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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2n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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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3. ======================================
  4. < 검귀-3 >
  5.  
  6.  
  7.  
  8. 소림에 있었을 적에는 시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체를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이성민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시체는 화산의 도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 형태가 이성민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9.  
  10. “이게… 뭐야…?”
  11.  
  12. 이성민은 당황하여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사인死因은 가슴을 깊게 베고 나간 검상이었지만, 단지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13.  
  14. 시체는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몸을 숙여 조금 더 살펴보려는 순간, 김종현이 이성민을 제지했다.
  15.  
  16. “만지지는 마십시오.”
  17.  
  18. “예.”
  19.  
  20. 애초에 만질 생각도 없었다. 이런 묘한 시체에 괜히 손을 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성민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김종현이 앞으로 나서 시체를 살펴 보았다.
  21.  
  22. “과연.”
  23.  
  24.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체를 살피던 김종현이 턱을 어루만졌다.
  25.  
  26. “검귀가 사법을 쓴다고 하더니… 후후! 단순히 대인전에서의 환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과연. 이래서야 ‘검귀’라고 할 법 하군요.”
  27.  
  28. “무슨 말입니까?”
  29.  
  30. “에너지 드레인이라는 마법은 알고 계십니까?”
  31.  
  32. “알고는 있습니다.”
  33.  
  34. “에너지 드레인은 굉장히 종류가 다양합니다. 뱀파이어의 흡혈도 에너지 드레인이고, 무공 중의 그 뭐냐… 흡성대법도 에너지 드레인이지요. 종류가 다양한 만큼 방법도 다르고. 하지만 결론은 이겁니다. 에너지 드레인은 상대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거죠.”
  35.  
  36.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라비틀어진 시체의 팔을 들어 올렸다.
  37.  
  38. “검귀가 사용하는 에너지 드레인이 어떤 방식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두십시오. 검귀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을 겁니다.”
  39.  
  40.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41.  
  42. “추격의 방식을 바꿔야겠어요. 지금까지는 사역마를 통해서 검귀를 쫓고, 화산의 도사들이 그 정보를 토대로 검귀를 쫓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계속했다가는 검귀에게 힘을 보태줄 뿐입니다. 아예 몰아넣어서 확실히 죽여야 해요.”
  43.  
  44. 어제. 검귀와 나누었던 말이 이성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벽을 맞닥트린 적이 있냐고. 검귀는 벽을 맞닥트렸고 절망했다. 다만 그렇게 주저앉는 것 대신에, 검귀가 택한? 것은 검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 그 벽을 넘는 것이었다.
  45.  
  46. 검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성민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민과 김종현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시체들은… 계속해서 나왔다. 화산 도사의 시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47.  
  48. “검귀는 선을 넘었군요. 너무 많은 선을 넘어버렸어요. 이건 더 이상 검귀와 화산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49.  
  50.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시체. 갑옷을 입은 용병의 시체.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정보 길드원들의 시체.
  51.  
  52.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군요.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궁지에 몰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뿐인가.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53.  
  54. 이성민도 김종현의 중얼거림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검귀는… 파멸로 가고 있었다. 성하 도인만 죽이고 도주하여 성공했다면, 그래도 화산의 주적이 되어 평생 추격을 받겠지만. 이미 상황은 검귀와 화산의 문제를 떠나 버렸다. 마법사 길드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고, 용병 길드와 정보 길드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55.  
  56. “운이 좋아 이곳에서 도주할 수 있더라도. 검귀는 에리아에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겁니다.”
  57.  
  58.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움직였다. 하늘을 떠돌던 까마귀 하나가 내려와 김종현의 귓가로 다가왔다. 김종현은 까마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고, 김종현의 입술이 닫히자 까마귀가 날개를 크게 퍼덕거리면서 위로 날아올랐다.
  59.  
  60. “근처에 있습니다.”
  61.  
  62. 얼마나 이동했을까. 김종현이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노을을 등진 김종현의 주변에는 주먹만한 검은 구체들이 떠있었다.
  63.  
  64. “우리가 이동이 훨씬 빨랐기 때문에, 화산의 도사들이 도착하는 것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제가 정보 전달에 장난을 조금 쳐 두었어요. 그들이 조금 늦게 오도록.”
  65.  
  66. “어째서입니까?”
  67.  
  68. “당신은 검귀와 만나고 싶은 것 아니었습니까?”
  69.  
  70.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며 이를 보이며 웃었다.
  71.  
  72. “만날 수 있게 해드리는 겁니다. 궁금하거든요. 당신이 검귀와 만나서 대체 무엇을 할지.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달라지기 시작한 흐름이, 다시 당신과 만나 어떻게 될지. 나는 그게 궁금합니다. 내가 관측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요.”
  73.  
  74. 이성민은 김종현의 말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김종현이 이 일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75.  
  76. 검귀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바쁘게 도망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가만히 서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이성민은 내심 의외라고 느꼈다. 이성민이 소리 죽인 걸음을 뻗었을 때.
  77.  
  78. “은신술은 배우지 않은 모양이로군.”
  79.  
  80. 등을 돌리고 서있던 검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81.  
  82. “놀랄 것 없네. 설마 자네가 이곳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83.  
  84. “…저인 줄 알고서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85.  
  86. “맞아. 자네의 기척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왔다면.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지는 않았겠지.”
  87.  
  88. 검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정면으로 선 검귀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89.  
  90. “자네도 나를 죽이러 온 것인가?”
  91.  
  92. 검귀가 묻는다. 이성민은 대답을 망설였다. 등 뒤에 비껴 맨 창을 쥐어야 하는 것일까. 손을 쥐었다 펴는 이성민을 보면서 검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 그는 검귀였다. 지금의 이성민 앞에 있는 것은 독비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인이 아니라, 검귀라 불리는 자였다.
  93.  
  94.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95.  
  96.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리 적절한 장소도 아니고, 내 형편이 마땅치도 않지만…”
  97.  
  98. 검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뒤를 힐긋 돌아 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99.  
  100. “상관은… 없겠군. 곧 밤이 될 테니까.”
  101.  
  102.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어르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화산의 산문에서 어르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103.  
  104.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105.  
  106.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지 못하는 이성민을 향해 검귀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나도 모르겠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107.  
  108. “제가. 어르신과 화산의 산문에서 만나지 않았고, 어르신에게… 성하 도인이 왜 비무를 거절하는지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르신은… 어찌 하셨겠습니까?”
  109.  
  110. “이상한 것을 묻는 군.”
  111.  
  112. 검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질문’이라고 한 주제에 검귀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검귀가 입을 열었다.
  113.  
  114.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성하 도인과의 비무를 포기했을 것일세.”
  115.  
  116. 그 대답을 듣고서. 이성민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머뭇거렸다.
  117.  
  118.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싸워보기에는 아직 자격이 부족하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물러섰을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왜 성하 도인이 나와의 비무를 거부하는 것인지. 자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 내가 사법을 쓴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야.”
  119.  
  120. 검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121.  
  122.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는 평생 성하 도인과 싸울 수가 없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야밤에 화산의 산문을 넘었네. 그리고 무례임을 알면서도 성하 도인에게 싸움을 걸었지. 그가 싸우려 들지 않고 나를 무례하다 꾸짖기에… 더욱 큰 무례를 범했을 뿐일세.”
  123.  
  124. “왜 죽인 겁니까.”
  125.  
  126. “칼에는 눈이 없는 법. 성하 도인은 강했네. 살초를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어.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127.  
  128. 하늘을 올려 보던 검귀가 머리를 내렸다. 검귀가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서 이성민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129.  
  130. 검귀는 웃고 있었다. 그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듯이, 그보다 더 충만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131.  
  132. “성하 도인과의 싸움을 즐거웠네.”
  133.  
  134. 검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135.  
  136. “세상이 넓음을 알았네. 내가 이전까지 싸워 본 상대 중에서 성하 도인은 가장 강했어. 갑작스러운 싸움이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네. 아마 성하 도인도 만족하면서 죽었을 거야.”
  137.  
  138. 일그러진 말이었다. 광기로 비틀린 검귀의 말은 이성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독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139.  
  140. 나 때문이다. 내가 말하였기에, 본래는 죽지 않을 성하 도인이 죽었다.
  141.  
  142. “헌데. 자네는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인가?”
  143.  
  144.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을 쥘까 말까 고민하며 쥐었다 펴던 손을 등 뒤로 넘긴다. 이성민의 손이 단호하게 창을 붙잡았다.
  145.  
  146. “나로 인하여 성하 도인이 죽었습니다.”
  147.  
  148. “이상한 말을 하는 군. 성하 도인을 죽인 것은 나일세. 내 칼이 성하 도인을 죽였지.”
  149.  
  150. “제가 어르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성하 도인이 죽을 일도 없었겠지요.”
  151.  
  152. “하하! 우스운 말이야. 세상 일이라는 것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인데. 이 일에 자네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자네와 내가 화산의 산문에 만난 것은 우연이었어.”
  153.  
  154. “나에게는 아닙니다.”
  155.  
  156. 창을 앞으로 꺼낸다. 검귀는 그것을 보고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157.  
  158. “자네는… 자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 자네의 경지가 나이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일세. 하지만 자네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내 비록 가진 그릇에 절망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초절정의 벽은 넘었네. 아직 그 문턱에도 가지 못한 자네가 나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159.  
  160. “…압니다. 나는 당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161.  
  162. 이성민은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비관적이어 자기혐오가 강했다.
  163.  
  164. 동시에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에, 죽음이 더욱 두렵다. 그럼에도 이성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165.  
  166. 책임감.
  167.  
  168. 이 알량한 감정에 대해 이성민은 그럴 듯한 포장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이성민이 살아 오면서 이런 경우가 분명히 또 존재했었을 테니까. 이성민이 전생과는 다른 삶을 살았기에, 이성민에게 휘말려 본래의 흐름에서 어긋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성민이 제나비스에서 성령단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본래 성령단을 차지해야 할 노 클래스가 성령단을 갖지 못했다. 이성민이 고서점에서 무공서들을 먼저 찾아냈기에 그를 가져야 할 누군가가 갖지 못했다.
  169.  
  170. 끝이 없다. 이성민이 살아 온 8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민으로 인하여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171.  
  172. 알바냐.
  173.  
  174.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를 외면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도 안다. 그게 무슨 대수냐. 김종현이 말했던 대로다. 결국은 자기만족이다. 이성민도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품은 생각이. 결국에는 모순 가득한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럴 듯하게 잘 포장할 수도 없는, 단순히 ‘하고 싶기에’ 하는 충동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175.  
  176. 인정하니 오히려 후련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알량한 책임감을 직시한다. 검귀와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 검귀의 행동이 전생과 달라진 것이 이성민 자기 자신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해 성하 도인이 죽었다. 그러니까.
  177.  
  178. 그 책임을 져야 한다.
  179.  
  180. [검귀와 싸울 셈입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당신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전투에는 그리 능숙하지 않아서요.]
  181.  
  182. [시간을 끌 생각입니다.]
  183.  
  184. 자세를 낮춘다. 검귀는 이성민이 창을 앞으로 세운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손을 들어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185.  
  186. [화산의 도사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겠습니다.]
  187.  
  188. [뭐… 그러시다면야. 힘내십쇼.]
  189.  
  190. 김종현은 이성민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성민의 행동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검귀가 검을 뽑았다.
  191.  
  192.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는 않아.”
  193.  
  194. 검귀가 중얼거렸다.
  195.  
  196. 이성민은 앞으로 뛰었다.
  197.  
  198. ======================================
  199. < 검귀-4 >
  200.  
  201.  
  202.  
  203. 인정에 기댈까.
  204.  
  205.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므쉬의 산이라는 같은 장소를 공유하며 수행하였다고 해도, 이성민과 검귀 사이에 인연은 없다. 그 산에서 이성민이 인연을 맺었던 것은 백소고와 스칼렛 뿐이었다.
  206.  
  207. 이성민의 기억 속의 검귀는 언제나 절벽 쪽에 서있었다.
  208.  
  209.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검객.
  210.  
  211.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내려보고 있던 검귀는, 그 산에서 수행하는 그 누구보다 수행자라는 모습에 어울렸다. 그렇기에 이성민은 검귀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212.  
  213. 버려야 했다.
  214.  
  215. 어쩌면 이성민은 검귀를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수행자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던 검귀를. 그것을 버린다. 지금의 이성민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모순투성이의 책임감과 그로 인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216.  
  217. 이성민의 손 안에서 일직선의 창이 미쳐 날뛴다. 펼친 것은 구천무극창의 이초인 분뢰추살. 낭창이는 창영이 두 눈을 어지럽히면서 수십 개로 분영한 창이 필살의 위력을 담아 검귀를 덮친다.
  218.  
  219. 검귀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창영에 현혹되지 않았다. 검귀가 오른 손으로 쥔 것은 곧게 뻗은 검이다. 이성민이 쥐고 있는 창과는 길이에서 큰 차이를 가진 무기이나, 그것은 검귀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220.  
  221. 카카카캉!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쉼없이 움직이는 이성민의 양 손은 일직선의 창으로 수십 개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검귀는 덮치는 창격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대응했다. 검과 창이 부딪힌다.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222.  
  223. 검귀는 어떤 검법을 쓸까?
  224.  
  225. 상대를 살필 여력은 없다. 이성민은 창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란 나 찰의 기본기가 구천무극창에 녹았다. 계속해서 쏘아지는 분뢰필살은 옆으로 파고 들거나 찔러 오는 검귀의 검을 란과 나를 통해 걷어낸다. 어느순간, 이성민이 호흡을 한 번 삼켰을 때. 이성민의 창은 정지했고, 단 한 번. 이성민의 창이 앞으로 쏘아진다. 추혼일살은 섬전처럼 빨랐다. 하지만 검귀의 표정에 놀람은 없다. 검귀의 오른 손 안에서 검이 빙글 돌더니, 역수로 쥐어 위로 크게 쳐올린 검이 이성민의 창을 튕겨낸다.
  226.  
  227. 검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성민은 손아귀의 저릿거림을 무시하고서 위로 들린 창을 아래로 내리 찍었다. 창은 둔기가 되어 파고들던 검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귀의 발이 옆으로 미끄러진다. 우회하는 동시에 휘두른 검이 이성민의 허리를 노린다.
  228.  
  229. 검이 이성민의 옆구리를 찢어 놓으려는 순간. 이성민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사라졌다. 무영탈혼의 일보무흔이 이형환위를 일으킨 것이다.
  230.  
  231. 검귀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휘두른 검의 방향을 살짝 틀어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이성민은 가슴을 찌르는 검귀의 검을 보고서 두 눈을 부릅 떴다. 이성민은 창을 품 안으로 당기면서 비틀었다.
  232.  
  233. 쩌어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성민의 몸이 뒤로 밀린다.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허리에 힘을 준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의 맛이 났다.
  234.  
  235. 연이어 덮쳐오는 칼날을 향해.
  236.  
  237. 구천무극창 삼초, 복사백탐伏蛇魄貪.
  238.  
  239. 창이 흩어진다. 사라진다. 쏘아낸 창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펄럭거리던 창영이 두 눈을 덮는가. 현혹되었다고? 두 눈을 버려라. 감각으로 느껴라. 아래에서 위로, 검귀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240.  
  241. 슈와악! 검귀의 코끝에서 피가 튀었다. 몸을 젖히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턱 아래부터 정수리까지 창으로 꿰뚫렸을 것이다.
  242.  
  243. “후하하!”
  244.  
  245. 몇 걸음 뒤로 물러선 검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아래에서 위로 창이 튀어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아래로 내린 창을 위로 올려 찌른 것 뿐이라면 검귀가 상처를 입었을 리가 없다. 그 단순한 동작 안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 검귀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246.  
  247. “과연. 그 산의 무식한 꼬마가 이렇게 성장하였는가.”
  248.  
  249. 검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등으로 코끝의 상처를 훔쳤다. 기묘한 일이었다. 얕기는 했으나 분명 살갗을 베어 피가 흘렀는데. 검귀가 손등으로 코끝을 훔쳤을 때, 그곳에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250.  
  251. “부럽구나.”
  252.  
  253. 검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양 손으로 검을 잡았다. 상체를 반쯤 숙이고 곧추세운 검을 횡으로 누인 검귀의 동작은, 돌진을 준비하는 맹수처럼 보였다.
  254.  
  255. “너의 그 재능이 부러워.”
  256.  
  257. 콱하고 얹혀 넘어가지 않는 말이었다.
  258.  
  259. [아.]
  260.  
  261. 이성민의 머릿속에 김종현의 목소리가 스쳤다.
  262.  
  263. [과연. 왜 도망치지 않고, 굳이 이곳에서 싸우는가 싶었더니…]
  264.  
  265. 검귀가 달린다. 달리는 검귀의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순식간에 검귀는 이성민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고, 이성민은 머리와 눈동자를 돌려 검귀를 쫓는 것보다는 육감대로 움직였다.
  266.  
  267. 파악! 왼쪽 어깨가 베였다. 시큰거리는 통증으로 그친 것을 다행이라 느끼며 이성민은 허리를 비틀었다. 일보무영으로 잔상을 그리면서 벗어난다.
  268.  
  269. “밤이다.”
  270.  
  271. 검귀가 내뱉는다.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는 검귀의 안광은 피처럼 붉었다. 확하고 덮쳐오는 몸놀림은 마치 어둠 속을 유영하듯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사방에서 내리 찍히는 검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절대적인 죽음이었고, 그만한 무게를 싣고 있었다.
  272.  
  273. 콰드득!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부러졌다. 창간으로 검귀의 검을 막아내고자 했으나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다.
  274.  
  275. [조심하십시오. 밤은 그의 시간입니다.]
  276.  
  277. 김종현의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다. 이성민은 급히 허리춤의 아공간 포켓에서 새로운 창을 꺼냈다.
  278.  
  279. [그는 뱀파이어입니다.]
  280.  
  281. 모르지는 않는다. 뱀파이어라는 인외人外는 그만큼 유명하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 해가 저문 밤에 더욱 강해지며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괴물.
  282.  
  283. 어둠 속에서 휘청거리며 선 검귀의 두 눈이 붉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새로 쥔 창을 꽉 쥐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던 검귀가 입을 벌렸다.
  284.  
  285. “이 모습이 추해 보이는가?”
  286.  
  287. 벌린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인다. 뱀파이어는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성민이 뱀파이어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88.  
  289. “…언제부터?”
  290.  
  291. “산을 내려온 후. 내가 가진 그릇에 절망했을 때였지. 나는… 늙어가는 것이 싫었네. 나는 더 하고 싶은데, 더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더 멀리가고 싶은데. 내 육체는 이미 노쇠하여 더 가지 못한다고 가고자 하는 나를 붙잡아.”
  292.  
  293. 검귀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올려 보았다.
  294.  
  295. “50년 동안 검을 휘둘렀다. 나는 대단한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고, 언젠가는 천하제일이 되리라고 생각했어. 후후… 후후후. 작았지. 나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 등신이었어. 10년 전 벽을 맞닥트리고 그 벽을 넘을 방법도 찾지 못한 주제에 말이야.”
  296.  
  297. 그래서 뱀파이어가 되었는가.
  298.  
  299. “늙음을 극복해야만 했네. 하지만 내 작은 그릇으로 반로환동은 꿈도 꿀 수가 없었어. 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 그래서 찾아다녔네.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이런 몸뚱이가 되었지만. 아직 만족스럽지가 않아.”
  300.  
  301. 검귀가 붉은 눈을 치켜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302.  
  303. “인간이 아니게 되면서 시간을 얻었다. 하지만 내 몸은 아직 늙었지. 더… 더 많은 피가 필요해.”
  304.  
  305. [아무래도 검귀를 혈족으로 들인 뱀파이어는 그리 강력한 존재가 아닌 모양입니다. 아니면 검귀에게 관심이 없거나.]
  306.  
  307. [무슨 뜻입니까?]
  308.  
  309. [상위종의 피를 마셔 변이한다면 늙음조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포기하여 얻는 보상은 그만큼 달콤하죠. 하지만 검귀는 아직 늙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않은 뱀파이어의 혈족이 되었거나, 아니면… 충분한 피를 받지 못해 최소한의 변이를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310.  
  311. “아름다운 달이로군.”
  312.  
  313. 검귀가 말했다.
  314.  
  315. “성하 도인을 죽였을 때에도 달빛이 아름다웠지… 정말 멋진 밤이었어.”
  316.  
  317. “…화산의 도사들이 어르신을 죽이러 올 겁니다.”
  318.  
  319.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지. 산문을 넘어 성하 도인에게 싸움을 건 순간 이미 나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게야. 밤이라서… 다행이군. 더 많이 날뛸 수 있게 되었어. 더 많은 피를 마실 수 있겠군. 얼마나 마시면 나는 젊음을 찾을 수 있을까.”
  320.  
  321. 검귀가 달을 보며 웃었다. 인성이 남아 있지 않은 광기. 아니, 바라는 것을 향해 달리는 맹목인가. 네 재능이 부럽구나. 검귀가 했던 말이 이성민의 머릿속을 맴돈다.
  322.  
  323.  
  324.  
  325. [검귀가 뱀파이어로서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는 해도. 초절정고수이면서 뱀파이어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특히나 오늘은 만월이군요. 천라지망은 실패입니다. 우선 검귀를 놓아주고 낮을 노려야 해요.]
  326.  
  327. “내가 두려운가?”
  328.  
  329. 검귀가 이성민을 보며 물었다. 후우웅… 검귀의 검에서 시뻘건 기류가 얽힌다. 이윽고 그것은 붉은 빛을 발하는 검강이 되었다.
  330.  
  331. […검귀가 당신을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 군요. 어쩔 수 없나. 조금만 더 버텨보십시오. 머지 않아 화산의 도사들이 올 겁니다.]
  332.  
  333. 어려운 이야기다. 만월의 덕을 보는 초절정 고수 뱀파이어. 초절정의 문턱을 간신히 보고 있는 이성민으로서는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34.  
  335. 하지만 이성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면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공이 이성민의 기혈을 돌고, 쥐고 있는 창에 자색의 기류가 얽혔다.
  336.  
  337. 효율이 좋지 않다고. 남궁희원도, 지학도 그를 지적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 기, 체가 엉킨 이성민은 내공을 다루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강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이성민이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얻었던 심득이 진짜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338.  
  339. “…놀랍군.”
  340.  
  341. 이성민의 창을 둘러 싼 자색의 강기를 보며 검귀가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342.  
  343. “자네와의 싸움이 즐거울 것 같아.”
  344.  
  345. 검이 춤을 춘다.
  346.  
  347. 시뻘건 검강에 쌓인 검은 어둠을 가로지르는 귀신불처럼 요악했다. 그것은 미끄러지다가 사라지고 빛을 번지게 하며 두 눈을 어지럽혔고, 그러면서도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베어버리는 흉악스러운 위력까지 품고 있었다.
  348.  
  349. 서로가 강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상처의 무게가 급격하게 달라진다. 이전의 교전에서 닿아 스친 상처가 살갗을 베어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강기를 펼친 순간부터는 스친 상처조차가 치명상이 된다. 강기라는 것은 그런 공격법이다. 공격 모두를 일격필살로 만들어낸다.
  350.  
  351. 하지만 초절정고수는 그런 강기에 대한 대비책을 갖는다.
  352.  
  353. ‘호신강기…!’
  354.  
  355. 얇은 붉은 기운이 검귀의 몸을 감싸고 있다. 호신강기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초절정고수임을 증명한다. 심득만이 앞서 강기를 억지로 사용할 뿐인 이성민은 호신강기를 사용할 수가 없다.
  356.  
  357. 그것이 이성민과 검귀 사이에 거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이성민은 검귀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받아낸다면 치명상을 입고 죽게 되겠지만, 검귀는 그렇지 않다.
  358.  
  359.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성민의 창법은 검귀를 상대로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강기가 더해진 구천무극창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보이면서 검귀의 움직임을 봉쇄했고, 검귀는 최소한의 움직임을 펼쳐가며 이성민의 창법에 대응했다. 이성민의 창이 검귀를 압도해서? 아니다.
  360.  
  361. 검귀는 즐기고 있었다.
  362.  
  363. 포식자가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검귀는 이성민의 창법을 농락하면서 보이는 틈을 못 본 척 넘어가 주었다. 나누는 초수가 늘어날수록 이성민은 그를 깨달았다. 검귀가 즐기고 있음을. 그리고 ‘나’ 자신은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364.  
  365. 그건 굉장히
  366.  
  367. ‘좆같아.’
  368.  
  369. 그런 기분이었다.
  370.  
  371. 생각해 보면 참 재수도 없지.
  372.  
  373. 소림에서 4년을 수행했다. 지학과 매일 비무하면서 무공이 상당히 안정되었다. 절정의 벽은 이미 돌파하여 초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성민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만한 경지에 오른 무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남궁세가 같은 명문세가의 후계자나, 구파일방과 같은 거대 문파의 직계제자, 그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이성민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앞선 실력에 있을 것이다.
  374.  
  375. 즉,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성민은 결코 약하지 않다. 동년배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성민이 열등감과 자괴감에 허덕거리는 것은, 이성민을 주박하고 있는 전생의 기억때문이다. 동시에 이성민이 맞닥트려온 수많은 진짜배기 천재들 때문이었다.
  376.  
  377. 그래서 재수가 없다. 좁은 세상에서, 작은 것들만 보고 살았다면 이런 자괴감과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재수가 없어서 더 대단한 사람들을 수두룩 만나버렸다.
  378.  
  379. 사람이 쉽게 변할 수 없음을 알았다.
  380.  
  381. 므쉬의 산에서 플람을 만났을 때. 므쉬의 시련을 극복하여 플람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 때. 이성민은 자기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였노라고 생각했다.
  382.  
  383. 아니었다. 므쉬의 산은 작았고, 그 산에서 보고 품었던 이성민의 열등감 또한 작았다. 그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큰 세상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성민은 자기 자신이 열등감을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
  384.  
  385. 소림에서의 수행은 그 열등감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386.  
  387. 그래서 ‘나’는 강해졌는가.
  388.  
  389. 아니.
  390.  
  391. ‘나’는 여전히 약하다.
  392.  
  393. 열등감과 자기비하가 아니다. 이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그냥, 사실이었다. 나는 약하다. 검귀보다 약하다. 그렇기에 검귀가 성하 도인을 죽인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전부 다 내가 약하기 때문이다.
  394.  
  395. 약하고 싶지 않은데.
  396.  
  397. ‘정말로?’
  398.  
  399. 창을 잡은 손의 감각이 낯설다.
  400.  
  401. ‘알아. 나는 약해.’
  402.  
  403. 창간을 더듬는 손가락에 전해지는 감촉이.
  404.  
  405. ‘그래서 수행했어.’
  406.  
  407. 앞으로 뻗는 오른 발에, 지탱하는 발가락의 감각이.
  408.  
  409. ‘왜?’
  410.  
  411. 떨어지는 검.
  412.  
  413. ‘약하게 남고 싶지 않아서.’
  414.  
  415. 쏘아지는 창.
  416.  
  417.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아서.’
  418.  
  419. 검귀의 가슴이 창에 꿰뚫렸다.
  420.  
  421. ======================================
  422. < 검귀-5 >
  423.  
  424.  
  425.  
  426. 이해가 늦다.
  427.  
  428. 검귀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슴을 꿰뚫고 들어 온 창은 검귀의 등 뒤로 길게 나와 있었다. 검귀는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내려 보았다. 창간은 상처에서 뿜어진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429.  
  430. 시선은 조금 더 아래로.
  431.  
  432. 손에 쥔 검은 힘없이 아래로 쳐져있다. 붉은 검강이 어둠 속에서 흩어진다. 검귀는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 붉어 끈적한 피였다. 몇 번이나 피를 토한 검귀가 바르르 떨리는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433.  
  434. “어떻게?”
  435.  
  436. 검귀가 물었다. 짧은 질문이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437.  
  438. ‘어떻게?’
  439.  
  440. 어떻게 한 것이지? 모르겠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스스로와 이어 간 문답.
  441.  
  442. 나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수행했다. 왜 수행했는가? 약하게 남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443.  
  444.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전생과는 다른 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 이성민이 있다. 전생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여, 지금의 이성민이 있게 되었다.
  445.  
  446. 이건 심득일까. 마음의 바람이 육체를 움직이게 하였는가. 알 수 없다. 이러한 심득을 겪어 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강기를 발현했을 때에는, 이보다 조금 더… 확실한. 그런 감각이 있었다.
  447.  
  448.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가 뒷걸음질을 쳐서 쥐를 잡은 것처럼.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행동이, 의도하지 않은 일초가 검귀의 공격을 꿰뚫고 그의 몸을 꿰뚫었다.
  449.  
  450. 불과 몇 초 전의 기억이다. 검귀의 검은 이성민의 창보다 빨랐다. 검귀의 검은 이성민의 창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거리의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검귀의 접근을 허용했다. 결국에는 검귀의 검을 막지 못하여, 그대로 진행되었다가는 검귀의 검에 몸이 두동강 났을 것이다.
  451.  
  452.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이성민의 창이 검귀의 검을 꿰뚫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이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453.  
  454. ‘대체 무엇을 한 거지?’
  455.  
  456. “커흡!”
  457.  
  458. 검귀가 피를 토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검을 휘둘렀다. 힘없이 휘두른 검은 이성민을 노리기에는 무디고 늦었으나, 가슴을 꿰뚫고 있던 창을 잘라내기에는 충분히 예리했다. 몇 걸음 더 물러 선 검귀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가슴을 꿰뚫은 창을 붙잡았다.
  459.  
  460. “자네는… 대체… 무엇을…?”
  461.  
  462. 검귀가 더듬거리며 묻는다. 서로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귀는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성민의 공격이 검귀의 검보다 빨랐다고 하여도, 호신강기에 가로막혔어야
  463.  
  464. 한다. 그것이 옳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465.  
  466. 그런데 그것이 뚫렸다.
  467.  
  468. 어째서?
  469.  
  470. “크으욱…!”
  471.  
  472.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검귀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무리 만월의 밤에 뱀파이어의 불사력이 드높아진다고 하나, 검귀는 뱀파이어의 격을 따지자면 그리 높지 않았다. 검귀가 강력했던 것은, 그가 뱀파이어 이전에 초절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473.  
  474.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검귀는 이전까지 흡혈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 그가 원하고자 했던 것은 늙지 않는 육체였고, 뱀파이어가 됨으로서 그것은 얻었다. 전성기 때의 육체. 젊은 육체를 원하기는 하였으나, 인간이 인간의 피를 탐한다는 것은 이전까지 인간으로 살아왔던 검귀가 범하기에는 힘든 배덕이었다.
  475.  
  476.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검귀는 그 인간성을 스스로 베어냈다. 살고 싶었다. 더, 더 멀리 가고 싶었다. 화산의 산문을 넘어 성하 도인을 죽였을 때. 검귀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최소한의 인성을 베어냈다. 그래서 죽인 시체의 피를 빨아 마시면서 이곳까지 왔다.
  477.  
  478. 제법 많은 피를 마시기는 하였지만, 뱀파이어로서의 격을 끌어 올리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가슴을 꿰뚫은 중상. 인간이라면 이미 죽어버렸을 상처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것은 오늘이 만월이기 때문이었다.
  479.  
  480. 하지만 길지 않다.
  481.  
  482. 길 수가 없었다.
  483.  
  484. 단순한 관통상이 아니다. 이성민의 창에는 강기가 실려 있었다. 몸을 꿰뚫은 강기는 검귀의 기혈을 파괴하여 내력을 진탕시켰고, 죽음에 이르러야 옳을 치명상은 뱀파이어의 생명력으로 버텨낸다.
  485.  
  486. 그것이 꺼져간다. 상처는 재생되지 않는다. 무리하여 창을 뽑아냈으나 뻥 뚫린 상처는 계속해서 피를 토해낸다. 검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고자 혈도를 누르려 했으나, “후… 후하하… 하하하…!”
  487.  
  488. 결국에는 웃고 말았다. 컥컥거리며 피를 토하던 검귀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피를 계속해서 삼킨다.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인다. 떨리는 손이 결국에는 혈도를 짚어 피를 강제로 멈추게 만들었다.
  489.  
  490.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기분이구나.”
  491.  
  492. 검귀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가진 붉음이 엷게 변해 있었다.
  493.  
  494. “그래… 그런 기분이야. 분명히, 나는 앞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더… 더 멀리 갈 수 있었는데. 넘어져 버렸어. 신경쓰지 않았던 돌부리에 발이 걸려서…”
  495.  
  496. 검귀가 피에 젖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면서 쿡쿡 웃었다. 비틀거리며 걷던 검귀는 내려 놓았던 검을 다시 들었다.
  497.  
  498. “하지만… 후… 흐흐흐… 이해를 벗어난… 무武였다. 자네의 수준으로는 절대로 펼칠 수 없는… 그런 무였어. 자네의 창은… 아아. 내가 방금 전에 본, 나의 몸을 꿰뚫은 자네의 창은. 성하 도인의 검보다 빨랐고 성하 도인의 검보다 강했고 성하 도인의 검보다 고요했다… 아아…”
  499.  
  500. 검귀의 눈에서 붉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검은 색으로 돌아 온 눈동자는 뱀파이어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이었다. 동시에 검귀의 몸에서 새하얀 기류가 솟구쳤다.
  501.  
  502. “더… 보여다오.”
  503.  
  504. 검귀가 끓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505.  
  506. “내가 절대로 도달할 수 없어 보이던 그 굉장함을. 다시 나에게 보여다오.”
  507.  
  508. 검귀는 진원진기를 격발시켰다. 검귀는 이곳에서 살아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이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십 명의 피를 마시지 않는 한 목숨을 구제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지금의 몸 상태로몇 십 명을 더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509.  
  510. 그렇기에 검귀는 검을 쥐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선다. 전신이 무겁다. 뱀파이어가 되어 인간이 아니게 된 후로 느끼지 못했던 늙음의 무게가, 그보다 더한 무게가 되어 검귀의 몸을 짓눌렀다.
  511.  
  512. 아니. 이것은 늙음의 무게가 아니었다. 죽음의 무게였다. 동시에 보고자 했으나 볼 수가 없게 된 이상理想의 무게였다.
  513.  
  514. “나에게. 너를 보여다오.”
  515.  
  516. 그럼에도 검귀는 체념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성민이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환한 열망을 담은 눈으로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517.  
  518. 모르겠다.
  519.  
  520.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검귀는 잠력을 격발시켜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자멸할 겁니다.]
  521.  
  522. 모르겠다.
  523.  
  524. [하하, 그건 그렇고… 굉장하군요. 이성민님이 설마 검귀를 상대로 승리할 줄이야! 설마 이 싸움을 통해서 무공에 큰 진보를 거둔 것입니까?]
  525.  
  526. 모르겠다.
  527.  
  528. 검귀가 다가온다. 이성민은 썩둑 잘린 자신의 창을 내려 보았다. 떨그렁. 이성민은 창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새로운 창을 꺼내 쥐었다.
  529.  
  530.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방금 전에 ‘내’가 어떻게 한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검귀를 꿰뚫었는가. 검귀가 말하는, 이해를 벗어난 무라는 것을 이성민 본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531.  
  532. 그럼에도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귀가 이성민을 본다. 검귀의 두 눈은 이성민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533.  
  534.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자신이 없다.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성민은 검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535.  
  536. 아.
  537.  
  538. 당신은 사법을 사용하는 지저분하고 위험한 자가 아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여 포기하여 눈을 돌린 도망자도 아니다.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으니 그를 극복하고자 했을 뿐이다.
  539.  
  540. 나와는 다르다.
  541.  
  542. 당신은 나를 부럽다고 말했다. 나의 젊음에, 재능에 대해 그런 말을 하였다. 거짓이다. 나의 젊음도 재능도 거짓이다. 나는 일그러져있던 도망자이며, 열등감을 극복한 척 행동했을 뿐인 위선자이며, 나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모순에 가득 찬 자기만족을 품었을 뿐인 그런 약하고, 작은 인간이다.
  543.  
  544. 창과 검이 부딪힌다. 진원진기를 격발시킨 검귀의 검강은 이전보다 눈부신 빛을 발했다. 하지만 느리다. 죽어가는 육체는 검귀가 바라는 검로를 그리지 못한다.
  545.  
  546. 그런 검귀를 향해 이성민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매섭게 구천무극창을 펼쳤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검귀를 죽이기 위해, 검귀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547.  
  548. 마음에 들지 않은 승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라고. 검귀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성민도 그에 대해서 공감했다. 검귀가 도달한 무에 있어서 이성민의 존재는 돌부리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민의 창이 검귀를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은 요행에 지나지 않는다.
  549.  
  550. 안다. 알아서… 싫다. 하지만 도망쳐서는 안 된다. 이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더라도 이 승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551.  
  552. 검귀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553.  
  554. 위지호연에게 죽어야 할 검귀가 이곳에서 죽는다.
  555.  
  556. 죽지 않아야 할 성하 도인이 검귀에게 죽었다.
  557.  
  558. 이성민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모순에 가득 찬 자기만족으로, 그런 책임감을 느끼면서.
  559.  
  560. 나는 당신의 죽음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561.  
  562. 당신이 보고자 했던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나의 걸음으로 당신이 보고자 했던 이상의 끝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해야만 한다. 검귀의 눈을 본다. 열망만이 가득한,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 눈을.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향하고 싶었던 그 집념이 꺼져가는 눈을.
  563.  
  564. 나는 그 눈을 가진 자를 죽이는 것이다.
  565.  
  566. “하.”
  567.  
  568. 검귀의 검이 아래로 떨어진다. 이성민의 창은 검귀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검귀는 배에 박힌 창을 내려 보면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검귀의 눈을 바라보았다. 몇 십 초의 공방은 결국 이성민의 승리로 이어졌다. 진원진기까지 격발시킨 검귀는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569.  
  570. “자네는…”
  571.  
  572. 검귀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573.  
  574. “마지막에… 나를 기만하는군…”
  575.  
  576. 이성민의 손이 굳었다.
  577.  
  578. “자네의 창은… 아… 나를 죽인 자네의 창은… 이보다 더… 훌륭했어야 해. 더 빠르고… 성하 도인보다 더…”
  579.  
  580. 중얼거리는 말은
  581.  
  582. “왜 내가 이곳에…”
  583.  
  584. 저주였다. 한탄이었다. 이성민은 창을 놓았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이성민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검귀를 보았다.
  585.  
  586. 이렇게 될 것임을 알았다. 검귀를 꿰뚫었던 이성민이 공격은, 지금의 이성민에게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순간에 얻게 된 심득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육체를 움직여 역랴을 뛰어넘은 공격을 행한 것이다. 이성민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얻은 심득을 몇 번이고 회고하면서 정련해야 할 것이다.
  587.  
  588. “…미안합니다.”
  589.  
  590. 이성민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검귀의 최후에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검귀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끌어 검귀가 자멸하게 두었더라면… 적어도 저 무인이 마지막에 한탄과 저주를 쏟지 않게끔은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591.  
  592. “나는… 어르신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93.  
  594. 멋대로 기대받았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부족했을 뿐이다.
  595.  
  596. 나 자신이 너무 약하기에.
  597.  
  598. “나는… 더…”
  599.  
  600. 검귀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소리를 낸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남긴 것은 한탄과 저주. 검귀는 이성민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죽는 순간까지. 이성민은 검귀에게 있어서 갑작스러운 돌부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성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601.  
  602. “난…”
  603.  
  604. 몸이 떨린다. 나의 약함이. 나의 부족함이. 이곳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위지호연이었다면, 지학이었다면, 남궁희원이었다면! 그들은 검귀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을까? 저 무인이 최후의 순간에 저주와 한탄을 흘리지 않게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605.  
  606. “사제.”
  607.  
  608. 울부짖고 싶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분노하면서도 울고 싶지는 않았다. 이 순간 울어버린다면 마음속의 중요한 무언가가 박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609.  
  610. “많이 컸구나.”
  611.  
  612. 목소리가 가까웠다.
  613.  
  614. 그녀에게서는 꽃의 향기가 났다.
  615.  
  616. ======================================
  617. < 프롤로그-1 >
  618.  
  619.  
  620.  
  621. 이성민은 고개를 들었다.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그녀는, 묵섬광 백소고는. 한아름의 꽃을 품 안 가득히 안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아 보이는 새하얀 백발은 바람에 흩날렸고, 그녀가 걸친 도복은 므쉬의 산에서 보았던 낡은 옷과는 다르게 깔끔했다.
  622.  
  623. “…사저…?”
  624.  
  625. 이성민은 놀라서 백소고를 불렀다. 이성민의 부름에 백소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이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시선만을 보내던 백소고가 앞으로 걸었다. 자그마한 발소리와 함께 다가 오는 백소고의 표정은,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우울하게 젖어갔다.
  626.  
  627. “어째서… 사저가 이곳에?”
  628.  
  629. “소문을 들었거든.”
  630.  
  631.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성민을 보던 눈을 돌려 쓰러져 있는 검귀의 시체를 보았다. 아무리 검귀가 뱀파이어라고는 해도 진원진기를 격발시키고 죽음에 이를 치명상을 연거푸 입은 상태에서 회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632.  
  633. 검귀는 죽었다.
  634.  
  635. 백소고의 걸음은 검귀의 시체 앞에서 멈췄다.
  636.  
  637. “…바보 같다고… 탄식해야 하는 것일까?”
  638.  
  639. 백소고의 말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잇엄니에게 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백소고 본인에게 하는 질문처럼 들렸다.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창을 내려 놓았다.
  640.  
  641. “…사제. 오랜만이야. 5년만… 이지? 설마 사제와 이런 장소에서, 이런 이유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어.”
  642.  
  643. 백소고가 우울한 눈으로 이성민을 본다. 백소고와의 재회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644.  
  645. “사제는 강해졌구나.”
  646.  
  647. 백소고가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648.  
  649. “이런 말은… 사제에게 조금 잔혹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부터 사제와 검귀 어르신의 싸움을 보고 있었어. 사제가 검귀 어르신에게 밀려 위기에 처하는 것도 보고 있었지.”
  650.  
  651. “제가 왜 그를 잔혹하다 느낄 지도 모른다고 하시는 겁니까.”
  652.  
  653. “그대로 싸웠다가는 사제가 검귀 어르시에게 살해되었을 거야.”
  654.  
  655. “살해되지 않았습니다.”
  656.  
  657. “나는 그를 방조하고 있었어.”
  658.  
  659.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660.  
  661.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사제와 검귀 어르신의 역량 차이는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끼어들 수가 없었어. 내가 끼어들어 둘을 방해한다면, 사제와 검귀 어르신의 싸움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662.  
  663. “비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664.  
  665. 백소고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백소고 역시 무인이다. 무림에서 태어나 살아오고, 에리아에 소환된 그녀는 이런 류의 문제에 있어서는 고지식한 면이 강했다. 백소고는 자신의 방조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하여도, 그에 대해 슬퍼할망정 자신의 행동에는 후회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666.  
  667. “나는 죽지 않았으니까.”
  668.  
  669. 죽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았는가.
  670.  
  671. 이성민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바로 지워낸다. 백소고는 이성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672.  
  673.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제가 이곳에서 죽었더라면, 나는 사제의 죽음을 막지 않았겠지만… 그 이후에 굉장히 슬퍼했을 거야.”
  674.  
  675. “내 원수는 갚아주셨을 겁니까?”
  676.  
  677. 이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 대해 물었다. 짓궂은 질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이성민의 입술 밖을 나간 후였다. 묻고나서 아차싶긴 하였지만, 의외로 백소고는 그리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678.  
  679. “사제의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는 검귀 어르신을… 막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680.  
  681. 백소고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숙였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꽃을 검귀의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682.  
  683. “검귀 어르신은 옳지 않았어.”
  684.  
  685. “…무엇이 옳지 않았다는 겁니까?”
  686.  
  687. 그 말에 이성민은 그렇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검귀는 옳지 않다. 지저분하다. 위험하다. 성하 도인이 했던 말과, 검귀 스스로 자신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하던 것이 뒤엉키고 있었다.
  688.  
  689. “검귀 어르신이 무도가 아닌 사도를 택한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겁니까.”
  690.  
  691. “무고한 사람을 해한 것이 옳지 않았다는 거야. 사제.”
  692.  
  693. 백소고는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694.  
  695. “검귀 어르신이 어떤 고충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몰라. 검귀 어르신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도 몰라. 나는… 단지. 검귀 어르신이 화산 장문인인 성하 도인을 살해했고, 그를 통해 화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추격하던 화산의 도사들을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만 듣고 이곳에 왔으니까.”
  696.  
  697. “…그것이 옳지 않았다?”
  698.  
  699. “사제.”
  700.  
  701. 5년만의 만남이다. 이성민은 백소고와 헤어진 후부터, 몇 번이나 백소고와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었다. 14살의 나이로 회귀한 이성민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백소고는 위지호연과 마찬가지로 이성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였다.
  702.  
  703. 이성민은 위지호연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동시에 스스로의 나약함을 배웠다. 그러면서 진짜 천재를 두고 느끼게 되는 열등감을 알았다.
  704.  
  705. 백소고에게서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배웠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을 배웠다.
  706.  
  707. 그 후에는 지학과 불영 대사를 통해 ‘나’ 자신의 모순과 부족함에 대해 알았다.
  708.  
  709. 이성민에게 있어서 백소고는 크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백소고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행했다. 어떻게든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어서.
  710.  
  711. 다시 만나게 된다면.
  712.  
  713.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714.  
  715. “누구에게나 지향하는 정의가 있는 법이야.”
  716.  
  717. 백소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718.  
  719. “나의 정의와 사제의 정의는 다를 지도 몰라. 내가 가진 정의라는 것은 나라는 인간이 어찌 행동하는지를 결정하는 척도지. 사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의를 가지고서 이곳에 와 검귀 어르신을 가로막았는지 나는 몰라. 사제가 검귀 어르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모르고. 마찬가지로, 사제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내가 검귀 어르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를 알지 못할 거야.”
  720.  
  721. “나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722.  
  723. “사제는 성장했구나.”
  724.  
  725. 백소고가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비꼬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726.  
  727. “므쉬의 산에서 보았을 때. 사제는 언제나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그 옷에 어울리도록 흉내를 내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사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졌구나.”
  728.  
  729. “…검귀 어르신을 막기 위해 오셨다고 하였죠. 괜찮다면 사저가 그리 생각한 이유를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730.  
  731. “나는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어.”
  732.  
  733. 백소고가 대답했다.
  734.  
  735. “무림맹이 내가 가진 정의를 관철하기에 가장 걸맞는 단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거든. 덕분에 검귀 어르신의 행보에 대해서도 빠르게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검귀 어르신과는… 산에서 맺은 인연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 최후는 내 손으로 전해드리고 싶었지. 사제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736.  
  737. “…사저.”
  738.  
  739. 이성민음 머뭇거리다가 백소고를 불렀다.
  740.  
  741. “사저가 본 나는… 어땠습니까?”
  742.  
  743. “많은 것이 변했어.”
  744.  
  745. 백소고가 대답했다. 그녀는 검귀의 시체를 한 번 더 내려 보았다.
  746.  
  747. “사제의 무공은 므쉬의 산에 있을 때보다 몇 걸음이나 앞섰구나. 그때의 사제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도 비관적이고 가혹했었지.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 같아서, 나는 기뻐.”
  748.  
  749. 아니다.
  750.  
  751. “사제. 미안하지만 그리 길게 이야기는 나누지 못할 것 같아. 해야 할 일을 내팽겨지치고 급하게 이곳에 온 것이거든. 일이 정리되었으니… 나도 돌아가야 해.”
  752.  
  753. “…사저.”
  754.  
  755. 이성민은 콱 막혀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꺼냈다 .
  756.  
  757. “사저가 맡고 있는 임무가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758.  
  759. [지금 나는 위지호연을 쫓고 있어.]
  760.  
  761. 백소고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762.  
  763. [자세한 이야기는 해줄 수가 없어. 다음에… 다음에 다시 만나자. 사제. 나도 바빠 그 날을 기약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764.  
  765. 백소고는 그 말을 남기고서 훌쩍 뛰어 사라졌다. 백소고가 남긴 꽃의 잔향은 검귀의 시체에 남았다. 백소고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성민은 백소고를 붙잡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766.  
  767. ‘위지호연을 쫓고 있다고…?’
  768.  
  769. 전생의 정보가 뒤엉킨다. 백소고와 함께 던전에 들어갈 검귀는 이곳에서, 이성민에게 죽었다. 검귀가 뱀파이어가 되는 것에는 이성민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생에 위지호연에게 죽은 검귀도 뱀파이어였을 것이다.
  770.  
  771. 그렇다면 백소고는? 백소고가 위지호연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백소고가 무림맹의 명령으로 위지호연을 쫓고 있기 때문인가?
  772.  
  773.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성민은 백소고를 설득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해서는 백소고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의와 가치관은 다른 것이라고. 백소고에게 있어서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도 같다.
  774.  
  775. 이성민에게 그런 신념은 없다. 백소고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 그렇기에 이성민은 떠나가는 백소고를 잡을 수가 없었다.
  776.  
  777. 그렇다고는 해도.
  778.  
  779. 확실하게 알았다.
  780.  
  781. 무엇을 해야 할지.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에 도망쳤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몇 십 년의 인생을 이미 살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782.  
  783. 버려야 한다.
  784.  
  785. 이미 버린 것이다.
  786.  
  787. 14살로 돌아오면서 이성민은 과거를 품었다. 용병으로서 살아 온 경험을, 그로 인해 형성된 인격을. 그 자기비하와 열등감에 찌들어 있던 삼류, 아니, 이류 시절의 인생을 ‘나’ 자신으로 삼았다.
  788.  
  789. 작디 작은 나였다. 하찮은 과거의 나였다. 그리 살면서 형성된 인격은 편협하였고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세상은 작았다. 이성민이 동경하고 되고 싶었던 제온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790.  
