림의 속가제자이자 절정 고수인 제온은 소녀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온이 반응하기도 전에 죽음은 제온의 의식을 밀어냈다.
  441.  
  442. 그렇게 제온은 죽었다.
  443.  
  444. 소녀는 제온의 가슴에 박혀 있던 손을 뽑아냈다. 프레스칸은 멍청히 서서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할 말을 잃은 것은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 소녀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445.  
  446. 소녀는 손에 움켜 쥐고 있던 제온의 심장을 빤히 보더니,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씹었다.
  447.  
  448. “하, 하하하…”
  449.  
  450. 프레스칸은 희열에 차서 웃었고, “…괴물…!”
  451.  
  452. 로이드는 적의를 불태웠다.
  453.  
  454. ======================================
  455. < 심장-3 >
  456.  
  457.  
  458.  
  459. 리치가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 넣어 둔다. 제물로서의 가치. 인과율. 혼란스러웠다. 마음속에 잔재한 공포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 이성민의 몸을 떨게 만들고 있었다.
  460.  
  461. 죽을 뻔 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죽음을 회피하게 된 이유에 대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뭔지 모를 공포는 왜 이성민을 제물로 받지 않은 것일까.
  462.  
  463. ‘나 말고 또 있었어.’
  464.  
  465. 이성민은 조심스레 닫힌 문을 향해 다가갔다. 리치가 말했었다. 이성민 외에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와 만난 적이 있다고.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른과 제온을 비롯한 다른 용병들을 어린 아이처럼 가지고 놀던 리치를 압도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466.  
  467. 누구일까? 리치에게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리치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사실 그것 외에도 이성민은 리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468.  
  469. 지금 이성민은 마갑을 입고 있다.
  470.  
  471. 마갑 데브나크. 삼류 용병을 절정고수로 바꿔준 아티펙트. 바랐던 대로 마갑을 손에 넣기는 하였지만, 마갑은 이성민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리치도 의아해 하고 있었다. 왜 마갑을 입었음에도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472.  
  473. 쿠우우웅!
  474.  
  475. 이성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지하에서 느껴진 거대한 굉음이 던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성민은 놀란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지? 그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서 울리는 굉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터졌다.
  476.  
  477.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리치… 리치가 싸우고 있는 것일까. 대체 누구와? 다른 용병들은 어떻게 되었지? 제온은? 의문이 계속해서 솟았으나, 그에 대해서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다.
  478.  
  479. 도망쳐야 했다.
  480.  
  481. 리치가 어디로 간 것인지는 모른다. 리치가 왜, 이성민을 두고 방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성민이 해야 할 것은 이곳에서 도망쳐 살아남는 것이다. 현재 이성민의 힘으로는 다시 리치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씁쓸함을 느꼈다.
  482.  
  483. 므쉬의 산에서 수행을 끝내고서, 이성민은… 자만하게 되었다. 전생에서는 도달하지 못했던 강함을 손에 넣었다. 절정 고수. S급 용병. 에리아 어디를 가도 나름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강함을 손에 넣었다. 그것에 자만하게 된 것이다.
  484.  
  485. 무력감을 알게 되었다. 이성민이 손에 넣은 강함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진짜’ 괴물을 상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486.  
  487. 정말 그런가?
  488.  
  489. 우연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이성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한도 자학도 자괴도. 지금 하는 것보다는 던전을 빠져 나간 뒤에 하는 것이 옳다.
  490.  
  491. 바닥 깊은 곳에서 울리는 울림은 어느 순간부터 뚝하고 멎었다. 강력한 존재들끼리의 충돌도 멈췄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을 무시하며 걸어 나가던 이성민의 머릿속으로, [용병인가?]
  492.  
  493. 탈출구를 찾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누군가가 이성민의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리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굳었다.
  494.  
  495. [아… 놀라지 말게. 나는 자네의 적이 아니야. 내가 지금 자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야.]
  496.  
  497.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는 진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이성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498.  
  499. [내 이름은 로이드. 금색 마탑의 탑주를 맡고 있네. …나를 아는가?]
  500.  
  501. 알고 있다. 금색 마탑의 탑주, 로이드. 이성민이 살았던 전생에서도 한창 이름을 날렸던 대마법사 중 하나다. 레시르 학파를 창립한 스칼렛이 그 후에 붉은 마탑의 탑주가 되었는데, 로이드는 그 이전부터 금색 마탑의 탑주로서 에리아에서 손꼽히는 대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502.  
  503. 하지만 로이드는 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방불명이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행방불명이었으니, 사실상 죽었다고 봐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대마법사로 이름을 떨치던 로이드가 행방불명되는 것은 지금과 시기가 비슷했다.
  504.  
  505. [부탁이 있네. 지금 내가 운신이? 힘든 상태라 그런데…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506.  
  507. “…당신이 정말로 로이드란 말입니까?”
  508.  
  509. 이성민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질문을 로이드가 들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지만, [마나에 걸고 맹세하지. 나는 로이드가 맞네. 금색 마탑의 탑주 로이드가 맞아. 그리고… 나는 결코 자네를 해하지 않을 것일세.]
  510.  
  511. 다행히 로이드는 이성민의 질문을 듣고,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나에 대한 맹세는 절대적이다. 이성민은 조금 안심하고서 다시 질문했다.
  512.  
  513. “흑마법사… 리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14.  
  515. [리치… 프레스칸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는 이곳에 없네. 도망쳤어.]
  516.  
  517. 로이드가 대답했다. 지하에서 느껴지던 폭음의 정체는, 로이드와 리치가 싸우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518.  
  519.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520.  
  521. [일단 이곳으로 와주게. 찾아보면 길이 있을 게야. 더는… 말하기가 힘들군. 마력이 고갈되기 직전이라…]
  522.  
  523. 로이드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고민했고, 로이드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524.  
  525. [나를 도와준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해주겠네.]
  526.  
  527.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치가 도망쳤다고 하니, 더 이상 이곳에 이성민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다. 로이드가 마나에 걸고 맹세까지 하였으니 더더욱. 결국 이성민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지하로 이어지는 길을 탐색했다.
  528.  
  529. 굳게 닫힌 철문에 자물쇠는 없었다. 이성민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습기 찬 곰팡내를 맡으며 계단을 내려가자, 드넓은 공동에 도착했다.
  530.  
  531. 공동은 엉망이었다. 바닥은 가뭄기의 논밭처럼 갈라져 있었고, 곳곳에 폭탄이라도 터트린 것 같은 큼직한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동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던 이성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532.  
  533. 제온의 시체가 보였다.
  534.  
  535.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진 시체의 곁에, 제온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뻥 뚫린 가슴의 상처가 보인다. 상처에서 흘러넘친 많은 피가 제온의 죽음을 확정짓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서 제온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536.  
  537. 이성민의 전생에서, 제온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성민이 C급 용병이 되어 던전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온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에서는 제온이 죽었다. 절정 고수의 벽을 진즉에 뛰어넘은 제온의 시체는, 이성민으로 하여금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538.  
  539. 이성민은 제온을 경계하고 있었다. 루드에게 걱정 어린 말을 듣기도 했고, 제온 본인이 이성민을 대하는 태도도 경계심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540.  
  541. “이쪽일세.”
  542.  
  543. 이성민이 제온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544.  
  545. “나는… 운이 좋군.”
  546.  
  547. 로이드의 얼굴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떻게 목숨을 구제하기는 하였지만 치명상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급히 경공을 펼쳐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548.  
  549. “설마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550.  
  551.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552.  
  553. 이성민은 로이드를 향해 몸을 숙이면서 물었다. 로이드는 마른기침을 내뱉었고,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554.  
  555. “별 것 아닐세. …프레스칸을 죽이려 했는데… 프레스칸의 키메라가 생각보다 너무 강했어. 프레스칸이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나마 동수를 이루고 쫓아내는 것이 가능했지. 덕분에 내 목숨도 건질 수가 있었고.”
  556.  
  557.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었다. 왜 리치가 마갑도 챙기지 못하고 던전을 떠났던 것인가. 금색 마탑의 탑주인 로이드가 왜 행방불명이 되었는가.
  558.  
  559. 전생에서는 아마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로이드가 이곳에 찾아와 리치와 싸움을 벌였다. 리치는 로이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이 던전에서 도망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구명 받지 못한 로이드는 이곳에서 죽었다.
  560.  
  561.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 겁니까?”
  562.  
  563. “나를 데리고 이곳에서 탈출해 주게. 나는… 마력이 고갈되어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자네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것도 남은 마력을 간신히 긁어모아 가능했던 것이야.”
  564.  
  565. 로이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566.  
  567. “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 떠있는 심장. 저것을 파괴해 주게.”
  568.  
  569. 그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로이드가 말한 대로였다. 높은 하늘 위에 심장이 떠있었다.
  570.  
  571. “본래는 내가 하려고 했지만… 말했듯이, 지금의 나는 마력이 고갈된 상태라. 그렇다고 나중에 돌아와 저것을 파괴하기에는… 프레스칸이 다시 돌아 올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 당장 심장을 파괴해 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같아.”
  572.  
  573. “…저게 대체 뭡니까?”
  574.  
  575. “나도 모르네.”
  576.  
  577. 로이드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키메라 소녀와 프레스칸과 싸웠고, 그들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로이드는 저 심장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578.  
  579. “하지만 저것은 위험해. 그것은 확실하네.”
  580.  
  581. 키메라 소녀는 강했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키메라 소녀가 사용하던 힘은 굉장히 기묘하고 불길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둘은 남은 심장조차 챙기지 못하고 도주했지만, 언제 다시 돌아와 저것을 다시 취할지 모르는 일이다.
  582.  
  583. “…알겠습니다.”
  584.  
  585. 로이드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기 때문에,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본래는 행방불명되어 죽어야 할 로이드를 살리는 것이 앞으로 어떤 변수를 만들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대마법사인 로이드와 인연을 만들어 두어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성민은 창을 꽉 쥐고 위를 올려 보았다.
  586.  
  587. 문제는 사소한 곳에서 발생했다.
  588.  
  589. 이성민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강기를 쏘아내는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공중에 떠있는 심장을 공격하여 파괴할 방법은, 지금의 이성민에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성민은 머뭇거리다가 창을 심장을 향해 던졌다.
  590.  
  591. 쉬이익! 투창은 허공을 찢어 발기며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쏘아낸 기세는 좋았음에도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다. 내공을 가득 주입해 던졌음에도, 심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속도가 크게 줄어들더니 제대로 닿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592.  
  593.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594.  
  595. 로이드가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이드가 펼친 마법으로도 심장을 어찌하지 못했었다. 이성민은 혀를 차면서 떨어진 창을 주웠다. 투창으로는 힘이 부족하다. 이성민은 심장이 떠있는 거리를 가늠해 보고서 무릎을 낮추었다.
  596.  
  597. 타악! 높이 도약한 이성민의 몸이 심장이 떠있는 위치까지 솟구쳤다. 공중에 떠오른 이성민은 호흡을 삼키면서 양 손에 쥔 창에 내공을 가득 불어넣었다.
  598.  
  599. 그리고 심장을 향해 창을 찔렀다. 그 순간이었다. 심장을 휘감고 있던 마력이 크게 부풀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에서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했다. 두근거리는 박동소리가 커지면서 마력이 이성민의 창을 밀어낸다. 이성민은 양 손에 전해지는 저항감에 입술을 씹으면서 창을 밀어내는 손에 힘을 주었다.
  600.  
  601. 두근.
  602.  
  603.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성민의 귓속에 울린다. 쿵쿵거리며 뛰는 이성민의 심장이 보조를 맞춘다. 창은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고, 어느 순간 이성민의 양 손에 느껴지던 저항감이 사라졌다.
  604.  
  605. 창두와 심장이 닿는다. 꿰뚫었다.
  606.  
  607. 꿰뚫었나?
  608.  
  609. 푸확! 심장이 사라졌다. 이성민의 창은 허공을 꿰뚫었다. 이성민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610.  
  611. 이성민의 심장이 한 번 멈추었다. 턱하고 막히는 호흡에 이성민의 입이 헉하고 벌어졌다. 공중에서 크게 휘청거린 이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창을 놓았다. 창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와 함께 이성민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612.  
  613. 땅에 닿기 전. 이성민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그 소리에 이성민은 이질감을 느꼈다. 급히 몸을 추슬러 바닥에 어떻게든 내려서기는 했지만, 뛰는 심장 소리에 대한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성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614.  
  615. [‘검은 심장’을 얻었습니다.]
  616.  
  617.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618.  
  619. 스킬을 익혔을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620.  
  621. ======================================
  622. < 심장-4 >
  623.  
  624.  
  625.  
  626. ‘검은 심장? 뭐야 이건?’
  627.  
  628. 이성민은 크게 당황하여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마갑에 휘감긴 몸에 아무런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귓가에 맴돌던 거슬리는 심장 소리도 조용히 가라앉아, 평소처럼 의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차있는 이질감은 남아 있었다. 이성민은 왼쪽 가슴을 손으로 짓누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629.  
  630. 이성민은 우선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검은 심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을 익혔을 때처럼 목소리를 들었으니 상태창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631.  
  632. 생각대로였다.
  633.  
  634. -검은 심장.
  635.  
  636. 리치 프레스칸이 바라던 비원의 궁극.
  637.  
  638. 문제는 이것이었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은, 다른 스킬들이 그러하듯이 설명이 너무 모호했다. 프레스칸이 바라던 비원의 궁극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그 비원은 무엇이고 궁극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성민이 기억하는 리치, 프레스칸에 대한 인상은 여자가 되고 싶다느니 자식을 낳고 싶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놓던 미친놈이었을 뿐이다.
  639.  
  640. “저… 로이드님?”
  641.  
  642. 이성민은 머뭇거리다가 로이드를 불렀다. 로이드는 이성민에게 심장을 파괴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의도치 않게 파괴해야 할 심장을 취해 버렸다. 이성민은 난감함을 느끼며 로이드를 불렀다.
  643.  
  644. “로이드님?”
  645.  
  646. 하지만 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화들짝 놀라 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쓰러져 있던 로이드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성민은 급히 로이드의 맥을 짚어 보았다.
  647.  
  648. 다행이도 로이드는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었다. 중상이라고 생각했던 상처는 막상 보니 크게 심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성민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재생되고 있는 로이드의 상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649.  
  650. 이성민은 로이드의 몸을 부축하려다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잠깐 멈췄다. 이성민은 몸을 돌려 제온을 향해 다가갔다.
  651.  
  652.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일까. 제온의 눈은 부릅 뜨여져 있었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쉬며 제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던 손으로 뜨고 있던 제온의 눈을 감겨 주고서, 이성민은 제온의 품을 뒤졌다.
  653.  
  654. 자그마한 천 주머니가 손에 잡힌다. 이성민은 조심스레 그것을 빼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주머니였지만 입구를 열어 손을 집어넣으니, 팔까지 쑥 들어갔다.
  655.  
  656. 안을 더듬어 보니 몇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손에 잡혔다. 이성민은 그 중에서 하나를 잡고서 손을 빼냈다.
  657.  
  658. ‘백보신권.’
  659.  
  660. 낡은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이성민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었다. 백보신권이라면 소림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권법 중 하나로, 제온이 익힌 신공절학이었다.
  661.  
  662. 내친 김에 안을 조금 더 뒤져보자 몇 가지 무공서를 더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이성민은 꺼내 놓은 달마심법과 나한보법을 내려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모두가 소림의 절기였다. 자하신공과 무영탈혼을 익힌 이성민으로서는 달마심법과 나한보법에는 욕심이 가지 않았지만, 백보신권에는 욕심이 들었다. 창을 휘두를 수 없는 상황을 위한 권법을 익혀 둬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63.  
  664. ‘제대로 익힐 여유는 없겠지만…’
  665.  
  666. 하지만 익혀 둔다면 위급할 때에 사용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당장 익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세 개의 무공서를 자신의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제온의 아공간 포켓을 뒤졌다.
  667.  
  668. 두 개의 목함. 그 중 하나는 눈에 익었다. 제온이 이성민을 코로나 용병단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에 보여주었던 목갑이었다.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목갑을 열어 보았다.
  669.  
  670. 소림의 비전 영약인 소환단이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이성민은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충동을 꾹 누르면서 다른 목갑을 열어 보았다.
  671.  
  672. 확하고 밀려 온 청량한 향기가 이성민의 코를 뻥 뚫었다. 목갑 안에 놓인 것은 소환단보다 조금 크기가 큰 붉은 단환이었다. 대환단. 이성민은 대환단을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저것이 대환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성민은 떨리는 손으로 목갑들을 닫고서 그것들을 자신의 아공간 포켓에 집어 넣었다.
  673.  
  674.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이대로 두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챙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675.  
  676. 이미 죽은 제온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뒤, 이성민은 제온의 몸을 조금 더 뒤져보았다. 아쉽게도 아공간 포켓 외에 다른 물건은 집히지 않았다. 이성민은 제온의 아공간 포켓을 챙긴 뒤에 다른 용병들의 몸을 뒤져 그들이 가진 아공간 포켓도 챙겨 두었다.
  677.  
  678. 챙길 것을 챙긴 뒤에, 이성민은 로이드의 몸을 부축했다. 그리고는 던전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제온이나 다른 용병들의 사체는 그대로 두었다. 본래의 생각은 베른이나 다른 용병의 사체에서 대형 아공간 포켓을 찾아 사망자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을 제외한 다른 용병들은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79.  
  680. 결국 이성민은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의 시체를 로이드와 함께 짊어지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681.  
  682. 던전의 다른 아티펙트를 챙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대환단과 소환단에 소림의 비급까지 취했으니 절대로 손해라고는 할 수 없었다.
  683.  
  684.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던전으로 돌입했었으니 못해도 반 나절은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등에 업힌 로이드를 힐긋 보았다. 로이드는 고른 호흡을 뱉으며 기절해 있었다.
  685.  
  686. 다행히 던전과 머지않은 곳에 마차와 말을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부들은 이성민이 기절한 로이드와 시체들을 데리고 돌아 온 것을 보며 경악했지만, 이성민이 대충 사정을 설명하자 일단은 납득해 주었다.
  687.  
  688. “베헨게르로 돌아갑시다.”
  689.  
  690. 이성민은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던전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반나절이었지만, 너무…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머릿속은 생각들로 인해 복잡하게 엉켜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691.  
  692. 덜컹거리는 마차의 안에서 이성민은 던전에서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품 안에 언제나 넣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 펜을 쥐었다.
  693.  
  694. 1.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는 나 이외에 또 존재하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강력하던 리치가 자신이 감히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 것을 보아 초절정고수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695.  
  696. 2.나에게는 인과율이 비틀어진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김종현은 그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지만 나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리치가 불러들인 존재는 나를 제물로 받는 것을 거부했다.
  697.  
  698. 2-1. 하지만 므쉬와 네블은 나의 혼에 욕심내고 있다. 리치가 불러들인 존재와 므쉬, 네블이 무슨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699.  
  700. 2-2. 회귀한 뒤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할 정도의 호의를 받고 있다.
  701.  
  702. 3. 전생에서의 마갑은 삼류 용병을 절정고수로 바꾸었으나, 나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703.  
  704. 4. 검은 심장이라는 것을 얻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705.  
  706. 5. 본래는 죽었어야 할 로이드가 살게 되었다. 로이드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기로 했으나, 무엇을 받게 될지는 모른다. 나 이외에 다른 용병들은 모두 죽었다. 제온에게서 대환단과 소환단, 소림의 비급을 얻었다.
  707.  
  708. 이성민은 자신이 써 내린 글들을 쭉 보았다. 복잡한 생각을 글로 풀이하니 그나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문제는 이렇게 글로 써봤자 저들 중 그 무엇에도 대답을 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709.  
  710. ‘애초에 전생의 돌에 뭔가가 있는 건가?’
  711.  
  712.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돌을 쥐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냥 웬 돌인가 싶었고, 그 뒤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713.  
  714. 그나마 마갑이나 검은 심장 같은 것에 대한 답을 알려 줄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이성민은 다행으로 여겼다.
  715.  
  716. 베헨게르에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 깊었다. 이성민은 바로 용병 길드로 돌아가 던전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 알렸고, 그에 대?한 증거로서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717.  
  718. “기, 길드장님은 어떻게 된 건가?”
  719.  
  720. 베른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 길드장 대리를 맡는 중년의 용병이 다급히 물었다. S급 용병인 조영이었다. 몇 번 보기는 하여 안면을 익히기는 했지만, 이성민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721.  
  722. “돌아가셨습니다.”
  723.  
  724. 베른의 죽음은 이성민도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베른은 이성민에게 제법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725.  
  726. “마… 말도 안 돼.”
  727.  
  728.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729.  
  730. “뭐? 어디를 갈 셈인가!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731.  
  732. “금색 마탑의 탑주, 로이드님이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로이드님이 흑마법사의 던전에 나타나, 흑마법사를 던전에서 쫓아내 준 덕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이드님은 큰 부상을 입으셨고요.”
  733.  
  734. “금색 마탑의 탑주…? 저, 정말인가?”
  735.  
  736. 조영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금색 마탑의 탑주라면 베헨게르 용병 길드 지부장보다 급이 높다. 애초에 마탑이라는 것은 마법사 길드 안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곳이다. 마탑의 탑주라면 마법사 길드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과 명성을 가진 대마법사라는 뜻이니, 조영이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737.  
  738. “예. 그러니 우선 로이드님을 마법사 길드로 모셔다 드리고 싶습니다만…”
  739.  
  740.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네.”
  741.  
  742. 결국 조영이 태도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조영은 마차에 실린 제온의 시체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743.  
  744. “설마 코로나 용병단의 단장인 제온이… 이렇게 죽을 줄이야. 베른님도… 후우!”
  745.  
  746.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는 조영을 뒤로 하고서 로이드를 등에 업었다. 마법사 길드는 용병 길드와 머지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에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747.  
  748. 이성민이 로이드를 데리고 마법사 길드를 방문하자 길드는 뒤집어졌다.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가 부상을 입고 업혀 들어왔다는 것은 베헨게르의 마법사 길드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마법사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부산히 움직이며 로이드를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749.  
  750. “오버하기는.”
  751.  
  752. 어느새 다가 온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이성민은 다가 온 스칼렛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해주었다.
  753.  
  754. “보니까 상처도 이미 다 재생되었던데. 저건 마력이 고갈되어서 기절한 것 뿐이야. 어느 정도 마력이 돌아오면 멀쩡하게 눈 뜰걸.”
  755.  
  756. “그러면 따로 치료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757.  
  758.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보여주기 식은 필요한 법이잖아. 뭐라도 바쁘게 하는 척을 해야, 나중에 저 대단하신 금색 마탑주가 눈을 떴을 때 체면치레를 하지.”
  759.  
  760. 스칼렛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말하는 것에서 전해지는 태도로는, 스칼렛은 ‘마탑주’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듯 했다.
  761.  
  762. “모든 마법사는 마탑주를 존경하지 않습니까?”
  763.  
  764. “존경은 무슨. 나는 마탑주라는 늙은이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 늙은이들은 비밀 투성이거든. 제자도 안 들이고. 자기들이 익힌 마법과 알게 된 지식을 남들과 공유하지도 않지.”
  765.  
  766.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레시르 학파를 창설하고, 붉은 마탑의 주인이 되는 스칼렛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겠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스칼렛에게서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767.  
  768. “그보다 너… 갑옷이 멋진 걸. 어디서 난 거야?”
  769.  
  770. “…우연히 기회가 있었습니다.”
  771.  
  772. “듣자 하니 다른 용병들은 다 죽었다며? …운이 좋았네.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죽었으면 꿈자리가 사나웠을 거야.”
  773.  
  774.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775.  
  776. “꼬맹이가 징글맞은 소리 하기는. 그냥 아는 사람이 죽으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당연하잖아.”
  777.  
  778. 스칼렛이 투덜거리면서 이성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779.  
  780. “야밤에 뭐 이리 시끄러운가 했더니.”
  781.  
  782.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783.  
  784. 새하얀 가운을 입은 김종현이 하품을 하며 서있었다.
  785.  
  786.  
  787. ======================================
  788. < 심장-5 >
  789.  
  790.  
  791.  
  792. “호오.”
  793.  
  794. 하품을 하던 김종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을 빛내면서 이성민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민이 입고 있는 갑옷을 보았다.
  795.  
  796. “그거… 꽤나 독특한 아티펙트로군요.”
  797.  
  798. 김종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의 생각대로였다. 흑마법사, 그 중에서도 스스로를 독특한 경우라고 표현했던 김종현은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다.
  799.  
  800. “묻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801.  
  802. “이곳은 너무 소란스럽군요. 제 방으로 가시죠.”
  803.  
  804. 김종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성민은 스칼렛 쪽을 힐긋 보았다. 이성민과 시선이 마주치자, 스칼렛은 질색이라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805.  
  806. “나는 저 또라이의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807.  
  808. “저도 스칼렛님을 초대한 적은 없습니다만.”
  809.  
  810. 김종현이 이죽거렸다. 그 말에 스칼렛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김종현을 노려 보았고, 김종현은 그 매서운 시선을 유들유들한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811.  
  812. “자, 가시죠.”
  813.  
  814. 로이드 쪽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직 로이드가 눈을 뜨지 않았으니 김종현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했다. 이성민은 김종현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815.  
  816.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817.  
  818. 잘린 팔다리와 내장이 떠도는 김종현의 방은 여전히 살풍경했다. 김종현은 이성민에게 자리를 권해주면서 두 눈을 빛냈다. 아까 전의 무기력함은 더 이상 김종현의 눈에 남아 있지 않았다.
  819.  
  820. “…당신은 이 마갑의 정체가 뭔지 알고 있습니까?”
  821.  
  822. “알고 있지요. 이름까지는 모르지만, 그 마갑이 어떤 성능을 가진 아티펙트인지는 보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도 대충은 알겠군요.”
  823.  
  824. 김종현이 웃는 소리를 냈다. 그는 양 손을 비비면서 이성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825.  
  826. “그 마갑은 일종의 계약입니다. 지난번에도 했던 말이지만, 흑마법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와의 계약입니다. 그 마갑은 정식적인 계약 과정을 생략하고서 일방적인 계약을 체결시키는 질 나쁜 물건이에요.”
  827.  
  828. “…예?”
  829.  
  830. “어디 보자… 자세한 것은 직접 만져 봐야 알 것 같은데.”
  831.  
  832. 김종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성큼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오더니, 이성민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갑을 손으로 더듬었다.
  833.  
  834. “흠. 직관적인 계약이군요. 이것은 착용한 인간의 잠재력을 격발시킵니다.”
  835.  
  836. “그게 무슨 뜻입니까?”
  837.  
  838.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죠. 삼류 용병이 있다고 칩시다. 그 용병이 가진 잠재력은 절정 고수에 준하는데, 노력이 부족해서 잠재력을 끌어올리지 못했다고 치죠. 이 마갑을 입게 된다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 없이, 삼류용병은 절정 고수의 실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839.  
  840. 알기 쉬운 예시였다. 이성민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멍하니 머리를 끄덕거렸다.
  841.  
  842. “그럼 좋은 것 아닙니까.”
  843.  
  844. “후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방적인, 질 나쁜 계약이라고. 마魔의 존재와 맺는 계약은 대부분이 종신형입니다. 스스로의 영혼을 바치는 대신에 그만한 힘을 얻는 것이죠. 왜 흑마법사들이 다른 인간의 영혼을, 가치 있는 영혼을 탐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계약한 존재에게 저당잡힌 자신의 혼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계약을 해지하고, 더 강한 힘을 받기 위해 계약한 마의 존재에게 혼을 갖다 바치는 것이죠.”
  845.  
  846. “그렇다면…”
  847.  
  848. “그 마갑을 입게 된다면 강제적인 계약을 맺게 됩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혼을 저당 잡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당신은 마갑과 계약되지 않은 듯 하군요.”
  849.  
  850.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851.  
  852. “그 경우에 대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이… 격발 될 잠재력도 갖고 있지 못하거나. 아니면 당신이라는 존재가 계약 자체가 불가능한 혼을 가지고 있거나.”
  853.  
  854. 그 말에 이성민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리치가 불러들인 존재는 이성민을 제물로 받는 것을 거부했다. 아무래도 마갑과 강제적인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것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855.  
  856. …어쩌면 이성민에게 잠재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답도 존재했지만. 이성민은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이성민이 아무리 노력해 봐야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소리 아닌가.
  857.  
  858. “…이 마갑의 저주를 해제해 줄 수 있습니까?”
  859.  
  860.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861.  
  862. “…뭘 원하십니까?”
  863.  
  864. “대단한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냥… 궁금할 뿐입니다. 그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는 길드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그런 로이드가 중상을 입고 업혀서 돌아왔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죠.”
  865.  
  866. 정보 만으로 마갑의 저주를 해주받을 수 있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에, 던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김종현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이성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867.  
  868. “프레스칸.”
  869.  
  870. 이성민의 입이 열렸을 때, 김종현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리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871.  
  872. “과연. 그 던전은 프레스칸의 던전이었나… 그렇다면 용병들이 전멸 당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873.  
  874.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875.  
  876. “알다마다요. 프레스칸은 본래 마법사 길드의 마탑, 그 중에서 흑마법사들로만 구성된 흑색 마탑의 탑주였습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비원을 위해 금기를 범하였고, 길드에서 퇴출당하게 되었지요.”
  877.  
  878. “금기라면?”
  879.  
  880. “인체 실험입니다.”
  881.  
  882. 김종현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883.  
  884. “아 물론… 대부분의 흑마법사는 인체 실험을 당연스레 하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 왜, 이런 법 아니겠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프레스칸은 운이 없었죠. 한창 인체실험을 하던 것을 들켜버렸으니까. 왜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가 던전으로 향했는지 알겠군요. 10년 전에 프레스칸의 추살 임무를 받은 것이 로이드였습니다.”
  885.  
  886. “그때의 프레스칸도 리치였습니까?”
  887.  
  888.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한 흑마법사 중 리치가 아닌 자를 찾는 것이 힘들 정도입니다. 리치가 된다면 흑마법사는 굉장히 쉽게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육체를 잃는 다는 것이 흠이긴 합니다만, 마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다들 정신이 나간 광인들입니다. 육체를 잃게 되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죠.”
  889.  
  890. 나야 뭐 워낙에 특별한 경우라. 김종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891.  
  892.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로군요. 인과율이 비틀린 존재가 또 있다는 것도 그렇고… 프레스칸은 당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으나 거부 당했죠. 흐으음…”
  893.  
  894. 김종현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895.  
  896. “…프레스칸이 계약한 마의 존재는 ‘공포의 마왕’입니다. 심연을 적시는 공포. 그렇게도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죠. 그와 계약하지 않은 저로서는 이름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건 굉장히 특이한 경우입니다. 공포의 마왕은 가진 권능의 성질 상, 자신과 계약하지 않은 모든 격이 딸리는 존재를 시선만으로 미치게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미치지 않았군요. 뭐 그건… 공포의 마왕이 당신의 혼을 거부했다는 이야기와 이어지기에 납득이 되는군요.”
  897.  
  898. “어째서입니까?”
  899.  
  900.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번과 똑같은 이유에요. 당신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901.  
  902. 김종현이 웃으며 말했다. 방 안이… 조금 춥게 느껴졌다. 이성민은 가볍게 몸을 떨면서 뒷목을 어루만졌다. 기분 탓일까. 차가운 칼날이 피부에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903.  
  904. “…내 혼이 다른 누군가의 것이기 때문에?”
  905.  
  906. “대답할 수 없습니다.”
  907.  
  908. “내 혼을 소유한 존재가 공포의 마왕보다 격이 높은 존재라서, 공포의 마왕이 나를 제물로 받지 못했다?”
  909.  
  910. “대답할 수 없습니다.”
  911.  
  912. 김종현은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맞다 틀리다, 머리를 끄덕거리거나 가로 저으면서 확인해 주는 것도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913.  
  914. “…므쉬는 내 혼을 받고 싶어 했는데.”
  915.  
  916. “대답할 수 없습니다.”
  917.  
  918. 결국 이성민은 이 문제에 대해 김종현에게 답을 받는 것은 포기했다. 김종현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919.  
  920. “…검은 심장.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921.  
  922. “…참 묘하단 말이지요.”
  923.  
  924. 끼익, 탁. 뒤로 기울였던 의자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김종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이성민의 가슴을 빤히 보았다.
  925.  
  926. “검은 심장… 당신은 허공의 심장이 갑자기 사라져, 당신의 몸에 흡수되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만. 내 ‘눈’에는 당신에게서 그런 이질적인 기운이 읽히지 않아요.”
  927.  
  928. “…예?”
  929.  
  930. “굉장히 묘하단 말이죠. 프레스칸이 아무리 나보다 수준 높은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없을 텐데… 이 경우에는 혼과 백의 연결고리를 생각해야 하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내가 보지 못할 리가… 마법이 아닌 주술적인 것인가? 하지만 결국은 같은 궤 안에 있을 터인데….”
  931.  
  932. 김종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김종현의 말은 더 이상 이성민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이 되어 있었다.
  933.  
  934. “아… 미안합니다. 이건 내 나쁜 버릇 중 하나에요. 어찌되었든, 나는 그 심장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해요. 아마 다른 마법사들도 당신의 몸 안에 있다는 심장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는 못할 겁니다.”
  935.  
  936. “…그건 다행이지만. 이게 대체 뭔지도 모르는데…”
  937.  
  938. “프레스칸이 연구했던 것은 궁극의 생명입니다.”
  939.  
  940. 김종현의 입 꼬리가 씰룩거리면서 올라갔다.
  941.  
  942. “그래서 프레스칸은 키메라 연구에 매진했지요. 프레스칸이 퇴출된 원인이 되었던 인체 실험 역시, 궁극의 생명을 만들기 위한 실험의 일환이었습니다. 그가 10년 동안 같은 연구를 했고, 그 심장을 가진 키메라가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를 저 꼴로 만들었다면… 당신에게 흡수된 심장은, 프레스칸이 바라였던 궁극의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943.  
  944. “나는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945.  
  946. “아직 심장이 몸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사실은 여기서 당신의 가슴을 갈라 확인해 보는 것이 빠른데…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목숨을 보장해 줄 수가 없어요.”
  947.  
  948. “사양하겠습니다.”
  949.  
  950.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아, 그리고. 프레스칸에게 정신 제압을 당했다고 했었지요?”
  951.  
  952. “아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953.  
  954. “하지만 정신도 멀쩡하고, 미치지도 않았군요. 후후! 당신의 가호는 굉장히 특별해요. 그 정도로 우수한 가호에 보호되고 있는 것이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955.  
  956. 그렇게 중얼거리던 김종현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957.  
  958. “아. 나는 당신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지만, 당신의 의문에 대답해 줄만한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959.  
  960. “누구입니까?”
  961.  
  962.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라면, 당신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963.  
  964.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965.  
  966. “가장 좋은 것은 프레스칸을 찾아가 묻는 것인데…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아니면, 다른 ‘신’을 찾아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967.  
  968. “신?”
  969.  
  970. “예. 므쉬는 당신의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을 피했죠. 하지만 다른 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971.  
  972. 아.
  973.  
  974. 이성민은 짧은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드리무어에 있는 시간의 신. 므쉬를 통해 존재를 알게 된 시간의 신이라면, 이성민의 궁금증에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975.  
  976. “…알겠습니다.”
  977.  
  978. “제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979.  
  980.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981.  
  982. 이성민이 그렇게 대답했을 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종현이 문쪽을 바라보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983.  
  984. “이성민님?”
  985.  
  986. 문 너머에 서있는 것은 위에서 보았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987.  
  988. “로이드님이 눈을 뜨셨습니다. 로이드님이 이성민님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시는데,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989.  
  990.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김종현을 힐긋 보았다. 김종현은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991.  
  992. “저와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지 않습니까?”
  993.  
  994.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995.  
  996. “뭘요. 다음에 또 오십시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997.  
  998. 김종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999.  
  1000. ======================================
  1001. < 심장-6 >
  1002.  
  1003.  
  1004.  
  1005. “신세를 졌군.”
  1006.  
  1007. 로이드는 큼지막한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이고 있었다. 고갈된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심각했던 상처가 재생되었다고는 하나 정신적인 피로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진한 피로감이 잔존해 있었다.
  1008.  
  1009. “괜찮습니다.”
  1010.  
  1011. “아니. 정말로 큰 신세를 졌어.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깊은 지하에서 홀로 죽었겠지. 그리고 그 심장도 파괴할 수가 없었을 거야.”
  1012.  
  1013. 로이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가슴 한 구석이 찔끔하였지만, 그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종현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마법사도 이성민이 갖게 된 심장을 간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1014.  
  1015. “자네가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던데.”
  1016.  
  1017. “아… 예. 운이 좋았습니다.”
  1018.  
  1019. 김종현이 말했던 대로, 로이드는 이성민이 검은 심장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성민이 인과율이 비틀어진 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조차 간파하지 못할 정도라면, 이성민의 인과율이 비틀어진 것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경지에 오른 흑마법사 정도뿐일 것이다.
  1020.  
  1021. “정말로 운이 좋았군. 프레스칸은… 미친 놈이야. 그 놈의 손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1022.  
  1023. “그… 프레스칸이라고 하는 리치 말입니다. 그 던전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1024.  
  1025. “응?”
  1026.  
  1027. 이성민의 질문에 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문스러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성민은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는 조금 겁에 질린 듯, 그리고 또 선망어린 눈을 하고서 로이드를 바라 보았다.
  1028.  
  1029. “금색 마탑주라면 마법사 길드 안에서도 정점에 가까운 실력을 가진 마법사 아닙니까?”
  1030.  
  1031. “으흠. 뭐 꼭 그렇지는 않고…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히겠지.”
  1032.  
  1033. “그런 로이드님이 중상을 입고 쓰러지시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프레스칸은 던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1034.  
  1035. “…뭐… 이건 꼭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니니.”
  1036.  
  1037. 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1038.  
  1039. “궁극의 생명일세.”
  1040.  
  1041. 김종현이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1042.  
  1043. “10년 전부터 그랬어. 프레스칸은 궁극의 생명을 연구하고 있었고, 그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금기를 범했네. 본래는 추방과 동시에 죽였어야했지만… 프레스칸이 도주한 바람에 내가 추살 임무를 맡게 되었지. 10년에 걸친 추격 끝에 간신히 놈의 던전을 발견했고.”
  1044.  
  1045. 로이드는 거기서 한 번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1046.  
  1047. “…10년 동안… 프레스칸의 연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더군. 본래 심장은 두 개였네. 그 중 하나가 내 눈앞에서 왠…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정말 끔찍하게 강했어.”
  1048.  
  1049. “여자아이… 라고요?”
  1050.  
  1051. “외견은 고작해야 열댓 살 정도였는데. 굉장히… 기묘했지. 내 마법을 영창 없이 디스펠하기도 하고, 팔다리의 형태가 바뀌고… 정말 끔찍하다고 느낀 것은, 그 계집아이가 심장을 씹어 먹었다는 것이야.”
  1052.  
  1053. “심장을요?”
  1054.  
  1055. “맞아. 배가 고프다면서… 내 눈앞에서 씹어 먹더군.”
  1056.  
  1057. 가슴이 뻥 뚫려 죽은 제온의 시체를 떠올린다. 로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몸 안에 들어와 뛰고 있는 검은 심장. 이것이 괴물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1058.  
  1059. “덕분에 프레스칸을 놓쳤어. 그 괴물 계집만 없었어도 프레스칸을 한 번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놈의 라이프 포스 배슬을 추적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고. …후우! 아니, 이 경우에는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1060.  
  1061. 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로이드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1062.  
  1063. “도와줘서 고맙네. 약속했던 대로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특별히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무조건, 전부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은 못하겠지만. 최대한 자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네.”
  1064.  
  1065. 그 말에 이성민은 잠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가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것은 일종의 백지수표라고 할 수 있다.
  1066.  
  1067. 그런데… 딱히 부탁하고 싶을만한 것이 없다. 마법서라도 받아볼까 싶었지만,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데 마법까지 익힐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티펙트를 받자니 뭘 받아야 될 지도 모르겠고, 당장 필요한 아티펙트도 없었다.
  1068.  
  1069. “…나중에 부탁해도 될까요?”
  1070.  
  1071. “빚을 지워두겠다는 뜻인가?”
  1072.  
  1073. 로이드가 쿡쿡 웃으면서 물었다.
  1074.  
  1075.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단지, 지금 당장은 부탁드릴 것이 없어서요.”
  1076.  
  1077.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알겠네. 나는 보통 금색 마탑에 있으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하게.”
  1078.  
  1079. “프레스칸을 추격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1080.  
  1081. “마법사가 두 발로 직접 뛸 리가 없잖은가.”
  1082.  
  1083. 이성민의 질문에 로이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1084.  
  1085. 로이드와의 대화를 끝내고서, 이성민은 용병 길드로 돌아왔다. 이성민은 조영에게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성민의 이야기에 조영이나 다른 용병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성민을 제외한 다른 용병들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1086.  
  1087. 던전에서의 몰살 때문에 베헨게르 용병 길드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길드장인 베른도 죽었고, SS급 용병인 제온도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S급과 A급 용병들이 죽었다. 제온과 S급 용병들의 사망 때문에 코로나 용병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봐야 옳았다.
  1088.  
  1089. 새벽이 돼서야 이성민은 용병 길드를 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 온 이성민은 피로감을 느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1090.  
  1091. ‘조만간 베헨게르를 떠나야겠어.’
  1092.  
  1093. 이성민은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선 드리무어에 있는 시간의 신 데니르를 찾아가는 것이 목표다.
  1094.  
  1095. 하지만 그 전에. 이성민은 미리 챙겨두었던 아공간 포켓들을 꺼냈다. 다른 용병들의 아공간 포켓 안에는 돈과 포션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제온의 아공간 포켓에서 대환단과 소환단을 꺼내니 아쉬움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1096.  
  1097.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면서 소환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선 소환단을 복용해 볼 생각이었다. 영약을 복용해 본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소환단은 이성민이 제나비스에서 복용했던 성령단과는 비교 할 수 없는 효능을 가진 영약이다.
  1098.  
  1099. 이성민은 조금 경건한 마음까지 품고서 소환단이 들어 있는 목갑을 열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소환단을 꺼냈다.
  1100.  
  1101. 입 안으로 넣은 소환단은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 목구멍 안으로 넘어 갔다. 꿀꺽, 하고 삼키고서. 이성민은 바로 자하신공을 운용했다.
  1102.  
  1103. “…응?”
  1104.  
  1105. 자하신공을 운용하기 전에.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고서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성령단을 먹었을 때에는 입에 넣자마자 이것이 영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구멍으로 넘어 온 거대한 내공을 기혈로 돌리고 단전으로 갈무리하는 것에 제법 고생했었다.
  1106.  
  1107.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1108.  
  1109. “…뭐야?”
  1110.  
  1111. 이성민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행공을 해 보았다. 자하신공의 구결에 따라 단전의 내공을 조금 건드려 본다.
  1112.  
  1113. 이성민은 할 말을 잃고서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단전 안에… 거대한 내공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의식하고자 하니 몸이 겪은 세세한 변화들이 느껴졌다. 단전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져 있었고, 이전보다 내공의 양이 몇 배나 불어 있었다.
  1114.  
  1115. 이성민은 그 내공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환단의 내공이다. 복용한 소환단의 내공이, 정제의 과정 없이 그대로 단전으로 흘러들어가 쌓여 버렸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든 영약은 반드시 정제의 과정이 필요하다. 영약이 가진 내공의 절반만 취해도 잘 취한 것이라는 것이 보통이다.
  1116.  
  1117. ‘운기조식도 하지 않았는데 내공이 그대로 쌓였어. 대체 왜…?’
  1118.  
  1119.  
  1120.  
  1121. 검은 심장. 이성민은 탄성을 지르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마 이것이 검은 심장이 가진 능력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영약의 내공을 그대로 흡수하는 것. 자세한 능력은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의 이성민이 느끼는 것은 그것이었다.
  1122.  
  1123. ‘그러고 보니… 위지호연이 말했었지. 자신이 익힌 천마신공은 모든 내공심법에 필수적인 정제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고.’
  1124.  
  1125. 위지호연은 그것이 천마신공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며, 천마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특별한 체질을 타고나야 한다고 말했었다. 설마 검은 심장을 먹게 되면서 그런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일까. 이성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1126.  
  1127. 몇 시간 정도 자하신공을 운용해 보았지만, 자연지기를 내공으로 정제하는 것에는 그리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체질의 문제가 아니라 천마신공의 특별함인 모양이었다.
  1128.  
  1129. 아직 확신하기에는 일렀기 때문에, 이성민은 대환단을 꺼냈다. 설마 소환단과 대환단을 같이 복용하게 될 줄이야. 이성민은 입을 벌려 대환단을 삼켰다. 소환단보다 조금 크기가 크기는 했지만, 대환단 역시 입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르르 녹아 목으로 넘어갔다.
  1130.  
  1131. 이번에는 확실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자각했다. 목으로 넘어 온 진한 내공은 기혈을 타고 쭉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단전에 도달해 쌓였다.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느낌에 이성민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1132.  
  1133. 소환단과 대환단의 내공을 그대로 단전에 쌓은 것이다. 그렇게 쌓은 내공은 여태까지 이성민이 쌓아 온 내공보다 몇 배나 많았다. 그것은 이성민이 가진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를 극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134.  
  1135. 이성민이 무공에 입문한 것은 이제 고작 4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비록 위지호연의 내공을 받고, 성령단을 복용하여 내공의 증진을 얻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도달한 경지에 비해 내공이 심하게 부족했다. 므쉬의 산을 거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절정의 벽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내공심법을 연마하며 절정의 벽을 뛰어넘은 다른 무인들과 비교하자면 내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1136.  
  1137. 하지만 그런 단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의 이성민은 비슷한 경지이거나 몇 수 앞서 있는 무인들을 압도할 수 있을만한 내공을 갖게 되었다. 한참 동안 운기조식을 하면서 단전의 내공을 확인한 이성민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어 있었다. 잠 한 숨 자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 개운함을 느꼈다.
  1138.  
  1139. 소환단과 대환단도 흡수했으니 다시 김종현을 찾아 가 마갑의 해주를 부탁할까 했지만, 그 전에. 이성민은 백보신권과 달마심법, 나한보법을 꺼냈다. 달마심법과 나한보법은 무시하고, 이성민은 백보신권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1140.  
  1141. 기를 쏘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높은 수준의 심법 깨달음과 더불에 많은 내공이 소모된다. 소림의 백보신권은 백보 밖에서 권격을 날리는 권법이며, 권법에 기를 실어 쏘아내는 것이 그 원리다. 현재 이성민의 경지로는 기를 쏘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백보신권을 익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이성민에게 도움이 되었다. 무공 자체가 기를 쏘아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익히기만 한다면 그 요령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42.  
  1143. 나한보법, 달마심법도 뛰어난 무공이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백보신권 이외에 다른 무공을 익힐 생각은 없었다. 백보신권을 익힌 뒤에, 이성민은 네블을 불렀다.
  1144.  
  1145. “부르셨습니까?”
  1146.  
  1147.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네블이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성민은 들고 있던 무공서들을 네블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1148.  
  1149.  
  1150. ======================================
  1151. < 동족-1 >
  1152.  
  1153.  
  1154.  
  1155. “흐음.”
  1156.  
  1157. 이성민에게서 무공 서적을 건네받은 네블은 그것들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1158.  
  1159. “소림의 무공이군요. 백보신권에 달마심법, 나한보법… 신공절학이라고 까지는 할 수가 없지만, 가치 있는 무공인 것은 확실합니다.”
  1160.  
  1161. “팔면 얼마나 나올까요?”
  1162.  
  1163. “파는 것은 그리 추천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1164.  
  1165. 네블의 대답에 이성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166.  
  1167. “판매가 안 되는 겁니까?”
  1168.  
  1169. “아뇨. 그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회원님이 원하는 모든 물건을 구입해 드립니다. 비록 그것이 바로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시세를 따져서 값을 쳐드리는데…”
  1170.  
  1171. 그렇게 말하고서, 네블은 쓰게 웃었다.
  1172.  
  1173. “소림의 무공은 매물이 많습니다. 특히 소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백보신권이나 달마심법, 나한보법의 경우에는 물량이 너무 많아 남아돌고 있어요. 저희는 구입한 무공을 경매나 상인 길드, 암시장을 통해 판매합니다.
  1174.  
  1175. 그런데… 소림은 워낙에 유명한 문파이다 보니까 무공 매물이 많아요. 원하신다면 구입은 해드리겠지만, 제 값을 쳐드리기는 힘듭니다.”
  1176.  
  1177. “그 정도입니까?”
  1178.  
  1179. “소림이니까요. 아… 괜찮으시다면 이 무공의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1180.  
  1181. “…꼭 말해야 합니까?”
  1182.  
  1183. “저는 이성민님의 전담 중개인입니다. 이성민님이 이 무공들을 어떤 방법으로 얻으셨던 간에, 저는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겁니다. 제가 출처를 묻는 것은, 그에 따라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184.  
  1185. 그 말에 이성민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 큰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민이 제온의 무공을 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이성민이 나서서 제온을 살해한 것도 아니었다.
  1186.  
  1187. “…이 무공서들을 소유하고 있던 원 주인이 죽어서, 그의 시체를 수습하다가 무공서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88.  
  1189. “그렇다면 이것들을 소림으로 가져가 돌려드리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1190.  
  1191. 네블이 곧바로 대답했다.
  1192.  
  1193. “소림은 명문정파입니다. 구파일방으로 꼽히는 열 개의 강대한 정파들 중에서도 특히나 그 세가 강성한 곳입니다. 그들은 정통적인 불가 문파이기 때문에 악행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성민님이 이 무공서들을 소림에 가져가 돌려준다면, 그들은 체면 때문이라도 그만한 보상을 해 줄 겁니다.”
  1194.  
  1195. “보상이라면?”
  1196.  
  1197. “이 정도의 무공서를 가져간다면 소환단 하나 정도는 주겠지요. 대환단까지는 힘들 것 같고. 최소한 소림과 인연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나쁜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무공서들을 저희가 구입해 드린다고 해도, 소환단 하나를 살만한 가격에는 못 미칩니다.”
  1198.  
  1199. 네블의 말에 이성민은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세 권이나 되는 무공서를 판매하는데, 그렇게 얻은 돈으로 소환단 하나도 살 수가 없다니.
  1200.  
  1201. ‘…소림이 어디에 있더라…?’
  1202.  
  1203. 이성민은 기억을 더듬었다. 구파일방은 각지에 분파를 두고 있지만, 본산은 하나씩 존재한다. 소림의 본산은 베헨게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인 ‘브레던’에 위치해 있었다.
  1204.  
  1205. ‘브레던과 드리무어는 제법 가까워. …브레던에 들렸다가 드리무어로 가면 되겠군.’
  1206.  
  1207. 분파에 가는 것보다는 본산으로 가서 무공서를 돌려주는 편이 나아 보였다. 우선 무공서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서. 이성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1208.  
  1209. “혹시. 에레브리사의 회원 중에서 저처럼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가 또 있습니까?”
  1210.  
  1211. 본래 이성민의 실력으로는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될 수가 없었다. 절정고수의 수준을 넘었을 때에도 자격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초절정의 실력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마법사로 친다면 대마법사의 경지라고 봐야 했다.
  1212.  
  1213. 프레스칸이 말하기를, 이성민처럼 인과율이 비틀어졌던 어떤 존재는 프레스칸이 감히 덤빌 생각도 하지 못한 괴물이라고 했었다. 그 정도의 괴물이라면 에레브리사의 회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1214.  
  1215. “…그건… 대답해 드리기 힘들군요. 다른 회원에 대한 정보는 극비입니다.”
  1216.  
  1217. “있는지 없는지도 말해줄 수 없는 겁니까?”
  1218.  
  1219. “예. 죄송합니다.”
  1220.  
  1221. 결국 소득은 없었다. 프레스칸을 다시 만나지 않는 한, 인과율이 비틀어진 다른 존재가 누구인지 이성민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1222.  
  1223. 네블을 돌려보낸 뒤에,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저런 신경 쓰이는 일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길이 막막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목표점은 확실히 정했다. 브레던에 가 소림의 본산을 방문하고, 무공서들을 돌려준다. 운이 좋다면 소환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224.  
  1225. 대환단과 소환단을 손실 없이 흡수하게 되면서 이성민의 내공은 큰 증진을 거두었다. 하지만 내공만 무식하게 많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이성민은 절정의 끝에 존재하는 벽의 존재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226.  
  1227. ‘아직… 멀었어.’
  1228.  
  1229. 던전에서의 일은 이성민에게 확실한 현실을 알려 주었다. 이성민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약한지. 절정고수가 되고, 오우거 키메라를 쉽게 쓰러트리면서… 이성민은 자기 자신이 굉장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1230.  
  1231. 현실은 아니었다. 이성민보다 강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비록 프레스칸이 리치에다가 흑색 마탑주였다고는 해도, 그에게 어린 아이처럼 농락당한 것은 이성민으로 하여금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1232.  
  1233. 위지호연이라면 어땠을까.
  1234.  
  1235. 아니. 위지호연을 데리고 올 것도 없다. 백소고만 하여도 제온보다는 훨씬 강했다. 이성민이 산에 들어갔을 시점에서부터 백소고는 절정을 뛰어넘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초절정고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1236.  
  1237. 7년 후의 던전에서 백소고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더, 더 강해져야만 했다.
  1238.  
  1239. ‘마갑의 덕은 볼 수 없었어. 아니. 이 경우에는 오히려 그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1240.  
  1241. 강제적인 계약을 맺지 않게 된 것이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아직 몸을 덮고 있는 마갑을 내려 보았다. 입은 것은 좋았지만…
  1242.  
  1243. “어떻게 벗어야 되는 거야?”
  1244.  
  1245.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렸다.
  1246.  
  1247. *
  1248.  
  1249. 이틀이 지난 뒤, 로이드는 베헨게르를 떠났다. 큰 타격을 받은 베헨게르 용병 길드는 임시적으로 조영이 지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루드가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에게 지부장 자리가 인수인계된다는 모양이었다. 조영 스스로가 지부장의 자격이 없다고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50.  
  1251. 차기 지부장의 자리에는 이성민의 이름도 언급되었지만, 이성민은 학을 때면서 거절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지부장이 되어 베헨게르에 얽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252.  
  1253. 용병 길드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성민은 마법사 길드를 찾아갔다. 김종현에게 부탁해 두었던 마갑의 해주를 받기 위해서였다.
  1254.  
  1255. “다 되었습니다.”
  1256.  
  1257. 해주를 끝낸 김종현이 마갑을 돌려주었다. 이성민은 마갑을 건네받고서 내공을 불어 넣었다. 마갑이 활짝 열리더니 이성민의 몸을 덮었다. 계약이 사라지기는 했어도 마갑 자체에 인챈트 되어 있는 다른 마법들은 그대로였다. 내공을 불어 넣으면 마갑을 입을 수 있고, 벗는 방법도 그와 똑같았다.
  1258.  
  1259. “곧 베헨게르를 떠날 생각입니다.”
  1260.  
  1261. “그렇습니까?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1262.  
  1263. “우선 브레던에 있는 소림의 본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1264.  
  1265. “먼 길을 떠나시는 군요. 이곳에서 브레던까지는 못해도 몇 달은 걸릴 텐데.”
  1266.  
  1267. “볼 일이 있어서.”
  1268.  
  1269. “소림과 인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1270.  
  1271. “네.”
  1272.  
  1273. 이성민은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 말에 김종현은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1274.  
  1275. “당신과는 제법 친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 아쉽군요.”
  1276.  
  1277. “…뭐.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까?”
  1278.  
  1279. “그렇겠지요. 저라고 해서 계속 베헨게르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으니. 아… 그러고 보니.”
  1280.  
  1281.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던 김종현이 이성민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1282.  
  1283. “스칼렛 레시르. 그 여자도 베헨게르를 떠난다고 하던데… 설마 같이 가시는 겁니까?”
  1284.  
  1285. “예?”
  1286.  
  1287. “아니었나 보군요. 둘이 꽤 친해 보이길래, 영락없이 그런 사이인줄 알았습니다만.”
  1288.  
  1289. 스칼렛이 베헨게르를 떠난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에 스칼렛은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었다. 머리를 갸웃거리는 이성민을 향해 김종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1290.  
  1291. “뭐. 본인도 아닌 제가 가타부타 떠들 일은 아니겠지요. 스칼렛님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1292.  
  1293. 스칼렛과도 제법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정 없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민은 김종현의 방을 나와 스칼렛의 방으로 향했다. 스칼렛의 방문을 몇 번 두드리자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1294.  
  1295. “뭐야?”
  1296.  
  1297. 문을 열어 준 스칼렛이 두 눈을 치켜뜨고서 이성민을 바라보았다. 그 매선 시선에 이성민은 조금 움찔하였으나, 스칼렛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방의 풍경을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장판처럼 지저분했던 스칼렛의 방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아예 다른 방처럼 보이고 있었다.
  1298.  
  1299. “…떠나신다더니. 진짜로?”
  1300.  
  1301. “누구한테 들었어? 아, 물어볼 필요도 없군. 김종현, 그 또라이가 말한 거지? 그 새끼는 왜 남 일을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거야?”
  1302.  
  1303.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풀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이성민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전생의 기억 상, 스칼렛 레시르가 베헨게르에 살았다는 소문은 없었다. 스칼렛이 베헨게르에 머물렀던 것은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이고, 그 뒤에는 베헨게르를 떠난다. 그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지금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1304.  
  1305. “도시에 처박혀 있으니 수행이 잘 안 돼. 나도 몰랐는데, 나는 도시보다는 그… 좀 지저분하고 말이야. 응? 산 같은 곳에서 구닥다리 수행을 하는 편이 더 잘 맞나 봐.”
  1306.  
  1307. “설마 또 므쉬의 산에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1308.  
  1309. “미쳤어? 내가 거기를 왜 가? 난 다시는 거기에 안 가. 그 지랄 맞은 곳! 으으… 그리고, 넌 모르는 모양인데. 므쉬의 산에 수행했다가 나오고, 다시 들어간다면 이전의 금제가 그대로 이어져.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다시 므쉬의 산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 엿같은 금제들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말이야.”
  1310.  
  1311. 그건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말이었다. 만약 산을 나오는 것으로 금제가 초기화 된다면, 그를 악용하는 방법도 충분히 존재할 테니까.
  1312.  
  1313. “어쨌든 므쉬의 산에는 안 가. 일단… 조금 돌아다녀 볼까 해. 그러다가 적당히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할 생각이야.”
  1314.  
  1315. “아… 그렇군요.”
  1316.  
  1317. “그거 하나 물어보자고 날 찾아 온 거야? 왜. 내가 너한테 말도 없이 떠날까 봐?”
  1318.  
  1319. 그렇게 이죽거리던 스칼렛은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냈다.
  1320.  
  1321. “그렇게 정없는 사람은 아니야. 그냥… 응. 아직 마음만 먹고 준비도 다 안 해놨으니까. 준비가 끝나면 말해주려고 했어.”
  1322.  
  1323.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사실은 저도 베헨게르를 떠날 생각이라서, 그 전에 인사를 드리려고 온 겁니다.”
  1324.  
  1325. “뭐? 베헨게르를 떠나? 왜? 네가 여길 떠나서 어디를 가게?”
  1326.  
  1327. “…못 떠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1328.  
  1329. “그래서 어디를 가겠다는 건데?”
  1330.  
  1331. “일단은 브레던 쪽으로 목표를 잡고 있습니다.”
  1332.  
  1333. “브레던? 겁나 멀리도 가네. 가본 적은 있고?”
  1334.  
  1335. “없습니다만, 뭐 지도를 보고 가면…”
  1336.  
  1337. “같이 가면 되겠네.”
  1338.  
  1339. 스칼렛이 이성민의 말을 뚝 끊고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스칼렛의 갑작스런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1340.  
  1341. “…네?”
  1342.  
  1343. “같이 가자고. 나도 좀 돌아다닐 생각이었으니까. 혼자 가는 것보다는 말동무라도 있는 것이 서로 좋잖아? 별로 외롭지도 않고.”
  1344.  
  1345. “그, 건 그렇겠지만. 그래도 좀…”
  1346.  
  1347. “왜. 내가 네 발목이라도 잡을까봐 그래?”
  1348.  
  1349. 스칼렛은 그렇게 이죽거리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성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1350.  
  1351. “까불지 마, 꼬맹아. 내가 너보다 훨씬 셀걸? 오히려 나랑 다니면 네가 편하지. 너보다 강한 놈이 나타난다면 내가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1352.  
  1353. “아니. 그래도 저는 S급 용병에 절정 고수인데…”
  1354.  
  1355. “어이구, 그러세요? 이 귀염성 없는 꼬맹아. 그냥 얌전히 고맙습니다 하고 이 누나랑 같이 다녀.”
  1356.  
  1357. 머리를 쓱쓱 문지르는 스칼렛의 손길에 이성민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1358.  
  1359. 그래도 알맹이는 이제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데. 그보다 연하인 스칼렛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1360.  
  1361. ‘…아니. 잠깐.’
  1362.  
  1363. “그런데. 스칼렛님은 몇 살입니까?”
  1364.  
  1365. “죽을래?”
  1366.  
  1367. 순수한 호기심으로 던진 질문에, 스칼렛이 눈을 부라렸다.
  1368.  
  1369. “여자의 나이는 묻는 것 아니야.”
  1370.  
  1371. 아마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1372.  
  1373. ======================================
  1374. < 동족-2 >
  1375.  
  1376.  
  1377.  
  1378. 루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인사라도 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루드의 의뢰가 언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르고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것인지 모르는 이상, 무턱대고 베헨게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1379.  
  1380. 사흘을 더 기다려 본 뒤에도 루드 쪽에서 소식이 없기에, 결국 이성민은 베헨게르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없었다. 살고 있는 집도 이성민의 것이 아니었고, 안에 있는 가구 중에도 이성민의 것은 없었다.
  1381.  
  1382. 베헨게르를 떠나면서 이성민이 준비한 것은 며칠 동안 사냥을 하지 않아도 버텨 줄 수 있는 식량 정도뿐이었다. 그것도 풍족하게 챙긴 것은 아니었다. 아공간 포켓이 있다고는 하지만, 쓸데없이 짐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1383.  
  1384. “뭐 이리 단출해?”
  1385.  
  1386. 스칼렛은 그런 이성민의 모습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베헨게르의 북쪽 성문에서 만난 스칼렛은, 누가 봐도 여행자라고 생각할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큼지막한 로브를 입어 모자까지 쓰고, 등 뒤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었다.
  1387.  
  1388. 이성민은 그런 스칼렛의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반쯤 벌렸다.
  1389.  
  1390. “…아공간 포켓은 안 쓰시는 겁니까?”
  1391.  
  1392. “이게 내 아공간 포켓이야.”
  1393.  
  1394. 스칼렛이 등 뒤에 메고 있는 가방을 힐긋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저 정도 크기의 아공간 포켓은 처음 본다.
  1395.  
  1396. “…짐이 많으신 겁니까?”
  1397.  
  1398. “나는 그냥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연구를 하기 위해 떠나는 거야. 당연히 짐이 많을 수밖에 없지.”
  1399.  
  1400. 스칼렛이 등에 멘 가방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슬며시 스칼렛에게 다가가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1401.  
  1402. “제가 들어드리겠…”
  1403.  
  1404. “까불지 마. 내가 너한테 들어달라고 한 적 없잖아. 내 짐은 내가 들어.”
  1405.  
  1406. 스칼렛은 이성민의 손을 찰싹 때리면서 그렇게 쏘아 붙였다. 이성민은 찔끔하여 뒤로 물러서면서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3개월 정도, 베헨게르에서 스칼렛와 몇 번 만남을 가지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스칼렛 레시르라는 여자가 도대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1407.  
  1408. “자, 가자. 마차는 이미 빌려뒀어.”
  1409.  
  1410. “마차를 타는 겁니까?”
  1411.  
  1412. “그럼 당연히 마차를 타지. 너 설마, 브레던까지 걸어 갈 생각이었어?”
  1413.  
  1414. 스칼렛이 되묻자 이성민은 할 말을 잃고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성민이 생각했던 것은 마차보다는 말이었다.
  1415.  
  1416. “마차는 내 돈으로 빌렸어. 너한테 달라고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그래도. 마부는 못 구했거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마차는 끌 수 있지?”
  1417.  
  1418. “아… 네. 할 수 있습니다.”
  1419.  
  1420. “그건 다행이네.”
  1421.  
  1422. 전생에서 하급 용병이었을 시절에는 어떻게든 의뢰에 끼기 위해 온갖 종류의 일을 배웠다. 마차를 끄는 법도 그때 배워 두었다.
  1423.  
  1424. 의외로 스칼렛은 준비성이 뛰어났다. 마차에 매여져 있는 말들은 건강했고, 마차의 상태도 좋았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보수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당분간은 큰 문제없이 마차를 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1425.  
  1426. “그럼… 방향은 어디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1427.  
  1428. 이성민은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며 물었다. 에리아가 워낙에 땅덩어리가 넓은 탓에 지도도 그렇게 자세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방향 정도는 잡는 것이 가능했다.
  1429.  
  1430.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나는 딱히 목적지를 정해둔 것이 아니니까.”
  1431.  
  1432. 스칼렛은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마차의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이성민을 돌아보면서 로브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1433.  
  1434. “그냥. 방 안에 있기만 하니까 답답해서. 어디로 가도 상관은 없어.”
  1435.  
  1436. 이성민은 그 말에서 전해지는 스칼렛의 어조에 묘한 시선을 보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방금 전에 느꼈던 스칼렛의 어조는 옅은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437.  
  1438. “뭐해? 출발하지 않고.”
  1439.  
  1440. 스칼렛은 마차에 올라와 마부석에 앉은 이성민의 곁에 앉았다. 이성민은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 고삐를 당겼다.
  1441.  
  1442.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443.  
  1444. *
  1445.  
  1446.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447.  
  1448. 던전을 습격해 온 로이드는 10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프레스칸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보낸 10년은 프레스칸과 로이드 사이에 이전보다 더욱 높은 벽을 만들어 놓았다.
  1449.  
  1450. ‘하지만 살았지.’
  1451.  
  1452. 괴물 자식. 리치도 아니고 인간인 주제에. 아마 마법이라는 분야의 천재가 존재한다면, 그건 로이드를 말하는 것이겠지. 프레스칸은 그것을 확신했다. 로이드는 프레스칸이 보았던 그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난 괴물이었다.
  1453.  
  1454.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번에는… 운이 너무 없었다. 프레스칸이 만전의 상태였더라면 로이드를 죽여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마법사 길드가 뒤집어져서 어떻게 해서든 프레스칸을 잡아 죽이려 했겠지만 말이다.
  1455.  
  1456. ‘내 몸이 멀쩡하지 않아서 간신히 호각… 아니. 내가 조금 밀렸어.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으니…’
  1457.  
  1458. 프레스칸이 리치가 아닌 평범한 인간 마법사였다면 그 던전에서 죽었을 것이다. 로이드와의 싸움에서 프레스칸은 죽음 직전까지 몰렸었다. 한 번 죽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마력을 잃게 되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로이드를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마법사 길드의 추격은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
  1459.  
  1460. 프레스칸은 아쉬움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프레스칸의 앞에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우두커니 서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입은 옷이 꽤 잘 어울렸지만,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1461.  
  1462. “아이네.”
  1463.  
  1464. 프레스칸이 조심스레 소녀를 불렀다. 궁극의 생명을 창조하고 싶었다. 그런 비원을 목표로 해서 몇 십 년을 연구했고, 최근에 간신히 결실을 맺은 결과가 저 키메라 소녀. 이름은 아이네로 붙였다. 프레스칸이 평생을 바라였던 비원의 결정체이긴 하였지만, 아이네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다. 육체도, 심장도. 뒤늦게 조율은 하고 있었지만 아이네의 완전한 조율은 프레스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465.  
  1466. “아이네.”
  1467.  
  1468.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아이네는 프레스칸을 돌아보았다. 육체와 혼의 부조화. 사실 그것보다 큰 문제인 것은, 아이네가 프레스칸의 말을 그리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혼을 심장과 육체에 깃들게 하면서 복종 각인이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것일까. 이런 저런 문제가 많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아이네를 조율할 수는 없었다.
  1469.  
  1470. 프레스칸은 심한 상처를 입었다. 비록 육체에 구애받지 않는 리치라고 해도, 대마법사인 로이드의 공격은 프레스칸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안겨 주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요양해야만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느슨하게 새겨진 복종 각인이라고 하여도, 아이네가 프레스칸을 죽이지 않는 것은 복종 각인이 어느 정도는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1471.  
  1472. “슬슬 다녀오렴.”
  1473.  
  1474. “알았어요.”
  1475.  
  1476. 아이네가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프레스칸의 말을 아주 거역하지는 않았다.
  1477.  
  1478. 아이네의 몸이 프레스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법은 아니다. 단순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을 뿐이다. 프레스칸은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1479.  
  1480. 프레스칸이 도주한 곳은 본래의 던전이 있던 위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을 노린 것이 아니라, 급하게 도주하면서 그리 먼 곳으로 도망치지 못했을 뿐이었다.
  1481.  
  1482. ‘심장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1483.  
  1484. 프레스칸은 한숨을 삼키면서 그를 기도했다. 급하게 도주하느라 남은 심장을 챙기지 못했다. 로이드를 죽이지 못했으니, 심장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아이네를 보내 심장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1485.  
  1486. 프레스칸의 은신처를 뛰쳐나온 아이네는 곧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아이네는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이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피부 아래가 간질거리는 불쾌감 속에서 아이네는 머리를 돌렸다.
  1487.  
  1488.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네의 신경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프레스칸은, 아버지는 심장이 남아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 보고 오라고 부탁했었는데.
  1489.  
  1490. ‘나중에.’
  1491.  
  1492. 아이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프레스칸의 부탁을 뒤로 미뤄버렸다.
  1493.  
  1494. 곧 있으면 해가 저물 것 같았기에, 마차를 끄는 것을 그만 두었다. 밤을 새가며 달린다면 말의 피로도 쌓이고 마차도 빠르게 노후될 것이다. 이성민은 적당한 평지에 마차를 멈추고서 말을 메어두었다.
  1495.  
  1496. “오늘은 여기서 노숙하도록 하죠.”
  1497.  
  1498. “응.”
  1499.  
  1500. 이곳까지 오면서, 스칼렛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성민이 마차를 끄는 동안 스칼렛은 마부석 쪽에 앉아 마도서를 읽었다. 길이 험해 많이 흔들렸는데도 그녀의 독서는 멈추지 않았다. 과연 미래의 대마법사. 집중력 하나는 대단한 것 같았다.
  1501.  
  1502. “…노숙에 익숙하십니까?”
  1503.  
  1504. “너 되게 이상한 질문을 한다. 나도 므쉬의 산에서 거의 2년동안 살았어. 씻지도 못하고 옷도 못 갈아입고 말이야. 노숙? 익숙하지. 아직까지는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맨 바닥에 자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정도인걸.”
  1505.  
  1506. 타악. 스칼렛이 읽고 있던 마도서를 덮으면서 대답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스칼렛이 읽고 있던 마도서는 그 자체로 둔기라 해도 충분할 정도로 묵직하고 두꺼웠다. 그녀는 그것을 마차 안에 대충 던져 두었다.
  1507.  
  1508. “그럼, 노숙 준비를…”
  1509.  
  1510. “준비? 무슨 준비?”
  1511.  
  1512. “장작 같은 것을 모아 와야…”
  1513.  
  1514. “너는 마법사를 뭐라고 생각 하는 거야?”
  1515.  
  1516. 이성민의 말에 스칼렛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되물었다. 스칼렛은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가까이 있는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영창도 없이 즉발로 마법이 발현되었다. 높다란 곳에 달린 굵직한 나뭇가지가 뚝 하고 부러져 스칼렛의 발밑으로 날아왔다. 스칼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1517.  
  1518. 펑! 작은 폭발음과 함께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1519.  
  1520. “귀찮은 일을 안 하게 해주는 것이 마법이야. 상대를 죽이고 그런 것만이 마법은 아니라고.”
  1521.  
  1522. “아… 예.”
  1523.  
  1524. “하여튼, 무공을 익힌 놈들은 다 이렇다니까. 무식해서 몸을 고생시켜. 너도 마법 몇 가지를 익히고 있잖아. 그러면 마법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할 궁리를 하라고.”
  1525.  
  1526.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성민은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고 스칼렛의 근처에 얌전히 앉았다.
  1527.  
  1528. “헤이스트에 스트렝스,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기본적인 마법이기는 하지만, 마법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과 가능성이 무한하게 바뀐다고. 너. 마법을 제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어?”
  1529.  
  1530. “아… 아뇨. 어디까지나 저는 무공을 중심으로 익혔…”
  1531.  
  1532. “사고가 굳었어. 무공이 좋으니까 무공만 익힌다고 해서 무공에 재능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어쩌면 너는 무공보다 마법에 재능이 있을 지도 몰라.”
  1533.  
  1534. 스칼렛이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법이다. 잘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하는 것은 굉장히 운이 좋은 경우고, 그런 경우를 천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35.  
  1536. 이성민의 경우에는 그 둘이 일치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민은 무공을 잘 하고 싶었지만, 무공을 잘 할 수가 없었다.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는 여태까지 수도 없이 들어서 새삼스레 떠올려 자괴감을 가질 것도 못 된다.
  1537.  
  1538. “어차피 여기서 브레던까지 몇 달은 가야 해. 그 동안 너한테 쓸만한 마법 몇 가지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
  1539.  
  1540. 조잘거리며 떠들던 스칼렛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보다 조금 늦게, 이성민은 감지했다. 이성민이 가진 육감이. 아니, 이것은 육감의 경고가 아니었다.
  1541.  
  1542. 왼쪽 가슴 안에서. 심장이 불쾌감을 내뿜고 있었다.
  1543.  
  1544. ======================================
  1545. < 동족-3 >
  1546.  
  1547.  
  1548.  
  1549. 갑작스런 돌풍이 장내를 덮쳤다. 스칼렛이 만들어낸 모닥불이 바람을 이기지 못해 꺼졌다. 아직 완전한 밤이 되지 않아 하늘은 붉은 노을로 젖어가는 중이었고, 덕분에 모닥불이 꺼졌어도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1550.  
  1551.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모닥불의 바로 근처에 서있었다. 소녀가 서있는 위치는 이성민과 스칼렛 둘 모두를 공격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1552.  
  1553. 어느 틈에? 둘은 동시에 그런 의문을 품었다. 소녀의 접근은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은 초고속이었기에, 스칼렛과 이성민은 소녀의 접근을 느끼지 못했다.
  1554.  
  1555. 아이네는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이네가 공복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스칼렛과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다행이었고, 운이 좋은 일이었다.
  1556.  
  1557. 스칼렛은 아이네를 알지 못했지만, 아이네에게서 발해지는 불길함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것은 스칼렛으로서는 낯선 불길함이었다.
  1558.  
  1559. “…뭐야 넌?”
  1560.  
  1561. 하지만 스칼렛은 주눅들지 않았다. 상황을 신경쓰지 않고 언제나 성격대로 행동한다는 점이 스칼렛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스칼렛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아이네와의 거리를 벌렸다.
  1562.  
  1563. ‘뭐하는 거야?’
  1564.  
  1565. 스칼렛은 경계와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스칼렛을 보았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시끄러이 울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이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노란색의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지그시 이성민의 얼굴을 보았다.
  1566.  
  1567. “…너…”
  1568.  
  1569. 이성민의 입술이 열렸다. 아이네와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낯설다는 느낌이 없었다. 만난 적이 없는데…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1570.  
  1571. 동질감.
  1572.  
  1573. “누구야?”
  1574.  
  1575. 이성민이 묻기 전에, 아이네가 먼저 그것을 물었다.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기분을 아이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아이네의 경우에는 이성민의 것과는 진행되는 감정의 변화가 달랐다. 동질감에 이어서 그것은 불쾌가 되었다. 그 즈음에 이성민도 똑같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느낀 ‘불쾌’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아이네와 이성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1576.  
  1577.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이네의 오른 팔이 비틀리는가 싶더니 시커먼 촉수처럼 변화했고, 그것이 이성민을 향해 쏘아졌다.
  1578.  
  1579. “야!”
  1580.  
  1581. 빽하고 지른 고함과 함께 스칼렛이 대응했다. 확하고 휘두른 손을 따라 마력이 요동쳤다. 이성민의 가슴을 노리고 쏘아진 촉수가 도중에 개입한 마력에 휘둘려 그 궤도를 바꾸었다. 이성민은 헉하고 숨을 삼키면서 급히 뒤로 물러섰다.
  1582.  
  1583. “정신 안 차려?! 뭐하고 있는 거야!”
  1584.  
  1585. 스칼렛이 굳은 얼굴로 외쳤다. 이성민은 느슨했던 정신에 날을 세우고서 몸을 날렸다. 바닥에 놓아두었던 창을 손에 쥐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1586.  
  1587. 아이네는 꿈틀거리는 촉수를 다시 팔로 바꾸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손을 쥐었다 펴면서 이성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이네는 스칼렛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이성민만을 보았다.
  1588.  
  1589. “너한테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어.”
  1590.  
  1591. 아이네가 중얼거렸다. 아이네가 성큼거리며 발을 뻗었을 때, 그녀의 발아래에서 새카만 마력이 솟구쳤다. 그 불길한 형태에 스칼렛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녀는 품 안에 손을 넣더니 큼직한 장갑을 꺼내서 양 손에 씌웠다.
  1592.  
  1593. “너는 누구야?”
  1594.  
  1595. 아이네가 묻는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는다. 위화감, 불길함. 뭔지 모를 적의. 아니, 그보다는 상대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까. 넉 놓고 죽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1596.  
  1597. “…이성민.”
  1598.  
  1599. “이성민? 이름이야? 나는 아이네야.”
  1600.  
  1601. 아이네가 대답했다. 그녀는 눈썹을 한 번 찡그렸다가, 입 꼬리를 실룩 올리면서 웃었다.
  1602.  
  1603. “그렇구나.”
  1604.  
  1605.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이네의 오른 팔이 다시 형태를 바꾼다. 인체 비율을 무시하며 비대해진 오른 팔은 우락부락한 괴물의 팔이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주먹을 보면서 이성민은 급히 무영탈혼을 펼쳤다.
  1606.  
  1607. 내공의 증진은 이성민의 몸을 보다 빠르게 만들어주었다. 주먹이 내리찍은 지면이 박살나면서 토사가 위로 솟구친다. 이성민은 시야를 덮쳐오는 먼지구름을 향해 창을 크게 휘둘렀다.
  1608.  
  1609. 먼지 구름이 걷어진다. 그 너머에서 아이네는 촉수로 바꾼 팔을 이성민을 향해 휘둘렀다. 이성민은 뒤늦게 아이네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로이드에게 들었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팔다리의 형태를 바꾼다는 키메라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1610.  
  1611.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소녀의 공격은 괴상하고 변칙적이었다. 꿈틀거리며 날아 온 촉수는 채찍보다 굵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에 내공을 불어넣으면서 란의 수법으로 아이네의 촉수를 걷어냈다.
  1612.  
  1613. 그걸 생각이었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간이 역회전했다. 아이네의 공격은 오우거 키메라의 주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1614.  
  1615. ‘흘려내는 것이 안 돼…!’
  1616.  
  1617. 대환단과 소환단을 복용해서 내공이 늘어난 덕분에 버티는 것이라도 가능했다. 만약 대환단과 소환단을 복용하기 전이었다면, 지금 공격 한 번에 팔이 찢겨져 날아갔을 것이다.
  1618.  
  1619. 겉모습이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 하여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를 빈사지경으로 몰고 간 괴물이다. 이성민은 느슨하게 풀리려던 손에 간신히 힘을 불어 넣고서 아이네의 공격을 버텨냈다.
  1620.  
  1621. 이성민이 그러는 동안, 스칼렛은 전투 준비를 맞췄다. 양 손에 낀 장갑의 손목을 덮은 금속이 빛을 발한다. 스칼렛은 입술을 빠르게 달싹거리며 텅 빈 허공을 향해 손을 활짝 펼쳤다.
  1622.  
  1623. 스칼렛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글자가 적힌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레시르 학파의 주문각인呪文刻印이 펼쳐졌다. 허공에 새겨진 붉은 주문을 통해 마법이 발현되었다.
  1624.  
  1625. 이성민을 공격하던 아이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위협에 흠칫 몸을 떨었다. 신경 쓰지 않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스칼렛이라는 존재가 아이네의 감각을 엉클었다. 주문을 통해 만들어진 이글거리는 불새가 아이네의 등뒤를 덮쳤다.
  1626.  
  1627. “읏…!”
  1628.  
  1629. 아이네는 급히 몸을 비틀면서 손을 활짝 펼쳤다. 아이네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심장은 대부분의 마법에 대한 면역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프레스칸이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궁극의 생명에 바라였던 절대적인 능력이었고,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를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의 성능은 가지고 있었다.
  1630.  
  1631. 하지만 스칼렛이 펼친 마법은 그 근본부터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랐다. 스칼렛의 주문각인은 마법과 주술을 혼용한 것으로, 주술 중에서도 음양도陰陽道와 기문둔갑奇門遁甲을 근본으로 두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아이네가 가진 마법 면역력을 뚫기 힘들었겠지만, 스칼렛의 주술각인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랐다.
  1632.  
  1633. 콰아아앙! 아이네와 충돌한 불새는 마나로 흩어지지 않고서 아이네의 몸을 집어 삼켰다. 이글거리는 초고온의 불꽃 속에서 아이네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아이네는 통증을 몰랐지만 몸을 태우는 불꽃은 불쾌하다고 느꼈다.
  1634.  
  1635. 콰드드득! 불꽃 속에서 아이네의 몸이 변화했다. 단순 마법 면역으로 막아낼 수 없다면 불꽃이 태우지 못하는 몸을 취하면 될 뿐이다. 바스락거리는 각질이 재가 되어 떨어지고, 그 아래에서는 거칠어 보이는 갑각의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1636.  
  1637. “육체 변화…! 폴리모프? 아니, 설마. 드래곤은 아니겠지!”
  1638.  
  1639. 스칼렛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다시 양 손을 펼쳤다. 스칼렛의 보조 덕에 호흡을 돌린 이성민은 흔들리는 감정의 동요를 가다듬었다.
  1640.  
  1641. 이성민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이성민의 가슴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존재 때문이었다. 검은 심장. 이 심장과 어떻게 동화된 것인지는 이성민도 몰랐지만, 만약 이 안에서 뛰고 있는 것이 그때, 던전의 허공에 떠 있던 검은 심장이라면. 지금 이성민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그 검은 심장이라면.
  1642.  
  1643. ‘지금의 나는. 저 여자애랑… 같은 것 아닌가?’
  1644.  
  1645. 심장을 뽑아 씹어 먹은 괴물이랑?
  1646.  
  1647.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 웃기지도 않는 감상에 휘말릴 수도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이네는 이성민을 죽이려 들었다. 정확하게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던 그 공격이 애교 가득한 인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1648.  
  1649.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자. 대환단과 소환단을 복용한 후로 전력으로 싸움에 임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공의 소모가 큰 편인 무영탈혼과 구천무극창을 펼치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650.  
  1651. 일보무흔을 펼쳐 아이네에게 접근했을 때, 아이네는 웅크려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위로 들던 아이네의 시선과 이성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본능, 육감. 그것이 경고했다. 이성민은 쏘아내던 창을 물리고서 급히 발을 옆으로 끌었다.
  1652.  
  1653. 보이지 않는 권격이 이성민의 귓가를 스쳤다. 직격한 것도 아닌데 귀가 찡하면서 시야가 순간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이네가 보였다.
  1654.  
  1655. “…백보신권?”
  1656.  
  1657. 멍하니 묻는 질문에 아이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네의 표정은 조금의 불만족을 담고 있었다. 아이네는 몇 번 손을 쥐었다 펴보이더니, 다시 권법의 자세를 잡았다.
  1658.  
  1659. 그리고 백보신권이 시작되었다. 연달아 펼친 백보신권은 두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므쉬의 산에서 단련한 감각이, 육감이 어떻게든 회피 동작을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1660.  
  1661. 그에만 치중할 수는 없었다. 아이네는 오른 손으로는 백보신권을 펼치면서, 왼 손을 그 형태를 바꾸어 이성민을 덮쳤다.
  1662.  
  1663. 이성민 혼자였다면 아이네를 상대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민 혼자가 아니었다. 스칼렛이 이성민과 함께 있어 준 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레시르 학파의 주문각인. 비록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레시르 학파의 마법은 완성된 순간 비교적 어린 나이였던 스칼렛 레시르를 적색 마탑주로 만들어 준 대마법이었다.
  1664.  
  1665. 거기에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상성이 좋다는 것도 행운으로 작용했다. 지금의 스칼렛은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와 비교해서 제법 큰 격차가 있었지만, 주문각인의 독특함이 아이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프레스칸의 조력까지 없으니 아이네가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666.  
  1667. 땅에서 솟구친 흙의 손이 아이네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이네는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왼 팔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은 촉수가 이성민을 덮쳤다. 이성민은 자세를 낮추면서 아이네와의 거리를 좁혔다. 일직선으로 뻗은 창이 아이네의 가슴을 뚫으려 들었고, 그 순간에 아이네는 상체를 크게 비틀더니 왼쪽 어깨로 이성민의 창을 대신 받아냈다.
  1668.  
  1669. 콰드득! 살과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이성민의 창이 아이네의 왼쪽 어깨를 꿰뚫는 것과, 아이네가 오른 팔을 휘둘러 자신의 양 다리를 자르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난 아이네는 양발이 잘렸음에도 땅을 뒹굴지는 않았다. 그녀는 뒤로 넘어가는 즉시 공중제비를 돌더니 바닥에 내려섰고, 스스로 끊어낸 양 발은 이미 재생되어 있었다.
  1670.  
  1671. “괴물이네.”
  1672.  
  1673. 스칼렛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짜증뿐이었다. 더 이상 저 뭔지 모를 괴물에 대한 위협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교전은 길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 우위에 서는지 알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1674.  
  1675. “응.”
  1676.  
  1677. 머리를 끄덕거리는 아이네의 대답에는, 지금의 상황으로 맞닥트린 불리함에 대한 자각 따위는 그리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네가 무지한 탓은 아니었다.
  1678.  
  1679.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1680.  
  1681. 아이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웃었을 때,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거대한 마력이 일렁거렸다. 상황이 우세하다 생각하고 있던 스칼렛은,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성급했던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네가 내뿜는 마력의 크기는 스칼렛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1682.  
  1683. “뭐하는 괴물이야…!”
  1684.  
  1685. 스칼렛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중얼거렸다. 스칼렛은 아이네가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1686.  
  1687. 그런 괴물같은 강함을 이성민은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성민의 몸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과 아이네가 가진 심장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성민과 아이네가 똑같은 동족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1688.  
  1689. 아이네가 보여주는 거대한 마력은 이성민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이성민이 대환단과 소환단의 내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고는 해도, 아이네가 풀어내는 불길한 마력은 이성민이 가진 모든 내공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1690.  
  1691. 그런 괴물이, 이성민을 노리고 있었다. 동족으로서 보는 눈은 아니었다. 이유 모를 살의만을 내비친 시선이었고, 아이네는 품은 살의를 시선만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1692.  
  1693. 이성민은 죽고 싶지 않았다.
  1694.  
  1695. ======================================
  1696. < 동족-4 >
  1697.  
  1698.  
  1699.  
  1700. 그것뿐이다. 죽고 싶지 않다. 죽어서는 안 된다. 죽어서는 안 될 이유 따위는 이제 와서 새삼스레 생각해 볼 것도 없다. 벌써부터,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스칼렛이 지르는 경고의 외침을 이성민은 아주 멀리서 들었다. 그는 창을 쥐었고, 자세를 낮추었다.
  1701.  
  1702. 아이네의 권법은 미숙했다. 제온이 익혔던 모든 무공을 아이네는 펼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온이 펼쳤던 것만큼 능숙하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은 있고 수준은 같았지만 그것을 펼치는 아이네 본인이 권법에 미숙했다.
  1703.  
  1704. 그러한 미숙함을 어마어마한 마력과 육체의 변화를 통한 변칙성으로 커버하는 것이 아이네의 전투법이었다. 스칼렛이 보조하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은 이미 아이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1705.  
  1706. 아니, 어쩌면 지금.
  1707.  