  791. 세상은 넓었다. 그를 계속해서 알았다. 알아가면서 과거의 나가 사라졌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버려야 했다. 열등감, 자기비하, 그 외의 모든 것들. ‘용병’으로 살았던 이성민을.
  792.  
  793. 지금의 ‘나’는. 용병이었을 때의 ‘나’가 아닌 새로운 나가 되어야만 했다.
  794.  
  795. 언제부터였을까.
  796.  
  797. 언제부터 버리려 했을까.
  798.  
  799. 언제부터 나는 13년간 용병으로 살다가 죽은 이성민이 아닌, 14살에 에리아에 소환된 ‘내’가 되었을까.
  800.  
  801. 세상이 넓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을 때.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거슬러 올라, 결국에 그 끝에는 위지호연이 있었다.
  802.  
  803. 만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804.  
  805. “요즘 소란스러워.”
  806.  
  807. 나흘만에 만난 데니르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언제 다시 찾아오겠다고 미리 약속을 해둔 것은 아니었지만, 데니르는 시답잖은 장난을 부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 이성민을 맞이해 주었다.
  808.  
  809. “네가 검귀를 죽였다지. 참 신기하단 말이야. 검귀는 너보다 강했어. 네가 열 명이 있어도 검귀를 죽일 수는 없었을 거야.”
  810.  
  811.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흐름을 어그러트리는 나. 모순 가득한 책임감과 자기만족에 찌들었던 나.
  812.  
  813. 검귀와 싸우고, 검귀를 죽이면서. 나는 무엇을 느꼈나. 최후에 느낀 것은 죄책감이었다. 검귀를 죽였기에 느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검귀의 기대를 배신해버렸기에 느낀 죄책감이었다.
  814.  
  815. 내가 약하기에 느꼈던 죄책감.
  816.  
  817. “그래서. 나흘만에 너는 무슨 말을 해주려고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지? 또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나 하고 싶은 것이냐? 너는 이야기상대로 그리 즐거운 친구는 아니었는데. 아마 나도 그러겠지만.”
  818.  
  819. “시련을 받고 싶습니다.”
  820.  
  821. 나흘 동안 이성민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볼은 움푹 파였고 눈 밑은 검게 물들었다. 화산파는 검귀를 혼자서 죽인 이성민을 향해 젊은 영웅이 탄생하였다고 탄사를 보냈다. 이 일에 개입했던 정보 길드들은 이성민이 성하 도인을 죽인 검귀를, 그것도 뱀파이어인 검귀를. 만월의 밤 아래에서 죽였노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822.  
  823. “어리석군.”
  824.  
  825. 데니르가 입을 열었다.
  826.  
  827. “내 시련은 므쉬의 시련처럼 자비롭지 않아. 그에 대해서는 이미 너에게 말했을 터다. 열 명.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열 명이 나의 시련에 도전했고, 세 명만이 살아…”
  828.  
  829. “내놔.”
  830.  
  831. 이성민이 데니르의 말을 끊었다. 데니르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성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광적인 집념이 타오르는 두 눈을 보며 데니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832.  
  833. “개새끼. 주제도 모르고 죽고 싶어 하는구나.”
  834.  
  835. 데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836.  
  837. “명심해라. 이 죽음은 자비롭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아. 장담하건데, 이 시련을 통해 네가 느끼게 될 고통은 네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그 어떤 고통들과도 다를 거다.”
  838.  
  839. “겪는 것은 나야.”
  840.  
  841.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대답했다.
  842.  
  843. “그러니 내놓으란 말이다.”
  844.  
  845. “오냐!”
  846.  
  847. 데니르가 고함을 질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주변의 풍경이 뒤집어졌다. 뒤집힌 모든 것이 흩어지고, 이성민은 새하얀 공간에 서게 되었다.
  848.  
  849. “이곳은 의식의 세계다.”
  850.  
  851. 데니르가 내뱉었다.
  852.  
  853. “이곳에서의 수련은 현실의 네 몸뚱이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의식만을 끝없이 단련하는 곳이지. 이곳은 너희 이계인들이 자랑하는 상태창과 스킬의 효과도 볼 수가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너는 순수하게, 너 자신의 기억과 재능만으로 이 세계에서 단련해야 해.”
  854.  
  855. 이성민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856.  
  857. “먹고 마시고 자고 쌀 필요도 없는 곳이지. 네가 이 세계에서 몇 년을 보내건 간에 현실의 네 몸뚱이에 흐르는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아. 육체를 벗어나 네 의식만이 이 공간에 있고, 의식이 느끼는 시간은 끝없이 늘어진다. 이곳에서 일억년을 보낸다고 한들 현실의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으니까.”
  858.  
  859. 데니르가 말한, ‘가혹하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데니르는 이성민의 앞에 자그마한 모래시계를 내려 놓았다.
  860.  
  861.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질 때. 너는 이 세계에서 100년을 보낸 것이 된다.”
  862.  
  863. “…그 뒤에는?”
  864.  
  865. “네가 선택해라. 이 세계에서 나올지, 아니면 다시 100년을 더 보낼지. 모두 떨어진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으면, 이번에는 200년이 이어진다. 그 다음은 300년.”
  866.  
  867. 끔찍한 시련이었다. 의식의 세계. 100년을 주기로 이 세계에서 탈출할 것인지, 아니면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아무리 무공을 단련한다고 해도, 상태창과 스킬의 도움을 보지 못하는 이상 무공의 성취를 확인하거나 무공을 쉽게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68.  
  869. 100년을 버틴다고 해도 현실의 몸뚱이에 의식 세계에서의 수행이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870.  
  871.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곳이라고는 해도, 선택은 네 몫이야. 이 세계의 주인은 너다. 무엇이든지 가능하지. 너 자신은 그대로겠지만 말이야. 그것은 네가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이해해 보도록 해라.”
  872.  
  873.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모래 시계를 발로 툭 건드렸다.
  874.  
  875. “이곳에서 보내는 10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에서 무엇을 얻을 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려있다. 그 얻어낸 것을 현실의 몸뚱이에 반영하는 것도 너에게 달려있지. 몇 가지 더 알려줄까? 열 명 중에서 실패한 일곱 명은 미쳤다. 이 세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100년을 살아가면서. 그 100년 동안 그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기계처럼 수행만 하면서, 그로 인해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도 얻지 못하면서… 절망에 미쳐 죽어 버렸지. 그건 꽤 즐거운 광경이야.”
  876.  
  877. 데니르가 웃는다.
  878.  
  879. “처음 100년은 어지간하면 해내. 그리고 자신감을 얻어 시계를 뒤집지. 그리고 200년… 그 도중부터 미치기 시작해.”
  880.  
  881. 데니르는 웃는 소리를 남기며 몸을 돌렸다.
  882.  
  883. “너는 과연 몇 년을 버틸까?”
  884.  
  885. 데니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성민은 멍하니 쏟아져 내려가는 모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았으나, ‘창’을 떠올린 순간. 이성민의 손에는 창이 있었다. 데니르가 말했던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곳은 이성민의 의식 세계. 무엇이든 가능하다.
  886.  
  887. “…자… 그럼…”
  888.  
  889. 이성민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창을 꽉 잡았다.
  890.  
  891. 100년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892.  
  893. ======================================
  894. < 프롤로그-2 >
  895.  
  896.  
  897.  
  898. 사라락.
  899.  
  900. 사라라락.
  901.  
  902.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닥에 놓인 모래시계에서 쏟아지는 모래 뿐이다. 사실 그건 편리한 시계는 되어주지 못했다. 며칠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903.  
  904.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 고요한 침묵. 그것은 므쉬의 산에서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금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수행이 므쉬의 산이나 소림에서의 수행보다는 낫다고 여겨졌다. 적어도 이곳에는 금제로 인한 고통도 없고, 열등감을 자각하게 만드는 지학도 없었다.
  905.  
  906. 그런 세계에서 스스로 하는 수행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907.  
  908. 처음에는 그랬다.
  909.  
  910. 아무런 소음도 없는 이 세상은 므쉬의 산보다 끔찍한 지옥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아무리 움직이고 움직여도 몸은 피로하지 않다. 배도 고프지 않다. 다가오는 수마睡魔가 그리웠다. 굶주림이 그리웠다. 갈증이 그리웠다.
  911.  
  912. 할 필요가 없음에도 음식을 상상해 먹었다. 물을 마셨다. 술도 마셨다. 하지만 맛은 느껴져도 포만감은 없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913.  
  914.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무공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게 남았지만, 스킬로 펼치는 것이 아닌 무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보아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915.  
  916. 그렇기에 막힌다.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지만 내공은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내공이 고갈되면서 다시 차오르는 것이 그 즉시 이루어질 뿐. 펼치는 무공의 형태가 잘못되는 것은 곧 내공의 흐름을 엉키게 만들었고, 그로 인한 고통은 현실보다 뚜렷했다.
  917.  
  918.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919.  
  920. 아직 100년이 되지 않았나?
  921.  
  922.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바라게 되었다.
  923.  
  924. 10.
  925.  
  926. 모래시계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구천무극창을 펼치던 것을 그만두고 란 나 찰로 도망친다.
  927.  
  928. 나는 쓰레기다.
  929.  
  930. 13.
  931.  
  932. 이대로는 안 된다. 뒤늦게 그것을 자각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연기하는 거야.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하지만 맞지 않지. 그래서 나의 검은 추악해. 남궁희원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그러면서 구천무극창을 펼쳐본다.
  933.  
  934. 잘 되지 않았다.
  935.  
  936. 15.
  937.  
  938. 지학과의 비무를 떠올려라. 지학에게서 배운 것을 떠올려라. 의식의 세계에서 기억은 뚜렷하게 떠오른다. 소림에서 했던 수행을 나는 잊지 않았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939.  
  940. 27.
  941.  
  942.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찔러도 손에 물집이 잡히지 않아. 지치지 않아. 대체 몇 번이나 창을 찔렀지?
  943.  
  944. 30.
  945.  
  946. 창이란 찌르고 휘두르는 것. 창간과 창영과 창두와 창준과 중화창은 천하절기이며 소림의 창은 그 중에서도 특출나. 그런데 나는 중이 아니잖아.
  947.  
  948. 41.
  949.  
  950. 나라는 인간은 왜 이리도.
  951.  
  952. 50.
  953.  
  954. 모래시계가 절 반 남았어.
  955.  
  956. 53.
  957.  
  958. 그런데 나는 무엇을 얻었지?
  959.  
  960. 60.
  961.  
  962. 조금 만 더.
  963.  
  964. 74.
  965.  
  966. 이대로 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아. 죽여야 한다. 나를 죽인다. 나약하고 쓰레기 같던 나 자신을 죽여야 한다. 죽여서 만들어진 공백에 나는 무엇을 채울까. 그를 채우는 나는 나인가?
  967.  
  968. 81.
  969.  
  970. 어르신. 죽여서 죄송합니다. 나 따위가 당신을 죽여서는 아니 되었는데.
  971.  
  972. 90.
  973.  
  974. 내가 얼마나 재능이 없는지를 알았다. 모래가 조금 남았음에도 나는 거의 진보하지 못했다. 충실하지 못하였는가? 10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창을 휘둘러 왔는데.
  975.  
  976. 열등감을 전해 주는 천재가 곁에 없음에도 나는 그를 느끼고 있다. 이전에 데니르에게 이 시련을 받았던 10명. 그들은 모두가 처음의 100년을 쉽게 넘겼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뭐지?
  977.  
  978. 열심히 했다고? 정말로?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싸지도 않고.
  979.  
  980. 열심히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창을 쥐지 않고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었으니까.
  981.  
  982.  
  983.  
  984. 바뀌는 것은 힘들어. 약한 나 자신을 죽이고 싶어서, 더 강해지고 싶어서 이곳에 왔으면서. 나라는 인간은 여전히 걷지 못하고 기고 있지. 걸음마를 배우지 못했어. 뒷걸음질만 배웠어. 아, 플람. 플람. 그때의 나는 너를 극복한 것이 아니었는데. 므쉬. 당신은 틀렸던 거야.
  985.  
  986. 95.
  987.  
  988. 그만하자.
  989.  
  990. 97.
  991.  
  992. 그만해서는 안 돼.
  993.  
  994. 99.
  995.  
  996. 모래가 다 떨어져간다.
  997.  
  998. 100.
  999.  
  1000. “다시.”
  1001.  
  1002. 이성민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니르가 말했던, 이 시련에 도전한 다른 자들은 처음의 100년을 쉽게 보내고 무언가를 얻었다고 했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1003.  
  1004. 100년 동안, 여태까지 해왔던 것의 몇 배나 되는 만큼 창을 휘둘렀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무공은 크게 진보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노 클래스의 보정도 없고 스킬의 강제 성장도 없다. 단순히 휘둘러서, 휘둘러서. 그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보아야 하고 그를 통해 직접 나아가야 한다.
  1005.  
  1006. 이성민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100년 동안… 몇 번이나 절망했을까. 몇 번이나 포기했을까. 창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 과연 몇 년이나 되었을까. 100년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나.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얻었나.
  1007.  
  1008. 그대로다.
  1009.  
  1010. 이성민은 질질 발을 끌면서 모래시계를 향해 다가갔다. 모래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모래시계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냥…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될까?
  1011.  
  1012. 아니. 안 된다. 여기서 그만두면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다시 외면하고 도망쳐서, 그럼에도 마음 속으로는 나는 변했다. 해냈다. 그래도 극복해냈다 라고 역겨운 자기위로를 하겠지. 그러다가 또 벽을 맞닥트리면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낄 테고.
  1013.  
  1014. 그게 싫다.
  1015.  
  1016.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모래시계를 잡았다.
  1017.  
  1018. [병신.]
  1019.  
  1020. 데니르의 비웃음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고, 200년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1021.  
  1022. 무력함을 알아라. 약함을 알아라. 못남을 알아라. 그를 떨쳐내라. 버려라. 바뀌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뀌어라. 조금 바뀌었다고 만족하지 마라. 갈구하고 갈구하고 계속, 의식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래가 상당량 떨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나는 잠깐 미쳤었구나. 아니면 꽤 오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미쳐버린 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1023.  
  1024. 아니. 그건 궁금하지 않아. 다만 시간이 아깝다고 여겼다. 나약한 정신도 경멸스러웠다.
  1025.  
  1026. 시간은 넘치도록 있었다. 이곳에서의 수행이 현실의 몸뚱이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과거로 회귀한 초기에 확실히 느껴왔다. 그 시기의 이성민이 살아가게끔 할 수 있었던 것. 이성민이 전생과는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류로나마 살아왔던 용병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1027.  
  1028. 창법의 수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환기하는 기분으로 무영탈혼의 수행을 시작했다. 시간은 많다. 이 넘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필요는 없다.
  1029.  
  1030. 버티기만 하면 된다.
  1031.  
  1032. 어떤 식으로든, 미치지만 않으면 된다.
  1033.  
  1034. 모래시계가 절반 정도 남았다. 100년이 흐른 것이다. 이번의 100년은, 처음 겪은 100년과 비교해서 훨씬 더 보람이 있었다. 몇 걸음은 앞으로 나아갔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기본기도, 구천무극창도, 무영탈혼도.
  1035.  
  1036. 자하신공을 익혀 보자.
  1037.  
  1038. 어그러진 심 기 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심법의 수행이 필요하다. 심법이 경지에 이른다면 자연스럽게 벽과 마주하게 되고, 그 벽을 어떻게 뚫느냐는 본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 세계에도 그런 벽을 마주하는 것이 가능할까.
  1039.  
  1040. 해보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부족하면 시계를 뒤집자. 그나마 제대로 된 목적을 잡게 된 것 같아서, 이성민은 즐거움을 느꼈다.
  1041.  
  1042. 몇 백 년 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1043.  
  1044. 모래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200년이 끝났다. 명상하고 있던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1045.  
  1046. “이쯤 되면 대단하군.”
  1047.  
  1048. 이성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진 100년을 자하신공에 매달렸는데 벽은커녕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성민은 새삼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쓰레기같은 것인지 깨달았다. 그래도 의식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는 무공에 매진하는 대로 조금씩이나마 성취가 올랐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성취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스킬로 익힌 무공과 노 클래스, 하급 무골의 성장 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1049.  
  1050. 하지만 의식 세계에서는 그런 보정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곳의 이성민은 그 어떤 성장 보정도 받지 않고 있다. 스킬로 무공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무공을 펼치고 있다. 그러니 성장이 늦다. 이성민은 새삼 지학이나 남궁희원과 같은, 이계인이 아닌 이 세계에서 태어난 무인들이 얼마나 경이적인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존재들인지 자각했다. 그들은 스킬 같은 것을 쓰지도 않고서 그만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1051.  
  1052. ‘위지호연이 괴물처럼 강할만도 해. 그녀는 압도적인 재능과 더불어 스킬의 보정도 받고 있으니까.’
  1053.  
  1054. 자. 여기까지.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이성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무기력함을 느꼈으나, 최근에는 그것도 거의 사라졌다. 자하신공은 익히고 익혀도 성장이 거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머리는 맑게 해주었다.
  1055.  
  1056. “지금까지 300년인가.”
  1057.  
  1058.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모래시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시계를 뒤집으면, 300년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 시간을 모두 마치면 이성민은 600년치의 수행을 하게 된 것이다.
  1059.  
  1060. 그렇게 생각하면 기가 질렸지만, 이성민은 망설임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1061.  
  1062. 600년이 넘어서야 무공을 익히는 것이 즐겁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1063.  
  1064. 자하신공만 매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 기, 체. 자하신공만 익혀서는 그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의식 세계에서 주화입마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무공들을 고루 익힐 필요가 있었다.
  1065.  
  1066. 300년이라는 시간은 나누기에 편했다. 모래시계에 눈금을 그린다. 셋으로 나뉜 눈금은 하나 당 대충 100년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100년을 자하신공을 익히고, 100년을 구천무극창을 익히고, 100년을 무영탈혼을 익히자.
  1067.  
  1068. 그렇게 생각했다.
  1069.  
  1070. 300년의 수행은 지겨우면서도 즐거웠다. 의외로 머리는 맑았다. 처음 이 시련을 시작한 100년은 미칠 것처럼 끔찍했지만, 이후의 수련은 오히려 처음보다 나았다. 익숙해 진 것일까?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1071.  
  1072.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에 대한 자학도 하지 않는다. 열등감도 자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 처박아 두고 있을 뿐, 나중이 되면 또 머리를 들어 올릴 지도 모른다.
  1073.  
  1074. 그러지 않도록.
  1075.  
  1076. 다시 모래 시계를 뒤집는다.
  1077.  
  1078. 목적을 위로 올린다. 이성민은 검귀와의 싸움에서, 검귀에게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주었던 창로를 다시 재현하고자 해보았다. 실패했다. 600년을 수행하였으나 이성민은 그때, 검귀를 죽였던 창로에 도달하지 못했다.
  1079.  
  1080. “좋아. 몇 번 해보고 성공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지.”
  1081.  
  1082. 이성민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예상했던 실패가 즐거웠다. 실패에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넘어가자. 더, 더 먼 곳으로.
  1083.  
  1084. 1000년이 되었을 때 벽을 보았다. 이성민은 배를 잡고 웃었다.
  1085.  
  1086. “1000년 동안 수행해서 초절정의 벽을 보다니!”
  1087.  
  1088. 데니르는 이성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 시련은 단순히 의식세계에서 의식만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성취는 늦다. 아무리 수행해도 그 효율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천재들도 미쳐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좌절에 익숙하지 않고 실패에 익숙하지 않다. 스스로가 천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몇 백 년 동안 매진해도 실패하기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1089.  
  1090. 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익숙했다. 자신이 미련하다는 것도. 등신이라는 것도. 재능이 없다는 것도. 열등감과, 자기비하와, 절망에 익숙하다는 것도.
  1091.  
  1092. “1000년을 해서 벽을 보았으니. 벽을 넘으려면 얼마나 더 해야 할까?”
  1093.  
  1094. 이성민은 즐거운 기분을 느끼면서 도전했다.
  1095.  
  1096. 500년이 시작된다.
  1097.  
  1098. “닿았다.”
  1099.  
  1100. 검귀를 죽인 창로를 재현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 단순히 재현만 해냈다. 그 이상의 것은 해낼수가 없었다. 똑같은 창로를 그릴 수는 있었지만 그 위력으로 다른 창법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1101.  
  1102. “역시 나야. 불쌍한 병신 새끼.”
  1103.  
  1104. 이성민은 흥얼거리면서 창을 쥐었다.
  1105.  
  1106. 600년.
  1107.  
  1108. “나는 언제 초절정 고수가 되는 거지?”
  1109.  
  1110. 멍한 생각.
  1111.  
  1112. “어쩌면 나는 이미 미쳤을 지도 몰라. 아니면 죽었던가.”
  1113.  
  1114. 그래도
  1115.  
  1116. “조금만 더 할까.”
  1117.  
  1118. 이성민은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1119.  
  1120. ======================================
  1121. < 프롤로그-3 >
  1122.  
  1123.  
  1124.  
  1125. “이… 미친 새끼…”
  1126.  
  1127. 데니르는 멍하니 앉아 있는 이성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성민이 의식 세계로 들어가고서 그리 많은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현실’의 시간은 그러했다. 길어봐야 5분 정도다.
  1128.  
  1129. 하지만 이곳과는 다른 의식의 세상 속에서. 이성민은 벌써 200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믿을 수도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130.  
  1131. 여태까지 데니르에게서 이 시련을 받아 도전한 사람은 10명이다. 그 중 7명은 5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정신이 붕괴했다. 천재라고 인정받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성장이 강제적으로 억제되어 있는 의식세계에서의 절망을 쉽게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다. 절망에 미쳐 정신이 붕괴된 이들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져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식세계에서의 죽음은 정신의 죽음이었고, 그것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치료마법과 포션으로도 정신의 죽음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1132.  
  1133. 시련을 극복해 낸 3명. 그들은 제각각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이는 1000년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고독과 미침을 견딜 수 없었노라고. 1000년을 버텨낸 인간은 그렇게 말했었다.
  1134.  
  1135. 그런데 저 인간은 2000년째 의식 세계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타고난 집념인가? 아니면 근성? 필사적인 그런 것?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니르가 본 이성민이라는 인간은 그렇게까지 그릇이 넓지 않았다. 오히려 저 인간의 정신력은 다른 인간과 비교해서 나약하다고 봐야 했다.
  1136.  
  1137. 그런데 어떻게 2000년이나 버티고 있는 것일까.
  1138.  
  1139. ‘도중에 몇 번이나 정신이 붕괴했었어.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했지. 이건… 불가능해. 붕괴 된 정신이 어떻게?’
  1140.  
  1141. 2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성민의 정신은 몇 번이나 붕괴되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정신을 차리더니 수행을 계속한다.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의식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시련이 끔찍한 것이다.
  1142.  
  1143. 몇 백 년 이상의 기억을 조금도 망각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서 혼자만 움직이고 반복하여 수련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성장이 억제되어 있기에 수련을 거듭해도 얻는 것은 보잘 것 없다. 이 시련은 그런 것이다. 견딜 수만 있다면 무한하게 늘릴 수 있는 의식 속의 시간에서, 느린 속도로나마 앞으로 나아가 무언가를 얻게 하는 것이 데니르의 시련이다. 므쉬의 시련이 연속된 금제를 통해 전체적인 성장을 가속시킨다면, 데니르의 시련은 체감하는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정신적인 성취를 얻게 만든다.
  1144.  
  1145. “아.”
  1146.  
  1147. 닫혀 있던 이성민의 입이 열렸다. 데니르는 이성민이 목소리를 내자 흠칫하고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감겼던 눈이 떠지고, 이성민은 멍한 눈을 깜박거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1148.  
  1149. “아… 아아. 아?”
  1150.  
  1151. 이성민은 입술을 뻐끔거리면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륵. 이성민의 코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이성민은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내려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1152.  
  1153. “…당연한 일이다. 정신이 2000년, 아니, 210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어. 뇌가 터지지 않은 것은 내 덕분이니 감사해라.”
  1154.  
  1155. “감사… 그래. 감사. 감사해. 감사합니다.”
  1156.  
  1157. 이성민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손등으로 콧가를 벅벅 문지르더니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내려 보면서 두 눈을 끔벅거렸다.
  1158.  
  1159. “몸이 무거워.”
  1160.  
  1161. “버르장머리가 없어졌군.”
  1162.  
  1163. “그야… 2100년을 더 살았으니까. 꿈은 아니겠지. 기억이 너무 확실해.”
  1164.  
  1165.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1166.  
  1167.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고, 하지 않고를 반복했지. 기계가 된 기분이었나. 아니, 기계가 차라리 나았을 지도.”
  1168.  
  1169. “너는 도중에 몇 번이나 미쳤었다.”
  1170.  
  1171. “나도 알아. 가끔 의식을 잃는 순간이 있었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모래가 제법 많이 떨어져 있었어.”
  1172.  
  1173. “넌 괴물이야.”
  1174.  
  1175. 데니르가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1176.  
  1177. “나는 아직도 네가 어떻게 이것을 해낸 것인지 모르겠다. 정신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정신의 죽음인데…”
  1178.  
  1179. “나도 잘 모르겠는데.”
  1180.  
  1181. 이성민은 멍한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1182.  
  1183. “하지만 해냈어. 더 해볼까 했지만…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지. 더 했다가는 진짜로 미쳐 죽었을 거야.”
  1184.  
  1185. 과연 그럴까. 이미 그 이전에도 몇 번이나 미쳐 죽었었는데.
  1186.  
  1187. “인격이 조금 변한 것 같기도 하군.”
  1188.  
  1189. “2100년을 살았으니까.”
  1190.  
  1191. “그 정도면 양반인 거야. 1000년을 살다 나온 놈은 사지분간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네가 그 정도로 인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기형적인 일이다.”
  1192.  
  1193. “그… 런가?”
  1194.  
  1195.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몸을 움직여 보았다. 스트레칭 하듯이 관절을 꺾어 보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을 쥐었다 펴던 이성민은 단전 속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것을 본 데니르가 기겁하면서 물었다.
  1196.  
  1197. “잠깐, 잠깐! 너 설마 여기서 무공을 펼칠 셈이냐?”
  1198.  
  1199. “아… 그래. 여기는 의식 세계가 아니지. 이곳에서 휘두르면 안 돼.”
  1200.  
  1201.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발을 질질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데니르는 불안을 가득 담은 얼굴로 이성민의 뒤를 쫓았다.
  1202.  
  1203. 뜰로 나오면서, 이성민의 자신의 육체에서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위화감이었다. 의식 세계의 이성민은 2100년의 시간을 수행했다. 반면에 현실의 육체는 고작해야 5분 동안 앉아 있었을 뿐이다.
  1204.  
  1205. 의식 세계에서 사용하던 아스트랄 바디와 진짜 육체의 위화감에는 2100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1206.  
  1207. “창… 창…”
  1208.  
  1209.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손을 쥐었다가 폈다. 본래라면 이렇게 생각한 순간 창이 쥐어졌어야 했다. 데니르는 그런 이성민을 보고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1210.  
  1211. “여기는 의식 세계가 아니야. 우선 그를 이해해라.”
  1212.  
  1213. “위화감이 짙어.”
  1214.  
  1215. “알아.”
  1216.  
  1217. 데니르가 손을 움직이자, 그의 손 위에 새하얀 구체가 만들어졌다.
  1218.  
  1219. “이건 네 기억의 백업이다. 네가 정신세계에 들어가 있을 때, 기존에 네가 가지고 있던 기억만을 추출했지. 받아라.”
  1220.  
  1221. 데니르가 구체를 던졌다. 이성민은 머리 근처로 다가오는 구체를 빤히 보았다.
  1222.  
  1223. “뭐해? 잡지 않고.”
  1224.  
  1225. “잡으면 어떻게 되지?”
  1226.  
  1227. “네가 한 2100년의 기억과 수행하기 전의 기억이 뒤섞이겠지. 위화감을 덜어내는 것에 도움이 될 거다.”
  1228.  
  1229. “그래?”
  1230.  
  1231. 이성민은 입꼬리를 비틀고서 킬킬 웃었다.
  1232.  
  1233. “한심하던 시절의 기억이군. 그래도 필요해.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있으니까.”
  1234.  
  1235.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구체를 잡았다. 머릿속이 확하고 뜨였다. 잠시 뒤에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1236.  
  1237. “후우.”
  1238.  
  1239. 기억이 더해졌다고 하여 위화감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세계가 정신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이성민은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내려보다가 아공간 포켓에서 창을 꺼냈다.
  1240.  
  1241.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창법을 펼쳐 보았다. 구천무극창을 펼친 뒤에는 무영탈혼을 펼쳤고, 그 뒤에는 창을 내려 놓고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몸을 점검해 보던 이성민은 소리 죽여 웃었다.
  1242.  
  1243. “내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아.”
  1244.  
  1245. “그야 그렇겠지. 2100년을 수련한 몸뚱이와 지금의 네 몸뚱이는 달라. 기억은 가지고 있겠지만, 그 몸으로 네가 경험해 본 수준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1246.  
  1247. “내가 재능이 없음은 그 세계에서 몇 천 몇 만 번이나 느꼈어. 어쩔 수 없지. 그게 나란 인간이니까.”
  1248.  
  1249.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성민은 데니르를 향해 물었다.
  1250.  
  1251. “당분간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싶은데.”
  1252.  
  1253. “뭐? 왜?”
  1254.  
  1255.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집 안에 들이지 않아도 좋아. 마당에서라도 잘 테니까.”
  1256.  
  1257. “이… 으… 후우!”
  1258.  
  1259. 뭐라고 반발하려던 데니르는, 결국에 눈을 질끈 감고서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1260.  
  1261. “마음대로 해라.”
  1262.  
  1263.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정리해 본다.
  1264.  
  1265. 백소고의 죽음을 막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남은 시간은 1년. 그 1년 동안 이성민이 해야 할 일은, 정신세계에서의 수련을 통해 얻은 것들을 현실의 육체에 새겨 넣는 것이다.
  1266.  
  1267. ‘내 몸은 심, 기, 체가 엉켜 있어.’
  1268.  
  1269.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았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은 이성민을 한 차례 높은 경지로 이끌어주었지만, 이성민의 육체는 그 심득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검귀와의 싸움도 그러했다. 심득이 이끄는 방향으로 육체가 움직였지만, 그것에 그쳤다.
  1270.  
  1271. 현재 이성민의 몸에서 단연 앞서고 있는 것은 마음이었다. 기와 체는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다. 소림에서의 수행을 통해 그것을 어느 정도 맞춰두기는 했지만, 데니르의 시련은 기껏 맞춘 심기체의 균형을 다시 엉키게 만들었다.
  1272.  
  1273. ‘환골탈태를 해야 해.’
  1274.  
  1275. 우선해야 할 목표는 임독양맥을 뚫어 환골탈태를 하는 것이다. ‘경험’은 있었다. 어디까지나 정신 세계에서의 경험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1276.  
  1277. ‘그 세계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에 1500년 정도 걸렸었지.’
  1278.  
  1279.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도 초절정의 경지가 도달하는 것에 15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도달한 기억은 있다. 구천무극창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 무영탈혼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 자하신공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1280.  
  1281. 이성민은 창을 내려놓고 가부좌를 틀고서 앉았다. 다시 한 번.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정신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개운했다. 육체의 위화감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 맞지 않는 위화감을 맞춰가는 과정은 즐거울 것 같았다.
  1282.  
  1283. ‘앞으로 1년.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1284.  
  1285. 어디로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1286.  
  1287. 봄이 되었다.
  1288.  
  1289. 산문의 젊은 무승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사내를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까까지 이곳에 서서 계단 아래 쪽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 사내가 갑자기 시야에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냥 자연스러운 출현이었기에, 무승은 사내를 포착하고도 놀라는 것이 더뎠다.
  1290.  
  1291. ‘고수…!’
  1292.  
  1293. 하지만 사내가 다가올수록 그것을 알게 되었다. 사내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기세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무공을 익힌 무승은 오히려 그것이 진짜 고수의 증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294.  
  1295. “누구십니까?”
  1296.  
  1297. 무승이 경계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사내는 머리 위에 쓰고 있던 방갓을 들어 올리면서 무승을 올려 보았다.
  1298.  
  1299. “승저님.”
  1300.  
  1301. “…어…”
  1302.  
  1303. 사내가 웃으면서 불명을 부르자, 승저는 입술을 쩍하고 벌렸다.
  1304.  
  1305. “이성민님?”
  1306.  
  1307. 1년 만에 소림으로 돌아왔다.
  1308.  
  1309. ======================================
  1310. < 프롤로그-4 >
  1311.  
  1312.  
  1313.  
  1314. “오랜만입니다.”
  1315.  
  1316. 이성민은 산문을 오르면서 승저에게 말을 걸었다. 승저는 쩍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잠깐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성민을 보던 승저가 머뭇거리며 머리를 끄덕거린다.
  1317.  
  1318. “예… 오… 오랜만입니다.”
  1319.  
  1320. 이성민이 불영 대사의 심부름으로 화산이 있는 드리무어로 떠난지 1년이 흘렀다. 화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에리아 전역에 퍼졌고, 소림에도 그 사건이 전해졌다.
  1321.  
  1322. “그… 1년 전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큰 일을 하셨더군요.”
  1323.  
  1324.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1325.  
  1326.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할 뿐,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승저는 그것을 못내 아쉽게 여겼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1327.  
  1328. “지학님은 안에 계십니까?”
  1329.  
  1330. “아… 예. 아마 불영 대사님의 거처 쪽에 계실 겁니다.”
  1331.  
  1332. 승저가 대답하자 이성민은 씩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승저가 합장을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1333.  
  1334. “어?”
  1335.  
  1336.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던 이성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337.  
  1338. 1년 만에 오는 소림이었지만 이성민은 굉장히 오랜 만에 찾아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데니르를 통해 백업 된 기억을 덧씌우기는 했지만,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보냈던 세월은 육체가 아닌 정신에 확실하게 누적되어 있었다.
  1339.  
  1340. “…음.”
  1341.  
  1342. 불영 대사가 거하는 동굴의 근처에 왔을 때. 이성민은 그런 소리를 들었다. 사실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이성민은 그의 기척을 눈치 채고 있었다.
  1343.  
  1344.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1345.  
  1346. 지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민이 기억하는 지학은 표정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지학은 이성민을 보고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1347.  
  1348.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1349.  
  1350. 오랜만에 보는 지학의 얼굴이 반가웠다. 그는 살짝 목례하면서 지학에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일. 지학은 이성민이 답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1351.  
  1352. “이성민님이 검귀를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1353.  
  1354. “요행이었습니다.”
  1355.  
  1356. “화산파 장문인을 살해한 검귀를 쓰러트렸다는 것이 요행이었다는 겁니까?”
  1357.  
  1358. “요행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그때의 저는 검귀보다 약했습니다.”
  1359.  
  1360. “…검귀가 방심했던 겁니까?”
  1361.  
  1362. “그럴 지도 모르죠.”
  1363.  
  1364. “…언제입니까?”
  1365.  
  1366. 지학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그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머리를 갸웃거렸다.
  1367.  
  1368. “무슨?”
  1369.  
  1370. “언제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신 겁니까.”
  1371.  
  1372. “아…”
  1373.  
  1374. 이성민은 뒤늦게 지학의 말을 이해하고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멋쩍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1375.  
  1376. “반 년 전이었습니다.”
  1377.  
  1378. 정신세계에서는 초절정의 벽을 넘는 것에 천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도전하자, 반 년도 되지 않아 초절정의 벽을 뚫을 수가 있었다. 데니르의 시련에 성장이 크게 억제되어 있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한 번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은 처음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1379.  
  1380. “반 년… 반 년입니까.”
  1381.  
  1382. “왜 그러십니까?”
  1383.  
  1384.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성민님의 눈을 보고 있으니, 반 년이라는 시간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1385.  
  1386. “반 년 전에 초절정의 벽을 넘은 것은 사실입니다.”
  1387.  
  1388. “압니다. 단지… 이성민님의 눈은 그 이상의 수행을 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1389.  
  1390. 그 말에 이성민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성민은 등 뒤에 비껴메고 있던 창을 손으로 잡았다.
  1391.  
  1392. “괜찮으시다면 비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1393.  
  1394. “얼마든지요. 다만… 조금 걱정되는 군요. 제가 보는 것이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성민님과 비무하면 저는 전력을 다해야 할 겁니다.”
  1395.  
  1396. “정말입니까?”
  1397.  
  1398.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1399.  
  1400. 지학은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칠십이종 절예를 두루 섭렵한 지학이었지만, 이성민은 지학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이 무기를 쓰지 않는 권법과 장법, 각법을 모두 아우르는 무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401.  
  1402. “관둬라.”
  1403.  
  1404. 이성민이 창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지학과 이성민 사이를 단절했다. 지학은 움찔 몸을 떨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1405.  
  1406. 동굴의 입구에 불영대사가 서있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성민은 불영대사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1407.  
  1408. “어째서 말리시는 겁니까?”
  1409.  
  1410. “지금 너희 둘이 싸운다면 비무로 끝나지 않을 게야. 누구 하나가 패배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1411.  
  1412. “…으음.”
  1413.  
  1414. 불영대사의 말에 지학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 말은 즉, 이성민의 무위가 지학과 동등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415.  
  1416. “둘 중 누구도 패배를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면. 지학 네가 죽거나 불구가 되겠지.”
  1417.  
  1418. 불영대사가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지학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과 불영대사를 돌아 보았다. 이성민은 불영대사의 말을 들으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1419.  
  1420.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해주시는 것 아닙니까.”
  1421.  
  1422. “끌끌끌! 아해야, 보이지 않던 1년 동안 거짓부렁이 늘었구나. 너는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냐.”
  1423.  
  1424. “…내가 어느 정도까지 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1425.  
  1426. “어느 정도까지. 누구와 비교해서 말이냐?”
  1427.  
  1428. “위지호연.”
  1429.  
  1430. 이성민의 대답에 지학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위지호연. 그녀는 지학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를 안겨 준 장본인이었고, 지학에게 세상의 넓음을 자각시켜 준 인물이었다.
  1431.  
  1432. “흠.”
  1433.  
  1434. 불영대사가 턱을 어루만졌다.
  1435.  
  1436. “아해야. 나는 지금의 위지호연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산에 찾아와, 소림을 보고 싶다고 말하던 위지호연 뿐이야. 그 패왕의 운명을 가진 천재가 그 후로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지금의 위지호연과 지학을 패배시켰을 때의 위지호연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하겠지.”
  1437.  
  1438. “저와 비교해 본다면 어떻습니까.”
  1439.  
  1440. “너는 이 산에 처음으로 왔던 때의 위지호연만도 못해.”
  1441.  
  1442. 불영대사가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1443.  
  1444. “이 1년 간 네가 무슨 수행을 하였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1년 전에, 네가 성하 늙은이를 죽인 검귀라는 놈을 죽였다는 소문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성하 도인에게도 십초지적이 안 되었거든.”
  1445.  
  1446. 이성민은 그 말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성민은 초절정의 문을 간신히 엿보고 있던 시절이었고, 성하 도인은 확실한 초절정 고수였다.
  1447.  
  1448. “그런 네가 성하 도인을 죽인 검귀를 죽였다니. 내가 그를 어찌 믿었겠느냐? 뭔가 소문이 와전되었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너는… 끌끌! 1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냐?”
  1449.  
  1450.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451.  
  1452. 지난 1년 간. 이성민은 데니르의 집에 살면서 정신세계에서의 경험을 갈무리했다. 그를 바탕으로 반 년이 지나 초절정의 벽을 넘을 수 있었고, 임독양맥이 뚫리면서 환골탈태를 이루었다.
  1453.  
  1454. 그리고 다시 반 년. 초절정 고수가 되었으나 이성민은 만족하지 못했다. 정신세계에서 보았던, 아스트랄 바디로 해냈던 이상적인 창로에 근접하고자 몇 번이고 창을 휘둘렀다.
  1455.  
  1456. 잘 되지 않았다. 정신은 저 먼 곳을 보는데 육체는 아직 그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심 기 체의 엉킴을 완전히 풀어놓는 것에는 실패했다.
  1457.  
  1458. “위지호연에게 얼마나 가까워진 것인지. 그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냐.”
  1459.  
  1460. “나름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1461.  
  1462. “확신은 얻지 못했겠구나. 너는 위지호연보다 약하니까.”
  1463.  
  1464.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465.  
  1466. 이성민은 풋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지금 수준에서 위지호연의 이상가는 무력을 갖게 되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아직 이성민은 자신이 보고, 도달했던 경지에 완전히 닿지 못했다.
  1467.  
  1468. '전부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1469.  
  1470. 불영대사가 아무리 대단한 통찰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직접 무공을 펼치지 않은 이성민의 전부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471.  
  1472. 지학과 불영대사를 느긋하게 하루라도 묵고 가라고 말을 하였지만, 이성민은 숭산을 내려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숭산에 들른 것은 어디까지나 이곳이 가고자 하는 길의 도중에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1473.  
  1474. 앞으로 두 달 뒤가 되면 던전이 열린다.
  1475.  
  1476.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품지 않았다. 그런 식의 자문과 고찰은 이미 몇 백 몇 천 번을 해왔다. 그렇게 해서 내린 답에 자괴감과 열등감을 갖고 결국에는 절망하여 이를 악물게 된다는 것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1477.  
  1478. 그러니 하지 않는다.
  1479.  
  1480.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대신에 해야 한다.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 이성민은 목 뒤에 걸치고 있던 방갓을 다시 머리 위에 눌러썼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백소고의 죽음을 막는 것이다.
  1481.  
  1482. 그 뒤에는 불영대사에게 깃든 신령이 조언한대로, 북쪽으로 가서 기인과 만나야 한다. 그 ‘기인’이라는 것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1483.  
  1484. 그 뒤에는.
  1485.  
  1486. 위지호연과 약속했던 날이 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1487.  
  1488. 프레스칸을 찾아야 했다.
  1489.  
  1490. 현재 이성민의 가슴 속에는 검은 심장이 있다. 검은 심장을 갖게 되고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성민은 아직도 이 심장이 대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491.  
  1492. 이 뭔지도 모를 심장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프레스칸 뿐이다.
  1493.  
  1494. ‘…이게 문제야.’
  1495.  
  1496. 이성민은 자신의 가슴을 힐긋 내려 보았다. 가슴을 열어 그 안에 뛰는 심장의 색깔을 학인해 보고 싶다고. 이성민은 몇 번인가 그런 충동을 느꼈었고,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런 충동을 느낄 때마다 이성민은 정신세계에서의 오랜 수행이 자신에게 확실한 광기를 심어 놓았음을 자각하였다.
  1497.  
  1498. 심장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1499.  
  1500. 심장을 얻게 된 이후로 겪은 일들 중에서, 몇 가지가 이성민의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아이네가 습격했을 때. 이성민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강기의 사용법을 깨달았다. 그 순간에 강기를 발현해내지 못했다면 이성민은 아이네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1501.  
  1502. 그와 비슷한 경험은 한 번 더 있었다. 검귀와 싸웠을 때. 검귀의 검이 이성민의 몸을 베어내려는 순간. 이성민은 무의식적으로 창을 뻗어 검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당시에는 앞선 심득이 육체를 강제로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정신세계의 수행과 현실에서 경험을 정리해가는 과정을 통해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1503.  
  1504. 아직도 이성민은 검귀를 죽였을 때의 창로를 재현해 낼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해낸 것이라고 하여도, 검강을 발현하고 그 뒤에도 효율이 나쁘게나마 검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과는 달리, 검귀를 죽였을 때의 창로는 아무리 해봐도 재현이 되지 않았다.
  1505.  
  1506. 결국 생각은 검은 심장에까지 이르렀다. 검은 심장을 얻은 이후, 이성민은 목숨의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그를 극복하며 살아남아 왔다.
  1507.  
  1508. ‘어쩌면 검은 심장 때문일지도.’
  1509.  
  1510. 그것은 그리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다. 검강을 깨달았을 때에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느낀 감격을 기억하고 있다. 전생에서는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를, 이번 생에서 도달하였다는 것에 이성민은 진심으로 감격했었다.
  1511.  
  1512. 하지만 그것이 검은 심장 덕분이라면.
  1513.  
  1514. “…뭔지도 모를 놈을 계속 가슴에 품고 있을 수는 없지.”
  1515.  
  1516.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방갓을 깊이 내렸다.
  1517.  
  1518.  
  1519.  
  1520. ======================================
  1521. < 잠자는 숲-2 >
  1522.  
  1523.  
  1524.  
  1525. 97.
  1526.  
  1527. 거한이 달려들었다. 그는 이성민에게서 별 다른 위험이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 이성민의 전부를 파악했다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지금의 거한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1528.  
  1529. 이성민은 등 뒤로 손을 넘겨 창을 잡았다. 뽑은 창을 앞으로 향했을 때, 거한은 이미 이성민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바위처럼 커다란 주먹을 이성민의 몸을 향해 내리 찍었다.
  1530.  
  1531. 주먹이 정수리부터 으깨려 할 때 이성민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먹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이성민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이성민은 한 손으로 잡아 앞으로 들고 있던 창을 바깥으로 돌렸다. 란의 회전에 거한의 팔이 걸렸다.
  1532.  
  1533. 우두둑!
  1534.  
  1535. 끔찍한 소리가 났다. 거한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포장되어 있던 오른 팔이- 피를 뿌리며 멀리 날아가는 것만 보았다.
  1536.  
  1537. “귀가 안 먹었다고 하던데.”
  1538.  
  1539. 이성민이 중얼거렸다. 오른 팔을 통째로 뜯어냈음에도 이성민의 표정은 무심했다. 올려보는 눈동자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1540.  
  1541. “그러니까 이야기를…”
  1542.  
  1543. “크으으우우!”
  1544.  
  1545. 거한이 크게 숨을 삼켰다. 그는 고통으로 인해 벌개진 얼굴로 아랫 이를 빠득 씹었다. 그리고는 몸을 크게 비틀더니 하나 남은 왼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을 감싼 일렁거리는 기는, 거한이 절정의 벽을 뛰어넘은 고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1546.  
  1547. 하지만 이성민에게 있어서 거한의 경지는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이성민은 혀를 차면서 창을 들었다.
  1548.  
  1549.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하게 뻗어진 찌르지가 거한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거한은 비명보다 먼저 뒤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충격을 받은 나무가, 아니, 나무의 형상을 한 괴물이 입을 쩍 벌리더니 거한의 몸을 씹으려 들었다.
  1550.  
  1551. “끄아아악!”
  1552.  
  1553. 등을 크게 물어 뜯긴 거한이 비명을 지른다. 이성민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쿠로마루가 고함을 질렀다.
  1554.  
  1555. “부, 부탁입니다! 장로님을 살려주십시오!”
  1556.  
  1557. 그 외침에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갸웃거리는 이성민을 향해 쿠로마루가 급하게 덧붙였다.
  1558.  
  1559. “자, 장로님을 살려준다면… 제가 아는 건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1560.  
  1561.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이성민이 잡고 있던 창으로 바닥에 글을 적었다.
  1562.  
  1563. 이상한 말이군요. 저 남자는 당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1564.  
  1565. “그렇다고는 해도… 저에게 있어서는 스승과 같은 분이십니다.”
  1566.  
  1567. 사실 이성민이 여기서 쿠로마루의 말을 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장로라는 저 거한이 죽는다고 해도, 쿠로마루를 두들겨 패서라도 원하는 답을 들을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1568.  
  1569. 하지만 이성민은 쿠로마루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는 나무 괴물에게 씹히던 장로의 몸을 꺼내주었고, 내친김에 상처까지 지혈해 주었다. 쿠로마루는 뜯겨진 장로의 오른 팔에 붕대를 감는 이성민을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로는 이미 실신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1570.  
  1571. 이제 대화나 좀 해 봅시다.
  1572.  
  1573. 이성민이 바닥에 글을 적었다.
  1574.  
  1575. 쿠로마루는 귀명에 저항하기 위한 비약을 먹은 탓에 청각이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민은 귀찮게 일일이 글을 적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다. 덕분에 오가는 이야기는 일방적이었다.
  1576.  
  1577. 쿠로마루가 떠들었고, 이성민은 듣기만 했다.
  1578.  
  1579. 죽은 놈의 이름은 하야토라고 했다. 하야토는 쿠로마루와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 온 놈이라고 했는데, 그건 이성민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야토를 죽인 것은 이성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1580.  
  1581. 거한의 이름은 노부히로. 쿠로마루와 하야토에게 어린 시절부토 무공을 가르친 스승 격인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직전제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1582.  
  1583. ‘죄다 일본인이로군.’
  1584.  
  1585. 에리아는 온갖 차원에서 이계인을 소환한다. 지구에 한국인만 있는 것은 아니니, 일본인이나 중국인부터 미국인 러시아인 등등 온갖 국가의 국민들도 에리아에 소환된다. 그렇게 소환된, ‘지구’ 출신의 이계인들은 대부분이 노 클래스다.
  1586.  
  1587. 전부는 아니다. 김종현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지구 출신이면서도 마법 같은 이능을 익혀 소환되는 경우도 존재는 한다.
  1588.  
  1589. 아군 하나 없는 이계에서 ‘국가’라는 것은 넘치는 동질감을 갖게 만든다. 비록 다른 차원이라고는 해도, 같은 국가의 인물들이 모여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생의 이성민도 대한민국 해병대 전우회라던가 십이지신 최강 용띠 한국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1590.  
  1591. 쿠로마루들은 잠자는 숲에서 살아가는 일족이며, 그들 일족은 이 숲에서 살아가며 일족의 비원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1592.  
  1593. 비원?
  1594.  
  1595. 이성민이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쿠로마루는 잠깐 망설이다가 쓰러진 노부히로를 힐긋 보았다. 겁에 질린 그 눈을 보면서 이성민은 웃는 소리를 냈다.
  1596.  
  1597. 저 거한이 두려우면 아예 죽여 둘까요?
  1598.  
  1599. “아, 아니.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1600.  
  1601. 쿠로마루가 질겁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1602.  
  1603. “저희 일족의 비원은, 이 숲의 끝을 보는 겁니다.”
  1604.  
  1605. 쿠로마루가 대답했다. 숲의 끝.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1606.  
  1607. 이 숲의 끝에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1608.  
  1609.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저희 일족의 가주 뿐입니다.”
  1610.  
  1611. 알지도 못하면서 따르고 있다는 겁니까?
  1612.  
  1613. “그야… 저희는 이 숲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족의 비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고, 마을의 모두가 그렇습니다.”
  1614.  
  1615. 비원에 대해서 쿠로마루는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성민은 고문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고문을 통해 정보를 캐내려 한다면 쿠로마루보다는 저기 쓰러져 있는 노부히로에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1616.  
  1617. 엔비루스를 알고 있습니까?
  1618.  
  1619. “그게 누구입니까?”
  1620.  
  1621. 쿠로마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결국 이 대화를 통해 이성민이 얻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성민은 쿠로마루를 내버려 두고서 노부히로 쪽으로 다가갔다.
  1622.  
  1623. 뺨을 몇 번 두들기자 노부히로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들려다가, 이성민이 창준으로 어깨를 짓누르자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뉘였다.
  1624.  
  1625. “엔비루스를 알고 있습니까?”
  1626.  
  1627. 이성민은 노부히로를 내려 보면서 물었다. 노부히로는 팔이 뜯겨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에 노부히로는 많은 생각을 했다. 마을에서도, 일족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가진 자신이 어린 아이처럼 농락되었다. 가주를 제외하고서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이 없었다.
  1628.  
  1629. “엔비… 엔비루스…?”
  1630.  
  1631. “알고 있습니까?”
  1632.  
  1633. “모른다…!”
  1634.  
  1635. “당신네 일족이 추구하는 비원이라는 건 뭡니까. 이 숲의 끝에 무엇이 있는 겁니까.”
  1636.  
  1637. “내가 그것을 알려줄 것 같으냐…!”
  1638.  
  1639. “음.”
  1640.  
  1641. 이성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노부히로를 내려 보았다. 잠시 노부히로를 보던 이성민은 몸을 돌려 쿠로마루에게 다가왔다.
  1642.  
  1643. 당신네 마을은 어디에 있습니까?
  1644.  
  1645. “그… 그건…”
  1646.  
  1647. “쿠로마루! 뭐하는 것이냐!”
  1648.  
  1649. 쿠로마루가 더듬거리자 노부히로가 고함을 지른다.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하면서 쿠로마루를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이성민의 눈을 보면서 쿠로마루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1650.  
  1651. “마을은…”
  1652.  
  1653. 쿠로마루가 입을 벌리자, 노부히로가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이성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마을을 위해 몸을 날렸다. 진원진기까지 끌어올리며 필살의 심정으로 덤볐으나, 퍽!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빙글 돌았다. 어깨 뒤로 쏘아진 창두가 노부히로의 머리를 꿰뚫었다.
  1654.  
  1655. 쿠로마루는 어릴 적부터 무공을 가르친 마을의 장로가 머리라 터져 죽는 것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1656.  
  1657. 어쩔 수 없었습니다.
  1658.  
  1659. 이성민은 변명하듯이 바닥에 적었다. 내용은 변명이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쿠로마루는 진심으로 이성민이 두려워졌다.
  1660.  
  1661. “아… 안내하겠습니다.”
  1662.  
  1663. 쿠로마루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1664.  
  1665. 사신을 데리고 가는 기분이었다.
  1666.  
  1667. 쿠로마루는 걸음걸이가 자꾸 처지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랬다. 앞으로 향하는 쿠로마루의 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그것은 쿠로마루의 등 뒤에 따라 걷는 이성민 때문이었다. 이성민은 딱히 쿠로마루를 위협하지도 않았고, 쿠로마루가 늦게 걷는 것을 탓하지도 않았다.
  1668.  
  1669.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강한 고수를, 자발적으로 마을에 데리고 간다는 것이 쿠로마루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죽은 하야토와 노부히로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나도 그렇게 죽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670.  
  1671. ‘아니. 내가 죽어도 저 남자는 마을을 찾아 갔을 거야.’
  1672.  
  1673.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쿠로마루는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변명했다.
  1674.  
  1675. 쿠로마루의 뒤를 따르면서 이성민은 생각에 잠겼다. 쿠로마루의 일족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마을 하나라고는 하지만 그 숫자가 100명도 채 안된다고 한다. 쿠로마루네 이전 세대까지는 근친 교배로 마을을 유지했고, 거듭된 근친혼으로 유전병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외부에서 상대를 납치하는 식으로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하였다.
  1676.  
  1677. ‘그렇게 까지 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는데.’
  1678.  
  1679. 이성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근친혼과 납치까지 하면서 마을을 유지하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이 잠자는 숲에서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저들 일족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비원이라는 것이 몇 세대에 걸쳐 몰두할 만큼 대단한 것인가?
  1680.  
  1681. ‘전생의 기억에서 이들 일족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잠자는 숲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고.’
  1682.  
  1683. 이성민이 이 숲에 오지 않았을 때, 에는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이성민이 이 숲에 오게 되었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성민의 존재로 인하여,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전생과 다른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1684.  
  1685. ‘내가 알 바는 아니지.’
  1686.  
  1687. 성하 도인이 죽고, 검귀를 죽였을 때.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엉클어지고 있다. 데니르도 말했었다. 이성민의 존재가 본래의 흐름을 망치고 있다고.
  1688.  
  1689. 2100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1690.  
  1691. 결론은 내렸다.
  1692.  
  1693. 세상이 어찌 되건, 그건 이성민이 알 바가 아니었다.
  1694.  
  1695. 이성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1696.  
  1697. “도착… 했습니다.”
  1698.  
  1699. 쿠로마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700.  
  1701. 마을의 입구는 조악한 목책 따위로 보호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텃밭 같은 것도 목책 너머로 보였다. 목책은 있었지만, 그 앞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성민은 목책을 물끄러미 보면서 잠깐 동안 고민했다.
  1702.  
  1703. 고민이 너무 길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성민은 고민의 결과, 그리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1704.  
  1705. 퍼억!
  1706.  
  1707. 멀리서 날아 온 화살이 쿠로마루의 목을 꿰뚫었다. 쿠로마루는 컥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고,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끝내 뱉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살의를 느꼈고 공격이 올 것임도 알았다. 하지만 이성민은 쿠로마루에게 그를 언질해 주지 않았다.
  1708.  
  1709. 따지고 보면 이성민이 쿠로마루를 보호해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노부히로에게 쿠로마루를 보호해 주었던 것은, 쿠로마루에게 들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 전부였다.
  1710.  
  1711. “같은 일족이라던데도 가차 없군.”
  1712.  
  1713. 이성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하면서 창을 꺼냈다.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외인에게 적대적인 마을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족의 비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엔비루스가 이 숲에 온 것인지.
  1714.  
  1715. ‘이곳까지 오는데 들인 수고를 보답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1716.  
  1717.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1718.  
  1719. ======================================
  1720. < 잠자는 숲-3 >
  1721.  
  1722.  
  1723.  
  1724. 이성민은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
  1725.  
  1726. 그것은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을 죽이는 것에 유쾌함을 느낀 적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민에게는 당연했다.
  1727.  
  1728. 하지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1729.  
  1730. 날카로운 살의를 느낀다. 마을의 모두가 이성민을 적으로 인식하고 죽이려 들고 있었다. 이성민은 나자빠진 쿠로마루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구해 줄 의리가 없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구해줬어야 했나? 이성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1731.  
  1732.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는 늦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고서 성큼 앞으로 걸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호신강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민이 절정 고수였던 시절에도 무리하여 강기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때 사용할 수 있던 강기와 지금의 이성민이 펼치는 강기는 질적으로나 효율적으로나 비교가 안 된다.
  1733.  
  1734. “들립니까?”
  1735.  
  1736. 이성민은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물었다. 커다란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린다. 덮쳐오는 살의의 방향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성민은 연이은 공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아주 무식한 야만인들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1737.  
  1738. “나는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대화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1739.  
  1740. 다시 한 번. 이성민이 소리를 내어 말했다. 잠시 뒤 쏘아지던 살기가 누그러들었다. 그리곤 한 사내가 목책을 뛰어넘어 이성민의 앞으로 떨어졌다.
  1741.  
  1742. ‘고수야.’
  1743.  
  1744. 이성민은 사내의 다듬어진 기도를 보고서 그렇게 판단했다. 반박귀진을 완성한 초절정고수다. 다만 반로환동까지 한 초월적인 무인은 아닌 듯 싶었다. 중년의 사내는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면서 물었다.
  1745.  
  1746. “자네는 누구인가?”
  1747.  
  1748.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1749.  
  1750. 포권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성민은 살짝 목례하면서 대답했다. 사내는 이성민의 눈동자를 들여보며 이성민의 경지를 엿보려 들었다.
  1751.  
  1752. “자네는 기묘하군. 기와 체가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데, 심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해.”
  1753.  
  1754. 사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사내에게 물었다.
  1755.  
  1756. “당신은 누구십니까?”
  1757.  
  1758. “카즈야.”
  1759.  
  1760. 카즈야가 대답했다.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방금 전에 쿠로마루에게 들었던 일족의 가주를 맡은 자의 이름이 카즈야였다.
  1761.  
  1762.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1763.  
  1764. “그렇다면 우리야 고맙지. 자네가 전력으로 덤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야. 많지도 않은 일족인데 더 이상 머릿수를 줄이고 싶지 않군.”
  1765.  
  1766. “쿠로마루는 왜 죽인 겁니까?”
  1767.  
  1768. “처벌은 필요한 법이니까.”
  1769.  
  1770. 카즈야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1771.  
  1772. “노부히로 장로는 죽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실력의 차이를 알았을 텐데, 그를 무시하고 싸움을 걸었으니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눈앞에서 장로의 죽음을 보고도 자결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원수를 마을로 직접 데리고 온 어린 녀석은 처벌해야 하는 것이야.”
  1773.  
  1774. 카즈야는 쿠로마루의 시체를 내려 보면서 말했다. 그것이 이 폐쇄된 마을에서 우선으로 세우는 법도인 모양이었다.
  1775.  
  1776. “자네를 마을의 손님으로 받도록 하지.”
  1777.  
  1778. 카즈야가 손을 뻗었다. 이성민은 멀뚱히 그 손을 보다가, 카즈야의 손을 맞잡았다.
  1779.  
  1780. “들어오게.”
  1781.  
  1782. 일족의 가주인 카즈야와 동행하여 마을에 들어가니 아무도 이성민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우선 카즈야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는 중에 본 마을의 집들은 대부
  1783.  
  1784. 분이 초라하여 빈궁해 보였다.
  1785.  
  1786. “카즈야님 정도의 고수라면 밖에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텐데.”
  1787.  
  1788. “자네는 나보다 어려. 그러면서 나보다 강하지. 나는 넓은 세상에 절망하고 싶지 않네. 그래서 이 좁은 숲에서 살아가는 것이야.”
  1789.  
  1790. 카즈야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카즈야가 이성민을 안내하는 것은 일본식의 가옥이었다. 이성민은 카즈야가 말한, 넓은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 잠깐 동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품은 생각에 대해 카즈야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1791.  
  1792. “엔비루스를 알고 있습니까?”
  1793.  
  1794. 카즈야와 함께 들어 온 방에서, 이성민은 카즈야와 마주 앉았다. 대뜸 한 질문에 카즈야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1795.  
  1796. “알고 있지.”
  1797.  
  1798.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1799.  
  1800. “이미 두 달 쯤 전에 숲을 떠났네.”
  1801.  
  1802. 카즈야가 대답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렸다. 에레브레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대로 엔비루스의 흔적은 쫓아 왔지만, 이곳에서 엔비루스와 쉽게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803.  
  1804.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1805.  
  1806. “모르네.”
  1807.  
  1808. 문제는 이것이다. 기껏 이곳까지 왔는데, 엔비루스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면 이후에 이성민이 엔비루스를 추적하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에서 엔비루스의 최신 위치는 바로 이곳, 잠자는 숲이다.
  1809.  
  1810. “…엔비루스는 이 숲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811.  
  1812. “자네는 왜 엔비루스를 쫓고 있는 것인가?”
  1813.  
  1814. 질문에서 질문으로. 되묻는 말에 이성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카즈야를 노려 보았다. 그 시선에 카즈야가 낮은 웃음 소리를 냈다.
  1815.  
  1816.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게.”
  1817.  
  1818. “…만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1819.  
  1820.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이유인데.”
  1821.  
  1822.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1823.  
  1824. “자네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궁금한 것만 질문하여 대답해 달라고 하는 군.”
  1825.  
  1826. 이성민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던 카즈야가 닫고 있던 입을 벌렸다.
  1827.  
  1828. “엔비루스가 말한 손님이 자네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1829.  
  1830. “…예?”
  1831.  
  1832. “엔비루스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말했었지. 앞으로 언젠가, 누군가가 이 숲을 찾아와 엔비루스에 대해 물을 것이라고. 그때가 되면…”
  1833.  
  1834. 카즈야가 앉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1835.  
  1836. “빨리 끝내고 싶은데. 바로 움직여도 되겠는가?”
  1837.  
  1838. “상관없습니다.”
  1839.  
  1840.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1841.  
  1842. 카즈야가 이성민을 데리고 간 곳은 마을의 바깥이었다. 목책을 지난 카즈야는 뒤에서 따라오는 이성민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1843.  
  1844. “일족의 비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나?”
  1845.  
  1846. “묻는다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1847.  
  1848.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줄 수 없는 거야. 우리는 비원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그 비원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거든.”
  1849.  
  1850. 이성민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카즈야의 뒤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1851.  
  1852. “그러면서… 왜 이 숲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1853.  
  1854.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우리의 혼은 이, 잠자는 숲에 얽매여 있네. 이 숲에서 태어난 이들은 절대로 이 숲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1855.  
  1856. “…저주입니까?”
  1857.  
  1858. “그것과 비슷해. 이미 우리 일족은 이 숲에서 몇 세대를 살았네. 거듭된 근친교배로 육체는 나약해졌지. 이어져 온 일족의 비기와 무공은 희미해져서 제대로 전수조차 되지 않아. 조만간 우리 일족은 자멸할 걸세.”
  1859.  
  1860. 그에 대해 말하는 카즈야의 목소리는 오히려 평온했다. 마치 그런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1861.  
  1862. “일족의 비원이 무엇인지는 가주인 나도 몰라. 어쩌면 처음부터 비원 같은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르지. 후대에 태어날 어린 것들을 위해, 억지로 목적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비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일지도.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일족은 이 숲에서 나갈 수 없고, 이 숲의 끝에 있는 무언가를 수호하고 있다는 것일세.”
  1863.  
  1864. “…수호…?”
  1865.  
  1866. “아니. 이것을 수호라고 해야 하나?”
  1867.  
  1868. 카즈야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1869.  
  1870. “귀명은 나약한 자들을 미치게 해. 일신의 무위가 절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 이 숲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어린 것들은 귀명에 저항하기 위해 약을 복용하며 듣는 것을 모르게 되었어. 숲이 깊어질수록 귀명은 더 강해지네. 자네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871.  
  1872. “아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1873.  
  1874. “후후! 초절정 고수라고 하여도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어. 이것은 정신에 작용하는 공격이니까. 엔비루스와는 약속이 있기에 자네를 안내 해 주는 것이지만… 자네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1875.  
  1876. 카즈야의 걸음이 멈추었다.
  1877.  
  1878.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얽히고 얽힌 나무들이 거대한 벽을 만들고 있었고, 그 벽은 거대한 숲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이성민은 카즈야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1879.  
  1880. “이건 뭡니까?”
  1881.  
  1882. “벽이지. 보면 모르나?”
  1883.  
  1884. “벽이라는 것은 나도 압니다.”
  1885.  
  1886. “일족의 가주의 동의가 없다면 이 벽을 지날 수 없어. 한 번 시험해 보겠나?”
  1887.  
  1888. 카즈야가 이성민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카즈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악동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1889.  
  1890. “만약 자네가 이 벽을 강제로 뚫는 것에 성공한다면…”
  1891.  
  1892.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1893.  
  1894. “음. 생각해 보니 줄 수 있는 것이 없군.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어떤가?”
  1895.  
  1896. 노골적으로 권하는 말에 이성민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들어 카즈야를 지나쳤다. 이성민이 창을 들어올렸을 때, 자색의 강기가 창을 휘감았다.
  1897.  
  1898. 꽈아앙! 창을 앞으로 찌르자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하지만 나무의 벽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고 건재했다. 전력은 아니었어도 나름의 힘을 실었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무의 벽을 보았다.
  1899.  
  1900. “그렇지? 힘으로는 뚫리지 않아. 엔비루스도 뚫지 못했지.”
  1901.  
  1902. “그런데 어떻게 들어간 겁니까?”
  1903.  
  1904. “내가 들여보내 줬어. 들여보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1905.  
  1906.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카즈야가 이성민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나무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그마한 소리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이었다.
  1907.  
  1908. 얽혀 있던 나무의 벽이 사라졌다.
  1909.  
  1910. “나는 이 이상 들어갈 수 없네.”
  1911.  
  1912. 카즈야가 뒷짐을 지고서 몸을 돌렸다. 이성민은 마을로 돌아가는 카즈야의 등을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벽이 사라진 곳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었다. 이성민은 잠시 그 길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뻗었다.
  1913.  
  1914. 아.
  1915.  
  1916. 아아.
  1917.  
  1918. 아아아아.
  1919.  
  1920. 귓가에 소리가 울린다. 귀명. 잠자는 숲에 들어서는 자들의 의식을 잃게 만드는 그 알 수 없는 소리가 더, 더, 더 커져서 이성민의 정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앞으로 향하는 걸음의 수가 많아질수록 귀명은 더욱 커졌다. 단순히 의식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 지독한 불길함이 이성민의 정신을 잡고서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1921.  
  1922. “후욱.”
  1923.  
  1924. 이성민은 숨을 삼켰다.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견디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이것은 강력한 정신공격이었다. 초절정고수라고 해도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다. 카즈야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성민은 뼈저리게 느꼈다. 심, 기, 체가 초절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고 하여도 이 지독한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1925.  
  1926. 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정신 세계에서 보낸 2100년은 이성민의 정신을 몇 번이나 무너트렸고 재구축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성민은 광기를 얻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광기를 얻은 정신은 이전보다 수십 수백 배 견고해졌다.
  1927.  
  1928. 무너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짜증을 느끼면서도 폭주하지는 않는다. 구불구불한 길은 외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하게도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만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1929.  
  1930. “헷갈렸음이라.”
  1931.  
  1932. 심드렁한 목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1933.  
  1934. “인과율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 그것이 비틀린 존재는 흔하지 않지.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얼마 전에 찾아 온 놈도 인과율이 비틀려진 놈이라, 착각하여 안에 들이고 말았어.”
  1935.  
  1936. 안개가 날뛴다. 이성민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향했다.
  1937.  
  1938. “대답하라.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여. 너는 되돌아 온 자인가?”
  1939.  
  1940. 목소리가 묻는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걸었다. 들끓던 안개 속에서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1941.  
  1942. 이성민의 걸음이 멈추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시커먼 불길이 흔들리고 있었다.
  1943.  
  1944. “무슨 말입니까?”
  1945.  
  1946. 이성민이 물었다. 그 말에 바위 위에서 흔들리던 불길이 크게 부풀었다.
  1947.  
  1948. “되돌아 온 자인가 물었다.”
  1949.  
  1950. “되돌아 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1951.  
  1952. “너는 죽음을 알고 있느냐?”
  1953.  
  1954. 불꽃이 묻는다. 이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공간에 파직하고 전류가 흘렀다. 그를 보면서 불꽃이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1955.  
  1956. “시답잖은 수작질. 내가 이리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저따위 수작질을 부리지 않게 두었을 텐데.”
  1957.  
  1958. “그랬더라면 제 주인님은 이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겠지요.”
  1959.  
  1960. 흐르던 전류가 뭉쳐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로브를 뒤집어 쓴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성민은 눈을 끔벅거리며 소녀를 보다가 질문했다.
  1961.  
  1962. “당신은 또 누구입니까?”
  1963.  
  1964. “엔비루스님의 사역마예요.”
  1965.  
  1966. 실체는 아니었다. 이 공간에 새겨 놓은 마법을 통해 의식만을 이곳에 전이시켰을 뿐이다. 엔비루스의 사역마를 향해 불꽃이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1967.  
  1968. “짜증나는 군. 단 둘이 대화도 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1969.  
  1970. “당신은 사악한 존재니까요.”
  1971.  
  1972. “으하하! 한낱 장난감 인형 주제에 나를 판단하느냐? 네 주인조차 나에 대해 판단할 수 없을 텐데!”
  1973.  
  1974. 불꽃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꽃의 목소리가 커졌고, 안개 속의 불빛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1975.  
  1976. “우선 내가 좀 알아먹게 해주면 안 됩니까?”
  1977.  
  1978. 보다 못한 이성민이 그렇게 내뱉었다.
  1979.  
  1980. ======================================
  1981. < 잠자는 숲-4 >
  1982.  
  1983.  
  1984.  
  1985. 그 말에 불꽃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불꽃을 노려보던 사역마도 머리를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집어 쓰고 있던 로브를 뒤로 넘겼다.
  1986.  
  1987. “수인獸人?”
  1988.  
  1989.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 삐죽하고 튀어나온 것은 고양이의 귀였다. 이성민의 말에 사역마가 호박색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1990.  
  1991. “루비아라고 합니다. 주인님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92.  
  1993. “오, 그런가? 그 빌어먹을 자식이 기다리고 있던 놈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저 녀석이 되돌아 온 자라는 말이로군.”
  1994.  
  1995. 루비아의 말에 불꽃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불꽃이 말할 때마다 주변의 불빛이 일렁거린다. 이성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루비아를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불꽃을 가리켰다.
  1996.  
  1997. “저건 뭡니까?”
  1998.  
  1999. “어린 놈의 새끼가 삿대질하는 것 보소.”
  2000.  
  2001. 불꽃이 투덜거렸다. 진한 불쾌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지만, 말만 그리 할 뿐 불꽃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의 불빛들이 불꽃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빛을 부풀릴 뿐이었다.
  2002.  
  2003. “이 숲에 잠들어 있는 대요괴大妖怪의 잔재예요.”
  2004.  
  2005. “잔재라니. 그런 하찮은 존재는 아니지. 비록 내가 육체를 잃어 의식만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나는 잔재 따위가 아니야.”
  2006.  
  2007. 불꽃이 내뱉었다. ‘요괴’라는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몬스터를 요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민이 아는 한 요괴와 몬스터는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잡아 먹는 괴물일 뿐이다.
  2008.  
  2009. “한때는 백귀百鬼를 이끌던 요괴 두령이었지만, 지금은 육체를 잃었어요.”
  2010.  
  2011. 이성민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루비아의 말을 들었다. 불꽃은 불쾌한 듯 빛을 번쩍거리기는 하였으나 뭐라고 반발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루비아와 불꽃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2012.  
  2013. “그래서. 당신들은 나한테 대체 뭘 말해주고 싶은 겁니까?”
  2014.  
  2015.  
  2016.  
  2017. 이성민은 우선 루비아를 보았다.
  2018.  
  2019. “이렇게 묻기는 하지만, 당신들이 나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엔비루스 본인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엔비루스가 아니지 않습니까.”
  2020.  
  2021. “…그건… 맞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당신이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2022.  
  2023. “엔비루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2024.  
  2025. “주인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저와 함께 다닌다면, 언젠가 주인님이 찾아오실 거에요.”
  2026.  
  2027. 루비아는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성민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루비아도 엔비루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니까. 이성민의 표정을 읽은 루비아가 급히 말했다.
  2028.  
  2029. “그것에 대해서는 주인님도 약속하셨어요. 제가 어디에 있든, 언젠가 찾아오겠다고요.”
  2030.  
  2031. “확실한 겁니까?”
  2032.  
  2033. “물론이죠.”
  2034.  
  2035. 루비아가 크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성민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불꽃을 바라보았다.
  2036.  
  2037. “당신은 누구입니까?”
  2038.  
  2039. “허주.”
  2040.  
  2041. “나는 되돌아 온 자입니다. 당신은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2042.  
  2043. “모른다.”
  2044.  
  2045. 허주가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용은 어찌되었든 목소리가 너무 당당해서, 이성민은 되려 말문이 막혔다. 멀뚱히 보는 시선에 허주가 말을 덧붙였다.
  2046.  
  2047. “정말로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언젠가 네가 되돌아 온 자가 나를 찾아 올 것이고, 나는 너와 함께 이 숲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2048.  
  2049. 허주의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루비아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는 조금 내키지 않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이성민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2050.  
  2051. “허주의 말은 사실이에요.”
  2052.  
  2053. “다를 것이 없군.”
  2054.  
  2055. 이성민의 눈가에 짜증이 어렸다.
  2056.  
  2057. “여태까지 나와 만나고, 나에게 뭔가 특별함이 있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습니다. 뭔가가 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 줄 수는 없다고. 종언이며 종언의 사도가 어쩌고 하면서 대답을 회피했지요.”
  2058.  
  2059. “그건… 제 주인님이라면 확실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2060.  
  2061. “당신의 주인인 엔비루스는 왜 나와 직접 만나지 않고, 이곳을 떠나 당신을 남긴 겁니까?”
  2062.  
  2063. “저도 잘 몰라요. 주인님은 바쁘신 분이니까요…”
  2064.  
  2065. “하!”
  2066.  
  2067. 이성민은 기가 차서 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루비아에게서 시선을 때고 허주를 보았다.
  2068.  
  2069. “허주. 당신이 이 숲에서 살아가는 일족들이 바라는 비원입니까?”
  2070.  
  2071. “숲의 일족이라. 그래. 몇 세대에 걸쳐 근친상간을 거듭하고, 그 대가로 죽어가고 있는 미련한 원숭이들을 말하는 것이냐? 나는 그들의 비원이 아니야. 그들의 비원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치는 핏줄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2072.  
  2073. “핏줄?”
  2074.  
  2075. “그 피를 가진 자 중에서 선택된 이가 가주가 되고, 가주만이 숲의 벽을 열 수 있다. 나는 그 길의 도중에 존재하고 있을 뿐.”
  2076.  
  2077. 허주의 말대로였다. 허주가 불꽃의 형태로 존재하는 뒤편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2078.  
  2079. “이 숲은 뭡니까?”
  2080.  
  2081. “오랜 괴물들의 혼이 묶여 있는 장소지. 그 원숭이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숲의 봉인을 지속시켜.”
  2082.  
  2083.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허주를 노려보았다. 잠깐의 생각 끝에 이성민은 허주에게 질문했다.
  2084.  
  2085. “나와 함께 나간다. 어떤 형태로 나간다는 겁니까? 당신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아니었습니까?”
  2086.  
  2087. “다 방법이 있지.”
  2088.  
  2089. 허주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루비아를 힐긋 보았다. 루비아는 허주를 힐긋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2090.  
  2091.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제 주인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셨어요.”
  2092.  
  2093. “돌아가겠습니다.”
  2094.  
  2095. 이성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뭔지도 모를 대요괴를 몸 안에 깃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성민이 빙글 몸을 돌리자 루비아가 재빨리 이성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2096.  
  2097. “같이 가요.”
  2098.  
  2099. “언제까지?”
  2100.  
  2101. “제 주인님이 찾아 올 때까지.”
  2102.  
  2103. 루비아가 대답했고,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숲의 안쪽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요괴의 혼이 봉인된 장소로 가봐야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2104.  
  2105. “으하하하!”
  2106.  
  2107. 이성민이 루비아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허주가 대뜸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성민이 뭔가 싶어서 머리를 돌렸을 때.
  2108.  
  2109. 바위 위에서 일렁거리던 허주의 불꽃이 크게 부풀더니 폭발했다. 안개 속에서 흔들거리던 수백 개의 불씨들이 일제히 이성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루비아가 놀란 소리를 냈고, 이성민은 즉시 무영탈혼을 펼쳤다.
  2110.  
  2111. 하지만 이성민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수백 개의 불씨들이 이성민을 덮치는 것이 더 빨랐다. 몸에 닿은 불씨들에게는 그 어떤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2112.  
  2113. 뭔가가 의식을 덮쳐온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2114.  
  2115. [뭐, 뭐냐?!]
  2116.  
  2117. 의식을 덮쳐 오던 무언가가 밀려난다. 곧이어 잔뜩 당황한 허주의 목소리가 이성민의 머릿속에 울렸다.
  2118.  
  2119. [너…!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정신방벽이 이리도 견고한 거냐?!]
  2120.  
  2121. 허주가 외칠 때마다 몸이 웅웅거린다. 이성민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입고 있던 무복을 벗었다. 그러자 이성민의 곁에 있던 루비아가 놀란 소리를 내면서 홱하고 머리를 돌렸다.
  2122.  
  2123. “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2124.  
  2125. 루비아가 그러건 말건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숲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셀게루스에게 미리 받아 입어 두었던 마갑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갑에 옅은 붉은 색이 덧칠되어 있었다.
  2126.  
  2127. [이런 병신 같은… 이 허주가 인간의 의식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아무리 되돌아 온 자라고 해도…!]
  2128.  
  2129.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이게 뭔 병신 같은 짓입니까?”
  2130.  
  2131.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마갑을 두드렸다. 허주의 빙의가 실패한 것에는 몇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과거 프레스칸은 이성민을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마법을 걸었다가 실패했었다. 김종현은 그를 두고서 이성민을 수호하고 있는 가호가 프레스칸의 마법을 반사시킨 것이라고 했었다.
  2132.  
  2133. ‘아니면 정신세계의 수행으로 내 정신력이 강해진 것일지도 모르지.’
  2134.  
  2135. 아마 둘 중 하나인 듯싶었다. 결과적으로는 허주가 이성민의 몸에 깃드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대신에 허주의 의식은 이성민의 몸이 아닌 마갑에 깃들어 버렸다.
  2136.  
  2137. “그 안에 허주가 들어간 건가요?”
  2138.  
  2139.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이성민은 짜증을 느끼면서 입고 있던 마갑을 벗었다. 그래도 꽤 괜찮은 갑옷이라 아끼고 있던 것인데, 허주의 개수작 때문에 입을 수 없게 되었다.
  2140.  
  2141. [자, 잠깐, 잠깐! 기다려!]
  2142.  
  2143. 허주가 급히 이성민을 불렀다.
  2144.  
  2145.  
  2146.  
  2147. [갑자기 빙의하려고 한 것은 사과하마!]
  2148.  
  2149. “이미 해놓고서는.”
  2150.  
  2151. [나도 급했단 말이다! 더 이상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2152.  
  2153. “그건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2154.  
  2155.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까…!]
  2156.  
  2157. “맹세 하나로 퉁치려 하지 마십시오.”
  2158.  
  2159. [그럼… 그… 보물을 주마. 내가 예전에 모아 두었던 보물을!]
  2160.  
  2161. 그것은 조금 구미가 당겼다.
  2162.  
  2163. “보물이라면 어떤 보물입니까?”
  2164.  
  2165.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지.]
  2166.  
  2167. “지금 상황파악이 잘 안되시나 본데. 되도 않는 개소리를 한다면 갑옷을 여기에 벗어두고 가겠습니다.”
  2168.  
  2169. [나도 내가 모은 보물이 얼마나 많은지 다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 설명하겠느냐?!]
  2170.  
  2171. 허주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2172.  
  2173. “허주가 뭐라고 하나요?”
  2174.  
  2175. 루비아가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딱히 숨길 이야기도 아니기에, 이성민은 루비아에게 허주가 한 이야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자 루비아가 오히려 놀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2176.  
  2177. “허주의 보물이라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대단한 것이기는 해요. 허주가 300년 전에 가장 강력하고 유명했던 요괴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고, 허주가 긁어모은 보물도 허주만큼 유명했었으니까요.”
  2178.  
  2179. [봐봐! 내 말이 맞지?!]
  2180.  
  2181. 루비아의 말에 허주가 급히 외쳤다. 이성민은 벗은 마갑을 내려 보다가 다시 입었다.
  2182.  
  2183. “앞으로 내가 말을 걸지 않는 한 닥치고 있으십시오. 만약 개소리를 늘어놓았다가는 벗어서 화장실 똥통에 버리고 갈 테니까.”
  2184.  
  2185. [이 대요괴 허주가 이런 꼴이 되다니…!]
  2186.  
  2187. “자업자득인데 왜 한탄하고 지랄이십니까.”
  2188.  
  2189. 이성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무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나무의 벽은 길을 막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길이 이어진 곳은 이성민이 카즈야와 함께 왔던 입구가 아니었다.
  2190.  
  2191. “신기하군.”
  2192.  
  2193. 길이 끝나면서 안개도 사라졌다. 이성민은 잠자는 숲 밖에 와 있었다. 이성민의 옆에 서있던 루비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대답했다.
  2194.  
  2195. “저 숲은 강력하면서도 다양한 주술로 얽힌 곳이에요.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마시죠.”
  2196.  
  2197. “이해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2198.  
  2199. 허주가 깃든 마갑이 웅웅거리면서 몸을 떤다. 이성민이 해둔 말이 있어서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숲 밖으로 나오게 되어 감격한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허주가 갑옷에 깃들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허주의 보물이라는 것을 얻게 될 때까지는 동행할 생각이었다.
  2200.  
  2201. “정말로 날 따라다닐 겁니까?”
  2202.  
  2203. 허주는 그렇다 치고. 이성민은 루비아를 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루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2204.  
  2205. “아까도 말했잖아요? 주인님이 저를 찾아 올 때까지, 저는 당신과 함께 다닐 거에요.”
  2206.  
  2207.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2208.  
  2209. “당신은 제 주인님과 만나고 싶은 것 아니었나요? 저를 해하거나 버리고 간다면, 주인님과 당신이 만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2210.  
  2211. 루비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2212.  
  2213. “내가 어디로 갈지 알고 나와 함께 다니겠다는 겁니까?”
  2214.  
  2215.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2216.  
  2217. “소천마와 만나러 갈 겁니다.”
  2218.  
  2219.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 말에 루비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2220.  
  2221. “소천마… 소천마라면. 그… 위지호연? 그 괴물이랑은 왜…?”
  2222.  
  2223. “만나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2224.  
  2225.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루비아가 정신을 차리고서 이성민의 뒤를 쫓아왔다.
  2226.  
  2227. “그냥, 어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쉬면서 제 주인님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 안 될까요?”
  2228.  
  2229. “댁의 주인이 바빠서 싸돌아디는 것처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쁩니다.”
  2230.  
  2231. 이성민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루비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232.  
  2233. “전 가기 싫은데…”
  2234.  
  2235. “그럼 억지로 데려 가겠습니다. 당신과 있어야 엔비루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2236.  
  2237. 그렇게 말하며 이성민은 손을 들어 올렸다. 길게 세운 손가락은 루비아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망설임없이 혈도를 점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루비아는 그것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2238.  
  2239. “…그냥 따라 갈 게요.”
  2240.  
  2241. 루비아가 귀를 축 늘어트리면서 말했다.
  2242.  
  2243. ======================================
  2244. < 던전-1 >
  2245.  
  2246.  
  2247.  
  2248. “던전이 개방되었다고 합니다.”
  2249.  
  2250. 조심스레 다가 온 독고귀검이 위지호연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다. 위지호연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독고귀검 쪽을 보았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흑룡포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2251.  
  2252. “던전?”
  2253.  
  2254. “예. 장소가 이곳에서 가깝습니다.”
  2255.  
  2256. 독고귀검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위지호연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독고귀검을 응시했다. 그 싸늘한 시선에 독고귀검은 살짝 몸을 떨었으나, 위지호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독고귀검은 위지호연의 시선에서 깊은 경외를 느끼며 머리를 숙였다.
  2257.  
  2258. “취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2259.  
  2260. 독고귀검은 진심을 담아 그를 간언했다. 던전이라는 것은 자연재해처럼 갑작스럽게 발생한다. 그렇게 발견되는 던전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온갖 종류의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분명한 것은 던전에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2261.  
  2262. “취할 필요가 있나?”
  2263.  
  2264.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기도 하였지만, 독고귀검에게 질문하는 것이기도 했다. 독고귀검은 그 질문을 내심 기쁘게 여겼다.
  2265.  
  2266. 1년 전. 위지호연은 북쪽에서 혈천마 백무선과 격돌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북쪽 도시 트라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백무선과 혈천맹은, 위지호연에게 패배를 맞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백무선은 왼 팔이 잘려 외팔이가 되었고, 백무선을 중심으로 세를 키우고 있던 혈천맹은 반토막 났다.
  2267.  
  2268. 그리 되면서 위지호연의 명성은 더욱 커졌다. 그 당시에 이십 명이었던 천마군도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물론 위지호연은 그것이 탐탁치 않아, 추종하는 천마군을 버리고서 혼자 행동하고 있었다.
  2269.  
  2270. 그럼에도 독고귀검을 비롯한 몇몇의 뛰어난 고수들은 위지호연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2271.  
  2272. 독고귀검은 스스로를 위지호연에게 반드시 필요한 충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위지호연의 압도적인 강함에 크게 매료되었고, 머지 않아 위지호연이 이 뭔지 모를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독고귀검이 위지호연에게 품고 있는 것은 신앙 자체였다.
  2273.  
  2274. “이것은 운명이라고 생각됩니다. 개방된 던전은 이곳에서 그리 머지 않은 곳이고, 당신이 이곳에 있습니다. 그 던전의 주인은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2275.  
  2276. 독고귀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상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열의만이 앞선 말이었지만 독고귀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2277.  
  2278. “흠.”
  2279.  
  2280. 위지호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던전이라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지호연은 제법 긴 시간 에리아를 떠돌았으나, 아직까지 던전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던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보다는 던전에서 무엇을 겪게 되는가가 위지호연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2281.  
  2282. “가볼까.”
  2283.  
  2284. 호기심이 위지호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위지호연이 움직인다. 그러자 주변에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추종자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고귀검은 천천히 걷는 위지호연의 등을 보다가, 먼 곳을 힐긋 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을 보는 독고귀검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담겨 있었다.
  2285.  
  2286. “어우.”
  2287.  
  2288.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2289.  
  2290. “시선 한 번 살벌하시군.”
  2291.  
  2292. 구파일방의 많고 많은 후기지수들.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를 하나만 꼽아 보라면 사람들은 대답을 망설인다. 하지만 하나가 아닌 셋을 말하라면, 견문이 있는 자들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할 것이다.
  2293.  
  2294. 소림의 지학.
  2295.  
  2296. 무당의 청명.
  2297.  
  2298. 개방의 취걸.
  2299.  
  2300. 그들 셋은 각 문파의 성명절기를 모두 익히고, 문파의 모든 어른들에게 무공을 지도받아 문파의 미래를 위해 준비된 이들이다. 저들 중 지학과 청명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문파의 본산에서 무공 수련만 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2301.  
  2302. 하지만 취걸은 다르다.
  2303.  
  2304. “어쩌시겠소?”
  2305.  
  2306. 취걸이 머리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2307.  
  2308. “소천마. 저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무슨 대화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던전으로 향하는 것이겠지.”
  2309.  
  2310. 취걸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2311.  
  2312. “저희도 가야죠.”
  2313.  
  2314. 묵섬광 백소고였다.
  2315.  
  2316.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않고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2317.  
  2318. “만약 위지호연이 던전을 공략하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더 위험할 겁니다.”
  2319.  
  2320. 그렇게 말한 것은 백소고가 아니었다.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이 진지한 눈으로 취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취걸은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아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2321.  
  2322. ‘감이 안 좋은데.’
  2323.  
  2324. 감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지만, 취걸은 자신의 감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었다. 사실 그 감을 믿어 여태까지 큰 이득을 보거나 불행을 피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도, 내키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2325.  
  2326. “독고귀검이 이쪽을 봤습니다. 독고귀검이 보았을 정도라면 위지호연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2327.  
  2328. “여태까지 위지호연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음에도 우리와 마찰을 빚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만하고 무자비한 것처럼 보여도 미련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위지호연은 구파일방과는 단 한 번도 마찰다운 마찰을 빚지 않았어요.”
  2329.  
  2330. “소림이 위지호연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2331.  
  2332. “소림은 그를 망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 모양이던 걸요. 오히려 불영대사는 위지호연에 대해 말할 때에 호의를 표했습니다.”
  2333.  
  2334. “소림도 갈 때까지 갔군.”
  2335.  
  2336. 취걸과 백소고를 포함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2337.  
  2338. “여태까지 위지호연이 우리의 존재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었소. 하지만 던전 안에서라면… 무림맹이라는 배경이 우리를 비호해 주지 못하겠지. 그곳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
  2339.  
  2340. 취걸이 강하게 목소리를 냈다. 위험하다. 취걸이 믿고 있는 감이 그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취걸을 제외한 나머지 넷은 취걸의 말을 듣지 않았다.
  2341.  
  2342. “위지호연을 내버려 둘 수는 없소.”
  2343.  
  2344. “던전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그 작은 괴물이 끔찍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2345.  
  2346. “시간이 없어요.”
  2347.  
  2348. “지원을 부르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위지호연이 던전을 공략한다면?”
  2349.  
  2350. “던전 안에 무엇이 있을 지는 모릅니다. 신공절학이 있을 지도 모르고 대단한 영약이 있을 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대마법이나 아티펙트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2351.  
  2352. “분명한 것은 이것이지. 던전에서 취하는 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해.”
  2353.  
  2354. “위지호연이 그 힘을 취하게 둘 수는 없어요.”
  2355.  
  2356.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백소고는 침묵했다. 취걸은 한숨을 삼키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지호연을 감시하라는 위험한 임무에, 저들은 직접 자원했다. 모두가 무림맹 내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힘을 가진 고수들이지만, 저들은 ‘정의’라는 애매모호한 것에 목숨을 건 미치광이들이다.
  2357.  
  2358. ‘반한 쪽이 손해인 것이지.’
  2359.  
  2360. 취걸은 백소고를 힐긋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백소고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면, 취걸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2361.  
  2362. “…어쩔 수 없지.”
  2363.  
  2364. 결국 취걸은 그렇게 말했다.
  2365.  
  2366. 위지호연과 천마군. 백소고와 무림맹. 그들이 던전으로 향할 때, 이성민도 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2367.  
  2368. 던전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다. 이성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던전에 가까운 곳에서, 던전이 개방되고 그에 대한 정보가 유통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2369.  
  2370. 정보는 구입했다. 던전이 열린 장소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2371.  
  2372. [정말로 갈 건가요?]
  2373.  
  2374. 루비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이성민을 보면서 물었다. 루비아는 수인의 육체를 취하는 대신에, 자그마한 구체가 되어 이성민의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애초에 사역마인 루비아가 고양이 귀를 가진 수인의 육체를 가진 것은 엔비루스의 취향 때문이었다.
  2375.  
  2376. “가야죠.”
  2377.  
  2378.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 손을 밀어 넣었다. 셀게루스가 만들어 주었던 창이 이성민의 손에 잡혀 뽑혀 나왔다. 소림에서 수행한 이후로 이 창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용해야 했다. 자격의 여부를 떠나, 지금부터 이성민이 겪어야 할 일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만 했다.
  2379.  
  2380. […후우. 좋아요. 알았어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당신, 던전에 들어 가 본 경험은 있나요?]
  2381.  
  2382. “없습니다.”
  2383.  
  2384. 이성민이 대답했다. 사실 없는 것은 아니다. 전생에서 딱 한 번, 던전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2385.  
  2386. ‘그리고 죽었지.’
  2387.  
  2388. 그리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에도 초행으로 들어간 던전이라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름의 준비를 해두었다. 이성민은 전 재산을 털어 다양한 포션을 구입해 놓았다. 이성민은 무장을 확인했다. 등 뒤의 창과 함께 다양한 단검들이 이성민의 벨트에 매어져 있었다. 이성민은 그 위에 망토를 두르고서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2389.  
  2390.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었다. 위지호연을 설득하는 것. 백소고를 설득하는 것. 위지호연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백소고는 가능한가? 백소고의 위치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는데. 에리아는 넓다. 백소고와 위지호연이 이 근방에 있다는 정보는 구입했으나, 그것만으로 이 넓은 지역을 뒤져 그들과 만나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2391.  
  2392. [던전 경험도 없으면서 던전에 들어가겠다니…! 대체 무슨 자신감인거죠?]
  2393.  
  2394. “해야 하니까.”
  2395.  
  2396. 이성민은 전해들은 던전의 위치를 향해 달렸다. 구체로 변한 루비아는 이성민의 머리 옆을 맴돌면서 웅웅거렸다.
  2397.  
  2398. [우선 던전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모든 던전은 확실한 끝이 존재하고, 그 끝에 도달하여 조건을 달성한다면 공략되죠. 문제는 ‘끝’까지 어떻게 도달하느냐! 던전은 미로일 수도 있고 숲일 수도 있어요.
  2399.  
  2400. 어쩌면 바다일 지도 모르죠.]
  2401.  
  2402. 이성민은 기억을 더듬었다. 전생의 이성민이 들어가 죽음을 맞았던 던전은 지하의 미로였다.
  2403.  
  2404. [던전 안에서는 몬스터나 트랩 같은, 출입자를 위협하는 다양한 수단들이 존재해요. 던전 밖에서는 몬스터를 죽여봤자 시체가 남을 뿐이지만, 던전 안에서 몬스터가 죽는다면…]
  2405.  
  2406. “나도 압니다. 던전에서의 몬스터는 던전 밖과는 다르게 확실한 전리품을 남기죠. 돈과 영약, 마법, 무공, 포션, 무기 같은 것들을.”
  2407.  
  2408. 그래서 던전이 개방된다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를 생각한다면 무림맹이 던전에 들어간 위지호연을 따라간 것도 이해가 된다. 위지호연이 던전을 토벌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본
  2409.  
  2410. 래부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위지호연이 정말 손도 댈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릴 테니까.
  2411.  
  2412. “이곳이군.”
  2413.  
  2414.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위 투성이의 지면에 붉은 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수정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성민이 전생에 들어갔던 던전도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성큼거리며 수정을 향해 다가갔다.
  2415.  
  2416. 손을 뻗어 수정에 대었을 때.
  2417.  
  2418.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2419.  
  2420. 머릿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전신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부유감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다.
  2421.  
  2422. 풍경이 바뀌었다.
  2423.  
  2424. 바뀐 풍경을 살펴 볼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성민의 발이 땅에 닿은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이성민을 향해 폭사했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은 이성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성민은 급히 발을 뒤로 끌면서 창을 들어 올렸다.
  2425.  
  2426. 쩌어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이성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창을 잡은 양 손이 저릿거렸다. 초절정고수가 되고서 이렇게 묵직한 공격을 받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성민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공격을 가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2427.  
  2428. “…넌 누구냐?”
  2429.  
  2430.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거한이 이성민을 노려 보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거한이 잡고 있는 거대한 도끼를 힐긋 보았다. 무기도 묵직하기는 하지만, 이성민을 밀려나게 한 거력은 도끼의 무게 때문은 아니었다.
  2431.  
  2432.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2433.  
  2434. “이성민?”
  2435.  
  2436. 그 말에 거한이 눈을 크게 떴다.
  2437.  
  2438. “설마. 네가 검귀를 죽였다는 귀창鬼槍이란 말이냐?”
  2439.  
  2440. 이성민은 그 별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에 흥분하는 사람들은, 성하 도인을 죽인 검귀를 죽인 이성민에게 귀창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검귀를 죽였기에 귀창. 어울리지 않는 별호다. 당시 이성민이 검귀를 죽였던 것은 이성민 본인의 실력이 아니었다. 아마 검은 심장의 도움 덕분이었을 것이다.
  2441.  
  2442. “…맞습니다.”
  2443.  
  2444. 마음에 들지 않는 별호이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2445.  
  2446. “어째서 네가 이곳에?”
  2447.  
  2448.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거한은 더 이상 도끼를 휘두르지 않았다.
  2449.  
  2450. ======================================
  2451. < 던전-2 >
  2452.  
  2453.  
  2454.  
  2455. 거한의 이름은 장득수. 별호는 역발산이라고 했다.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이성민은 역발산 장득수가 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에게 죽은 고수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2456.  
  2457.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2458.  
  2459. 이성민을 보는 장득수의 시선에는 여전히 경계가 묻어 있었지만, 다짜고짜 살초를 날렸던 처음과 같은 적의는 없었다. 이성민은 화산파 장문인인 검귀를 죽이면서 창귀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 이후로 행적이 묘연해지기는 했지만, 창귀라는 별호가 붙여지는 과정에는 새로운 정파의 젊은 영웅의 탄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성하 도인을 죽이고 도주한 검귀는 누구나 인정하는 마인이었다. 그런 검귀를 죽인 이성민에게 장득수가 호의를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460.  
  2461.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는 도중이었습니다. 기묘해 보이는 붉은 수정이 세워져 있길래, 뭔가 싶어서 건드려 보았죠.”
  2462.  
  2463.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네.]
  2464.  
  2465. 이성민이 어깨에 두른 망토 안쪽에 숨어 있던 루비아가 투덜거렸다.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닥치라고 쏘아붙여 준 뒤에 장득수의 반응을 보았다.
  2466.  
  2467. “음… 자네는 던전이 처음인가 보군.”
  2468.  
  2469. “이곳이 던전이었습니까?”
  2470.  
  2471. 이성민이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 말에 장득수가 힘을 주어 머리를 끄덕거렸다.
  2472.  
  2473. “우리는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네. 자네도 위지호연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2474.  