  1708. 촉수가 스친다. 아이네의 공격을 란과 나로 흘려내기에는 이성민의 힘이 부족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멀다. 호흡을 잊고서 이성민은 앞으로 달렸다. 머리를 아슬하게 스쳤던 촉수의 형태가 뒤바뀐다. 등 뒤를 찔러 오는 공격을 육감으로 느낀다.
  1709.  
  1710. 무영탈혼 이식, 일보무영. 그림자가 춤을 춘다. 이성민의 몸이 잔상을 그렸다. 돌진하는 속도 그대로 구천무극창 일초인 추혼일살을 쏘아낸다.
  1711.  
  1712. 아이네는 피하지 않았다. 갑각이 씌워진 맨 몸뚱이가 이성민의 창을 받아낸다. 쩌어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내공을 그렇게 불어넣었음에도 창은 아이네의 몸을 꿰뚫지 못했다.
  1713.  
  1714. 더 힘을 밀어 넣어 억지로 창두를 박아 넣을 여유는 없다. 이성민은 창을 쏘아낸 양 손을 회수하면서 발을 움직였다. 일보무영으로 공간을 이탈했을 때, 아이네의 주먹이 방금 전까지 이성민이 서있던 자리를 때렸다.
  1715.  
  1716.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우거 키메라 때와 똑같, 아니, 그보다 더 심하다. 오우거 키메라의 공격에 대응할 때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지금의 이성민에게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여유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1717.  
  1718. ‘스칼렛님이 없었다면.’
  1719.  
  1720. 그런 생각.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 그런 것은… 프레스칸의 던전에서 자각했다. 절정 고수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하찮은가. 매미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도 유충은 벗었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는가.
  1721.  
  1722. 상대는 그런 괴물이다.
  1723.  
  1724. 이성민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이성민과는 비교가 안 된다. 제온을 죽였고 로이드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 붙인 괴물.
  1725.  
  1726. ‘나는 할 수 있을까?’
  1727.  
  1728. 코로나 용병단장인 제온을 상대로? 아니면 로이드를 상대로?
  1729.  
  1730.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고 무엇을 얻는가.
  1731.  
  1732. 무의 끝을 보고 싶었다.
  1733.  
  1734. 그런 생각을 했다. 므쉬의 산을 나올 때만 하여도, 이성민은 ‘무’라는 고독한 외길을 걷는 구도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미천한 재능을 대신할 행운과 인연, 그런 주제에 노력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서. 그래, 그때의 이성민은 그랬다.
  1735.  
  1736. 하지만 지금은.
  1737.  
  1738. 스스로의 약함. 위지호연이라면, 백소고라면. ‘나’가 아닌 타인의 시점으로 생각하면서 결국 해대는 것은 도피, 노력하는 것도 반쯤 포기해 버렸지. 무의 끝을 보겠다고, 노력하겠다고. 나 자신을 단련하겠다고 마음먹은 주제에 마갑이라는 것에 의존하여 넘지 못할 벽을 넘으려 했다.
  1739.  
  1740. 그 벽을 부수려 하지도, 스스로 뛰어넘으려 하지도 않고서.
  1741.  
  1742. 현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잠들기 전에, 이성민은 몇 번인가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의뢰를 수행하는 것은 쉬웠으나 그래봤자 S급 의뢰. 실력은 발전하지 못했고 무공의 성취도 늘지 않았지. 므쉬의 산이 아닌 곳에서는 열심히 한 노력치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도망쳤다. 노력에 대해서. 무공의 수련에서.
  1743.  
  1744. 그래서 죽는가.
  1745.  
  1746.  
  1747.  
  1748. 콰앙! 이성민의 몸이 땅을 뒹굴었다. 이성민의 몸을 덮은 마갑은, 본래의 능력을 잃기는 하였어도 그 자체로도 뛰어난 방어구의 역할은 수행해 주고 있었다. 그것이 다행이었다. 마갑이 없었더라면 이 정도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1749.  
  1750. 그렇다고는 해도 상처는 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내상이 제법 묵직하다. 나뒹군 이성민을 향해 아이네가 뛰어 들었고, 스칼렛이 급히 마법을 펼쳐 아이네를 견제했다.
  1751.  
  1752. 시끄러운 폭음, 울렁거리고 쓰린 속,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 지끈거리는 두통,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왼쪽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얻어맞아서인지, 굴러서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1753.  
  1754. 어느새 밤이 가까웠고 주변은 어두웠다. 스칼렛이 펼치는 마법은, 그쪽 분야에서 문외한인 이성민이 보기에도 대단했다. 스칼렛의 손이 허공을 훑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마법이 발현되고, 터진다.
  1755.  
  1756. 그것을 보면서 이성민은 입 안의 씁쓸함이 마치 독과 같다고 느꼈다. 혓바닥 아래에서 샘솟는 것은 침이 아닌 진한 독약이 되었다. 싫다. 무력한 자신이 싫다. 이성민은 발을 질질 끌었다.
  1757.  
  1758. ‘나는.’
  1759.  
  1760. 변해야만 했다. 변하고 싶었다. ‘내’가 변하는 것으로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므쉬의 산에서 배웠다. 그때의 이성민은 분명히 변했었다. 이전의 이성민, 므쉬의 산에 들어가기 이전의 이성민과는 다르게 변했었다.
  1761.  
  1762. 부족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래, 흔히들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의 인간은 모든 일을 쉽게 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변하는 것도. 천재가 내딛는 한 걸음은 범인이 내딛는 몇 개, 혹은 몇 십 개의 걸음과 같을 것이다.
  1763.  
  1764. 천재가 아닌 이성민은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는 부족하다. 몇 번이고 계속 깨달아야 한다.
  1765.  
  1766.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현실을 알아야 한다. 품었던 이상과 닥쳐오는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
  1767.  
  1768. ‘알아.’
  1769.  
  1770. 띄엄띄엄 떨어지는 생각을 이어 붙여. 나는, 알아. 느슨하게 풀리던 손아귀에 힘을 주어 창을 잡는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아. 하찮다는 것도 알고. 천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내가 느끼고 겪은 ‘변함’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무의 끝을 보겠다고 구도자처럼 군 주제에 맞닥트린 벽에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 버린 등신이라는 것도 알아.
  1771.  
  1772. 그런 주제에 높은 곳을 보고 있어.
  1773.  
  1774. 이상이 너무 높아.
  1775.  
  1776.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1777.  
  1778. 자기혐오 속에서 이성민은 묵묵히 걸음을 움직였다. 스칼렛이 뛰어난 마법사라고는 하여도, 그녀의 주문각인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법이다. 덕분에 마력 소모에 대한 효율이 그리 좋지 않다. 기문둔갑과 음양도를 접목시킨 주문각인은, 마법 면역을 갖추고 있는 아이네를 상대로 유효한 공격법이기는 했다.
  1779.  
  1780. 하지만 결정력이 너무 부족했다. ‘지금’의 스칼렛이 끌어낼 수 있는 화력으로는 승패를 결정짓기에 너무나도 부족했다. 터무니없는 재생력을 갖춘 아이네는 궁극의 생명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상처를 회복하고, 회복하고, 회복하는 것을 반복하며 스칼렛을 몰아붙이려 했다.
  1781.  
  1782. 이성민은 그것을 보았다.
  1783.  
  1784. 역겨운 자기혐오 속에서, 스스로의 무력감에 짓눌려서. 싫다. 그런 거부감이 이성민을 움직이게끔 만든다. 스칼렛을 죽게 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죽고 싶지 않다. 죽어서 안 될 이유가 있다.
  1785.  
  1786. 아직 변하지 못했다.
  1787.  
  1788. 스칼렛을 향해 뛰어들던 아이네는 등 뒤에서의 예리함을 감지했다. 무시해도 상관은 없을 정도로 얕은 공격이었지만, 아이네는 굳이 몸을 돌려 주었다. 애초에 아이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것은 스칼렛의 존재가 아닌 이성민의 존재다.
  1789.  
  1790. 아이네는 이성민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신경에 거슬렸다. 아이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 나름대로 합리적인 답을 내려 했을 뿐이었다.
  1791.  
  1792. 죽여 버린다면 끝날 일 아닌가. 창을 내지르는 이성민을 보면서 아이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볍고 느린 공격. 맨 몸으로 맞아도 아무 문제없다.
  1793.  
  1794. 실제로 그러했다. 아이네가 가볍게 휘저은 손에 이성민의 창은 형편없이 위로 튀어 오른다. 손아귀가 찢어지고 팔꿈치 관절이 들어 온 힘을 이기지 못해 삐걱거린다. 텅 빈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아이네의 손을, 그 날카로운 손톱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비튼다. 카가각!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옆구리를 감싸고 있던 마갑이 베어진다. 얄팍하게 베인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쏟아진다. 조금 더 깊게 베어졌더라면 내장이 흘렀을 지도 모른다.
  1795.  
  1796. 안심할 수는 없다. 아이네는 포식자였고 이성민은 먹잇감이었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농락하려 든다. 토끼와 호랑이 사이에 놀이와 싸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토끼가 아무리 필사적이라고 해 봐야 호랑이가 장난처럼 휘두른 앞발에 얻어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1797.  
  1798. 이성민은 토끼처럼 뛰었다. 어쩌면 토끼라기보다는 벼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아이네의 폭력을 피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뛰었다. 쉼 없이 움직이는 발은 무영탈혼의 보법을 밟았고, 그 사이사이에 삐걱거리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가며 구천무극창을 펼친다. 스칼렛은 더 이상 이성민을 지원해 주지 못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마력을 가다듬었고,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으로 이성민을 볼 뿐이었다.
  1799.  
  1800. 그녀가 도망친다고 해도 이성민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칼렛은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마지막 수를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1801.  
  1802. 물론 이성민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를 알고자 할 여유도 없었다. 콰아앙! 아이네의 발길질에 이성민의 몸이 뒤로 밀려난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 하였으나, 이성민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꽉 다문 아랫입술 사이에서 검은 피가 울컥하고 흘렀다. 아이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형태를 바꾼 손은 커다랗고 날카로웠다.
  1803.  
  1804. 창이 무겁다.
  1805.  
  1806.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거움이었다. 산에서 내려 온 이후로 창이 무겁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몸이 무겁다.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달린 고막은 웅웅거리는 잡음을 냈고, 코에는 피비린내가 아른거렸다.
  1807.  
  1808. 죽는다.
  1809.  
  1810. 이곳이 나의 끝인 것일까. 위지호연도 만나지 못하고, 백소고를 구하지도 못하고, 괜히 스칼렛을 휘말리게 해서 죽게 만들고. 갑작스러운 죽음, 언제나 그러하듯이. 단전에는 아직 내공이 남아 있다. 먹은 값어치를 못하는 빌어먹을 몸뚱이야. 이성민은 웃고 싶은 기분을 참으면서 내공을 끌어냈다. 자하신공을… 돌린다. 내공을 돌린다. 아이네가 뛰어오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죽을 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811.  
  1812. 왜냐하면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까.
  1813.  
  1814. 죽음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련이 남은 사람이라면,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미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이성민도 발악했다. 죽어서 안 될 이유는 수없이 존재했고, 그것은 이성민을 움직이는 미련이 되었다.
  1815.  
  1816. 지금 이 자리에서 이성민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지호연도 없고, 백소고도 없다. 로이드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 내가 변하여 세상이 변한 것처럼, 모든 주체는 ‘나’에게 있다.
  1817.  
  1818. 머릿속이 조금, 맑아진 기분이었다.
  1819.  
  1820. 스칼렛은 고민에 끝을 내렸다. 고민해 봤자 그녀가 낼 수 있는 답은 둘 뿐이다. 도망치던가, 싸우던가. 그 중 도망치는 것은 애초에 스칼렛에게 있어서는 논외였다. 그럼에도 고민하고 있던 것은, 단순히 아까웠기 때문이다.
  1821.  
  1822.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따질 수는 없었다. 스칼렛은 혀를 차면서 품 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1823.  
  1824. 이성민의 창에서 자색의 연기가 부풀었다. 뛰어들던 아이네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위험하다고 알았고, 그 즉시 뛰던 것을 멈추고서 이성민과의 거리를 벌렸다.
  1825.  
  1826. 부풀었던 연기가 휘감겨 뭉친다. 그것은 희미한 연기가 아니라 일렁거리는 빛이 되었다. 아니.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빛을 처음 보는 아이네가 입을 반쯤 벌리고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를 너무 쏟아 안색이 창백해진 이성민은, 자신의 창을 감싼 자색의 불꽃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1827.  
  1828.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1829.  
  1830. 창을 앞으로 쏘았을 때. 창의 움직임은 구천무극창이 아니었다. 이성민이 가장 많이 수련했던 란나찰의 찰이었다. 그래. 단순한 찌르기였다. 그리 빠르지 않은 찌르기였으나 아이네는 더 이상 그것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응수했다. 갑각으로 뒤덮은 손이 창을 막아내기 위해 다가온다.
  1831.  
  1832. 막지 못했다. 창두가 닿은 순간 갑각은 흩어졌고 금속의 날이 꿰뚫기도 전에 아이네의 손바닥이 꿰뚫렸다. 그렇게 하는 것에 속도나 힘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막힘없이 밀어낸 창두가 아이네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는다.
  1833.  
  1834. 아이네가 비명을 질렀다. 통증을 모르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통증은 이질적이었다. 상처가 재생이 안 된다. 아이네는 날카로운 비명을 고함으로 바꾸며 왼쪽 손을 휘둘렀다. 이성민은 반 걸음 뒤로 물러섰고, 란의 수법으로 창간을 회전시켰다.
  1835.  
  1836. 회전에 휘말린 아이네의 왼 팔이 뜯겨졌다. 이 과정에서도 큰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스칼렛은 품 안에 손을 넣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고, 아이네의 두 눈동자가 경악으로 떠졌다. 이성민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란나찰의 수법으로 아이네를 공격했고, 기겁한 아이네가 상체를 비틀었다. 스친 옆구리가 쩍하고 갈라지면서 피가 왈칵거리며 쏟았다.
  1837.  
  1838. “아, 아, 아파!”
  1839.  
  1840. 아이네가 비명을 지른다. 상처를 감싸고 싶어도 그녀는 더 이상 양 손을 갖지 못했다. 아이네는 펄쩍하고 뒤로 뛰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성민은 아이네를 쫓기 위해서 발을 움직였으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핑 돌았고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스칼렛도 아이네를 쫓지 않고 급히 이성민에게 달려왔다.
  1841.  
  1842. “…아.”
  1843.  
  1844. 이성민은 멀어지는 아이네를 보지 않았다. 그냥, 아직까지 놓지 않은 자신의 창을 보았다. 창을 감싸고 있던 불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845.  
  1846. “해냈어.”
  1847.  
  1848. 이성민은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1849.  
  1850. 방금 전에 이성민이 펼친 것은 강기였다.
  1851.  
  1852. ======================================
  1853. < 동족-5 >
  1854.  
  1855.  
  1856.  
  1857. 기었다.
  1858.  
  1859. 걸었다.
  1860.  
  1861. 뛰었다.
  1862.  
  1863. 몸을 움직이는 것은 느렸다. 몸은 무겁지 않았으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늘어지는 것인지 의식이 늘어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감각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성민은 기다가, 걷다가, 뛰었고, 더 빨리 뛰기를 바랐다.
  1864.  
  1865. 하지만 더 빠르게 뛸 수는 없었다. 스치는 풍경이 느리다. 애초에 풍경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성민이 뛰고 있는 세계는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빛 한 점 없는 밤과 같았고,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익숙해졌던 어둠과 닮아 있었다.
  1866.  
  1867. 뛰고 있음은 알았다. 이성민은 날고 싶다고 바라였으나, 날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성민은 뛰지 않고 멈췄다. 그리고 창을 휘둘렀다. 란나찰에서 구천무극창. 이미 익숙한 창로를 손과 창으로 따랐다.
  1868.  
  1869. 한 번만 더.
  1870.  
  1871. 간절하게 그를 바라였다. 이성민은 자신이 펼쳤던 강기를 떠올렸고, 그것을 다시 펼치기 위해 몇 번이고 시도했다. 내공을 불어넣어 창두에 자색의 불꽃을 입히고 싶었다.
  1872.  
  1873. 되지 않았다.
  1874.  
  1875. 감각 자체를 모르겠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단전에 웅크리고 있는 내공은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1876.  
  1877. 대체 왜. 그때의 강기는 단순한 우연이었나? 거듭된 실패 속에서 이성민은 절망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창을 쥐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주저앉는 시간이 많아졌고 좌절은 의욕을 뭉개 놓았다. 그렇게 썩어간다고 생각했다.
  1878.  
  1879. 눈을 떴을 때에는 시끄러운 빗소리가 가득했다. 이성민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 보았다. 마차의 천장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입술을 벌려 잠깐 동안 호흡을 더듬었고, ‘방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880.  
  1881. “일어났어?”
  1882.  
  1883.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둔 의자에 스칼렛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콧잔등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1884.  
  1885. “너. 사흘 동안 쓰러져 있었어. …죽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았네.”
  1886.  
  1887. “…여긴… 어딥니까?”
  1888.  
  1889.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전신이 나른하고 뻐근한 것이 사흘 동안 쓰러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것으로 스칼렛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테고.
  1890.  
  1891.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마을이야. 도시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꽤 부족해서.”
  1892.  
  1893. “스칼렛님이 마차를?”
  1894.  
  1895. “나도 몰수는 있어. 하기는 싫지만. 뭐 어쩌겠어? 마차를 몰아야 할 네가 쓰러졌으니, 내가 해야 할 것 아냐.”
  1896.  
  1897.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창 밖에 내리는 비를 힐긋 보았다.
  1898.  
  1899. “오늘 아침부터 내리더라. 내일이면 그칠 것 같기는 한데… 비온 뒤에는 땅이 안 좋잖아. 빨라야 모레가 되어야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너도 오늘 막 눈을 떴고.”
  1900.  
  1901.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을 향해 다가왔다.
  1902.  
  1903. “이 마을의 의사를 불러보기는 했는데… 그리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치유 마법사나 프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포션을 써서 외상을 어떻게든 치료하기는 했는데… 일단 확인해 봐.”
  1904.  
  1905. 정신이 조금 몽롱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일단 스칼렛의 말을 따라 양 팔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기억하는 상처는 양 손바닥과 팔꿈치 관절, 왼쪽 옆구리와 늑골의 상처였다.
  1906.  
  1907. 이성민의 양 팔에는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이성민이 스칼렛을 힐긋 보자, 스칼렛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1908.  
  1909. “내가 했어. 응급처치 법은 나도 아니까.”
  1910.  
  1911. 이성민은 부목의 아래에서 조심스레 팔을 움직여 보았다. 약간 뻐근하기는 했어도 움직이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다. 포션이라고 해서 상처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찰과상이나 베어진 상처에는 효과가 빠르지만, 골절상이나 내상은 포션만으로는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큰 통증없이 뼈가 붙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경우였다.
  1912.  
  1913.  
  1914.  
  1915. ‘아니. 어쩌면 이것도 심장의 능력인가?’
  1916.  
  1917. 이성민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검은 심장이 정확히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확인했던 것은 영약을 복용할 때에 정제과정 없이 단전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
  1918.  
  1919. 이성민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 아이네는, 여러 가지로 이성민과 달랐다. 아이네는 이성민이 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백보신권을 펼치던 것을 보니 제온의 심장을 통해 제온의 무공을 빼앗은 것 같았다.
  1920.  
  1921.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도 아이네는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었고, 단단한 갑각으로 전신을 감싸기도 했다. 육체 능력은 이성민보다 뛰어났고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해내기도 했다. 어떤 점을 보아도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능력들이었다.
  1922.  
  1923. 이성민과는 다르다. 이성민은 팔다리를 바꿀 수도 없었고, 경이적인 재생력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네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재생력을 갖추게 되었을 수도 있다.
  1924.  
  1925. “괜찮은 것 같습니다.”
  1926.  
  1927. “내상 쪽은 어때?”
  1928.  
  1929. 스칼렛이 다가와 이성민의 양 팔에 묶인 부목을 풀어 주었다. 이성민은 팔을 조금 움직여 보고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내상을 제법 크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사흘 사이에 내상은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포션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었다.
  1930.  
  1931. “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1932.  
  1933. 내공을 살짝 움직여 보고서, 이성민은 스칼렛을 향해 물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이성민의 곁에 앉은 스칼렛이 헛웃음을 흘렸다.
  1934.  
  1935.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1936.  
  1937. “위험한 상황 아니었습니까? 자칫했다가는…”
  1938.  
  1939. “별로 그렇지도 않았어. 실제로 위험하게 되지도 않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전부야. 널 버리고 가고 싶지도 않았고.”
  1940.  
  1941. 자세하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모양이라, 이성민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1942.  
  1943. “그보다 그 괴물 꼬맹이는 대체 뭐였던 거야? 왜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를 공격한 거지?”
  1944.  
  1945. “…저 때문일 겁니다.”
  1946.  
  1947. 이성민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스칼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1948.  
  1949. “무슨 뜻이야?”
  1950.  
  1951. 스칼렛에게는 빚이 있다. 그녀는 이성민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이성민을 위해 남는 것을 선택했다. 스칼렛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성민은 아이네를 상대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1952.  
  1953.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자신과 아이네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스칼렛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이성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과 이성민이 갖게 된 검은 심장, 그리고 아마 그와 같은 심장을 갖고 있는 아이네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스칼렛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1954.  
  1955. “…어쩐지. 네가 김종현, 그 싸이코 자식이랑 이상하게 자주 만난다 싶더라니. 그 심장 때문이었던 거야?”
  1956.  
  1957. “아… 예.”
  1958.  
  1959. “너도 참 재수 더럽게 없다. 아니. 이 경우에는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어찌 되었든 몸이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적당한 대가라고 보는데.”
  1960.  
  1961. “죽을 뻔 한 것이 말입니까?”
  1962.  
  1963. “세상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기연을 얻고 싶어하는 놈이 넘치도록 있어. 앞으로도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
  1964.  
  1965.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1966.  
  1967.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나랑 같이 다니게 된 덕에 목숨 부지하기 더 편해졌을 테니까.”
  1968.  
  1969. “…앞으로도 저랑 같이 다니시겠다는 겁니까?”
  1970.  
  1971. “왜? 내가 이 말 들으면, 내 목숨 아깝다고 너랑 같이 안 다닐 줄 알았어? 너 나를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보고 있었구나? 나 그렇게 정 없는 사람 아니야.”
  1972.  
  1973. 스칼렛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두었던 안경과 책을 들어 올렸다.
  1974.  
  1975. “어쨌든. 몸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원래는 비가 그치고 땅이 좀 마른 뒤에 떠날까 했는데. 네 사정을 들으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내일 비가 그치는 대로 바로 떠나도록 하자.”
  1976.  
  1977. “아… 예.”
  1978.  
  1979. “내 생각은 안 해도 돼. 아무리 위험해도 내 목숨 지킬 방법은 가지고 있으니까.”
  1980.  
  1981. 쉬고 있어.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고서 방을 나갔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스칼렛은 다른 방에 묵고 있었다. 단지 이성민을 간호하기 위해서 이 방에서 지내고 있었을 뿐이다.
  1982.  
  1983. 스칼렛이 떠나자 이성민은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성민은 스칼렛이 남긴 말을 생각해 보았다. 왜 스칼렛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성민과 같이 다니려는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스칼렛 본인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캐물어봤자 이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1984.  
  1985. 다만 이성민이 느끼기에는, 스칼렛의 말과 태도에는 감정적인 이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 감정은 남녀 사이의 애정 같은 것은 아니었다.
  1986.  
  1987. 이성민은 그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었다. 이성민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제법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인지 몸이 나른하고 뻐근하였다. 그것은 꿈 속에서 느꼈던 무거움과 닮아서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1988.  
  1989. 벽에 기대어 세워 놓은 창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꿈에서 느낀 절망에서 기인한 것들이었다. 창을 쥐었을 대,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켰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1990.  
  1991. 이성민은 기절하기 직전에 느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방법은 이성민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방법을 알고서 강기를 쓴 것이 아니다. 지긋지긋한 상념과 자기혐오의 끝에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고… 거기서.
  1992.  
  1993. 갑자기 강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1994.  
  1995. 그때 느꼈던 것을 더듬어 보면서, 이성민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창에 불어넣은 내공은 자주색의 안개가 되어 창간과 창두의 주변을 떠돌았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내공을 불어 넣었다. 흔들리던 안개의 색이 진해지며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감각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이성민은 내공을 더 불어넣었다.
  1996.  
  1997. 그리고 어느 순간, 안개가 완전히 뭉쳤다. 이윽고 그것은 흔들거리는 불길이 되었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도달했던 강기보다는 색이 엷고 크기가 작기는 했지만, 단순히 기를 덮는 것을 넘어 강기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998.  
  1999. 그것은 이성민이 절정의 가장 크고 단단하며 높은 벽을 뛰어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강기를 쓴다고 해서 초절정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초절정고수는 강기를 사용한다. 즉, 강기는 초절정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2000.  
  2001. ‘하지만 미숙해.’
  2002.  
  2003.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내공의 소모도 많아 남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강기를 형성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이성민이 해야 할 최우선과제일 것이다.
  2004.  
  2005. 이성민은 창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강기를 처음 사용했을 때. 이성민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꿈에도 꾸지 못했던 경지에 들어선 것에 감격했다. 그런 눈물이었다. 나는 조금 앞으로 나아간 것일까. 얼마나 앞으로 나아간 것일까. 한 걸음? 어쩌면 반 걸음일지도 모른다.
  2006.  
  2007.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2008.  
  2009. 이성민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해서 울었다.
  2010.  
  2011. 창 밖에서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2012.  
  2013. ======================================
  2014. < 검룡-1 >
  2015.  
  2016.  
  2017.  
  2018. 아이네는 죽지 않았다. 그때의 상황은 아이네에게 있어서 심하게 불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택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을 택했을 뿐이다. 양 팔을 잘라 놓기는 했지만 아이네가 양 발목이 잘린 상태에서 순식간에 잘린 발을 재생했던 것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었다.
  2019.  
  2020. 아이네가 왜 덤볐던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아이네는 이성민이 검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괴물같이 강하던 리치, 프레스칸도 죽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 둘은 같이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2021.  
  2022. ‘아마… 내 심장을 빼앗으려는 것이겠지.’
  2023.  
  2024.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칼렛이 없었더라면 이성민은 오래 버티지 못해 죽었을 것이고, 운 좋게 그 상황에서 강기의 사용법을 깨치지 못했다면 스칼렛이 있었어도 죽었을 것이다.
  2025.  
  2026. 그래.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2027.  
  2028. ‘결국에는 운이야.’
  2029.  
  2030. 언제 아이네가 다시 쫓아올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비가 그친 다음 날 바로 마을을 출발했다. 이성민의 상처는 이미 대부분이 회복되어 있었지만 스칼렛은 굳이 나서서 이성민 대신에 마차를 몰았다.
  2031.  
  2032. 의외로 스칼렛은 마차를 모는 것이 능숙했다. 대강의 사정은 들어두었기에, 스칼렛도 빠르게 이 지역을 이탈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2033.  
  2034. 스칼렛이 마차를 몰아 준 덕분에 이성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강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무공의 성취는 늘지 않았다. 상태창에 표시되는 무공의 성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035.  
  2036. ‘아직 초절정의 벽은 넘지 못했어.’
  2037.  
  2038. 단순히 하나의 벽을 넘었을 뿐이다. 아직 이성민의 앞에는 많은 벽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이성민은 그 벽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2039.  
  2040. 나는 조금 강해진 것일까.
  2041.  
  2042. 그런 의문에 이성민은 스스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강해지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도의 강함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만 든다. 강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는 했지만 프레스칸을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상대가 아이네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음에도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2043.  
  2044. 그래서 이성민은 다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수행에 집중하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벽을 맞닥트리고, 그것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성민은 좌절했었다. 좌절해 버려서 수행을 멈췄다. 더 좌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때에 느끼게 될 절망이 두려웠었다.
  2045.  
  2046. 지금은 아니었다.
  2047.  
  2048. 아이네와 프레스칸의 습격을 걱정하기는 했지만, 처음의 급습 이후로 아이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를 제외하면 여정은 순조로웠다. 도중에 몇 개의 도시를 거쳤고 그때마다 마차를 보수하고 말을 바꾸었다.
  2049.  
  2050. 이성민과 스칼렛이 베헨게르를 떠나고서 세 달이 흘렀다. 세 달 동안 이성민은 시간이 날 때마다 창법과 보법, 내공심법을 수행했다. 이성민이 그럴 때마다 스칼렛은 머지않은 곳에서 마도서를 펼쳐 이성민은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이라는 학문에 매진했다.
  2051.  
  2052. “참 열심히도 하네.”
  2053.  
  2054.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온 스칼렛은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 흐르던 땀을 찬 공기에 말리고 있던 이성민은 스칼렛을 힐긋 돌아보았다.
  2055.  
  2056.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2057.  
  2058. “좋은 꿈을 꾸지 않아서.”
  2059.  
  2060. 그렇게 말하는 스칼렛의 얼굴에는 엷은 짜증이 실려 있었다. 스칼렛은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힐긋 보더니 손을 뻗었다. 별다른 영창도 없이 모닥불에 불꽃이 더해졌다.
  2061.  
  2062. “그러고 보니. 너는 므쉬의 산에 있었을 적에 꿈에 대한 금제를 받았었지. …생각해 보면 너도 참 독해. 매일매일 악몽을 꿨던 거잖아. 나같으면 미쳐버렸을 거야.”
  2063.  
  2064. “의외로 버틸만 했습니다. 스칼렛님의 마법도 있었고.”
  2065.  
  2066. “마인드 클리닝은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일 뿐이야. 너한테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나는 솔직히… 네가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수행을 끝내고 산에서 도망치던가, 아니면 미쳐버리던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지.”
  2067.  
  2068. 스칼렛이 큭큭거리면서 웃었다. 그녀는 모닥불의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담요를 여몄다.
  2069.  
  2070. “뭐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2071.  
  2072. “더 주무시지 않을 겁니까?”
  2073.  
  2074. “말했잖아. 악몽을 꿨다고.”
  2075.  
  2076. “무슨 악몽이었습니까?”
  2077.  
  2078. “오지랖도 넓으셔. 무슨 악몽을 꿨는지는 왜? 말하면 네가 해결이라도 해 줄 거야?”
  2079.  
  2080. 스칼렛이 입 꼬리를 올리면서 물었다. 스칼렛의 저런 화법에 대해서는 이미 완전히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성민은 별 고민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2081.  
  2082.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2083.  
  2084. “난 딱히 네가 들어주기를 바라지 않는데.”
  2085.  
  2086. “그러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087.  
  2088.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창을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고서 내공을 움직인다. 창을 덮은 자색의 연기가 뭉쳐서 불꽃이 되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강기를 형성하는 속도는 제법 빨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느리기는 했다. 이성민은 자기 자신이 이런 종류에 대해 요령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2089.  
  2090. “옛날 꿈을 꿨어.”
  2091.  
  2092. 스칼렛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창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귀는 열어두고 스칼렛의 말을 들었다. 괜히 창을 멈추고 스칼렛 쪽을 신경 쓴다면, 스칼렛은 말하려던 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2093.  
  2094. “내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이야기야. 내가 아주… 앙증맞고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을 때의 이야기지. 에리아에 소환되기 이전의 말이야. 별 것 아닌 이야기긴 한데. 전쟁이 터졌거든.”
  2095.  
  2096. 단숨에 이야기의 스케일이 커져버렸다.
  2097.  
  2098. “왜. 전쟁이 나면 고아는 항상 생기는 법이거든. 나도 그랬어. 그때의 꿈을 꾼 거야. 가족이 죽고, 마을이 불타고.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고, 그 이후로도 쭉 운이 좋았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고, 마법도 익히게 되었으니까.”
  2099.  
  2100. 살아남는 것에 있어서는 말이야. 스칼렛이 덧붙였다.
  2101.  
  2102.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고 생각해. 운이 좋아서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이지. 운이 없으면 죽는 것이 당연하잖아. 내 주변에는… 운이 없는 녀석들이 많았어. 기껏 친해졌는데 운이 없어서 죽어버리면?, 운이 좋아 살아남은 쪽은 상실감이 꽤 크거든. 그런 법이야.”
  2103.  
  2104. 운이 없어서 죽는다. 그 말은 이성민도 동감했다. 전생에서의 이성민은 운이 없어서 죽었다. 이번 생에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그 ‘운’이라는 것이 정말로 운인 것인지는 이성민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지만.
  2105.  
  2106. “그런 상실감에는 익숙해지기가 힘들어. 나는… 그러더라고. 이건 내 일종의 방어기재야. 나는 여태까지 운이 좋았고, 앞으로도 운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다른 사람까지 운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 그래서 친해지고 싶지 않아.”
  2107.  
  2108.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스칼렛이 헛웃음을 흘렸다.
  2109.  
  2110. “그러니까, 이런 거야. 친해지지 않으면 돼. 사람이라는 것은 다 그렇잖아? 자기 주변 사람이 죽으면 다양한 기분을 느끼지만,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죽으면 그냥 그렇지. 응. 딱히 이기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람은 그래. 나도 그렇고.”
  2111.  
  2112. 란나찰은 구천무극창이 되었다. 제법 긴 세월 익혀 온 창법은 익숙했고 휘두르는 것에 막힘이 없었다.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내공이 강기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빛은 점점 엷어진다. 강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집중도가 소모되는데, 스칼렛의 말까지 듣고 있으니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2113.  
  2114.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브레던에 도착할 거야. 여태까지는 운이 좋아서 아무 일도 없었지.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2115.  
  2116. “걱정해 주는 겁니까?”
  2117.  
  2118. 이성민이 창을 멈췄다. 그 말에 모닥불을 보고 있던 스칼렛이 시선을 들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스칼렛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2119.  
  2120. “응.”
  2121.  
  2122. 스칼렛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2123.  
  2124. “기껏 친해졌으니까.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거든.”
  2125.  
  2126. “나도 똑같습니다.”
  2127.  
  2128. 이성민이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2129.  
  2130. “스칼렛님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나도… 내가 아는 사람이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다고 생각해요.”
  2131.  
  2132.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다. 딱히 이성민의 성격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고, 죽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죽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2133.  
  2134.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2135.  
  2136. 스칼렛은 담요의 안쪽에서 두꺼운 마도서를 꺼냈다. 그녀는 안경을 콧등에 올려 쓰면서 히죽 웃었다.
  2137.  
  2138. “운이 좋은 내가, 너랑 같이 다녀주고 있으니까. 알지? 내가 없었다면, 너는 ‘그’ 괴물이 습격했을 때 죽었을 거야.”
  2139.  
  2140. “그 일은…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141.  
  2142. “생각만으로는 부족해.”
  2143.  
  2144.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도서를 펼쳤다.
  2145.  
  2146. “앞으로 기회가 생긴다면 그 빚을 갚도록 해. 내가 네 목숨을 한 번 구해줬으니까. 너도 나중에 내 목숨을 구하란 말이야.”
  2147.  
  2148. “알겠습니다.”
  2149.  
  2150. 이성민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는 했지만, 딱히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스칼렛에게 아무런 위험도 생기지 않는다. 머지 않아 스칼렛은 레시르 학파의 마법을 완성할 것이고, 대마법사가 되어 적색 마탑주가 된다. 즉, 여태까지 스칼렛을 살아오게 만든 ‘운’은 앞으로도 똑같이 작용된다는 말이다.
  2151.  
  2152. 하지만 이성민은 다르다.
  2153.  
  2154. ‘나도 여태까지는 운이 좋았지.’
  2155.  
  2156.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2157.  
  2158. 브레던은 불상이 많았다.
  2159.  
  2160. 구파일방 중 하나인 소림은, 정파를 상징하는 열 개의 문파들 중에서 특히나 그 세가 강성한 곳이다. 흔히들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말을 하는데, 그 중에서 태산은 소림을 일컫고 북두는 무당을 일컫는다.
  2161.  
  2162. 그것은 대부분의 차원에 존재하는 무림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브레던은 에리아에 있는 도시였지만, 구파일방이 자리잡은 다른 도시들이 그러하듯이 제나비스나 베헨게르, 그리고 이성민과 스칼렛이 여태까지 지나 왔던 다른 도시들과 그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입구에서부터 불상이 서있었고, 공기 중에는 ‘향’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2163.  
  2164. “브레던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야.”
  2165.  
  2166. 브레던과 같은 대도시에는 입성 전에 신분 증명이 필요했다. 제나비스나 그에 인접한 베헨게르에서는 어중이떠중이 이계인들이 많지만, 브레던 정도 되는 도시에는 아니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은 브레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다.
  2167.  
  2168. “S급 용병… 베헨게르라. 멀리서도 오셨군.”
  2169.  
  2170.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의 복색부터가 다른 도시와는 달랐다. 그들은 갑옷이 아닌 무복을 입고 있었다. 스칼렛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성문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동양풍의 건축물들이 쭉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2171.  
  2172. “브레던에 처음으로 소림의 본산이 들어 온 것은 수백 년 전이래. 참 신기하지 않아?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이 세계에는 이계인들이 소환되고 있었다는 거야.”
  2173.  
  2174. 성문을 통과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성민이야 용병패로 신분이 증명되고 있었고, 마법사 길드 소속인 스칼렛도 마찬가지였다.
  2175.  
  2176. “수백 년 전에 소환된 신불神佛 무각 대사는 브레던에 도착하고서, 브레던의 근처에 있는 이름 없던 산에 ‘숭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대부분의 중원 무림에서는 숭산이라는 산에 소림이 있었다는 모양이야. 뭐, 그들이 알고 있는 숭산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지만.”
  2177.  
  2178. 거리를 걷던 스칼렛이 손을 들었다. 브레던의 서쪽 성문 너머에는 그리 크지 않은 산이 있었다. 저 산이 브레던에 있는 소림 본산이 위치한, 신불 무각 대사가 이름 붙인 에리아의 ‘숭산’이었다.
  2179.  
  2180. “수백 년 전부터 이계인들은 소환되었지만, 이계인들이 무엇을 위해 이 세계에 소환된 것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어. 마법사들 중에서는 이계인의 소환 이유에 ‘진리’가 이어져 있다고 믿는 미치광이들도 존재하지. 꽤 많은 학파가 그 이유를 연구했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어. 애초에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겠냐구.”
  2181.  
  2182. “어… 음. 신이라면 알지 않을까요.”
  2183.  
  2184. “신? 아하하! 내가 므쉬한테 물어봤는데, 므쉬도 모른다고 하더라. 뭐, 나는 이계인이 소환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냥 이 세계는 ‘그런’ 세계인 거야. 딱히 이유 없이, 그냥 전 차원에서 운 없는 녀석들을 소환하는 세계인 거지.”
  2185.  
  2186. 스칼렛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2187.  
  2188. “아. 무조건 운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말이려나? 누군가는 이 세계에 소환되는 것이 행운이었을 지도 모르니까. 내 경우에는 반반이지만.”
  2189.  
  2190.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샐쭉 휘어 보이며 악동처럼 웃었다.
  2191.  
  2192. “당장 소림에 갈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응. 기왕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관광이라도 해보자구.”
  2193.  
  2194. 은근한 권유도 아니었다. 대놓고 하는 권유에 이성민은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2195.  
  2196. “알겠습니다.”
  2197.  
  2198. 브레던이라는 도시에는 이성민도 제법 관심이 있었다.
  2199.  
  2200.  
  2201.  
  2202. ======================================
  2203. < 검룡-2 >
  2204.  
  2205.  
  2206.  
  2207. “어서옵쇼!”
  2208.  
  2209. 식사를 위해 들어 온 식당은 정오가 조금 지나 점심시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스칼렛은 두 눈을 빛내면서 식당의 안을 둘러보았다. 브레던이라는 도시의 분위기가 다른 도시와 판이하게 달랐듯이, 식당 내부의 분위기도 독특했다.
  2210.  
  2211. 이성민과 스칼렛은 2층의 빈자리로 안내되었다. 둘을 안내한 것은 허벅지를 트인 치파오 차림의 여자 종업원이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이성민과 스칼렛을 향해 물었다.
  2212.  
  2213. “브레던은 처음이신가요?”
  2214.  
  2215. “아, 예.”
  2216.  
  2217. “역시! 그렇다면 이곳의 음식이 잘 맞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분들은 이계인이 많고, 본인이 이계인이 아니어도 이계인 출신의 조상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요.”
  2218.  
  2219. 종업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주변에 혼혈이 꽤 많아 보이기는 했다.
  2220.  
  2221. “각지에서 중원 출신의 무림인들도 많이 오고요. 그러다 보니 그 분들의 입맛에 맞는 요리가 많아요. 남자 손님은 괜찮을 것 같은데… 여자 손님은 음식이 입에 안 맞을 수도 있어요.”
  2222.  
  2223. 종업원이 스칼렛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무림 출신은 아니지만, 중원 무림인과 같은 동양인이다. 하지만 스칼렛은 누가 봐도 서양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업원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2224.  
  2225. “거르는 음식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으음. 중원 음식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는 해.”
  2226.  
  2227. 스칼렛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메뉴판을 휘휘 넘겼다. 그 말에 종업원이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2228.  
  2229. “중원 음식은 향신료를 듬뿍 사용해서 맛이 굉장히 강해요. 조금 덜한 것들로 추천해 드릴까요?”
  2230.  
  2231.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2232.  
  2233. 스칼렛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성민도 중원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똑같았기에, 종업원이 추천해 주는 음식들로 주문을 골랐다.
  2234.  
  2235. “소림으로 가서는 어쩔 거야?”
  2236.  
  2237. “글쎄요. 일단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2238.  
  2239. “나는 무공은 잘 모르지만, 소림이라고 하면 무림 문파 중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잖아.”
  2240.  
  2241. “그야 그렇기는 한데… 저도 소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라서요.”
  2242.  
  2243. 몇 달 동안의 여행 도중에, 이성민은 스칼렛에게 소림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알려 주었었다. 이성민의 말을 듣고서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2244.  
  2245. “멀리서 무공서를 반납해 주기 위해 온 것이니까 말이야. 뭔가 더 해주지 않을까?”
  2246.  
  2247. “글쎄요… 그리 가치가 없는 무공들이라는 말을 들어서요. 예의 상 뭔가를 챙겨줄 것 같기는 한데. 사실 뭘 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248.  
  2249. 네블이 말하기로는 소환단 정도는 줄 것이라고 하였지만. 일이 그렇게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2250.  
  2251. “그보다.”
  2252.  
  2253. 스칼렛이 미간을 찡그렸다.
  2254.  
  2255. “이 식당. 서비스는 괜찮은데 똥파리가 많네.”
  2256.  
  2257. 스칼렛이 다리를 꼬고서 팔짱을 꼈다. ‘똥파리’라는 말에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스칼렛은 얼굴과는 다르게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단어와 폭언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똥파리’라는 단어에는 이성민도 동의했다.
  2258.  
  2259. “그렇군요.”
  2260.  
  2261. 시선을 느낀다. 그들은 나름대로는 은밀하게 이쪽을 살피는 듯 했지만, 이성민과 스칼렛은 이쪽을 향하는 시선들을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둘이 종업원을 따라 2층에 안내되고, 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2층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이성민과 스칼렛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2262.  
  2263. 외인外人이라서? 아니, 그것보다는.
  2264.  
  2265. ‘아직 미숙해.’
  2266.  
  2267. 이성민은 혀를 차면서 생각했다. 내공을 숨기는 것이 미숙하다. 정말로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반박귀진이 완성되어 등봉조극을 이루게 된다. 아무리 심후한 내공과 드높은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내공과 육체의 조화가 완벽하고 심오해져 겉으로 보기에는 그 성취를 읽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268.  
  2269. 지금의 이성민에게는 멀고도 먼 경지였다. 지금의 이성민은 반박귀진은커녕 한서불침과 노화순청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대환단과 소환단을 통해 내공은 심후해 졌지만, 그를 조율하는 자하신공의 성취가 아직 너무 낮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게 되었어도 전체적인 내공의 조율이 아직은 미숙했다.
  2270.  
  2271. 그렇다 보니 아무리 내공을 감추고 기세를 낮추어도 흘러 넘쳐 버린다. 그렇다 보니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한 무인들은 이성민의 존재를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272.  
  2273. “후후! 똥파리라.”
  2274.  
  2275. 스칼렛의 투덜거림은 딱히 목소리를 낮춘 것이 아니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듣기에는 충분히 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은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청년이었다. 남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이성민과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2276.  