  2475. “물론 알고 있습니다.”
  2476.  
  2477. 확실해졌다. 전생에 이 던전에서 있었던 일. 위지호연이 이곳에서 죽였던 고수들은,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2478.  
  2479. “왜 위지호연을 막겠다는 겁니까?”
  2480.  
  2481. 하지만 이것이 의문이다. 이성민은 자신의 질문이 장득수를 자극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2482.  
  2483. “그녀는 위험하니까!”
  2484.  
  2485. 걱정과는 다르게 장득수는 이성민의 질문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의 믿음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는 냥 격정적으로 내뱉었다.
  2486.  
  2487. “작금의 무림, 아니, 이 세계. 제나비스에서는 매일이고 온갖 차원에서의 괴인들이 소환되고 있네. 헌데 지금까지 10년 간, 위지호연만큼 강력하고 불순한 인물이 소환된 적이 있는가?”
  2488.  
  2489. “…불순하다?”
  2490.  
  2491. “그녀는 스스로를 소천마라 칭하고 있지! 자네 역시 무공을 익혔다면 천마라는 별호가 무엇을 상징하고, 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2492.  
  2493. “저는 무림 출신이 아닙니다.”
  2494.  
  2495. “뭐라…?”
  2496.  
  2497. 이성민의 대답에 장득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득수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2498.  
  2499.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찌되었든, 스스로를 소천마. 천마라 말하는 위지호연은 위험한 존재일세. 실제로 그녀는 북쪽의 혈천마의 왼 팔을 자르는 것으로 우월한 강함을 떨쳤지. 이미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위지호연을 중심으로 세력을 만들고 있어. 머지않아 그들은 무림맹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야. 그러니 위지호연을 막아야 하는 것일세.”
  2500.  
  2501. “…그렇습니까?”
  2502.  
  2503. “당연히 그렇지! 자네는 던전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던전을 공략하면 불가사의한 거대한 힘을 얻게 되네. 가뜩이나 위험한 위지호연이 그 힘마저 얻게 된다면, 정말로 손 쓸 방법이 없는 대마인이 될 것이야. 그러니 우리는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네.”
  2504.  
  2505. 장득수는 그렇게 말하고선 성큼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솥뚜껑만큼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를 잡았다.
  2506.  
  2507. “자네가 도와줬으면 해.”
  2508.  
  2509. “…어떻게?”
  2510.  
  2511. “이 던전에는 이미 위지호연과 그녀를 추종하는 천마군들이 들어와 있네. 독고귀검, 혈혈노파, 마랑철권. 모두가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마두들이지.”
  2512.  
  2513. “예?”
  2514.  
  2515. 가만히 장득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성민이 반응을 보였다. 독고귀검, 혈혈노파, 마랑철권.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 던전 안에서 그런 별호를 쓰는 셋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2516.  
  2517. “뭘 되묻는 것인가? 그 셋이 위지호연을 따라 이 던전에 들어왔단 말일세.”
  2518.  
  2519. 전생과 달라졌다.
  2520.  
  2521. ‘위지호연은 전생보다 빠르게 명성을 떨쳤어. 전생에서 위지호연과 혈천마가 충돌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이번 생에서 위지호연은 혈천마와 충돌하면서 빠르게 유명해졌지. 그래서 추종자가 더 빠르게 붙은 거야.’
  2522.  
  2523. “설마 장득수님 혼자서 위지호연을 막으러 온 것은 아니시겠죠?”
  2524.  
  2525. “물론 아니지! 본좌를 포함한 무림맹의 용사들은 위지호연이 본격적으로 발호한 시점에서부터 그 괴물을 감시하고 있었네.”
  2526.  
  2527. “이 던전에 장득수님 외에 또 누가 들어와 있습니까?”
  2528.  
  2529. “묵섬광 백소고와 개방의 취걸, 무쌍괴협, 극천도가 와 있네.”
  2530.  
  2531. 모두가 이성민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전생에 위지호연에게 죽었던 고수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이성민은 대강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위지호연이 빠르게 발호하면서 그녀를 추종하는 독고귀검과 혈혈노파, 마랑철권이 이 던전에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 백소고를 포함한 무림맹의 무사들이 들어왔다.
  2532.  
  2533. ‘검귀는 죽어서 오지 않아. 대신에 내가 왔고. 그래도 숫자가 맞지 않는데.’
  2534.  
  2535. 전생에 위지호연은 이 던전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고 혼자 나왔다. 본래는 들어오지 않는 셋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숫자가 맞지 않는다.
  2536.  
  2537. ‘이후에 더 들어온다는 것이겠지. 어쩌면 오지 않을 지도 모르고.’
  2538.  
  2539. 무조건 전생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이성민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장득수는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이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2540.  
  2541. “힘을 보태주게.”
  2542.  
  2543. “…헌데… 장득수님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다른 분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2544.  
  2545. “그게… 으음. 사실 본좌도 잘 모르겠어. 던전이라는 것은 상식에 구애받는 장소가 아닐세. 모두가 함께 들어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 혼자 이곳에 있었지. 아마 뿔뿔히 흩어진 듯 해.”
  2546.  
  2547. 상황이 좋지? 않다. 흩어져 있어서 장소를 알 수가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위지호연과 백소고가 마주쳤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2548.  
  2549.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2550.  
  2551. 이성민의 대답에 장득수는 기분이 좋아져서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2552.  
  2553. [잠깐만 기다려 봐요. 던전의 형태를 분석 중이니까요.]
  2554.  
  2555. 이성민이 장득수의 뒤를 따라 걷는 중에, 품 속에 숨은 루비아가 웅웅거리면서 목소리를 보냈다.
  2556.  
  2557. ‘분석하면 뭐 알기는 합니까?’
  2558.  
  2559. […당신… 저를 너무 무시하는 모양인데. 저는 대마법사인 엔비루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고의 사역마예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여태까지 창조된 인공생명 중에서 나만큼 뛰어난 존재는 없을 걸요.]
  2560.  
  2561. ‘그렇게 말해봤자 엔비루스 본인이 유명하지도 않는데.’
  2562.  
  2563. [그건! 저희 주인님이 소문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셔서…]
  2564.  
  2565. ‘일단 해보십시오.’
  2566.  
  2567. 루비아와 긴 실랑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는 이성민이 말을 끊자 작은 소리로 궁시렁거렸다.
  2568.  
  2569. “음?”
  2570.  
  2571. 덜컥.
  2572.  
  2573. 앞장서서 걷던 장득수가 무언가를 밟았다. 그 작은 소리를 듣고서, 이성민은 등에서 찌릿하고 오한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2574.  
  2575. [오, 이런.]
  2576.  
  2577. 루비아가 탄식을 흘렸다.
  2578.  
  2579. 공간이 일렁거린다. 던전은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어나는 현상을 보며 이성민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천장이 사라지고 벽이 사라진다. 곧이어 역한 악취가 후각을 덮쳐온다.
  2580.  
  2581. “뭔 악취가…!”
  2582.  
  2583. 장득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외친다. 이성민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발을 굴러대는 장득수의 뒤통수를 보며 끓어오르는 살의를 삼켜야만 했다. 어느새 이성민과 장득수가 있는 곳은 구불구불한 외길로 변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장득수가 코를 부여 잡으며 투덜거렸다.
  2584.  
  2585. “여긴 또 어디인가?”
  2586.  
  2587. “내가 어떻게 압니까?”
  2588.  
  2589.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에 장득수가 등 뒤에 매고 있던 도끼를 들었다. 장득수가 도끼로 붉은 벽을 내리 찍으려 들자, 이성민은 기겁하면서 장득수를 가로막았다.
  2590.  
  2591. “잠깐, 잠깐! 지금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2592.  
  2593. “우선 벽을 뚫어야 하지 않겠나.”
  2594.  
  2595. “우선 탐색 먼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2596.  
  2597. “시간이 없네!”
  2598.  
  2599. 장득수가 버럭 외쳤다. 이성민은 진심으로 장득수를 죽이고 싶어졌다.
  2600.  
  2601. […흠.]
  2602.  
  2603. 그래도 장득수가 아주 등신은 아니었다. 그는 이성민이 앞을 가로막자,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끼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2604.  
  2605. [기묘한 곳이네요. 벽… 아니, 저걸 벽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는데. 저건 살덩이 같은 거예요. 괜히 건드리지는 마시고. 말했던 것처럼 던전이라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장소에요. 마법 같으면서 마법도 아닌 기묘한 힘들이 뒤엉킨 장소죠.]
  2606.  
  2607. ‘…그래서?’
  2608.  
  2609. [준비나 하시죠. 뭔가 일어날 테니까.]
  2610.  
  2611. 루비아가 경고했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붉은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이 꿈틀거리더니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2612.  
  2613. “…이건 또 뭐야?”
  2614.  
  2615. 장득수가 솟구친 괴물을 보고서 중얼거렸다. 꾸물거리던 살덩이는 장득수를 보고 이성민을 보았다. 이윽고, 그 괴물의 모습이 바뀌었다.
  2616.  
  2617. 바뀐 괴물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이성민은 꿈틀거리며 뒤틀리는 괴물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부릅 떴다.
  2618.  
  2619. “…백소저?”
  2620.  
  2621. 장득수가 멍하니 목소리를 냈다. 뭔지 모를 괴물은 백소고의 모습을 하고 잇었다. 백소고, 아니, 백소고의 모습을 한 괴물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며 머리를 돌리더니 장득수를 보았다.
  2622.  
  2623. 쉭.
  2624.  
  2625. 괴물의 모습이 사라진다. 이성민은 움찔하고서 발을 뒤로 빼냈다. 이성민과는 다르게 장득수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
  2626.  
  2627. “어, 어…”
  2628.  
  2629. 빠아악! 허공에서 튀어나온 괴물의 발길질이 장득수의 가슴을 갈겼다. 장득수의 입이 쩍 벌어지며 검은 피가 튀었다. 묵직한 일격이었지만 장득수 역시 고수다. 찰나의 순간에 끌어올린 반탄강기가 장득수의 몸을 보호했다.
  2630.  
  2631. 안다.
  2632.  
  2633. 이성민은 발길질의 반동으로 허공에 떠있는 괴물을 보았다. 방금 전에, 괴물이 보여주었던 것. 저 보법. 이성민은 저것을 알고 있었다. 무영탈혼의 일식인 일보무흔.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소림에서, 정신세계에서 쉼없이 수련했던 그 보법.
  2634.  
  2635. 그 보법을 왜 괴물이 펼치고 있는 것일까.
  2636.  
  2637. 왜 저 괴물이 백소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2638.  
  2639. “잠깐… 잠깐! 백소저! 대체 이게 무슨…!”
  2640.  
  2641. 장득수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는 괴물이 백소고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주제에 괴물을 향해 백소저라고 칭했다. 그 부름이 이성민은 역겨웠다. 이성민은 창을 잡았다.
  2642.  
  2643. [저건… 도플갱어네요. 아니, 일반적인 도플갱어와는 조금 다르기는 한데. 저기, 듣고 있어요?]
  2644.  
  2645. 안다.
  2646.  
  2647. 저건 백소고가 아니다. 백소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일 뿐이다.
  2648.  
  2649. [조금 진정하는 것이 어때요?]
  2650.  
  2651. 하지 않을 거야. 이성민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백소고의 모습을 한 괴물을 향해 장득수는 계속해서 떠들고 있었다. 미련하게도. 이성민은 앞을 가로 막은 장득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장득수가 놀란 표정을 하고서 이성민을 돌아보았지만, 이성민은 장득수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입을 열어 봐야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2652.  
  2653. “잠깐, 지금 뭐하는…”
  2654.  
  2655. 장득수가 이성민에게 말을 건다. 듣지 않는다. 이성민은 서있는 괴물을 볼 뿐이었다. 괴물은… 백소고를 닮은 괴물은. 백소고와 같은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이성민을 보다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뻗었다.
  2656.  
  2657. 일보분영. 수십 개의 잔상이 이성민을 덮친다. 이성민은 걷지 않고 창을 들었다. 무영탈혼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무영탈혼은… 저 괴물이 아닌, 백소고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그 산에서. 당신에게 이 무공을 배웠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되었노라고. 걸음 하나하나 때는 것도 힘들어하던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되었노라고.
  2658.  
  2659. 많이 컸구나.
  2660.  
  2661. 검귀를 죽이던 밤, 백소고에게 그 말을 듣고서 얼마나 좋았던가.
  2662.  
  2663. 다시 한 번 그 말을 듣고 싶었다.
  2664.  
  2665. 수십 개의 잔상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진짜’ 백소고의 무영탈혼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성민은 알지 못한다.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가 보여주었던 무영탈혼과 지금 그녀가 펼치는 무영탈혼은 수준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건, 저 괴물이 펼치는 무영탈혼은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가 보여 주었던 무영탈혼의 이상이었다.
  2666.  
  2667. 하지만 현혹되지 않는다. 붉은 창영이 펄럭거린다. 그리고 수십 개의 찌르기가 앞으로 쏘아진다.
  2668.  
  2669. 창에 꿰뚫린 잔상들이 모조리 흩어졌다.
  2670.  
  2671. ======================================
  2672. < 던전-3 >
  2673.  
  2674.  
  2675.  
  2676. 쉭.
  2677.  
  2678. 흩날리는 잔상의 파편 속에서 살초가 덮쳐온다. 도플갱어의 공격은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살기는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처하는 것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살기가 없는 공격이기에 감지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2679.  
  2680. 이성민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감각과 존재하지 않는 육감은 도플갱어의 공격을 확실히 포착했다.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붕하고 회전했다. 타탁! 연달아 차낸 발길질과 이성민의 창간이 부딪힌다. 이성민은 걸음을 뒤로 물리지 않고서 양 팔 근육에 힘을 불어 넣었다.
  2681.  
  2682. 부웅! 옆으로 크게 휘두른 창이 도플갱어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도플갱어는 백소고의 것과 같은 회색 눈동자를 굴리면서 붉은 창영을 보았다. 창영 안에 날을 숨긴 창두를 확인했을 때. 이미 창은 그보다 앞선 곳에 있었다.
  2683.  
  2684. ‘똑같군. 소름끼칠 정도야.’
  2685.  
  2686. 도플갱어의 발이 움직인다. 발놀림에서 시작되는 전체적인 몸짓은 완벽에 가까운 무영탈혼을 만들어낸다. 무영탈혼을 모르는 이라면, 저 특별할 것 없는 발걸음에서 시작되는 극쾌와 극환의 몸놀림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아니다. 이성민은 무영탈혼을 알고 있다.
  2687.  
  2688. 한 걸음에서 두 걸음으로. 그렇게 이어지는 것은 무영탈혼의 삼식인 이보겁살二步劫煞. 무영탈혼은 보법이면서 보법이 아니다. 걸음에서 시작되는 극한의 체술이 무영탈혼이다. 도플갱어가 두 걸음을 걸었을 때 전신이 폭사하며 농도 짙은 강기를 쏘아냈다. 이성민이 잡은 창에서 자색의 강기가 크게 부풀었다.
  2689.  
  2690. 꽈아앙! 휘두른 일격에 이보겁살의 강기가 밀려난다.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면으로 찌른 창이 도플갱어의 가슴을 꿰뚫었다.
  2691.  
  2692. 도플갱어는 입을 벌렸지만 비명도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눈을 깜박거리며 이성민을 보다가, 다시 흉측한 살덩이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살덩이를 보면서 이성민은 찌른 창을 뽑았다.
  2693.  
  2694.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2695.  
  2696. “괴물입니다.”
  2697.  
  2698. 이성민은 백소고의 모습을 했던, 지금은 단순한 살덩이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괴물을 꿰뚫었을 때 손에 전해진 감각. 마지막으로 이쪽을 향하던 표정. 이성민은 창을 털어 묻은 살덩이를 털어내며, 그 순간에 느꼈던 불쾌와 짜증도 마저 털어냈다.
  2699.  
  2700. “백소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괴물이라니…”
  2701.  
  2702.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것은 그런 괴물입니다.”
  2703.  
  2704. “대응이 미진하기는 했지만, 그… ‘괴물’이 보여주었던 무영탈혼은 틀림없는 백소저의 것이었네. 내가 겪기에는 크게 수준 차이가 나지 않았던 듯 해.”
  2705.  
  2706. 장득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이성민도 도플갱어와의 싸움을 통해 어느 정도 느낀 것이 있었다. 놈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놈들이 펼치는 무공은 대상으로 한 본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2707.  
  2708. [본래 도플갱어라는 몬스터는 모습만 똑같이 흉내낼 뿐, 기술까지 흉내 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서의 상식이죠.]
  2709.  
  2710. 루비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2711.  
  2712. [분석은 진행중이예요. 지금 선에서 파악한 정보는 이 던전이 복잡한 미로 형식이라는 것. 길잡이 역할 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니, 저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세요.]
  2713.  
  2714. ‘믿어도 되는 겁니까?’
  2715.  
  2716. [우씨. 그냥 좀 믿어주면 안 되나요?]
  2717.  
  2718. 루비아가 투덜거렸다.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마갑이 웅웅거리며 떨린다. 마갑에 빙의된 허주가 자기도 떠들고 싶어하는 듯 했다.
  2719.  
  2720. ‘뭡니까?’
  2721.  
  2722. [저 조잡한 인형은 떠들게 내버려두면서 왜 나는 닥치고 있으라 하는 것이냐?]
  2723.  
  2724. [조잡한 인형이라니요? 제 몸뚱이도 갖지 못하고 갑옷에 깃들어 있는 주제에!]
  2725.  
  2726. [맹세하건데, 내가 본신을 되찾은 순간 네년의 궁둥이를 찢어버릴 것이다.]
  2727.  
  2728. 허주와 루비아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이성민은 머리가 지끈거려져 오는 것 같아 마갑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허주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고, 루비아가 보란 듯이 으스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2729.  
  2730. “…끔찍한 생각이 드는군.”
  2731.  
  2732. 장득수는 이전과는 다르게 경계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조심스레 앞을 걷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양 손에 쥔 거한이 움찔거리며 앞으로 걷는 것은 꽤나 희극적으로 보였다.
  2733.  
  2734. “무슨 생각 말입니까?”
  2735.  
  2736. “이… 던전 말일세. 방금 우리는 백소저와 같은 모습을 한 괴물과 싸움을 벌였지.”
  2737.  
  2738. 우리는, 이 아니라 내가. 이성민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2739.  
  2740. “만약 다른 이들도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면…”
  2741.  
  2742. 이성민도 장득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깨달았다. 백소고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는, 백소고의 무영탈혼을 펼쳤다. 비록 싸움 자체에 익숙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도플갱어가 펼친 무공은 진짜였다. 이성민은 무영탈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만약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나타난다면.
  2743.  
  2744. ‘아.’
  2745.  
  2746.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그리고 위지호연은 던전에서 나와 선언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자신이 죽였노라고.
  2747.  
  2748. 백소고와 다른 이들을 죽인 것은 위지호연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였던 것이 아닐까.
  2749.  
  2750. “서두르죠.”
  2751.  
  2752. 이성민은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불길함을 의식하면서 장득수를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2753.  
  2754. *
  2755.  
  2756. “허억… 허억…!”
  2757.  
  2758. 무쌍괴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앞을 노려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무쌍괴협과 함께 이 던전에 들어 온 무림맹의 고수 중 하나인 극천도였다. 극천도는 초절정을 목전에 둔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였으나, 경지에 오른 무공과 높은 무명과는 무던하게도 극천도의 죽음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2759.  
  2760. “괴물 같으니…!”
  2761.  
  2762. 무쌍괴협은 머지않아 자신이 극천도와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피가 들러 붙은 자신의 양 손을 힐긋 내려 보았다. 왼 주먹은 으깨져서 통증 외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른 주먹은 그나마 뼈는 상하지 않았지만, 무쌍괴협은 그를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2763.  
  2764. 극천도의 시체를 넘어 괴물이 다가온다. 괴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을 길게 늘인 듯한 검은 머리카락은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얕게 찰랑거렸고, 빛이 없는 검은 눈동자는 일말의 감정도 비춰지지 않았다.
  2765.  
  2766. 소천마 위지호연.
  2767.  
  2768. 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혈천마 백우선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왼 팔을 자르고, 백우선의 본거지인 트라비아에서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이미 위지호연의 강함을 상징하는 신화가 되어 있었다.
  2769.  
  2770. 그럼에도 위지호연을 추격했던 것은. 이 던전에 위지호연을 따라 들어 온 것은 무쌍괴협이 품고 있던 정의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무쌍괴협은 도망치려 들지 않았다. 그는 필살의 각오와 함께 진원진기를 격발시켰다. 평생을 쌓아 온 공력이 무쌍괴협의 전신에 깃들었다. 비록 초입이라고는 하나 무쌍괴협 역시 초절정 고수. 동귀어진을 각오한다면 팔 하나쯤은 가져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무쌍괴협이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2771.  
  2772. “으아아앗!”
  2773.  
  2774. 무쌍괴협은 사자후를 터트리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방어 없는 공격. 목숨을 돌보지 않는 동귀어진의 각오가 무쌍괴협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 무쌍괴협을 바라보던 위지호연이 손을 들어 올린다.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던 흑룡포가 크게 부풀었다.
  2775.  
  2776. 알고 있다. 바로 방금 전에, 극천도가 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처참한 시체가 되었다. 힘없어 보이는 저 천쪼가리는 위지호연의 공력이 더해지면서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빠른 둔기가 되기도 하고 채찍이 되기도 했다. 시야를 가득 덮고 휩쓸어오는 공격을 뛰어 넘는다. 완전히 피하지 못해 왼쪽 다리가 뜯겨져 날아가지만 개의치 않는다. 무쌍괴협은 통증을 잊었다. 살의가 쏟아져 나오는 무쌍괴협의 눈은 이쪽을 올려 보는 위지호연만을 보았다.
  2777.  
  2778. 무쌍괴협을 올려 보는 위지호연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위지호연의 손이 다시 움직였고, 흑룡포가 펄럭거리며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단조로운 공격이었지만 그 속도와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2779.  
  2780. 무쌍괴협은 이를 악물고서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2781.  
  2782. 콰드드득! 왼팔이 뜯겨진다. 아찔한 고통이지만 무시한다. 참아야 했다. 무쌍괴협은 피를 토하면서 오른 손을 앞으로 펼쳐 뻗었다. 긁어 모을 수 있는 모든 공력을 담은 장력이 위지호연을 거기까지가 무쌍괴협이 본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직전에 품었던 무쌍괴협의 간절한 바람 속에서 그의 장력은 위지호연의 머리를 박살냈다. 하지만 현실에서 머리가 박살난 쪽은 무쌍괴협이었다.
  2783.  
  2784. 위지호연은 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쏟아지는 피의 비를 그대로 맞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위지호연은 몸을 돌려 극천도의 시체를 보았다.
  2785.  
  2786. 위지호연의 모습을 한 괴물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2787.  
  2788.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극천도와 무쌍괴협을 살해했을 때.
  2789.  
  2790. 진짜 위지호연은 앞에 서있는 남자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상처투성이였다. 옆구리는 크게 찢어져 있었으나 피도 내장도 흐르지 않는다.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이었으나 남자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의 눈동자에는 특별해 보이는 집념이나 각오가 깃들어 있지도 않았다.
  2791.  
  2792. “…흐음.”
  2793.  
  2794. 위지호연은 펄럭거리는 흑룡포를 아래로 내리면서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다시 한 번 남자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2795.  
  2796. 저것이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바로 눈앞에서, 뭔지 모를 살덩이가 솟구쳐 저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2797.  
  2798. “혹시나 했는데.”
  2799.  
  2800.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9년이나 흐르지 않았나. 9년 전에 제나비스에 있었던 위지호연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 녀석’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세월과 사건을 겪은 위지호연은 9년 전의 모습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2801.  
  2802. “너도 이곳에 와있었구나.”
  2803.  
  2804. 어느 틈에 들어온 것일까. 무림맹의 추격자들은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저 녀석의 존재를 느낀 적은 없었다. 위지호연은 복잡한 그리움을 느끼면서 쓰게 웃었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지호연은 ‘진짜’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꾸미고 올 것을 그랬나. 아니, 그것도 어울리지는 않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위지호연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 보았다.
  2805.  
  2806. ‘이건 그리 크지 않았지만.’
  2807.  
  2808. 위지호연이 느끼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그것이었다. 9년 동안 키가 크는 등 체격이 변하고 얼굴이 바뀌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크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고, 위지호연이 가진 기준에 있어서는 평균보다 조금 작았다. 남자 행세를 하지 않고 여자답게, 여자의 옷을 입고, 스스로를 여자라고 소개하며 9년을 살았다. 하지만 위지호연이 ‘들었던’ 전생에서 위지호연의 가슴이 자라지 않았 듯이, 위지호연이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살기는 했어도 그녀의 가슴은 커지지 않았다.
  2809.  
  2810. ‘나름 노력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2811.  
  2812. 다시 만났을 때, 도드라진 가슴의 굴곡을 보여주며 으스대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가슴은 커지지 않았다. 차라리 풍유환이라도 구해서 먹어볼까 싶기는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려고 하니 그 녀석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가 싶어서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슴이 정말로 수박처럼 커져버린다면, 그것도 굉장히 불편할 것 같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위지호연은 지금 자신의 가슴 크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체술을 펼치기에도 부담이 없고.
  2813.  
  2814. ‘하지만 지금은 꽤 후회되는 군.’
  2815.  
  2816. 하지 않기는 하였지만, 놀란 표정은 꽤 보고 싶었거든. 위지호연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2817.  
  2818. “이 세계는 무척이나 신비로와.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겪었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지. 지금의 나는, 전생의 네가 알고 있던 ‘나’와는 다를 것이야.”
  2819.  
  2820. 이렇게 말은 해보지만. 위지호연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2821.  
  2822. “뭐. 너는 전생의 나와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대화도 의미가 없군. 너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녀석이 아니잖아. 그렇지?”
  2823.  
  2824. 도플갱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옆구리의 상처를 도외시하고 공격. 앞서 뻗은 걸음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오며 쥐고 있던 창을 일직선으로 쏜다. 아니, 쏘는 척을 할 뿐. 창영이 흩날리며 창두를 감춘다. 일직선의 창간은 양팔, 양손의 움직임에 따라 직선이 아닌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2825.  
  2826. 그것이 위지호연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구천무극창 성민식. 본래 있던 구천무극창을, 위지호연이 이성민에게 맞게 뜯어고친 무공. 솔직히 그 무공을 전수하면서 위지호연은 이성민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위지호연이 보았던 이성민의 재능은 정말로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 10년의 시간을 주기는 하였지만 이성민이 초절정의 문턱에도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2827.  
  2828. 하지만 보라. 쏘아진 창은 자색의 강기가 덮여 아름답다. 자하신공의 강기다. 위지호연은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래로 처져있던 흑룡포가 위지호연의 손짓에 따라 앞을 향해 활짝 펼쳐진다.
  2829.  
  2830. 도플갱어가 내지른 창은 위지호연의 흑룡포에 의해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2831.  
  2832. “훌륭해졌어.”
  2833.  
  2834.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뻗은 손이 주먹을 쥐었을 때. 흑룡포에 휘감긴 창이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으스러졌다. 도플갱어는 잡은 창을 빼려고 들었지만 그보다 위지호연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는 살짝 말아 쥔 주먹을 도플갱어의 가슴에 가져갔다.
  2835.  
  2836. 퍼엉.
  2837.  
  2838. 도플갱어의 상체가 폭발했다. 위지호연은 흩뿌려진 살점을 피해 멀찍이 뒤로 물러서면서 쓰게 웃었다.
  2839.  
  2840. “네가 이곳에서 죽으면 나는 많이 슬플거야.”
  2841.  
  2842. 아마도.
  2843.  
  2844. 위지호연은 그렇게 덧붙이면서 몸을 돌렸다.
  2845.  
  2846. ======================================
  2847. < 던전-4 >
  2848.  
  2849.  
  2850.  
  2851. 백소고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2852.  
  2853. 그녀는 운이 좋았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마주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임 당한 극천도나 무쌍괴협과 비교한다면 확실하게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소고가 마주친 것은, 그녀와 함께 이곳에 들어 온 무림맹의 소속원 중 하나인 극천도의 도플갱어였다.
  2854.  
  2855. 무림맹의 다섯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극천도였고, 백소고의 실력은 다섯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덕분에 백소고가 극천도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리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2856.  
  2857. 더욱이 운이 좋았던 것은, 백소고가 다짜고짜 극천도의 도플갱어와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백소고는 극천도의 도플갱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했고, 이 던전이 어떤 식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2858.  
  2859. ‘도플갱어…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2860.  
  2861. 대부분의 무림인들. 특히나 에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무림에서 살다가 갑작스레 에리아에 소환 된 이계인들은 무공 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무림이라는 세상에 넘치는 자부심과, 무공이라는 기술이 제일이라는 자부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소고는 굉장히 합리적인 무림인이었다. 그녀는 무공 외에 다른 기술에 대해서도 박식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2862.  
  2863. ‘보통의 도플갱어는 모습만을 흉내낼 뿐인데. 하지만 이 던전의 도플갱어는 무공까지 사용하고 있어. 전투 자체는 미숙했지만… 극천도의 도플갱어는 극천도 본인과 비교해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무공을 사용했지.’
  2864.  
  2865. 백소고는 극천도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무림맹에 소속되고, 위지호연의 감시라는 임무를 받게 되면서 극천도와 여러 번 비무를 해왔기 때문이다. 극천도는 일행들과 비교해서 그리 뛰어난 고수는 아니었으나, 무공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진짜였기 때문에 백소고는 극천도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2866.  
  2867. ‘이 던전은 위험해.’
  2868.  
  2869. 쓰러진 도플갱어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던전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쓰러지면서 확실한 전리품을 남긴다. 백소고는 손을 뻗어 도플갱어의 살점을 뒤적거렸다. 방금 전까지 극천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살덩이를 뒤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살덩이를 헤집는 백소고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2870.  
  2871. “…포션?”
  2872.  
  2873. 끈적거리는 살점의 아래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유리병이 파묻혀 있었다. 백소고는 유리병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색깔은 영롱한 자주색. 나름대로 지식을 쌓은 백소고였지만, 안에 든 내용물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 가장 확실한 것은 자신이 마시거나 타인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많은 방법 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방법일 것이다.
  2874.  
  2875. 백소고는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아공간 포켓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무림맹의 쥐꼬리만 한 봉급을 모아 구입한 아티펙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잡한 돋보기처럼 보이지만, 이 아티펙트를 구입하기 위해 백소고는 반 년이 넘도록 생활비를 줄여야만 했다.
  2876.  
  2877. ‘엘릭서로군. 불순물도 적어… 이 정도의 엘릭서라면 고위 신관의 축복 급이야.’
  2878.  
  2879. 물론 엘릭서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팔이 잘렸을 때, 잘려나간 팔이 있다면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팔 자체를 재생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엘릭서는 다양한 포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힌다. 백소고는 엘릭서를 아공간 포켓 안에 집어 넣었다.
  2880.  
  2881. “…자아… 그러면…”
  2882.  
  2883. 백소고는 구불구불한 살덩이의 길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 공간이 변화한 것인지 이런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겠다.
  2884.  
  2885.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2886.  
  2887. 우선, 백소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2888.  
  2889. 던전을 악취 가득한 살덩이의 길로 바꾼 장본인인 장득수는 말이 많았다. 그는 이성민의 어깨 옆에서 걸으면서, 이성민이 백소고의 도플갱어를 살해할 때에 보였던 수법에 대해 감탄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무론을 늘어놓았다.
  2890.  
  2891. [시끄럽네요.]
  2892.  
  2893. 이성민은 루비아의 말에 공감했다. 차라리 죽이고 가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성민은 살인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성민이 2100년의 정신세계에서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정신이 붕괴하고 재구축되는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붙잡은 인간성 중 하나였다.
  2894.  
  2895. 죽이는 것에 망설임은 갖지 않는다. 하지만 즐기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다면 죽인다. 그래야 한다면 죽인다. 그 외에는 죽이지 않는다. 장득수는 수다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장득수는 초절정고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던전이니 함께 행동해서 나쁠 것은 없다.
  2896.  
  2897. 마갑이 웅웅거린다.
  2898.  
  2899. ‘또 뭡니까?’
  2900.  
  2901. [단순한 궁금증이다.]
  2902.  
  2903. 이제까지 잘 닥치고 있던 허주이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웅웅거리는 것에 이성민이 그리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조금 안심한 모양이었다.
  2904.  
  2905. [네놈. 왜 먹지 않는 것이냐?]
  2906.  
  2907. 뭔가 싶었더니. 이성민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도플갱어의 사체를 뒤져 얻은 전리품. 이성민이 획득한 것은 인공적으로는 정제가 불가능한,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마정석이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영약이다. 본래 영약은 아무리 잘 만들고, 복용자가 뛰어난 심법을 익힌 고수이거나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고 하여도 취할 수 있는 내공과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
  2908.  
  2909. 하지만 마정석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보석이지만, 입에 넣는다면 사르르 녹아 그대로 몸에 흡수된다. 내공심법도 마법도 필요없다. 복용한 순간 아무런 부작용없이 힘이 더해진다. 무공을 익혔다면 내공이 증진되고, 마법을 익혔다면 마력이 증진된다.
  2910.  
  2911. ‘내 몸뚱이는 불안정합니다. 괜히 처먹었다가는 몸이 망가질 수도 있어요.’
  2912.  
  2913.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걸.]
  2914.  
  2915. 이성민의 대답에 허주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2916.  
  2917. ‘…무슨 뜻입니까?’
  2918.  
  2919. [빙의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 갑옷에 깃들어 네놈의 몸을 밀착하여 살필 수 있었지. 확실히 네놈은 불안정해. 하지만 그런 주제에 몸뚱이는 굉장히 튼튼하지.]
  2920.  
  2921. ‘튼튼하다고?’
  2922.  
  2923. [네놈의 몸 안에 이상한 것이 있어. 의식하고 있나? 으하하! 인간의 몸에 인간의 것이 아닌 심장이라니. 이 대요괴 허주가 장담하건데, 대요괴라고 불리는 놈들 중에서 네놈만큼 튼튼하고 뛰어난 심장을 가졌던 놈은 없었다. 물론 이 몸을 제외하고서 말이야.]
  2924.  
  2925. [몸뚱이도 없는 주제에 으스대기는.]
  2926.  
  2927. 루비아가 투덜거렸지만 허주는 개의치 않았다. 이성민은 허주의 말에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육체의 부조화. 그것이 일어난 것은 얻은 심득을 무공으로 제대로 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이 앞선다. 부족한 기는 검은 심장 덕분에 얼마든지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체가, 이 몸뚱이가. 마음이 보고 겪은 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 정신세계에서 보낸 2100년은 그 부조화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2928.  
  2929. 이성민은 불영대사에게 대환단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복용하지 않고, 이성민의 아공간 포켓 안쪽에 보관되어 있다. 이성민이 그를 복용하지 않는 것은 괜히 내공을 부풀렸다가 심기체의 부조화가 심해서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2930.  
  2931. ‘하지만 몸뚱이가 튼튼하다고. 심장 때문이야. 무조건 믿을 수는 없지만.’
  2932.  
  2933. 프레스칸에게 확실한 답을 얻는다면 모를까. 허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몸에 빙의하여, 그의 육체를 빼앗으려 한 장본인이다.
  2934.  
  2935. ‘그런데 허주. 당신이 잠자는 숲에서 나와 마갑에 깃든 것도 꽤 되었는데. 당신은 왜 숲에서 나가고자 했던 겁니까?’
  2936.  
  2937. [뭐냐 그 말은. 그 숲에서 이미 대답했을 텐데? 모른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네놈과 함께 숲을 나가야 한다는 것 뿐이었어.]
  2938.  
  2939. ‘함께 나간다는 새끼가 몸을 빼앗으려고 듭니까?’
  2940.  
  2941.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새끼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참 요상하군.]
  2942.  
  2943. 그래도 2100년은 살았어 새끼야. 이성민은 그렇게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2944.  
  2945. [이것은 강력한 암시야. 어떤 대단한 존재가 이 대요괴 허주에게 암시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 따위는 아니겠지.]
  2946.  
  2947. ‘따위?’
  2948.  
  2949. [하하! 되돌아 온 자라고는 하지만 아는 것은 부족하군. 이 세계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야. 나도 하고자 했다면 신이 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신이라는 것은 필멸자가 필멸의 굴레를 반쯤 벗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절대적인 것 같으면서도 미약한 존재지.]
  2950.  
  2951. 허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므쉬와 데니르를 떠올렸다. 그들이 보여 준 권능을 생각한다면 허주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다.
  2952.  
  2953. [뭐 어찌 되었든. 나는 네놈과 함께 숲을 나가야 했고, 숲을 나오게 되었지. 머지않아서 그래야 했다는 것이 증명될 거야. 운명이라는 것은 그런 법이지.]
  2954.  
  2955. ‘운명은 개뿔이.’
  2956.  
  2957. [네놈은 운명을 믿지 않는 것이냐?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린 거야. 네놈이 죽음에서 돌아오고, 내가 네놈과 함께 숲을 나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 된 것이다. 그것이 인과율이고 운명이지.]
  2958.  
  2959. 운명의 신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것일까. 이성민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2960.  
  2961. “음.”
  2962.  
  2963. 하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육감이 발하는 경고에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장득수도 느낀 것이 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2964.  
  2965. “…취걸?”
  2966.  
  2967. 장득수가 목소리를 냈다.
  2968.  
  2969. 취걸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취걸의 주변에는 흩어친 도플갱어의 사체가 있었다.
  2970.  
  2971. “아… 장대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을 보니… 후후! 사람이 맞는 것이겠지요?”
  2972.  
  2973. 취걸은 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우두커니 서서 앉아 있는 취걸을 보았다.
  2974.  
  2975. “…으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2976.  
  2977. 장득수가 급히 취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취걸을 부축하려 들었으나, 취걸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2978.  
  2979. “괜찮습니다. 그냥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독고귀검과 만났습니다. 아니, 독고귀검이 아닌가. 독고귀검과 똑같은, 독고귀검과 같은 무공을 쓰는… 그런 괴물과 만났지요.”
  2980.  
  2981. 언제나 말이 많고 유쾌하던 취걸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통증과 피로에 찌들어 웃을 수가 없었다. 왼 팔이 잘려나간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982.  
  2983. “포션은…?”
  2984.  
  2985. “아공간 포켓이 박살났습니다. 안에 있던 것들은 공간의 틈새로 사라져버렸지요. 그래도… 지혈은 했습니다.”
  2986.  
  2987. “장득수님. 포션은 안 가지고 계십니까?”
  2988.  
  2989. “…없네.”
  2990.  
  2991. 당당한 대답이었다. 이성민은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않고서 던전에 들어 온 장득수의 무식함에 경외를 느꼈다.
  2992.  
  2993. 주변을 살펴본다. 독고귀검이었던 도플갱어의 시체는 보였지만, 잘린 취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2994.  
  2995. “팔은 어디로 갔습니까?”
  2996.  
  2997. 이성민이 취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취걸은 이성민을 올려 보면서 흐릿한 눈동자를 굴렸다. 그 시선을 받은 장득수가 대답했다.
  2998.  
  2999. “1년 전, 검귀를 죽인 귀창. 자네도 들어본 적이 잇지 않은가?”
  3000.  
  3001. “들어는 보았습니다만… 설마 그가?”
  3002.  
  3003. “우연히 나와 만나게 되어 이곳까지 동행하고 있었네.”
  3004.  
  3005. 유명한 별호를 가지게 된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귀창이라는 별호를 듣고서 취걸은 납득하여 머리를 끄덕거렸다.
  3006.  
  3007. “…독고귀검은 쾌검의 고수입니다.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은 실상은 수십개의 검기가 실려 있지요. 저 살덩이 틈바구니에, 내 왼 팔이었던 살덩이들도 섞여 있을 겁니다.”
  3008.  
  3009. “도플갱어의 사체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3010.  
  3011. “무공서.”
  3012.  
  3013. 취걸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옆에 있던 빳빳한 책을 들어 흔들었다. 살점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무공서에 새겨진 글씨는 선명했다.
  3014.  
  3015. “항룡십팔장이라니. 개방도인 나에게 개방의 무공서라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물론 항룡십팔장은 뛰어난 무공이지만, 나에게는 필요가 없어요.”
  3016.  
  3017. “포션.”
  3018.  
  3019.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공간 포켓에 손을 넣었다. 취걸이 움찔하고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3020.  
  3021.  
  3022.  
  3023. ‘어차피 포션은 많이 있으니까.’
  3024.  
  3025. 팔이 남아 있다면 엘릭서를 써서 붙여 줄 수 있겠지만, 남아 있지 않으니 귀중한 엘릭서를 쓸 필요는 없다. 적당한 포션을 먹인다면 기운은 차릴 수 있을 것이다.
  3026.  
  3027. 포션 몇 개쓰는 것으로 개방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지학은 소림의 미래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취걸도 개방의 미래일 것이다. 그런 취걸에게 도움을 주어 인연을 만든다면 개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다.
  3028.  
  3029. 개방은 유명한 정보 문파다. 거지가 없는 도시는 없고, 대부분의 거지들은 개방에 소속되어 눈과 귀의 역할을 맡고 있다. 에레브리사의 회원인 이성민은 정보에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개방의 힘이 정보뿐인 것은 아니다. 구파일방의 일방인 개방은 머릿수만 따지자면 모든 문파 중에 제일이다. 그런 거대 문파와, 그 거대 문파의 중심격인 인물과 인연을 만들어 손해 볼 것은 없다.
  3030.  
  3031. “…감사합니다.”
  3032.  
  3033. 취걸은 이성민이 건네는 포션을 받으면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던 항룡십팔장의 무공서를 이성민에게 건네주었다.
  3034.  
  3035. “저에게는 필요가 없는 무공인데. 어떠십니까?”
  3036.  
  3037. “감사합니다.”
  3038.  
  3039. 이성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항룡십팔장은 개방의 절기로 뛰어난 무공이다. 만약 저것을 얻은 것이 취걸이 아니라면 대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항룡십팔장에 욕심을 낼 이유는 없었다. 백보신권도 익혀두기는 했지만 제대로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 항룡십팔장까지 익힐 이유는 없었다.
  3040.  
  3041. ‘워낙 유명한 무공이라 팔아봤자 큰 가치는 없을 거야. 백보신권이 그랬던 것처럼.’
  3042.  
  3043. 그래도 공짜로 받는 것이니 기분은 좋았다.
  3044.  
  3045. ======================================
  3046. < 던전-5 >
  3047.  
  3048.  
  3049.  
  3050. “후우!”
  3051.  
  3052. 다섯 병의 포션이 소모되었다. 취걸은 이전과 비교해서 확실히 나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팔뚝부터 잘린 왼 팔이 어색하여 몇 번 어깨를 돌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린 팔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3053.  
  3054. “감사합니다.”
  3055.  
  3056. 취걸이 이성민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상처가 아물면서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이성민은 취걸의 웃음을 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3057.  
  3058. “별 것도 아닌 것을요.”
  3059.  
  3060. “저에게는 아닙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크게 곤란해 졌을 거예요.”
  3061.  
  3062. 당연히 그렇겠지. 장득수는 포션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취걸은 가진 아공간 포켓을 잃었다. 혈도를 점해 지혈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만능인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육체가 그 부담을 지게 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던전이니 약해진 몸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3063.  
  3064. ‘애초에 전생에서 취걸은 죽었어. 장득수도 마찬가지고.’
  3065.  
  3066. 그리고 백소고도.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생각했다. 이성민이 그러는 동안, 장득수는 이 던전의 특징에 대해 취걸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취걸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3067.  
  3068.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요. 위지호연 본인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도플갱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큰 피해가 생길 겁니다. 어쩌면 위지호연 본인보다 그녀의 도플갱어가 위험할 지도 몰라요. 대화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3069.  
  3070. 어쩌면 이미 피해자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생각하니 이성민은 초조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성민이 이 던전에 온 것은 백소고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그녀의 죽음만 막을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죽는 것쯤은 아무 상관없었다. 개방과의 인연을 만들어두기 위해 취걸을 돕기는 했지만, 백소고만 살릴 수 있다면 이성민은 지금 당장 취걸을 죽일 수도 있었다.
  3071.  
  3072. “갑시다.”
  3073.  
  3074. 이성민이 먼저 움직였다. 장득수와 취걸이 이성민의 뒤를 따랐다.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다짜고짜 달려 나갈 수가 없었지만, 이성민은 감각을 활짝 열고서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려 들었다.
  3075.  
  3076. “백소저가 걱정되는 겁니까?”
  3077.  
  3078. 그런 이성민에게 가까이 다가 온 취걸이 질문했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취걸을 돌아보았다.
  3079.  
  3080. “아. 당신이 백소저와 사제관계라는 것은 백소저 본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1년 전에… 그러니까, 당신이 검귀를 죽였을 때.”
  3081.  
  3082. “…사저와 무슨 관계이십니까?”
  3083.  
  3084. “동료죠.”
  3085.  
  3086. 날이 선 이성민의 질문에 취걸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취걸은 이성민이 드러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왜 자신이 취걸에게 순간이나마 적의를 품은 것인지. 자기 자신이 한 일임에도, 이성민은 그 이유를 잘 알수가 없었다.
  3087.  
  3088. “아… 죄송합니다. 단지, 의외의 질문이라 놀라버린 것뿐입니다.”
  3089.  
  3090. “아, 괜찮습니다. 이런 문제는 경우에 따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니까요.”
  3091.  
  3092. 취걸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문파에서의 사제관계라면 비밀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성민과 백소고처럼 문파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무공을 공유하며 이뤄진 사제 관계는 비밀스러울 때도 있는 법이다.
  3093.  
  3094. “백소저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녀는 저희 중에서 가장 강해요.”
  3095.  
  3096. “하지만 위지호연보다는 약하겠죠.”
  3097.  
  3098. 그 대답에 취걸은 입을 다물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앞을 보았다. 그러던 중에 루비아의 목소리가 이성민의 머릿속에 울렸다.
  3099.  
  3100. [분석이 끝났어요.]
  3101.  
  3102. 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요. 루비아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루비아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부심이 충만하게 차있었다. 이성민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3103.  
  3104. “무슨 일입니까?”
  3105.  
  3106. 이성민이 가던 것을 멈추니 취걸과 장득수가 묻는다. 이성민은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고서 루비아에게 질문했다.
  3107.  
  3108. ‘어떻습니까?’
  3109.  
  3110.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직접 보는 것이 낫겠죠.]
  3111.  
  3112. 그 말이 끝난 순간, 이성민의 눈 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가끔 띄워서 확인하던 상태창과 같은 식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은 전혀 달랐다.
  3113.  
  3114. “이런 건 오랜만이군.”
  3115.  
  3116. 얼마만일까. 데니르가 기억의 백업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향수조차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의 백업을 받은 덕에, 이성민은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이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에리아로 소환되기 전. 대한민국의 서울에 살았을 때, 그래. 이성민이 아직 초등학생이던 시절.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이성민도 컴퓨터 게임을 즐겨 했었다.
  3117.  
  3118. ‘미니맵이잖아.’
  3119.  
  3120. 평면적으로 그려진 지도에 푸른 점이 깜박거린다. 이성민의 시선이 그것을 향하자, 루비아가 설명했다.
  3121.  
  3122. [저 파란 점이 당신이에요. 이 던전은 네 개의 외길이 있는데, 모든 길의 끝은 한 곳으로 이어져요. 아마 그곳에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있겠죠.]
  3123.  
  3124. 모든 던전에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은 던전에서 생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3125.  
  3126. [보세요.]
  3127.  
  3128. 멈춰 있는 푸른 점의 곁에 노란 점 두 개가 생겨났다.
  3129.  
  3130. [현재 던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에요.]
  3131.  
  3132. 노람 점들이 늘어난다. 그 숫자는 이성민의 것을 포함한다면 총 여덟 개였다.
  3133.  
  3134. [그리고 이쪽이 사람이 아닌 존재들. 아마 도플갱어겠죠.]
  3135.  
  3136. 도플갱어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붉은 점 세 개가 만들어진다. 이성민은 노란 점과 붉은 점을 노려보았다. 도플갱어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성민을 조금 안심시켰다. 그리고 노란 점이 많다는 것도.
  3137.  
  3138. ‘던전에 추가적으로 들어 온 사람은 없는 건가?’
  3139.  
  3140. [아마도요.]
  3141.  
  3142. 이성민이 던전에 들어 온 시점에서, 이 던전에 있는 것은 열 명이었다. 위지호연과 그녀의 추종자 셋. 백소고를 포함한 무림맹의 다섯. 그리고 이성민.
  3143.  
  3144. 하지만 지금 생존자는 여덟이다. 둘이 죽었다. 누가 죽은 것인지 이성민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제발 백소고가 아니기를. 그렇게 간절하게 믿을 뿐.
  3145.  
  3146. ‘움직이고 있는 도플갱어는 셋이야.’
  3147.  
  3148. 백소고의 도플갱어가 죽었고, 독고귀검의 도플갱어가 죽었다. 그 외에도 다섯의 도플갱어가 죽었다.
  3149.  
  3150. ‘누구의 도플갱어지?’
  3151.  
  3152.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죽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위지호연 본인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여럿이서 합공을 한다면 또 모를 일이겠지만.
  3153.  
  3154. ‘아니. 지금 움직이는 도플갱어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어.’
  3155.  
  3156.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면, 결국 끝의 광장에서 생존자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다면 끝의 광장에 가서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3157.  
  3158. 사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3159.  
  3160. “앞쪽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3161.  
  3162. 거리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노란 점은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다.
  3163.  
  3164. ‘혹시 이 던전에 마법 트랩은 있습니까?’
  3165.  
  3166. [글쎄요…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는데요.]
  3167.  
  3168. “더 이상 마법 트랩은 없는 듯 합니다. 속도를 올리도록 하죠.”
  3169.  
  3170. 루비아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이성민은 개의치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루비아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건 말건 이성민은 취걸과 장득수의 행동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성민이 달리기 시작하자 취걸과 장득수도 이성민의 뒤를 따라 뛰었다.
  3171.  
  3172. 노란 점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하지만 근접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성민은 루비아가 띄운 미니맵을 통해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지만, 누군지 모를 노란 점은 등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더 이상 앞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3173.  
  3174. ‘아니야.’
  3175.  
  3176.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서있는 것은 백소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위지호연인 것도 아니었다. 누더기처럼 지저분한 장포를 걸친 것은 작달막한 키를 가진 노파였다. 이성민은 저 노파를 처음 보았지만, 그녀가 위지호연을 따라 이 던전에 들어 온 혈혈노파라는 것을 눈치챘다.
  3177.  
  3178. 선택해야 했다.
  3179.  
  3180. 장득수와 취걸과 함께 혈혈노파와 싸울지. 아니면 혈혈노파를 저 둘에게 맡기고 백소고를 구하러 갈지. 사실 이 문제는 선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이미 이성민에게는 답이 내려져 있었으니까.
  3181.  
  3182. [미안합니다.]
  3183.  
  3184. 그래도. 이성민은 취걸에게 그런 전음을 보냈다. 갑작스런 전음에 취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 쪽을 보았다.
  3185.  
  3186. [혈혈노파가 앞에 있습니다. 그녀와 싸웠다가는 시간이 너무 걸릴 수밖에 없어요. …나는 사저를 구해야 합니다.]
  3187.  
  3188. “미안하다고 할 것은 없습니다.”
  3189.  
  3190. 전음과 내용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취걸은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쓰게 웃으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3191.  
  3192. “나 역시 백소저를 구하고 싶으니까요. 팔이 잘린 나보다는 당신이 가는 것이 앞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3193.  
  3194.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겐가?”
  3195.  
  3196. 이성민과 취걸의 대화에 장득수가 질문했다. 그러다가 장득수도 혈혈노파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공력을 끌어 올렸다.
  3197.  
  3198. “혈혈노파!”
  3199.  
  3200. 장득수가 고함을 질렀다. 꼭 그렇게 외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싶기는 하였지만. 이성민은 다시 앞을 보았다. 멀리 보이던 혈혈노파와의 거리는 더 이상 멀지 않았다. 혈혈노파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3201.  
  3202. “끌끌! 개방의 꼬맹이는 팔이 잘렸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돼지가 큰 소리를 내는 구나.”
  3203.  
  3204. 그렇게 중얼거리던 혈혈노파가 이성민을 보았다. 그녀는 이성민의 얼굴을 보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3205.  
  3206. “넌 또 누구냐?”
  3207.  
  3208. 작은 목소리였지만 공력이 가득 담겨 있어 거리를 격하고 귀청을 때린다. 이성민은 혈혈노파의 질문을 무시했다. 대신에 그는 진기를 끌어 올리며 경공의 속도를 높였다.
  3209.  
  3210. “혼자서는 위험해!”
  3211.  
  3212. 장득수가 뒤에서 고함을 지른다. 이성민은 그 고함을 무시했다. 취걸에게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장득수에게는 그런 감정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혈혈노파는 빠르게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고서 조금 당황했지만, 개의치 않고서 주름 가득한 손을 들어 올렸다. 공력이 가득 덮인 혈혈노파의 오른 손이 흉흉한 기운을 발했다.
  3213.  
  3214. “어린놈이 용감하구나!”
  3215.  
  3216. 혈혈노파가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일장이 이성민을 향해 뻗어졌다. 정면으로 맞는다면 호신강기가 있다고 해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당연히 정면으로 뚫을 생각은 없었다. 이성민은 위로 도약하여 혈혈노파의 장력을 피해냈다.
  3217.  
  3218. “쥐새끼같은 놈!”
  3219.  
  3220. 혈혈노파가 이성민이 그리 대응할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녀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반대쪽 손을 허공에 뜬 이성민을 향해 뻗었다. 그 순간에 이성민은 허리를 비틀었다. 발판 없는 공중에서 이성민의 몸이 움직인다. 그의 발이 허공을 딛었을 때. 혈혈노파의 장력이 이성민의 몸을 박살냈다.
  3221.  
  3222. ‘이형환위!’
  3223.  
  3224. 잔상이 무너진다. 혈혈노파는 움찔하고서 발을 뒤로 빼냈다. 이성민의 몸이 혈혈노파의 정면으로 육박한다. 혈혈노파는 이성민이 외견과는 다르게 뛰어난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터운 호신강기로 몸을 덮었다. 이성민은 그런 혈혈노파를 향해 쥐고 있던 창을 찔렀다.
  3225.  
  3226. 혈혈노파가 찌르는 창두에 대응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허초다. 혈혈노파의 손이 창두를 걷어내려 할 때, 창두의 궤적이 비틀린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혈혈노파의 틈을 찔러볼까 했지만 그녀의 왼 손은 허초에 대한 대응을 끝내고 실행하고 있었다. 혈혈노파의 왼 손이 이성민의 몸을 잡으려 들었다. 이성민은 창을 잡고 있던 오른 손을 놓고서 혈혈노파를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3227.  
  3228. ‘혈혈노파는 수공의 고수다. 맨손으로 상대해서는 안 돼.’
  3229.  
  3230. 그를 앎에도 손을 뻗는다. 이성민의 오른 손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쩌어엉! 혈혈노파와 이성민의 손이 부딪혀 폭음이 터졌다. 혈혈노파는 손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에 눈을 크게 떴다.
  3231.  
  3232. ‘어린 놈의 공력이 무슨…!’
  3233.  
  3234. 예상 외의 묵직함에 놀라기는 했지만 혈혈노파는 주눅들지 않았다. 이성민이 의도한 것은 혈혈노파의 당황함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그녀가 수공을 펼치려 하자, 이성민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공격을 피해 땅으로 몸을 날렸다.
  3235.  
  3236. “나려타곤! 이놈! 무인이라는 놈이!”
  3237.  
  3238. 땅을 뒹구는 이성민을 보며 혈혈노파가 노호성을 터트린다. 그러던지 말던지.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 이성민은 자세를 추스른 즉시 앞으로 뛰었다. 그제 서야 혈혈노파는 이성민이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단순히 앞으로 나가는 것을 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3239.  
  3240. “놈!”
  3241.  
  3242. 혈혈노파가 이성민의 등을 향해 일장을 날리려 들었다. 그 전에 취걸이 혈혈노파를 향해 항룡십팔장을 날렸다. 혈혈노파는 급히 손의 방향을 틀어 취걸의 장력에 대응했다.
  3243.  
  3244. “뭐, 뭐야? 어디를 가는 거야?”
  3245.  
  3246. 장득수가 당황하여 외친다. 이성민은 그 외침을 뒤로 하고서 계속해서 앞으로 뛰었다. 미니 맵을 본다. 이 앞에는 아무도 없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면 끝의 광장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3247.  
  3248.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끝에 도착한다면 보스 몬스터가 출현할 것이다.
  3249.  
  3250. ‘이 벽. 뚫을 수 있을까?’
  3251.  
  3252. 혈혈노파와의 거리를 벌리고 나서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벽을 보면서 루비아에게 물었다.
  3253.  
  3254. [글쎄요… 해봐야 알지 않을까요?]
  3255.  
  3256. 루비아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에 이성민은 양 손으로 창을 잡았다. 자하신공이 운용되며 이성민의 창이 자색으로 휘감겼다.
  3257.  
  3258.  
  3259.  
  3260. ‘다른 길로 들어가야 해.’
  3261.  
  3262. 위지호연과, 혹은 그녀의 도플갱어와 만나기 전에 백소고와 만나야 했다.
  3263.  
  3264. ======================================
  3265. < 재회-1 >
  3266.  
  3267.  
  3268.  
  3269. 위치를 잡는다. 벽이 얼마나 두꺼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끝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성민은 시야 한쪽에 떠있는 미니맵을 바라보았다.
  3270.  
  3271. 끝으로 이어지는 길은 총 네 개. 현재 이성민이 있는 길에 있는 것은 취걸과 장득수, 혈혈노파다. 이성민은 다른 길 네 개를 응시했다.
  3272.  
  3273. 네 개의 길 중 두 개는 노란 점과 붉은 점이 공존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길에는 하나는 노란 점 두 개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길에는 붉은 점만이? 있었다. 이성민은 붉은 점만이 남은 길을 노려 보았다.
  3274.  
  3275. ‘누구지?’
  3276.  
  3277. 누구의 도플갱어인가. 길 하나에 도플갱어만 남아 있는 것이라면 저 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플갱어에게 살해되었다는 뜻일 터.
  3278.  
  3279. ‘위지호연인가?’
  3280.  
  3281. 어쩌면 이미 백소고는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불길함을 삼켰다. 다른 길을 본다. 사람만 세 명 있는 길. 사람과 도플갱어가 함께 있는 길이 하나. 도플갱어 둘이 있는 길이 하나.
  3282.  
  3283. 도플갱어만 있는 길은 일단 제외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현재 이성민이 위치해 있는 길에서 갈 수 있는 것은 오른쪽과 왼쪽. 그 중 왼 쪽에는 사람과 도플갱어가 있었고, 오른 쪽에는 사람이 셋 있었다.
  3284.  
  3285. 미니맵을 보던 이성민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노란 점 세 개가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3286.  
  3287. 어떻게 해야 할까.
  3288.  
  3289. 최악의 경우는 이것이다. 저 노란 점 세 개가 위지호연이 아닌, 위지호연의 추종자들이라는 것. 위지호연 본인이라면 크게 문제는 안 된다. 위지호연도 이성민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를 추종하는 마인들이라면? 그들이 이성민을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3290.  
  3291. ‘위지호연의 이름을 팔아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3292.  
  3293. 노란 점들 간의 거리가 가깝다. 곧 있으면 조우할 것이다. 아니면 이미 서로를 포착했을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왼쪽 길을 힐긋 보았다. 도플갱어와 사람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다.
  3294.  
  3295. “제기랄.”
  3296.  
  3297. 이성민은 강기에 덮힌 창을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정말 최악의 경우라서, 이 벽 너머에 마두 둘. 독고귀검과 마랑철권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지호연과 백소고가 있을 지도 모르고, 극천도나 무쌍괴협이 있을 지도 모른다.
  3298.  
  3299. 확실한 것은 없다. 해봐야 안다. 창 전체를 휘감고 있던 강기가 창두 끝으로 모인다. 날이 선 부분에 응집된 강기가 작게, 작게 응축되었다.
  3300.  
  3301. [호오.]
  3302.  
  3303. 그것을 보고서 허주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이성민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수라는 것은 알았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강기의 조율이 능숙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3304.  
  3305. [도달한 무공의 경지로는 불가능한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냐?]
  3306.  
  3307. “예전에 해봤거든.”
  3308.  
  3309. 이성민은 창끝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이성민이 도달한 무공의 경지. 상태창으로 보이는 무공의 경지만 본다면 이렇게까지 강기를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적으로 이성민의 무공 수위는 자하신공과 구천무극창, 무영탈혼이 모두 8성이었다.
  3310.  
  3311.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게. 이성민은 이미 그보다 훨씬 앞선 경지에 도달한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데, 육체와 익힌 무공이 그것을 완전히 펼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가능하지 못한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공의 소모가 크다.
  3312.  
  3313. 하지만 해낸다. 단전에 공허감이 들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개의치 않았다. 이성민은 창을 잡은 손에 계속해서 힘을 불어 넣었고 내공을 쏟아 부었다. 루비아가 혀를 내둘렀고 허주는 침묵했다. 창끝에 응집된 강기는 진한 자색이었다.
  3314.  
  3315. ‘정신세계랑은 확실히 다르군.’
  3316.  
  3317. 그때는 이것보다 빠르고 편했는데. 이성민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것뿐이었다. 이성민은 붉은 색 살덩이로 이루어진 벽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3318.  
  3319. [재밌는 놈이군.]
  3320.  
  3321. 이성민의 창이 벽을 터트렸을 때, 허주가 껄껄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3322.  
  3323.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뚫은 벽을 걸어 들어갔다. 내공이 크게 빠져나간 덕에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성민은 떨리는 다리를 잡고 있다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3324.  
  3325. ‘어쩔 수 없군.’
  3326.  
  3327. 이성민은 우선 아공간 포켓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만으로 몸의 피로는 조금 가셨지만, 포션이 소모된 내공까지 회복시켜주지는 않았다.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운기조식을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다.
  3328.  
  3329.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서 대환단을 꺼냈다. 그는 대환단을 반으로 쪼개고서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입에 넣은 대환단의 반쪽이 바로 녹아 목으로 넘어간다. 본래 영약을 복용한다면 운기조식을 하며 내공을 취해야 하지만, 검은 심장을 가진 이성민은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복용한 대환단 반쪽의 내공은 바로 이성민의 단전에 쌓였다.
  3330.  
  3331. “후우!”
  3332.  
  3333.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 대환단과 마정석을 복용하지 않고 둔 것이다.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급할 때에 내공을 바로 회복하기 위함도 있었다. 비었던 단전이 가득 찬다. 확실히 대환단은 소림 최고의 영약답게 반쪽만으로도 이성민이 소모한 내공을 대부분 회복시켜 주었다.
  3334.  
  3335. ‘주화입마는 없군. 허주의 말이 맞을 지도 몰라.’
  3336.  
  3337.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이성민은 내공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고서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노란 점 두 개는 같은 위치에 있었고, 지금 이성민이 있는 곳과는 그리 멀지 않았다.
  3338.  
  3339. 얼마나 달렸을까.
  3340.  
  3341. 교전하고 있는 둘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성민의 가슴이 쿵쿵거리며 뛴다. 새하얀 무복과 회색 머리카락. 이성민은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3342.  
  3343. 백소고다.
  3344.  
  3345. 백소고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검은 무복을 입은 거한이었다. 덩치만을 보자면 장득수보다 크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 맨 주먹을 사용하는데, 그 강맹한 공격은 직접 당하지 않고 보는 것뿐인데도 가슴을 졸이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3346.  
  3347. ‘주먹. 마랑철권인가?’
  3348.  
  3349. 백소고와 마랑철권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 몸으로 무투를 벌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둘의 공격법은 판이하게 달랐다. 백소고가 무영탈혼을 기본으로 하여 쾌와 환을 중점으로 쉴 틈 없이 몰아친다면, 마랑철권은 느리고 묵직했다. 둘 중 누가 우세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듯 했지만, 이성민이 보기에는 백소고가 조금 우세한가 싶었다.
  3350.  
  3351.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소고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빼빼 마른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3352.  
  3353. 독고귀검이다.
  3354.  
  3355. 독고귀검 외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극천도나 무쌍괴협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백소고를 공격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서있는 남자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검이 걸려 있었다.
  3356.  
  3357.  
  3358.  
  3359. 경공을 펼치는 이성민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3360.  
  3361. 아까까지만 해도 운이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설마 이 길에서 독고귀검과 마랑철권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아주 불운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마랑철권과 독고귀검이 합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3362.  
  3363. 그렇게 된 것은 마랑철권이 강짜를 부렸기 때문이다. 서로가 무기를 쓰지 않고 맨몸 무투에 일가견이 있으니, 마랑철권이 직접 나서서 한 번 겨뤄보고 싶다고 승부를 걸어왔다.
  3364.  
  3365. ‘여기서 내가 이긴다고 해도…’
  3366.  
  3367.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랑철권은 뛰어난 고수였지만, 백소고는 그 마랑철권보다 반 수 정도 뛰어났다. 쉽게 쓰러트릴 수는 없지만 큰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백소고는 마랑철권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3368.  
  3369. 문제는 독고귀검이다. 독고귀검은 위지호연을 따르는 추종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 고수였다.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마랑철권을 쓰러트린 후에 독고귀검과 싸우게 된다면 백소고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3370.  
  3371. ‘마랑철권을 제압하고서 그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아니. 이게 가능할 리가 없지. 독고귀검이 마랑철권의 목숨을 신경쓸 리도 없고.’
  3372.  
  3373.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소고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마랑철권을 압박했다. 뒤로 조금씩 밀려나는 마랑철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독고귀검의 미묘한 웃음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섰는데, 이렇게 망신을 당하게 되니 열불이 끓었다.
  3374.  
  3375. “계집년이…!”
  3376.  
  3377. 노한 목소리로 씹어 뱉어 보지만 마랑철권은 백소고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에,
  3378.  
  3379. 쿠우우웅!
  3380.  
  3381. 커다란 소리가 났다. 독고귀검이 반응했고 백소고의 어깨도 흠칫 떨렸다. 그로 인해 자그마한 틈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소리에 놀란 것은 마랑철권도 마찬가지라 백소고가 보인 틈을 기회로 바꿀 수는 없었다.
  3382.  
  3383. “누군가가 오는군.”
  3384.  
  3385. 독고귀검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랑철권도, 백소고도 느꼈다. 누군가가 고속으로 접근하고 있다. 누구지? 백소고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한 최악은 다가오는 것이 혈혈노파거나… 위지호연일 때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백소고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3386.  
  3387. “저 놈은 뭐야?”
  3388.  
  3389. 백소고는 뒤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마랑철권과 독고귀검은 아니었다. 마랑철권은 백소고에게 집중하느라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 볼 수가 없었다.
  3390.  
  3391. “무림맹 놈들 중에 창을 쓰는 녀석이 있었나?”
  3392.  
  3393. 독고귀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뽑았다. 창. 없다. 취걸과 무쌍괴협은 무투파고, 장득수는 도끼를 쓰며, 극천도는 도를 사용한다. 창… 창. 백소고의 기억 저편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한 명. 창을 쓰는 무인을 알고 있었다.
  3394.  
  3395. “보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군.”
  3396.  
  3397. 독고귀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저 누구인지 모를 놈에게 흥미가 동했다. 백소고는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3398.  
  3399. “먼저 죽일까?”
  3400.  
  3401. “필요없다!”
  3402.  
  3403. 독고귀검이 마랑철권에게 물었고, 마랑철권이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독고귀검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러던 중에
  3404.  
  3405. 까아앙!
  3406.  
  3407. 섬광처럼 쏘아진 찌르기가 독고귀검의 검과 부딪힌다. 독고귀검의 자세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속도가 실린 찌르기를 받아 냈다.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독고귀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지금의 일격을 통해, 상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3408.  
  3409. “누구냐?”
  3410.  
  3411. 독고귀검이 묻는다. 마랑철권의 공격에 백소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런 3자의 난입에 마랑철권도 바로 백소고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백소고와, 독고귀검을 공격한 남자를 보았다.
  3412.  
  3413. 이성민을.
  3414.  
  3415. 백소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이성민의 등을 보았다. 1년 전에 보았던 등이다. 그때와 비교해서 겉모습의 큰 차이는 없다. 그런데, 왜일까. 왜 저 등이, 1년 전과 비교해서 크게 성장하지 않은 등이 더 커보이는 것일까.
  3416.  
  3417.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 뒤를 돌아서, 백소고에게. 사저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앞에는 독고귀검과 마랑철권이 있다. 이성민이 틈을 보인다면 독고귀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할 것이다.
  3418.  
  3419. “사저.”
  3420.  
  3421. 창을 든다. 양 손이 저릿했다. 속도를 실어 충돌했으나 독고귀검은 이성민의 공격을 무리없이 받아냈다. 비록 독고귀검의 도플갱어가 취걸에게 쓰러졌다고는 해도, 독고귀검의 실력이 취걸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이 느끼는 독고귀검의 강함은, 그가 여태까지 보았던 모든 무인을 통틀어서 가장 강했다. 만월 아래의 검귀도 독고귀검과 비교한다면 몇 수 떨어져 보였다.
  3422.  
  3423. “오랜만입니다.”
  3424.  
  3425. 백소고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이성민은 독고귀검을 노려 보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백소고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1년이다. 고작해야 1년. 1년 전과 비교해서 백소고는 분명히 강해졌다. 하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백소고의 실력은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고는 하나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다.
  3426.  
  3427. 그런데 이성민은 어떤가.
  3428.  
  3429. 백소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1년 전에 보았던 사제의 강함은 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의 이성민도 초절정에 근접해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이성민은 백소고도 놀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3430.  
  3431. “…사… 사제?”
  3432.  
  3433.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지? 백소고는 그를 묻고 싶었으나, 지금 상황이 그런 질문을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했다. 독고귀검은 백소고와 이성민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3434.  
  3435. “묵섬광에게 사제가 있었나? 그건 처음 듣는군.”
  3436.  
  3437. 독고귀검의 검에 시뻘건 검기가 솟구친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창을 잡고서 호흡을 골랐다. 위지호연의 지인이라고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겠지. 그렇다면 백소고를 데리고서 싸움을 피해 도주할까. 저들이 그럴 틈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3438.  
  3439. 그렇다면 할 수 있을까.
  3440.  
  3441. 상대는 독고귀검.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상대다. 뛰어난 검수가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다. 이성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에 있는 독고귀검은, 지금의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3442.  
  3443. 할 수 있을까?
  3444.  
  3445. 다시 떠오른 의문에, 이성민은 걸음을 앞으로 뻗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446.  
  3447. 해야만 한다고.
  3448.  
  3449. ======================================
  3450. < 재회-2 >
  3451.  
  3452.  
  3453.  
  3454. 기묘한 놈이다.
  3455.  
  3456. 독고귀검은 ‘놈’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놈의 눈은 깊었다. 그런 주제에 처음 맞부딪혔던 공격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놈이 보인 일격의 무게는 마랑철권 이상이었다.
  3457.  
  3458. ‘묵섬광에게 저런 사제가 있었을 줄이야.’
  3459.  
  3460. 아직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느끼기에는 묵섬광과 동등하거나 반 수 정도 앞설지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갑작스레 난입하기는 했지만, 놈의 실력은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독고귀검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독고귀검의 애검이 끼이이 끼이이하며 소리를 낸다. 그것은 죽어가는 아이의 신음 섞인 울음처럼 들렸다.
  3461.  
  3462. 이성민은 독고귀검을 보았다. 무공의 고하만 두고 견준다면 이성민의 무공은 아직 독고귀검에게 견줄 수 없다. 그래도 물러설 수가 없기에. 그는 창을 쥐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고 호흡을 고른다. 단전의 내공은 부족함이 없다. 마음 속에도 미혹은 없다. 결의만이 있을 뿐.
  3463.  
  3464. ‘묘해.’
  3465.  
  3466. 독고귀검이 자세를 갖춘다.
  3467.  
  3468. ‘쉬워야 하는데… 왜 쉬울 것 같지가 않지?’
  3469.  
  3470. 저 끝 모를 눈동자가 그럼 예감을 준다.
  3471.  
  3472. 기다리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이성민은 무영탈혼을 숨기지 않았다. 일보무흔이 이성민의 육체를 있던 자리에서 지워버리고 앞으로 달리게 만들었다. 독고귀검은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검을 옆으로 뉘여 베었다. 길게 찌른 창을 검이 받아낸다.
  3473.  
  3474. 부딪히는 소리는 없다. 서로가 허초다. 찌른 창은 직선에서 위로 솟구친다. 독고귀검 역시 옆으로 베었던 검을 상체 각도를 틀면서 아래로 내려버렸다.
  3475.  
  3476. 쩌어엉!
  3477.  
  3478. 이번에는 확실히 부딪힌다. 뒤를 보지 않고 몸 전체를 휘두르며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었다. 양 손이 저릿거린다. 이성민은 무릎에 힘을 반쯤 풀었다. 힘에 밀려 뒤로 물러서는 것 같은 모양새, 실상은 일곱 걸음이나 물러선다.
  3479.  
  3480. 독고귀검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 광견 같았다. 기억해라. 취걸이 했던 말을. 취걸이 입은 상처를. 잘린 취걸의 팔이 어찌 되었는지를.
  3481.  
  3482.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 그 안에 있는 수십 개의 검기. 베이는 것은 한 번이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잘려나갈 것이다.
  3483.  
  3484. 창을 쏜다. 거리를 유지하여 견제하듯이. 독고귀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연이어 쏘아지는 창 중에서 허와 실을 구분했다.
  3485.  
  3486. ‘모두가 살초로군. 젊어 혈기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후후! 묘한 놈이야.’
  3487.  
  3488. 독고귀검은 씰룩거리는 입술을 붙잡았다. 아직 웃어서는 안 된다. 파직거리며 쏘아진 검기가 창을 걷어 낸다.
  3489.  
  3490. ‘공격일변인 것 같으면서도 신중해. 물러설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 과연… 지금은 네가 유리한 거리지.’
  3491.  
  3492.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검수의 접근을 허용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3493.  
  3494. 반걸음.
  3495.  
  3496. 독고귀검이 나아간 걸음이다. 독고귀검의 몸을 덮고 있던 호신강기가 크게 부풀었다. 육감이 경고를 발한 것은 짧았고, 이성민의 몸은 곧바로 그를 대응했다. 본격적으로 구천무극창이 펼쳐졌다. 낭창거리는 창영이 붉은 파도처럼, 그리고 날카로운 창두가 그 사이를 꿰뚫는다.
  3497.  
  3498. 경고로 느낀 공격은 예리했다. 군더더기 없는 살검이 창두와 격돌한다.
  3499.  
  3500. ‘아니야.’
  3501.  
  3502. 격돌이 아니다. 타고 올라온다. 독고귀검은 늑대가 아니라 뱀이었다. 그의 검이, 검을 쥔 손이 창간을 타고 오르며 목을 노린다. 이성민의 걸음이 변화했다. 뒤로 물러서는 대신에 앞으로.
  3503.  
  3504. 일보무흔. 파악! 독고귀검의 검이 잔상을 베었다. 잔상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져 흩어졌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공격의 예감에 독고귀검은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옆으로 간 것인지. 이형환위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나.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독고귀검은 검을 뿌렸다. 수십 개의 검기가 덮쳐 올 때, 이성민은 팔을 뒤로 빼냈다.
  3505.  
  3506. 숫자에는 숫자로. 수십 개의 검기에 맞서 수십 개의 창을 쏜다.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속에서 독고귀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의 웃음을 베어내듯이 독고귀검은 일검을 뿌린다. 이성민은 창을 빙글 돌렸다. 까아앙! 란의 수법으로 검을 걷어 낸다.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앞으로 밀어냈다.
  3507.  
  3508. 한걸음, 두걸음. 그렇게 이보겁살이 시작된다. 살기와 강기가 뒤엉켜 독고귀검을 향해 폭사했다. 독고귀검은 오른 손에 있던 검을 왼 손으로 던졌다. 허공에서 낚아 챈 검이 칼부림을 만든다. 가닥가닥 끊어진 강기가 공중에서 흩어진다.
  3509.  
  3510. ‘없어?’
  3511.  
  3512. 그 너머에서 독고귀검은 창을 놓쳤다. 아래에서 위로 창이 솟구친다. 복사백탐이다. 검귀를 놀라게 한 초식이었지만 독고귀검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서는 대신에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의 참격에 수십 개의 검기를 담는 것이 독고귀검의 검법이다. 그는 이성민이 보았던 모든 검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쾌검의 소유자였다. 복사백탐이 막힌다. 그를 확인한 즉시 이성민은 걸음을 옆으로 밀었다. 일보분영. 수십 개로 분영한 이성민이 독고귀검을 둘러싸고 창을 내지른다.
  3513.  
  3514. “하하하!”
  3515.  
  3516. 독고귀검이 크게 웃었다. 독고귀검은 몸을 크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방을 휩쓴 검강이 일보분영의 잔상을 거꾸러트렸다. ‘눈’으로 보이는 수준과는 다르다고. 독고귀검은 이성민에 대한 첫인상을 대폭 수정했다. 놈의 창은 까다롭고 예리했으며 걸음은 눈을 어지럽힌다.
  3517.  
  3518. ‘몇 살인지 궁금하군.’
  3519.  
  3520. 펼치는 무공만 본다면 긴 시간 무공을 다듬은 노고수와 다를 것이 없는데. 젊은 창수 중에 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놈이 있었단 말인가? 있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3521.  
  3522. ‘조금 더 싸워보고 싶은데. 시간을 끌다가는 안 되겠어.’
  3523.  
  3524. 마랑철권이 문제다. 백소고와 다시 뒤엉켜 싸우던 마랑철권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백소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머지 않아 결판이 날 것이다. 그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랑철권이 죽고서 백소고와 이성민이 합공한다면 독고귀검도 버틸 수 없을 터이니.
  3525.  
  3526. ‘이런 즐거운 싸움은 흔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
  3527.  
  3528. 독고귀검의 생각이 끊어졌다.
  3529.  
  3530. 그렇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독고귀검의 바로 옆에 있던 살덩이의 벽이 찢어지고, 그 안에서 쏘아진 시커먼 급류가 독고귀검의 몸을 덮쳤다. 설마 이런 공격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독고귀검은 방어도 하지 못했다.
  3531.  
  3532. 사실 방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독고귀검의 호신강기는 건재하여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고 할 것은. 독고귀검의 호신강기가 그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3533.  
  3534. 벽을 찢어놓았음에도 공격의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상반신의 반쪽이 날아간 독고귀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다만, 피를 뿌리며 하늘을 날면서. 독고귀검은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놓기 전에 생각했다.
  3535.  
  3536. ‘흑룡포…? 소천마? 어째서…’
  3537.  
  3538. 콰당탕! 독고귀검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성민은 멍하니 그런 독고귀검을 보았다. 움찔거리는 독고귀검은 회생이 불가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3539.  
  3540. 백소고와 마랑철권의 싸움이 멈춘다. 마랑철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독고귀검을 내려 보았다. 움찔거리던 독고귀검의 몸이 완전히 정지했다.
  3541.  
  3542. 독고귀검이 죽었다.
  3543.  
  3544. “…소천마…”
  3545.  
  3546.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중얼거린다. 백소고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이성민은 멍한 얼굴로 독고귀검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방금 전까지 사나운 쾌검을 날려대던 독고귀검은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상체의 절반이 으깨진 처참한 시체뿐이었다. 뻣뻣한 목을 움직인다. 이성민은 고개를 돌렸다.
  3547.  
  3548. 독고귀검을 죽인 것은 흐느적거리는 검은 천이었다. 저것을 이성민은 본 적이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에레브리사에서 구입한 정보에서, 이성민은 저것을 본 적이 있었다.
  3549.  
  3550. 그녀는 자신이 찢은 벽의 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독고귀검의 시체를 한 번 힐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감정한 눈을 통해 이성민은 그녀가 ‘진짜’ 위지호연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551.  
  3552. 도플갱어는 손에 쥐고 있던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 놓았다. 이성민은 그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 보았다. 아까 전에 보았던 혈혈노파의 머리였다. 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을 보아, 저 머리는 혈혈노파 본인의 머리가 아닌 도플갱어의 머리였다. 도플갱어 둘이 같이 있던 길. 그 길에 있었던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혈혈노파의 도플갱어였던 모양이다.
  3553.  
  3554. “소천마… 어째서…!”
  3555.  
  3556. 마랑철권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그는 아직 저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닌 그녀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성민과 백소고는 저것이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았기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3557.  
  3558. 차라리 위지호연 본인이었다면 상황이 더욱 나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상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도플갱어다. 비록 도플갱어의 힘이 본인과 비교한다면 아주 똑같지는 않다고는 해도,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본래부터 압도적으로 강하던 것이 위지호연이니, 그녀의 도플갱어조차도 초월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고귀검의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그 독고귀검이… 아마, 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할 독고귀검이. 눈 먼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휘말려 죽지 않았나.
  3559.  
  3560. “…사제.”
  3561.  
  3562. 백소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성민을 불렀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노려 보면서 아랫입술을 빠득 씹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네 개의 길에 골고루 사람들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위지호연 본인만 빼고 다 죽었다니. 아마 전생에도 이런 식으로 도플갱어가 벽을 뚫고 다니며 보이던 모든 이들을 죽였던 모양이다.
  3563.  
  3564. ‘그러다가 위지호연 본인이 자신의 도플갱어를 죽였겠지.’
  3565.  
  3566. 그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 말했으리라. 자신이 모두 죽였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위지호연 본인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는 하여도, 그녀의 도플갱어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결국 위지호연이 던전의 모두를 몰살한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3567.  
  3568. “소천마!”
  3569.  
  3570. 마랑철권이 거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3571.  
  3572.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어째서 독고귀검을…! 그리고 그 머리는 혈혈노파의 것이 아닌가!”
  3573.  
  3574. 마랑철권은 도플갱어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곳까지 오면서 도플갱어와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향해 진심으로 노성을 터트렸다.
  3575.  
  3576. “당신이 우리를 수하로 거두지 않는다 하였어도, 우리는 그대를 주군으로 여겼소. 언젠가 당신이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을 때… 마인인 당신이 이룬 군림천하를 보고 싶었소. 단지 그 뿐이었소…!”
  3577.  
  3578. 마랑철권이 씹듯이 내뱉었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서 저벅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백소고와 싸웠을 때 이상의 강렬한 투기를 발하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에게 외쳤다.
  3579.  
  3580. “헌데 어째서…!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어도 독고귀검은 당신을 진심으로 따랐단 말이오!”
  3581.  
  3582. 위지호연은, 도플갱어는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무감정한 눈으로 마랑철권을 볼 뿐이었다. 그 눈을 보고서 마랑철권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도플갱어에게 뛰어들었다. 마랑철권은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위지호연의 괴물같은 강함을, 그녀를 추종하며 따라 온 마랑철권이 모를 리가 없었다.
  3583.  
  3584.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죽게 될 것임을 알아도 위지호연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랑철권은 그 자신이 상상했던 결말을 맞이했다. 흑룡포가 폭사했고, 마랑철권의 몸이 고깃덩이가 되었다.
  3585.  
  3586. 후두둑 떨어지는 피와 살점을 보면서 이성민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3587.  
  3588. “사저.”
  3589.  
  3590. “으… 응?”
  3591.  
  3592. “도망치십시오.”
  3593.  
  3594.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렇게 내뱉었다.
  3595.  
  3596. ======================================
  3597. < 재회-3 >
  3598.  
  3599.  
  3600.  
  3601. “잠깐… 사제. 대체 무슨…!”
  3602.  
  3603. “둘이 덤빈다고 하여 저 괴물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3604.  
  3605.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를 ‘괴물’이라고 칭하는 것에 망설임을 갖지 않았다. 저것은 위지호연이 아니다. 위지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의 강함만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괴물이다. 위지호연이 가진 강함은 괴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3606.  
  3607. “하지만… 사제. 왜 나보고 도망치라고 하는 거야? 차라리 함께 싸우는 편이 생존 가능성이 커…!”
  3608.  
  3609.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싶으시다면.”
  3610.  
  3611.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천천히 들었다. 알고 있었다. 백소고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말을 하여도 백소고는 혼자 도망치지 않는다. 이성민이 이곳에 있으니까. 이곳에 있는 것이 사제인 이성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백소고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하는 행동에 대해 변명처럼 덧붙이던, ‘착한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3612.  
  3613. “뒤쪽에 제가 만들어 놓은 구멍이 있습니다.”
  3614.  
  3615.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두 눈을 멀뚱거리며 뜰 뿐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플갱어에게 이성이나 대화 욕구가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만, 이성민은 저 괴물이 다짜고짜 공격하지 않아 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616.  
  3617. “그 너머에 취걸과 장득수님이 있을 겁니다. 그 분들을 데리고 와 주십시오.”
  3618.  
  3619. “하지만 사제는…!”
  3620.  
  3621. “도주한다면 쫓아 올 겁니다. 저희가 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저 괴물이 저희보다 빠르겠지요.”
  3622.  
  3623. 백소고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무영탈혼은 쾌와 환의 극의를 바라보는 보법이며 체술이고 신법이다. 하지만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보여 준 일수는 압도적이었다. 저런 힘을 가진 괴물이 느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망치면 쫓아 올 것이고… 잡힐 것이다.
  3624.  
  3625. “사저가 저보다 빠릅니다.”
  3626.  
  3627.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3628.  
  3629. “그리고, 저는 사저보다 저 괴물을 상대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3630.  
  3631. “그러다가 죽으면…!”
  3632.  
  3633.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저에게 달린 겁니다. 제가 죽게 될 것인지, 말 것인지.”
  3634.  
  3635. 그런 식으로 책임감을 강요한다. 백소고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이성민은 더 이상 백소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무영탈혼의 걸음을 밟으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우두커니 서있던 위지호연의 도플갱어가 반응한다.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리던 흑룡포가 부풀더니 이성민을 휘둘러 치려 들었다. 말이 ‘휘둘러 치다’지, 그 일격에 담긴 위력은 호신강기를 찢고 육체를 으깨 놓을 정도의 거력이었다.
  3636.  
  3637.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호신강기를 전력으로 펼쳤다. 그와 함께 구천무극창을 펼치며 흑룡포의 공격에 대응했다. 꽈아아앙! 부딪힌 것만으로도 양 팔이 박살나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단순한 느낌일 뿐이다.
  3638.  
  3639. ‘버텨… 냈어…!’
  3640.  
  3641. 등 뒤에서 백소고가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이 멀어진다. 그녀도 이해한 것이다. 둘이 함께 싸운다고 해 봐야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을 뿐. 결국에는 사이좋게 몰살이라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조력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생존 가능성이 늘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3642.  
  3643.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내가 찢은 구멍까지 가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에 길어 봐야 5분이다.'
  3644.  
  3645. 단순 걸음과 뜀박질이라면 느릴 지도 몰라도, 경공을 펼친다면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혈혈노파가 취걸과 장득수를 죽이고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록 취걸이 왼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그 역시 뛰어난 고수였고, 장득수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이성민이 굳이 혈혈노파를 합공하지 않은 것은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지, 혈혈노파를 쓰러트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3646.  
  3647. ‘이런 저런 변수가 있더라도 10분이면 올 거야.’
  3648.  
  3649. 알고 있다.
  3650.  
  3651. 이러한 예상에 구멍이 가득하다는 것쯤은. 혈혈노파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득수와 취걸이 허무하게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백소고라면 싸움으로 지친 혈혈노파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3652.  
  3653. 그 뒤에는?
  3654.  
  3655. 백소고 혼자서 이곳에 다시 돌아온다면 변하는 것은 없다.
  3656.  
  3657. 그리고 또. 이성민이 백소고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가능성. 그렇게 된다면 백소고는 어떻게 행동할까. 돌아온 그녀가 이성민의 시체를 본다면?
  3658.  
  3659. 취걸과 장득수가 합류한다고 해서, 저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3660.  
  3661. 모른다. 모르겠다. 구멍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설마 여기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3662.  
  3663.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간 몸을 간신히 지탱한다. 척추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튕기며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달린다. 양 손이 찢어진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죽고 싶지 않다. 당연한 것 아닌가.
  3664.  
  3665.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고, 버텨야 했다.
  3666.  
  3667. 흑룡포가 다시 이쪽을 덮친다. 결국은 천이기에, 흑룡포가 만들어내는 공격 궤적은 변칙적이었다.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큼직했던 흑룡포가 둘둘 말리더니 날카로운 송곳의 모습이 되어 찔러 온다.
  3668.  
  3669. 떠올려라.
  3670.  
  3671. 2100년.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수행한 시간이다. 그곳에서의 수행은 지루했다. 너무 지루해서 몇 번이나 미쳐버렸을 정도다.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 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단은 없었다.
  3672.  
  3673. 그 긴 시간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 몸으로 펼칠 수 있는 것, 펼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나뉘어져 있다. 이성민의 정신이 겪었던 무공과 지금의 이성민이 펼칠 수 있는 무공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674.  
  3675. 떠올려 취해야 할 것은 펼치는 무공이 아니다.
  3676.  
  3677. 경험이다.
  3678.  
  3679. 처음에는 심심풀이였다.
  3680.  
  3681. 상상해 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창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지겨워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면서 무공을 연마했다. 내가 창을 이렇게 찌르면 저쪽이 이렇게 움직이겠지? 아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이 좋을까? 그 회피에서 어떤 공격이 만들어질까. 공격의 형태는? 보법은? 나는 그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피해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받아 쳐야 하나? 받아치기에 너무 강하다면?
  3682.  
  3683. 그럼 죽어야 하나?
  3684.  
  3685. 옆으로 휘두른 창이 흑룡포와 닿는다. 위력 면에서 이성민의 창은 흑룡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알고 있다. 그러니 힘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정면으로 찌르는 것은 측면에서 약하다. 맞서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힘이라면 흘려 내거나 역이용해라.
  3686.  
  3687. 위지호연이 가르쳐 준 것들이다. 알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성민은 창을 앞으로 찔렀다. 흑룡포와 닿을 듯 하다가 스친다. 이성민은 창을 찌르면서 몸을 옆으로 돌렸고, 그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흑룡포가 이성민의 몸을 아슬하게 비껴가면서 이성민의 창끝은 도플갱어의 가슴을 노린다.
  3688.  
  3689. 도플갱어에게 감정은 없었다.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다. 단지 눈으로 본 것에 확실하게 대응할 뿐이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의 창두가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흑룡포를 움직여 그곳을 방어했다.
  3690.  
  3691. 기억은 선명하다. 2100년 동안 했던 것들. 정신세계의 기억은 결코 엷어지지 않는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아서, 떠올리는 것을 의식해야 할 뿐이지. 쓰지 않는 기억을 꺼내기 위해 고심하는 것과 똑같다.
  3692.  
  3693.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한 상상에 푹 빠졌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강할 셈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하며 비무하듯이 수행했다.
  3694.  
  3695. 상상하는 상대는 항상 바뀌었다. 검, 창, 도끼, 활, 마법사, 주먹, 발 등. 빈곤한 상상력을 총 동원했다. 다행히 시간은 넘치도록 있었다.
  3696.  
  3697. 방어한 흑룡포를 뚫을 수는 없다. 단단한 상대에게는 발경, 그 중에서도 침투경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 수준의 침투경으로 도플갱어의 방어를 뚫을 수 있을까? 해 봐야지. 창두 끝에 강기가 맺힌다. 회전을 가미한 일격이 흑룡포와 부딪힌다.
  3698.  
  3699. 꽈앙!
  3700.  
  3701.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흑룡포가 뒤로 밀린다. 여전히 도플갱어의 얼굴에 당황은 없다. 꿈틀거리던 흑룡포가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을 덮치려 들었다. 이성민은 창을 고쳐 잡고서 크게 휘둘렀다. 공기가 터지면서 강기가 폭사한다. 흑룡포가 조금 뒤로 밀려났다.
  3702.  
  3703. [알고 있냐?]
  3704.  
  3705. ‘알고 있습니다.’
  3706.  
  3707. 허주가 말을 걸었고, 이성민은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공격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흑룡포를 휘두르는 것이 공격의 전부였고, 방어나 회피도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다.
  3708.  
  3709. [저 녀석. 무공을 쓰지 않고 있어. 단순무식한 수법만 고수하고 있다.]
  3710.  
  3711. 백소고의 도플갱어는 무영탈혼을 펼쳤는데,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아니었다.
  3712.  
  3713.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도플갱어는 오리지널을 흉내내는 경향이 있어요. 만약 이 던전의 도플갱어도 그런 것이라면, 무공을 쓰지 않는 것은 오리지널의 흉내라는 것이겠지요.]
  3714.  
  3715. 무공을 쓰지 않고 단순무식한 수법을 고수하는 것이 위지호연의 흉내라고? 그 의문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흑룡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성민은 행동에 집중했다.
  3716.  
  3717. 분뢰추살. 창영이 흔들리며 수십 개의 찌르기가 도플갱어를 덮친다. 흑룡포가 꿈틀거리더니 분뢰추살을 받아 친다. 거기서 한 걸음 앞서 일보무흔. 도플갱어의 옆으로 파고들면서 추혼일살을 찌른다. 휘릭하고 돌아 온 흑룡포가 추혼일살을 막는다. 침투경을 가미했음에도 뚫을 수가 없다.
  3718.  
  3719. ‘복사백탐은?’
  3720.  
  3721.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사라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창이 흑룡포의 사이를 파고들려 했다. 이 역시 먹히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흑룡포가 창끝을 막아낸다. 구천무극창의 세 가지 초식으로도 흑룡포를 뚫을 수가 없다.
  3722.  
  3723. ‘사각이 없어.’
  3724.  
  3725. 몸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큰 흑룡포. 길이와 너비마저 자유롭게 변환 된다. 본래 저것은 그리 위력적인 아티펙트는 아니다. 형태를 바꾸고 그를 유지하며 공격과 방어에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내공과 숙련도가 필요하다.
  3726.  
  3727. 구천무극창은 총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태까지 이성민이 사용한 것은 세 개 뿐이었다. 추혼일살, 분뢰추살, 복사백탐. 그 이후의 초식들은 내공 소모도 크고, 이성민이 도달한 무공 수준이 그 이상의초식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3728.  
  3729.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이성민의 창에 어린 강기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도플갱어가 손을 움직인다. 여전히 도플갱어는 무공을 쓰지 않는다.
  3730.  
  3731. 창이 뒤로 움직이고 다시 앞으로.
  3732.  
  3733. 강기가 폭발했다. 쏘아진 그 일격이 아홉으로 나뉜다. 순수하게 강기로 이루어진 그것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구천무극창의 사초, 구룡살생. 아홉 개의 용이 도플갱어를 집어 삼킨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 천장이 갉혀나간다.
  3734.  
  3735. ㅡ콰콰콰콰! 아홉 마리의 용이 전면을 휩쓸었다. 이성민은 창을 쏘아낸 손을 바르르 떨면서 앞을 보았다.
  3736.  
  3737. 도플갱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 밀려난 살덩이가 지저분하게 달라 붙어 있었다. 피하지 않고 막았다. 구룡살생을 정면으로 받고서… 조금 뒤로 밀려난 것이 전부였단 말인가. 이성민은 조금 허탈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3738.  
  3739. 그래. 위지호연의 모습을 흉내낸 놈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
  3740.  
  3741. 이성민은 그런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큭큭 웃었다.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던 도플갱어가 흑룡포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놓은 흑룡포가 힘없이 늘어진다. 저벅거리며 앞으로 나오는 도플갱어의 전신을 시커먼 강기가 휘감았다. 그것은 호신강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흉흉했고 거대했다.
  3742.  
  3743. [과연.]
  3744.  
  3745. 허주가 껄껄 웃었다.
  3746.  
  3747. [여태까지는 단순한 장난이었다는 모양이다.]
  3748.  
  3749. 그것은 이성민도 통감했다. 흑룡포를 벗은 도플갱어는 무기와 방어구를 잃었음에도, 방금 전보다 더욱 흉악하게 느껴졌다.
  3750.  
  3751. 도플갱어가 보법을 밟는다. 순식간이었다. 이성민은 시야와 감각 모두에서 도플갱어를 놓쳤다. 육감조차도 도플갱어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3752.  
  3753. [뒤.]
  3754.  
  3755. 허주가 내뱉어 주지 않았더라면 이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성민은 급히 몸을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3756.  
  3757. ‘사저, 오면 안 됩…’
  3758.  
  3759. 통증과 함께 공중을 날면서,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3760.  
  3761. 이건 진짜 괴물이라고.
  3762.  
  3763. ======================================
  3764. < 재회-4 >
  3765.  
  3766.  
  3767.  
  3768. “…괜찮은 것인가?”
  3769.  
  3770. 장득수는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취걸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3771.  
  3772. “저희 셋이서 위지호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773.  
  3774.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3775.  
  3776.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누군가는 살아서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777.  
  3778. 취걸의 목소리는 낮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섞였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과 살아야 한다는 갈망이 있었다.
  3779.  
  3780. “저는 백소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죽을 수 없습니다. 개방… 개방을 위해서.”
  3781.  
  3782. 알고 있다. 이것이 결국에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에는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칠 뿐이다. 취걸은 죽은 혈혈노파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저 잔학한 마두조차도 죽기 직전에는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다.
  3783.  
  3784. 죽고 싶지 않다. 그것은 모두가 똑같다. 하나 뿐인 삶이기 때문이다.
  3785.  
  3786. “장득수님은 어떠십니까.”
  3787.  
  3788. “…죽고 싶지는… 않지.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살고 싶네.”
  3789.  
  3790. 이제 와서 체면을 따지는 것이 무어가 중요하겠나. 장득수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취걸이 쓴 웃음을 흘렸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둘둘 말린 스크롤을 꺼냈다.
  3791.  
  3792. “운이 좋았습니다.”
  3793.  
  3794. 이것은 혈혈노파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이다.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아, 혈혈노파가 던전의 도플갱어 중 하나를 죽이고서 얻은 듯 했다. 백소고가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를 이용해서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을 분석했다.
  3795.  
  3796. ‘던전 탈출.’
  3797.  
  3798. 사용한다면 즉시 던전에서 탈출이 가능한 마법이 새겨져 있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은 셋이었다. 혈혈노파는 죽기 직전까지 이 스크롤에 어떤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3799.  
  3800. “…백소저가 원망할텐데…”
  3801.  
  3802. “책임을 지겠습니다.”
  3803.  
  3804. 취걸이 대답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 앉아 쓰러져 있는 백소고를 보았다. 이성민을, 사제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를 기습적으로 점혈하여 정신을 잃게 만든 것은 취걸이었다.
  3805.  
  3806. ‘나를 원망하십시오.’
  3807.  
  3808. 취걸은 짧게 만났던 이성민을 떠올리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크롤을 찢었다.
  3809.  
  3810. [함께 사용할 인원을 지정해 주십시오.]
  3811.  
  3812.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 대해, 취걸은 장득수와 백소고의 이름을 말했다.
  3813.  
  3814. *
  3815.  
  3816. 아프다.
  3817.  
  3818. 통증을 자각했을 때, 이성민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떤 식의 공격이었는지 분석할 여유는 없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3819.  