  2277. “아리따운 소저가 보기와는 다르게 입이 험해.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인가?”
  2278.  
  2279.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목구멍에 버터를 처발랐나.”
  2280.  
  2281. 스칼렛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과하지 않나 싶어서 이성민은 난감함을 느꼈고, 스칼렛에게 말을 걸었던 청년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2282.  
  2283. “…과연.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는…”
  2284.  
  2285. “이 미친 새끼. 회화를 소설로 배웠냐?”
  2286.  
  2287. 청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스칼렛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굳었던 청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청년이 성큼거리며 스칼렛에게 다가왔다. 이성민은 그것을 보면서 한숨을 쉬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2288.  
  2289. “그만.”
  2290.  
  2291. 이성민이 나서기도 전이었다. 다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청년의 걸음이 멈추었다.
  2292.  
  2293. “비청학 공자. 그대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품은 살의를 갈무리하고 얌전히 앉아 식사나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2294.  
  2295. 그렇게 말한 것은 반대쪽 창가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청년이었다. 청년의 말에 비청학이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2296.  
  2297.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도 알고 있을 텐데?”
  2298.  
  2299. “별호라는 것이 이래서 안 좋단 말이오. 대충 갖다 붙여 준 별호인데,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실력을 가진 좆밥들이 꼭 자기가 별호만큼 한다고 나댄단 말이야.”
  2300.  
  2301. “좆… 좆밥? 뭐?”
  2302.  
  2303. “좆밥이라고 했소. 유아백검儒雅白劍 비청학. 아니면 왜. 그대가 믿고 있는 것은 유아백검이라는 별호와 좆밥같은 실력이 아니라, 이 근처에서 꽤 세가 강성하다는 비씨 세가의 힘인가?”
  2304.  
  2305. 청년이 이죽거리며 하는 말에 비청학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허리춤에 맨 검을 어루만지면서 입술을 열었다.
  2306.  
  2307. “그대의 모욕이 도를 넘었군. 감당할 수 있겠소이까?”
  2308.  
  2309. “비청학 공자. 이건 내가 그대를 위해 하는 말이기도 하니, 부디 새겨들어 주시오.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을 논하고 싶거든 머리를 삭발하고 가문의 전 재산을 들고 숭산으로 들어가 제자로 들여 달라 한 뒤에, 소림의 제자가 되어 50년 동안 면벽 수련을 하시오. 아무리 그대가 좆밥이라고 하여도 소림의 무공을 들고 50년 면벽 수행을 한다면 그런 말을 논할 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오.”
  2310.  
  2311. 청년이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말이었기 때문에 비청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려 하였고,
  2312.  
  2313. “뽑지 마시오.”
  2314.  
  2315. 청년의 말이 비청학의 행동을 멈추었다. 단순히 ‘말’만이 비청학의 행동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청년의 목소리에 실린 심후한 공력이 비청학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2316.  
  2317. “그대가 검을 뽑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오. 그대의 대단치 못한 실력이 그대의 목숨을 보호해 줄 수 있을리는 만무하고, 유아백검이라는 별호도 마찬가지지. 비씨 세가의 힘도 마찬가지고.”
  2318.  
  2319. “그… 그대는 누구요?”
  2320.  
  2321. 비청학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청년이 내뱉은 말과 목소리에 실린 공력은 비청학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2322.  
  2323. “빨리도 묻는군. 하는 짓을 보아하니, 그대의 두 눈은 정말로 옹이구멍이었던 모양이야.”
  2324.  
  2325. “누구냐고 물었잖소…!”
  2326.  
  2327. “남궁희원.”
  2328.  
  2329. 청년이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 비청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청학 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2층의 손님들 대부분이 경악했다. 그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2330.  
  2331. ‘남궁’이라는 성씨를 쓰는 무림인이라면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남궁씨가 남궁세가의 직계이고 대단한 고수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궁희원이라면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 중에서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2332.  
  2333. 당연히 이성민도 남궁희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검룡劍龍 남궁희원. 전생의 이성민이 죽기 전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던, 남궁세가 제일의 후기지수다. 동시에 그는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세가 내 제일고수인 천존검왕天尊劍王 남궁백의 외아들이기도 했다. 즉, 가진 실력이 대단하며 거대한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의 힘을 등 뒤에 업은 금수저라는 말이었다.
  2334.  
  2335. “으… 으으음…”
  2336.  
  2337. 비씨 세가가 이 동네에서 꽤나 힘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궁세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 비청학은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2338.  
  2339. “이곳이 소림이 지배하는 도시라는 것을 다행인 줄 아시오. 뭐하고 있소? 가만히 앉아서 식사나 계속하지 않고.”
  2340.  
  2341. 남궁희원의 말에 비청학은 얌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성민은 그런 비청학을 보다가 남궁희원 쪽을 돌아보았다. 이성민과 눈이 마주치자 남궁희원이 빙그레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2342.  
  2343. “쟨 또 왜 와?”
  2344.  
  2345.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근처까지 다가 온 남궁희원은 스칼렛과 이성민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2346.  
  2347. “내가 괜한 참견을 한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주시오. 괜?히 시체라도 치우게 되었다가는 이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불쌍하지 않소.”
  2348.  
  2349. “시체라니. 무슨 말입니까?”
  2350.  
  2351. 이성민이 물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2352.  
  2353. “저 뭣도 모르는 좆밥 공자가 와서 뻘짓이라도 했다가는 시체가 되지 않았겠소?”
  2354.  
  2355.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2356.  
  2357. “직전까지 살기를 뿜으려 했으면서 어디서 거짓말을 하시오?”
  2358.  
  2359. 남궁희원의 말에 이성민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비청학이 다가 와 시비를 건다면 어느 정도의 위협을 줄 생각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2360.  
  2361. “괜찮다면 합석해도 되겠소?”
  2362.  
  2363. “밥 다 먹은 것 아니었습니까?”
  2364.  
  2365. “먹으려면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소.”
  2366.  
  2367. “밥을 먹고 싶은 거야? 아니면 대화를 하고 싶은 거야?”
  2368.  
  2369. 그렇게 물은 것은 스칼렛이었다. 남궁희원이 남궁세가의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스칼렛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남궁희원은 신경쓰지 않았다.
  2370.  
  2371. “당연히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오.”
  2372.  
  2373. “그러면 앉아. 밥값은 당신이 내고.”
  2374.  
  2375. “하하!”
  2376.  
  2377. 남궁희원은 크게 웃으면서도 의자를 빼고서 이성민의 곁에 앉았다. 이성민은 옆에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시선을 통해 느끼건데, 남궁희원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스칼렛이 아닌 이성민이었다.
  2378.  
  2379. “뭘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2380.  
  2381. “아니. 신기해서 그렇소. 그대는 반박귀진에 도달한 것도 아니고 반로환동을 한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그냥 보이는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 텐데… 뭐 주안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말이오. 궁금해서 묻는데, 그대는 몇 살이오?”
  2382.  
  2383. “열여덟입니다.”
  2384.  
  2385. “그렇군. 열여덟에 초절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말인가… 하하! 그건 참 대단하군. 나는 많고 많은 기재를 보아왔고 나 스스로도 대단한 기재라고 생각해 왔는데.”
  2386.  
  2387. 남궁희원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성민을 보는 남궁희원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2388.  
  2389.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2390.  
  2391. “뭡니까?”
  2392.  
  2393. “당신의 별호가 소천마요?”
  2394.  
  2395. 마시던 차를 뿜을 뻔 했다. 설마 소천마라는 별호를 이곳에서, 그것도 남궁희원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궁희원을 바라보았다.
  2396.  
  2397. “소천마?”
  2398.  
  2399. “소천마 위지호연.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이면서 어마어마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어린 괴물이지. 하지만 그대의 반응을 보니, 그대가 소천마는 아닌 것 같군.”
  2400.  
  2401. 타인에게서 위지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기를 보건데, 슬슬 떠돌던 위지호연이 자리를 잡고서 본격적으로 소문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때인 것은 맞았다. 물론 그런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만나지 않은, 전생의 위지호연이기는 했다.
  2402.  
  2403. “그리고 소천마는 여자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2404.  
  2405. “…여자?”
  2406.  
  2407. “남장을 한 여자라는 말이 있소. 누군가는 그냥 여자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2408.  
  2409. 그것만은 이성민이 알고 있는 전생의 기억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전생의 위지호연은 여자라는 의혹이 붙은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의 위지호연은 딱히 남자로서 보이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 듯 했다.
  2410.  
  2411. “뭐 어쨌든. 그대는 소천마가 아닌 것 같은데…”
  2412.  
  2413. 남궁희원은 거기서 한 번 말을 멈추고서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았다.
  2414.  
  2415.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 것이오?”
  2416.  
  2417. ======================================
  2418. < 검룡-3 >
  2419.  
  2420.  
  2421.  
  2422. 누구냐, 라고 묻는 남궁희원의 질문에 이성민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보았다. 대답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즉답하지 못한 것은, 이성민의 앞에 있는 것이 남궁세가의 소공자이자 차기 당주인 검룡 남궁희원이며, 그런 남궁희원에게 소천마 위지호연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에 조금 놀라버린 탓이다.
  2423.  
  2424.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2425.  
  2426. “이성민?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아, 미안하오. 내가 견문이 좀 짧은 편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흘려 듣는 편이라오. 싸가지가 없다는 말이지.”
  2427.  
  2428. 남궁희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2429.  
  2430. “혹, 이름 외에 불리는 별호같은 것은 없소?”
  2431.  
  2432. “없습니다.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 용병입니다.”
  2433.  
  2434. “무림인이 아니라 용병이라. 애초에 무림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오?”
  2435.  
  2436. “나는 노 클래스입니다.”
  2437.  
  2438.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짧은 침묵의 끝에 남궁희원이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2439.  
  2440.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군. 그대는 이미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듯 한데. 내 말이 맞지 않소?”
  2441.  
  2442. “나는 무림인이 아닙니다.”
  2443.  
  2444. “무공을 익히기는 했잖소.”
  2445.  
  2446. “익히기는 했죠. 하지만 당신과 같은 ‘진짜’ 무림인처럼…”
  2447.  
  2448. “진짜 무림인이라는 것은 상당히 우스운 말이오.”
  2449.  
  2450. 남궁희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2451.  
  2452. “나는 무공을 익혔고 남궁 성씨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원 무림’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오. 이계인으로서 에리아에 소환된 것은 내 고조부셨고, 그 분은 에리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남궁 성씨를 가진 무림인들을 모아다가 이 세계에 남궁세가를 세웠소.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 나는 중원 무림에 가본 적도 없고 중원 무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소. 내 고향은 에리아란 말이오.”
  2453.  
  2454.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팔짱을 꼈다.
  2455.  
  2456. “그런 나를 무림인이라 해야 하오? 내 말투는 세가에서 배웠고 내 무공도 세가에서 배웠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림인인 것인가? 나는 중원에서 태어나 이계에 온 것도 아닌데?”
  2457.  
  2458. “하지만 나보다는 진짜에 가까울 겁니다.”
  2459.  
  2460.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남궁희원이 다시 한 번 웃는 소리를 냈다.
  2461.  
  2462. “그럴 지도 모르겠군. 그대는 강기를 사용할 수 있소이까?”
  2463.  
  2464.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2465.  
  2466. “하지만 반박귀진을 완성하지는 못했군. 등봉조극도 이루지 못했어. 허면 노화순청은 어떻소?”
  2467.  
  2468. “이루지 못했습니다.”
  2469.  
  2470.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2471.  
  2472. 남궁희원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2473.  
  2474. “뚫리지 않았습니다.”
  2475.  
  2476. “…말이 안 되는데.”
  2477.  
  2478. 이성민의 대답에 남궁희원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2479.  
  2480. “임독양맥이 뚫리지도 않았는데 검강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2481.  
  2482.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는다면 검강을 쓸 수 없는 겁니까?”
  2483.  
  2484.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소. 검강을 쓰기 위해서는 기혈이 내공의 거친 흐름을 견뎌내면서 순환이 고속으로 되어야 하오. 임독양맥이 뚫린다는 것은 내공이 흐르는 가장 빠른 길이 열린다는 뜻이지.”
  2485.  
  2486.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2487.  
  2488. “당연히 중요하오.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는 상태로 강기를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효율이 쓰레기처럼 좋지 않소. 내공의 소모도 커지고.”
  2489.  
  2490. 남궁희원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이성민은 자신이 강기를 만들어내면서 거치는 ‘집중’의 과정이 사실은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요령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령이 아니라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아 효율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2491.  
  2492. “하지만 뭐… 그런 경우도 있겠지. 나도 겪어 본 적은 없소만, 이야기는 들어 보았소. 얻은 심득을 육체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육체가 무공을 따르지 못하게 된다는 군.”
  2493.  
  2494. “내가 그런 경우라는 겁니까?”
  2495.  
  2496.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오. 하지만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런 경우는 대게… 끝이 좋지 않거든. 심心과 신身과 기氣의 부조화는 필연적으로 주화입마를 불러오게 되오.”
  2497.  
  2498. 남궁희원의 말에 이성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심과 신과 기의 부조화가 지금의 이성민의 몸에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2499.  
  2500. “언제까지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야?”
  2501.  
  2502. 뚱한 표정을 하고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칼렛이 대뜸 내뱉었다. 마법사인 그녀는 이성민과 남궁희원의 대화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칼렛이 내뱉은 말에 남궁희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2503.  
  2504. “하하, 미안합니다. 신경 쓰이는 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2505.  
  2506. “그, 소천마 말입니다만.”
  2507.  
  2508. 스칼렛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성민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2509.  
  2510. “어떤 인물입니까?”
  2511.  
  2512. “관심 있소이까?”
  2513.  
  2514. “나는 무림인이 아니지만 ‘천마’라는 별호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소천마라고 한들 천마는 천마.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2515.  
  2516. “후후! 그대는 ‘천마’라 불리는 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2517.  
  2518. “거의 알지 못합니다.”
  2519.  
  2520. 이성민의 대답에 남궁희원이 웃는 소리를 냈다.
  2521.  
  2522. “현 에리아에 ‘천마’라고 불리는 이는 셋이오.”
  2523.  
  2524. 요리가 나왔다. 스칼렛은 이성민과 남궁희원의 대화를 막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소채무침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렸다.
  2525.  
  2526. “하나는 혈천마血天魔 백무선. 약관을 넘긴 청년으로 4년 전쯤부터 이름을 날리고 있지. 그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은 에리아 북단의 만년설의 지역이오.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그쪽 지역에서는 패주로 군림하고 있소. 조만간 그 지역을 일통하고서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것이라 추측되고 있지.”
  2527.  
  2528. 혈천마 백무선이라면 이성민도 안다. 이성민이 죽게 될 즈음에 백무선은 북쪽 지역을 떠나 남하한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성민도 모르고 있었다.
  2529.  
  2530. “다른 하나는 광천마狂天魔 벽원패. 난 사실 이 인물이야말로 천마라는 별호에 걸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오. 나이도 제법 많고 무공도 하늘에 닿았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지. 혈천마 백우선은 확실하게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인물이지만, 광천마 벽원패는…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초인이라고 할 수 있소. 거기에 성격이 잔혹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어서 마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혈천마 백무선은 북쪽 지역의 패주로 군림하며 그를 따르는 혈천맹血天盟의 맹주를 지내고 있지만, 광천마 벽원패는 추종자를 거느리지 않고 있소. 그는 홀로 떠돌지. 만약에라도 광천마와 마주치게 된다면 도망치도록 하시오. 그는 용서가 없는 인물이니까.”
  2531.  
  2532. 광천마 벽원패. 그 이름도 알고는 있다. 다만 혈천마 백무선이나 소천마 위지호연과 비교하면, 의외로 광천마 벽원패라는 이름은 이성민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원패는 광오하고 잔혹하여 용서가 없기로유명한 인물이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인물이라 큰 소문의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2533.  
  2534. “그리고 남은 하나가 그 소천마 위지호연. 소천마라는 별호만 본다면 혈천마나 광천마보다는 못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소. 사실 소천마 위지호연이야말로 배일에 쌓인 인물이라 그 힘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있지. 다만 분명한 것은, 소천마 위지호연은 앞서 말한 혈천마와 광천마와 비교해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괴물이라는 것이오.”
  2535.  
  2536. 남궁세가의 소공자인 검룡 남궁희원이 하는 말이다. 그 무게감은 확실히 이성민에게 전해졌다.
  2537.  
  2538. “위지호연이 어떤 인물인지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소. 하지만 그녀는 잔혹하고, 용서가 없으며, 자비롭기도 하고, 대범하며… 하하! 모순되는 소문들 투성이지. 위지호연이 ‘그’인지 ‘그녀’인지도 모르고. 다만 그 강함은 진짜라더군.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라고 하는데, 확실하게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 ‘천마’라는 별호를 가진 저 셋은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일 것이오.”
  2539.  
  2540. 안다. 위지호연은 천재다. 그 누구보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천재성을 알고 있었다.
  2541.  
  2542. “너희들.”
  2543.  
  2544. 깨작거리며 밥을 먹던 스칼렛이 눈을 치켜떴다.
  2545.  
  2546. “밥 안 먹냐?”
  2547.  
  2548. 그 말에 이성민은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남궁희원도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2549.  
  2550. 스칼렛은 중원의 음식이 그리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식사의 대부분은 이성민과 남궁희원이 해치워야만 했다. 남궁희원은 이미 식사를 했다고 한 주제에 대부분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입가심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남궁희원이 입을 열었다.
  2551.  
  2552. “소림에 가신다고 들었소.”
  2553.  
  2554. “우리끼리 나누는 말을 훔쳐 들었나 봐?”
  2555.  
  2556. “꼭 그런 것은 아니라. 그냥 들렸을 뿐이지. 제가 워낙 귀가 좋아서 말이오.”
  2557.  
  2558. 남궁희원이 능청을 떨면서 대답했다.
  2559.  
  2560. “소림에 간다면 저와 동행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마침 나도 소림에 볼 일이 있던 차인데.”
  2561.  
  2562. “무슨 볼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2563.  
  2564. “소림의 장문인인 불영대사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지. 남궁세가를 비롯한 네 개의 명문세가는 일 년에 한 번씩 불영대사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있소. 오래 전의 약속 때문이지.”
  2565.  
  2566. 네 개의 명문세가라면 남궁세가, 모용세가, 당가, 제갈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오래 전의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성민은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것을 남궁희원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런 것까지 묻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2567.  
  2568. “이 도시가 싫어졌어.”
  2569.  
  2570. 식사를 끝내고 나온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중원의 음식을 기대했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본래는 조금 더 도시를 관광해 볼 생각이었지만, 남궁희원과 만나게 되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바로 소림으로 향하기로 했다.
  2571.  
  2572. 하지만 브레던이라는 도시가 워낙에 큰 탓에, 숭산으로 이어지는 서쪽 성문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저물어 버렸다. 밤이 넘어서 소림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아, 일단은 여관을 잡아 하루를 보내고 내일 출발하기로 했다.
  2573.  
  2574. “아, 괜찮으시다면.”
  2575.  
  2576. 숭산의 근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림인이 많기 때문일까. 여관의 뒤에는 널찍한 연무장이 있었다. 그를 보던 남궁희원이 이성민을 보면서 말했다.
  2577.  
  2578. “가볍게 비무라도 한 번 해볼 수 있겠소이까?”
  2579.  
  2580. 그 권유에 이성민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남궁희원이 비무를 권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 했다. 이성민은 잠깐 고민하다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2581.  
  2582. “…친선전 정도라면.”
  2583.  
  2584. “당연히 그럴 것이오.”
  2585.  
  2586. 남궁희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2587.  
  2588. 스칼렛은 관심이 없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다행히 연무장을 쓰는 사람이 없어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성민과 남궁희원은 바로 연무장에서 마주 설 수 있게 되었다. 여관 주인에게 물으니 날이 없는 목검과 봉을 빌릴 수 있었다.
  2589.  
  2590. “창수라고는 생각했지만.”
  2591.  
  2592. 남궁희원은 목검을 가볍게 휘두르면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마갑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섰다. 창과 봉은 다른 무기이긴 했지만, 친선으로 하는 비무에서 날을 세운 무기를 쓰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2593.  
  2594. “사실 나는 진짜 같은 비무를 선호하기는 하는데. 참관인도 없으니 그런 비무는 너무 위험하겠지. 그러니 적당히, 즐겨 봅시다.”
  2595.  
  2596. “기대만큼 내가 잘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2597.  
  2598. “하하! 겸손이 과하시오. 뭐, 해 보면 알겠지.”
  2599.  
  2600.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넉살 좋던 표정이 사라지고 남궁희원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단순히 검법의 자세를 잡았을 뿐인데,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양 손으로 봉을 잡은 이성민은 남궁희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보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2601.  
  2602.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2603.  
  2604. 남궁희원은 강했다.
  2605.  
  2606. ======================================
  2607. < 검룡-4 >
  2608.  
  2609.  
  2610.  
  2611. 생각해 보면 검수와 이렇게 마주한 경험은 많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남궁희원처럼 제대로 무공을 익힌 고수와 대면하는 경험 자체가 드물었다.
  2612.  
  2613. 명문세가 중 하나로 꼽히는 남궁세가는 누구나 인정하는 검의 명가다. 검문으로 유명한 문파는 많지만 검으로 일가를 이룬 것은 남궁세가 뿐이다. 물론 견식이 짧은 이성민은, 남궁세가의 그 대단한 검법과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2614.  
  2615. ‘애초에 검수와의 싸움 경험 자체가 드물어.’
  2616.  
  2617. 남궁희원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벌써부터 ‘검룡’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못해도 절정의 수준은 넘었을 것이다. 그래. 최소치가 그것이다. 남궁희원은 이성민이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으니, 남궁희원도 이성민과 마찬가지로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618.  
  2619. 그렇다고 서로의 수준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절정고수라고 해도 그 격차가 크다. 하물며 남궁세가라는 걸출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무공과 고수들의 지도를 받아 온 남궁희원이 가진 ‘경험’은 이성민이 가진 경험과 질 적으로도 양 적으로도 차?원이 다를 것이다.
  2620.  
  2621. 이성민도 경험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C급 용병인 이성민이 13년 동안 살아 온 경험. 과거로 회귀하여 4년 동안 쌓은 경험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생의 이성민은 절정의 문턱도 밟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622.  
  2623. 그렇기에 이성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양 무릎을 낮추고 창을 쥔 이성민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대치는 영원처럼 긴 것 같았으나 실상은 고작해야 일 분도 지나지 않았다. 의식이 엿가락처럼 쭉 늘어지면서 호흡이 가빠져 온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울려대며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면서 검을 쥐고 선 남궁희원의 모습만이 선명해졌다.
  2624.  
  2625.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희원이었다.
  2626.  
  2627. 남궁희원이 밟은 보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걸음 하나하나가 기기묘묘하여 이성민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성민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끌면서 무영탈혼을 펼쳤다. 남궁희원의 보법이 환幻을 담았다면 이성민의 보법은 쾌快를 담았다.
  2628.  
  2629. 일보무흔은 무영탈혼 중에서도 극쾌를 추구하는 걸음이다. 쉭하고 사라진 이성민의 몸이 남궁희원의 앞을로 다가왔다. 남궁희원은 그런 이성민의 접근에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창, 아니, 봉. 그런 장병을 쥐고서도 오히려 거리를 좁혀오는 이성민의 무모함이 마음에 들었다.
  2630.  
  2631. 남궁희원이 쥔 목검이 움직인다. 느릿하게 움직인 듯 싶었으나, 남궁희원의 검이 만든 반원의 궤적은 근처의 것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듯 한 흡의 요결을 품고 있었다. 이성민은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봉을 단단히 붙잡으면서 ‘나’의 수법으로 남궁희원의 목검에 대응했다.
  2632.  
  2633. 빠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로의 병기가 튀어 오른다. 이성민은 봉을 고쳐 잡으면서 양 팔을 뒤로 쭉 빼냈다. 첫 초는 거리감과 반응속도를 보기 위한 것. 장병을 취하였는데 상대의 거리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남궁희원이 이성민보다 하수라면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이성민이 느끼는 남궁희원은 결코 자신보다 못하지 않았다.
  2634.  
  2635. 봉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걸음을 뒤로 미룬다. 양 팔을 앞으로 뻗고 상체를 뻗으니 이성민이 쓸 수 있는 거리는 남궁희원의 두 배에 가까워졌다. 이것이 봉이나 창과 같은 장병의 이점이다. 한 번 거리를 잡고 유지하려고 한다면 상대 쪽에서는 그를 뚫는 것이 힘들다.
  2636.  
  2637. 파바박! 이성민의 손 안에서 봉이 폭발했다. 난무하여 쇄도하는 봉 끝은 뭉툭했으나 그렇다고 얻어맞을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남궁희원은 보법을 밟으면서 검을 곧추세웠다. 살짝 흔들리는 목검과 닿을 때마다 이성민이 내지르는 봉의 궤적이 조금씩 비틀렸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궁희원이 힘을 밀어 넣어 궤도를 꺾는 타이밍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2638.  
  2639. 내지른 봉을 뒤로 뻗고, 그 순간에 이성민은 봉에 회전을 집어넣었다. 구천무극창의 일초, 추혼일살이 쏘아졌다. 친선 비무였기에 상대를 해할 만큼의 위력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이전의 공격들과 비교한다면 확연한 무거움이 깃든 찌르기였다.
  2640.  
  2641. “오.”
  2642.  
  2643. 남궁희원의 입에서 짧은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즉시 남궁희원의 손 안에서 검이 빙글 돌았다. 역수로 쥔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다. 따아악! 살초가 아니었다고 하여도 추혼일살이 도중에 걷혀졌다. 남궁희원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2644.  
  2645. “이거 참 재미있군. 진짜 창이었다면 더 매서웠을 텐데… 하하! 이거 흥이 나는 걸. 하지만 부족해. 그러니까… 이건 어떻소?”
  2646.  
  2647. 남궁희원의 입꼬리가 빙긋하고 올라갔다.
  2648.  
  2649. “가벼운 내기를 하는 것이오.”
  2650.  
  2651. “무슨 내기 말입니까?”
  2652.  
  2653. 이성민은 남궁희원이 쥔 목검을 보면서 물었다. 역수로 검을 쥐고 있던 남궁희원이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2654.  
  2655. “친선 비무이니, 친분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내가 이긴다면 나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소?”
  2656.  
  2657. “…당신을 형님으로?”
  2658.  
  2659. “이상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애초에 내가 그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2660.  
  2661. “만약 내가 이긴다면 어떻게 합니까?”
  2662.  
  2663.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형님으로 모시지. 좋지 않소? 남궁세가의 소공자인 나 남궁희원의 형님이 되는 것이오.”
  2664.  
  2665. 남궁희원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2666.  
  2667. “물론 나는 나보다 어린 사람의 아우로 들어갈 생각이 없소. 그러니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2668.  
  2669. “…그럼 나한테 너무 유리한 것 아닙니까? 나는 당신보다 어린데. 내가 진다고 해서…”
  2670.  
  2671. “그렇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고작해야 그런 무인인 것이겠지.”
  2672.  
  2673. 남궁희원의 말에 이성민의 말문이 막혔다.
  2674.  
  2675. “모름지기 무를 익힌 자라면 패배를 달게 느끼지 않는 법이오.”
  2676.  
  2677. 그 말이 이성민이 품고 있던 패배에 대한 여지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성민은 이 비무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2678.  
  2679. “자, 그럼 계속해서 놀아 봅시다.”
  2680.  
  2681. 남궁희원이 검을 흔들며 말했다. 이번에도 남궁희원이 먼저 움직였다. 이전의 접근이 환이었다면 이번에는 쾌였다. 빠르게 다가 온 남궁희원은 오른 손에 쥔 검을 바쁘게 움직였다. 시야 가득 검격이 덮쳐 온다. 이성민은 표정을 굳히면서 봉을 잡은 양 손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2682.  
  2683. 진정한 창법의 고수라면 복잡한 창술 없이 란나찰, 세 가지만으로도 모든 공격에 대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위지호연이 란나찰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란으로 받아라. 안에서 파고들어오는 공격은 나로 받아라. 틈이 보인다면 찰로 찔러라.
  2684.  
  2685. 숱하게 들었던 말. 그것은 이미 이성민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진리이며 신앙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완전히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남궁희원의 검은 빠르고 무거우면서도 변화가 다양했다. 오히려 그것은 명문정파이자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의 검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2686.  
  2687. 철저하게 승리만을 추구하는 검이라는 감상이었다. 그 실용적인 검법은 목검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날카로워 감히 접근하는 것이 두려웠다.
  2688.  
  2689. 거리를 벌려야 한다. 이성민이 발을 뒤로 미끌일 때마다 남궁희원은 성큼거리며 다가온다. 양 손으로 잡은 봉은 찌르는 찰을 펼치지 않았다. 크게 휘두른 봉이 남궁희원의 머리로 날아온다. 창이라고 해서 단순히 찌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2690.  
  2691. 남궁희원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이성민의 공격을 피해냈다. 이성민은 봉의 앞쪽을 잡은 오른 손을 아래로 꺾으면서 봉 자체를 양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트렸다. 단숨에 봉의 거리감이 바뀐다. 남궁희원은 관자놀이로날아오는 봉을 보고 능숙하게 대응했다. 홱하고 휘두른 목검이 봉과 부딪힌다. 아니, 부딪힌다기 보다는 그것은 ‘닿았다.’ 봉과 목검이 착하고 달라붙었다. 흡吸. 접착제라도 바른 것마냥 목검과 봉이 단단히 붙는 다. 그것은 남궁희원이 내공을 다루는 것이 굉장히 능숙하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였다. 남궁희원이 목검을 움직일 때마다 이성민의 봉이 따라 움직였고, 이성민은 더욱 내공을 불어넣으면서 봉을 바깥쪽으로 회전시켰다. 따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목검과 봉이 떨어진다.
  2692.  
  2693. 거기서 이성민은 구천무극창의 이초인 분뢰추살을 펼쳤다. 수십 개로 분영한 봉이 남궁희원을 노린다. 남궁희원이 목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쩌어엉! 큼직한 소리와 함께 이성민이 내지른 봉이 위로 튀어 오른다.
  2694.  
  2695. 아무리 빠르게, 연거푸 찌른다고 해도 결국 이성민이 쥐고 있는 것은 하나의 봉이다. 그 중 하나를 정확히 맞붙여 찌른 남궁희원의 수법은 단조로우면서도 정확했다.
  2696.  
  2697. 더.
  2698.  
  2699.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보법과 창법을 섞는다. 단순히 거리를 벌리고 일직선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를 노린다. 남궁희원은 그것조차 대응했다. 남궁희원의 대응은 허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고 그의 목검은 이성민의 봉보다 단단하고 가벼우며 무거운 것 같았다. 그런 모순적인 평가 이외에 다른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2700.  
  2701. 남궁세가의 검.
  2702.  
  2703. 이성민이 처음 겪는 명문세가의 전통있는 검법이 이성민을 압박해 온다. 이성민이 익힌 구천무극창은 그 검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성민은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장병인 창을 쥐었음에도 남궁희원의 검법을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밀린다. 이성민의 손아귀에 땀이 차오르고 초조함에 짓이겨 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할 때.
  2704.  
  2705. 남궁희원의 검이 이성민의 창로를 꿰뚫었다.
  2706.  
  2707. “헉.”
  2708.  
  2709. 이성민이 숨을 삼켰다. 남궁희원의 목검은 이성민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2710.  
  2711. “내가 이겼소.”
  2712.  
  2713. 남궁희원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2714.  
  2715. “앞으로는 나를 형님이라 부르도록 하시오.”
  2716.  
  2717. “…으음…”
  2718.  
  2719. “정 원한다면 목검이 아닌 진검과 봉이 아닌 창을 들고 다시 승부해도 좋고. 나는 그 편이 더 재미있을 듯 하니.”
  2720.  
  2721. “아니, 아닙니다.”
  2722.  
  2723.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2724.  
  2725. “내가… 졌습니다. 형님.”
  2726.  
  2727. 그 말에 남궁희원이 방긋 웃었다.
  2728.  
  2729. “아우는 굉장히 특이해.”
  2730.  
  2731. 이성민이 형님이라고 부른 순간, 남궁희원은 즉시 자신의 말투를 바꾸었다. 남궁희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성민을 올려 보았다. 이성민은 잠깐 주저하다가 남궁희원의 앞에 마주 앉았다.
  2732.  
  2733. “무엇이 특이하다는 겁니까?”
  2734.  
  2735. “아우의 창술은 이미 명인의 경지에 올라가 있어. 그래. 창술은 말이야. 그런데 그게 참 애매하단 말이지.”
  2736.  
  2737. 명인의 경지라면서 애매하다는 것은 또 뭔가?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남궁희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성민의 시선에 남궁희원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2738.  
  2739. “란나찰. 창수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세 가지의 기본기지. 아우는 그것만큼은 명인의 경지야. 하지만 란나찰이 아닌 다른 창법은 조금 부족하더군.”
  2740.  
  2741. “…어떤 의미로 하는 말입니까?”
  2742.  
  2743. 란나찰이 아니라면 구천무극창을 하는 말이리라. 이성민의 질문에 남궁희원이 웃으며 말했다.
  2744.  
  2745. “내가 보기에는. 아우는 실전 경험이 부족해. 특히나 고급 창술로 싸우는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 기본기를 쓰는 법은 알지만 그 이상의 고급 창술은 단순히 이론만으로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실전 경험. 아우는 고수와 싸워 본 경험이 너무 부족해 보여.”
  2746.  
  2747. 그 말에 이성민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2748.  
  2749. “그리고 또. 아우는 내공을 다루는 것이 너무 미숙하군.”
  2750.  
  2751. “내공… 말입니까?”
  2752.  
  2753. “맞아. 육체는 할 수 있는데 내공이 따라와 주지 못하는 느낌? 그렇다고 해서 내공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고… 이 경우에는 심법의 수준이 낮거나 기혈이 제대로 뚫리지 않았다는 말이지. 역시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환골탈태?”
  2754.  
  2755. “환골탈태라고요?”
  2756.  
  2757. “임독양맥이 뚫리고 단전이 커지게 되면 육체가 그에 맞게 변화하지. 근데 이게 참 묘한 일이란 말이야. 내공이 육체를 따르지 못하는데 육체가 환골탈태한 것도 아니라니. 심, 기, 체. 모두가 엉망으로 꼬여 있어. 대체 아우의 몸뚱이는 뭐지?”
  2758.  
  2759. 남궁희원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검은 심장. 갑작스레 육체와 동화 된 검은 심장이… 이성민의 육체를 기묘하게 꼬아놓은 듯 했다.
  2760.  
  2761. “뭐 그건… 앞으로 아우가 내공수련을 열심히 한다면 보완될 거야. 경험도 마찬가지지. 내가 왜 아우를 아우로 삼고 싶어했는지 알아?”
  2762.  
  2763. “…모르겠습니다.”
  2764.  
  2765. “아우는 언젠가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설 거야.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초절정에 입문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2766.  
  2767.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 웃었다.
  2768.  
  2769. “아우로 삼아 나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지.”
  2770.  
  2771. “내 인성이나 배경, 과거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겁니까?”
  2772.  
  2773. “무슨 말인가?”
  2774.  
  2775. “내가 당신… 이 아니라, 형님의 아우가 된다고 해서. 형님을 진심으로 형님으로 모시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2776.  
  2777. “그건 아우가 하고 싶은 대로 해.”
  2778.  
  2779. 남궁희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2780.  
  2781. “내가 알 바는 아니거든. 그냥, 아우를 아우라 부르고 아우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남한테 보여주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해.”
  2782.  
  2783.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아우로 삼은 겁니까?”
  2784.  
  2785. 이성민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물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2786.  
  2787. “말하지 않았나. 숭산 소림에 가서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과 함께 불영 대사에게 인사를 올려야 한다고.”
  2788.  
  2789.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2790.  
  2791. “허세라는 것은 중요한 거야.”
  2792.  
  2793. 그렇게 말하는 남궁희원의 웃음은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2794.  
  2795.  
  2796.  
  2797. ======================================
  2798. < 소림-1 >
  2799.  
  2800.  
  2801.  
  2802. “밤 새 붙어먹기라도 했어?”
  2803.  
  2804. 스칼렛은 부쩍 거리가 가까워진 이성민과 남궁희원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이 하하 웃더니 이성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2805.  
  2806. “무릇 사내끼리 친해지는 것에는 술 한 잔과 하룻밤, 한 번의 비무로 충분한 법이외다.”
  2807.  
  2808. “다른 것은 다 그러려니 듣겠는데 하룻밤이라는 것이 참 묘하게 들리네. 뭐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2809.  
  2810.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살피듯 하는 질문에 이성민이 질색하여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해가 빠른 이성민과는 다르게 남궁희원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2811.  
  2812. “하룻밤이 하룻밤이지. 이상한 짓이라는 것은 또 무엇이오?”
  2813.  
  2814. “형님. 괜한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2815.  
  2816. “아니,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아우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2817.  
  2818.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궁희원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칼렛도 남궁희원에게 말 뜻을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2819.  
  2820. “어쨌든. 어제 이후로 우리 둘은 의형제가 되었소.”
  2821.  
  2822. “너 좋겠다. 남궁세가의 소공자님이랑 의형제가 된 거잖아. 어디 가서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2823.  
  2824. 남궁세가는 명문세가답게 에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두고 있다. 어디 가서 남궁세가 출신이라고 말하고 그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모든 곳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파가 득세한 지역이라면 남궁세가와의 인연이 오히려 안 좋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2825.  
  2826. 서쪽 성문을 나선 셋은 곧바로 숭산으로 향했다. 소림의 본산이 있는 숭산은 그리 크지도 않았고 산세가 험하지도 않았다. 에리아에 소림을 세운 신불 무각대사가 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작달막한 산을 숭산으로 이름 붙이고 소림을 이곳에 세운 것인지는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2827.  
  2828. “말년에 노망이 든 걸 거야.”
  2829.  
  2830. 스칼렛이 물을 마시면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은 내심 동의했고 남궁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만나고 동행한지 이제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남궁희원이라는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정파의 명문세가 소공자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소탈한 점 때문이었다.
  2831.  
  2832. “소림의 장문인인 불영대사와 오래 전에 약속을 했다고 했는데. 무슨 은혜입니까?”
  2833.  
  2834. “아우가 궁금했던 모양이지. 왜 어제는 묻지 않았나?”
  2835.  
  2836. “친하지도 않는데 묻기에는 조금 눈치 보여서.”
  2837.  
  2838. “맞아. 그때 물었으면 대답해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대답해 주지.”
  2839.  
  2840. 남궁희원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2841.  
  2842. “남궁세가, 제갈세가, 모용세가, 당가. 이 네 개의 가문은 당연히 네 개의 후계자들을 가지고 있지. 나이는 다 비슷비슷하고 실력도 고만고만해.”
  2843.  
  2844. “예.”
  2845.  
  2846. “우리가 아직 어릴 적이었지. 각 세가의 가주들은 세가를 하나로 통합한 단체를 만들고자 했어. 그, 왜. 무림맹처럼 말이야. 이름도 지었더군. 천룡회. 그런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 문제가 생겼지. 각 세가의 가주들의 실력도 다 비슷했거든. 누구 하나를 회주로 세우자니 타 가문이 반발할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가문을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가진 가주도 없었단 말이야.”
  2847.  
  2848. 명문세가의 가주라는 것은 그 가문을 책임지고 통솔하는, 가문 내 최고의 고수다. 남궁세가의 제일고수로 천존검왕 남궁백이 있듯이 다른 가문에도 그에 버금가는 고수들이 있다.
  2849.  
  2850.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지. 다음 세대에 맡기기로 한 거야. 마침 나이가 비슷한 자식들도 있으니, 이 놈들을 어릴 때부터 잘 키워서 잘난 놈을 천룡회의 회주로 삼자고 말이야. 그에 대한 공증인으로 나서 준 것이 현 소림 장문인인 괴불怪佛 불영대사고.”
  2851.  
  2852.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전생에서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이성민이 살았던 전생이 명문세가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탓이기도 했고. 전생에 이성민이 죽을 때가지 천룡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853.  
  2854. ‘앞으로 못해도 8년 동안은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2855.  
  2856. 과연 누가 승리하여 천룡회의 주인이 될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성민은 남궁희원이 천룡회의 회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857.  
  2858.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숭산 소림의 산문에 도착했다. 숭산은 작았지만 산문은 작지 않았다. 높게 세워진 문을 보고서 이성민은 압도되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스칼렛도 감탄성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2859.  
  2860. “저렇게 문짝이 크다면 말이야. 열고 닫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2861.  
  2862. “내가 닫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소.”
  2863.  
  2864.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성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성민도 스칼렛과 함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이성민은 미리 꺼내 품에 넣어 둔 백보신권과 나한보법, 달마심법의 비급을 손으로 더듬었다.
  2865.  
  2866. “오랜만입니다. 남궁공자.”
  2867.  
  2868. 산문 앞을 지키고 있던 승려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머리털 한 올 없는 깨끗한 민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그 반사광을 제대로 얻어맞은 스칼렛이 눈살을 찌푸렸다.
  2869.  
  2870. “그렇구려. 다른 후계자들은 도착했소이까?”
  2871.  
  2872. “그들은 어제 도착하였습니다. 남궁공자가 가장 늦었지요.”
  2873.  
  2874. 승려가 염주를 굴리면서 말했다. 힐난하는 투는 아니었으나 지각했다는 것은 결국 사실이다. 이성민은 그 지각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괜히 남궁희원을 힐긋 보았다. 하지만 남궁희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
  2875.  
  2876. “늦을 만한 이유가 있었소이다. 즐거운 만남이 있었거든.”
  2877.  
  2878. “남궁공자와 함께 온 두 분 때문입니까?”
  2879.  
  2880. 승려가 이성민과 스칼렛을 힐긋 보면서 물었다. 여자인 스칼렛을 보는 눈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그 시선이 이성민에게 향할 때에는 달랐다. 시선에 담긴 진한 관심을 느끼며 이성민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2881.  
  2882. “맞소이다.”
  2883.  
  2884. “아직 어린 듯 한데 대단한 경지로고…”
  2885.  
  2886. 승려가 감탄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셋은 승려를 지나치고서 소림의 안으로 들어섰다.
  2887.  
  2888. “아우는 무공서를 소림에 반납하겠다고 했었지. 기왕 그렇게 된 것, 아예 나를 따라서 불영대사를 만나는 것이 어떤가? 아마 불영대사가 더 좋은 값을 쳐줄 듯 한데.”
  2889.  
  2890. “보상을 원하고 온 것은 아닙니다만.”
  2891.  
  2892. “에이. 아우. 나도 알 건 아는 사람이야. 어디서 되도 않는 구라를 치고 그러나? 소림의 비전 무공서 세 권이니 소환단 하나는 받고 싶을 것 아냐?”
  2893.  
  2894. 정곡이었기에 이성민은 반론하지 않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2895.  
  2896. “불영대사는 괴팍한 늙은이야. 내가 아우를 위한 조언을 해 주자면… 불영대사한테는 구라를 치지 마. 그 늙은이. 불경 외다가 신통력이라도 익힌 것인지 남이 치는 구라는 귀신같이 알아 먹거든.”
  2897.  
  2898. “구라… 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2899.  
  2900. “처맞아.”
  2901.  
  2902. 남궁희원이 정색하고 말했다.
  2903.  
  2904. “그 늙은이가 괜히 괴불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야. 말보다 주먹이 앞서가는 늙은이지. 가끔 보면 치매라도 걸린 것 같다니까. 그런 늙은이가 어떻게 소림의 방장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어.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2905.  
  2906. 소림의 본산에서 방장을 씹어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인가? 이성민은 진지하게 그것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2907.  
  2908. “예나 지금이나 무례하시군요.”
  2909.  
  2910. 짜증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궁희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2911.  
  2912. “당아희.”
  2913.  
  2914. 남궁희원이 중얼거렸다. 몸에 착 달라붙는 새카만 무복을 입은 여자가 성큼거리며 남궁희원에게 다가왔다. 그는 남궁희원의 뒤에 서있는 이성민과 스칼렛을 힐긋 보더니, 이어서 남궁희원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2915.  
  2916. “약속한 날은 어제였을 텐데요?”
  2917.  
  2918. “거 사정이 있어서 늦었소.”
  2919.  
  2920. “당신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우리가 왜 하루를 손해 봐야 하죠?”