  3820. [정신 차려라! 계속해서 오고 있으니까!]
  3821.  
  3822. 이성민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가 발을 크게 들더니 바닥을 내리 찍었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바닥이 파도처럼 요동치더니 거대한 힘이 이성민을 덮쳤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몸을 날렸다.
  3823.  
  3824. 콰아아앙!
  3825.  
  3826. 방금 전까지 이성민이 있던 자리에 초토화되었다.
  3827.  
  3828. [어떡하지? 어, 어떡해요?]
  3829.  
  3830. 루비아가 불안한 듯 웅웅거리면서 목소리를 낸다. 모른다. 이성민은 급히 창을 휘둘렀다. 꽈앙! 도플갱어가 내지른 장력이 이성민의 창과 부딪혔다. 창을 잡은 왼쪽 손목이 비틀린다. 왼쪽 팔 전체가 찌르르 울리면서 감각이 둔해졌다.
  3831.  
  3832. ‘손이…!’
  3833.  
  3834.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불어넣는다. 오른 손을 중심으로 잡고서 창을 한 바퀴 돌린다. 창준과 창두, 그 두 개가 순차적으로 도플갱어를 덮친다.
  3835.  
  3836. 도플갱어의 얼굴은 무심했다. 오리지널보다는 못한 도플갱어였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흑룡포를 쓰지 않는 것은 도플갱어가, 아니, 위지호연이 상대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즉, 여태까지는 단순히 상대를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었고 앞으로는 상대를 적수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3837.  
  3838.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불행이었다. 이성민의 공격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도플갱어의 손에 가로막혔다. 전신에 검은 호신강기를 두른 도플갱어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파괴의 화신이었다. 비록 그것이 위지호연 본인이 아닐 지라도.
  3839.  
  3840. 벌려 뻗은 손이 커보인다. 가벼운 손목의 흔들림, 그것이 수백의 잔상을 그린다. 변? 환? 허? 실은 어디지?
  3841.  
  3842.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열, 왼쪽으로 일곱…]
  3843.  
  3844. 허주가 뭐라고 말은 했지만 느리다. 듣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응하기에는 위지호연의 공격이 너무 빠르다. 하나에 맞춰 요격하는 것보다는 전체를 막기 위해 창을 돌렸고, 결과적으로는 늦었다. 이성민은 피를 토하면서 뒤로 날아갔다.
  3845.  
  3846. [불편하기 짝이 없군.]
  3847.  
  3848. 허주가 투덜거린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여기서 죽으면 주인님을 만날 수 없는데… 의식 너머에서 루비아가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3849.  
  3850. “좀… 닥치고 있어 봐.”
  3851.  
  3852.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다.
  3853.  
  3854.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내가 공격의 일부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너는 방금의 일격으로 몸이 폭사했을 거다.]
  3855.  
  3856. 과연. 정면으로 당한 것과 공격에 실린 위압감을 생각하면 의외로 버틸만했다고 생각했는데.
  3857.  
  3858. ‘왜 막아 준 겁니까?’
  3859.  
  3860. [네가 이곳에 죽는다면 나도 난감해지니까. 핏덩이가 된 몸을 빼앗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네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다.]
  3861.  
  3862. 허주가 대답했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플갱어는 이성민이 몸을 일으킨 것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3863.  
  3864.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네놈이 도망치라고 보낸 여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
  3865.  
  3866. ‘압니다.’
  3867.  
  3868. 바보도 아니고. 취걸과 장득수를 데리고 오라고 보낸 백소고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음도 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안다.
  3869.  
  3870. 백소고가 배신한 것일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3871.  
  3872. [원망스럽지 않나? 후회스럽지 않나?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 계집을 대신하여 죽을 필요는 없을 터인데. 나는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아. 네놈은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어 본 자가 아닌가?]
  3873.  
  3874. 몸상태를 추스를 틈도 없었다. 도플갱어가 다시 공격해 온다. 홱하고 뻗은 오른 손, 권拳인가 장掌인가. 아니, 수도? 예리하게 벼려진 강기가 목젖을 노려 온다. 이성민은 오른 손 안의 창을 빙글 돌렸다.
  3875.  
  3876. 카가가각!
  3877.  
  3878. 강기와 강기가 서로 맞부딪힌다. 밀린 것은 이성민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지 않고 자세 자체를 바꾼다. 동시에 창을 돌리면서 아래에서 위로 복사백탐을 잇는다.
  3879.  
  3880. 통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이성민의 공격궤도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
  3881.  
  3882. [겪어 보았기에 더욱 잘 알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인지. 설마 이번에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3883.  
  3884. ‘그럴 리가 없잖아.’
  3885.  
  3886. 대답과 즉시 뛴다. 무영탈혼의 이보겁살. 강기를 폭사시키면서 바로 구천무극창의 사초인 구룡살생을 펼친다. 명확한 살의를 담은 강기의 줄기가 전면을 휩쓴다.
  3887.  
  3888. 방어로 쓰던 흑룡포는 내려놓았다. 도플갱어는 방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용하는 것은 오른 손 뿐. 도플갱어가 흉내 내고 있는 위지호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인정하여 흑룡포를 벗었다. 그렇다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쓰지 않는다. 쓰는 것은 오른 손 뿐이다.
  3889.  
  3890. [대답해라. 네놈은 후회하고 있는가? 그 계집을 원망하고 있는가?]
  3891.  
  3892. ‘나는.’
  3893.  
  3894. 대답을 끊어 내뱉는다. 이보겁살과 구룡살생은 도플갱어가 내지른 일장에 파훼되었다. 흩어진 강기의 파편 속으로 도플갱어가 뛰어 들어온다.
  3895.  
  3896. ‘후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애초에… 사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8년 전에 죽었을 테니까.’
  3897.  
  3898. 무턱대고 들어간 므쉬의 산. 스스로를 과신하여 걸었던 과한 금제. 백소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산에서 죽었을 것이다.
  3899.  
  3900. ‘사저에게 구명 받았다. 사저와 지내면서, 사저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에 왔고 이렇게 남은 거야.’
  3901.  
  3902. [그 계집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냐?]
  3903.  
  3904. ‘개소리하는군.’
  3905.  
  3906. [으하하!]
  3907.  
  3908. 허주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껄껄 크게 웃었다. 루비아는 여전히 신경 사납게 중얼거리고 있었고, 도플갱어의 공격은 매서웠다.
  3909.  
  3910. [조금 마음에 들었다. 네놈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조금 도와줘 보도록 할까.]
  3911.  
  3912. 허주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는 지금의 이성민이 어찌 할 수 없을 수준의 괴물이었다. 헤어지고서 9년. 9년 동안 이 정도인가. 이성민은 피식 웃었다.
  3913.  
  3914. ‘진원진기를 격발시켜도 상대가 안 돼. 도망치기에는… 늦었나? 앞으로 뛰어 볼까?’
  3915.  
  3916. [저만한 적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지.]
  3917.  
  3918. ‘이기는 것은 힘들어. 말했을 텐데. 죽고 싶지는 않다고.’
  3919.  
  3920. [죽지 않아도 된다.]
  3921.  
  3922. 허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성민의 몸을 덮은 마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이성민은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3923.  
  3924. [매개만 있다면 힘을 끌어오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지!]
  3925.  
  3926. 허주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마갑에서 뿜어진 불길은 이성민의 몸을 덮고 있었으나, 이성민은 그 불꽃에서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다.
  3927.  
  3928. “너… 뭐하는 거냐?”
  3929.  
  3930. [으하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반말을 하는 구나. 뭐, 상관없지. 나는 네놈이 조금 마음에 들었으니까.]
  3931.  
  3932. 도플갱어가 뛴다. 이성민의 구룡살생과 이보겁살과 격돌하여 파훼시켰던 위력적인 장법이 덮쳐온다. 일장을 때렸을 때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이성민을 덮쳤고, 이성민이 대응하기 전에 불꽃이 앞으로 나섰다.
  3933.  
  3934. [봐라! 이것이 진짜 괴력난신이다!]
  3935.  
  3936. 허주가 웃는 목소리로 외쳤다. 꽈아아앙! 힘과 힘이 충돌했다. 위지호연의 강기가 애초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사라졌다. 불길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고 앞으로 몰아쳤다. 도플갱어는 급히 양 손을 들었다. 가슴 앞으로 모은 손바닥 사이에서 피처럼 붉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공을 던지듯이 앞으로 날렸다. 꽈아아앙! 격이 다른 두 힘이 충돌하면서 공간 자체가 뒤흔들렸다. 이성민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3937.  
  3938. “대체 뭐야…!”
  3939.  
  3940. [이해가 늦군, 미련한 놈! 내 힘의 일부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네놈 혼자서 맞서 봤자 저 반푼이에게 죽어버릴 테니까!]
  3941.  
  3942. “나를 돕고 있는 거냐…?”
  3943.  
  3944. [그렇다! 네놈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효율이 좋지 않군. 힘은 빌려 주마. 그러니 네가 마음대로 써 보아라.]
  3945.  
  3946. 허주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솟구친 불길이 흩어지더니 이성민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성민은 이해했다. 그때, 잠자는 숲에서 보았던 것은 불꽃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위지호연의 공격을 밀어낸 것 역시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주가 다스리는 거대한 힘 자체였다.
  3947.  
  3948. [요력이다. 본래라면 너희 인간은 다룰 수 없는 힘이지. 하지만 네놈이라면 다룰 수 있을 것이야. 네놈의 심장은 인간보다는 요괴의 것에 가까워 보이니까.]
  3949.  
  3950. 허주의 요력이 몸에 깃들고 심장이 그를 집어 삼킨다. 이성민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노곤하던 전신의 피로감이 사라진다. 욱신거리던 통증도 가셨다. 부러진 늑골과 손목이? 멀쩡하게 움직였다.
  3951.  
  3952. 심장에 깃든 힘을 통해 이성민은 요력의 성질을 이해했다. 이것은 내공도 아니고 마력도 아니었다. 요력은 파괴밖에 모르는 단순하고 무식한 힘이었으며,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인외의 힘이었다. 본래는 공존이 불가한 요력과 내공이 이성민의 몸 안에서 공존한다. 그것은 서로 뒤엉키면서도 섞이지는 않았다. 물과 기름과 같은 두 개의 힘이 전신을 흐르면서 이성민은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3953.  
  3954. [견뎌라!]
  3955.  
  3956. 허주가 외친다. 도플갱어가 뛴다. 놀이상대에서 적으로, 그리고 호적수로 격이 올랐다. 그렇기에 도플갱어는 가진 전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뛰어나간 도플갱어의 몸이 다섯으로 나뉘더니 사방에서 덮쳐 온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실체를 갖춘 본인이었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창을 움직였다.
  3957.  
  3958. 분뢰추살.
  3959.  
  3960. 요력과 내공이 섞인 분뢰추살은 이전에 펼친 분뢰추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달아 터지는 폭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분신이 박살난다. 그 중 본체는 이형환위를 통해 빠져나갔다.
  3961.  
  3962. [뒤!]
  3963.  
  3964. 허주가 위치를 알린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요력은 이성민의 전신 감각을 평소보다 더욱 예리하게 바꿔 놓았다. 이성민은 신음을 삼키고서 몸을 돌렸다. 창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방금 전에 펼친 분뢰추살은 끔찍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초식을 펼친 이성민의 양 팔이 제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뼈가 박살나 버렸기 때문이다.
  3965.  
  3966.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박살난 팔이 순식간에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문제다. 등 뒤로 이동한 도플갱어가 이성민의 가슴을 향해 양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3967.  
  3968. 일보무흔. 이성민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걸음을 마저 뻗기도 전에 이형환위가 펼쳐졌다. 이성민은 그 경악스런 속도에 놀라면서도 몸을 통제했다. 일보무흔에서 두 걸음. 이보겁살. 요력과 내공이 뒤섞인 강기가 폭사한다. 도플갱어는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급히 양 손을 들어 방어를 완성했다. 하지만 완전히 버티지 못했다.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3969.  
  3970. 그 순간에 이성민의 양 팔은 재생되었다. 이성민은 숨을 삼키고서 구천무극창을 펼쳤다.
  3971.  
  3972. 구천무극창 오초, 절명섬絶命閃.
  3973.  
  3974. 그것은 소리조차 갖지 않는 극한의 쾌를 담은 찌르기였다.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검귀를 죽인 이상적인 찌르기에 근접한 공격이기도 했다. 정신세계에서는 이미 다시 도달하였었지만, 현실의 육체로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공격이기도 했다.
  3975.  
  3976.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요력의 보조를 받는 몸뚱이가, 무리한 움직임도 가능하게 만든 몸뚱이가 최속의 찌르기인 절명섬을 완벽하게 펼쳐냈다.
  3977.  
  3978. 노린 것은 가슴 정 중앙.
  3979.  
  3980. 이성민의 창이 도플갱어의 가슴 정 중앙을 꿰뚫었다.
  3981.  
  3982. ======================================
  3983. < 재회-5 >
  3984.  
  3985.  
  3986.  
  3987. 호신강기의 저항감을 뚫는다. 강기와 요력이 뒤섞인 절명섬. 정신세계에서는 쉼 없이 펼칠 수 있던 절명섬은, 이성민의 진짜 육체로는 펼치는 것이 부담스러운 무공 중 하나였다. 임독양맥을 뚫으면서 이성민은 초절정 고수가 되었고 환골탈태를 해냈다. 육체는 그 이전의 육체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해졌으나, 구천무극창의 절초들은 그러한 육체로도 부담이 존재하는 신공들이었다.
  3988.  
  3989.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허주가 보태 준 요력의 보조를 받은 이성민의 육체는 정신 세계에서 도달한 무공 수준을 힘겹게나마 펼칠 정도는 되었다.
  3990.  
  3991.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난다. 놈은 피도 토하지 않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감각이 완전히 거세 된 괴물은, 진짜 사람이었다면 죽어버릴 치명상 속에서도 반격을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제 몸의안위를 완전히 도외시한 질 나쁜 동귀어진의 공격이었다.
  3992.  
  3993. ‘팔이…!’
  3994.  
  3995. 절명섬을 펼친 근육이 파열된 것이 느껴진다. 힘이 빠진 손이 창을 놓으려 들었으나, 이성민은 입술을 짓이겨 씹으면서 창을 잡았다. 뻗은 창을 뒤로 회수하면서 무영탈혼을 펼쳐 뒤로 물러선다. 가슴에 바람 구멍을 가진 도플갱어가 양 팔을 펼친다.
  3996.  
  3997. 콰콰콰! 그녀를 중심으로 시커먼 강기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인간의 무공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처럼 보였다. 몰아치는 힘의 격류가 사방을 휩쓴다. 이성민은 요력과 강기를 동시에 끌어올리면서 그에 저항했다.
  3998.  
  3999. [놀랍군. 저 계집… 진짜도 아니면서 저만한 힘을 휘두르는가. 저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4000.  
  4001.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요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헉하고 숨이 막히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풀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아작난 양 팔이 재생되었다.
  4002.  
  4003. ‘이길 수 있나…?’
  4004.  
  4005. [네가 하기에 따라 달려있지. 나는 너에게 요력을 더해줄 뿐이다. 아니면… 나에게 육체를 넘길 테냐?]
  4006.  
  4007. 허주가 물었다.
  4008.  
  4009. [나에게 육체를 넘긴다면 저깟 반푼이 따위야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저 모습을 한 본인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어. 그럴 테냐?]
  4010.  
  4011. 계속해서 묻는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고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성민은 허주의 질문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4012.  
  4013.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4014.  
  4015. ‘내가 해야 돼.’
  4016.  
  4017. [으하하! 힘을 빌려 쓰는 주제에 네가 하겠다고? 마지막 자존심, 뭐 그런 것이냐?]
  4018.  
  4019. ‘맞아. 내 자존심이야. 내 몸이 너무 약해. 할 수 있는데,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 몸으로는 아직 할 수가 없어.’
  4020.  
  4021.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도플갱어의 강함과 위지호연의 강함은 다르겠지.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2100년의 수행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보인다. 위지호연이 가지고 있는, 위지호연이 도달한 초월적인 강함이. 저 강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4022.  
  4023.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안다. 정신세계에서 수련을 마쳤을 당시의 몸뚱이와 무공을 그대로 펼칠 수 있더라면 이런 식으로 고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가슴 벅찬 성취감과 달성감을 느끼기도 했다.
  4024.  
  4025. 2100년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4026.  
  4027. [묘한… 놈이군.]
  4028.  
  4029.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었다. 육체가 없는 허주는 거대한 요력의 덩어리에 혼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한 요력과 혼이 마갑을 거쳐 이성민의 몸 안에 깃든 것이 지금이다. 이성민과 반쯤 동화되어 있는 허주는 완전히 빙의하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의 육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으나, 절반 정도의 빙의로도 이성민이 느끼는 감정을 전해 느낄 수는 있었다.
  4030.  
  4031. [좋아. 더 빌려주지.]
  4032.  
  4033. 허주는 이성민이 느끼고 있는 달성감과 성취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해야 돼’라는 이성민의 대답이 근거 없는 아집이 아님은 알았다.
  4034.  
  4035. [네가 버틸 수 있을까?]
  4036.  
  4037. 그 말은 허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어 애매했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대한 힘이 이성민의 몸 안을 가득 채웠다. 단전이 박살나는 것 같았다. 단전을 통해 내공을 받아 흘리는 기혈이 찢어지면서 강제로 확장된다. 왼쪽 가슴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내공과 요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4038.  
  4039.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통증에 몸을 무디게 할 수는 없었다.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몰아친 강기의 폭풍이 이성민을 휩쓸려 들었다. 이성민은 아찔한 통증 속에서 창을 찾았다. 창은 이미 이성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4040.  
  4041. 구룡살생.
  4042.  
  4043. 아홉의 용과 강기의 폭풍이 부딪혔다. 내공은 이미 바닥이다. 남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씹어 내공을 보충할 필요는 없었다. 내공의 빈자리를 요력이 채운다. 불길한 색으로 물든 아홉의 용이 꿈틀거린다. 이윽고 용들은 입을 쩍 벌리면서 강기의 폭풍을 집어 삼켰다.
  4044.  
  4045. 격돌하던 힘과 힘이 사라진 공백. 도플갱어는 살짝 비틀거리더니, 전보다 더한 힘을 내뿜었다. 괴물이 발하는 무위는 이미 인간의 것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었다. 허주가 탄성을 질렀고 이성민은 앞으로 걸었다. 손에 있는 창이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힐긋 내려보니 창간은 찌그러져 있었고 창두의 창날은 금이 가있었다.
  4046.  
  4047. ‘보수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4048.  
  4049. 셀게루스에게 한 소리 듣겠군.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단전과 기혈을 활짝 열었다. 통증은 건재했으나 이성민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했다.
  4050.  
  4051. ㅡ후우웅! 자색이 뒤섞인 요력이 창 전체를 휘감았다. 도플갱어의 전신을 덮고 있던 검은 강기가 그녀의 양 손에 어린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이성민은 직감했다. 도플갱어의 공격이 아니라, 이성민 본인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검은 심장이 요력을 받아 펌프질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이번 일격으로 끝내지 못한다면.
  4052.  
  4053. 아니. 끝낼 수 있다. 이성민은 그를 확신했다. 확신과 함께 무공을 준비한다. 추혼일살이나 분뢰추살, 복사백탐으로는 무리다. 도플갱어가 끌어올리는 힘은 구룡살생으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고 절명섬으로 저 부푼 강기를 뚫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사용하지 못한 무공을 택해야 한다.
  4054.  
  4055. 구천무극창의 육초.
  4056.  
  4057. 그 이상의 무공은 무리다. 정신세계에서도 가혹한 수행과 기나 긴 시간으로도 간신히 도달했던 무공들이다. 지금의 육체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언제 가능할까.
  4058.  
  4059. ‘할 수 있어.’
  4060.  
  4061. 구천무극창 육초. 공도空道.
  4062.  
  4063. 창을 덮고 있던 자색의 강기가 부푼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잡은 창을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내질렀다. 그 순간에 도플갱어의 강기가 폭발하여 이성민을 덮쳤다. 그것과 닿는 순간 파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공도는 도플갱어의 공격을 모조리 휘감더니 회전을 통해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성민은 손에 전해지는 압박감을 견뎌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4064.  
  4065. ㅡ꽈아아앙!
  4066.  
  4067. 살덩이로 이루어진 벽들이 모조리 폭발했다. 흩뿌린 파편에 얻어 맞은것만으로도 그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이성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부유감 속에서 길을 찾았다. 창을 내지른 곳이 이성민이 가야할 길이었다. 홱하고 날린 몸이 공백의 길을 꿰뚫는다. 그 끝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도플갱어가 서있었다.
  4068.  
  4069. 그 얼굴.
  4070.  
  4071. 퍼어어엉!
  4072.  
  4073. 소리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방으로 튀었던 강기의 파편들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자색과 검은색의 안개가 퍼져 나간다. 무너지는 안개를 보면서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그녀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를 내려 보았다.
  4074.  
  4075. 몸뚱이의 절반이 사라진 도플갱어는 움직이고 싶어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두 눈을 깜박거리는 도플갱어의 시선을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말은 뱉지 않고 다시 다물었다. 해보았자 의미가 없다. 저것은 위지호연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지호연이 아니니까.
  4076.  
  4077.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꾹 다물면서 손을 보았다. 창은 더 이상 무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쏟아 부은 힘을 창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창을 뒤에 걸쳤다.
  4078.  
  4079. 그러는 사이에 도플갱어의 눈이 감겼다.
  4080.  
  4081. 완전히 죽은 것이다.
  4082.  
  4083. [이겼군.]
  4084.  
  4085. 허주가 중얼거렸다.
  4086.  
  4087. [어떤 기분이냐? 본래라면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대를 네 힘이 아닌 내 힘을 빌어 쓰러트린 것이다. 자랑스러우냐?]
  4088.  
  4089. “아무렇지도 않아.”
  4090.  
  4091.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숙였다. 그는 손을 뻗어 도플갱어의 사체를 뒤적거렸다. 공도에 휘말려 사라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남은 사체 속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그것은 주먹만한 크기를 가진 광석이었다. 마석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그것을 일단 아공간 포켓 안에 넣었다.
  4092.  
  4093. [준비해라.]
  4094.  
  4095. 허주가 말했다.
  4096.  
  4097. “무슨 준비?”
  4098.  
  4099. [네 몸에 쏟아 넣은 요력을 거둘 것이다. 아마 반동이 심할 것이야.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4100.  
  4101. 요력을 몸으로 받던 중에도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또 있다고? 이성민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정도의 힘을 사용했는데 대가가 없는 것도 이상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면서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4102.  
  4103. ‘준비 됐어.’
  4104.  
  4105. [하하하!]
  4106.  
  4107. 허주의 웃음소리와 함께, 몸 안에 들어와 있던 허주의 요력이 쭈욱 빨려나갔다. 몸에서 뿜어진 요력은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 속에 깃들었다.
  4108.  
  4109. 정신을 놓을 뻔했다.
  4110.  
  4111. 다양한 고통에 익숙해진 이성민이었지만, 지금의 고통은 여태까지 느껴왔던 고통들은 장난질로 느껴질 만큼 강력했다. 단전과 기혈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근육이 터지는 것 같았다. 뼈는 얼음이라도 쏟아 넣은 것처럼 시리다가 불로 달구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혈류는 역류하는 것 같았다. 이성민은 입을 쩍 벌리고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4112.  
  4113. [버틸 만 하냐?]
  4114.  
  4115. 그런 허주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이성민은 한참 동안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죽는다. 허주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정신을 잃는 순간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뇌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고통은 끔찍했다.
  4116.  
  4117.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과도 같던 고통이 끝난다.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몇 번이나 씹은 입술은 피투성이였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4118.  
  4119. “괘, 괜찮아요?”
  4120.  
  4121. 주변에는 루비아가 있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가 이성민이 정신을 차리자 황급히 다가왔다.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킨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다가 루비아를 보았다.
  4122.  
  4123. “뭐라도 조금 해주지 그랬습니까?”
  4124.  
  4125. “땀 닦아주고 피 닦아주고 열심히 했거든요?”
  4126.  
  4127. “치유 마법을 펼칠 줄 모르는 겁니까?”
  4128.  
  4129. “할 줄 몰라요.”
  4130.  
  4131.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히 내밀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루비아의 로브는 피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닦을 것이 없어서 입고 있던 로브로 몸을 닦아 준 모양이었다.
  4132.  
  4133. “시간은… 얼마나 흘렀습니까?”
  4134.  
  4135. “1시간 정도…”
  4136.  
  4137. 1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리며 창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4138.  
  4139. “뭐, 뭐하는 거예요?”
  4140.  
  4141. “가야해.”
  4142.  
  4143.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욱신거림이 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뼈가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근육이 아팠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4144.  
  4145. 이성민은 시야 한쪽에 있는 미니맵을 보았다. 도플갱어와 싸우는 도중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던전 안에 남아있는 것은 이성민을 제외하면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확인해야만 했다.
  4146.  
  4147. 이성민은 발을 질질 끌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변이 워낙 엉망이기는 했지만 미니맵 덕분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확인 된 바로는 도플갱어들도 모조리 죽어 있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이성민의 행동에 거리낌은 없었다.
  4148.  
  4149. 혈혈노파의 시체가 보였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는 도끼 자국과 장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4150.  
  4151. “이건…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4152.  
  4153. 루비아가 이성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4154.  
  4155. “…마법? 어떤 마법?”
  4156.  
  4157. “확실하지는 않은데… 잠깐만요.”
  4158.  
  4159. 루비아를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진들이 펼쳐졌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루비아가 머뭇거리며 이성민을 힐긋거렸다.
  4160.  
  4161. “괜찮습니다.”
  4162.  
  4163. 이성민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4164.  
  4165. “…이동 마법이 펼쳐졌어요. 아마 던전 밖으로 이동하는 마법이었겠죠.”
  4166.  
  4167. 백소고와 장득수, 취걸이 그 정도의 고등 마법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스크롤일 것이다.
  4168.  
  4169.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4170.  
  4171. “아… 네. 탈출 마법으로 이동한 사람은 셋이에요. 정확히 누가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4172.  
  4173. “알겠습니다.”
  4174.  
  4175. 그것으로 충분하다.
  4176.  
  4177. 백소고는 죽지 않았다. 취걸, 장득수와 함께 던전을 벗어났다. 그러면 된다. 만족할 수 있다. 백소고를 살리기 위해 이 던전에 들어왔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고 싶어서 지금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78.  
  4179. 그것을 이루었다.
  4180.  
  4181. “…그러면…”
  4182.  
  4183.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이성민을 보고서 루비아가 당황하며 달라붙었다.
  4184.  
  4185. “어, 어디로 가는 건가요?”
  4186.  
  4187. “앞으로.”
  4188.  
  4189. 이성민은 몸의 통증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4190.  
  4191. “앞으로 가야합니다.”
  4192.  
  4193. 미니맵을 본다.
  4194.  
  4195. 던전의 끝에 노란 점이 있었다.
  4196.  
  4197. ======================================
  4198. < 재회-6 >
  4199.  
  4200.  
  4201.  
  4202. “…대단… 하군…”
  4203.  
  4204. 죽어가는 목소리. 위지호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 보았다. 인간이 아닌 괴물이 위지호연을 올려 보고 있었다. 양 팔은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었고 하반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4205.  
  4206. 강했다. 위지호연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것을 인정했다. 여태까지 위지호연이 에리아에 살아 온 9년 간, 저기 죽어가는 괴물만큼 위지호연을 힘겹게 한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이름모를 괴물은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미 몇 년 전에 아버지 천마의 무위를 뛰어넘은 위지호연으로서도 진심이자 전력으로 상대에 임해야 할 정도였다.
  4207.  
  4208. “필멸자… 그들 중에서도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늘…”
  4209.  
  4210. “넌 강했다.”
  4211.  
  4212. 위지호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조금의 피로를 느끼면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강적이기는 하였으나, 긴 싸움을 통해 위지호연이 흘린 것은 피가 아닌 땀이었고 고통이 아닌 조금의 피로감 뿐이었다.
  4213.  
  4214. 그를 알기에 괴물은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4215.  
  4216. “보이는 구나.”
  4217.  
  4218. 괴물이 눈을 반개했다. 시뻘건 안광을 줄줄 흘리던 눈은 이제는 끝 모를 깊이를 가지고 위지호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4219.  
  4220. “네가 가진 운명.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될, 패왕의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를 벗어나 군림하게 될 운명이 보여.”
  4221.  
  4222. “무슨 말이냐.”
  4223.  
  4224. “천재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네가 타고난 재능은 운명조차 뒤틀었구나… 흐흐! 이러니 내가 인간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이래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나도 결국은 이곳에 묶여 있는 망령일 뿐이니… 자아. 거두어라. 너에게 거두어진다면 오히려 영광일 터이니.”
  4225.  
  4226. 그 말을 들으면서 위지호연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힘이 몸을 일으켰다. 괴물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 소리 없이 죽음이 피어났다. 던전의 최종에 존재했던 괴물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고, 그것은 허공을 맴돌다가 위지호연에게 스며들었다. 위지호연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몸 안에 깃드는 힘을 의식했다. 그것은 의지 없는 힘의 덩어리였고, 자연스레 위지호연의 천마신공의 흐름에 맡겨져 그녀가 가진 힘의 일부가 되었다.
  4227. 위지호연은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이 가로막던 곳의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위지호연은 손을 뻗었다. 흑룡포가 대신하여 앞으로 날아가 문을 열었다.
  4228.  
  4229. 문의 안쪽에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많았다. 위지호연은 허리춤에 매인 아공간 포켓을 열었다. 그 막대한 금은보화들이 모조리 위지호연의 아공간 포켓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보물창고의 끝에 도착했다. 공중 위에 검은 색의 천이 떠있었다. 위지호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움찔거리던 천이 위지호연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그것은 위지호연의 몸 전체를 덮더니 착 달라붙는 의복이 되었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 입은 것 같지가 않았다. 위지호연은 이 옷이야말로 이 던전에서 주어지는 가장 뛰어난 보상임을 깨달았다.
  4230.  
  4231. “제법 재미있었어.”
  4232.  
  4233.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지난 손이 위지호연의 가슴에 닿았다.
  4234.  
  4235. “던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렵다기 보다는 재미있더군. 마지막 녀석은 굉장히 강했어. 아마 예전의 나였더라면 이길 수 없었을 거야.”
  4236.  
  4237. 정말로 그랬을까?
  4238.  
  4239. “나는 바보가 아니야. 이 던전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했어. 나는… 너와 똑같이 생긴, 구천무극창을 사용하는 네가 아닌 너와 만났었다. 너는 재미있는 상대였어. 내가 가르친 무공이었지만 직접 상대를 해보니 의외인 점이 많더군. 워낙에 잘 만들어진 무공이었으니까 말이야.”
  4240.  
  4241.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4242.  
  4243. 그는 부러진 창에 몸을 기대고서 위지호연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위지호연은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것이 이성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4244.  
  4245. “너도 이 던전을 목적으로 온 것이냐. 하지만 조금 늦었군. 이 던전의 마지막 괴물을 쓰러트린 것은 나거든.”
  4246.  
  4247. 위지호연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양보해줄 생각은 없다. 이 던전을 공략한 것은 위지호연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위지호연이 취하게 되었다.
  4248.  
  4249. “하지만 네가 달라고 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어. 우리는 친구니까. 안 그래?”
  4250.  
  4251. “…아니. 주지 않아도 괜찮아.”
  4252.  
  4253. “이제야 말을 하는 군.”
  4254.  
  4255. 위지호연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위지호연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피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4256.  
  4257.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하고 있었어.”
  4258.  
  4259. “하하! 멍청한 녀석. 9년이나 흘렀다. 9년이 흘러서 만나게 된 거야. 9년 동안 나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 한 마디도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냐?”
  4260.  
  4261. “생각은… 했었지.”
  4262.  
  4263. 생각해 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 뿐이다. 위지호연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응시했다.
  4264.  
  4265. “너는 누구를 만났지?”
  4266.  
  4267. “…너.”
  4268.  
  4269. “나인가. 그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 뒤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었거든. 그래도 살아남았군. 나를 쓰러트렸다는 것이겠지?”
  4270.  
  4271. “힘들었어.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4272.  
  4273. “하지만 죽지는 않았지. 9년… 서로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떠냐?”
  4274.  
  4275. “의미는 많았지. 고생도 많이 했고.”
  4276.  
  4277. “너는 강해졌어.”
  4278.  
  4279. “만족은 안 돼.”
  4280.  
  4281.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는 부러진 창을 내려 보았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싸웠을 때를 떠올린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허주의 도움. 요력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정신세계에서 도달한 무위를 재현할 수 있었다.
  4282.  
  4283. “어째서?”
  4284.  
  4285. “너는 나보다 더 강하니까.”
  4286.  
  4287. “하하! 알고 보면 너도 욕심은 참 많다니까. 나보다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냐?”
  4288.  
  4289. “지금은.”
  4290.  
  4291. “지금은… 이라는 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인가?”
  4292.  
  4293. “세상은 넓으니까.”
  4294.  
  4295. “좋은 일이야. 확실히 9년 전과는 다르군. 그때의 너는 제대로 된 목표라는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기껏 죽음에서 돌아왔음에도 뭔가 대단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
  4296.  
  4297. “그게 싫었어.”
  4298.  
  4299. “그래서 변했다는 거냐?”
  4300.  
  4301.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해.”
  4302.  
  4303. “아직인 모양이군.”
  4304.  
  4305. 위지호연이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몸을 돌린 그녀는 성큼거리며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이성민은 가까워지는 위지호연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이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되었다. 지금의 이성민은 아직 위지호연과 대등한 위치에 서지도 않았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성취를 자랑스레 말할 만큼의 수준도 되지 않았다.
  4306.  
  4307. 이성민은 그것을 ‘싫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백소고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므쉬의 산에 있었을 적과 비교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얼마나 뛰어나졌는지. 결과적으로 백소고에게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만족했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으니까.
  4308.  
  4309. 그렇다면 위지호연은?
  4310.  
  4311. ‘아직은 안 돼.’
  4312.  
  4313.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지금 위지호연에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었을 때. 위지호연이 보이는 반응이 어떨 것인지 두렵다. 단순한 칭찬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정 받고 싶었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을 두고 친구라고 했다. 이성민도 위지호연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314.  
  4315.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안 된다. 친구니까, 그러니까.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위지호연에게 부끄러울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 위지호연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4316.  
  4317. “약속했던 날까지는 아직 1년이 남았나.”
  4318.  
  4319. “응.”
  4320.  
  4321. “약속 장소는 기억하고 있어. 날짜도. 계속… 생각했거든. 너랑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너는 어떤 모습이 되었고,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4322.  
  4323. “…너는 많이 변했어.”
  4324.  
  4325. “너도 마찬가지야. 아, 그래. 기회가 된다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 내 가슴은 어때?”
  4326.  
  4327. “뭐?”
  4328.  
  4329. 9년 전과 똑같았다. 위지호연은 대뜸 뜬금없는 이야기를 물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성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 온 위지호연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4330.  
  4331. “네가 아는 전생에 비해서 그리 커지지 않은 것 같은데. 네 취향은 어떠냐? 조금 더 큰 편이 좋은가?”
  4332.  
  4333. “…어… 내 대답이 중요한 건가?”
  4334.  
  4335. “기왕이면 네가 좋은 쪽이 나도 좋으니까 말이야.”
  4336.  
  4337. “딱히 상관은 없다고 보는데…”
  4338.  
  4339.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풍유환을 먹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 아, 너는 뭔지 모르려나? 풍유환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가슴이 확실하게 커진다고 하더군. 부작용도 없고. 그런데 막상 가슴을 키우면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서…”
  4340.  
  4341.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4342.  
  4343. 진심으로 위지호연의 가슴이 크건 말건 이성민은 신경쓰지 않았다. 가슴 크기라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위지호연이 히죽 웃었다.
  4344.  
  4345. “나와 함께 갈 테냐?”
  4346.  
  4347. 위지호연이 물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4348.  
  4349. “나를 추종한답시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이 많아. 귀찮은 놈들이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기대를 품고 나를 대하고 있어.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4350.  
  4351. 독고귀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를 죽인 것이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덤벼들던, 마랑철권의 고함과 함께.
  4352.  
  4353. “나는 타인에게 기대받는 것이 싫어. 마교에 있었을 적에도 그랬으니까. 그들이 멋대로 기대하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어떻게’ 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 역겹다.”
  4354.  
  4355.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거야.”
  4356.  
  4357. “알아. 내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멋대로 기대를 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네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괜찮아. 나 역시 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까.”
  4358.  
  4359.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눈은 9년 전에 제나비스에서 보았던 눈과 똑같았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를 품은 눈이다.
  4360.  
  4361. “너와 함께 다닌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 나는 많은 것을 해왔지만, 너랑 함께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런 예감이 든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4362.  
  4363. “…미안해.”
  4364.  
  4365. 이성민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4366.  
  4367. “아직, 나는 그럴 수가 없어.”
  4368.  
  4369.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싫은 것이냐?”
  4370.  
  4371. “아니. 그건 아니야. 단지… 그래. 나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아.”
  4372.  
  4373. “욕심이 많아.”
  4374.  
  4375.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더니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에 얹었다.
  4376.  
  4377. “나는 지금의 너로도 충분히 좋아.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졌어.”
  4378.  
  4379. “나 스스로 만족을 못하는 거야. 나는 더 할 수 있어. 더 먼 곳을 보고 왔으니까, 더 나아갈 수 있어.”
  4380.  
  4381. “하하!”
  4382.  
  4383. 이성민의 말에 위지호연이 크게 웃었다. 그녀는 이성민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의 말에 강한 집념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위지호연을 기쁘게 만들었다. 적어도 9년 전의 이성민은 저런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변하기 마련이다. 위지호연은 변해버린 이성민을 가까이서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4384.  
  4385. “그렇다면 1년 후에 다시 보도록 하자.”
  4386.  
  4387. 약속했던 그곳에서. 위지호연이 덧붙였다.
  4388.  
  4389.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갈 거야. 네가 더 갈 수 있듯이, 나도 더 갈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데 1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강할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안목이 높아져 있겠지. 나는 지금의 너를 이곳에서 봐 버렸으니까.”
  4390.  
  4391.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고서 이성민의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이성민을 지나쳤다. 이성민은 배웅의 말을 전하기 위해 위지호연을 돌아 보았다.
  4392.  
  4393. “1년 후에 보자.”
  4394.  
  4395. “그래.”
  4396.  
  4397.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말을 듣고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이성민에게 보이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미묘한 가슴의 떨림을 즐겁게 받아 들였다. 9년 전의 기억이 났다. 처음 제나비스의분수대 앞에서 소환되었을 때. 뭔지 몰라 멀뚱히 서있던 중에 느꼈던 시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고 위지호연은 그것이 좋았다. 처음으로 갖게 된 또래 친구. 단지 그것뿐인데도, 위지호연은 여태까지 살아 온 평생 중에서 제나비스에서 살았던 짧은 시절에 많은 향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4398.  
  4399. ‘욕심이 나. 하지만 참을 거야.’
  4400.  
  4401. 위지호연은 아래로 내린 손을 쥐었다 피면서 생각했다.
  4402.  
  4403.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 그래서는 미움 받게 될 지도 모르니까. 위지호연은 하나 뿐인, 유일한 친구의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은 많다. 나누고 싶은 대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않다. 때도 아직 되지 않았다.
  4404.  
  4405. 1년 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 하자.
  4406.  
  4407. ‘그러고 보니 이 말은 하지 못했어.’
  4408.  
  4409. 문을 나서면서, 위지호연은 뒤늦은 생각을 했다.
  4410.  
  4411. ‘보고 싶었다는 말.’
  4412.  
  4413. 그 말도 가슴에 묻는다.
  4414.  
  4415.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 테니까.
  4416.  
  4417. ======================================
  4418. < 허주-1 >
  4419.  
  4420.  
  4421.  
  4422. “아아아악!”
  4423.  
  4424. 백소고는 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점혈은 행동의 자유를 앗아가 버렸다. 장득수는 그런 백소고를 보면 안절부절했고, 취걸은 우울한 얼굴로 백소고를 응시했다.
  4425.  
  4426. “대체 왜!”
  4427.  
  4428. 백소고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보았다. 취걸은 백소고의 시선을 받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백소고가 기다리지 않고 내뱉었다.
  4429.  
  4430. “왜 나를 데리고 나온 건가요?!”
  4431.  
  4432. 너무 비명을 질러 쉬어버린 목소리는, 평소의 백소고의 목소리와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았다.
  4433.  
  4434. “사제가, 내 사제. 하나 뿐인… 내 사제를. 나는 사제를 구해야 해요. 사제가 나를 대신해서 그 괴물과 맞닥트렸는데! 사제, 내 사제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괴물과 맞섰다고요. 당신들과 함께 사제를 구하러 가겠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4435.  
  4436. 더듬거리며 뱉은 백소고의 말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명확했고 들끓는 감정은 노골적이었다. 원망을 듣는 것이 당연하지. 눈치없는 장득수도 그를 알고서 침묵했다. 그는 변명하는 대신에 눈을 감고서 머리를 숙였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437.  
  4438. 하지만 취걸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취걸은 백소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해서는 안 되었다.
  4439.  
  4440. 도망치는 것을 택한 것은 취걸이다. 기습으로 백소고를 점혈하고,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며 놀란 장득수를 설득하고, 혈혈노파에게서 취한 스크롤을 사용해 던전을 탈출한 것도 취걸이다. 스크롤은 성능이 뛰어났다. 그들은 많은 거리를 격하고서, 도시 크론의 개방 본파로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4441.  
  4442. 크론은 던전과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는 도시였으며, 개방의 본파 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초 장거리 텔레포트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마법이다. 대마법사라고 추앙받는 이들조차 도시 단위의 텔레포트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던전에서 얻은 스크롤은 통상적인 상식과는 아득하게 벗어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이 어마어마한 거리의 텔레포트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4443.  
  4444. “…우선. 진정하십시오.”
  4445.  
  4446. 취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해 봤자 백소고가 진정하지 않을 것임은 취걸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백소고는 그 말에 눈을 부릅 뜨고서 취걸을 노려 보았다.
  4447.  
  4448. “우선. 백소저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은 크론에 있는 개방 본파입니다. 이곳에서 그 던전까지 돌아가려면 백소저가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도 한달은 걸릴 겁니다.”
  4449.  
  4450. “마법을…”
  4451.  
  4452. “우리가 이곳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던전에서의 스크롤 덕분이었습니다. 그 어떤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백소저가 원하는 시간 안에 백소저를 그 던전 앞으로 이동시켜 줄 수는 없을 겁니다.”
  4453.  
  4454. “왜 도망친 거죠…?!”
  4455.  
  4456. 백소고는 이를 악물고서 내뱉었다. 몸이 점혈되지만 않았으면 백소고는 현실이 어떻고 간에 이 던전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크론의 모든 마법사 길드를 돌아다니며 텔레포트를 부탁하던가.
  4457.  
  4458. “말하지 않았습니까.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4459.  
  4460. 취걸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4461.  
  4462. “우리 셋. 거기에 백소저의 사저인 귀창이 힘을 합친다고 하여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4463.  
  4464. “해보지도 않았잖아요…!”
  4465.  
  4466. “해보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나는… 백소저. 나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건 장득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467.  
  4468. “그렇다면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나요.”
  4469.  
  4470.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취걸은 그런 백소고의 시선을 아프게 느꼈다. 백소고를 알고서, 백소고를 연모하고. 그런 시간 동안 취걸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저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했다. 그럴 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4471.  
  4472.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4473.  
  4474. “…왜죠?”
  4475.  
  4476. “나는 백소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4477.  
  4478. 그 말에 백소고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잠깐 동안 취걸을 보던 백소고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잠시 뒤에, 백소고는 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4479.  
  4480. “비겁하군요.”
  4481.  
  4482. 탄식어린 목소리였다.
  4483.  
  4484. “비겁하고, 비겁하고… 너무… 비겁해요. 이것이 무림맹인가요. 이것이 협의俠義인가요? 위지호연을 감시하면서 위지호연을 따라 던전에 들어간 것은, 위지호연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그녀가 던전에서 강한 힘을 얻고 정말로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우리는 막지 못했어요. 아니, 막지 않았죠.”
  4485.  
  4486.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위지호연과 싸우다 죽는 것이 협의라는 겁니까?”
  4487.  
  4488. “적어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협의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4489.  
  4490. “그건 만용입니다. 백소저. 위지호연에게 도전하여 죽는 것은 협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더 많은 협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4491.  
  4492. “…사제.”
  4493.  
  4494.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4495.  
  4496. “내 사제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도… 협의인가요?”
  4497.  
  4498. “…일부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4499.  
  4500. 터무니없는 말이다. 위선. 백소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득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취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4501.  
  4502. “귀창은 영웅이었습니다.”
  4503.  
  4504.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4505.  
  4506. “…그러면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4507.  
  4508. “…점혈을 풀어주세요.”
  4509.  
  4510. 백소고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4511.  
  4512.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말이 위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요?”
  4513.  
  4514.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4515.  
  4516. “나는 이상을 위해 무림맹에 들어왔어요.”
  4517.  
  4518. “백소저가 위하는 이상은 뭡니까? 이 세상. 매일매일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놈들이 소환되는 이 세상에서 악을 근절하겠다는 것? 그건 불가능합니다.”
  4519.  
  4520. 백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기로 얼룩진 눈으로 취걸을 노려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아프게 느끼면서, 취걸은 계속해서 말했다. 말해야만 했다.
  4521.  
  4522. “누구나…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상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 타협하는 겁니다. 현실을 알고 있으니까.”
  4523.  
  4524. “그만두겠어요.”
  4525.  
  4526. 알고 있다. 이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이라는 것은 이상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벅차다. 그러니 타협하는 것이다.
  4527.  
  4528. “나도 알아요. 내가 바라는 이상이 터무니없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무림맹에 들어온 것은, 이곳이 내 이상과 그나마 맞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4529.  
  4530. “…내 의견이 무림맹 전체의 의견은 아닙니다.”
  4531.  
  4532. “점혈을 풀어주세요.”
  4533.  
  4534. 백소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취걸은 입을 다물고 백소고에게 다가와 그녀의 점혈을 풀어 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 선 백소고는 숨을 크게 내뱉으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그리고는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손을 휘둘러 취걸의 뺨을 갈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취걸의 머리가 홱하고 돌아갔다.
  4535.  
  4536. “어, 어디로 가는 것인가?”
  4537.  
  4538.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4539.  
  4540. 백소고가 내뱉었다.
  4541.  
  4542. “역겨워서.”
  4543.  
  4544. 취걸은 방을 나서는 백소고를 잡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았다. 단순한 따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취걸은 쿡쿡 웃으면서 물었다.
  4545.  
  4546. “차인걸까요?”
  4547.  
  4548. 나사가 반쯤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4549.  
  4550. *
  4551.  
  4552. 위지호연이 보물창고를 빠져나가면서 던전은 완전히 닫혔다. 그와 함께 이성민도 자연스레 던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위지호연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휘둘릴 수는 없었다. 1년은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4553.  
  4554.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의 여관에 들어오고서, 이성민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4555.  
  4556. 아프다.
  4557.  
  4558. 이성민은 숨을 몰아 쉬면서 팔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쥐 죽은 듯이 누워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성민은 낡은 천장을 올려 보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곱씹었다. 백소고의 죽음을 막았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이성민은 그림자를 내려 보면서 네블을 불렀다.
  4559.  
  4560. “예.”
  4561.  
  4562. 네블이 솟구쳤다. 그는 피로에 절은 이성민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네블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4563.  
  4564. “묵섬광에 대한 정보를 구해 주십시오.”
  4565.  
  4566.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4567.  
  4568.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4569.  
  4570. “알겠습니다. 정보 길드를 통해 수소문해보도록 하죠. 그 외에… 다른 요구는 없으십니까?”
  4571.  
  4572. 네블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은 창으로 향했다. 새로 받은지 얼마 안 된 것인데 형편없는 꼴로 변해 있었다. 네블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4573.  
  4574. “이거야 원… 셀게루스님이 화를 낼 겁니다. 마이스터가 공 들여 만든 무기가 저렇게 박살날 줄이야. 드래곤이라도 잡으신 겁니까?”
  4575.  
  4576. “그럴리가요.”
  4577.  
  4578. “농담입니다. 상대가 드래곤이었다면 이성민님은 이미 죽었겠죠. 원하신다면 셀게루스님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4579.  
  4580. “…아, 그 전에.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4581.  
  4582.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성민이 꺼낸 것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리면서 얻은, 주먹만한 크기의 광석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네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4583.  
  4584.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4585.  
  4586. 네블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려운 요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네블에게 광석을 건네 주었다. 주의깊은 눈으로 광석을 살피던 네블이 감탄을 터트렸다.
  4587.  
  4588. “맙소사. 이걸 대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4589.  
  4590. “…뭐길래 그럽니까?”
  4591.  
  4592. “이건 오리하르콘입니다.”
  4593.  
  4594. 네블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오리하르콘이라는 금속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에리아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광물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희귀한 광물이었다.
  4595.  
  4596. “저는 대장장이가 아니기에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지만, 제가 판단하건데 이 오리하르콘은 불순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은 최상품입니다. 판매하신다면 성채 몇 개는 구입하실 수 있을 겁니다.”
  4597.  
  4598. “그렇습니까?”
  4599.  
  4600. 놀라기는 했지만 그 정도. 이성민은 마음을 진정 시켰다. 전생에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광물이었지만, 지금은 이성민의 소유가 되었다. 놀랄 것도 없다.
  4601.  
  4602. “마침 잘 되었군요. 쓰던 창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셀게루스님에게 오리하르콘을 드려 무기 제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4603.  
  4604. “바로 연결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4605.  
  4606. “예.”
  4607.  
  4608. 이성민의 대답에 네블이 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민의 앞이 쩍하고 벌어지더니 셀게루스의 공방과 연결되었다.
  4609.  
  4610. “오리하르콘이라고?!”
  4611.  
  4612. 얼굴을 보자 마자 셀게루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셀게루스의 얼굴에는 평소의 권태로움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들여 보았다.
  4613.  
  4614. “정말이야? 오리하르콘, 그것도 제련되지 않은 원석을 가지고 있다고?”
  4615.  
  4616. “아… 예.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제가 가진 창이…”
  4617.  
  4618. “그건 상관없어!”
  4619.  
  4620. 셀게루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민은 셀게루스가 그렇게 큰 목소리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버렸다.
  4621.  
  4622. “줘봐. 일단 내가 직접 봐야겠어.”
  4623.  
  4624. “아… 예.”
  4625.  
  4626. 이성민은 곁에 나타난 네블에게 오리하르콘 광석을 넘겨주었다. 네블을 통해 오리하르콘을 넘겨 받은 셀게루스는 크게 뜬 눈으로 오리하르콘을 훑어보면서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4627.  
  4628. “그러니까… 그걸로 창의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크기가 충분하지 않기는 하지만 가능할지…”
  4629.  
  4630. “모르는 소리 마.”
  4631.  
  4632. 이성민의 말에 셀게루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양 손으로 오리하크론 광석을 잡더니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주먹만한 오리하르콘이 크게 부풀었다.
  4633.  
  4634. “이 정도로 불순물이 없는 오리하르콘이라면 창 한 자루는 거뜬해. 오히려 만들고도 남을걸.”
  4635.  
  4636. “그렇다면 남은 오리하르콘은 제작 보수로 하죠.”
  4637.  
  4638. 이성민이 별 생각없이 그렇게 말하자, 셀게루스가 눈을 크게 뜨고 이성민을 보았다.
  4639.  
  4640. “너 미쳤어?”
  4641.  
  4642. “…예?”
  4643.  
  4644. “남은 것을 보수로 하자고? 뭔 말도 안 되는…! 너는 진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모든 대장장이가 보수 없이 제작을 맡으려 들 거야. 오리하르콘은 그만큼 희귀한 금속이라고.”
  4645.  
  4646. “그렇다고 공짜로 부탁하기에는…”
  4647.  
  4648. “아니, 됐어. 보수는 필요 없어. 나도 제련되지 않은 오리하르콘을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차라리 창 말고 보조 무기를 만드는 것은 어때? 이 정도 오리하르콘이라면 단검 몇 자루는 더 만들 수 있을 거야.”
  4649.  
  4650. “그렇다면… 그것으로 부탁…”
  4651.  
  4652. [아니. 단검 말고 차라리 이 갑옷을 보수해라.]
  4653.  
  4654. 이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허주가 끼어들었다.
  4655.  
  4656. [이 갑옷도 매개로 쓸 정도는 되지만, 내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아. 오리하르콘은 마력 반응이 뛰어나니까 내 힘도 이전보다 잘 받아낼 수 있겠지.]
  4657.  
  4658. “…단검 말고. 이 갑옷을 오리하르콘으로 보수할 수 있을까요?”
  4659.  
  4660. “전부다 하는 것은 무리인데…?”
  4661.  
  4662. [상관없다고 말해라.]
  4663.  
  4664. “상관없습니다.”
  4665.  
  4666. 오리하르콘 단검을 가지고 있어 봐야 쓸 곳도 없다. 쓰지도 않는 단검을 가지고 있느니, 허주의 말대로 오리하르콘을 통해 마갑을 보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4667.  
  4668. ‘그런데. 당신이 들어 있는데 마갑을 제련해도 되는 겁니까?’
  4669.  
  4670. [잠깐 동안 거처를 옮기면 된다. 저 반쪽짜리 창도 미스릴을 쓴 것이니, 내 혼을 잠깐은 담을 수 있겠지.]
  4671.  
  4672. 이성민은 셀게루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창을 잡았다.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뻗어져 창 속으로 스며들었다.
  4673.  
  4674. [됐다.]
  4675.  
  4676. 창이 웅웅거린다. 이성민은 마갑을 벗어 네블에게 건네 주었다.
  4677.  
  4678. “…묘한 존재를 사역하고 계시군요.”
  4679.  
  4680. [사역이라니, 새끼가 뒤질려고.]
  4681.  
  4682. 허주가 으르렁거렸지만 네블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성민은 순간 떠오른 것이 있어서 네블에게 부탁했다.
  4683.  
  4684. “허주에 대한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4685.  
  4686. “허주…?”
  4687.  
  4688. “네. 몇 백 년 전에 이름을 날린 요괴라고 하더군요.”
  4689.  
  4690. “알겠습니다. 묵섬광에 대한 정보와 함께 전해드리지요.”
  4691.  
  4692. 그것으로 에레브리사와의 거래는 끝났다. 이성민은 창을 내려 놓고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4693.  
  4694. “…피곤해.”
  4695.  
  4696.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4697.  
  4698.  
  4699.  
  4700. ======================================
  4701. < 허주-2 >
  4702.  
  4703.  
  4704.  
  4705. 나른한 감각 속에서 이성민은 눈을 떴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어렵잖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4706.  
  4707. ‘꿈?’
  4708.  
  4709. 자각몽을 꾸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므쉬의 산에서 꿈의 시련을 받았을 때, 악몽 속에서 이성민은 숱하게 자각몽을 꾸었었다. 그 시절에 꾸었던 꿈들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다. 흔히들 자각몽이라고 한다면 꿈속에서 바라던 대로 꿈이 바뀌는, 그런 것을 기대하겠지만 이성민이 겪었던 자각몽은 그런 편리한 것들이 아니었다.
  4710.  
  4711.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 보았다.
  4712.  
  4713. “일어났나?”
  4714.  
  4715. 목소리.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악몽과는 다르다. 보통의 꿈과도 다르다. 감각적인 면에서는 데니르의 권능을 통해 들어갔던 정신세계와 닮아 있었다.
  4716.  
  4717. 목소리의 주인은 허주였다.
  4718.  
  4719. 그는 흔들리는 요력을 몸뚱이로 삼고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몸 전체가 그랬다.
  4720.  
  4721.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4722.  
  4723.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냐?”
  4724.  
  4725.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왜 자신의 꿈 속에 허주가 있는 것인가 궁금하였지만, 우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 허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이윽고 그것은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허주는 이성민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거한이 되었다. 손은 머리 하나는 우습게 손으로 감싸 으깰 수 있을 만큼 컸다.
  4726.  
  4727.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처럼 생겼군.”
  4728.  
  4729.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평했다. 대요괴라고 하기에 뿔과 이빨, 손톱을 가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본 허주의 본 모습은 키와 덩치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4730.  
  4731. “요괴는 인간과 닮아 있으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요괴는 몬스터가 아닌 아인이다.”
  4732.  
  4733. “오크같은?”
  4734.  
  4735. “그런 저열한 놈들과 비교하지는 마라.”
  4736.  
  4737. 허주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팔을 붕붕 돌렸다.
  4738.  
  4739. “진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몸뚱이를 갖게 되니 기분은 좋군.”
  4740.  
  4741.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냐?”
  4742.  
  4743. “시험 삼아서 해 보았다. 네놈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네놈과 영적으로 연결되었거든. 그래서 할 수 있나 해 보았는데… 네놈이 잠들어 있는 중에는 꿈에 개입할 수 있더군. 육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4744.  
  4745. “해보기는 한 모양이군.”
  4746.  
  4747.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패해버렸어. 네놈에게 어린 가호는 나의 힘으로도 뚫을 수가 없더구나. 잠자는 숲에서는 네놈의 정신력을 뚫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신력이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버렸어.
  4748.  
  4749. 어지간한 존재라면 네놈의 정신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4750.  
  4751. 짚이는 것이 있었다. 프레스칸의 정신 마법은 이성민의 가호를 뚫지 못했다.
  4752.  
  4753. “그래서. 볼 일은 끝났나? 그렇다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자고 싶거든.”
  4754.  
  4755.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4756.  
  4757. 이리 와라. 허주가 이성민에게 손짓했다.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허주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4758.  
  4759. “뭐냐?”
  4760.  
  4761. “말하지 않았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고.”
  4762.  
  4763. “그러니까 뭔데.”
  4764.  
  4765. “네놈. 뭐하는 놈이냐?”
  4766.  
  4767. 허주가 곧바로 질문했다.
  4768.  
  4769. “네놈에게 요력을 빌려 주었을 때. 그때의 나는 네놈과 영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면서, 네놈의 감정의 일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 반푼이 괴물과 싸웠을 때 네놈이 느끼던 감정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인간같지 않던 계집과 대했을 때의 네놈의 감정도.”
  4770.  
  4771. “마음대로 읽어대는군.”
  4772.  
  4773. “느껴졌을 뿐이다.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야.”
  4774.  
  4775. “정확히 뭘 듣고 싶다는 거냐?”
  4776.  
  4777. “네놈이 여태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네놈과 그 계집의 관계. 네놈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4778.  
  4779. “듣고 싶은 것이 참 많으시군. 내가 왜 그것을 말해줘야 하는 거냐?”
  4780.  
  4781. “네놈과 앞으로 제법 오랫동안 지내야 할 텐데 서로에 대해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나? 그리고 네놈은 나에게 빚이 있어.”
  4782.  
  4783. “빚?”
  4784.  
  4785.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 반푼이와 싸우던 중에 죽었을 것이다.”
  4786.  
  4787. 안다. 그때 허주가 요력을 보태주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 이성민이 이 몸뚱이로 펼칠 수 있는 구천무극창은 사초인 구룡살생까지가 한계였고, 무영탈혼은 삼식인 이 보겁살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의 무공은 알고 있고 정신세계에서 펼쳐 본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의 몸으로는 온전히 펼칠 수가 없었다.
  4788.  
  4789. 사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성민의 몸은 환골탈태를 거친 완전한 초절정 무인의 것이다. 구천무극창과 무영탈혼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고 해도 초절정의 몸뚱이로 펼치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
  4790.  
  4791. 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성민이 가진 내공은 여타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4792.  
  4793. 펼칠 수 없는 이유는, 무공의 수준이 높다 보다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심득이 겪은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육체가 따르지 못한다. 요력의 보조를 받았을 때에는 구천무극창의 육초인 공도까지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지금의 몸뚱이로 공도를 펼치려 들었다가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4794.  
  4795. “…내가 마음에 들어서 도와줬다는 것 아니었나?”
  4796.  
  4797.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나?”
  4798.  
  4799. “말해서 뭐하자고.”
  4800.  
  4801. “부끄러운가?”
  4802.  
  4803. “그것도 조금 있기는 해.”
  4804.  
  4805. “새끼. 비싸게도 구는 군. 네놈, 알고는 있냐? 네놈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어.”
  4806.  
  4807. “그건 또 무슨 말이냐?”
  4808.  
  4809. “자기 궁금한 것만 챙겨 들으려는 이기적인 새끼야. 알고 싶거든 이 어르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거라.”
  4810.  
  4811.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허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주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키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허주가 말한, ‘문제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4812.  
  4813. 어차피 허주는 이성민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길 것은 없었다. 이성민은 허주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나비스에서 위지호연과 만나고, 위지호연과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되어 무슨 약속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와 만나고, 수행 끝에 므쉬의 산에서 내려온 점. 베헨게르에서 있었던 일들. 프레스칸과 검은 심장, 아이네. 소림에서의 수행과 화산… 데니르까지.
  4814.  
  4815.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허주는 바닥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허주는, 이성민의 말이 끝나자 바로 입을 열었다.
  4816.  
  4817. “마법은 왜 안 쓰는 거냐?”
  4818.  
  4819. “…어?”
  4820.  
  4821. 대뜸 말한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하고 말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이성민은 상태창을 띄웠다.
  4822.  
  4823. “아.”
  4824.  
  4825. 잊고 있었다. 므쉬의 산에서, 이성민은 스칼렛에게 몇 가지의 마법을 배웠었다.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스트렝스, 헤이스트. 사실상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저 네 가지 마법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4826.  
  4827. “네놈에게서 마법의 느낌이 나. 정확히 무슨 마법을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4828.  
  4829. “…보조 마법을 몇 가지.”
  4830.  
  4831. “버프 종류냐?”
  4832.  
  4833. “그것도 있는데…”
  4834.  
  4835. “이 병신 새끼. 그런 것들을 배워놓고서 왜 안 쓰는 거야? 무공이랑 마법을 같이 병행하면 뒈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4836.  
  4837. 허주가 신랄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 언제였더라? 정신세계에서의 수행에서는 무공만 죽어라 사용했고, 그 기억을 그대로 갖게 되면서 마법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4838.  
  4839. “공격 마법과 무공을 병행한다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이 될 지도 몰라도, 보조 마법이라면 무공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 해 보기는 했냐?”
  4840.  
  4841. “옛날에는…”
  4842.  
  4843. “병신 새끼.”
  4844.  
  4845. 허주가 이죽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4846.  
  4847.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네놈이 꽤 마음에 들었다.”
  4848.  
  4849. “…왜?”
  4850.  
  4851. “우직한 멍청이는 좋아하거든.”
  4852.  
  4853. 허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4854.  
  4855. “까놓고 말하지. 여기서 1년이 더 흐른다고 해서 네놈이 그, 위지호연이니 소천마니 하는 계집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4856.  
  4857. “나도 알아.”
  4858.  
  4859. “신의 시련은 까다롭지. 정신 세계에서 2100년을 수행했다고? 큭큭! 어쩐지, 네놈이 가진 재능 이상의 무공을 쓰더니… 부족한 재능을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보충했구나. 2100년 동안 그 지랄을 해서 고작해야 그 정도라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만.”
  4860.  
  4861. “무시당할 정도로 약한가?”
  4862.  
  4863. “인간 이상의 힘임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이들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4864.  
  4865. 허주가 단언하여 내뱉었다.
  4866.  
  4867. “그 계집은 인간을 초월해가고 있다. 네놈이 정녕 그 계집과 동등하게 되고 싶거든 너 역시 그렇게 되어야겠지. 정신세계예서의 무위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하여도 부족해.”
  4868.  
  4869. “…그건 어쩔 방법이 없지.”
  4870.  
  4871. “인간이 아니게 될 방법은 많다.”
  4872.  
  4873. 허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시선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4874.  
  4875. “가장 쉬운 방법은 흡혈귀가 되는 것이다. 혹은 라이칸슬로프가 되던가. 놈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가장 흔한 놈들이지. 방법도 어렵지는 않아.”
  4876.  
  4877. “그러고 싶지는 않아.”
  4878.  
  4879. 흡혈귀, 라는 말에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4880.  
  4881.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고집이냐?”
  4882.  
  4883.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럴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할 뿐이지.”
  4884.  
  4885. “크크! 나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흡혈귀나 라이칸슬로프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거든. 네가 흡혈귀가 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든 모체에게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귀찮은 제약들이 생겨나지.”
  4886.  
  4887.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4888.  
  4889. “요괴가 되는 방법도 있다.”
  4890.  
  4891. 허주의 눈이 빛났다.
  4892.  
  4893. “요괴라는 것은 몬스터와 아인 둘 모두에 속하는 존재다. 인간이 요괴로 변한 것도 있고, 그냥 태어난 놈들도 있고, 요괴와 요괴가 떡을 쳐서 태어난 놈들도 있지.”
  4894.  
  4895. “…나보고 요괴가 되라는 거냐?”
  4896.  
  4897.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지. 요력은 너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애초에 네놈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괴물의 것이야. 그것을 중심으로 두고 내 요력으로 인해 변이한다면, 아주 재밌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898.  
  4899. 허주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여태까지 인간으로 살았는데, 대뜸 인간이 아닌 요괴가 되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4900.  
  4901. “뭐.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네놈이 마음에 드니 알려주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나쁘지 않은 기회임을 알거라. 이 어르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니까.”
  4902.  
  4903. 허주는 그 말을 남기고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민은 꿈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4904.  
  4905. “멋대로 남의 꿈에 들어오고선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군.”
  4906.  
  4907.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이성민의 의식은 멀어졌다.
  4908.  
  4909.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성민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밀어냈다. 근처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에 시선을 내리니, 침대 아래에서 루비아가 웅크리고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4910.  
  4911. “잊고 있었군.”
  4912.  
  4913.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루비아의 몸을 들어다가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귀가 어두운 것인지 루비아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근처에 세워 놓은, 허주가 깃든 창이 웅웅거렸다.
  4914.  
  4915. [오늘은 뭘 할 거냐?]
  4916.  
  4917.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4918.  
  4919. 포션을 연달아 먹어두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문제가 많았다. 이성민은 허주를 무시하고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아공간 포켓에서 쪼개 놓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꺼냈다.
  4920.  
  4921. 먹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허주가 말했었다. 이성민은 우선 대환단의 반쪽을 입에 넣었다. 내공은 운기조식 없이 그대로 단전에 쌓였다. 단전은 며칠 전과 비교해서 굉장히 커져 있었다. 소림 최고의 비전 영약인 대환단을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성민은 단전의 크기를 확인하고서 마석도 흡수했다.
  4922.  
  4923. ‘왜 던전에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겠군.’
  4924.  
  4925. 마석으로 인해 증진된 내력을 확인하고서 이성민은 혀를 내둘렀다. 이성민이야 마석의 이점에 크게 구애되지 않지만, 정제 과정 없이 그 즉시 힘의 증진을 얻는 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마석이 증진시킨 내공의양은 대환단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효율 좋은 마석뿐만이 아니라, 마이스터 대장장이가 눈을 뒤집을 정도로 순도 높은 오리하르콘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던전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당연했다.
  4926.  
  4927. ‘그러고 보니 항룡십팔장도 있었지.’
  4928.  
  4929. 이성민은 항룡십팔장의 비급을 아공간 포켓에서 꺼냈다. 이것을 어떻게 처분할까. 에레브리사를 통해 판매할까 싶기도 하였지만, 백보신권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4930.  
  4931. ‘개방 쪽에 가져다줄까.’
  4932.  
  4933. 물론 당장은 아니다. 우선 에레브리사를 통해 의뢰한 백소고와 허주에 관련 된 정보를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프레스칸을 추격해야만 했고, ‘북쪽으로도 가야해.’
  4934.  
  4935. 불영대사에게 깃든 신령이 말했던 북쪽에도 볼 일이 있다. 겨울까지 가야 하니 아직은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개방에 들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4936.  
  4937.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운용하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이성민은 단전의 바닥에 있는 기묘한 힘의 존재를 의식했다. 내공과 섞이지 않고 혼자 고여 있는 그 힘은 요력이었다.
  4938.  
  4939. ‘이건 또 뭐야?’
  4940.  
  4941. 이성민은 운기조식을 멈추고 허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허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4942.  
  4943. [내 잔재로군. 네놈과 내가 영적으로 연결 된 흔적이다.]
  4944.  
  4945. ‘거슬리는데. 치울 수는 없나?’
  4946.  
  4947. [내버려 둬라.]
  4948.  
  4949. ‘이 요력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4950.  
  4951. [몸뚱이에 괴물의 심장을 박고 있으면서 별 시답잖은 것을 걱정하는 군. 아무 문제 없으니까 그냥 둬.]
  4952.  
  4953. 허주의 대답에 이성민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자하신공에 몰입하면서 이성민은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호흡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고 자하신공의 자색 기운이 주변을 떠돌았다.
  4954.  
  4955.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4956.  
  4957. ======================================
  4958. < 허주-3 >
  4959.  
  4960.  
  4961.  
  4962. 루비아는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루비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4963.  
  4964. “잘 잤습니까?”
  4965.  
  4966. “…바닥에서 잤던 것 같은데.”
  4967.  
  4968. “거슬려서 옮겼습니다.”
  4969.  
  4970. “말 참 예쁘게 하시네요. 나는 걱정 되서 당신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곁에서 보고 있었는데.”
  4971.  
  4972. “걱정할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4973.  
  4974. “죽기 직전까지 가고, 아프다고 뒹굴면서 비명까지 질렀던 사람이.”
  4975.  
  4976. “비명은 안 질렀습니다.”
  4977.  
  4978. “소리 없는 비명은 질렀었죠. 어쨌든, 걱정 되서 보고 있었다고요.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자는 것 같아서 마법으로 몸도 씻겨 드렸고.”
  4979.  
  4980. 루비아가 쏘아 붙였다. 어쩐지. 피곤하고 힘들어서 씻지도 않고 바로 곯아 떨어졌는데 몸이 깨끗하더라니.
  4981.  
  4982. “서비스가 좋으시군요.”
  4983.  
  4984. “냄새가 심했거든요.”
  4985.  
  4986. 루비아가 코를 부여잡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하고서 벽에 걸쳐 세워 놓은 창을 들었다.
  4987.  
  4988. “어디를 가는 거예요?”
  4989.  
  4990. “몸이 꽤 나아져서. 바깥에서 몸이나 좀 풀어야겠습니다.”
  4991.  
  4992. “그냥 푹 쉬는게 어때요?”
  4993.  
  4994. “걱정해 주는 겁니까?”
  4995.  
  4996. “그러면 안 되나요? 나는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그랬다가는 저희 주인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
  4997.  
  4998.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인데.”
  4999.  
  5000. 이성민은 엔비루스를 떠올리면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루비아는 조금 기가 죽은 것인지 고양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5001.  
  5002. “…반드시 찾아오실 거예요.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저를 남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5003.  
  5004.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5005.  
  5006. “그럴 리가… 없잖아요.”
  5007.  
  5008. 대답하는 루비아의 목소리에 확신은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해도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겪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 온 사건들은 루비아가 가진 맹목적인 신뢰를 조금 흩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엔비루스에게서 만들어져 엔비루스를 위해 살아왔다.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엔비루스와 함께 겪었던 위험들은 그녀를 사역하는 강력한 주인을 위협하기에는 나약한 것들이었다.
  5009.  
  5010. 하지만 지금 엔비루스는 곁에 없다. 죽을 뻔 했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5011.  
  5012. “장난으로 한 말입니다.”
  5013.  
  5014. 이성민은 우울하게 젖어가는 루비아의 얼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5015.  
  5016. “엔비루스가 당신을 버린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나한테 인도하지도 않았겠지요.”
  5017.  
  5018. “…하지만 나는 죽을 뻔 했어요.”
  5019.  
  5020. “‘우리’가 죽을 뻔 했죠. 결국 죽지 않았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안 죽을 겁니다.”
  5021.  
  5022. 루비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녀의 눈을 보고서 어깨를 으쓱거리고선 밖으로 나갔다.
  5023.  
  5024. 이성민이 급하게 숙박한 여관은 이 마을에서 유일한 여관으로, 굉장히 낡은 건물이었다. 마을의 규모는 제법 크기는 했지만,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은 언제나 위험이 인접해 있다. 도시 성주의 관리를 떠난 곳이기 때문에 치안도 좋지 않다.
  5025.  
  5026. 1층은 지저분한 술집이자 식당이었다. 부랑자와 다를 것 없는 몰골을 한 자들이 모여들어 싸구려 술과 음식을 대낮부터 퍼먹고 있었고, 용병처럼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이성민은 그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아침이자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따라 내려 온 루비아가 이성민의 곁에 붙어 앉았다.
  5027.  
  5028. “…냄새.”
  5029.  
  5030. 루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나온 음식의 맛도 그저 그랬다. 깨작거리며 하는 식사가 끝나가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발을 질질 끌면서 이성민 쪽으로 다가왔다.
  5031.  
  5032.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구료.”
  5033.  
  5034. 입을 열때마다 악취가 풍긴다. 루비아가 질색하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이성민은 시선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얼굴에 시커먼 반점을 박고 있는 늙은 거지가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5035.  
  5036. “적선이라도…?”
  5037.  
  5038. “개방입니까?”
  5039.  
  5040. 이성민이 대뜸 물었다. 애초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지는 악취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웃었다.
  5041.  
  5042. “그러는 그대는 귀창이쇼?”
  5043.  
  5044.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낮았다. 여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이성민은 거지를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5045.  
  5046. “개방과 악연을 맺은 적은 없는데.”
  5047.  
  5048. “끌끌! 어린 대협은 뭔가를 오해하고 계시구료. 그냥, 이 작은 마을에 범상치 않은 고수가 있기에 호기심에 물어보았을 뿐인데.”
  5049.  
  5050. “맞습니다.”
  5051.  
  5052. 조금 늦게 대답했다.
  5053.  
  5054. “내가 귀창입니다. 뭐 문제가 됩니까?”
  5055.  
  5056. “이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던전이 열렸고, 소천마 위지호연이 그 던전을 닫았다고 하더구려.”
  5057.  
  5058. “소문이 빠르군.”
  5059.  
  5060. “끌끌! 마법이 참 편리하지 않소?”
  5061.  
  5062. “뭘 묻고 싶은 겁니까?”
  5063.  
  5064. “우리 개방의 어린 영웅이 그 던전에서 왼 팔이 잘려 간신히 살아 나왔소. 초절정 고수인 역발산 장득수와 묵섬광 백소고도 함께 그 던전에서 빠져나왔지. 문제는 그 영웅들이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친 것이 고작이라, 던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마지막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오.”
  5065.  
  5066. 그 말에 이성민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안도했다. 백소고가 무사히 던전에 나왔다는 것이 이성민을 안도하게 한 것이다.
  5067.  
  5068. “무엇이 궁금한 겁니까.”
  5069.  
  5070. “귀창. 그대는 어떻게 살아나온 것이오?”
  5071.  
  5072. 거지가 묻는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 거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 보았다. 잠시 뒤에 이성민의 입이 열렸다.
  5073.  
  5074. “살아나올 만한 짓을 하였으니까 살아나왔겠지.”
  5075.  
  5076. “흐흐! 이 늙은 거지가 그대를 불쾌하게 한 것인가?”
  5077.  
  5078. “아니. 그건 아니오. 그냥 제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5079.  
  5080. “어떤 이유로?”
  5081.  
  5082.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물으십시오.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5083.  
  5084. 그 말에 거지가 입을 다물었다. 이성민은 작은 짜증을 느꼈다. 애초에 그는 정파 무림맹이 위지호연을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위지호연이 대단한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들은 멋대로 위지호연을 악으로 규정짓고서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들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장득수가 떠들어대던 말을 통해 파악했다.
  5085.  
  5086.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소이까?”
  5087.  
  5088. “못 봤습니다.”
  5089.  
  5090. 그러니 거짓말을 했다.
  5091.  
  5092. “던전은 끔찍했고, 나는 살아남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위지호연 본인과는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중에 던전이 닫혔고, 그곳에서 강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5093.  
  5094. 이성민의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인지 거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침묵했다. 잠시 뒤에 거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5095.  
  5096. “협조 해 주셔서 고맙소.”
  5097.  
  5098. “아, 그리고.”
  5099.  
  5100. 이성민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 주었다.
  5101.  
  5102. “적선.”
  5103.  
  5104. “…끌끌! 복 많이 받으십쇼.”
  5105.  
  5106. 거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몸을 돌렸다. 이성민은 떠나가는 거지의 등을 보면서 한숨을 삼켰다.
  5107.  
  5108. ‘이런 식으로 또 얽히게 되는 군.’
  5109.  
  5110. 인연이라는 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결국 얽히게 되는 법이다. 식당 전체를 본다. 구석에 처박힌 부랑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개방이겠지.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지만 개방이 까다로운 것은 고수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숫자’ 때문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거지가 있다. 다른 문파들은 색목인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지만, 개방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나 받아들인다.
  5111.  
  5112. 이성민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정도 이 마을에 묵으면서 몸을 점검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시자의 존재가 거슬린다. 이성민은 숙박료를 지불하고서 바로 여관을 나왔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없었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5113.  
  5114.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5115.  
  5116. “우선 북쪽으로 방향을 잡을 겁니다.”
  5117.  
  5118. 그곳까지 가면서 얻은 정보들에 대해 정리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는 자그마한 빛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성민이 두른 망토 안으로 몸을 숨겼다.
  5119.  
  5120. 서두르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추격자의 기미는 없었다. 하지만 감각에 무언가가 거슬렸다. 등에 걸친 허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5121.  
  5122. [마법이군.]
  5123.  
  5124. ‘개방이 마법도 쓰나?’
  5125.  
  5126. [나야 모르지. 하지만 감시가 붙은 것은 확실해. 어쩔 테냐?]
  5127.  
  5128. ‘내버려 둔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더 귀찮게 굴 거야.’
  5129.  
  5130. 개방 쪽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던전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이 그들이 신경쓸 만한 이유가 되나? 아니면 위지호연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개방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개방이 얼마나 집요한 존재들인지는 이성민도 소문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5131.  
  5132. ‘설마 취걸. 그 놈이 혈혈노파에게 던져두고 갔던 것 때문에 속 좁게 구는 것은 아니겠지.’
  5133.  
  5134. 따지고 보면 제대로 버림 받은 것은 이쪽인데 말이야.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걸었다.
  5135.  
  5136. ‘새’는 그런 이성민의 뒤를 쫒고 있었다. 이성민이 아직 경공을 펼치지 않아 추격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새의 눈은 지상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이성민의 움직임을 살폈고, 새가 본 것은 그 새를 사역하고 있는 마법사에게 전해진다.
  5137.  
  5138. 그리고 마법사가 전해 본 풍경은 마법을 통해 계속해서 전달 되어, 먼 곳에 떨어진 크론까지 전해진다. 타임 딜레이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아득하게 떨어진 거리를 무시하고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무공에게는 불가능한, 마법만이 가능한 경이였다.
  5139.  
  5140. “살아 있었군.”
  5141.  
  5142. 취걸은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마법사 길드의 중추와 협력을 맺은 개방은 에리아 전역에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렇게 실시간으로, 지속적으로 감시 받는 대상은 많지 않다. 취걸은 개방 소방주라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이성민의 위치를 확인하고 감시 대상으로 골랐다.
  5143.  
  5144.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5145.  
  5146.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는 소천마 위지호연의 도플갱어. 도플갱어가 본인보다는 크게 약하다고는 하나, 소천마 본인이 가진 강함을 생각한다면 도플갱어 역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5147.  
  5148. 취걸은.
  5149.  
  5150.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왼 팔이 잘린 큰 부상을 입었고, 장득수 역시 혈혈노파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그것은 백소고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귀창의 실력은 추측이 되지 않았고, 무리한 싸움을 벌였다가는 전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도주를 택했다. 취걸이 판단하기에는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5151.  
  5152. 그곳에서 귀창이 죽었더라면 취걸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소고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노라고. 비록 당신은 그를 납득하지 못하여 나의 뺨을 갈겼지만, 결국에는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이라고.
  5153.  
  5154.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5155.  
  5156. 취걸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백소고는 떠났다. 그녀는 무림맹 쪽에 일방적으로 맹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였고, 무림맹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서 이 도시 크론을 떠났다. 크론을 떠난 백소고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감시대상으로는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5157.  
  5158. ‘마음에 안 들어.’
  5159.  
  5160. 취걸은 수정구를 내려 보았다. 반토막 난 창을 등에 걸친 이성민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왜 자신의 사제를 버린 것이냐고, 그렇게 부르짖던 백소고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렇게 외치던 백소고의 모습이 마치.
  5161.  
  5162. “질투라는 것은 추하군.”
  5163.  
  5164. 취걸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5165.  
  5166. *
  5167.  
  5168. 마을과 거리를 둔 시점에서 이성민은 경공을 펼쳤다. 단순히 경공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경공의 속도가 오른 시점에서 헤이스트를 펼친다.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마력을 사용해야 하지만, 스킬로 익힌 마법은 편리하기 짝이 없다. 내공이 지속적으로 소모되면서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진다.
  5169.  
  5170. ‘웃.’
  5171.  
  5172. 순식간에 더해진 속도에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곧바로 적응했다. 이성민은 보이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뛰어넘으면서 헤이스트와 무영탈혼의 결합이 만들어낸 속도에 몸을 맡겼다.
  5173.  
  5174. ‘장기적으로 펼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아.’
  5175.  
  5176. 이성민이 보유한 내공이 많기는 하지만, 무영탈혼과 헤이스트의 내공 소모가 워낙에 컸다. 내공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이성민은 한참을 달리다가 멈추었다.
  5177.  
  5178. ‘실전에서 써먹으면 좋겠군.’
  5179.  
  5180. 헤이스트의 속도가 더해짐으로서 의외성을 줄 수 있다. 창법에 녹여내기에는 시행착오가 제법 필요해보였고, 헤이스트 뿐만이 아니라 스트렝스까지 가미한다면 익숙해지는 것에 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5181.  
  5182.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5183.  
  5184.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감시의 기척은 없다. 아마 감시 마법이 이성민이 달리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뒤처진 모양이었다.
  5185.  
  5186. “나오셔도 됩니다.”
  5187.  
  5188. 이성민이 말이 끝나자 그림자 속에서 네블이 몸을 꺼냈다. 그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5189.  
  5190. “요구하신 정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5191.  
  5192. 네블이 수정구를 꺼내며 말했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수정구를 받았다.
  5193.  
  5194. ======================================
  5195. < 허주-4 >
  5196.  
  5197.  
  5198.  
  5199. 정보를 전해 듣고서, 이성민은 회색으로 변한 수정구를 바스라트렸다. 그 가루를 바람에 흩날리고서 이성민은 생각에 잠겼다.
  5200.  
  5201. 백소고는 살아 있다. 개방의 늙은 거지에게 전해 들어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에레브리사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들었다.
  5202.  
  5203. ‘사저가 무림맹을 탈퇴했다고?’
  5204.  
  5205. 탈퇴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무림맹 탈퇴를 선언한 백소고는 도시 크론을 떠나 남하하고 있다고 했다. 에리아는 워낙에 땅덩이가 넓어 방향만 두고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크론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향한다면…
  5206.  
  5207. ‘나를 걱정하는 거야.’
  5208.  
  5209. 크론에서 던전까지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 던전에서의 스크롤을 사용해 순식간에 크론으로 텔레포트 하기는 했던 모양이지만, 보통의 방법으로 크론에서 던전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몇 달이 걸린다. 백소고가 밥먹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며 내공 회복 포션을 물처럼 마셔 경공을 펼친다고 가정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다.
  5210.  
  5211. “혹시 묵섬광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5212.  
  5213. “어려운 일은 아니죠.”
  5214.  
  5215. 네블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디에 있건 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네블을 보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에게는 ‘거리’라는 개념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 했다.
  5216.  
  5217. “저를 묵섬광이 있는 곳까지 이동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5218.  
  5219. “그건 불가능합니다.”
  5220.  
  5221. 혹시나 해서 했던 질문이었지만, 기대 대로 네블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5222.  
  5223. “저희는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민 회원님은 아닙니다. 저희와 같은 방법으로 공간이동을 하셨다가는 공간 간의 격류를 견디지 못해 육체가 박살날 겁니다.”
  5224.  
  5225. 네블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대해 충고를 했다.
  5226.  
  5227. “장거리 텔레포트 스트롤을 구해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리 편리한 도구는 아닙니다. 보통은 지정해 둔 좌표로만 이동하는 것이 고작이니까요. 게다가 그런 스크롤은 굉장히 비쌉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고가인 이유는 이동하는 ‘시간’을 구입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죠.”
  5228.  
  5229. “…그렇다면 편지 배달 정도는?”
  5230.  
  5231. “그거야 무리는 없죠. 제가 직접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5232.  
  5233. 네블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중개 길드라는 에레브리사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중개인들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장 중개인이라는 자들은 공간이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5234.  
  5235.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이성민으로서도 네블의 강함은 추측조차 되지 않는다.
  5236.  
  5237.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5238.  
  5239. “중개 길드입니다.”
  5240.  
  5241. 이성민의 질문에 네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5242.  
  5243. “종이와 펜을 받을 수 있을까요.”
  5244.  
  5245. “드리죠.”
  5246.  
  5247. 네블이 손을 까닥하고 움직였다. 이윽고 그는 공간의 틈 안에 손을 집어넣고서 얇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5248.  
  5249. “빌려주는 겁니까?”
  5250.  
  5251. “…그냥 드리죠.”
  5252.  
  5253. 이성민은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종이에 펜촉을 대고서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는 괜찮으니까 안심하라고?
  5254.  
  5255. 이렇게 편지로 생사를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5256.  
  5257.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고, 무사히 살아나왔습니다.
  5258.  
  5259. 사저도 목숨을 건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저. 저는 사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저를 위해 그 던전에 간 것이었고, 사저가 살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5260.  
  5261. 그러니 제 걱정도, 죄책감도 가지지 말아주십시오.
  5262.  
  5263.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5264.  
  5265. 여기까지 쓰고서. 이성민은 펜을 멈추었다. 백소고에게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도 되는 것일까? 알린다면 백소고의 성격상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렇게 두어도 되는 것일까. 이성민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북쪽이다. 그곳에서 또 어떤 사건과 위험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5266.  
  5267. 결국.
  5268.  
  5269. 이성민은 백소고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백소고를 만나고 싶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아직… 백소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했다. 많이 늘었구나. 강해졌구나. 그런 말들. 이성민은 펜을 내려놓았다.
  5270.  
  5271. ‘나중에.’
  5272.  
  5273. 우선은 북쪽으로 가야 한다.
  5274.  
  5275. “너. 대단한 놈이었군.”
  5276.  
  5277. 네블을 돌려보내고서, 이성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공과 헤이스트를 병행하면서 그 속도에 익숙해지려 했고, 그것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서. 달리는 것도 수행으로 삼았다.
  5278.  
  5279. [이제야 알았냐?]
  5280.  
  5281. 허주가 으스대며 말했다. 네블이 전한 정보에는 허주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5282.  
  5283. 허주가 활동한 것은 400년도 전이었다. 그 이전부터 허주는 존재하고 있었고, 에리아의 남쪽 지역에서 악몽처럼 군림해 온 요괴 두령이 바로 허주였다.
  5284.  
  5285. “그래봤자 육체도 잃고 봉인되었으면서.”
  5286.  
  5287. [나를 봉인하겠답시고 덤빈 놈의 쪽수가 수 만이었다. 마법사에 무림인, 기사, 정령사 등. 당시 한가락 하는 놈들은 모조리 날 토벌하려고 들었어.]
  5288.  
  5289. “왜 도망치지 않았던 거지?”
  5290.  
  5291.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5292.  
  5293. 허주의 대답은 빨랐다.
  5294.  
  5295. “…그것이 전부냐?”
  5296.  
  5297. [전부지.]
  5298.  
  5299. “듣자 하니 진짜 대단했던 모양인데. 왕은 아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진짜 왕처럼 군림했다 하고. 남쪽의 원주민들 중에서는 아직도 너를 신앙하는 부족도 있다고 해.”
  5300.  
  5301.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 이해를 벗어난 경이를 보면 신앙을 품어. 하늘을 가르는 번개를 보고서 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이다.]
  5302.  
  5303. 그렇게 말하는 허주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5304.  
  5305.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남쪽으로 가자. 내 보물을 주기로 말했었으니까.]
  5306.  
  5307. “네 부하들은 다 어디 갔지?”
  5308.  
  5309. [죽었다.]
  5310.  
  5311. 허주가 대답했다. 그 이후로 허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옛날이야기를 들추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성민도 더 이상 물을 생각은 없었다.
  5312.  
  5313. ‘남쪽이라.’
  5314.  
  5315. 그쪽은 가본 적이 없다. 사실 지금 향하고 있는 북쪽도 가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해서 북쪽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흔히 ‘북쪽’ 하면 떠올리는 것은 대도시인 트라비아다. 과거 혈천마
  5316.  
  5317. 백무선이 군림하던 곳이지만, 위지호연이 백무선의 팔을 자르면서 트라비아는 아귀다툼의 장이 되었다. 본래 마두들이 득세하던 곳에서 혈천마가 찍어 누르던 것이었는데, 혈천마가 힘을 잃고 모욕당하면서 마두들이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5318.  
  5319. ‘무림인 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들도 넘친다던데. 인외도 돌아다니고.’
  5320.  
  5321. 어쩌면 그곳에서 프레스칸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였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프레스칸을 찾으러 들 것도 없이, 그에게 검은 심장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5322.  
  5323. *
  5324.  
  5325. 남자의 출현은 기묘하고 갑작스러웠다. 백소고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네블을 경계어린 시선으로 응시했고, 네블은 양 손을 들어 보이면서 백소고에게 말을 걸었다.
  5326.  
  5327.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5328.  
  5329. “…드래곤?”
  5330.  
  5331. 백소고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네블이 눈을 멀뚱히 뜨더니 곧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5332.  
  5333. “그런 오해는 처음 들어 보는 군요!”
  5334.  
  5335. 네블은 웃음기를 채 잠재우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면전에서 저런 웃음을 들었음에도 백소고는 딱히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다. 사실 백소고가 네블을 ‘드래곤’이라고 오해할 만큼, 그의 출현은 놀라웠다.
  5336.  
  5337.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쩍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대마법사나 사용할 수 있다는 텔레포트나 블링크와는 격이 달라 보였고, 백소고는 네블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며 강함조차 엿보지 못하고 있었다.
  5338.  
  5339.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어버렸네요. 드래곤, 드래곤이라… 그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요.”
  5340.  
  5341.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백소고에게 다가왔다. 백소고는 네블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적의를 내비치며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네블은 걷던 걸음의 속도를 죽이지 않았다.
  5342.  
  5343.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냥… 심부름꾼일 뿐이죠.”
  5344.  
  5345.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슈트 자켓 안쪽에서 꺼낸 것은 잘 접힌 편지봉투였다.
  5346.  
  5347. “이성민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5348.  
  5349. “…네?”
  5350.  
  5351. 백소고의 표정이 돌변했다.
  5352.  
  5353. “이성민님이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5354.  
  5355. 당장 손을 뻗어 저 편지를 낚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백소고는 그것을 인내했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삼키면서 끌어 올렸던 위협을 갈무리했다. 백색의 호신강기가 흩어졌다.
  5356.  
  5357. ‘강제로 빼앗으려 했어도… 빼앗을 수 있었을까?’
  5358.  
  5359. 백소고는 뭇내 그런 의문을 품었다. 백소고가 위협을 잠재우자 네블은 빙긋 웃더니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백소고에게 편지를 건넨 후, 네블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틈 사이로 사라졌다. 백소고는 한동안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5360.  
  5361. “…살아있었어.”
  5362.  
  5363. 단순한 편지다.
  5364.  
  5365.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는 하여도, 백소고는 믿고 있었다. 필적 같은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블의 존재가 백소고가 느끼는 신뢰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백소고는 편지를 소중하게 끌어 안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366.  
  5367. “살아있어… 사제가 살아있어.”
  5368.  
  5369. 가슴 깊이 느끼는 안도의 끝에서, 백소고는 자그마한 의문을 느꼈다.
  5370.  
  5371. ‘어떻게 살아 나온 거야?’
  5372.  
  5373. 당연스러운 의문이었다.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어디에 있다, 어디로 향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라도 적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백소고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5374.  
  5375. ‘내가 더 강했다면… 사제가 시간을 벌겠다고 나설 필요도 없었을 거야.’
  5376.  
  5377.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몇 년 만에 본 하나 뿐인 사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거두었다. 불과 일 년 전에 보았을 때만 하여도 초절정에 입문하지도 못하였었는데, 던전에서 보았던 사제는 백소고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5378.  
  5379. 어디로 갈 것인지 정했다.
  5380.  
  5381. 백소고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편지는 잘 접어서 품 안에 넣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산’이 있는 곳을 보면서. 백소고는 이성민과 헤어지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5382.  
  5383. 도망치라고 했던 말.
  5384.  
  5385. “…그건 내가 했어야 할 말이야.”
  5386.  
  5387. 백소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므쉬의 산 쪽으로 향했다.
  5388.  
  5389. *
  5390.  
  5391. 트라비아를 목적지로 두기는 했지만 크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아직 겨울까지는 시간 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5392.  
  5393. “이놈의 노숙.”
  5394.  
  5395. 루비아가 불평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모닥불에 사냥한 고기를 구우다가 루비아의 불평을 듣고 그녀 쪽을 흘겨 보았다.
  5396.  
  5397. “불만도 많으시군요.”
  5398.  
  5399. “기왕 잘 거면 지붕 아래가 좋고 침대가 좋잖아요.”
  5400.  
  5401. “엔비루스는 노숙한 적 없습니까?”
  5402.  
  5403. “주인님은 노숙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하셨죠. 언제나 마법으로 멋진 집을 지어 놓고서 그곳에서 주무셨다고요.”
  5404.  
  5405. “귀찮은 인간이로군.”
  5406.  
  5407. “무슨 말이에요?”
  5408.  
  5409. “지붕 없는 곳의 바닥에서 자도 잠은 잘 옵니다.”
  5410.  
  5411. 이성민은 그렇게 대답해 주면서 통으로 구운 토끼의 다리를 부욱 찢어 루비아에게 건네 주었다. 불만이 많은 주제에 루비아는 건네는 것은 잘 받아 먹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토끼의 다리를 잡고서 입을 벌려 물어뜯었다.
  5412.  
  5413. “언제까지 노숙할 셈이죠?”
  5414.  
  5415. “트라비아에 도착할 때까지.”
  5416.  
  5417. “여태까지 한 달을 노숙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트라비아까지는 세 달은 더 가야 할 텐데요.”
  5418.  
  5419. “압니다.”
  5420.  
  5421. “세 달 동안 노숙하시겠다고?”
  5422.  
  5423.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밥이야 사냥으로 구하면 되는 거고, 아공간 포켓에 보존식도 여분이 많습니다.”
  5424.  
  5425. “그 외에 생필품은 어쩌시려고?”
  5426.  
  5427. “다 방법이 있지요.”
  5428.  
  5429. “어쩌다가 당신 같은 사람이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된 것인지.”
  5430.  
  5431. 루비아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성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루비아를 보았다.
  5432.  
  5433. “알고 있었습니까?”
  5434.  
  5435. “애초에 숨기지도 않았잖아요?”
  5436.  
  5437. 루비아가 되물었다. 그렇게 하는 말에 반박할 말은 없었다. 루비아와 허주를 신경쓰지 않고 네블을 불러댄 것은 이성민 쪽이었으니까.
  5438.  
  5439. [나도 안다.]
  5440.  
  5441. 허주가 웅웅거렸다. 내심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허주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네블을 보고 아무 놀람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5442.  
  5443. ‘의외로 역사가 깊은 모양이군.’
  5444.  
  5445. 400년 전에 활동했던 허주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 시기에도 에레브리사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5446.  
  5447. ‘너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이었나?’
  5448.  
  5449. [제안은 받았지만 거절했지.]
  5450.  
  5451. “…엔비루스는 에레브레사의 회원입니까?”
  5452.  
  5453. “물론이죠.”
  5454.  
  5455. 루비아가 기운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루비아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5456.  
  5457. “에레브리사는 대체 뭡니까?”
  5458.  
  5459. 허주와 루비아. 둘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5460.  
  5461.  
  5462.  
  5463. ======================================
  5464. < 허주-5 >
  5465.  
  5466.  
  5467.  
  5468. “중개 길드죠.”
  5469.  
  5470. 이상한 걸 물어보네. 루비아가 덧붙여 중얼거렸다.
  5471.  
  5472.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봅니까?”
  5473.  
  5474. 이성민은 오히려 면박을 주면서 익은 고기를 물어뜯었다. 루비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기를 야금야금 먹었다.
  5475.  
  5476. “에레브리사가 중개 길드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5477.  
  5478. “…뭐. 그들이 여러 가지로 신비롭고 괴상한 집단이기는 하죠.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용병 길드는 길드 안에 용병단이 나뉘어져 있고, 마법사 길드는 길드 안에 학파와 마탑이 나뉘어져 있어요. 그것은 대부분의 길드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죠. 하지만 정보 길드는 아니에요.”
  5479.  
  5480. 그것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고 있다. 정보 길드는 크고 작은 것을 따지자면 수십 수백 개나 존재한다. 특히 대도시에는 정보만을 취급하는 길드만 해도 대여섯 개는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정보’를 취급하는 것은 정보 길드 뿐만이 아니다. 도시 내에 존재하는 도적 길드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고, 무림 문파 중에서는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여러 문파들도 정보를 취급하고 있다.
  5481.  
  5482. “에레브리사는 목적과 사상이 다른 ‘모든’ 정보 길드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어요. 그것 뿐 만이 아니죠. 상인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다양한 상인 조합들과 개인 상인들이 보유한 모든 물건들도 종합해서 거래를 주선해주죠. 이것은 고위 귀족이나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5483.  
  5484. 이성민은 묵묵히 루비아의 말을 들었다. 에레브리사는 단순한 중개 길드가 아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집단들을 저렇게 종합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대한 땅덩이에 존재하는 왕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5485.  
  5486. [폭력이다.]
  5487.  
  5488. 허주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5489.  
  5490. [에레브리사의 중개인들은 거리와 공간을 무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절대로 인간은 아닌 존재들이야. 경이적이고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권력도 지위도 의미가 없다. 아무리 경호가 출중하더라도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 목을 딸 수 있는 것이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이라는 놈들이다.]
  5491.  
  5492. “…그런 능력을 가진 자들이 왜 중개 길드 따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지?”
  5493.  
  5494. [400년 전.]
  5495.  
  5496. 허주가 내뱉었다.
  5497.  
  5498. [당시의 이 어르신은 악명이 꽤 높았다. 요괴라는 것은 그런 존재야. 본성이 악명을 불러오지. 모든 인간이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돼지를 먹는 것에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 요괴도 그렇다. 요괴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흉폭하고 이기적인 놈들이라 사고를 많이 치지. 이 어르신도 그랬고.]
  5499.  
  5500. 그러니 토벌 당한 것이다.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전해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400년 전에 남쪽 지역에서 군림한 허주는 경외 받는 대요괴였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토벌된 것은 아니다. 그만한 악행을 벌였기에 토벌 된 것이다.