  2921.  
  2922. “누가 기다려달라고 했소이까?”
  2923.  
  2924. 남궁희원이 되려 뻔뻔하게 묻고 나서자 당아희의 말문이 막혔다. 남궁희원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면서 당아희를 지나쳤다. 남궁희원이 그렇게 행동하자 당아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2925.  
  2926. “너 되게 싸가지 없다.”
  2927.  
  2928. “먼저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데 왜 내가 내 싸가지를 챙겨야 하오?”
  2929.  
  2930. 스칼렛의 말에 남궁희원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뒤를 따르면서 당아희 쪽을 힐긋거리며 돌아 보았다. 몸을 홱 돌린 당아희와 이성민의 눈이 마주쳤다.
  2931.  
  2932. “…소협은 누구죠?”
  2933.  
  2934. 당아희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성민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 말에 이성민이 대답하기도 전에 남궁희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2935.  
  2936. “하하하!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는 고수에게 소협이라니.”
  2937.  
  2938. “초절정… 이라고요?”
  2939.  
  2940. “우리 당씨 소저가 눈썰미가 많이 부족한 듯 싶군. 무공 수행을 게을리 한 것 아니오?”
  2941.  
  2942. 남궁희원의 이죽거림에 당아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씨근거리는 숨을 뱉던 당아희가 뾰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2943.  
  2944. “그래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요!”
  2945.  
  2946. “소협에서 사람으로 바뀌었군. 당 소저도 참 알고 보면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단 말이오.”
  2947.  
  2948. “누구냐고 물었잖아요!”
  2949.  
  2950. “내 아우라오.”
  2951.  
  2952. 남궁희원이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한숨을 삼키면서 남궁희원과 당아희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상황을 위해 남궁희원이 이성민을 아우로 삼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성민이 18살이라는 나이에 절정고수를 넘어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가능성과 실력을 겸비했다는 뜻이다. 남궁희원이 그런 이성민을 아우로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남궁희원의 급을 올려준다.
  2953.  
  2954. ‘영리하다고 해야 할지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할지.’
  2955.  
  2956. 둘 다겠지. 어찌 되었든 이성민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남궁희원이 이성민의 존재 자체를 이용하는 것처럼, 이성민도 남궁희원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사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남궁희원이 가진 남궁세가 소공자라는 배경은 의형제로 삼기에 과해 넘친다.
  2957.  
  2958.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2959.  
  2960. “이성민…? 모르는 이름인데…”
  2961.  
  2962. “당연히 모르겠지. 그래서, 다른 후계자들은 어디에 있소?”
  2963.  
  2964. 남궁희원이 뒷짐을 지며 물었다. 그 질문에 당아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홱하고 몸을 돌렸다. 당아희는 따라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남궁희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당아희의 뒤를 쫓아갔다.
  2965.  
  2966. 잘 가꾸어진 정원에 두 명의 남녀가 서있었다. 일단 따라 온 이성민을 향해 남궁희원이 전음으로 모인 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2967.  
  2968. [저기 저, 무게 잡고 서있는 놈이 제갈태령. 제갈세가의 소공자로 은비룡銀飛龍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지. 방금 전에 지랄 맞던 계집이 독접毒蝶 당아희. 그리고 저곳에 있는 아리따운, 한 떨기 꽃과 같은 아가씨가 바로… 내가 사모하고 있는, 화설花雪 모용서진이라고 한다.]
  2969.  
  2970. 모두가 이성민이 알고 있는 별호였다. 은비룡 제갈태령도, 독접 당아희도, 화설 모용서진도. 전생에서는 인연이 없는 거물들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2971.  
  2972. “늦었구나. 희원아.”
  2973.  
  2974. “사정이 있었소이다.”
  2975.  
  2976. “우리가 너를 기다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불영대사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서는 사죄해야 할 것이야.”
  2977.  
  2978. “그건 불영대사에게 직접 하면 될 일 아니오?”
  2979.  
  2980. 남궁희원의 대답에 제갈태령이 남궁희원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남궁희원은 제갈태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던 모용서진이 입을 열었다.
  2981.  
  2982. “불영대사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2983.  
  2984. “음.”
  2985.  
  2986. 남궁희원이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갈태령이나 당아희에게는 건방을 떨어댔지만, 모용서진을 상대로는 입을 꾹 다물고 과묵한 척 머리를 끄덕거린다. 아무래도 전음으로 해댔던, 모용서진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2987.  
  2988. “그러면, 아우.”
  2989.  
  2990. 남궁희원이 이성민을 돌아 보면서 말했다.
  2991.  
  2992. “나는 불영대사를 뵙고 올 테니. 아우는 스칼렛님과 함께 대충 소림 구경이라도 하고 있으시게. 불영대사께는 내 미리 언질을 전할 터이니.”
  2993.  
  2994. “알겠습니다, 형님.”
  2995.  
  2996. 이성민이 그렇게 말하자 제갈태령과 모용서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이성민이 도달해 있는 무위를 느끼고 있었고, 고수인 이성민이 남궁희원을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2997.  
  2998. “절 밥은 먹을만 했으면 좋겠네.”
  2999.  
  3000. 단 둘이 남게 되자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3001.  
  3002. 그러고 보니 아직 아침도 먹지 않았다.
  3003.  
  3004.  
  3005.  
  3006. ======================================
  3007. < 소림-2 >
  3008.  
  3009.  
  3010.  
  3011. 대뜸 밥을 달라고 청한 것이었는데, 소림의 승려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스칼렛은 보란 듯이 이성민을 향해 히죽거리며 웃었고, 이성민은 괜히 뻘쭘해져서 입맛을 다셨다.
  3012.  
  3013. 아직 점심시간이 되기는 이른 탓일까. 안내 된 식당에는 식사 중인 사람이 적었다. 그 얼마 없는 사람들도 머리를 민 승려들이었다. 스칼렛은 털 한오라기 없는 승려들의 머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았고, 이성민은 그런 스칼렛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3014.  
  3015. “무례입니다.”
  3016.  
  3017. “내가 뭔 말을 했다고.”
  3018.  
  3019.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적당히 빈 자리에 앉자, 그리 오래지 않아 키가 작은 동자승이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소림의 음식은 생긴 것부터가 절밥처럼 보였다. 간이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스칼렛의 입맛에 맞았다.
  3020.  
  3021.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 내의 승려들은 이성민과 스칼렛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 덕분에 이성민과 스칼렛도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조용한 식사가 끝날 즈음에,
  3022.  
  3023. “이성민님.”
  3024.  
  3025. 동자승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접시를 비우고 차를 마시고 있던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동자승을 바라보았다. 동자승은 합장을 하면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3026.  
  3027. “방장께서 부르십니다.”
  3028.  
  3029. “…나를?”
  3030.  
  3031. “예.”
  3032.  
  3033. 방장이라면 괴불 불영대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남궁희원이 불영대사에게 말을 전해 준 모양이었다. 이성민이 스칼렛 쪽을 보자, 젓가락을 쯥하고 빨고 있던 스칼렛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3034.  
  3035. “다녀 와.”
  3036.  
  3037. “스칼렛님은?”
  3038.  
  3039. “난 적당히 이 근처나 둘러보고 있을게. 어차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아냐?”
  3040.  
  3041. “그건 이야기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닐까요.”
  3042.  
  3043. “가보기나 해.”
  3044.  
  3045. 스칼렛이 젓가락을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살짝 머리를 끄덕거리고서 몸을 일으켰다. 동자승은 이성민이 일어서자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나갔다.
  3046.  
  3047. 이성민이 동자승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동자승이 걷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을 ‘걷는다’고 해야 할까. 동자승이 펼치는 것은 기묘한 신법이었다. 동자승이 한 걸음 앞으로 뻗을 때마다 자그마한 몸뚱이가 휙휙하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보통의 신법이 몸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동자승이 펼치는 신법은 걸음과 걸음 사이의 공간이 접히는 것 같았다.
  3048.  
  3049. 내공에 부족함이 거의 없고, 신공절학에 들어가는 무영탈혼을 익힌 이성민이었지만 동자승의 걸음을 간신히 쫓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자승은 소림의 뒷문을 빠져나가더니, 그 뒤로 이어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3050.  
  3051. 이성민은 동자승이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불영대사를 만난다던 남궁희원과 다른 세가의 후계자들은 뒷문으로 나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3052.  
  3053. “불영대사를 향해 가는 것이 맞습니까?”
  3054.  
  3055. “네.”
  3056.  
  3057. 이성민이 큰 소리로 묻자 동자승이 화답했다.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게 되었다. 동자승은 나무 사이사이를 작은 동물처럼 빠르게 가로질렀고, 이성민도 동자승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서로가 경신법을 펼쳐 달린 탓에 소림과는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동자승의 걸음이 멈춘 것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동굴의 입구였다.
  3058.  
  3059. “이곳입니다.”
  3060.  
  3061. 동자승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3062.  
  3063. “불영대사는 이 안에 있습니다.”
  3064.  
  3065. 말의 끝맺음과 함께 동자승은 합장을 했고, 이성민의 눈앞에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동자승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안개는 이미 흩어져 사라졌다.
  3066.  
  3067. [뭐하고 있는 게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3068.  
  3069.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전음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그 진원지를 확인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3070.  
  3071. [아해야. 이 안쪽이란다.]
  3072.  
  3073. 목소리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동굴의 안쪽이다. 이성민은 긴장하여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동굴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3074.  
  3075. 몸을 살짝 낮춰서야 간신히 동굴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동굴의 안쪽에서 불빛이 비춰지고 있었고, 이성민은 그것을 방향표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걸어 들어갈수록 동굴의 천장은 높아져서, 얼마 걷지 않아 허리를 꼿꼿이 피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3076.  
  3077. “과연.”
  3078.  
  3079. 동굴의 끝에는 노승老僧이 정좌하여 앉아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이성민을 본 노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깊은 주름과 기다란 수염이 노인이 살아 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3080.  
  3081. “너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3082.  
  3083. 노승이 중얼거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3084.  
  3085. “…당신은 누구십니까?”
  3086.  
  3087. “알면서도 묻는구나. 아해야.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게냐.”
  3088.  
  3089. 노승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이성민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3090.  
  3091. “…괴불 불영대사.”
  3092.  
  3093. “맞다. 내가 괴불 불영이다.”
  3094.  
  3095. 불영대사가 웃음을 흘렸다. 소림의 방장이라기에 법력높은 고승을 상상했으나. 막상 이성민이 앞에 있는 불영대사에게 느낀 것은, 오래 된 늙은 요괴같다는 인상이었다.
  3096.  
  3097. “방금 그건 뭐였습니까.”
  3098.  
  3099. “법술이다.”
  3100.  
  3101. 불영대사가 말했다. 그 대답도 신경이 쓰였지만, 이성민을 거슬리게 한 것은 불영대사가 중얼거린 다른 말이었다.
  3102.  
  3103. “괴력난신… 이라는 것은 뭡니까?”
  3104.  
  3105. “괴이怪異, 용력勇力, 패란悖, 귀신鬼神.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존재와 현상. 그 모든 것을 칭하는 말이지.”
  3106.  
  3107. “괴력난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은?”
  3108.  
  3109. “의미 그대로란다, 아해야. 너는 괴이를 품고 용력의 보살핌과 패란의 가호를 받아 귀신의 어여쁨을 받고 있구나.”
  3110.  
  3111. 그렇게 말하는 불영대사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으나, 이성민은 즐겁지 않았다. 괴력난신이라는 것이 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에 대해 캐물어봤자 불영대사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3112.  
  3113.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주면 안 됩니까?”
  3114.  
  3115. “아해야. 내가 그것이 가능하였다면 이미 육신을 벗고 혼백이 하늘에 올라 신좌에 앉았을 게다. 오랜 세월 살아오기는 하였으나 아직 한참 멀었지.”
  3116.  
  3117. 결국 이번에도 제대로 말해줄 수가 없다는 것 아닌가. 이성민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3118.  
  3119. “어떻게 알았습니까?”
  3120.  
  3121. “무엇을 말이냐?”
  3122.  
  3123. “그, 괴력난신이 뭐시기. 설마 불영대사께서도 내 인과율이 비틀어져있음을 보고 있는 겁니까?”
  3124.  
  3125. “인과율? 그건 뭔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아해야. 내가 말하는 괴력난신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란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존재와 그에 해당되는 모든 현상이지.”
  3126.  
  3127. 그렇게 말하는 불영대사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수염이 풍성한 노인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 묘하게 어울렸다.
  3128.  
  3129. “…나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3130.  
  3131. “그에 대해 나 자신은 해답을 줄 수가 없지. 필멸의 굴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인간은 너에게 해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3132.  
  3133. “…필멸의 굴레… 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는 겁니까?”
  3134.  
  3135. “네가 말하는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라면, 그들은 대답해 줄 수 없겠지.”
  3136.  
  3137. 불영대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과 말은 묘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이성민이 표정을 굳히고서 물었다.
  3138.  
  3139. “어째서?”
  3140.  
  3141. “그들 역시 인간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는 괴력난신이 무엇임을 알고 싶다면, 그래. 한 번 죽어보는 것이 빠르겠구나. 그렇다면 너는 그 불가사의한 존재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 터이니.”
  3142.  
  3143. “뭔 말도 안 되는…”
  3144.  
  3145. 이성민이 중얼거렸다. 불영대사가 살짝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불영대사의 눈이 떠졌을 때, 그의 눈은 검은자 없이 새하얀 백색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성민과 불영대사의 눈이 마주쳤을 때, 이성민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3146.  
  3147. “북쪽으로 가라.”
  3148.  
  3149. 불영대사가 소곤거리는 말은 이성민의 머릿속에 울렸다. 숨이 멈춘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눈을 깜박거리려고 해 보아도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3150.  
  3151. “북쪽.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 인연이 있다면 귀인貴人과의 만남이 있겠지. 아니. 반드시 그리 되리라.”
  3152.  
  3153.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멈췄나? 아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3154.  
  3155. “5년 뒤. 겨울이 더욱 얼어붙을 때. 그때.”
  3156.  
  3157.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불영대사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잠깐 머리를 기울이던 불영대사의 두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고서야 느려졌던 시간이 가속되었다. 이성민은 눈을 깜박거리고,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3158.  
  3159. “방금 그건…”
  3160.  
  3161. “묻지 말라.”
  3162.  
  3163. 불영대사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3164.  
  3165. “내가 너에게 무엇을 말하였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단다. 방금 전에 내 몸에 깃든 것은 내가 아닌 신령神靈이다. 낄낄! 머리 민 중인 내가 부처가 아닌 신령을 말하는 것은 조금 우습다만.”
  3166.  
  3167.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불영대사는 여태까지 이성민이 만나 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특히 방금 전, ‘신령’이 깃들어 했던 말. 북쪽,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 5년 뒤, 겨울이 더욱 얼어붙을 때. 이성민은 그 말을 생각하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3168.  
  3169. “…왜 나한테 이런 말을?”
  3170.  
  3171. “낄낄! 아해야, 너는 자꾸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는 구나. 대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란다. 대부분의 존재가 너의 의문에 답을 내려주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3172.  
  3173.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3174.  
  3175. “검룡. 그 건방진 꼬마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소림의 무공서를 가지고 있다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3176.  
  3177. “…백보신권과 나한보법, 달마심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3178.  
  3179. “그리 대단한 무공서들도 아니구나. 소림의 대표 권법이라 한다면 백보신권이고 대표 보법은 나한보법이며 대표 심법은 달마심법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흔해 빠졌다는 뜻이란다.”
  3180.  
  3181. 불영대사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품 안에 두었던 세 권의 무공서를 꺼냈다.
  3182.  
  3183. “그 흔해빠진 것들을 어떻게 얻었느냐?”
  3184.  
  3185. “…시체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3186.  
  3187. “그 시체. 누구였느냐?”
  3188.  
  3189. “…제온입니다.”
  3190.  
  3191. “제온. 그래. 소림의 속가 중에 그런 녀석이 있었지.”
  3192.  
  3193. 베헨게르에서 위명을 떨치던 소림의 속가제자 제온. 그에 대한 소림의 방장, 불영대사의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불영대사는 이성민에게 받은 무공서들을 대충 뒤에 던져두었다. 이곳까지 들고 온 무공서들이 설마 저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기에, 이성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3194.  
  3195. “옛다. 받아라.”
  3196.  
  3197. 불영대사가 품을 뒤적거리더니, 종이에 둘둘 쌓인 무언가를 이성민에게 던졌다. 이성민은 양 손을 뻗어 엉거주춤 그것을 받았다.
  3198.  
  3199. “대환단이다. 먹어라.”
  3200.  
  3201. 불영대사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움찔 놀라 종이를 열어 보았다. 불영대사의 말대로였다. 그 안에는 청량한 향기를 내뿜는 대환단이 들어 있었다.
  3202.  
  3203. “흔해빠진 무공이라면서, 왜 대환단을 주시는 겁니까?”
  3204.  
  3205. “아해가 줘도 지랄을 하는 구나. 왜. 싫으면 소화단으로 바꿔주랴?”
  3206.  
  3207. “아니, 싫다는 것은 아니고…”
  3208.  
  3209. 이성민이 찔끔하여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말에 불영대사가 크게 웃었다.
  3210.  
  3211. “위지호연.”
  3212.  
  3213. 대뜸 뱉은 이름에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3214.  
  3215. “한 달 쯤 전에. 위지호연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자아이가 이곳에 왔었다.”
  3216.  
  3217. “…예?”
  3218.  
  3219. “위지호연. 소천마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더구나. 참 묘한 일이야. 내가 본 위지호연이라는 아이는 소천마라는 별호로 불릴 아이가 아니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천마’라 불리는 아이가 그 여자아이를 포함하여 셋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위지호연이라는 아이야말로 ‘천마’라는 별호에 가장 근접해 있었단다.”
  3220.  
  3221. 불영대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검룡 남궁희원은… 광천마 벽원패야말로 천마라는 별호에 걸 맞는 인물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소림의 방장인 불영대사는 소천마 위지호연이 천마라는 별호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
  3222.  
  3223. “그 아이는 패왕의 운명을 가지고 있더구나. 초월적인 농간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그 아이는 절대적인 존재에 오르겠지.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그 아이만큼 강력한 천명과 자질을 가진 아이를 본 적이 없단다.”
  3224.  
  3225. “…왜 나에게 그런 말을?”
  3226.  
  3227. “그 아이가 이성민이라는 이름을 말하더구나.”
  3228.  
  3229. 불영대사의 두 눈이 샐쭉 휘어졌다.
  3230.  
  3231. “나는 위지호연, 그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그 아이가 가진 패왕의 운명과 자질은 머지않아 그 아이를 만마萬魔를 굴복시켜 그 위에 군림하는 천마로 만들겠지. 단순한 호기심이었단다. 필연적으로 거인이 될 아이가 이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어떤 만남을 겪었는가?”
  3232.  
  3233. 이성민은 침묵했다. 불영대사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고, 위지호연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위지호연이 ‘이성민’이라는 이름을 말했다는 것에 이성민은 진한 흥미를 느꼈다.
  3234.  
  3235.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 유일한 친구. 그렇게 말하더구나. 그래서 이성민이라는 이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단다. 설마 그 이성민이라는 아해가 괴력난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3236.  
  3237. 불영대사가 킬킬 웃었다. 이성민은 그 노인의 웃음과, 불영대사가 했던 말에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만든 친구. 그리고 유일한 친구. 유일하다가는 것은… 위지호연과 헤어지고서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녀는 아직 이성민과 같은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3238.  
  3239.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단다. 일신의 무공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나의 자질로는 무공의 끝을 보아 필멸의 굴레를 벗을 수가 없었지. 하기에 이런 저런 많은 잡기에 손을 댔다. 괴불이라는 별호도 그리 생겼지. 낄낄! 소림의 방장으로 있는 늙은 중이 육식을 하고 술을 마시며 법술과 사법에 손을 대니 어찌 괴이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뭐, 무공의 끝을 보지 못한 나의 자질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신묘한 재주를 몇 가지 부릴 수 있게 되었거든.”
  3240.  
  3241. 불영대사가 손을 들어 자신의 민머리를 쓸어내렸다.
  3242.  
  3243. “나는 네가 이곳에 올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한 달 전에 위지호연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나는 ‘이성민’이라는 아해가 이곳에 올 것임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위지호연, 그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앞으로 한 달 뒤에 이성민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3244.  
  3245. “…위지호연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3246.  
  3247. “뭔 상관이냐고 하더구나!”
  3248.  
  3249. 불영대사가 크게 웃었다.
  3250.  
  3251. “아직은 너와 만날 때가 되지 않았다면서. 그런 주제에 나한테 하나 부탁은 하더구나. 만약 네가 이곳에 오고, 네 실력이 별 볼 일 없다면… 무공이나 조금 봐 달라고 말이다.”
  3252.  
  3253. 위지호연과 만나기로 약속한 때까지 아직 6년이 남았다. 약속을 나누었던 것은 이성민이 14살이었을 때였고, 만나기로 한 것은 이성민이 24살이 되었을 때다. 아직 이성민의 나는 18살이었다.
  3254.  
  3255. “너는 기묘하구나. 괴력난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둘째치고서… 너는 아주 기묘해. 심, 기, 체가 엉망으로 엉켜있어. 아해야. 내가 노파심에 일러주마. 이대로 가다가는 너는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3256.  
  3257. “…주화입마입니까.”
  3258.  
  3259. “그래. 지금의 너는 언젠가 터질 폭약과 같단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나로서도 너의 엉켜버린 몸뚱이와 혼을 건드릴 수가 없을 지경이야.”
  3260.  
  326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262.  
  3263. “모른다.”
  3264.  
  3265. 불영대사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3266.  
  3267. “위지호연.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네 무공을 보아주겠다는 부탁은 받기로 하였다. 네가 원한다면 소림에 남거라. 운이 좋다면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겠지.”
  3268.  
  3269. “나를 지도해주시겠다는 겁니까?”
  3270.  
  3271. “심, 기, 체가 일그러진 네 몸뚱이를 뜯어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 무공 정도는 봐 줄 수 있어. 그래… 하지만 이 노구를 이끌고 너를 하나하나 지도해 줄 수는 없지. 그러니까.”
  3272.  
  3273. 지학아. 불영대사가 펼친 육합전성이 멀리 울렸다. 오래지 않아 잘생긴 청년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3274.  
  3275. “저 아이가 소림의 미래다.”
  3276.  
  3277. 잘생기긴 했지만 머리에 털 한 오라기 없는 대머리라는 것은 똑같았다. 승복을 입은, ‘지학’이라 불린 청년이 이성민과 불영대사를 향해 합장을 하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3278.  
  3279. “가볍게 비무라도 해보거라.”
  3280.  
  3281.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비무를 하자는 사람이 참 많았다.
  3282.  
  3283. ======================================
  3284. < 소림-3 >
  3285.  
  3286.  
  3287.  
  3288. 지학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림 방장인 불영대사가 말하지 않았나. ‘소림의 미래’라고. 갑자기 하게 된 비무였지만, 이성민은 불만은 갖지 않았다. 비록 패배한다고 해도, 패배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남궁희원과의 비무가 그러했다. 남궁희원과의 비무에서 패배하면서, 이성민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3289.  
  3290. 불영대사의 참관 하에 이성민은 지학과 마주 섰다. 지학은 아무런 병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이성민은 창을 들었다. 이성민은 날이 선 진짜 창을 들어도 괜찮은가 싶어서 불영대사를 보았지만, 불영대사는 이성민의 시선을 받고서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3291.  
  3292. “네 창은 금강석을 꿰뚫을 수 있느냐?”
  3293.  
  3294. 그 말에 이성민은 경악을 느꼈다. 불영대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학은 금강불괴를 이루었다는 말이었다.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지학을 바라보았다. 이성민과 비슷한 체구의 지학은, 이성민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3295.  
  3296. 비무가 시작되었다.
  3297.  
  3298. 그리고 그것은 100여초의 공방 끝에 마무리되었다. 이성민의 패배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이성민은 허탈한 표정으로 지학을 올려 보았다. 지학은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에 반해 이성민의 몰골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주저앉은 이성민을 보던 불영대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3299.  
  3300. “과연. 왜 그 계집아이가 너에게 무공을 지도해 달라고 한 것인지 알겠구나.”
  3301.  
  3302. 박수까지 쳐대면서 웃어대는 불영대사를 보며 이성민은 이를 갈았다. 이게 말이 되는 것인가? 지금의 이성민은 절정고수의 경지를 넘어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학은 이성민을 마치 어린 아이처럼 가지고 놀았다. 남궁희원과의 비무에서도 패배를 겪기는 하였으나, 지학과의 비무에서처럼 어린아이 취급은 당하지 않았었다.
  3303.  
  3304. “지학아. 어땠느냐?”
  3305.  
  3306. 합장을 하며 꾸벅 머리를 숙였던 지학이 시선을 들었다. 그는 불영대사를 한 번 보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3307.  
  3308.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3309.  
  3310. “네가 느낀대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3311.  
  3312. 답을 재촉하는 불영대사에게서는 덕망높은 고승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기던 지학의 입이 열렸다.
  3313.  
  3314.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3315.  
  3316. 언어가 비수가 되어 이성민의 가슴을 꿰뚫었다.
  3317.  
  3318.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입니다. 익힌 창술은 절세의 것임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그 창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루는 것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펼치는 것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3319.  
  3320. 그 말은 남궁희원에게도 들었다.
  3321.  
  3322. “내공을 다루는 것이 미숙합니다. 내공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전체적인 흐름에 거슬림이 많습니다.”
  3323.  
  3324. “심, 기, 체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임독양맥이 타동된 것도 아닌데 심득으로 인하여 무공의 경지가 기이하게 높아져 버렸어. 심과 기는 앞으로 나아가 있는데 체는 뒤에 처져 있구나. 위험한 일이야.”
  3325.  
  3326. 지학의 대답에 불영대사가 덧붙였다.
  3327.  
  3328. “아해야.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양 다리의 길이가 맞다면 걷고 뛰는 것에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한쪽 다리가 과하게 길거나 짧다면 걷는 것도, 뛰는 것도 힘들어진다. 억지로 걷고 뛰어봤자 오래지 않아 넘어질 수밖에 없지. 문제는… 비유는 이렇게 간단히 할 수 있어도, 네 상태는 그리 간단하고 쉽지 않다는 것이야.”
  3329.  
  3330.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3331.  
  3332. “가장 우선해서 해야 할 것은 임독양맥을 타동하는 것이다. 운이 따른다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겠지. 기의 흐름이 원활해지니 기가 흐르는 것에 거슬림은 사라질 것이다. 사실 가장 쉬운방법은 환골탈태를 하는 것인데… 낄낄! 환골탈태라는 것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333.  
  3334.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3335.  
  3336. “지학아. 당분간은 네가 데리고서 무공을 좀 봐주거라.”
  3337.  
  3338. “알겠습니다.”
  3339.  
  3340. 동굴 안으로 돌아가는 불영대사를 향해 지학이 합장을 보냈다.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3341.  
  3342. 므쉬의 산에서 절정 경지에 올랐고,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강기를 깨달았다. 그래서…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3343.  
  3344. 사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강해졌다. 전생에서 도달했던 경지는 이미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이성민이 약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무인 중에서 이성민은 손에 꼽히는 고수일 것이다.
  3345.  
  3346.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검룡 남궁희원은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이며 현 가주인 천존검왕의 어린 시절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절세기재였다.
  3347.  
  3348.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3349.  
  3350. 그것은 지학도 마찬가지였다.
  3351.  
  3352. “당신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볼 때,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18살이라는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드물 겁니다.”
  3353.  
  3354. “…하지만 당신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3355.  
  3356. “자화자찬인 것 같아서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저는 이 땅에 소림이 세워진 이래 존재한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나는 소림에 있었고, 자라면서 불영 대사 뿐만이 아니라 소림의 뛰어난 무승들이 모두 나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깨달음을 공유했고 소림의 모든 무공과 영약을 받아먹으면서 자랐습니다.”
  3357.  
  3358. 지학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기가 질려버렸다. ‘소림의 미래.’ 불영대사가 지학을 소개하면서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3359.  
  3360. “그렇다고는 해도 소천마를 이길 수는 없었지만.”
  3361.  
  3362. 지학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3363.  
  3364. “싸워 본 겁니까?”
  3365.  
  3366. “예.”
  3367.  
  3368. “소천마… 위지호연이 왜 이곳에 온 겁니까?”
  3369.  
  3370. “소림을 보고 싶다는 이유였습니다.”
  3371.  
  3372. 지학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3373.  
  3374.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혼자서 소림의 산문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그러고서는 말했죠. 소림을 보고 싶다고.”
  3375.  
  3376.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3377.  
  3378. “소림을 보고 싶다. 17살의, 아직 약관도 넘지 않은 소녀가 와서 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그 어떤 무승도 그녀를 질책하거나 비웃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있었는데… 그건… 굉장히 신비로운, 굴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한 명의 존재감이 ‘그렇게까지’ 공간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3379.  
  3380. “…그 후에는?”
  3381.  
  3382. “귀인이 방문하였다며 불영대사가 직접 행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위지호연과 불영대사,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후에… 저는 위지호연과 비무를 했습니다. 위지호연은 소림을 보고 싶다고 했고, 불영대사는 저를 보고 소림의 미래라고 했지요.”
  3383.  
  3384. 결과는 이성민도 알고 있었다. 이미 지학이 말했기 때문이다.
  3385.  
  3386. “세상은 넓더군요.”
  3387.  
  3388. 지학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3389.  
  3390. “100초를 조금 넘겼나. 아니… 비무라서 그 정도였지. 생사결이었다면 50초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소천마라고 하였는데, 저는 그 별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소천마라면 대체 천마는 누구란 말입니까.”
  3391.  
  3392. 이성민은 지금의 위지호연을 알지 못한다. 만나 본 적도 없다. 위지호연이 강해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위지호연이 대체 얼마나 강해졌을지는 어렴풋하게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3393.  
  3394.  
  3395.  
  3396. 지학에게 들은 위지호연의 강함은 이성민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성민을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던 지학을 위지호연이 가지고 놀았단다.
  3397.  
  3398. “…위지호연은…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겁니까?”
  3399.  
  3400.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겠죠. 그녀는 이미 초절정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에 가있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을 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당신은 위지호연과 무슨 관계입니까?”
  3401.  
  3402. “…친구.”
  3403.  
  3404. “그렇습니까.”
  3405.  
  3406. 지학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학은 창을 드는 이성민을 보며 다시 물었다.
  3407.  
  3408. “당신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입니다. 내가 본 당신은… 가진 실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건 다양한 실전을 겪으면서 보완될 겁니다.”
  3409.  
  3410. “…알겠습니다.”
  3411.  
  3412.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우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패배에 너무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3413.  
  3414.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415.  
  3416.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3417.  
  3418. “좌절에는 익숙하고. 일어서는 것도 익숙합니다.”
  3419.  
  3420. 익숙할 뿐이다.
  3421.  
  3422. 쉽지는 않다.
  3423.  
  3424. 멀다고 느꼈다. 불영대사의 거처를 떠난 이성민은, 일단 소림을 향해 내려갔다. 멀다고 느낀 것은 소림까지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3425.  
  3426. 어렴풋하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바로 앞에 있지는 않아도, 조금만 더 뛰면. 그리고 손을 더 멀리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427.  
  3428. 착각이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 더 멀리 있었다. 어쩌면 위지호연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민이 느리게 다가왔을 뿐일까. 어느 쪽이든 닿기에는 너무 멀다.
  3429.  
  3430. ‘부족해.’
  3431.  
  3432.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성민은 손에 쥔 창을 내려 보았다. 쥐고 있는 창은 무겁지 않았으나, 이성민은 므쉬의 산에서 느낀 무거움이 그리워졌다. 눈이 보이지 않고, 악취가 끊이지 않고, 잡음이 끊이지 않던 그 매일매일이. 생각해 보면 그때의 일상은 미쳐버릴 것처럼 힘들기는 하였어도, 이성민이 살았던 그 어느 순간보다 충실하지 않았던가.
  3433.  
  3434. 산에서 내려오고서 나는 무엇을 했지?
  3435.  
  3436. 산길을 뛰지 않고 걸어 내려간다. 이성민은 산벌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관조했다. 므쉬의 산에 내려오고서… 무엇을 했나. 용병 길드를 찾아가 용병이 되었다. S급 용병. 전생에서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그 높은 등급을 받고서 만족을 느꼈다. 산에서 했던 고행이 증명 받았다 생각했고, ‘지금’의 자신이 전생의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3437.  
  3438. 그 후로 몇 달. 의뢰를 수행하면서 돈을 벌었다. 벌어들인 돈으로 창을 제작 받았다. 만족… 했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쥐어보지 못한 좋은 무기를 쥐게 되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3439.  
  3440. 그래.
  3441.  
  3442. 몇 달 동안 그랬다. 자기만족을 위해 움직였다. 인정받고 싶어서, 인정받았다는 것에 즐거워서. 전생에서는 갖지 못했던 힘. 이전에 살았던 베헨게르의 용병 길드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취급을 해주는 것을 보며 즐거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행에 그리 열심이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갑이라는 도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443.  
  3444.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도 모르고.
  3445.  
  3446. 전생의 기억에 의존했다. 맞닥트린 벽을 마갑을 써서 넘으려고 했다. 노력. …노력?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므쉬의 산에서 몇 년 했던 것이 노력의 전부였는데. 여태까지 뭘 그리 열심히 해왔다고. 결국 지금의 이성민은 전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던. C급 용병이었을 때와 다를 것이 없단 말이다. 목숨을 걸고 의뢰를 수행했으니까 놀아도 된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고. 보상심리에 취해 하루하루를 살던 그때와 지금이 다를 것이 무언가. 므쉬의 산에서 고행하였으니, 조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3447.  
  3448. 이 정도면 많이 했다고. 열심히 했다고. 그리 대단한 실력을 갖지도 못한 주제에! 이성민은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소림으로 향하는 길이 멀어 보였다. 무의 끝을 보겠다고. 므쉬의 산에서 구도자마냥 품었던 그 거창한 생각은 결국 구질구질한 자기 만족에 위선일 뿐이었다.
  3449.  
  3450. 현실을 알았다.
  3451.  
  3452. 매미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유충은 벗었다고 생각했다.
  3453.  
  3454. 착각이었다.
  3455.  
  3456. 이성민은 아직 유충이었다.
  3457.  
  3458. ======================================
  3459. < 소림-4 >
  3460.  
  3461.  
  3462.  
  3463. “지학과 비무했다고?”
  3464.  
  3465. 남궁희원은 스칼렛과 함께 있었다. 남궁희원은 이성민의 말을 듣고서 입을 크게 벌렸다. 잠깐 동안 이성민을 보던 남궁희원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3466.  
  3467. “불영대사. 이 개같은 늙은이. 내가 그렇게 비무를 하게 해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지랄을 하더니!”
  3468.  
  3469. “누군지 아셨던 겁니까?”
  3470.  
  3471. “알다마다. 아우. 지학이라면 소림의 미래며 불영대사의 직계제자야. 아니. 그 말은 조금 틀린가… 지학은 어린 시절부터 소림의 모든 무승들에게 무공을 배웠지. 그건 굉장한 일이야.”
  3472.  
  3473.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3474.  
  3475. “남궁세가가 포함된 사대세가의 후계자들도 뛰어나긴 하지만. 구파일방의 제대로 된 후기지수들과 비교한다면 조금 급이 딸려. 소림의 지학, 무당의 청명, 개방의 취걸. 특히 이 셋은 각 문파의 성명절기를 모두 익히고 그 문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지.”
  3476.  
  3477.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전생에 이성민은 용병으로 살면서 다양한 소문을 접했으나, 소림의 지학과 무당의 청명, 개방의 취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3478.  
  3479.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3480.  
  3481. “그야 그렇겠지. 지학도 그렇지만. 그 셋은 문파를 떠나지 않아. 문파의 비밀 병기 같은 느낌이지. 대부분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인데, 은거고수마냥 문파에 처박혀 무공만 익히고 있어.”
  3482.  
  3483. 남궁희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3484.  
  3485. “매년 소림에 오면서, 지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 한 번 꼭 비무를 해보고 싶었는데…”
  3486.  
  3487. 남궁희원과 지학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전력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학의 전력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겪어 본 것만으로 비교를 해본다면, 지학이 남궁희원보다 더 강할 것 같았다.
  3488.  
  3489. “그래서. 아우는 이제 어디로 갈 셈인가?”
  3490.  
  3491. “…당분간은 소림에 남을 생각입니다.”
  3492.  
  3493. 이성민의 대답에 스칼렛이 눈을 부릅 뜨고 이성민을 노려 보았다.
  3494.  
  3495. “뭐? 여기 남겠다고?”
  3496.  
  3497. “예. …생각할 거리도 많고, 다듬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다행히도 인연이 닿아 소림에서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3498.  
  3499. “불영대사가 아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3500.  
  3501. 남궁희원이 중얼거렸다.
  3502.  
  3503. “만약 아우가 한가하다면 남궁세가에나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3504.  
  3505.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찾아가 보겠습니다. 형님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06.  
  3507. “나? 나야 뭐 작년이랑 똑같이 되었지. 불영대사의 앞에서 무공을 조금 보여주고, 그것으로 끝이야. 천룡회의 회주가 되기에는 우리 모두가 부족해. 내 아버지도 이기지 못하는데 회주는 무슨.”
  3508.  
  3509. 남궁희원의 중얼거림에 이성민은 조금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3510.  
  3511. 세상은 너무 넓었다. 이성민을 가지고 놀았던 남궁희원은 지학보다 약하다. 그리고 그 지학은 위지호연에게 농락당했다. 남궁희원은 그의 아버지인 천존검왕을 이기지 못한다.
  3512.  
  3513. ‘난… 너무 작아.’
  3514.  
  3515. 서있는 위치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보고 있는 관점이 달라서? 전생의 이성민이 보기에도 세상은 넓었지만, 그때의 이성민이 느꼈던 세상의 크기는 지금 느끼고 있는 크기와는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C급 용병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만남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3516.  
  3517. 겪은 것이 다르기에 보이고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 그것은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느꼈던 깨달음과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가 달라지면 세상이 변한다. ‘나’가 달라졌기에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3518.  
  3519. “…네가 이곳에 남겠다면. 나는 조금 더 돌아다녀 볼래.”
  3520.  
  3521. 스칼렛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이 스칼렛을 돌아 보았다.
  3522.  
  3523. “예?”
  3524.  
  3525. “나는 무공도 익히지 않았고. 이곳에 있어봤자 얻을 것이 없어.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네가 걱정되서 같이 왔지만… 뭐. 이곳에 있다면 네가 위험해 지지는 않겠지.”
  3526.  
  3527.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3528.  
  3529. “어디든 가 볼 생각이야. 내 몸 하나 건사할 재주는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니까.”
  3530.  
  3531. 이성민은 스칼렛을 붙잡으려 할까 했다가 그만두었다. 스칼렛이 전생에 겪은 사건에 이성민이라는 존재는 끼어 있지 않았다. 괜히 이성민이 스칼렛과 깊이 연관되었다가는, 그녀의 운명이 크게 바뀔 가능성이 컸다.
  3532.  
  3533. “다음에 만날 수 있겠습니까?”
  3534.  
  3535. “당연히 만나야지, 멍청아. 내가 했던 말 잊었어? 내가 위험해지면 네가 도와주기로 했었잖아.”
  3536.  
  3537. 스칼렛은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로브의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그녀가 꺼낸 것은 붉은 실을 엮어 만든 팔찌였다.
  3538.  
  3539. “받아.”
  3540.  
  3541. “이게 뭡니까?”
  3542.  
  3543. “내 심령이랑 연결한 팔찌야. 백소고한테도 줬었던 건데. 설마 너한테 주게 될 줄은 몰랐네.”
  3544.  
  3545. 그런 말을 들으니 팔찌가 눈에 익었다. 시각을 잃기 전에… 백소고가 저런 팔찌를 손목에 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3546.  
  3547. “텔레파시가 통하는 그런 편리한 도구는 아니야. 하지만 세상 어디에 있던지, 내가 바란다면, 그 팔찌로 신호가 전해질 거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3548.  
  3549.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스칼렛이 준 팔찌를 손목에 찼다.
  3550.  
  3551. 다음 날. 너무 빠르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였지만, 스칼렛은 오히려 더 길게 있는 것이 미련이 남는다고 하며 소림을 떠났다. 남궁희원도 마찬가지였다.
  3552.  
  3553. “한가해진다면 남궁세가로 찾아 와. 아우가 찾아 온다면 언제든지 대접을 해 줄 테니까.”
  3554.  
  3555.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고는 해도 인연이 얇지만은 않았다. 남궁희원은 이성민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서 산문을 내려갔다. 다른 세가의 후계자들은 전 날에 이미 떠난 모야이었다.
  3556.  
  3557. 소림의 승려들은 이성민에게 거주할 방을 준다고 하였으나, 이성민은 그들의 배려를 거절했다. 이성민은 창을 쥐고서 소림의 후문을 나섰다. 그는 기억에 의존하여 불영대사의 거처로 향했다.
  3558.  
  3559. 드리무어로 가 시간의 신 데니르를 만나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드리무어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불영 대사와 지학에게 무공의 지도를 받는 것도 대단한 기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560.  
  3561. ‘5년 후… 겨울이 얼어붙을 때.’
  3562.  
  3563. 애매한 말이기는 했지만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불영대사의 몸에 깃든 신령은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에리아에서 만년설이 쌓인 곳은 최북단 지역 뿐. 겨울이 얼어붙을 때라는 것은 겨울 중 가장 추울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3564.  
  3565. 5년 후라면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이성민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3566.  
  3567. 위지호연과 만나기로 하는 것은 이성민의 나이가 24살이 되었을 때. 앞으로 6년 남았다. 지금부터 5년 후에 백소고와 위지호연이 엮이는 던전이 개방된다. 위지호연과의 재회 이전에, 이성민은 백소고의 죽음을 막아야만 했다.
  3568.  
  3569. 즉, 순서가 어찌 되었든 앞으로 이성민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년이라는 것이다.
  3570.  
  3571.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3572.  
  3573.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위지호연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이성민은 자신의 양 손을 내려 보았다. 심, 기, 체가 일그러진 나 자신.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10년 안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3574.  
  3575. 대환단을 먹는 것은 우선 보류하기로 했다.
  3576.  
  3577. 심, 기, 체가 일그러져있는 지금 대환단을 복용한다면, 주화입마가 더 빠르게 찾아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3578.  
  3579. ‘뭘… 해야 하지?’
  3580.  
  3581. 이성민은 멍하니 손에 쥔 창을 내려 보았다. 자기만족과 보상심리로 의뢰하여 갖게 된 창이다. 입은 마갑을 내려 본다. 맞닥트린 벽을 편법으로 넘기 위해 그토록 바라던 마갑이다.
  3582.  
  3583. 이성민은 마갑을 벗었다. 내공을 불어 넣자 쇳소리와 함께 마갑이 벗겨졌다. 이성민은 벗은 마갑을 눈에 보이는 장소에 내려 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창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민은 동굴의 근처에 있는 큼직한 바위에 창을 내리 꽂았다. 강기를 입힌 창두가 바위를 두부처럼 꿰뚫었다.
  3584.  
  3585. 아공간 포켓에서 꺼낸 것은, 오랜만에 쥐어보는 평범한 창이었다. 예비로 쓰기 위해 구입해서 들고 다니던 것으로, 많이 휘두르지 않아 창간이 빳빳했다.
  3586.  
  3587. 맨 손으로 창간을 쓸어 본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노력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민은 낮은 웃 음 소리를 내었다.
  3588.  
  3589. 천재가 범재보다 노력이 부족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범재보다 앞선 시작점에서 시작하고, 범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고 하여도. 그들이 달리기 위해 한 노력은 진짜일 것이다.
  3590.  
  3591. 천재의 뒤에서 시작하는 범재는. 천재의 노력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더, 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토끼와 거북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우화가 생각난다. 토끼는 빠르게 뛰었고… 거북이는 느리게 기었다. 토끼는 태만하여 잠들었고, 거북이는 토끼가 잠든 사이에 계속해서 기어나가 토끼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
  3592.  
  3593. 이성민은 토끼가 아니다. 어쩌면 거북이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태만했다. 기어가는 것조차 열심히 하지 않고 한 눈을 팔았다.
  3594.  
  3595. “병신 새끼.”
  3596.  
  3597. 이성민은 중얼거리면서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의 굳은 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창법. 므쉬의 산에서 했던 수행.
  3598.  
  3599. 부족하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성민은 천천히 구천무극창을 펼치기 시작했다.
  3600.  
  3601. “훌륭한 창법이군요.”
  3602.  
  3603. 이성민이 구천무극창을 모두 펼쳤을 때,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흐트러짐없는 호흡을 한 번 더 가다듬으면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승복을 입은 지학이 그곳에 서있었다.
  3604.  
  3605. “그래서 아쉽습니다.”
  3606.  
  3607. “내 실력이 떨어져서입니까.”
  3608.  
  3609. 이성민은 지학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그 질문에 지학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3610.  
  3611.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입니다.”
  3612.  
  3613. 지학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굴의 입구를 힐긋 보았다. 불영대사는 나와있지 않았다. 지학이 보는 것은 입구의 근처에 놓여진 마갑과 이성민의 창이었다.
  3614.  
  3615. “왜 갑옷을 벗고 좋은 창을 내려놓은 겁니까?”
  3616.  
  3617. “지금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3618.  
  3619. “그런 식으로 마음과 각오를 다지는 겁니까?”
  3620.  
  3621. “위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622.  
  3623.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무공이라는 것은 몸을 쓰는 공부이고, 결국 몸을 쓰는 것은 마음의 명령을 받는 것이니. 심법心法이라는 것은 마음을 쓰는 법입니다. 심, 기, 체. 흔히들 저 셋을 무공이 완성되는 요인이라고 합니다만.”
  3624.  
  3625. 지학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등 뒤에 두고 있던 창을 꺼냈다. 붉은 창영이 나부끼는 중원의 창이었다.
  3626.  
  3627. “그 셋은 무공 이전에 사람을 완성하는 것들입니다. 심을 신이 감싸고 기로 단련하는 것이지요.”
  3628.  
  3629. “…그게 무공이라는 겁니까?”
  3630.  
  3631. “아. 이건 어디까지나 소림의 무론입니다. 무공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각각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요. …소림과 같은 불가佛家의 무론. 무당이나 화산 같은 도가道家의 무론은 무공을 통해 자기 수양을 완성하여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3632.  
  3633. “커다란 깨달음?”
  3634.  
  3635. “표현하는 방식과 단어가 다르기는 한데… 결국 풀어 말하자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도가의 무공은 수양을 통해 등선하여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불가의 무공은 수양을 통해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신선도 부처도 인간은 아니지요. 본래 인간이었을 뿐.”
  3636.  
  3637. 이런 식의 무론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성민은 귀를 열고 지학의 말을 들었다. 이성민이 경청하자 지학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3638.  
  3639. “말했듯이 무공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도가와 불가의 무공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흔히 사마외도의 것이라고 하는 무공들은 보다 직관적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기술. 그 외에도 동물이나 벌레의 특징을 뽑아 다듬은 무공들도 많지요. 소림의 무공 중에서도 그런 것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이 그러하다고 한들 지향점은 다릅니다.”
  3640.  
  3641. “당신은 부처가 되고 싶은 겁니까?”
  3642.  
  3643. “후후! 저는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숙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알아주기를 바라서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소림의 무공 뿐이며, 내가 아는 무론은 부처가 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불가에 입문하는 것을 종용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내가 당신의 무공을 봐주려면, 우선 당신은 소림의 무공을 이해해야 할 겁니다.”
  3644.  
  3645. 지학이 창영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3646.  
  3647. “소림에는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라고 하여 칠십이 개의 절기가 있습니다. 흔히들 소림 하면 백보신권과 대력금강장 같은 맨손 무술을 떠올립니다만. 저는 이것만큼은 틀림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현 구파일방에서 소림만큼 창술과 봉술을 깊이 이해하고 확립한 곳은 없을 겁니다.”
  3648.  
  3649. 지학이 양 손으로 창을 들고서 자세를 낮추었다. 이성민은 구천무극창의 기수식을 펼쳤다.
  3650.  
  3651. “소림을 보십시오.”
  3652.  
  3653. 지학이 빙그레 웃었다.
  3654.  
  3655.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3656.  
  3657. 지학에게서 흘러나오는 투지는 소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3658.  
  3659.  
  3660.  
  3661. ======================================
  3662. < 소림-5 >
  3663.  
  3664.  
  3665.  
  3666. 소림을 본다.
  3667.  
  3668. 소림을 느낀다.
  3669.  
  3670. 창을 내려놓고 갑옷을 벗었다. 이성민은 낡은 창을 쉼 없이 휘둘렀다. 소림의 미래라는 평을 듣던 지학의 무공은 끝이 없어 보였다. 소림의 모든 무승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영약과 무공서와 심도 깊은 깨달음 속에서 살아 온 지학은, 살아 숨 쉬는 소림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3671.  
  3672. 이성민은 왜 불영대사가 지학에게 자신의 지도를 맡긴 것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림의 미래인 지학은, 소림이 가진 칠십이절예를 능수능란하게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 말은 즉, 지학 혼자서 칠십이 개의 무공을 사용하는 칠십이 명의 무인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3673.  
  3674. 그러면서도 지학은 가르치는 것이 능숙했다. 여태까지 이성민은 두 명의 무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위지호연과 백소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위지호연과 백소고는 훌륭한 스승은 아니었다. 너무 뛰어난 천재인 위지호연은 무공을 이성민의 몸에 맡게 뜯어 고쳐 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성민에게 제대로 가르치지는 못했다. 위지호연이 이성민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이성민이 부족한 무공에 대한 기반 지식을 채워주는 것과 창법의 기본기 등을 지도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3675.  
  3676. 백소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민은 백소고에게서 무영탈혼을 전수받았지만, 무영탈혼을 딱 맞는 옷처럼 펼치던 백소고와는 다르게 이성민은 무영탈혼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므쉬의 산에서 이성민이 가지고 있던 ‘무거움’에 대한 금제 때문이었다. 아무리 경공을 펼쳐도 몸이 무거웠으니, 경공을 익히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것에 더해 백소고는 목소리과 전음에 대한 금제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공을 지도하는 것에 불편함이 많았었다.
  3677.  
  3678. 하지만 지학은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소림의 모든 무승들에게 교육을 받아 온 덕분일까. 지학은 가르치는 것에도 능숙했다. 문제는 가르침을 통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지학의 오성悟性과 이성민의 오성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지학은 이성민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요령을 터득했다.
  3679.  
  3680.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 보는 것 뿐입니다.”
  3681.  
  3682.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였다. 지학은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이성민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성민과 비무하는 것을 반복했다. 비무를 할 때마다 지학은 펼치는 무공을 바꾸었다.
  3683.  
  3684.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부족함이 많은지. 이성민은 매일매일 주저앉아 그를 절감했다. 지학은 천재였다. 이성민이 숨이 가빠 주저앉을 때 지학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성민이 전력을 다해 펼친 무공은 지학을 위협하지 못했다. 지학이 어렵지 않게 휘두른 공격은 이성민의 사각을 꿰뚫었다.
  3685.  
  3686. “시야를 넓히십시오. 보다 많은 것을 보십시오. 상대의 무공을 이해하기 이전에 상대를 이해하십시오. 무공이라는 것은 결국 육체로 펼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변초와 환초도 육체와 무기로 펼치는 이상 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를 다루는 것의 고수라면 기를 통해 두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을 펼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는 하여도 육체와 무기를 쓰는 이상 움직임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3687.  
  3688. 검과 도와 창은 일직선의 무기다. 관절과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허와 실을 만들어낸다. 그것에 기를 섞어 속도와 무게를 만들고 잔상을 그려 변초와 환초를 만든다.
  3689.  
  3690.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기 전에 보이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아야 합니다. 당신의 감각은 기묘하게 엉켜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육감은 뜨였는데 오감이 둔합니다. 당신이 해 온 고행은 당신을 높은 경지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정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먼저 배워버린 겁니다.”
  3691.  
  3692. 지학의 지적은 통렬하기 짝이 없었다. 므쉬의 산에서 했던 고행은 이성민을 절정고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감각을 차단해버린 그 수행은 이성민의 감각을 망가트렸다. 감각이 차단되면서 육감이 뜨이고 육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이성민의 눈은 좁아지고 귀는 어두워졌으며 코는 둔해졌다.
  3693.  
  3694. “이성민님. 당신은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695.  
  3696. 둔해진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성민도 자각하고 있었으나, 여태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지 않았던’ 것이다.
  3697.  
  3698. “이성민님이 익힌 창법은 절세의 무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란 나 찰은 결국 기본기일 뿐입니다. 기본기만으로 상승 무학을 이길 수 있다면 무공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기본기는 어디까지나 무공을 보다 잘 익히기 위해 보조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3699.  
  3700. 란 나 찰은 이성민이 매일같이 수행하던 기본기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성민은 구천무극창보다 란 나 찰의 수행에 치중했다. 그 역시 도피 행위였다. 구천무극창의 성취가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것에 이성민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 대단한 무공을 대성하기에는 자신의 자질이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3701.  
  3702. 그래서 도망쳤다. 익히기 어려운 구천무극창보다 익숙하고 쉬운 란나찰로.
  3703.  
  3704. 남궁희원이 이성민에게 말했었다. 기본기만큼은 명인의 반열에 올라가 있다고. 하지만 다른 창법은 부족하다고. 남궁희원은 그를 향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런 평가는 지학도 똑같이 내렸다.
  3705.  
  3706. “왜 도망쳤던 겁니까?”
  3707.  
  3708.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한 번의 비무라면 그렇게밖에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지학은 이성민과 지속적으로 비무를 하면서 이성민이 가진 부족함을 파악했다.
  3709.  
  3710. “이리도 뛰어난 창법을 익히고 있으면서. 왜 기본기를 고집했던 겁니까.”
  3711.  
  3712. “…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3713.  
  3714. “그래서 익히는 것을 포기했습니까. 삼재검법만을 익혀 절세의 검수가 된다는 것은 삼재검법만을 익힌 사람들이 꿈에 절어 하는 말입니다.”
  3715.  
  3716. 그런 말을 하는 지학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언제나 친절했던 지학이었지만, 지금 만큼은 그 친절함이 보이지 않았다.
  3717.  
  3718. “삼재검법만을 익힌 사람들을 어리석다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삼재검법만 익히고 싶어서 익힌 것이겠습니까. 다른 상승 무학을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요. 무공이라는 것. 특히나 뛰어난 무공일수록 기연이 없다면 익히기가 힘듭니다. 예, 운이 없다면 익힐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상승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들이… 상승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3719.  
  3720. 알고 있다. 그 갈증이 얼마나 지독한지. 전생의 이성민은 이류 무공을 익혔다. 더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익힐 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3721.  
  3722. “이성민님. 당신은 거듭된 기연을 통해 뛰어난 무공을 익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걸고 찾아다니던 무공을 어린 나이부터 익혔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무공을, 자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익히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다니. 왜… 노력하여 정진하지 않았던 겁니까?”
  3723.  
  3724. 이성민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울하게 젖은 이성민의 얼굴을 보며 지학이 한숨을 내쉬었다.
  3725.  
  3726. “…냉정하게 말하겠습니다. 이성민님. 당신은 천재가 아닙니다.”
  3727.  
  3728. 안다.
  3729.  
  3730. “오성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배우고 느는 것이 빠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3731.  
  3732. 안다.
  3733.  
  3734. “나는 당신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이성민님. 남들이 바라 마다지 않던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735.  
  3736. “…알고 있습니다.”
  3737.  
  3738.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3739.  
  3740. “내가 여태까지 도망쳐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3741.  
  3742. 그토록 바라던 기회를 얻었음에도 도망쳤다. 스스로가 부족했다고 여기며, 몇 번이나.
  3743.  
  3744. “이제는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3745.  
  3746. 이성민이 말했다. 그 말에 지학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지학은 합장을 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3747.  
  3748. “무의 길은 멀어 끝이 없습니다. 무를 익혀 무인이 되기를 바라고, 무의 끝을 보고자 한다면 쉼 없이 정진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족함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족함을 인정하여 극복해야 합니다. 절망하되 절망에 삼켜지지 말아야 합니다. 날 수가 없다면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한다면 걸어야 합니다. 걷지도 못하면 기어야 하고 길수도 없다면 기고자 하십시오. 그리 바라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749.  
  3750. “당신은 날고 있습니까?”
  3751.  
  3752. “세상은 넓습니다. 나는 스스로 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소천마 위지호연과 만나게 되면서 진정 날개를 가져 나는 것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날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고자 생각하여 날고자 합니다.”
  3753.  
  3754. 나는 어떤가.
  3755.  
  3756. 땅 속의 유충은 무엇을 바라는가. 차가운 땅을 기어 나오는 것을 바라는가. 꿈틀거리며 기는 것보다는 걷고 싶다. 걷는 것보다는 뛰고 싶다. 뛰는 것보다는 날개를 가져 날고 싶다.
  3757.  
  3758. 소림에서의 수행은 므쉬의 수행과는 고난함이 적었다. 이곳에는 금제도 없고 금제과 시련에 대한 보상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지학이 있었다. 이성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지학이 이성민에게 무공을 지도해 주었다.
  3759.  
  3760.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성민은 홀로 무공을 익혔다. 좁았다. 혼자였던 이성민이 보았던 세상은 너무나도 좁았다. 므쉬의 산에서 세상이 달라짐을 느꼈으나 세상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었다. 므쉬의 산에 내려오면서 이성민은 거듭된 패배와 절망을 느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알게 되었다.
  3761.  
  3762. 소림을 본다. 소림을 느낀다. 부족했다. 이성민은 동트는 여명을 보며 우두커니 섰다. 산 끝에서 올라오는 아침 해의 밝음이 이성민의 눈을 적셨고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이성민의 가슴을 얼게 만들었다. 보고 느껴야 할 것은 소림이 아니다. 진정으로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은 소림이 아닌 세상이었다.
  3763.  
  3764. 세상은 크고 나는 작다. 땅속의 유충이 새카맣고 차가운 어둠을 세상의 전부로 알 듯, 이성민도 그래왔다. 유충이 되고 싶지 않다. 매미도 되고 싶지 않다. 좁아빠진 시야를 세상의 전부라 알고 싶지 않다.
  3765.  
  3766. 날고 싶다. 날개가 없음에도 나는 것을 꿈꾼다. 날아본 적이 없음에도 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성민은 여명을 보면서 크게 숨을 삼켰다. 저 넓은 세상을… 날아보고 싶다. 작고 하찮은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바란다.
  3767.  
  3768. 계절이 바뀐다.
  3769.  
  3770.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지학과 비무하고, 비무하고, 비무했다. 언제부터인가 지학의 가르침은 언어가 아닌 행동이 되었다. 대화 대신에 나누는 무공이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변하고 있습니까? 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걷고 싶습니까. 날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3771.  
  3772. 무엇이든지.
  3773.  
  3774. 열여덟의 나이가 열아홉이 되었을 때. 동굴에서 불영대사가 나왔다. 이성민이 동굴의 입구에서 거주한지 반 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그간 이성민은 불영대사가 동굴에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었다.
  3775.  
  3776. “아해야. 너는 변했구나.”
  3777.  
  3778. 동굴에서 나온 불영대사는 반 년 전에 보았을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그는 불심 깊은 고승이라기보다는 오래 묵은 요괴처럼 보였다. 악동처럼 주름을 일그러트리며 짓는 웃음을 보면서, 이성민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3779.  
  3780.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나오려 하느냐. 네 무공이라면 우물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터인데.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3781.  
  3782.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3783.  
  3784. “낄낄! 세상은 누구나 볼 수 있지. 그래.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3785.  
  3786.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뒷짐을 지고 섰다.
  3787.  
  3788.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논하고자 한다면. 너는 거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거인이 되고 싶은 것이냐.”
  3789.  
  3790. “날고 싶습니다.”
  3791.  
  3792. “낄낄! 바람이 높구나. 거인이 되어 내려 보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가져 세상을 아래에 두고 싶다는 게냐? 그를 논하기에는 너는 너무나도 작은데.”
  3793.  
  3794. “알고 있습니다.”
  3795.  
  3796.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3797.  
  3798. “하지만 꿈은 꾸고 싶습니다.”
  3799.  
  3800. “꿈을 꿈으로 남길 테냐.”
  3801.  
  3802.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3803.  
  3804. “이 반 년 간. 너는 무엇을 했느냐?”
  3805.  
  3806. 불영대사가 물었다. 이성민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반 년 동안 해 온 것들이 이성민의 머리를 스쳤다.
  3807.  
  3808. “기는 것을 배웠습니다.”
  3809.  
  3810. “좋구나.”
  3811.  
  3812. 불영대사가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웃었다.
  3813.  
  3814. “이제는 걷는 것을 배우려무나.”
  3815.  
  3816.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을 보다가, 이성민은 몸을 돌렸다.
  3817.  
  3818. 여명이 환해지고 있었다.
  3819.  
  3820. ======================================
  3821. < 소림-6 >
  3822.  
  3823.  
  3824.  
  3825. 스물이 되었다.
  3826.  
  3827. 키는 부쩍 자랐고, 육체는 건장해졌다. 므쉬의 산에서 불규칙한 식사와 생활을 해 온 탓에 전생보다 몸뚱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소림에서의 생활은 이성민의 몸을 오히려 전생보다 더 건장하게 성장시켰다.
  3828.  
  3829. 이성민이 소림에서 수행을 시작한 나이가 열여덟이었으니, 소림에서 일 년하고 반 년을 보낸 것이다.
  3830.  
  3831. 백소고의 죽음을 막기까지 앞으로 3년 정도 남았다. 가급적이면 그 전에 드리무어로 가 시간의 신 데니르를 만나고 싶었지만, 이성민은 아직까지는 소림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소림에서 보내는 일상은 단조로웠으나 충실했다. 소림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성민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게끔 만들지는 않았다.
  3832.  
  3833. 다만 잊고 있던 것. 하지 않고 있던 것들을 새로이 깨닫게 만들었다. 둔해진 상태로 익숙해졌던 감각을 새롭게 깨웠다. 알고만 있되 경험이 부족하여 다루지 못했던 창법에 익숙해졌다. 부족했던 실전에 대한 감각을 지학과의 비무로 채웠다.
  3834.  
  3835. “내가 귀찮지 않습니까?”
  3836.  
  3837. 언젠가, 이성민은 지학에게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 하던 비무가 끝나고, 한 숨을 돌리고 있던 때였다. 그 질문을 했던 시점에서 이성민은 더 이상 지학에게 어린 아이처럼 다뤄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학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838.  
  3839. “내가 당신을 왜 귀찮게 여긴다고 생각합니까?”
  3840.  
  3841. “나는… 약합니다. 그리고 지학님은 강합니다. 나와 비무하는 것은 지학님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3842.  
  3843.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3844.  
  3845. 그때 지학이 했던 대답을, 이성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3846.  
  3847. “이성민님과 비무하면서 나는 내가 익혔던 무공들을 다시 점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와 비무하면서 알고 있던 것을 새로 깨치듯이, 나 역시 그러고 있습니다.”
  3848.  
  3849. “지학님과 같은 고수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한 겁니까?”
  3850.  
  3851. “소림의 무공은 난해하고 깊습니다. 나는 그런 무공을 칠십이 개나 익혔으니 더 배우고 정진하여야 합니다. 무의 길은 끝이 없지요. 나는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겁니다.”
  3852.  
  3853. 그 말.
  3854.  
  3855. “세상은 넓습니다. 이 넓은 세상. 전 차원에서 무작위로 소환 된 이계인들은, 에리아라는 세상을 너무 넓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앞으로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넓어질 겁니다. 이계인들이 계속해서 소환되는 이상,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무학武學도 마찬가지입니다.”
  3856.  
  3857. 지학의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지학은 소림의 무승 이전에 꿈꾸는 청년이었다.
  3858.  
  3859. “나는 세상이 넓음에 감사합니다. 내가 세상이 좁음을 한탄할 만큼 어리석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이 넓은 세상에는 나보다 잘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이지 않습니까. 저는, 저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한 겁니다.”
  3860.  
  3861. 이성민은 멍하니 그런 말을 들었다. 이성민이 보기에는 지학도 충분히 큰 인물이었다. 그는 이성민과 비교도 되지 않는 재능과 그릇을 지녔다. 그런 지학도 세상이 넓다 말하며 자신이 작다고 말한다.
  3862.  
  3863. “이성민님은 꿈이 있습니까?”
  3864.  
  3865. 아.
  3866.  
  3867. ‘나’는 얼마나 작은가.
  3868.  
  3869. 스스로 품었던 열등감이 우습다고 생각한다. 좌절 역시 우습다고 생각한다. 열등감에 찌들어 좌절하고 주저앉은 나 자신. 좌절에서 일어서는 것이 익숙하다고 하면서 쉽지는 않다고 생각하던 나 자신.
  3870.  
  3871. 우습기 짝이 없다.
  3872.  
  3873. 착각에 빠져 살았다. 나는 재능이 없다. 스타트 라인이 달랐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실제로 기회는 주어졌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았는가. 살았다… 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충실하였는가?
  3874.  
  3875. 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나비스에서 소환되고서 6년이 흘렀다. 그 6년 동안, 나는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열중하였는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
  3876.  
  3877. 이성민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재능’을 가진 천재들보다 더 노력했는가? 더 열중했는가? 더 필사적이었나?
  3878.  
  3879. 충실하였는가?
  3880.  
  3881. 아니다.
  3882.  
  3883. 절감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검룡 남궁희원에게 패배했다. 소림의 지학에게 패배했다. 그들에게 패배하면서 느낀 패배감. 답답함. 약해 빠진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그들 뿐만이 아니다. 던전에서 프레스칸에게 제압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무력함에 몸을 떨었다.
  3884.  
  3885. 충실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던 주제에.
  3886.  
  3887. 어린 아이부터 소림에서 지내 온 지학은 틀림없는 천재였다. 온갖 종류의 영약을 받아먹고 소림의 모든 무승들에게 교육을 받은 것이 지학이다. 하지만 지학은 오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과 재능과 가진 것들에 취하지도 않았다. 천재로 태어나 소림에서 살아 온 지학의 삶은 이성민의 것보다 충실했고, 노력했으며, 열중했고, 필사적이었다.
  3888.  
  3889. 그것은 남궁희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궁세가에서 태어난 남궁희원이 살아 온 삶도 이성민이 살았던 삶보다 밀도가 깊었을 것이다. 미치광이처럼 보이던 리치, 프레스칸도 마찬가지다. 그의 비원은 광기에 절어 있었지만, 그 비원을 위해 육체를 버려 리치가 되고 금기를 범해 마탑의 추격을 받아 온 프레스칸의 평생은 이성민의 삶보다 밀도가 높았다.
  3890.  
  3891. 시작점이 달랐다.
  3892.  
  3893. 그들이 가진 것 같은 재능을 갖지 못했다.
  3894.  
  3895. 상승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3896.  
  3897. 영약을 먹지 못했다.
  3898.  
  3899. 핑계였을 뿐이다. 구질구질한 핑계. 다른 누구보다, 이성민 본인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과거로 돌아 온 이성민에게 저것은 핑계일 뿐이다.
  3900.  
  3901.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승 무공을 익혔다. 영약을 먹었다. 재능을 갖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온다는, 세상에 다시없을 기회를 얻든 주제에. 도망 다니기만 했으면서.
  3902.  
  3903. 그래.
  3904.  
  3905. 여태까지는 그랬다.
  3906.  
  3907. “네 꿈은 무엇이냐?”
  3908.  
  3909. 동굴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불영대사는 요즘 들어서 부쩍 자주 밖으로 나왔다. 저무는 황혼을 보고 있던 이성민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3910.  
  3911. “모르겠습니다.”
  3912.  
  3913. 불과 1년 전이었다면 뭐라도 대답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위지호연을 따라잡고 싶다고. 무의 끝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3914.  
  3915. “일 년 전에 너는 꿈을 꾸고 싶다고 대답했다. 날고 싶다고도 대답했었다. 그리고 기는 것을 배웠다고 대답했었지. 걷는 법은 배웠느냐?”
  3916.  
  3917. “배웠… 습니다.”
  3918.  
  3919. “낄낄! 아해야, 너는 고작해야 한 걸음을 걸었을 뿐이란다. 이제야 알겠느냐? 네가 말한 ‘날고 싶다’라는 대답이 얼마나 막연하던 것이었는지.”
  3920.  
  3921. 날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는가? 문득 떠오른 그 의문에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노력을 하였다고 스스로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922.  
  3923. “…불영대사. 당신께서는… 나의 모순을 알고 있었습니까?”
  3924.  
  3925. “네가 꼬여버린 것이 모순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더냐?”
  3926.  
  3927. 이성민의 질문에 불영대사가 크게 웃었다.
  3928.  
  3929. “아해야. 나는 너의 전부를 알지 못한단다. 신통력을 가진 이 늙은 중도, 네가 전부를 말하지 않는 한 전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해. 하지만 네가 익힌 무공을 보았다. 그를 통해서 네가 어떤 심마心魔를 품고 있는지는 알았지.”
  3930.  
  3931. 심마. 불영대사는 그를 심마라고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멍하니 들었다. 이성민이 품고 있던 열등감과 온갖 종류의 썩어빠진 감정은 심마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3932.  
  3933. “아해야. 너는 최고에 가까운 창법을 알고 있으면서 그를 익히는 것을 포기했다. 흔해 빠진 기본기는 경지에 올랐으면서 정작 뛰어난 창법은 외면하고 있었지. 그것은 네가 익힌 대부분의 무공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지학에게 너를 지도할 것을 말한 것이란다.”
  3934.  
  3935. “…왜 나에게 먼저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먼저 알고 있었더라면…”
  3936.  
  3937. “언제까지 타인에게 기댈 셈이냐?”
  3938.  
  3939. 불영대사가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의 표정이 움찔 떨렸다.
  3940.  
  3941. “너는 괴력난신의 사랑의 받고 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랑은 가호로 작용되어 너에게 유리함을 주고 있지. 대부분의 인간은 너에게 이유모를 호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그를 알고 있느냐?”
  3942.  
  3943. 이성민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불영대사의 말을 들었다. 불영대사는 이성민의 표정을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
  3944.  
  3945. “그 호의라는 것은 참으로 애매한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너에게 호의를 느낄 것이야. 하지만 불가의 무공을 정통으로 익힌 나와 지학은 네 가호에 현혹되지 않는다.”
  3946.  
  3947. 그것에 이성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성민은 어렴풋이, 지학이나 불영대사가 자신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948.  
  3949. “너는 그 가호를 통해 타인과 보다 쉽게 친밀해지며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겠지. 그것이 너를 오만하게 만들었구나. 너는 스스로 하지 않고 타인이 해줄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어.”
  3950.  
  3951. “나, 나는…”
  3952.  
  3953. “내가 왜 너에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느냐고? 말해서 무엇이 바뀌느냐. 직접 깨치지도 못하였으면서 내가 말해주었다 한 들 네가 변하려 하였겠느냐?”
  3954.  
  3955. 이성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이성민을 향해 불영대사가 다시 말했다.
  3956.  
  3957. “너는 지학과 자신을 견주어 보면서 네가 가진 심마를 알았다. 그리고 그 심마를 몰아내고자 했지. 변함을 바란다고 하여 모든 인간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변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스스로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너는 변하려 들고 있지. 열여덟 살이던 네가 스무 살이 되었구나. 다시 물으마. 네 꿈은 무엇이냐.”
  3958.  
  3959. “…무의 끝을 보고 싶습니다.”
  3960.  
  3961. “그것은 너 자신에게 속삭이는 듣기 좋은 거짓말일 뿐이다. 네 꿈은 무엇이냐.”
  3962.  
  3963. “위지호연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3964.  
  3965. “그 역시 거짓말이다. 급하게 갖다 붙인 그럴 듯해 보이는 목표일뿐이다. 네 꿈은 무엇이냐.”
  3966.  
  3967. “..,바꾸고, 변하고 싶습니다.”
  3968.  
  3969. “무엇을?”
  3970.  
  3971. “나 자신을.”
  3972.  
  3973. 그렇게 대답하자 불영대사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었다.
  3974.  
  3975. “어려운 꿈이로구나. 무의 끝을 보고 싶은 것보다, 그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변하게 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3976.  
  3977.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이 보고 있던 황혼을 보았다. 잠시 뒤, 불영대사가 말했다.
  3978.  
  3979. “네가 원한다면. 네 몸을 감싸고 있는 가호의 일부를 없애 줄 수 있다.”
  3980.  
  3981. 그 말에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3982.  
  3983. “선택은 네 몫이다. 아해야. 그 가호 자체는 너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는다. 타인에게서 받아내는 이유 없는 호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충동과도 같은 감정이다. 그 가호를 내버려 둔다면 너는 많은 이들에게 호의를 받을 수 있겠지.”
  3984.  
  3985. “…부탁드립니다.”
  3986.  
  3987. 이성민은 불영대사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백소고에게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배웠다. 은혜와 갚음에 대해서도 배웠다. 허나 이성민이 가진 이 알 수 없는 가호는 타인과 이성민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강제로 허물어트린다. 여태까지… 겪었던 만남에서. 이 가호의 덕도 제법 많이 보았을 것이다.
  3988.  
  3989. 이성민은 그것이 싫었다. 가호를 통해 이어지는 인연은 거짓이 아닐까. 그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이성민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3990.  
  3991. “오냐.”
  3992.  
  3993. 불영대사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다음 날 아침, 이성민은 불영대사와 마주 앉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끝났다’라고 말했을 때 불영대사의 얼굴은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언제나 악동처럼 웃던 불영대사가 저렇게 지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아서, 이성민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3994.  
  3995. “괜찮으신 겁니까?”
  3996.  
  3997. “괜찮을 턱이 있나. 내 법력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손을 대는 순간 죽어버렸을 터인데. 이 가호가 그리 깊이 새겨져 있지 않아 간신히 지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3998.  
  3999. 그렇게 말하며 불영대사가 쿨룩거리며 기침을 했다. 한참 기침하던 불영대사는 숨을 헥헥 거리면서 등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4000.  
  4001. “후회해 봐야 늦었다. 지워버린 가호는 다시 씌울 수가 없어.”
  4002.  
  4003. “…후회고 자시고, 달라졌다는 감각이 없습니다.”
  4004.  
  4005. “그야 그렇겠지. 네 가호는 타인에게 작용하던 것이었으니까.”
  4006.  
  4007.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고서 피곤하다며 이성민을 내쫓았다. 이성민은 동굴 밖으로 나오다가, 입구 근처에 박아 넣은 창과 갑옷을 보았다. 일 년하고도 반이 지나면서 창과 갑옷은 지저분하게 변해 있었다.
  4008.  
  4009. 이성민은 잠시 그것을 보다가 바닥에 던져 두었던 낡은 창을 향해 다가갔다.
  4010.  
  4011. 지학이 오기 전까지 구천무극창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4012.  
  4013. ======================================
  4014. < 소림-7 >
  4015.  
  4016.  
  4017.  
  4018. “아우.”
  4019.  
  4020.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남궁희원이 방문했다. 이성민은 아직도 소림에 있었다. 평소처럼 아침부터 창법을 수행하고 있던 이성민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3년 만에 만난 남궁희원이 이성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 이성민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창을 내려 놓았다.
  4021.  
  4022. “형님.”
  4023.  
  4024. 3년 만에 부른 형님이라는 말은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실 남궁희원을 형님이라 부르게 된 과정부터가 갑작스러웠고, 그 이후로 곧바로 소림에 남아 수행하게 된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3년 전에 형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던 것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4025.  
  4026. 오랜만에 본 남궁희원은 이전보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4027.  
  4028. “축하드립니다.”
  4029.  
  4030. 이성민은 남궁희원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 보이면서 말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이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4031.  
  4032. “이 빡빡한 산에 3년 동안 처박히면서 중이 된 것은 아니겠지?”
  4033.  
  4034. “…머리카락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4035.  
  4036.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14살 때로 회귀하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남궁희원은 근처에 있던 바위에 털썩 앉았다.
  4037.  
  4038. “그렇다면 술이나 한 잔 하지.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말이야. 인연이 짧고 얕기는 하여도, 의형제는 의형제고 아우는 아우니까.”
  4039.  
  4040.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근처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남궁희원은 품 안에서 술잔을 꺼내 이성민에게 던졌다. 이성민은 손을 들어 날아 온 술잔을 받았다.
  4041.  
  4042.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4043.  
  4044. “후후!”
  4045.  
  4046. 남궁희원이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에 남궁희원이 던진 술잔에는 상당한 공력이 담겨 있었다. 작고 약한 술잔에 공력을 실어 던졌음에도 금 하나 가지 않았으니, 남궁희원의 내공수법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4047.  
  4048. “많이 늘었군.”
  4049.  
  4050. 그리고 이성민은 그런 술잔을 무리 없이 받아냈다. 남궁희원이 소리 죽여 웃었다. 이성민은 받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4051.  
  4052. “반박귀진을 완성하셨군요.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신 것. 축하드립니다.”
  4053.  
  4054.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있었어. 아니,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자고 일어나니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더군. 환골탈태는 엿 같은 기분이었지만 말이야.”
  4055.  
  4056. 지금의 남궁희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긴 세월 검을 휘둘러 왔기에 체격이 건장하기는 하였지만, 육체적인 강인함을 제외한다면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반박귀진에 환골탈태까지 했다면 초절정의 초인이 되었다는 말과 똑같았다.
  4057.  
  4058. “아우는 묘해졌군.”
  4059.  
  4060. 남궁희원이 이성민을 향해 술병을 던졌다. 이번에는 내공을 실어 던진 것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반쯤 채우고서 남궁희원에게 술병을 돌려 주었다.
  4061.  
  4062. “기도가 안정되었어. 반박귀진은 아니지만… 이전처럼 기도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날뛰어 내비치던 모습과는 달라. 소림의 수행이 제법 도움이 되었나 보군. 아니면 절밥이 싱거워서인가?”
  4063.  
  4064. “그렇습니까?”
  4065.  
  4066. “응. 몸도 장성하였고… 그리고 또 묘한 것이 있어. 예전에는 아우의 얼굴을 보면 괜히 마음이 들뜨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단순히 그때의 내가 질풍노도의 시기라 남색 취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가?”
  4067.  
  4068. 남궁희원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불영대사가 이성민의 몸에 어린 가호의 일부를 지워 준 덕분이다. 타인의 감정에 충동을 불어 넣던 그 가호는 더 이상 이성민에게 작용하고 있지 않았다.
  4069.  
  4070.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것은 사실이야. 아우의 실력이 상승한 것도 즐겁고.”
  4071.  
  4072. “이전까지는 찾아오지 않으시더니. 일 년에 한 번 소림에 오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4073.  
  4074. “마음잡고 수행하는 사람에게 매년 뺀질나게 찾아갈 만큼 나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야. 슬슬 이쯤 가보면 뭔가 성과를 얻었을 것 같아서 와봤는데… 생각대로였군. 아우는 3년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졌어.”
  4075.  
  4076. “형님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겁니다.”
  4077.  
  4078. “그야 그렇지. 나는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초절정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어. 고수가 너무 많거든.”
  4079.  
  4080. 남궁희원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이성민과 남궁희원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마신 술맛은 예전처럼 달게 느껴지진 않았다.
  4081.  
  4082. “무슨 말입니까?”
  4083.  
  4084. “아. 하긴 아우는 이곳에 처박혀 있었으니 바깥의 소문에 어둡겠군. 알고 있나? 그때 아우와 함께 소림에 왔던 스칼렛님이 적색 마탑주가 되었어. 나는 마법 쪽은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하하! 그래도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 기존의 적색 마탑주와 마법 승부를 하여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더군. 역대 최연소 마탑주라고 해.”
  4085.  
  4086. 아. 벌써 그 시기인가. 이성민은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힐긋 내려 보았다. 슬슬 시기가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했었다. 본래의 미래에서도 스칼렛은 레시르 학파를 확립하여 적색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 있다. 지난 3년 동안, 이성민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4087.  
  4088. “소천마 위지호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아래에 추종자들이 모여 들고 있어. 소천마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라고 했던가? 후후, 듣자 하니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던데… 그러면서 초절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추종자가 모이는 것도 당연해. 듣자 하니 북방의 혈천마도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있는 모양이고.”
  4089.  
  4090. 소천마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이성민도 기억하고 있다. 다만 현생의 현재는 전생의 과거와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전생의 위지호연은 남자라는 소문이 떠돌았지, 지금처럼 여자라고 확정되지 않았었다. 또한 추종자가 붙는 시기도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이성민이 기억하는 한, 위지호연에게 추종자들이 붙는 것은 위지호연이 던전에서 다른 초고수들을 몰살시키고 홀로 나온 뒤였기 때문이다.
  4091.  
  4092. “그 외에도 많은 신진 고수들이 이름을 알리고 있지. 비무행을 벌이고 있는 검귀 독비준도 그렇고, 작은 마을을 불안으로 떨게 하는 몬스터들을 보수 없이 토벌하는 묵섬광 백소고도 최근에 이름을 날리고 있지.”
  4093.  
  4094. 남궁희원에게 들은 이름에 이성민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백소고의 이름은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잠깐 멍하니 남궁희원의 얼굴을 보다가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4095.  
  4096. “…백소고님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4097.  
  4098. “응? 뭐야. 아우, 묵섬광에게 관심이 있었나? 소문으로는 백발의 미녀라고 하던데…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독비준도 그렇지만 백소고도 워낙에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소문이 들렸던 곳도 남궁세가 근처였으니, 이곳에서 한 달은 이동해야 하지.”
  4099.  
  4100. 남궁희원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앞으로 2년 남았다. 이성민의 나이가 스물 셋이 되고서, 묵섬광 백소고와 검귀 독비준은 던전에서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성민은 그 죽음을 막아야 한다.
  4101.  
  4102.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백소고가 던전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직 던전이 개방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면 미리부터 백소고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 그녀와 만나야 한다.
  4103.  
  4104. ‘지금의 나는 위지호연을 막을 수가 없어.’
  4105.  
  4106. 그것은 2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학은 위지호연이 초절정의 경지를 초월한 괴물이라고 했다. 이성민이 지학과 처음 비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학은 반박귀진을 완성한 초절의 고수였다. 그런 지학을 쉽사리 상대했다는 위지호연의 경지를, 이성민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4107.  
  4108. 이성민은 소림에서 3년 동안 수련하면서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단점을 보완했다. 아직 심, 기, 체의 어그러짐을 잡지 못해 불안정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내공을 조율하고 다루는 수법이 크게 발전하였고 무뎌졌던 감각들도 날카롭게 세웠다. 그 과정에서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얻었던 육감도 기존의 감각이 뜨여지는 과정에서 더욱 진해졌다.
  4109.  
  4110.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무공들. 그것은 지학과의 비무를 거듭하면서 익숙해졌다. 익히는 것을 반쯤 포기하여 도망쳤던 구천무극창과 무혼탈영도 숙련되었다. 고행에 대한 성취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던 므쉬의 산이 아니기에, 3년을 수행했음에도 무공은 크게 늘지 않았다. 다만 ‘알고 있던 것’을 제대로 펼치게 되었을 뿐이다.
  4111.  
  4112. 그것 뿐이었음에도 이성민의 실력은 굉장히 늘었다. 여전히 지학과의 비무에서 승기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처음 때처럼 일방적으로 패배하지는 않게 되었다.
  4113.  
  4114. “한 번 얼굴이나 보기 위해 왔을 뿐이야. 얼굴을 보니까… 좋긴 하군. 짧고 얕은 인연이라고는 해도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반가움이 있는 법이지.”
  4115.  
  4116.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이성민은 그런 남궁희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4117.  
  4118.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4119.  
  4120. “아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군. 물어봐 주니 고마운데.”
  4121.  
  4122. “도움이 되어 주겠다는 말은 함부로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들어드릴 수는 있을 겁니다.”
  4123.  
  4124. “상관없어. 나도 그냥 한탄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4125.  
  4126. 남궁희원이 술병을 허공에 놓았다. 둥실 떠오른 술병이 천천히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4127.  
  4128. “모용소저가 혼인했거든.”
  4129.  
  4130. 격공섭물로 날아 온 술병을 잡으면서 감탄하고 있던 이성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모용소저. 모용세가의 영애인 화설 모용서진. 3년 전, 남궁희원과 함께 처음으로 소림에 왔을 때 전음으로 소개를 들었었다. 당시의 남궁희원은 모용서진을 두고서 자신이 사모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했었다.
  4131.  
  4132. “…그렇군요.”
  4133.  
  4134. “어쭙잖은 위로도 해주지 않는 건가?”
  4135.  
  4136. “상대가 누구입니까?”
  4137.  
  4138. “은비룡 제갈태령.”
  4139.  
  4140. 남궁희원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대답했다. 역시 소개를 들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만 할까. 이성민은 잡은 술병을 어루만지면서 잠깐 동안 고민에 잠겼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런 류에 대해 조언을 던질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었다. 차라리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3년 전에 뭐라고 언질이라도 주었을 터인데, 전생의 기억에서 모용서진이 누구와 혼인했는지 따위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4141.  
  4142. “…어… 음…”
  4143.  
  4144. “후후! 위로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야. 말하지 않았나. 그냥 한탄하고 싶은 것 뿐이었다고.”
  4145.  
  4146. 남궁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빈 술잔을 내려 보았다.
  4147.  
  4148. “물론 나도 병신은 아니야. 쑥맥도 아니고.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모용소저에게 마음을 전하기는 했었지. 거절당했지만 말이야. 내가 너무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라 싫다더군.”
  4149.  
  4150. 확실히. 남궁희원은 그런 면이 심했다. 그것은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의 후계자라는 것에 대한 오만함이 아니라, 남궁희원이라는 인간 자체가 품고 있는 오만함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가진 재능과 실력에 대한 오만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4151.  
  4152. “그래서 변하려고 했지.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쉬이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특히 타고난 성정은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어. 나는 이런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오며 더욱 이런 인간이 되었지. 바꿀 수가… 없는 거야. 그렇기에 연기해 보려고 했지. 안 맞는 옷을 입고서.”
  4153.  
  4154. 남궁희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4155.  
  4156. “나는 광대가 아니야. 광대의 재능도 없고. 그래서 연기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어. 결국 모용소저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고, 나보다 오만하지 않은 은비룡과 혼인했다. 그게 전부인 이야기야. 후후후!”
  4157.  
  4158. 남궁희원이 마지막에 붙인 웃음은 진한 자조가 섞여 있었다. 인간은 변할 수 없다.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말에 담긴 뜻을 느끼며 착잡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인간이 변하기 힘들다는 것은 이성민도 잘 알고 있었다.
  4159.  
  4160. “그래서 그만두었다. 광대놀음을. 도피처가 필요했어. 몰두하고 싶은 것이 필요했지. 그 순간에 눈에 보인 것은 검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검을 쥐어 휘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겠나?”
  4161.  
  4162. “모르겠습니다.”
  4163.  
  4164. “내 검은 추악해.”
  4165.  
  4166. 남궁희원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4167.  
  4168. “보답 받지 못한 연심의 쓰림을 달래기 위해 도피로 휘둘러 도달한 검이다. 해서… 만족스럽지 못해. 즐겁게 휘두른 검이 아니었거든. 아우는 어땠지?”
  4169.  
  4170. “예?”
  4171.  
  4172. “이곳에서 보낸 3년. 3년간 한 수행은… 즐거웠나?”
  4173.  
  4174. 남궁희원이 이성민의 눈을 들여 보면서 물었다. 이성민이 기억하고 있던 남궁희원의 눈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이성민은 그런 남궁희원을 오만하였으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앎이 짧기는 하였어도 남궁희원과 나눈 이야기와 짧았던 비무, 패배, 그에게 들었던 조언은 이성민에게 깊이 새겨졌었다.
  4175.  
  4176.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십니다.”
  4177.  
  4178. “마음의 상처 때문이지. 아직 낫지 않았거든. 오히려 곪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고.”
  4179.  
  4180. “…저는… 즐거웠습니다.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산에서 저의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4181.  
  4182. “부족함을 아는 것이 즐거웠나.”
  4183.  
  4184. “그를 알고 나아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4185.  
  4186. “뒤로 미뤄야겠어.”
  4187.  
  4188. 남궁희원이 중얼거렸다.
  4189.  
  4190. “아우의 기도가 다듬어진 것을 보고, 비무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3년 전의 비무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거든. 하지만… 뒤로 미루지. 나는 지금의 내 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가, 아우는 더 나아갈 수 있을 듯 해. 뒤로 미루어 즐기는 것도 좋겠지.”
  4191.  
  4192. 남궁희원은 그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떠났다. 그리 많은 대화도, 그렇다고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남궁희원이 자리를 떠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4193.  
  4194. “검룡 남궁희원.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습니다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인물이군요.”
  4195.  
  4196. “왜 이제 나오시는 겁니까?”
  4197.  
  4198. “마주쳤다면 비무를 청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 자신은 그를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지만, 소림의 미래인 나는 나 스스로 선택하여 비무를 해서는 안 됩니다.”
  4199.  
  4200. 지학은 그렇게 말하면서 쓰게 웃었다. 지학은 소림의 미래라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지만, 소림의 미래이기에 자신을 구속하는 면이 강했다. 그것이 지학이라는 인간이다.
  4201.  
  4202.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4203.  
  4204. ‘나는 어떤 인간인 것일까.’
  4205.  
  4206. 답을 내놓기에 어려운 고민이었다. 전생의 이성민과 지금의 이성민. 그것은 같은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4207.  
  4208. “오늘은 창을 쓰겠습니다.”
  4209.  
  4210. “오늘은, 이 아니라 ‘오늘도’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제도 창을 쓰셨는데.”
  4211.  
  4212. “이성민님과 창을 들고 겨루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성민님의 구천무극창을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재밌어요. 구천무극창은 잘 만들어진, 뛰어난 창법입니다. 이성민님과 나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즐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창법을 고작해야 13살의 나이에 뜯어 고쳐냈다니… 소천마의 천재성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경이적이로군요.”
  4213.  
  4214. 3년의 시간 동안, 이성민은 지학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음에서 회귀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위지호연과의 인연과 익힌 무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주었다.
  4215.  
  4216. 비무는 이번에도 지학의 승리였고, 이성민의 패배로 끝났다. 3년 동안 매일같이 겪은 패배였지만, 패배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음을 이성민은 알고 있었다.
  4217.  
  4218. 그리고 1년이 흘러, 이성민의 나이가 22살이 되었을 때.
  4219.  
  4220. 이성민은 소림을 내려왔다.
  4221.  
  4222. ======================================
  4223. < 드리무어-1 >
  4224.  
  4225.  
  4226.  
  4227. “어디로 가십니까?”
  4228.  
  4229. 승복을 입은 탓일까. 브레던의 성문 경비병은 이성민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 보인 뒤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브레던은 소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다. 비록 이성민이 머리를 민 중이 아니어도, 소림의 승복을 입고 있는 이상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4230.  
  4231. “드리무어로 갑니다.”
  4232.  
  4233. 이성민의 대답에 경비병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성문을 지나친 이성민은 말을 타지 않았다. 브레던과 드리무어가 비교적 인접해 있는 도시라고 하여도, 말을 타지 않고 걸어 이동한다면 보름은 걸릴 것이다.
  4234.  
  4235. 갑작스레 소림을 내려오게 된 이유는, 불영대사의 심부름 때문이었다. 심부름의 내용은 드리무어에 있는 화산파에 서찰을 전하는 것이다. 본래는 지학이 가야 할 일이었지만, 목적지가 드리무어라는 것에 이성민이 여태까지의 은혜를 갚겠다며 대신하여 심부름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4236.  
  4237. 화산은 구파일방 중 하나로 검법이 유명한 도가 계열의 문파다. 도가에 검법이 유명하다고 하여 무당파와 곧잘 비교되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산의 검법이 무당의 검법에 비해 조금은 떨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그것은 구파일방의 태산북두라는 말로 드러난다. 태산은 소림, 북두는 무당. 화산은 없다.
  4238.  
  4239. 비교되어 조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화산의 검법은 무당의 검법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화산의 검법은 화려하여 변과 환을 담는다. 반면에 무당의 검법은 화려함보다는 묵직함을, 변화보다는 정적을 담는다.
  4240.  
  4241. ‘화산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4242.  
  4243. 본래 화산파는 화산에 있다고 하여 화산파로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중원의 이야기다. 에리아는 중원이 아니기에, 화산이 없다. 단지 소림이 그러했듯이 화산이 아닌 산을 화산이라 이름 붙여 그곳에 본파를 세워두었다.
  4244.  
  4245. 마침 시기가 좋았다. 불영대사의 심부름 건은 어디까지나 계기였을 뿐이다. 소림에서의 수행도 가치 있고 충실하기는 하였으나, 이성민은 드리무어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므쉬에게 전해들은 대로 시간의 신 데니르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4246.  
  4247. “네블.”
  4248.  
  4249. 성문을 떠나 걷고, 해가 저물 즈음. 이성민은 노숙을 준비한 뒤에 네블을 불렀다. 3년 동안 소림에서 지내면서 이성민은 단 한 번도 네블을 불러 본 적이 없었다.
  4250.  
  4251. “오랜만입니다.”
  4252.  
  4253. 그림자 속에서 솟구친 네블은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성민은 기이할 정도로 변하지 않은 네블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4254.  
  4255. “셀게루스님과 연결해 주십시오.”
  4256.  
  4257. “알겠습니다.”
  4258.  
  4259. 지난 3년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네블은 묻지 않았다. 네블이 이성민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뒤, 이성민의 앞에서 공간이 쩍하고 찢어졌다.
  4260.  
  4261. “죽은 줄 알았어.”
  4262.  
  4263. 네블이 변하지 않았듯이 셀게루스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크 엘프인 그녀의 시간은 인간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다. 셀게루스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쓰게 웃음 지었다.
  4264.  
  4265. “제가 죽기를 바라셨던 겁니까?”
  4266.  
  4267. “당연히 아니지. 많이 변했네. 하긴, 3년이라면 인간은 늙는 시간이니까.”
  4268.  
  4269. 셀게루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끼고 있던 두터운 장갑을 벗었다. 그녀는 땀에 절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4270.  
  4271. “생존신고라도 하려고 부른 거야?”
  4272.  
  4273. “아… 그건 아닙니다.”
  4274.  
  4275.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공간 포켓을 열었다. 안에서 꺼낸 창과 마갑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풍파에 젖어 많이 낡아 있었다. 그것을 보며 셀게루스의 눈썹이 팍하고 찡그러졌다.
  4276.  
  4277. “대체 어떻게 썼기에 저 모양이 된 거야? 너, 어디 전쟁터에서 구르기라도 했어? 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없었는데…”
  4278.  
  4279. “약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해 많이 낡아버렸습니다만. 보수가 가능할까요?”
  4280.  
  4281. 3년 동안 이성민은 이 창과 마갑을 사용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동굴의 입구에 놓아두었던 이유는, 이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태만했던 자신. 현실에서 도망쳐서 보상심리로 삼았던 창과 마갑을 보이는 장소에 두어 매일 거듭해 수행하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끊어내고 싶었다.
  4282.  
  4283. “가능은 하지. 갑옷 쪽은 처음 보는데. 한 번 봐도 될까?”
  4284.  
  4285. “아, 예. 물론입니다.”
  4286.  
  4287. 네블이 셀게루스 쪽으로 마갑과 창을 전해 주었다. 셀게루는 창보다는 마갑 쪽에 관심을 보였다.
  4288.  
  4289. “이건… 아티펙트로군. 중심이었던 마법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보조적인 마법들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네.”
  4290.  
  4291. 마갑은 마력을 불어넣으면 자동으로 착용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어지간한 손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동으로 수복된다.
  4292.  
  4293.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손을 대긴 해야 할 텐데.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창도 마찬가지고.”
  4294.  
  4295. 셀게루스의 대답에 이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년 동안 방치한 탓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4296.  
  4297. “따로 추가할 의뢰는?”
  4298.  
  4299. “아직은 없습니다. 우선은 보수만 부탁드립니다.”
  4300.  
  4301. “알았어. 사흘 정도면 될 거야.”
  4302.  
  4303. “아… 괜찮다면, 당분간 그것들을 맡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4304.  
  4305. “왜?”
  4306.  
  4307. “아직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4308.  
  4309. 이성민의 대답에 셀게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동안 이성민을 보던 셀게루스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4310.  
  4311. “뭐. 맡아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만약을 위해서 말해두는데. 내가 한가할 때 조금 주물러 봐도 되겠지?”
  4312.  
  4313. “예?”
  4314.  
  4315. “손이나 풀 겸.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설마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겠지?”
  4316.  
  4317. “물론 아닙니다. 너무… 좋은 창이라서요. 지금의 제가 다루기에 아까울 정도로. 그래서 당장은 쓰고 싶지 않은 겁니다.”
  4318.  
  4319. “대장장이한테는 최고의 찬사야. 그러니까, 시간 나고 심심할 때마다. 손이나 풀 겸 주물러 볼게.”
  4320.  
  4321. “더 뛰어나진다면 더 쓰기 힘들텐데…”
  4322.  
  4323. “그렇다면 너도 더 뛰어나지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잖아.”
  4324.  
  4325. 셀게루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셀게루스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이성민은 네블에게 말했다.
  4326.  
  4327. “정보를 구입하고 싶습니다.”
  4328.  
  4329.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4330.  
  4331. “검귀 독비준, 묵섬광 백소고에 대한 정보입니다.”
  4332.  
  4333. “그리 어려운 의뢰는 아니군요. 그 셋은 최근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무인들이니까요. 무엇을 위주로 알아봐 드리면 되겠습니까?”
  4334.  
  4335. “현재 위치에 대해 부탁드립니다.”
  4336.  
  4337. “알겠습니다. 내일까지는 원하시는 정보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보값도 내일 말씀드리지요.”
  4338.  
  4339. “아 그리고… 소천마 위지호연에 대한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4340.  
  4341. “알겠습니다.”
  4342.  
  4343. 네블이 머리를 숙이면서 답했다. 그것으로 네블과의 이야기는 끝이었다.
  4344.  
  4345. 다음 날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때.
  4346.  
  4347. [지금 정보를 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4348.  
  4349. 드리무어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던 이성민의 머릿속으로 네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고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4350.  
  4351.  
  4352.  
  4353. “에레브리사와 연결되어 있는 정보 길드들에게서 종합해 추린 정보들입니다. 정확함에 대해서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4354.  
  4355. 네블은 자그마한 수정 구슬을 쥐고 있었다. 이성민이 그것을 바라보자, 네블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4356.  
  4357. “이 안에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4358.  
  4359. 정보료가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소림에서 생활하면서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덕에 지불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계산이 끝나자 네블이 수정 구슬을 건네 주었다.
  4360.  
  4361. “어떻게 쓰면 됩니까?”
  4362.  
  4363. “내공을 불어넣어 보십시오.”
  4364.  
  4365. 네블의 말에 이성민은 수정구슬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수정구슬이 회색으로 변하였고, 대신에 이성민의 머릿속에 원했던 정보가 전해졌다.
  4366.  
  4367.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백소고에 대한 정보였다. 백소고는 힘없는 이들에게 대가없는 선행을 베풀면서 협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현재 백소고는 대도시 루베스에서 일주일 째 체류 중이었고, 그것은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여행 중인 모양이었다.
  4368.  
  4369. 백소고가 협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면, 검귀 독비준은 승부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이름난 무인과 문파들을 찾아가면서 비무행을 벌이고 있다. 독비준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 이성민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4370.  
  4371. ‘화산으로 향하고 있다고?’
  4372.  
  4373. 확정된 사실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비준의 행보를 통해 정보 길드 쪽에서 추측한 것뿐이다. 현재 독비준은 드리무어로 향하고 있었고, 드리무어에 있는 무림 문파 중에서 독비준이 관심을 보일만한 문파는 화산파 뿐이었다.
  4374.  
  4375. 어쩌면 독비준과 화산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므쉬의 산에서 독비준과 크게 엮였던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산에서 같이 수행하던 독비준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가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4376.  
  4377. ‘아니. 생각해 보면 독비준님는 내 얼굴을 모를 텐데.’
  4378.  
  4379. 산에서 독비준을 만났을 당시, 독비준은 두 눈의 금제를 받고 있었다.
  4380.  
  4381. 독비준의 정보 다음으로는 위지호연에 대한 정보가 기억에 새겨졌다. 그 정보를 확인하고서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4382.  
  4383. ‘전생과는 달라.’
  4384.  
  4385. 전생에 소천마 위지호연이 유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지호연이 이름을 크게 알린 것은 던전에서의 사건 이후다. 당시의 던전에는 백소고와 독비준 외에도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4386.  
  4387. 그들 모두를 몰살시키고, 혼자 던전을 정복하고서 나왔기에 위지호연은 소천마라 경외 받는 괴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4388.  
  4389. 하지만 ‘현재’는 아니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이 기억하고 있는 전생과는 다르게 이른 시점에서부터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일 년 전에 남궁희원에게도 들었지만, 그부터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위지호연은 더한 거인이 되어 있었다.
  4390.  
  4391. 수정구슬을 통해 전해 받은 정보에는 위지호연의 최근 모습도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선명했다. 이성민은 기억 속에 새겨진 위지호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4392.  
  4393. 그녀는 머리를 길게 길렀다. 남장도 하지 않았다. 털이 풍성한 외투를 그 위에 걸쳤고, 그 아래에는 몸의 굴곡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 위지호연의 어깨를 감싸 흘러내리고 있는 비단과 같은 긴 어깨걸이가 그녀를 체구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4394.  
  4395. 백소고와 독비준과 비교해서 위지호연의 정보는 그 양이 제법 많았다. 그만큼 위지호연이라는 이름이 현 에리아에서 큰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위지호연의 행보에 붙은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천마군天魔軍이라 칭하며 위지호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숫자는 그리 20명 남짓으로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절정의 수준을 넘은 고수라는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도 많은 세력들이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있었다.
  4396.  
  4397. 특히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있는 것은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를 중심으로 한 명문세가들이었다. 그들은 정파이기에, 소천마라 불리는 위지호연과 그녀를 중심으로 힘이 모이고 있는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위지호연은 북쪽 도시인 제라르 인근에서 목격되었고, 그에 대해서도 정보 길드들은 위지호연의 행보를 예상했다.
  4398.  
  4399. 혈천마 백무선과의 충돌.
  4400.  
  4401. 혈천마 백무선은 만년설이 쌓인 에리아 최북단에서 준동하고 있는 괴물이다. 그 지역에서 백무선은 귀족 이상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소천마 위지호연의 행보는 백무선과 혈천맹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북방의도시, 트리기아로 향하고 있었다. 정보 길드들은 천마라 불리는 두 인물의 성향을 통해서, 둘이 충돌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4402.  
  4403. ‘이것도 전생과는 달라. 위지호연과 백무선은 충돌한 적이 없었어. 위지호연은 중앙에 있었고, 백무선이 북방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 남하하였는데…’
  4404.  
  4405. 왜 전생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전생과 다른 것이 행보 뿐만이 아니다. 위지호연의 차림새도 달라졌다. 남장을 아예 포기했다는 것… 그것은 위지호연의 가치관이 전생과는 달라졌다는 뜻일까.
  4406.  
  4407.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북방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불영대사의 심부름도 해야만 했고, 시간의 신 데니르도 만나야만 했다. 애초에 이성민이 지금 북방으로 간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4408.  
  4409.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소림에서 이성민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지금 이성민이 해야 하는 것은 드리무어로 향하는 것이다. 이성민은 회색으로 변한 수정구슬을 내려 보다가 네블을 보았다.
  4410.  
  4411. “전해진 정보에는 만족하셨습니까?”
  4412.  
  4413. “예.”
  4414.  
  4415. “그 수정구슬은 일회용입니다. 그리 큰 가치는 없으니 버리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4416.  
  4417.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4418.  
  4419. “다음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4420.  
  4421. 네블이 모습을 감추었다. 이성민은 손에 잡힌 수정구슬에 힘을 주었다. 파각, 하고 금이 간 수정구슬은 산산이 조각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성민은 머릿속에 남은 위지호연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크게 숨을 삼켰다.
  4422.  
  4423. 14살에 헤어지고서… 지금의 나이가 22살이니. 8년 만인가.
  4424.  
  4425. 비록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8년 만에 본 위지호연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4426.  
  4427. 그녀는 아름다웠다.
  4428.  
  4429.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4430.  
  4431. ‘가슴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지만.’
  4432.  
  4433. 위지호연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성민은 풋하고 웃었다.
  4434.  
  4435. ======================================
  4436. < 드리무어-2 >
  4437.  
  4438.  
  4439.  
  4440. 잠깐 잠을 잤다.
  4441.  
  4442. 꿈을 꾸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 그랬다. 잠을 옅게 자도, 깊이 자도. 꿈은 잘 꾸지 않는다. 현실에 충실하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꿈속의 세계에 그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흐릿해지다가 사라지는 기억에 아쉬움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4443.  
  4444. 그녀는, 위지호연은. 꿈을 꾸지 않는다. 잠들어 꾸는 꿈을 즐기지 않는다. 잠을 자는 행위는 위지호연에게 있어서는 피로를 푸는 것과 동시에 효율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눈을 뜬 위지호연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4445.  
  4446.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4447.  
  4448. 에리아 최북단인 트리기아는 매일매일이 겨울이고 눈이 녹지 않는 곳이다. 내린 눈은 녹지 않고 쌓이고 쌓여 얼어붙는다. 공기는 폐를 얼어붙게 만들만큼 차갑다. 두꺼운 옷을 몇 겹으로 껴입지 않는다면 버티기 힘들 만큼 가혹한 추위를 가진 곳이 이곳이다. 하지만 위지호연의 차림새는 방한에는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털이 풍성한 외투를 걸치기는 하였으나 그 아래에는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았다.
  4449.  
  4450. 그렇다고는 해도 위지호연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한서불침을 완성하였기에 추위에 침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에서 웅크려 잠드는 미친 짓을 한 것이다. 다만 흩날리는 눈발이 머리카락과 피부에 붙는 것은 귀찮았다. 위지호연은 머리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4451.  
  4452. 몰아치는 눈발과 바람을 막아주고 있던 흑룡포黑龍包가 위지호연의 손짓에 따라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힘없이 나풀거릴 것처럼 보이는 이 흑룡포는 위지호연이 여행 중에 얻은 아티팩트로 위지호연이 가장 마음에 들어 아끼는 것이었다. 흑룡포는 내공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며, 넓어지고 좁아지기도 한다. 어깨를 감싸 아래로 내려 온 흑룡포의 눈발을 털어내며 위지호연은 나무 아래에서 나왔다.
  4453.  
  4454. “조금 더 주무시지 않고.”
  4455.  
  4456. 빼빼 말라 삭막해 보이는 남자가 위지호연을 향해 다가오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독고귀검獨孤鬼劍. 위지호연을 추종하여 따르는 천마군 중 하나로, 20명도 안 되는 천마군 중 제일의 고수이면서 가장 먼저 위지호연을 따라다니던 인물이다.
  4457.  
  4458.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어.”
  4459.  
  4460. 위지호연이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고 있는 천마군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때어놓을 필요가 없으니 데리고 다니고 있을 뿐. 그들이 자신을 추종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위지호연이 천마군을 품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위지호연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해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고, 천마군이 일방적으로 위지호연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선이 그어진 관계였음에도 천마군은 위지호연을 추종했다. 그녀가 가진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4461.  
  4462. “약속 시간은 지났을 텐데 오질 않는 군요.”
  4463.  
  4464. “늦잠이라도 잔 것이 아닐까.”
  4465.  
  4466. 위지호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위지호연은 그런 식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독고귀검은 아니었다. 그는 얇은 두 눈에 살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4467.  
  4468. “건방지게. 누가 누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인지…”
  4469.  
  4470. “혈천마가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인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것이지?”
  4471.  
  4472. “하지만, 주군…”
  4473.  
  4474. “주군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너희를 수하로 거둔 적이 없다. 너희 마음대로 나를 따라다니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지는 마라.”
  4475.  
  4476. 위지호연의 말에 독고귀검의 눈썹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는 항변하지 않고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것은 이래저래 쓸 일이 많고 편리하겠지만, 위지호연에게 있어서는 필요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저들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잠든 위지호연의 호법을 서기 위해, 이 눈보라 속에서 서있었다. 하지만 위지호연은 저들에게 그것을 부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감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4477.  
  4478. 돌이켜 보면, 위지호연이 에리아에서 살아 온 8년이라는 세월은 대부분이 그랬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만남을 겪었다. 이 신비로운 세상이 넓다는 것에 위지호연은 즐거움을 느꼈지만, 만나고 지나친 인연들에게서 즐거움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추종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위지호연은 스스로를 혼자라고 여겼다. 저들이 보는 것은 소천마였지 위지호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479.  
  4480. 신경 쓰지는 않는다. 타인의 무엇을 보는가는 전적으로 그들의 관점이니까. 그렇기에 위지호연은 저들에게 소천마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지도, 저들이 관점을 바꾸도록 설득하지도 않았다.
  4481.  
  4482. 위지호연은 그런 인간이었다.
  4483.  
  4484. ‘마음에 들지 않아.’
  4485.  
  4486. 위지호연은 눈보라 속에 서서 생각했다. 그녀를 추종하는 천마군은 위지호연과 조금 떨어진 뒤쪽에 서있었다. 그들 모두가 한서불침을 이룬 고수는 아니었음에도, 추위에 몸을 떠는 이들은 있을망정 자리를 떠나는 이들은 없었다. 위지호연은 머리를 돌려 그들을 힐긋 보았다. 이쪽을 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엿보면서 위지호연은 작게 혀를 찼다.
  4487.  
  4488. 마음에 들지 않는다.
  4489.  
  4490. 저들이 가진 기대감이 싫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저런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에리아에 소환되기 전, 그녀가 마교의 소교주로 살았을 때에도 항상 저런 눈을 보아 왔었다. 무심하던 아버지, 교주.
  4491.  
  4492. 그도 위지호연을 보았을 때에는 말로는 하지 않아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고, 위지호연을 가르친 수많은 고수들도 저런 눈을 했었다.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위지호연에게 향하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4493.  
  4494. 천마군은 앞으로 있을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소천마 위지호연과 혈천마 백무선의 만남. 그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쩌면 이곳에서 새로운 소문이 탄생할 지도 모르고, 그것은 널리 퍼져 전설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역사적인 순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위지호연의 눈에 들어 측근이 될 것이다.
  4495.  
  4496. 그런 기대가 역겹다. 죽일까. 위지호연은 손을 쥐었다 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들 모두가 덤벼도, 위지호연은 손 짓 몇 번에 저들을 조각내어 눈밭에 파묻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현실이다.
  4497.  
  4498. 쉬운 일이지만 하지 않는다. 해봤자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위지호연은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역겨운 기대를 걸며 접근하는 이들을 죽여 보았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잔학함은 눈 먼 추종자들을 열광적으로 만들었다. 사마외도의 길을 걷는 자들은 용서 없는 잔혹함마저도 ‘천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멋이라고 하며 기뻐했다.
  4499.  
  4500. “왔군.”
  4501.  
  4502.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파바박! 바닥에 쌓인 눈이 크게 흩어진다. 떠오른 눈발이 가라앉았을 때, 위지호연과 조금 떨어진 앞에 열한 명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위지호연은 그 중심에 서있는, 붉은 장포를 입은 미남자를 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4503.  
  4504. “늦잠이라도 잤느냐?”
  4505.  
  4506. 위지호연이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혈천마 백무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위지호연이 혈천맹의 본거지로 찾아가 만남을 청했을 때, 바쁜 일이 있다는 이유로 백무선은 위지호연을 내치고서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었다. 그런데 정작 시간과 장소를 정한 백무선이 늦게 온 것이다.
  4507.  
  4508. “요즘 한창 위명을 떨치고 있는 소천마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느라 늦은 것 뿐이오.”
  4509.  
  4510. “그렇다면 혈천맹의 안으로 들이지 그랬느냐? 그곳이라면 준비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4511.  
  4512. “후후! 혹시 모를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소천마를 혈천맹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비난은 듣고 싶지 않아서.”
  4513.  
  4514. “불상사? 무슨 불상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4515.  
  4516. 위지호연이 웃으며 말했다. 백무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오른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주변에 서있던 열 명. 백무선의 호위대라고 할 수 있는 혈천십걸이 뒤로 물러섰다.
  4517.  
  4518. “그대의 뜻은 이미 전해 들었으니. 본좌와 한 번 싸워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4519.  
  4520. “나 역시 천마라고 불리는 몸이라. 혈천마라는 별호를 가진 네 솜씨가 궁금했을 뿐이다.”
  4521.  
  4522. “하하… 마치 본좌를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군.”
  4523.  
  4524. “아무렇게나 생각하여라. 아니면 운이 없다고 생각하던가.”
  4525.  
  4526. 위지호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후우웅!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던 흑룡포가 크게 펄럭거리더니, 위지호연의 주변에 쌓여 있던 눈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먼 뒤쪽에서 위지호연과 백무선의 대치를 보고 있던 천마군들이 감탄성을 내질렀다. 위지호연과 마주 선 백무선은 소리 죽여 웃었다.
  4527.  
  4528. “운이 없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4529.  
  4530. “상대가 필요했다.”
  4531.  
  4532. 위지호연이 속삭였다.
  4533.  
  4534. “구파일방을 건드려 볼까 싶었지만 그건 꽤 귀찮은 일이었지. 결속 잘 된 집단을 건드리는 것은 이래저래 뒷일이 짜증스러워.”
  4535.  
  4536. “혈천맹은 건드릴 법 했다는 말이오?”
  4537.  
  4538. “건드리는 것은 혈천맹이 아닌 너지. 혈천마 백우선. 사마외도의 무인들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굶주린 짐승과도 같다. 가장 센 놈이 우연찮게 너였기 때문에 네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너를 중심으로 혈천맹이 만들어졌지. 네가 무너진다면 혈천맹이 혈천맹으로 있을 수 있을까?”
  4539.  
  4540. 그 말에 혈천십걸이 분개를 터트렸다. 성큼거리며 나서려던 혈천십걸을 제지한 것은 백무선이 들어올린 손이었다. 백무선은 여전히 여유를 담은 얼굴로 위지호연을 보았다.
  4541.  
  4542. “자신감이 과하시군.”
  4543.  
  4544. “사실이니까. 혈천맹에 나를 들이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어. 네가 구질구질한 방법을 썼다면 시체가 더 늘었을 테니까.”
  4545.  
  4546. “말하지 않았소이까. 괜한 비난을 듣기 싫었을 뿐이라고. 혈천맹 안에서 그대가 죽었다면 뭣 모르는 이들이 혈천마가 비겁한 수단을 썻노라 떠들지도 모르지. 보는 이들이 적기는 하지만, 뭐… 충분하오. 다만, 괜찮겠소? 이곳은 그대의 무덤으로 쓰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장소인데. 원한다면 불구로 만들지언정 죽이지는 않겠소. 아니면 시체를 다른 곳에 묻어주던가.”
  4547.  
  4548. “난 자신감이 과하지만 넌 오만하군. 아니면 미쳤던가.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느냐?”
  4549.  
  4550. 위지호연의 주변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쏟아지던 눈발은 위지호연이 발하는 투기에 내리는 즉시 증발하고 있었다.
  4551.  
  4552. “너는 운이 없었다. 광천마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았어도 그를 찾아가 싸웠을 텐데… 원망하고 싶거든 마음대로 쏘다니는 광천마를 원망하여라.”
  4553.  
  4554. “오만하군. 너무 오만해…”
  4555.  
  4556. 백무선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가 발하는 투기는 피처럼 붉은 색이었다. 전신에 붉은 투기를 두른 백무선의 두 눈은 투기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혈천마 백무선의 소문은 오히려 저평가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확실하게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 다음 경지를 엿보고 있는 괴물이었다.
  4557.  
  4558.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왜 굳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혈천맹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4559.  
  4560. “이해를 못하는 군. 말하지 않았느냐. 운이 없기 때문이라고.”
  4561.  
  4562. “단지 그것만으로 이 먼 북쪽의 땅까지 와서 본좌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말인가?”
  4563.  
  4564. “너를 쓰러트린다면 내 소문은 더욱 커지겠지.”
  4565.  
  4566.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4567.  
  4568. “그렇다면 그 녀석도 내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였고, 얼마나 강해졌는지. 괜히 기가 죽어 찌그러지지 않으면 좋겠군. 그 녀석은 자기비하가 심하거든.”
  4569.  
  4570.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4571.  
  4572. “네가 이해할 필요는 없어. 아… 그래. 네가 나에게 질문한 것처럼, 나도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데. 대답해 줄 수 있을까?”
  4573.  
  4574.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4575.  
  4576. “숟가락을 어느 손으로 드느냐?”
  4577.  
  4578. 위지호연이 손을 들어 올렸다. 흐느적거리던 흑룡포가 크게 부풀더니 위지호연의 손을 감쌌다.
  4579.  
  4580. “말한다면 그 손은 내버려 두마.”
  4581.  
  4582. 환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백무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4583.  
  4584. 갑작스러운 혈천마와 소천마의 격돌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났다.
  4585.  
  4586. 그날, 혈천마 백무선은 왼 팔이 잘려 불구가 되었다.
  4587.  
  4588.  
  4589.  
  4590. ======================================
  4591. < 드리무어-3 >
  4592.  
  4593.  
  4594.  
  4595. 혈천마 백우선이 왼 팔이 잘려 불구가 되었을 때.
  4596.  
  4597. 이성민은 드리무어에 도착했다. 브레던이 소림의 영향을 받아 전체적으로 불가의 분위기를 가진 도시였다면, 드리무어는 화려했다. 브레던처럼 동양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풍기지는 않았으나 동양풍의 건물과 의복을 입은 사람들은 많았다.
  4598.  
  4599. 그것은 드리무어에 터를 잡은 화산파의 성격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각 차원에서 소환된 각 문파의 무인들이 제각각 모여 에리아에서 새로운 문파를 만들었다고는 해도. 중원에서 있을 적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게 될 리가 없다. 이곳은 중원이 아니며, 같은 이름을 가진 문파의 동문이라 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문파인 이상 그 성격과 분위기에 미미하게나마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4600.  
  4601. 그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구파일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소림의 경우에는 변화없이 공통된 전통을 추슬러 명맥을 이어왔지만, 화산은 아니었다. 드리무어에 있는 화산의 본파는 도교의 방향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많이 엷었다. 각 차원에서 모인 화산의 검법은 에리아에서 세운 수백 년의 역사를 통해 그 정수만을 모아 새롭고 강인하게 정립하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에리아에 있는 화산파는 이름만 화산파이지 중원의 화산파와는 다른 문파라고 봐야만 했다.
  4602.  
  4603. 그것은 화산으로 향하면서 두드러졌다. 물론 이성민은 중원의 화산을 모른다. 하지만 화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매화가 수놓아진 무복을 입은 도사들이, 도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하여도 고요한 정적에 차있던 소림에서 생활했기에 더욱 진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4604.  
  4605. 도복을 입은 청년 도사가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더듬으며 거리를 걷는다. 힐긋 본 노상 주점에서는 한 무리의 도사들이 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소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들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4606.  
  4607. “그 미친 늙은이 말이야. 아직도 산문 앞에 서있나?”
  4608.  
  4609. 주점 앞을 지나치던 이성민의 귓가에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4610.  
  4611. “아까 내려오기 전에 보니 아직 있던데?”
  4612.  
  4613. “말귀를 못 알아먹는 늙은이야. 화산이 동네 삼류 문파도 아니고, 대뜸 찾아와서 비무를 해달라고 하는 것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나?”
  4614.  
  4615. 낄낄거리는 비웃음이 섞인 대화였다. 이성민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도복을 입은 젊은 무리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웃어대고 있었다. 이성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술잔을 들던 청년 하나가 멈칫하고서 이성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뒤, 청년이 몸을 일으키더니 포권을 취했다.
  4616.  
  4617. “화산의 우풍이라고 합니다만. 대협께서는 왜 저희를 보고 계신 겁니까?”
  4618.  
  4619. 대협이란다. 이성민은 그런 호칭을 조금은 어색하게 느꼈다. 이성민의 나이는 이제 22살이었고, 이성민을 대협이라 부르는 청년 도사는 이성민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잠깐 주저하다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4620.  
  4621.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화산으로 향하는 길인데, 우연찮게 도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향해 버렸습니다.”
  4622.  
  4623. “아… 그러십니까. 혹 괜찮으시다면, 화산에 무슨 볼 일로 가는 것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4624.  
  4625. 그렇게 묻는 청년 도사의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이 어려 있었다. 이성민은 아직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반박귀진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심, 기, 체의 일그러짐을 잡지도 못했다. 하지만 무공이 안정되면서, 이성민의 기도는 잘 다듬어져 고수의 풍모를 내비치게 되었다. 아무리 화산파의 도사라고 하여도 쉽사리 대할 수 없는 섯이 당연했다.
  4626.  
  4627. “…저는 소림에서의 심부름을 받았습니다.”
  4628.  
  4629. “소림!”
  4630.  
  4631. 이성민의 대답에 우풍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것은 우풍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화산파의 도사들도 눈을 크게 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숨길 일은 아니다. 오히려 불영대사가 이성민에게 서찰을 맡기면서 미리 언질을 주었었다. 만약 화산에 들기 전에 귀찮은 시빗거리가 붙는다면, 무력을 보이기 이전에 소림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라고.
  4632.  
  4633. “대협께서는 소림의 속가제자이신 겁니까?”
  4634.  
  4635. 이성민은 승복을 입었으나 머리를 밀지는 않았다. 긴장한 얼굴로 묻는 우풍의 질문에,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4636.  
  4637. “소림의 제자는 아닙니다. 다만 방장이신 불영대사에게서 조금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4638.  
  4639. “불영대사와…”
  4640.  
  4641. 우풍이 신음을 흘린다. 그는 주변의 도사들과 시선을 나누더니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4642.  
  4643. “귀한 손님이셨군요.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화산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4644.  
  4645. “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4646.  
  4647. “아니, 아닙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되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4648.  
  4649. 우풍과 다른 도사들은 이성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성민은 그들과 함께 거리를 가로질러 화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경공을 써서 이동한 탓에 드리무어를 가로지르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650.  
  4651. 본래는 화산에 들르기 전에 데니르를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화산에 먼저 서찰을 전해두고서 여유를 잡고 데니르를 찾아갈 것이 나아 보였다.
  4652.  
  4653. “…그… 아까 전에 이야기하던. 산문 앞의 늙은이라는 것은 누구입니까?”
  4654.  
  4655. “아… 그걸 들으셨군요. 대협께서는 ‘검귀 독비준’을 알고 계십니까?”
  4656.  
  4657. 이성민의 물음에 우풍이 대답했다. 화산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도착해, 경공을 멈추고 걸어 올라가던 도중이었다.
  4658.  
  4659. “비무행을 벌이고 있는 검수 아닙니까?”
  4660.  
  4661. “맞습니다. 나흘 전에 그 독비준이 화산파를 찾아왔습니다. 화산의 검을 보고 싶다며, 대뜸 장문인에게 비무를 청했지요. 하지만 화산이 흔해빠진 중소방파도 아니고, 장문인도 바쁘신 분이지 않습니까.”
  4662.  
  4663. 우풍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4664.  
  4665.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인 것은 아닙니다. 야인野人들 중에서 자신의 무공에 자신을 가진 이들이 비무행을 다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화산파도 몇 번인가 그들의 방문을 받아왔었지요. 청한 비무를 항상 받아주었다가는 문파의 위신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4666.  
  4667. 그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이성민이 떠올린 것은 검귀 독비준에 대한 기억이었다. 검귀의 비무행은 워낙 유명하여 이성민의 기억에도 제법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성민의 기억 중에서 검귀가 화산파 장문인과 비무를 벌였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결과가 어찌 되었건 크게 소문이 났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검귀가 화산파 장문인과 비무를 위해 찾아갔겠지만, 끝내 비무를 하지는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
  4668.  
  4669. 화산은 브레던의 숭산보다는 산세가 험했다. 높은 계단을 오르고 나니 커다란 산문이 보였다. 이성민은 산문 앞에 서있는 백발의 노인을 보고 움찔 굳어 버렸다.
  4670.  
  4671. “아직도 있군.”
  4672.  
  4673. 우풍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귀 독비준. 이성민은 독비준의 등을 보면서 잠깐 동안 입술을 머뭇거렸다.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걸까? 이성민이 주저하는 동안 우풍이 성큼거리며 산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독비준이 빙글 몸을 돌려 우풍을 보았고, 그 뒤에는 이성민을 돌아 보았다.
  4674.  
  4675. “음.”
  4676.  
  4677. 독비준은 므쉬의 산에서 보았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는 제대로 씻지 못해 지저분했는데, 지금은 긴 백발을 잘 묶고 수염을 정돈하여 깔끔한 모습이라 므쉬의 산 때보다 젊어 보였다. 이성민은 독비준을 보고서 내심 감탄했다. 완벽하게 갈무리 된 기도는 반박귀진의 증명이었고, 그럼에도 칼날처럼 예리한 안광이 독비준이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검수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678.  
  4679. “너는…”
  4680.  
  4681. 독비준의 입이 열렸다. 그는 다른 도사들의 중심에 서있는 이성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4682.  
  4683. “그때. 므쉬의 산에 있던 꼬마 아니냐?”
  4684.  
  4685. 독비준의 말에 이성민은 크게 놀랐다. 당시의 독비준은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여서 이성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독비준을 만난 것은 7년 전이다. 몸도 장성하였고 목소리도 변해서, 므쉬의 산에서 가지고 있던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4686.  
  4687. “절 기억하시는 겁니까?”
  4688.  
  4689. “기억하다마다. 그 산에서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지. 그처럼 힘든 나날은 내 기억에서 존재하지 않았었으니.”
  4690.  
  4691. “하지만 어떻게 저를…? 그때의 독비준님은 앞을 보지 못하셨을 텐데…”
  4692.  
  4693. “네가 풍기던 내공을 기억하고 있단다.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구나.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4694.  
  4695. 독비준이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탄성을 흘렸다. 독비준과 이성민이 이야기를 나누자 우풍과 다른 도사들이 식겁하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독비준은 이성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눈짓으로 닫힌 산문을 힐긋거렸다.
  4696.  
  4697. “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냐?”
  4698.  
  4699. “아… 예.”
  4700.  
  4701. “내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다. 나 역시 볼 일이 있어서 이곳에 있는 것이지만, 너와는 다른 볼 일이니 말이다.”
  4702.  
  4703. 독비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머뭇거리던 이성민을 향해 등 돌린 독비준이 다시 말했다.
  4704.  
  4705. “들어가거라.”
  4706.  
  4707. 독비준의 말이 이성민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이성민은 독비준을 내버려 두고 우풍과 다른 도사들과 함께 화산의 산문으로 들어갔다. 산문이 닫히자 우풍이 재빨리 이성민에게 다가와 물었다.
  4708.  
  4709. “검귀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4710.  
  4711. “예전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4712.  
  4713. “크흠. 그렇군요.”
  4714.  
  4715. 우풍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우풍의 그런 표정을 무시하고 화산의 건물을 둘러 보았다. 거리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화산 본파의 분위기는 정적이었던 소림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도가와 불가의 차이라기 보다는 화산파가 에리아에서 해낸 독특한 적응 때문이었다.
  4716.  
  4717. 소림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성민은 곧바로 화산파 장문인과 독대하게 되었다. 화산의 장문인인 유풍검선流風劍仙 성하 도인은 구파일방에서도 손에 꼽히는 검의 고수라 이성민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한 성하 도인은 인상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4718.  
  4719. “지학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거늘.”
  4720.  
  4721. 이성민과 마주 앉은 성하 도인이 중얼거렸다. 본래라면 지학이 왔을 것이다. 단지 이성민이 드리무어에 볼 일이 있어서 대신 왔을 뿐이다. 이성민이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성하 도인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4722.  
  4723. “아. 그것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소림과 화산이 제법 가까이 위치해 있다고는 하여도 왕복하는 것에는 한 달은 족히 걸릴 테니까. 사실 사람이 누가 오든 큰 상관은 없는 것 아닌가. 서찰만 받으면 되는 것을.”
  4724.  
  4725. 성하 도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에게서 서찰을 건네 받았다. 성하 도인은 서찰의 봉인을 뜯으면서 이성민을 힐긋 보았다.
  4726.  
  4727. “자네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군. 하지만 소림의 제자는 아닌 것 같아.”
  4728.  
  4729. “예. 그렇습니다.”
  4730.  
  4731. “하지만 소림과 연관은 있겠지. 끌끌! 소림은 복이 많아. 지학 같은 절세기재도 품고 있으면서 말이지. 혹시나 해서 묻는다, 자네는 이 서찰의 내용을 읽어 보았나?”
  4732.  
  4733. “읽지 않았습니다.”
  4734.  
  4735. “사실 읽었다고 해도 상관은 없네. 그리 비밀스러운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거든. 현 무림맹주인 무당의 명월자가 맹주 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하여, 차기 맹주가 뽑힐 때까지 불영대사에게 임시로 맹주 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에 대한 답변이 들어 있을 뿐이야.”
  4736.  
  4737. 그 말에 이성민은 납득하여 머리를 끄덕거렸다.
  4738.  
  4739. “예상대로로군. 불영대사가 거절했어.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
  4740.  
  4741. 이성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성민이 알고 있는 불영대사라면 그런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하 도인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서찰을 삼매진화로 태워버렸다.
  4742.  
  4743. “자네와 함께 온 젊은 도사들에게 듣자 하니. 자네는 산문에 있는 검귀와 구면이라 하던데.”
  4744.  
  4745. “아… 예. 우연찮게 인연이 있었습니다.”
  4746.  
  4747. “귀찮은 노릇이야. 내가 검귀와의 싸움을 왜 피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4748.  
  4749. 성하 도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팔짱을 꼈다. 이성민은 우풍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4750.  
  4751. “비무 요구를 받아들이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4752.  
  4753.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야.”
  4754.  
  4755. 성하 도인은 손에 묻은 재를 털어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4756.  
  4757. “소문일 뿐이지만, 검귀는 지저분해.”
  4758.  
  4759. “…예?”
  4760.  
  4761. “아니. 지저분하다기 보다는…”
  4762.  
  4763. 성하 도인이 작게 혀를 찼다.
  4764.  
  4765. “위험하지.”
  4766.  
  4767. ======================================
  4768. < 드리무어-4 >
  4769.  
  4770.  
  4771.  
  4772. 지저분하다. 위험하다. 이성민은 성하 도인의 말을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저 두 가지의 말에 섞인 뜻이 지칭하는 대상은 검귀 독비준이다. 하지만 이성민이 아는 검귀는 저런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4773.  
  4774.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4775.  
  4776. “자네는 검귀와 인연이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깊지는 않은 것 같군.”
  4777.  
  4778. 성하 도인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맞는 말이다. 이성민과 독비준의 인연은 므쉬의 산에서 몇 번 만났던 것이 고작이다. 백소고나 다른 수행자들은 독비준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친분을 쌓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4779.  
  4780. “자네는 검귀에 대해 모르는 듯 해.”
  4781.  
  4782. 그 말에 이성민은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다.
  4783.  
  4784. “검귀 독비준은 최근 1년 동안 상대를 가리지 않고 비무행을 다니고 있지. 여태까지 검귀는 구파일방이 아닌 중소방파의 문주나 세력 없이 홀로 떠도는 야인, 혹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용병들을 상대로 비무를 벌여 왔어. 그리고 모두 승리했지.”
  4785.  
  4786. “…그건… 알고 있습니다.”
  4787.  
  4788. 독비준에 대한 정보는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했다. 하지만 이성민이 구입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독비준의 ‘위치’에 관한 정보였었다.
  4789.  
  4790. “이 세상에서 갑작스러운 고수가 출몰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닐세. 에리아는 각 차원에서 이유 불문하고 사람들을 불러 오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강자에게 무감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신경 쓰지.”
  4791.  
  4792. “…무슨… 말입니까?”
  4793.  
  4794. “독비준이 화산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개방을 통해 독비준에 대해 알아보았네. 후후! 이름없는 야인과 비무하지 않는다고? 문파의 위신을 위해? 그건 겉으로 말하는 핑계일 뿐이야. 검귀 독비준이라면 초절의 경지에 들어선 고수. 나 역시 검을 쥐어 휘두르는 자로서 강자와의 비무를 즐기지 않을 리가 없잖나. 그럼에도 내가 독비준과 비무하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일세.”
  4795.  
  4796. 지저분하다. 위험하다. 성하 도인이 했던 말이 이성민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성민을 향해 청하 도인이 입을 열었다.
  4797.  
  4798. “그는 사법邪法을 사용하고 있어.”
  4799.  
  4800. 성하 도인이 말했다.
  4801.  
  4802. “아. 물론 사법을 쓰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네. 나는 마법과 사법을 쓰는 자들을 부정하지 않아. 나는 40년 전에 이 세상에 소환되었는데… 후후!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이해했어. 하지만?
  4803.  
  4804.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 사법을 쓰는 자와는 비무하고 싶지 않아. 그들의 수법을 정정당당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
  4805.  
  4806. 성하 도인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본래의 심부름이었던 불영 대사의 서찰을 전달하는 것은 끝났다. 성하 도인의 방을 나오고서 이성민은 산문으로 향했다. 화산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외객인 이성민이 마음대로 문파를 둘러보는 것은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4807.  
  4808. 산문으로 향하면서, 이성민은 성하 도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검귀는 사법을 쓴다. 그 수법이 지저분하고 위험하여 비무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정정당당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4809.  
  4810.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비록 이 세계에서 40년을 살았다고는 해도, 성하 도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의 상당수를 중원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화산파의 제자로서 정통으로 무공을 익혔을 터이니, 에리아에서 40년을 살아오면서도 사법과 마법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살아 온 세계과 본질과 가치관을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성민도 잘 알고 있었다.
  4811.  
  4812. “볼 일은 끝났나?”
  4813.  
  4814. 산문을 나오자 검귀가 말을 걸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서 화산의 산문을 노려 보고 있었다. 이성민은 두 눈을 부릅 뜬 검귀의 시선을 조금 어색하게 느끼기는 하였으나, 이윽고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4815.  
  4816. “예.”
  4817.  
  4818. “그래.”
  4819.  
  4820. “…성하 도인을 만났습니다.”
  4821.  
  4822.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검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성민을 보았다. 설마 이성민이 화산의 장문인인 성하 도인과 만났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4823.  
  4824. “…성하 도인과… 크크! 내가 그렇게 만나달라고 했을 때에는 나오지 않더니.”
  4825.  
  4826. “이유를… 들었습니다.”
  4827.  
  4828. 말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검귀가 사법을 익혔다고? 성하 도인에게 그렇게 듣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성민이 보는 검귀는 검밖에 모르는 검수였고, 그것은 전생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4829.  
  4830. 진정 그런가?
  4831.  
  4832. 이성민은 검귀가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전생의 기억이라고 해 봐야 흘러 들은 소문일 뿐. ‘검귀’라는 별호를 가진 무인에 대해 깊이 알아 본 적은 없다. 사실 이성민이 검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검귀와 묵섬광을 비롯한 고수들이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처음이었다.
  4833.  
  4834. “…독비준님이 사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4835.  
  4836. 이성민의 말에 독비준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그는 잠시 동안 이성민의 얼굴을 보다가 하늘을 보았다. 뒷짐을 지고서 높은 하늘을 보던 독비준이 입을 열었다.
  4837.  
  4838. “그런가.”
  4839.  
  4840. 독비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독비준이 사법을 익혔다는 것인가. 이성민은 조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질문해 보았다.
  4841.  
  4842. “무슨 사법을 익히신 겁니까?”
  4843.  
  4844. 독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 볼 뿐이었다.
  4845.  
  4846. “독비준님은 산에서 검을 익히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사법을…”
  4847.  
  4848. “한계를 맞닥트린 적이 있나?”
  4849.  
  4850. 독비준이 물었다.
  4851.  
  4852. “아무리 노력하고 발악해 보아도 넘을 수 없는 벽의 존재를 느낀 적이 있는가? 그 벽을 결코 무너트릴 수도 넘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음을 자각해 본 적이 있는가?”
  4853.  
  4854. “있…”
  4855.  
  4856. 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비준은 이성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4857.  
  4858. “자네는 벽을 논하기에는 너무 젊지.”
  4859.  
  4860. 이성민의 입이 닫혔다.
  4861.  
  4862. “늙어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하루가 지나갈수록 몸이 무거워짐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내 정신은 전성기 때를 기억하고 있는데, 내 육체가 늙어가며 그를 따르지 못 해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나?”
  4863.  
  4864.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독비준의 물음은 이성민이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성질의 질문이었다.
  4865.  
  4866.  
  4867.  
  4868. “내 나이는 어느새 육십이 넘어가고 있지. 내 육체는 이미 전성기의 기량을 잃어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약해지고 있어. 므쉬의 산에서 한 고행으로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었지. 그… 절망감을. 자네는 알고 있나?”
  4869.  
  4870. “…모릅니다.”
  4871.  
  4872. “사법이라. 그래. 사법이지. 내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것에 의존하였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 맞닥트린 벽을 넘을 수도 부술 수도 피해갈 수도 없어. 내 육체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늙어가지. 내공으로 지탱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네. 그러나. 그러나…”
  4873.  
  4874. 검귀가 두 눈을 감았다.
  4875.  
  4876. “더 하고 싶다고. 그런… 간절함을 아는가?”
  4877.  
  4878. 그를 끝으로 독비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침묵하는 독비준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화산을 내려왔다. 독비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성민은 독비준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4879.  
  4880. 이성민 역시 그랬다. 맞닥트린 벽을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행을 포기했었다. 그래서 마갑에 의존하려 했다. 상승 무공보다는 익숙하고 쉬운 기본기에 매달렸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다.
  4881.  
  4882. 하지만 이성민은 젊다. 그는 아직 스물 둘의 나이였고, 육체는 지금이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성민과는 다르게 독비준은 늙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심후한 내공으로도 육체의 노화를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반로환동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무공은 늘지 않는다. 아무리 무공에서 마음의 공부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육체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4883.  
  4884. 세상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 중 반로환동을 해낸 이가 몇이나 될까. 당장 이성민이 보았던 불영 대사나 성하 도인도 초절의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었지만, 반로환동은 하지 못했다. 그들의 육체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 노쇠해 가고 있다.
  4885.  
  4886. 검귀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단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악착같은 집념으로 억지로 검을 휘두르고 무공이 아닌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벽을 넘고자 하는 것뿐이다.
  4887.  
  4888. 비난할 수가 없다.
  4889.  
  4890. 이성민도 똑같았었으니까.
  4891.  
  4892. 다만 가진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성민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화산을 내려왔다. 이성민은 성하 도인의 기분도, 검귀의 기분도 이해하고 옳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둘 중 누가 옳음을 가를 수가 없었다. 결국은 가치관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4893.  
  4894. 도시로 내려 온 이성민은 기억을 떠올렸다. 므쉬가 새겨 준 시간의 신, 데니르에 대한 기억은 떠올리려고 한 순간 명확하게 떠올랐다.
  4895.  
  4896. 에리아에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신들은 그들을 모시는 신전이나 직접 강림한 성지에 존재하며, 그들의 존재는 딱히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다. 당장 므쉬만 하더라도 ‘므쉬의 산’이라는 그녀의 성지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성민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4897.  
  4898. 하지만 데니르는 달랐다. 전생의 기억을 뒤져 보아도 ‘시간의 신’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신. 그런 존재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민은 두근거림과 긴장을 느꼈다.
  4899.  
  4900. 떠오르는 기억에 따라 도착했을 때. 경공을 펼쳤음에도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고서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빤히 보았다. 도심지를 떠나 교외에 위치한 자그마한 시골집. 이곳이 므쉬가 넣어 준 기억에 해당되는 장소였다.
  4901.  
  4902. ‘이곳에 데니르가 있다는 건가?’
  4903.  
  4904. 이성민은 의아함에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문을 향해 다가갔다. 기억은 확실하였기 때문에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향해 다가갔다.
  4905.  
  4906. “응?”
  4907.  
  4908. 문고리를 잡으려 한 순간이었다. 이성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고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손을 쥐려는 순간에 문고리는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이성민은 문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4909.  
  4910. 이성민은 조금 당황했으면서도 다시 문고리를 향해 다가갔다.
  4911.  
  4912. 또였다.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에 문고리는 그곳에 없었다. 다시 이성민은 문고리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똑같은 것이 반복된다.
  4913.  
  4914. “뭐… 뭐야?”
  4915.  
  4916. 이성민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닫혀 있는 문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4917.  
  4918. [돌아가라.]
  4919.  
  4920. 이성민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성별을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4921.  
  4922. “누… 누구십니까?”
  4923.  
  4924. [돌아가라.]
  4925.  
  4926. 질문에도 목소리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성민은 목소리의 주인이 데니르라고 확신했다. 이런 이해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신밖에 없을 것이다.
  4927.  
  4928.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드리무어로 가라. 그곳에 있는 시간의 신 데니르에게 므쉬가 보내서 왔다고 말을 하여라.
  4929.  
  4930. 므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성민은 즉시 입을 열어 말했다.
  4931.  
  4932. “므쉬가 보내서 왔습니다.”
  4933.  
  4934. […]
  4935.  
  4936. 그 말에 데니르가 침묵했다. 잠시 뒤, 데니르가 이성민의 머리에 대고 중얼거렸다.
  4937.  
  4938. [빌어먹을.]
  4939.  
  4940. 문이 열렸다.
  4941.  
  4942. ======================================
  4943. < 드리무어-5 >
  4944.  
  4945.  
  4946.  
  4947. 열린 문의 안쪽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서있었다. 아니. 사실 이성민은 그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찌 보면 남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여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4948.  
  4949. 이성민은 잠깐 동안 그, 혹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4950.  
  4951. “…데니르?”
  4952.  
  4953. “맞아.”
  4954.  
  4955. 데니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외모로 성별을 알 수가 없듯이, 데니르의 목소리 역시 성별을 알 수가 없었다. 므쉬가 그랬던 것처럼 데니르도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왜 ‘신’이라는 존재들이 저런 미성숙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이성민은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의문이 아니었다.
  4956.  
  4957. “빌어먹을 므쉬. 왜 나한테 이런 귀찮은 녀석을 떠넘긴 거야?”
  4958.  
  4959. 데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홱하고 몸을 돌렸다. 이성민이 데니르의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데니르가 크게 숨을 내뱉더니 다시 이성민을 돌아 보았다.
  4960.  
  4961. “너는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냐?”
  4962.  
  4963. “…예?”
  4964.  
  4965.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4966.  
  4967.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이성민은 급히 데니르의 뒤에 따라 붙었다. 이성민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혔다. 데니르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자그마한 시골집의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고, 얼마 걷지 않아 넓지 않은 거실에 도달했다. 이성민은 데니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깨 너머에서 찰랑거리는 짧은 단발머리는 소년의 것 같기도 하였고 소녀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중에, 데니르는 빙글 몸을 돌렸다. 데니르는 가까운 곳에 있는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
  4968.  
  4969. “나에게 무엇을 바라지?”
  4970.  
  4971. 데니르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고,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이성민은 잠깐 동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성민을 향해 데니르가 다시 말했다.
  4972.  
  4973. “인사차로 온 것은 아닐 테고. 나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이곳에 온 것이냐?”
  4974.  
  4975.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 봐야 뭐라고 대답할 말이…”
  4976.  
  4977. “흠. 그것도 그렇겠군.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4978.  
  4979. 지칭이 바뀐다. 이성민이 데니르에게 바라는 것에서, 이성민 본인이 바라는 것으로. 하지만 이성민은 그 질문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성민의 침묵에 데니르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4980.  
  4981. “너는 우유부단하군.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인가. 뭐, 좋아. 신은 자비로워야지. 이런 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대화를 하도록 할까.”
  4982.  
  4983.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리를 꼬았다. 대화를 하자고는 해도 이제 처음 만난 것이고, 신을 상대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잠깐 동안 입술을 다물고 있던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4984.  
  4985. “당신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4986.  
  4987. 진지하게 한 질문은 아니었다. 단지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다. 그 질문에 데니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4988.  
  4989. “이상한 것을 신경 쓰는 군. 하긴. 인간은 그런 법이지… 신에게 성별은 존재하지 않아. 조금의 취향이 있을 뿐이지. 므쉬가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가진 고약한 취향일 뿐이야. 시련과 고행을 주관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신. 고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4990.  
  4991.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데니르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멍하니 머리를 끄덕거리는 이성민을 향해 데니르가 말을 계속했다.
  4992.  
  4993. “나 역시 마찬가지고. 내가 취한 모습에 성별은 존재하지 않아. 남자로 여기고 싶다면 남자로 여기고, 여자고 여기고 싶다면 여자로 여기어라.”
  4994.  
  4995. “…어린 모습을 취하는 것도 단순한 취향인가?”
  4996.  
  4997. “아니. 이건 취향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
  4998.  
  4999. 데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시가를 꺼냈다. 중성적인 모습을 한 어린 아이가 제 손가락보다 훨씬 두꺼운 시가를 무는 모습은 위화감이 가득했다.
  5000.  
  5001. “너는 시간을 거슬렀군.”
  5002.  
  5003. 데니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의 뺨이 움찔 떨린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신인 데니르가 이성민이 인과율이 비틀어졌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므쉬도 눈치챈 것을 데니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5004.  
  5005. “인과율이 비틀어져 있어. 뭐.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네 경우는 독특하군. 시간을 거슬렀다. 죽음이라는 결과에서 되돌아 왔다… 후후! 아주 재밌어.”
  5006.  
  5007. 데니르가 다리를 휘저으면서 웃었다. 이성민은 그런 데니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5008.  
  5009.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의 일부를 지워내기는 했지만 전부 지워지지는 않았습니다.”
  5010.  
  5011. “알아. 너를 어여삐 여기는 존재의 가호는 필멸자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일부의 가호를 지워냈다고? 후후. 그것은 지워낸 것이 아니라 지울 수 있게 해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니까.”
  5012.  
  5013. 데니르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한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말했다.
  5014.  
  5015. “당신은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5016.  
  5017. “네 존재는 이질적이다.”
  5018.  
  5019. 데니르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5020.  
  5021. “죽음에서 돌아 온 너는 죽기 이전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라는 존재가 없다면 이 세상은 네가 가지고 있는 기억대로 흘러갈 거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해. 하지만 ‘너’라는 존재 자체가 변수가 된다.”
  5022.  
  5023. “…무슨… 말입니까?”
  5024.  
  5025. “너는 이전 생과 똑같이 살았나?”
  5026.  
  5027. 데니르가 물었다.
  5028.  
  5029. “그 어떤 차이도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나? 전생에서 보낸 매일과 조금의 다름도 없는 매일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나? 전생의 매일과 똑같은 시간에 잠들고, 밥 먹고, 마시고, 싸고, 말하고, 만나고. 그렇게 했나?”
  5030.  
  5031.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5032.  
  5033. “그래. 그래서 네 존재가 변수가 되어버린 거야. 너는 네 전생과 다른 매일을 보냈기 때문에, 네 존재는 이 세상의 흐름에 대한 변수가 된다.”
  5034.  
  5035.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5036.  
  5037. “자그마한 나비의 날갯짓도 먼 곳에서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는 법이지. 실제로 지금의 세상은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변했을 거야. 아닌가?”
  5038.  
  5039. 그 말에 이성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짚이는 일이 있었다.
  5040.  
  5041.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전생에서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하지만 ‘이성민’이 그 던전에 있었기 때문에, 로이드는 행방불명되지 않고서 생환했다.
  5042.  
  5043. 소천마 위지호연에 대한 소문이 다르다. 그녀는 전생보다 빠르게 위명을 떨쳐갔고, 남자가 아닌 여자로서 알려지고 있었다.
  5044.  
  5045.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을 제외하고서라도 몇 십 몇 백 가지의 일이 이성민의 머리에 떠올린다. 전생과 똑같은 매일을 보냈는가? 그럴 리가 없다. 전생에서 살아 온 매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5046.  
  5047. 그때와 똑같은 시간에 잠들었냐고? 먹고, 마시고, 싸고, 말하고, 만나고.
  5048.  
  5049. 불가능하다. 전생의 매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성민은 전생의 이성민과 다르다. 다른 무공을 익혔고,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만남을 가져왔다.
  5050.  
  5051. “너라는 존재가 변수가 되어 이 세상을 전생과 바꾸어 가고 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5052.  
  5053. “…모르겠…”
  5054.  
  5055. “네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을 헝?클고 있는 거야.”
  5056.  
  5057. 데니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5058.  
  5059. “나는 시간의 신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흐름이지. 네 존재는 이 세상을 흘러야 할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 너를 가호하는 존재가 궁금한가? 내가 그를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신’으로 모셔지는 우리는 절대로 그에 대해 말할 수가 없어.”
  5060.  
  5061. “어째서…?”
  5062.  
  5063. “그것은 반드시 함구해야 할 ‘종언’이기 때문이지. 언급한 순간 우리는 소멸을 각오해야 해. 므쉬처럼 자신의 성지를 가지고 신도를 가지며 신앙되는 신이라면 ‘종언의 사도’와 공멸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불가능해. 나는 성지도 갖지 못했고 신도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5064.  
  5065. 종언. 종언의 사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이성민은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므쉬의 혼잣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김종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한기를 느껴 본 적이 있었다.
  5066.  
  5067. “하하… 봐라. 가벼운 언급 정도임에도 사도의 기척이 다가오는 군. 더 이상 말할 생각은 없으니 물러서 주시길.”
  5068.  
  5069. 데니르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싸늘함이 멀어진다. 이성민은 막혔던 호흡을 터트리며 목을 어루만졌다.
  5070.  
  5071. “바, 방금 그건 대체?”
  5072.  
  5073. “사도가 다가오려 했을 뿐이다. 더 이상 말해줄 수는 없어.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기는 한 모양이군.”
  5074.  
  5075.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5076.  
  5077. “나는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는 없다. 모든 신도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어. 우리 역시 필멸의 굴레를 벗지 못한, 종언의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니까.”
  5078.  
  5079. “그렇다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5080.  
  5081. “필멸의 굴레를 벗은 존재를 찾아라.”
  5082.  
  5083. “그게 누구인지 말은 해 줘야 알지 않겠습니까…!”
  5084.  
  5085. “엔비루스.”
  5086.  
  5087. 이성민의 낮은 외침에 데니르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5088.  
  5089. “워낙 떠돌아다니는 녀석이니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그 녀석이라면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거야. 그 녀석은 너와는 다른 의미로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니까.”
  5090.  
  5091. 엔비루스, 엔비루스… 이성민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엔비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는 알지 못했다.
  5092.  
  5093. “그래서. 이제 슬슬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할까. 너는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거냐. 므쉬는 왜 너를 이곳에 보낸 것이지?”
  5094.  
  5095.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므쉬가 말하기를, 죽음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5096.  
  5097. “그래. 그렇군. 그래서 그 빌어먹을 므쉬가 너를 나에게 보낸 것이었어.”
  5098.  
  5099.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성민을 보던 데니르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5100.  
  5101. “하지만 안 돼.”
  5102.  
  5103. “…예?”
  5104.  
  5105.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너에게 나의 ‘시련’을 줄 수가 없어.”
  5106.  
  5107. “잠깐… 시련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시련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5108.  
  5109.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너는 감당할 수 없을 거다. 미쳐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충고이니 새겨듣도록 해.”
  5110.  
  5111. “나는 므쉬의 산에서의 시련도 견뎌냈습니다. 고통에는 익숙…”
  5112.  
  5113. “이건 네가 알고 있는 고통과는 달라. 므쉬의 고행과 시련과 금제는 굉장히 상냥하지. 므쉬 본인이 시련과 고행을 주관하는 신이면서도 말이야. 결국 금제라는 것은 너희가 선택하는 것이고,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잖아.”
  5114.  
  5115.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쿡쿡 웃었다.
  5116.  
  5117. “하지만 내 시련은 달라. 내 시련은 므쉬의 것과는 다르게 ‘반드시’ 무언가를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디까지나 너 자신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이지. 그러면서도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지루해. 여태까지 나를 만나고, 나에게서 시련을 받아낸 존재는 열 명이다. 그리고 그 중 셋만이 시련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냈지.”
  5118.  
  5119. “…나머지는?”
  5120.  
  5121. “모두 죽었다. 아. 시련이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야. 그들 스스로 포기해서 자살한 것뿐이거든. 내 시련에 도전한 열 명 중에서 너보다 못한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열정과 노력과 근성과 독기를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셋만이 시련을 극복했어.”
  5122.  
  5123.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5124.  
  5125. “우선 조금 머리라도 식히도록 해라. 언제라도 찾아와 시련을 요구한다면… 그래. 네가 자살하고 싶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시련을 주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5126.  
  5127. “머리를 식히라니…”
  5128.  
  5129. “잠이나 자고 오란 말이다.”
  5130.  
  5131. 데니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5132.  
  5133. “아. 그래도 이곳에서 자는 것은 안 돼. 여긴 내 집이니까.”
  5134.  
  5135. 집 밖으로 꺼지란 말이었다.
  5136.  
  5137. ======================================
  5138. < 검귀 >
  5139.  
  5140.  
  5141.  
  5142. 데니르와의 대화를 통해 이성민은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종언과 종언의 사도. 말하면 내가 죽는다. 김종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성민은 의아함을 느꼈었다. 대체 누가 김종현을 죽이려 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므쉬가 했던 혼잣말 또한 이성민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5143.  
  5144.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므쉬와 김종현을 위협했던 것은 ‘종언의 사도’다. 그렇다면 종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데니르와의 만남은 이성민에게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다.
  5145.  
  5146. 엔비루스.
  5147.  
  5148.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성민과는 다르게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 에리아가 넓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름 하나 가지고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에레브리사의 회원인 이성민은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정보를 접하는 것이 가능했다.
  5149.  
  5150. ‘나로 인해 흐름이 바뀌고 있다고…’
  5151.  
  5152. 교외를 떠나면서, 이성민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것을… 크게 의식해 본 적은 없다. 느낀 적은 있되 심각한 일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성민은 회귀하고서 자신이 살아 온, 14살부터 새로이 시작한 8년의 세월을 떠올려 보았다. 현재의 이성민은 전생의 이성민과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야만 했다.
  5153.  
  5154. ‘나라는 존재가… 흐름을 바꿀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5155.  
  5156.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5157.  
  5158. 이성민은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면서 가까운 여관 방을 잡았다. 생각은 데니르가 말한 ‘시련’으로 이어졌다. 데니르의 시련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데니르도, 므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데니르가 축객령만 내리지 않았어도 그에 대해서 진득하게 물어보았을 텐데. 그것이 크게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기에는 늦은 일이었다.
  5159.  
  5160. 자하신공을 대주천하고서 잠들었다. 언제나 일어나던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5161.  
  5162. 성하 도인이 죽었다.
  5163.  
  5164. 여관의 1층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성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성민은 화산의 장문인인 성하 도인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하 도인은 늙기는 했지만 기운은 정정했고 두 눈은 정기를 가득 담아 맑았었다.
  5165.  
  5166. 그런 성하 도인이 죽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데.
  5167.  
  5168. “검귀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5169.  
  5170. 반나절만에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검귀 독비준이… 성하 도인을 죽였다. 1층 식당에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성민은 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5171.  
  5172. 전생의 기억.
  5173.  
  5174. 전생의 이성민은 대단한 위치에 선 존재가 아니었다. C급 용병이었던 이성민이 접할 수 있는 소문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시절에 적극적으로 정보 수집을 하였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성민이 접할 수 있었던 소문은 정말로 ‘유명한’ 것들 뿐이었다.
  5175.  
  5176. 검귀 독비준이 화산파 장문인인 성하 도인을 살해했다는 것은 에리아 전역에 퍼질 만한 큰 소문이다. 하지만 전생의 이성민은 그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성하 도인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성하 도인이 죽었다.
  5177.  
  5178. 이성민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물었다. 이성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고 흘러나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숨김없이 간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성민에게 설명해 주었다.
  5179.  
  5180. 검귀 독비준이 심야에 화산의 산문을 넘었다. 독비준은 은밀하게 화산 장문인인 성하 도인의 침소를 침입했고, 성하 도인을 깨워 비무 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5181.  
  5182. 성하 도인은 독비준의 무례를 꾸짖으며 물러가라고 하였지만, 독비준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결국 먼저 출수하여 성하 도인을 공격했고, 갑작스러운 급습을 시작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지 않는 비무를 벗어난 생사결로 이어져, 성하 도인은 독비준에게 죽임을 당했다.
  5183.  
  5184. 화산의 도사들이 뒤늦게 찾아왔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성하 도인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독비준은 그곳에서 도망쳐 버렸다.
  5185.  
  5186. ‘대체 왜.’
  5187.  
  5188. 이성민은 여관을 뛰쳐 나왔다. 이성민은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에서 의문만을 끊임없이 품었다. 전생의 독비준은 성하 도인을 죽이지 않았다. 아마 전생의 독비준도 화산을 찾아갔겠지만, 끝내 비무는 성립되지 않고 독비준은 성하 도인과의 비무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 년 후의 던전에서 위지호연에게 죽는다. 그것이 본래의 흐름이다.
  5189.  
  5190. 하지만 그것이 바뀌었다. 데니르가 했던 말이 이성민의 마음을 짓누른다.
  5191.  
  5192. -너라는 존재가 변수가 되어 이 세상을 전생과 바꾸어 가고 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5193.  
  5194. -네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을 헝클고 있는 거야.
  5195.  
  5196. ‘나 때문인가?’
  5197.  
  5198. 생각은 그곳으로 향한다. 전생과 지금의 차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전생의 독비준은 화산의 산문에서 이성민을 만나지 않았다. 이성민은 바로 어제 독비준과 만났다. 독비준과 만나, 왜 성하 도인이 비무를 거절하는 것인가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것이 독비준의 행동을 바꾼 것인가?
  5199.  
  5200. 그렇다면.
  5201.  
  520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5203.  
  5204. 성하 도인의 죽음은 이성민에게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5205.  
  5206. 화산파는 장문인을 살해한 독비준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독비준이 화산을 탈출한 순간부터, 화산은 독비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지었다. 이미 화산파는 드리무어의 많은 길드에게 협력 요청을 보내 천라지망을 독비준을 맹추격 중이었다.
  5207.  
  5208. 이성민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살아오면서 그렇게 크게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 감정이 낯설다고 하여 주저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성민은 달리고 있었다.
  5209.  
  5210. 여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독비준은 화산을 넘어 북쪽으로 오르고 있다고 했다. 습격하여 성하 도인을 살해하는 것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독비준의 행동 또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독비준이 북쪽으로 향하는 것에는 그곳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단지. 화산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것 뿐이다.
  5211.  
  5212. 전력을 다해 펼친 경공은 이성민을 단숨에 북쪽 성문을 지나게 만들었다. 이성민은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5213.  
  5214. 책임감.
  5215.  
  5216. 낯선 감정이다. 용병이었을 적의 이성민에게, 책임감이라는 것은 ‘돈’이었다. 의뢰를 받아놓고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의뢰금을 내뱉어야 한다. 당시의 이성민이 가지고 있던 책임감이라는 것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죽어서, 되돌아 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5217.  
  5218. 여태까지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던가?
  5219.  
  5220. 없다. 모르겠다. 자각한 적도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처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이성민이 살아 온 8년은 자기 자신을 위한, 그런 시간이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위지호연과의 재회만을 멀찍이 두었고, 그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을 끼워 넣어 살아왔다.
  5221.  
  5222. 그런 삶에서 책임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일도 이성민이 정말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일인 것인지, 그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 수가 없었다.
  5223.  
  5224. 다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5225.  
  5226. ‘나’와 검귀가 만났기에 죽지 않아야 할 성하 도인이 죽었다.
  5227.  
  5228. ‘나’라는 존재가 본래의 흐름을 어그러트리고 있다.
  5229.  
  5230. 지금만이 아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 여태까지 자신이 보낸 8년이 스쳤다. 이성민의 존재로 인해 본래의 삶과 벗어난 이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책임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 이성민은 이기적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손에 닿는. 그런 이들만 생각할 뿐이다.
  5231.  
  5232. 그러니 검귀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동시에, 검귀에게 묻고 싶었다.
  5233.  
  5234.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5235.  
  5236. “멈추시오.”
  5237.  
  5238. 화산의 근처까지 달려 온 이성민의 앞을 다섯 명의 도사가 가로막았다. 모두가 매화의 문양을 옷에 새긴 화산의 도사들이었다.
  5239.  
  5240. “이 앞으로는 갈 수 없소.”
  5241.  
  5242. “…어째서입니까?”
  5243.  
  5244. “이 앞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질 예정이오.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다른 길을 찾아 주시오.”
  5245.  
  5246. “…검귀를 쫓는 겁니까?”
  5247.  
  5248. 이성민이 물었다. 그 말에 말을 하던 도사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5249.  
  5250. “그렇소.”
  5251.  
  5252.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행동이 정답인 것일까. 이성민은 말없이 도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성민이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서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5253.  
  5254. 이대로 물러서야 하는가. 검귀를 만난다고 해서… 이성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어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검귀를 구하고 싶은 건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검귀는 성하 도인을 죽였다. 화산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빚을 갚으려 할 것이다. 검귀의 행동을 두둔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5255.  
  5256. ‘내’가 하고 싶은 것은.
  5257.  
  5258. “…비켜 주십시오.”
  5259.  
  5260. 이성민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을 가로 막고 있던 도사들 중 하나가 검을 뽑았다. 스릉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뽑힌 검이 창백한 빛을 발했다. 그를 시작으로 다섯 명의 도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5261.  
  5262.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등 뒤에 비껴 메고 있던 창을 잡았다.
  5263.  
  5264. 도사들이 달려 들었다. 가장 빠르게 접근한 것은 중앙의 도사였다. 이성민은 화산의 검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을 모르지는 않았다.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익힌 지학은 검술 또한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지난 4년 간 이성민은 지학과 매일매일 쉼없이 비무를 해왔다.
  5265.  
  5266. 그렇기에 ‘검’은 안다. 검이라는 무기가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검법이라는 것은 검이라는 무기를 보다 다양하고 위력적이게 쓰이게 하는 것이다. 결국 검이라는 무기를 완전히 초월하지는 못한다.
  5267.  
  5268. 횡으로 다가 온 검을 란의 수법으로 거두어 낸다. 살초를 쓸 수는 없다. 그렇게 하였다가는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이성민은 구천무극창을 쓰지 않았다.
  5269.  
  5270. 사실 쓸 필요도 없었다.
  5271.  
  5272. 이성민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다섯. 그들은 모두가 화산의 검법을 정통으로 익힌 제자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뛰어난 천재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민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고, 실력은 훨씬 뒤떨어졌다.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검의 소리를 듣는다. 눈으로 볼 것도 없이 이성민은 공격을 느끼고 있었다.
  5273.  
  5274. 제압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이성민을 공격하는 도사들은 이성민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에 착잡함을 느꼈다. 어쩌면, 만약 나에게 그 ‘가호’가 남아 있었더라면. 저들을 설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5275.  
  5276. 그런 생각을 버린다. 그런 것에 기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불영 대사에게 부탁해서 가호를 없앴던 것 아닌가.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빙글 돌았다. 창두가 아닌 창준으로. 이성민이 휘두른 창은 묵직한 둔기가 되어 지척에 있던 도사의 어깨를 때렸다. 도사는 비명과 함께 검을 놓았고. 이성민은 그 즉시 공격의 대상을 바꾸었다. 파바박! 빠르게 뻗어져 나간 창두가 도사들이 쥐고 있던 검을 떨어 트렸다.
  5277.  
  5278. “그만!”
  5279.  
  5280. 버?럭 지른 외침이 이성민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발을 뒤로 끌면서도 육감의 경고에 따라 창을 들어 올렸다.
  5281.  
  5282. 꽈아앙! 손아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이성민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난입과 동시에 이성민에게 검을 찌른 것은 짧은 수염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막아내는 것 자체는 좋았으나, 이성민은 내장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5283.  
  5284. 난입한 중년의 도사는 이성민보다 반 수 정도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민은 낭패다 싶어서 중년 도사를 노려 보았다. 이성민을 물러서게 한 도사는 쓰러져 있는 어린 도사들을 힐긋 보았다.
  5285.  
  5286. “…그대는 누구시오?”
  5287.  
  5288. 이성민의 실력을 인정한 것인지, 도사는 이성민에게 어느 정도 말을 높여 주었다. 사실 실력의 인정 뿐만이 아니라, 이성민에게 쓰러진 도사들이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289.  
  5290. “…아… 이성민님?”
  5291.  
  5292. 의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5293.  
  5294. 중년 도사의 뒤쪽에 이성민이 알고 있는 얼굴이 서있었다.
  5295.  
  5296. 김종현이었다.
  5297.  
  5298. ======================================
  5299. < 검귀-2 >
  5300.  
  5301.  
  5302.  
  5303. 이성민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서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김종현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베헨게르를 떠나기 전에 보았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김종현과 다시 만나는 것은 4년만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둘 사이에 공백으로 존재하기는 했었어도, 김종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5304.  
  5305. “이거… 별난 인연이로군요. 이것도 운명인지.”
  5306.  
  5307. 김종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성큼거리며 걸었다. 4년 전과 비교해서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입은 옷차림은 그때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성민이 기억하는 김종현의 옷차림은 아무렇게나 받쳐 입은 티와 그 위에 걸친 흰 가운이었다.
  5308.  
  5309. 하지만 지금의 김종현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어두운 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브에 새겨진 검은 색의 문양은 단순히 금색 실을 박아 새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쉼없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5310.  
  5311. “…아는 사이십니까?”
  5312.  
  5313. 검을 쥐고서 이성민을 견제하고 있던 중년 도사가 묻는다. 그 질문이 향한 대상은 김종현이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5314.  
  5315. 초절정 고수라는 것은 흔한 것이 아니다. 이성민이 만나 온 무인들 중에 기이할 정도로 고수가 많은 것이지, 초절정 고수는 대형 문파에서도 몇 명 존재하지 않는다. 절정 고수라면 어느 문파에서도 중견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5316.  
  5317. 이성민보다 반 수 정도 높은 실력을 가진 화산의 중년 도사. 이성민의 실력이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이성민을 가로막은 도사는 구파일방인 화산파 안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선 고수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화산파의 고수가, 김종현을 상대로 극존칭을 하고 있었다.
  5318.  
  5319. “아. 아아. 아, 예. 아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뭔가 오해가 오간 듯 한데.”
  5320.  
  5321. 김종현은 주변을 쓱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쓰러져 있던 화산의 어린 도사들이 몸을 일으킨다. 그들은 숨을 몰아쉬면서 외쳤다.
  5322.  
  5323. “우,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들은 대로 이곳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5324.  
  5325. “…으음…”
  5326.  
  5327. 어린 도사들의 외침에 중년 도사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성민의 얼굴을 살펴 보다가, 뒤늦게 깨달아 중얼거렸다.
  5328.  
  5329. “그대는… 어제… 소림의 서찰을 가지고 장문인과 독대한 청년 아니오?”
  5330.  
  5331. “…맞습니다.”
  5332.  
  5333. “그래… 맞아. 우풍이 말했었지. 그대가 검귀와 아는 사이었다고. 설마… 검귀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오?”
  5334.  
  5335. “그건… 아닙니다.”
  5336.  
  5337.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오? 왜 저들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오? 검귀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면서, 왜 검귀를 추살하려는 화산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것이오!”
  5338.  
  5339. 그 말에 이성민은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검귀와 만나야 한다. 검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5340.  
  5341. 어떤 식으로?
  5342.  
  5343.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주제에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어렴풋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다. 마음 속에서 느끼고 있는 충동. 고작해야 충동. 그것을 언어로 제련하지 못하였으니 말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을 갈무리할 수도 없다.
  5344.  
  5345. “…흐음.”
  5346.  
  5347. 침묵하고 있던 김종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김종현의 두 눈이 이성민에게 향했다.
  5348.  
  5349. [무슨 일입니까?]
  5350.  
  5351. 머릿속에서 김종현의 목소리가 울린다. 전음은 아니었지만 전음과 흡사했다. 이성민은 우선 김종현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김종현은 이성민이 죽어서 회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설명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352.  
  5353. “함께 가도록 하죠.”
  5354.  
  5355.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김종현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중년 도사가 놀란 눈을 하고서 김종현을 돌아 보았다.
  5356.  
  5357. “그게 무슨…?”
  5358.  
  5359. “유상 도인. 나는 당신의 사숙인 진랑 도인의 부탁을 받아, 당신들을 돕기 위해 길드에서 파견되었습니다. 검귀를 추격하고 죽여, 그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기 위해서는 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겁니다.”
  5360.  
  5361. 김종현은 차분한 얼굴로 유상 도인에게 말했다. 유상 도인은 김종현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하였지만 머리는 끄덕거렸다.
  5362.  
  5363. “그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
  5364.  
  5365. “이성민님과 함께 갈 수 없다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5366.  
  5367. 김종현이 대뜸 그렇게 내뱉자 유상 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표정이 그렇게 된 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5368.  
  5369. [아니. 너무 억지스러운 것 아닙니까?]
  5370.  
  5371. [억지를 부리는 것 말고 저 깐깐한 도사를 설득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애새끼마냥 졸라대는 것이 잘 먹힐 겁니다.]
  5372.  
  5373. [유상 도인이 당신을 제압해서 억지로 데려가면 어떻게 합니까?]
  5374.  
  5375. [유상 도인에게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아니. 화산의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없습니다. 화산은 이 일에 대해 마법사 길드에게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하였고, 나는 그를 위해 마법사 길드에서 파견되었습니다. 화산이 나를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마법사 길드의 위신에 똥을 쳐바르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5376.  
  5377. [그 정도입니까?]
  5378.  
  5379.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성민님은 상당히 변하셨군요. 특히 무공이 아주 늘은 것 같아요. 나라고 해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스칼렛님이 적색 마탑주가 되었다기에, 나도 배알이 꼴려서 베헨게르 마법사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5380.  
  5381.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5382.  
  5383. [지금의 나는 흑색 마탑주가 되었습니다.]
  5384.  
  5385. 김종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지만, 이성민은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흑색 마탑주. 그 말은 즉, 마법사 길드에 적을 올린 흑마법사들 중에서 김종현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5386.  
  5387. [너무 그렇게 보실 것 없습니다. 다른 마탑주와는 다르게 흑색 마탑은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대단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실력 있는 흑마법사들은 프레스칸처럼 죄다 금기를 범하여 퇴출되었거나 죽었고, 애초에 마법사 길드에 들어오지 않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뭐. 그래도 지금 같은 때에 억지를 부릴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습니다.]
  5388.  
  5389. 김종현이 빙그레 웃었다. 똥 씹은 얼굴로 고민하고 있던 유상 도인이 이를 갈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5390.  
  5391. “…만약… 저 청년이 검귀를 도우려 든다면 어쩔 셈이시오?”
  5392.  
  5393.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이성민님을 죽이겠습니다. 확실하게요.”
  5394.  
  5395.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성민은 그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느낀 것은 유상 도인도 마찬가지였다.
  5396.  
  5397. 결국 유상 도인은 이성민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성민과 동행하게 되자, 김종현은 유상 도인에게 호위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5398.  
  5399. “저 청년이 나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입니까?”
  5400.  
  5401. “아니오. 그냥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흑색 마탑주입니다. 내 한 몸 지킬 재주는 넘치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5402.  
  5403. “하지만 정중히 모셔오라고…”
  5404.  
  5405. “당신과 함께 가는 것 자체에 나는 정중함을 느끼고 있지 못합니다. 그냥 가서 저기 저, 아파하는 어린 도사들이나 챙기십시오.”
  5406.  
  5407.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유상 도인은 더 이상 김종현을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김종현과 함께 이동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5408.  
  5409. “김종현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억지를 잘 부리시는 군요.”
  5410.  
  5411.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 아니겠습니까.”
  5412.  
  5413. 김종현이 대답했다. 이성민은 마음이 조급하여 빠르게 걸었고, 김종현은 그런 이성민의 걸음 속도와 비교해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5414.  
  5415. “마음 껏 달리셔도 됩니다.”
  5416.  
  5417. 김종현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이성민은 경공을 펼쳐 앞으로 뛰어 나갔다.
  5418.  
  5419.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 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5420.  
  5421. 힐긋 옆을 보자 김종현이 바닥에서 반 뼘 정도 떨어져서 날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경신법이라면 절세적인 것일 테지만, 김종현이 쓰고 있는 것은 무공이 아닌 마법이다.
  5422.  
  5423. “…모릅니다.”
  5424.  
  5425. “아무 계획도 없군요. 방향은 제가 정해 드릴 테니 가십시오.”
  5426.  
  5427. 이성민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움직였는기 자각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김종현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상 도인과의 싸움에서 크게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운이 좋아 유상 도인을 제압하고 나아갔더라도 화산과 척을 졌을 테고, 이 넓은 지역에서 검귀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5428.  
  5429. “그런데… 천라지망이라고 하였는데.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5430.  
  5431. “천라지망이라고 하여 광범위한 지역을 사람으로 가득 채워 좁혀나간다면 그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일입니까. 뭐. 에리아가 아닌 무림에서는 그런 식의 천라지망을 펼쳤다는 모양이지만… 이곳은 무림이 아닙니다.”
  5432.  
  5433. 김종현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었다.
  5434.  
  5435. “에리아에는 인력을 대체할 많은 수단이 존재합니다. 마법도 그런 수단 중 하나이지요. 화산은 검귀의 추살을 위한 천라지망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드리무어 마법사 길드에게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마법사 길드는 그를 수락했습니다. 마법사 길드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추격 마법과 사역마 등을 사용하여 검귀를 쫓고 있고, 마침 드리무어에 있던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겁니다. 이미 검귀의 위치는 파악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화산의 무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지요.”
  5436.  
  5437. “…당신은… 검귀와 만나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5438.  
  5439. “나 말입니까? 흠. 검귀의 추살 자체에 내가 개입할 여지는 없을 겁니다. 나는 단지… 검귀가 기묘한 사술을 쓴다고 하여,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곳에 온 겁니다. 그리고 검귀가 죽었을 때, 그를 심문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도 하고요.”
  5440.  
  5441. “…심문이라니. 검귀가 죽었을 때,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5442.  
  5443. “때로는 산 사람을 심문하는 것보다 죽은 사람을 심문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나 나 같은 흑마법사에게는 말이지요. 그보다… 이성민님. 당신에게 느껴지던 불길한 가호의 일부가 사라져 있군요.”
  5444.  
  5445. “…느껴지십니까?”
  5446.  
  5447. “물론입니다. 나는 해주가 불가능했지만. …후후! 왜 그 가호를 해주하신 겁니까?”
  5448.  
  5449. 김종현이 웃는 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김종현이 정하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이성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서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잠시 뒤에, 이성민이 대답했다.
  5450.  
  5451. “…의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5452.  
  5453. “그 기묘한 가호는 당신에게 악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돕고 있었지요.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받아내는 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 호감이 비록 충동적인 것이라고는 하여도, ‘첫인상’을 강제적으로 새겨줄 수 있다는 것은… 사용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능력이지요. 그런데. 그런 가호를 단순히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버린 겁니까?”
  5454.  
  5455. “…차라리 그 가호의 존재를 내가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나는 타인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타인이 나에게 호의를 주는 것을.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오만해 질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 충동적인, 강제적인 호의로서 타인과 이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5456.  
  5457. “하하하!”
  5458.  
  5459. 이성민의 대답에 김종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5460.  
  5461. “결국은 자기만족인 것 아닙니까. 이성민님. 이미 당신은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얻었고, 그것을 얻게 된 과정은 그 정체모를 가호의 덕이었을 겁니다. 받아먹을 것은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5462.  
  5463. “맞습니다. 결국은 자기만족이에요.”
  5464.  
  5465. 이성민은 그를 부정하지 않았다.
  5466.  
  5467.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릅니다. 지금 내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검귀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 스스로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기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5468.  
  5469. “뭘 새삼스럽게.”
  5470.  
  5471. 김종현이 다시 웃었다.
  5472.  
  5473. “사람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런 것 아닙니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에 뭐 대단한 이유와 근거와 납득이 필요합니까. 애초에 모든 동물은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이성이고. 이성이 엷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5474.  
  5475. 냄새가 느껴진다.
  5476.  
  5477. “충동적으로 행동한다고 하여 이성민님이 왜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굳이 답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가호를 지워낸 것에 대단하고 숭고하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5478.  
  5479. 이것 아닙니까? 이성민님.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5480.  
  5481. 그래서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5482.  
  5483. 느껴진 냄새가 진해진다. 이성민은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5484.  
  5485. 피냄새였다.
  5486.  
  5487. 나뒹구는 시체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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