  5501.  
  5502. [장담하건데, 그때의 에리아에서 나보다 강한 존재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드래곤조차 이 어르신을 어찌 하지 못했지!]
  5503.  
  5504. 그건 조금 오버한 것 같은데. 이성민은 내심 그런 생각을 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5505.  
  5506. [그런데 말이다. 이 어르신을 찾아 왔던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나조차도 쉬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런 놈이 대뜸 찾아와 자기들은 중개 길드인데, 나를 회원으로 받고 싶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 그래서 물어봤다.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중개 길드 따위를 하는 것이고, 왜 나를 회원으로 받고 싶은 것이냐고.]
  5507.  
  5508. “…그래서?”
  5509.  
  5510.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변수’라고 말이야.]
  5511.  
  5512. “그게 뭐냐?”
  5513.  
  5514. [존재 자체가 세상 전체에 변수가 될 만한 존재. 에레브리사의 회원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어르신의 강함은 그를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원권을 제안한 것이라고 하더군. 바꿔 말하자면, 에레브리사라는 놈들은 세상에서 변수가 될 만한 존재들을 회원으로 두고서 지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놈들이 그를 통해 무엇을 획책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5515.  
  5516. 므쉬의 산에서 에레브리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에레브리사의 중개인은 이성민에게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다. 당시의 이성민은 단순히 그것을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5517.  
  5518. [놈들은 기묘하다. 그래서 내가 놈들의 회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뭔지도 알 수 없는 놈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거든.]
  5519.  
  5520. “편리하기는 한데.”
  5521.  
  5522. [아마 그 소천마라는 계집도 에레브리사의 회원일 것이다.]
  5523.  
  5524. 허주가 덧붙였다.
  5525.  
  5526. [그 정도의 강함과 성장력을 본다면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그런데… 이게 참 웃긴 말이란 말이야. 왜 변수라는 거지? 정해져 있는 상황도 아닌데 왜 변수라는 단어를 붙인 것일까? 무엇에 대한 변수라는 것이지?]
  5527.  
  5528. 허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성민도 그에 대한 의문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따위는 없었다. 네블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네블이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5529.  
  5530.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군요.”
  5531.  
  5532.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5533.  
  5534. 이성민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네블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었다.
  5535.  
  5536. “…부르지는 않았는데?”
  5537.  
  5538. “셀게루스님의 작업이 끝나서, 그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5539.  
  5540. “마침 잘 되었군요.”
  5541.  
  5542. 이성민은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쯥 빨아내면서 네블을 바라보았다.
  5543.  
  5544. “에레브리사는 무엇입니까?”
  5545.  
  5546. “중개 길드지요. …그 이상의 것을 알려드리기는 힘듭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5547.  
  5548.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알려 줄 수 없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힘으로 질문하여 대답을 얻을 상대도 아니다.
  5549.  
  5550. “까다로우시군요.”
  5551.  
  5552. “그렇다고 해서 회원님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맹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5553.  
  5554. 네블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공간을 갈랐다. 그 너머에는 셀게루스가 서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꾀죄죄한 몰골을 한 셀게루스는, 피로가 누적된 것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고 뺨이 조금 파여 있었다.
  5555.  
  5556. “분위기가 왜 그래?”
  5557.  
  5558. 셀게루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고 네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던 셀게루스가 입술을 벌려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5559.  
  5560. “뭐. 내가 알바는 아니지. 네가 주문했던 것들이 완성됐어. 형태는 지난번에 만들었던 창을 따랐고.”
  5561.  
  5562. 네블이 셀게루스 쪽으로 이동해 창과 마갑을 받아 왔다. 방금 전까지는 에레브리사에 대한 의문이 뒤섞여 기분이 심란했으나, 네블이 받아 온 창을 본 순간. 이성민의 마음속에서 그런 심란함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만큼 셀게루스가 만든 창은, 이성민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5563.  
  5564. “오리하르콘은.”
  5565.  
  5566. 셀게루스가 입을 열었다.
  5567.  
  5568. “절대로 부서지지 않아. …라고 얼간이들이 떠드는데. 그건 틀린 말이야. 이 세상에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어. 그렇다고 해서 오리하르콘이 무른 것은 아니지. 견고함을 본다면 오리하르콘만한 금속은 몇 존재하지 않아. 드래곤의 비늘이나 뼈 이상의 강도를 가진 것이 오리하르콘이지.”
  5569.  
  5570. 이성민은 네블에게서 창을 건네받았다. 길이는 이전에 쓰던 창보다 길어졌다. 처음 그 창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서 이성민의 몸이 커진 탓이다.
  5571.  
  5572. ‘가벼워.’
  5573.  
  5574. 하지만 무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성민은 창간을 잡고서 가볍게 힘을 줘 보았다. 휘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5575.  
  5576. “완전히 파괴되면 방법이 없지만, 그 이외의 손상은 마력…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내공을 불어 넣는 것으로 수복이 돼. 날을 세우거나 보수할 필요도 없어. 땅에 파묻고 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리하르콘이야.”
  5577.  
  5578.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은 많지 않습니다. 드워프 대장장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고, 드워프를 제외한 대장장이 중에서는 마이스터의 칭호를 가진 셀게루스님만이 오리하르콘을 다룰 수 있지요.”
  5579.  
  5580. 네블이 덧붙였다. 대놓고 띄워주고 있음에도 셀게루스는 자부심 따위는 내비치지 않았다.
  5581.  
  5582. “그럼 뭐해? 다크 엘프라고 제대로 취급도 해주지 않는데.”
  5583.  
  5584. 오히려 그렇게 투덜거린 뒤에, 셀게루스가 말을 덧붙였다.
  5585.  
  5586. “오리하르콘은 마력이나 내공을 미스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받아들이기도 해. 직접 써보면 무슨 느낌인지 감이 올 거야. 그리고 갑옷도.”
  5587.  
  5588. 셀게루스가 손을 뻗어 마갑을 가리켰다.
  5589.  
  5590. “창을 만들고도 오리하르콘이 꽤 많이 남아서, 갑옷의 가변 마법이 새겨진 핵을 중심으로 해서 오리하르콘을 삽입했어. 덧씌우는 정도에 그쳤지만 대부분의 마법에 대해서는 안티 매직이 기능할 거야. 하지만 너무 신뢰하지는 마. 인챈트로 새겨 넣은 안티 매직은 아니니까.”
  5591.  
  5592. “인챈트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5593.  
  5594. “안 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오리하르콘은 뛰어난 금속인 만큼 인챈트 난이도도 높아. 대마법사 급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내지. 그리고 인챈트라는 것은 금속의 질을 떨어트려. 오리하르콘 정도의 소재라면 인챈트를 넣는 것이 오히려 손해야.”
  5595.  
  5596. 그 쪽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셀게루스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셀게루스는 크게 숨을 내뱉고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5597.  
  5598. “…장담하건데, 그건 내 대장장이 인생 중에 최고의 역작이라고 할 만 해. 소재도 내가 여태까지 만져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좋았고. 네가 드래곤과 싸우려 들지 않는 한 부숴지는 일은 없을 거야.”
  5599.  
  5600. “…감사합니다.”
  5601.  
  5602. “감사는 무슨. 이름은 안 붙였으니까, 붙이고 싶거든 네가 붙이도록 해. 나는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5603.  
  5604. 셀게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 버렸다. 네블은 열어 놓은 공간을 닫고서 웃는 얼굴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5605.  
  5606. “마음에 드십니까?”
  5607.  
  5608. “네.”
  5609.  
  5610. “저희를 의심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에레브리사는 회원님들의 편의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611.  
  5612. 네블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5613.  
  5614. “…저는 이성민 회원님의 담당 중개인입니다. 회원님의 전속이죠. 비록 제가 에레브리사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에레브리사의 방침보다 회원님을 우선할 수도 있습니다.”
  5615.  
  5616. 아까의 질문 같은 것에는 아니지만. 네블은 그렇게 덧붙인 뒤에 꾸벅 머리를 숙였다.
  5617.  
  5618. “다음에 불러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5619.  
  5620. 네블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네블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주가 투덜거렸다.
  5621.  
  5622. [저 녀석 호모인가?]
  5623.  
  5624. “뭔 말을 씨발…”
  5625.  
  5626. 허주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성민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5627.  
  5628. [취향은 다양한 법이다. 네 얼굴이 못난 편은 아니니,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5629.  
  5630. “개소리 좀 하지 마.”
  5631.  
  5632. [어찌 되었든. 호의를 품은 조력자를 곁에 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태도가 애매한 놈이기는 하지만.]
  5633.  
  5634. 허주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마갑을 입어 보았다. 상체를 감싼 마갑은 이전보다 착용감이 훌륭했다. 거기에 내공을 불어넣으니, 마갑이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 전체를 감싼다. 이성민은 마갑이 덮은 몸을 움직여 보면서 내심 감탄을 흘렸다.
  5635.  
  5636. ‘편해.’
  5637.  
  5638. 이전의 마갑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맨 몸과 비교한다면 저항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저항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민의 근력을 생각한다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5639.  
  5640. 거기에 호신강기를 일으켜 본다. 콰아아! 순식간에 솟구친 호신강기가 이성민의 몸 전체를 덮었다. 그것은 마치 자색의 불꽃이 몸을 집어삼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성민은 기겁하고서 내공의 출력을 줄였다.
  5641.  
  5642. “내공이 오리하르콘을 거치면서 증폭된 거예요.”
  5643.  
  5644. 루비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5645.  
  5646. “그것이 오리하르콘이 최고의 소재라고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죠. 적은 내공이나 마력으로 그 이상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5647.  
  5648. 확실히 그랬다. 이전의 마갑을 입고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을 때에는 이 정도로 출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내친 김에 이성민은 창을 잡았다. 창간을 꽉 잡고 내공을 불어 넣자, 곧바로 자색의 강기가 창 전체를 뒤덮었다. 오리하르콘을 덧칠한 마갑과는 다르게 창은 오리하르콘 통짜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강기를 뽑아내는 효율이 호신강기보다 훨씬 뛰어났다.
  5649.  
  5650. [몸뚱이로 안 되면 기물의 도움을 받아야지.]
  5651.  
  5652. ‘비꼬는 거냐?’
  5653.  
  5654. [성격이 배배 꼬인 새끼로군. 기물을 쓰는 것이 부끄럽냐?]
  5655.  
  5656. ‘그건 아니지만.’
  5657.  
  5658. [구라 치지 마라.]
  5659.  
  5660. 허주가 낄낄 웃으며 쏘아 붙였다.
  5661.  
  5662. [가진 것을 제대로 쓰는 것도 중요한 것이?야. 네놈의 심장이나 갑옷, 무기. 모든 것들이 결국 네 것이니까. 안 쓰겠답시고 묵히면서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말고 잘 써라. 잘.]
  5663.  
  5664. 허주가 충고하듯이 말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들으면서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몸 안에 박혀있는 검은 심장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싫지는 않았다. 결국 이 심장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5665.  
  5666. ‘그래서 프레스칸을 만나야 하는 거야.’
  5667.  
  5668. 써먹으려고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5669.  
  5670. ======================================
  5671. < 프레데터-1 >
  5672.  
  5673.  
  5674.  
  5675.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5676.  
  5677. 바깥에는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 섞인 북쪽의 바람은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살결조차 베어낼 정도로 날카로워 매섭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그 바람에 대한 대비책인지 두꺼워 보이는 로브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5678.  
  5679. “어서 옵쇼.”
  5680.  
  5681. 여관에 손님은 없었다. 벽난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여관 주인은 눈치 빠르게도 머리를 일으켰다. 그는 오른 손으로는 졸리 눈을 부비면서 왼 손으로는 어깨를 끌어안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5682.  
  5683. “일단 문을 조금 닫는 것이 어떻수?”
  5684.  
  5685. 열고 들어 온 문은 바깥바람에 요동치고 있었다. 이성민은 손을 들어 문을 밀어 닫아버렸다.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는 것을 보고 여관 주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5686.  
  5687. “사냥꾼은 아닌 모양이군.”
  5688.  
  5689. 여관 주인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뒤로 넘겼다. 여관 주인은 하얗게 질린 이성민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5690.  
  5691. “커피를 드릴까? 아니면 뜨거운 물? 우유? 스프도 있기는 한데.”
  5692.  
  5693. “스프로 주십시오.”
  5694.  
  5695. “저는 우유가 좋아요.”
  5696.  
  5697. 이성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루비아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주문했다. 여관 주인은 루비아의 머리 위에 솟아나 있는 고양이 귀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5698.  
  5699. “수인이라니. 이 근방에서는 보기 힘든데. 노예 상인이쇼?”
  5700.  
  5701. “아닙니다.”
  5702.  
  5703. 이성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루비아는 여관 주인이 한 말에 조금 마음이 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발작하지는 않았다. 수인이라는 존재는 그렇다. 엘프야 워낙에 보기 드물고, 긴 세월을 살아가는데다가 정령과 마나의 사랑을 받는다. 모든 엘프는 뛰어난 정령사고 마법사며 궁수고 검사다. 모든 부호들이 엘프 노예를 갖는 것을 꿈꾸지만, 엘프를 노예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5704.  
  5705. 하지만 수인은 다르다. 그들은 엘프보다 약하다. 엘프보다 숫자도 많다. 비교적 노예로 삼기 쉬운데다가 복종심을 끌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편도 아니다. 그 ‘어렵지 않다’는 것이 가학적인 폭력을 통해 강제로 박아 넣는 것일 뿐이지.
  5706.  
  5707. “우선 여기 앉아 계시고.”
  5708.  
  5709. 여관 주인은 벽난로 앞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5710.  
  5711. “뜨거운 스프와 우유. 곧 가져다 드릴 테니 기다리고 계쇼.”
  5712.  
  5713. 여관 주인은 몸을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비아가 후다닥 벽난로 앞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서 숨을 내뱉었다.
  5714.  
  5715. “따지고 보면 난 수인이 아니지만요.”
  5716.  
  5717. 벗은 로브를 대충 뒤에 던져두고서 루비아가 쫑알거렸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곁에 와 의자에 앉았다. 루비아는 엔비루스가 만들어낸 사역마다. 수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것은 어디까지나 엔비루스의 취향일 뿐이지, 루비아가 수인인 것은 아니다.
  5718.  
  5719. “굳이 여관으로 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5720.  
  5721. “갑자기 바람이 강해졌잖아요.”
  5722.  
  5723. “당신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5724.  
  5725. “그래도 저는 바람 쌩쌩 부는 곳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아요.”
  5726.  
  5727. 이성민은 한서불침을 이루었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여관에 들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루비아가 강경하게 주장한 탓에 이 여관에 들르게 되었다.
  5728.  
  5729. “머지않아 트라비아에 도착할 거예요. 트라비아는 혈천마가 군림하기 이전부터 사마외도와 흑마법사, 그리고 인외의 땅이었죠. 솔직히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인데.”
  5730.  
  5731. “어쩔 수 없습니다.”
  5732.  
  5733.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로브를 벗었다.
  5734.  
  5735. “북쪽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혈천마라는 누름돌은 무게를 잃었고, 힘을 가진 마인들은 군림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트라비아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고.”
  5736.  
  5737. 이곳까지 오면서, 네블을 통해 트라비아의 사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전해 들었다. 혈천마가 트라비아에 군림했을 적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적어도 그는 정도를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5738.  
  5739. 하지만 혈천마가 위지호연에게 패한 이후.
  5740.  
  5741. 무인이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혈천마는 트라비아에 군림할 정도의 거인이었으나, 팔이 잘리고 혈천맹이 와해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트라비아에 법은 없다는 것이다. 성주는 트라비아를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고 트라비아를 떠나 별장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치안이 사라진 트라비아는 온갖 범죄가 들끓어대고 있었다.
  5742.  
  5743.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림맹도 그쪽을 주시하고 있답니다.”
  5744.  
  5745. “…신령이라고 했었죠? 북쪽,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 인연이 있다면 귀인과 만나게 된다.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에.”
  5746.  
  5747. 루비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5748.  
  5749.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그런 진위 여부도 확실치 않은 말을 따라 이 멀고 위험한 곳까지 오다니.”
  5750.  
  5751. [애매하지는 않아.]
  5752.  
  5753. 마갑이 웅웅거리더니 허주가 루비아에게 쏘아 붙였다.
  5754.  
  5755. [신령이라는 것은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르고 꿍꿍이도 알 수 없는 존재긴 하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놈들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보통은 그렇게 된다.]
  5756.  
  5757. “그 말조차 애매하네요.”
  5758.  
  5759. [원래 그 새끼들이 그런 놈들이야. 놈들은… 운명을 엿보지. 아예 북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북쪽에 온 이상 신령이 말한 ‘만남’은 반드시 일어난다.]
  5760.  
  5761.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이성민도 긴가민가하기는 했다. 북쪽에서 만년설이 녹지 않는 곳이 한 두 군데도 아니고, 겨울이 가장 얼어붙을 때라고 해 봐야 언제인지도 모른다. 이곳까지 오기 한참 전에 루비아가 왜 트라비아로 가는 것이냐고 캐묻기에 대답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그냥 가면 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여 대책 없이 이곳까지 오기는 했다.
  5762.  
  5763. “어디로들 가쇼?”
  5764.  
  5765. 큼직한 머그컵 두 개를 들고 온 여관 주인이 물었다. 루비아는 양 손으로 머그컵을 받고서 후후 입 바람을 불며 우유를 마셨다.
  5766.  
  5767. “트라비아로 갑니다.”
  5768.  
  5769. “저런.”
  5770.  
  5771. 이성민의 대답에 여관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5772.  
  5773.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 군. 왜. 당신들도 그곳에서 이름이라도 떨치고 싶은 거요?”
  5774.  
  5775. “그건 아닙니다만.”
  5776.  
  5777. “뭐, 내가 오지랖을 떨만한 입장은 아니지. 조심들 하쇼. 특히 그쪽 수인 아가씨.”
  5778.  
  5779. 여관 주인이 턱짓으로 루비아를 가리켰다.
  5780.  
  5781. “트라비아는 법이 존재하지 않게 된 곳이야. 색마도 많고 인신공양을 하는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많다더군. 도시 안에 들어간다면 위험이 엮어 올 지도 몰라.”
  5782.  
  5783.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5784.  
  5785. 루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입에 들어 온 스프를 우물거렸다. 잠시 뒤에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5786.  
  5787. “안 어울리게 친절하시군요.”
  5788.  
  5789. “응?”
  5790.  
  5791. “독을 탄 스프를 주는 것치고는 말입니다. 꼴같잖은 위선이야. 아니면 기만인가?”
  5792.  
  5793.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들고 있던 머그컵을 벽난로의 불길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 말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변했다.
  5794.  
  5795. “…이거야 원.”
  5796.  
  5797. 여관 주인이 투덜거렸다. 만독불침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조잡한 독은 이성민의 몸을 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입맛이 더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이성민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퉤하고 침을 뱉었다.
  5798.  
  5799. “도, 독?”
  5800.  
  5801. 루비아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발이 풀린 것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5802.  
  5803. “치명적인 독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당신이 마신 것은.”
  5804.  
  5805. 수인은 판매가치가 있는 상품이다. 여관 주인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5806.  
  5807.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5808.  
  5809. “사정은 무슨 사정…!”
  5810.  
  5811. 루비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이성민의 말대로 루비아가 복용한 것은 치명적인 독은 아니었다. 단순히 몸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성민은 숨을 헐떡거리는 루비아를 힐긋 보고서 여관 주인에게 손을 뻗었다.
  5812.  
  5813. “해약은 없습니까?”
  5814.  
  5815. “주면 살려줄 텐가?”
  5816.  
  5817. “거래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죽이고 몸을 뒤져 해약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 나는 지금 당장 해약을 구할 방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5818.  
  5819. 에레브리사의 네블을 소환해 해약을 구입하겠다고 하면 된다. 치명적인 독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5820.  
  5821. “…그렇군.”
  5822.  
  5823. 여관 주인은 빠르게 포기했다. 마실 것에 독을 타고, 그것이 실패한 이상 칼자루는 저들에게 있다.
  5824.  
  5825. “이 일을 하면서 보는 눈은 꽤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5826.  
  5827. 여관 주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 이성민 쪽으로 내밀었다.
  5828.  
  5829. “안심하쇼.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좆 되보라는 심정으로 독약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5830.  
  5831. 하지만 이성민은 그 약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루비아가 그런 이성민을 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5832.  
  5833. “뭐, 뭐하는 거에요? 왜 약을…”
  5834.  
  5835. “뭔지도 알 수 없는 약을 주사할 수는 없죠.”
  5836.  
  5837. “진짜 해독제인데…”
  5838.  
  5839. “그렇다고 마냥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오기 싫다는 나를 이 여관으로 데리고 온 것은 루비아님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독도 아니니 그냥 잠깐 앉아 계십시오.”
  5840.  
  5841. “이 개새끼야…!”
  5842.  
  5843. 루비아가 욕설을 외쳤지만 이성민은 듣지 않았다. 그는 여관 주인을 올려 보면서 물었다.
  5844.  
  5845.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5846.  
  5847. “…수인은 돈이 되니까.”
  5848.  
  5849. “그게 전부입니까?”
  5850.  
  5851. “…이 근방은 귀랑문의 영역이요. 매달 할당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트라비아가 그 모양 그 꼴이 되면서 오는 손님이 없어졌지.”
  5852.  
  5853. “그래서 수인을 팔아 돈을 장만하려고 했다?”
  5854.  
  5855. “이해해 주쇼.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5856.  
  5857. “악의 없는 사람에게 해를 주면서 제 보신을 하려 했는데. 그것을 이해해 달라? 이거 참 이기적인 분이시군.”
  5858.  
  5859. 이성민은 웃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살기에 여관 주인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5860.  
  5861. “이런 식으로 몇 명을 넘겼습니까?”
  5862.  
  5863. “이번이 처음…”
  5864.  
  5865. “거짓말이군.”
  5866.  
  5867. 이성민이 뱉은 말에 여관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우물쭈물하던 여관 주인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순간.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주인의 머리가 터졌다. 이성민은 쓰러진 시체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루비아를 부축해 몸을 일으켰다.
  5868.  
  5869.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 하기는…!”
  5870.  
  5871. “독약일지도 몰라서,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5872.  
  5873. “됐어요!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니깐.”
  5874.  
  5875. 루비아는 그렇게 내뱉고서 이성민의 몸을 밀쳤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루비아를 보면서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의자를 끌어다가 루비아를 앉혔다.
  5876.  
  5877. [위에 인기척이 있다.]
  5878.  
  5879. 허주가 웅웅거렸다.
  5880.  
  5881. [손님은 아닌 것 같고. 네가 죽인 남자의 가족인 것 같군.]
  5882.  
  5883. “저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았겠지.”
  5884.  
  5885. [죄책감은 없나 보군.]
  5886.  
  5887. “느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독에 당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루비아님은 팔려서 성노리개가 되거나 마법실험의 제물이 되었겠지.”
  5888.  
  5889. “엿 같은 이야기 하지 마세요.”
  5890.  
  5891. 루비아가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천장을 올려 보았다. 인기척은 이성민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러 가지는 않았다.
  5892.  
  5893.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놈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야.]
  5894.  
  5895. “내가 자비라도 베풀었어야 했다는 거냐. 내가 용서해 주었다고 해서 저 남자가 개심했을까?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가족이 살겠다고 다른 이들에게 독을 먹일지도 모르는데?”
  5896.  
  5897. [그럴 지도 모르지. 개심했을 지도 모르고.]
  5898.  
  5899. “확률이 반반이라고 해서 내가 자비를 베풀 이유는 되지 않아.”
  5900.  
  5901. [여기서 저 남자를 죽여 앞으로의 일을 방지하는 것이 네놈의 협의라는 것이냐?]
  5902.  
  5903. “협의는 무슨. 그런 대단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그냥 자비를 베풀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대요괴라는 놈이 이제 와서 인정에 눈이라도 뜬 거냐?”
  5904.  
  5905. [으하하하! 그럴 리가.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너라는 놈이 어떤 인간인지 말이야. 위에 있는 놈들은 어쩔 테냐? 저 녀석들도 따지고 보면 저 남자의 공모자 아닌가?]
  5906.  
  5907. “나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내가 찾아가서 죽일 이유는 없지.”
  5908.  
  5909. 이성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루비아를 보았다. 루비아는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이성민에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비가 풀린 루비아가 몸을 일으켰다.
  5910.  
  5911. “이놈의 고양이 귀를 숨길 수도 없고.”
  5912.  
  5913. “우선 몸이나 숨기십시오. 귀찮은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으니까.”
  5914.  
  5915. “…이거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마력 소모가 얼마나 큰데.”
  5916.  
  5917. “지금 마력이 없는 거도 아니잖습니까?”
  5918.  
  5919. 그 말에 루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빛의 구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성민은 루비아가 벗어 놓은 로브를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고, 자신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위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괜히 마주쳐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성민은 여관을 나섰다.
  5920.  
  5921. “마을에 괜히 왔어.”
  5922.  
  5923. [그거 참 죄송하네요. 제가 들어가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5924.  
  5925. “알면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5926.  
  5927. 이성민의 대답에 루비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바람은 여관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매서워져 있었다. 이성민은 로브 모자를 뒤집어쓰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바람 소리 너머에서 그런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 그런 외침도 함께. 이성민은 뒤를 힐긋 보았다. 열린 문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직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부릅 뜬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5928.  
  5929. 나올 때 챙긴 것인지, 소년은 식칼을 들고 있었다. 소년이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에게 덤비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고 세찬 바람에 균형을 잃어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5930.  
  5931. [저런.]
  5932.  
  5933. 허주가 혀를 찼다. 소년이 악 받친 고함을 지르며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뒤늦게 문으로 나온 중년 여자가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이성민이 죽인 남자의 부인이자 소년의 어머니인 듯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이성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5934.  
  5935. “죽여 버리겠어!”
  5936.  
  5937. 소년의 원독어린 고함을 무시하고 이성민은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을을 가로지른다. 시선이 느껴졌다.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이쪽을 살피는 경계의 시선이었다. 바람소리 너머로 늑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5938.  
  5939.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5940.  
  5941. 늑대의 울음소리는 이성민이 나간 걸음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5942.  
  5943. “이거 참.”
  5944.  
  5945.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눈발 섞인 바람은 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바람 소리에 역한 짐승의 노린내가 섞였다. 그 즉시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 손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꺼낸 창이 앞으로 향한다. 쩌엉! 큼직한 소리가 났지만 이성민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것은 눈발에 몸을 숨기고 공격을 감행한 놈이었다.
  5946.  
  5947. “고수구나!”
  5948.  
  5949.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떨어진 놈이 양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전신에 눈발을 달고 있는 놈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5950.  
  5951. “웬 개 냄새가…”
  5952.  
  5953. [라이칸슬로프로군.]
  5954.  
  5955. 허주가 중얼거렸다. ‘개 냄새’라고 한 말에 남자의 눈이 뒤집어졌다.
  5956.  
  5957. “늑대다!”
  5958.  
  5959. 그 외침과 함께 남자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근육이 우락부락 커지고 전신에 털이 돋는다. 이성민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퍼억! 순식간에 뻗은 찌르기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5960.  
  5961. “커헉!”
  5962.  
  5963. “덤빌 거면 변신부터 하고 오지 그랬어.”
  5964.  
  5965.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찌른 창에 강기를 불어 넣었다.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창이 몰려오는 내공에 반응하고 강기를 증폭시켰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몸뚱이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5966.  
  5967. “병신도 아니고.”
  5968.  
  5969. 이성민은 창을 등에 걸치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5970.  
  5971. ======================================
  5972. < 프레데터-2 >
  5973.  
  5974.  
  5975.  
  5976.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이성민은 다섯 번의 습격을 받았다. 연거푸 이어진 습격에서 이성민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5977.  
  5978. 습격한 놈들은 모두 다 라이칸슬로프, 그들 중에서도 웨어 울프였다.
  5979.  
  5980. ‘귀랑문.’
  5981.  
  5982. 여관 주인이 죽기 전에 말했던 문파 이름을 떠올린다. 이 근방을 지배하고 있는 무림 문파. 하는 짓을 보면 사파 문파일 테지만, 전생의 이성민은 귀랑문이라는 문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습격한 놈들은 그리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지만, 라이칸슬로프의 강인한 육체는 무공의 수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5983.  
  5984. “언제까지 덤벼 올 셈이냐?”
  5985.  
  5986. 마을의 끝에서. 이성민은 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성민의 앞에는 양 다리가 끊어진 라이칸슬로프가 엎어져 있었다. 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성민을 올려 보았고, 이성민은 눈바람을 손으로 밀어내면서 다시 질문했다.
  5987.  
  5988. “너희가 덤비지 않는다면 나도 굳이 너희를 찾아 싸울 생각은 없어. 그러니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떠냐.”
  5989.  
  5990. “개소리.”
  5991.  
  5992. 남자가 내뱉었다.
  5993.  
  5994. “이런 망신을 당했는데 그만두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5995.  
  5996. “처음에 먼저 덤벼 온 것은 너희잖아.”
  5997.  
  5998. “너는 우리가 다스리는 마을에서 분란을 일으켰다.”
  5999.  
  6000. 그 말에 이성민은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분란? 그것이 분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인가. 거기서 그냥 독에 당했어야 깔끔하게 끝났다는 말인가?
  6001.  
  6002. “우리는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는다. 네놈이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귀랑문은 너를 추격해 죽일 것이다. 늑대는 집요…”
  6003.  
  6004. 이성민은 더 이상 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려 놓은 창을 손으로 튕겼다. 퍼억! 쌓인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성민은 남자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6005.  
  6006. “곧 있으면 밤이 될 거예요.”
  6007.  
  6008. 루비아가 조언했다.
  6009.  
  6010.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는 대표적인 인외종이면서 밤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죠.”
  6011.  
  6012. [그건 대부분의 인외종이 그래.]
  6013.  
  6014. 허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6015.  
  6016.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된 이들은 밤과 달의 어여쁨을 받는다. 보다 강인해지고 흉포해지지. 오늘이 만월이던가?]
  6017.  
  6018. “아닙니다.”
  6019.  
  6020. [그건 다행이로군. 일이 꽤 귀찮아질 것 같아.]
  6021.  
  6022. “…그렇게 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덤벼 온 놈들의 실력은 이성민님과 비교해서 한참 떨어져요. 만월의 밤도 아닌데, 밤이 된다고 해서 그들이 이성민님을 위협할 만큼 강해질 것 같지는…”
  6023.  
  6024. [놈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6025.  
  6026. 허주가 웃는 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성민의 침묵 속에서 허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6027.  
  6028.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 놈들은 하나의 로드를 두고서 하위 개체를 만들어내지. 로드의 힘이 강할수록 그에 비롯된 개체의 힘이 강해진다.]
  6029.  
  6030. “…혈족血族이죠. 클랜이라고도 하고.”
  6031.  
  6032. [호칭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내가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가 되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느냐?]
  6033.  
  6034. “로드에게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추천하지 않았었지. 될 생각도 없었지만.”
  6035.  
  6036. [그래.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의 혈족 내 상하관계는 절대적이다. 로드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로드를 완전히 압도할 힘을 비축해야 해.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혈족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모든 것이 로드에게 통제되고 노출되니까.]
  6037.  
  6038.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당시 이성민과 함께 검귀를 쫓았던 흑마법사 김종현은, 검귀를 보고서 ‘뱀파이어로서의 격은 낮다’라고 평가했었다. 어쩌면 그것은 검귀를 뱀파이어로 변이시킨 로드가, 초절정 고수인 검귀를 견제하기 위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6039.  
  6040. [로드는 다양한 곳에서 혈족에게 관여한다. 특히 ‘충성심’은 로드의 강함을 상징하는 것이지. 죽음조차 네게 덤빈 웨어 울프들 중에 죽음을 겁냈던 놈들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공포로 각인한 충성이 아닌, ‘격’으로 새겨 넣은 충성이야. 저 놈들을 이끌고 있는 로드가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쉬운 상대는 아닐 게다.]
  6041.  
  6042. 허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이성민도 귀랑문의 문주가 어떤 놈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성민은 네블을 불러 귀랑문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고, 네블이 정보를 가져오는 동안 마을을 완전히 벗어났다.
  6043.  
  6044. [산으로는 들어가지 마라.]
  6045.  
  6046. 마을에 인접한 곳에는 높지 않은 설산이 있었다. 허주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산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웨어 울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놈들은 인간과 짐승을 뒤섞은 놈들이다. ‘산’이라는 곳에서는 인간보다 짐승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6047.  
  6048. 산을 돌아서 방향을 잡는다. 향하는 곳은 트라비아다. 얼마 걷지 않아 네블에게서 귀랑문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6049.  
  6050. 귀랑문은 이 근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파 문파로, 그리 세력은 크지 않다고 했다. 트라비아를 비롯한 북쪽의 도시가 아닌, 크고 작은 마을들을 향해 영향을 펼치고 있었다.
  6051.  
  6052. 특징은 귀랑문에 소속된 전원이 웨어 울프라는 것. 귀랑문의 문주를 맡고 있는 것은 주원이라는 남자로,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6053.  
  6054. 그렇다고 해서 주원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6055.  
  6056. ‘프레데터.’
  6057.  
  6058. 얽힌 정보를 파악하고서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렸다.
  6059.  
  6060. 프레데터. 그것은 인간이었으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존재. 그런 인외종 중에서도 특히나 포악하고 강력한, 인외종의 안에서 정점에 가까운 괴물들의 집단. 이성민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전생의 이성민은 프레데터에 대한 소문은커녕 그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성민에게 전해 진 정보에는 프레데터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6061.  
  6062. [재수가 없군.]
  6063.  
  6064. 허주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로 안절부절하였다.
  6065.  
  6066. “…위험한 놈들입니까?”
  6067.  
  6068. “그걸 말이라고 해요?!”
  6069.  
  6070. 루비아가 꽥하고 비명을 질렀다.
  6071.  
  6072. “프레데터는 양지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음지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괴물들의 모임이에요. 설마 귀랑문이 그 프레데터와 연결되어 있었다니…!”
  6073.  
  6074.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이 프레데터에 소속되었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다만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죠.”
  6075.  
  6076. [프레데터는 위험한 놈들이야.]
  6077.  
  6078. 허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치 프레데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들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허주가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6079.  
  6080. [인외라는 것들은 오래 산다. 인간을 포기한 만큼 인간보다 오래 살아. 400년 전에도 놈들은 있었지.]
  6081.  
  6082. ‘…너도 프레데터에 소속되어 있었나?’
  6083.  
  6084. [말하지 않았냐. 요괴는 인외이면서 아인이고 몬스터라고. 요괴의 태생은 다양해. 이 어르신의 경우에는 그 근원을 인간으로 두지 않은 탓에 프레데터에 소속되지는 않았어. 하지만 놈들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
  6085.  
  6086. “…저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6087.  
  6088. 루비아가 귀를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성민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6089.  
  6090. “이 주변은 귀랑문의 영역입니다. 마을을 들르지 않았더라도 이 지역을 지났더라면 귀랑문과 시비가 붙었겠죠.”
  6091.  
  6092. “맞아.”
  6093.  
  6094.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민은 표정을 굳히고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눈바람은 시야를 가로막고 바람소리가 청각을 집어 삼킨다. 이성민은 감각을 열었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를 넘고, 몰아치는 눈발을 넘는다.
  6095.  
  6096. 그 너머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추위에 어울리는 두터운 털옷을 입고 있었다. 이성민은 말없이 창을 쥐었다. 시선만으로도 남자는 짐승 같은 난폭함을 전하고 있었다.
  6097.  
  6098. 주원.
  6099.  
  6100. 귀랑문의 문주. 남자는 자기 이름을 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민은 저 남자가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런 괴물이 문주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문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말인가.
  6101.  
  6102. “그 마을에 들르지 않았더라도 너 정도로 뛰어난 놈이라면 포착하였겠지. 건드려 볼까, 말까는 고민했겠지만. 그래서… 넌 누구냐?”
  6103.  
  6104. 먼 거리였지만 주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6105.  
  6106. “이성민.”
  6107.  
  6108.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기억났다. 네가 귀창이라는 놈이군. 나는 주원이다.”
  6109.  
  6110. 주원은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난폭한 눈동자와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씨는 조곤조곤했다. 주원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주원은 눈바람을 넘어 이성민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6111.  
  6112. “귀창은 정파라고 들었는데.”
  6113.  
  6114.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원은 피곤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권태로워 보인다는 말이 옳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이성민이 보았던 웨어울프들은 모두가 강인해 보이는 육체를 가진 거구였으나, 주원은 체격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축 쳐진 눈매 안쪽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무시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빛을 담고 있었다.
  6115.  
  6116. “실제로 보니 정파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 군.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사파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외에 가까워 보여.”
  6117.  
  6118. 요력의 잔재 때문일까? 이성민은 등 뒤로 넘긴 창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원을 보았다. 주원은 턱을 긁적거리면서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6119.  
  6120.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나?”
  6121.  
  6122. “모르겠는데.”
  6123.  
  6124. “너를 죽일까 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6125.  
  6126. 주원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알았다. 인간이 아닌 인외, 어쩌면 수백 년을 살았을 지도 모르는 저 웨어울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6127.  
  6128. [이름을 바꿨었군.]
  6129.  
  6130. 허주가 중얼거렸다. 이성민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마갑이 웅웅거리면서 허주의 요력이 풀려 나왔다. 주원은 치솟는 불길한 요력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6131.  
  6132. “익숙한데…”
  6133.  
  6134. [광랑狂狼.]
  6135.  
  6136. 공기가 웅웅거린다. 마갑에 빙의된 허주의 목소리가 주원에게 전해졌다. ‘광랑’이라는 이름에 주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6137.  
  6138. “…하하!”
  6139.  
  6140. 주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6141.  
  6142. “잊을 수가 없는 요력이로군. 허주. 400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6143.  
  6144. [봉인되었었다.]
  6145.  
  6146. “몸뚱이는 어디다 버리고 갑옷따위에 깃들어 있나?”
  6147.  
  6148. [내 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몰라. 소멸되었을 지도 모르지.]
  6149.  
  6150. “안쓰러운 처지가 되었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모습을 보인 거냐?”
  6151.  
  6152. 주원이 눈을 번뜩거리며 물었다.
  6153.  
  6154. [괜한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있었던 문제라고 해 봐야 대단한 일도 아니잖나.]
  6155.  
  6156. “그러니 그냥 보내 달라고?”
  6157.  
  6158. [그래.]
  6159.  
  6160. 그 말에 주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서 이성민과 허주의 요력을 번갈아 보았다.
  6161.  
  6162. “…400년이 긴 시간이기는 한가 보군. 그 허주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6163.  
  6164. [싸우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다.]
  6165.  
  6166.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주원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머리를 가로 저었다.
  6167.  
  6168. “아니. 네 말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도록 하지. 웨어 울프 몇이 죽기는 했지만 큰 손해는 아니니까.”
  6169.  
  6170. 주원은 그 말을 남기고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주원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성민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루비아가 크게 숨을 토해냈다. 이성민은 창을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6171.  
  6172. “싸웠다면 내가 졌을까?”
  6173.  
  6174. [도대체 뭔 바람이 불어 문파 따위를 굴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원… 아니, 광랑은 라이칸슬로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물이다. 프레데터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네가 싸워 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6175.  
  6176. “…하하!”
  6177.  
  6178. 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귀랑문. 대단한 소문도 들리지 않은 중소 사파인데, 그 사파의 문주인 주원이 프레데터 중 한 명이자 라이칸슬로프 중에서 손에 꼽히는 괴물이란다. 주원을 쓰러 트리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6179.  
  6180. ‘과연. 세상은 넓어.’
  6181.  
  6182.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는 주원이 떠난 곳과 정 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이 넓은 세상에는 이성민 이상 가는 강자는 아직 많았다. 이성민은 그것에 한탄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거대한 벽을 맞닥트리는 것보다는 갈 수 있는 길이 더 이어져 있다는 것이 이성민을 즐겁게 만들었다.
  6183.  
  6184. ‘북쪽.’
  6185.  
  6186. 인외와 마인들에게 점령된 땅. 저곳에서 만날 수 있는 귀인은 대체 누구인 것일까. 이성민은땀에 젖은 손을 옷깃에 문질러 닦았다. 주원과 대치하던 중에… 고여 버린 땀이었다.
  6187.  
  6188. ‘없었던 일로 한다.’ 주원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다. 설원을 넘는 동안 웨어 울프들의 습격은 없었다. 마을이 몇 개 보이기는 했지만, 전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루비아는 마을에 들르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6189.  
  6190. 덕분에 오늘도 노숙이었다. 이성민은 능숙하게 눈밭을 파헤쳐 굴을 파고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6191.  
  6192.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멀리 하고서, 이성민은 웅크려 눈을 감았다.
  6193.  
  6194. ======================================
  6195. < 프레데터-3 >
  6196.  
  6197.  
  6198.  
  6199. 귀랑문으로 돌아 온 주원은 곧바로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조명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방 한 가운데에 서서, 주원은 놓여 진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불어넣은 힘을 받아먹은 수정구가 몇 번 웅웅거렸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수정구의 진동이 멈추었다.
  6200.  
  6201. “허주를 만났다.”
  6202.  
  6203. 주원이 그렇게 말한 순간. 방 안에 희끄무레한 빛들이 나타났다. 잠깐의 침묵 끝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
  6204.  
  6205. “허주? 400년 전에 죽은 것 아니었나?”
  6206.  
  6207. “자기 말로는 봉인되어 있었다고 하던데.”
  6208.  
  6209. “하하! 봉인이라… 그래. 남쪽의 악몽이라 불리던 허주였지만, 400년 전의 토벌대는 그 허주로서도 극복하기는 힘겨웠었지. 그래도 목숨은 부지했다니 놀라운 걸.”
  6210.  
  6211. “허주가 살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왜 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6212.  
  6213. “허주는 육체를 갖지 못한 상태였어.”
  6214.  
  6215. 주원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의외였던 것인지 다들 침묵했다. 말로는 설명이 귀찮았기 때문에, 주원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주원은 자신의 기억을 뽑아다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6216.  
  6217. “호오.”
  6218.  
  6219. 누군가가 작은 감탄성을 흘렸다. 주원의 부름에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은 프레데터에 소속된 괴물들. 주원을 비롯한 오래 된 존재들은 남쪽의 악몽으로 군림하던 허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6220.  
  6221. “육체를 잃고 혼만이 남았나. 요력은 건재한 듯 싶은데… 기묘하군. 그러면서도 고작해야 인간. 아니, 인간도 아니고 갑옷에 빙의되어 존재하고 있다니.”
  6222.  
  6223. “귀창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어. 제니엘라가 몇 년 전에 혈족으로 삼았던 장난감을 죽인 놈이 그 귀창이었지.”
  6224.  
  6225. “맞아.”
  6226.  
  6227. 여성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6228.  
  6229. “아끼던 장난감은 아니었지만. 부서져서 짜증은 났었지.”
  6230.  
  6231. “허주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 귀창이라는 놈. 느낌이 기묘해. 분명 인간인데 인간 같은 느낌이 연하단 말이야.”
  6232.  
  6233. 그것은 주원도 느꼈던 것이었다. 그는 틀림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인간과 동 떨어진 느낌이 있었다.
  6234.  
  6235. “우선 지켜보도록 하지.”
  6236.  
  6237. 주원은 그렇게 판단을 내려 이성민을 보내 주었다. 거기서 이성민을 죽이려 들 수도 있었지만, 이성민이 가진 꺼림칙한 기운이나 허주의 존재도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6238.  
  6239. 갑작스레 괴물들을 부른 이유는 허주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당장 허주나 허주와 함께 있는 귀창을 건드릴 생각은 없다.
  6240.  
  6241. “아마 놈들은 트라비아로 향하는 것 같던데.”
  6242.  
  6243. “트라비아? 이곳에는 무슨 볼 일이지?”
  6244.  
  6245. 그렇게 반응한 것은 ‘제니엘라’라고 불렸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흡혈귀 중에서도 특히나 강력한 존재로서, 몇 년 전에 검귀를 혈족으로 거둔 장본인이었다.
  6246.  
  6247. “괜히 접촉하지는 마. 육체가 없다고는 했지만 허주의 요력은 진짜였다.”
  6248.  
  6249. 주원이 경고했다. 하지만 그 말에 제니엘?라는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6250.  
  6251. 회동이 끝나고서.
  6252.  
  6253. 프레스칸은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원이 보여 준 기억을 통해 보게 된 귀창이라는 놈.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은 어디까지나 기억일 뿐, 주원이 귀창을 맞닥트리면서 느낀 ‘기묘한 기운’ 까지는 모두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니 프레스칸으로서는 주원이 대체 무엇을 느낀 것인지 알지 못했다.
  6254.  
  6255. “그래. 기억났다.”
  6256.  
  6257. 프레스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프레스칸은 분노와 환희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6258.  
  6259. “빌어먹을 심장 도둑!”
  6260.  
  6261. 몇 년 전이었나. 던전에서 용병의 습격을 받았다. 그래, 그것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용병이라는 놈들은 머릿수는 많지만 그리 대단한 놈들이 아니다. 물론 모든 용병이 그런 것은 아니고, 용병들 중에서도 진정 괴물로 취급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때 던전에 왔던 용병들은 프레스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퀴벌레보다 조금 나은 버러지들 뿐이었다.
  6262.  
  6263. 아무 문제 없었다. 인과율이 비틀어진 혼과, 금색 마탑의 마탑주인 로이드만 없었어도. 프레스칸은 아무런 위험과 굴곡 없이, 그 안락한 던전에서 즐거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6264.  
  6265. ‘놈이 이곳에 오고 있다고?’
  6266.  
  6267. 프레스칸이 만들었던 심장은 두 개. 그 중 하나는 아이네가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소실되었다. 처음에는 로이드가 부숴놓았을 것이라 생각해 포기하였으나, 아이네의 이야기를 들어 그 심장을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몸에 박아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268.  
  6269. 그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분에 겨웠던가. 리치가 되면서까지 바라여 추구하던 비원, 간신히 창조한 심장이 누군지도 모를 놈의 가슴에 박혀 있다니.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심장을 도둑질한 녀석이, 던전에 들어왔던 인과율이 비틀어진 용병이었다는 것을.
  6270.  
  6271. “잡아 죽여야지.”
  6272.  
  6273. 프레스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주의 존재? 알 바가 아니었다. 400년 전에 이름을 날린 대요괴라고는 하지만 프레스칸은 400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프레데터에 소속된 괴물들이 허주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6274.  
  6275. ‘그래서 뭐 어쩌라고.’
  6276.  
  6277. 애초에 프레스칸은 프레데터라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로이드를 피해 도주한 북쪽. 사마외도와 인외가 넘쳐난다는 인외마경 트라비아. 설마 이곳
  6278.  
  6279. 트라비아에, 프레데터의 오랜 괴물인 뱀파이어 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뱀파이어 퀸에게 붙잡혀 강제로 프레데터에 가입하게 되었지만, 프레스칸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프레데터를 탈퇴할 용의가 있었다.
  6280.  
  6281. “오기만 해 봐라.”
  6282.  
  6283. 프레스칸은 있지도 않은 이빨을 가는 것을 의식하며 내뱉었다.
  6284.  
  6285. “심장을 뽑아 버릴 테니.”
  6286.  
  6287. *
  6288.  
  6289. 주원과 헤어지고서 한 달. 이성민은 트라비아를 목전에 두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트라비아의 성벽과 성문은 크고 웅장했으나,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성민은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문은 박살나 있었고, 그 주변에는 문의 잔해와 원형을 알 수 없는 시체, 그리고 핏물 따위가 눈에 파묻히거나 얼어붙어 있었다.
  6290.  
  6291. “윽…”
  6292.  
  6293. 빛의 구체가 되어 이성민의 품 안에 몸을 숨긴 루비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서 성문의 안으로 들어갔다.
  6294.  
  6295. 도시는 폐허와 닮아 있었다. 그나마 기능은 하고 있는 듯 했지만, 힐긋 보이는 사람들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저분한 부랑자와 질 나쁜 양아치들. 그들은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이성민을 힐긋거리면서도 섵불리 접근하지는 않았다.
  6296.  
  6297. “트라비아는 북쪽 제일의 대도시인데…”
  6298.  
  6299. “예전에는 그랬겠죠.”
  6300.  
  6301. 위지호연이 혈천마의 팔을 자르고서 고작해야 2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 2년 동안 대도시 트라비아는 인외마경이 되었다.
  6302.  
  6303. 이곳까지 오면서, 이성민은 트라비아라는 도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두었다.
  6304.  
  6305. 트라비아에 도착하기 전에 이성민은 귀랑문과 마찰을 빚었고,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은 인외의 집단인 프레데터에 소속된 오랜 괴물이었다. 트라비아에는 그런 주원과 비교해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늙은 괴물이 존재한다.
  6306.  
  6307. [뱀파이어 퀸과는 부딪히지 마라.]
  6308.  
  6309. 허주가 몇 번이나 했던 경고를 되풀이했다.
  6310.  
  6311. [주원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였어. 놈은 한 번 빡 돌면 통제불능의 난폭함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이성적이야.]
  6312.  
  6313. “그래 보이더군.”
  6314.  
  6315. 이성민은 조곤조곤 말을 해오던 주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6316.  
  6317. [하지만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는 그렇지 않아. 그년은 미쳤어.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야.]
  6318.  
  6319. “이미 나를 포착하고 있지 않을까.”
  6320.  
  6321. [아마 그렇겠지. 제니엘라가 미쳤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너를 어찌 하겠다고 미쳐 날뛰지는 않을 거야.]
  6322.  
  6323. “너 때문에?”
  6324.  
  6325. [이 어르신이 육체를 잃었다고는 하나 요력은 건재하다는 것을 주원에게 보여 주었다. 제니엘라가 미치기는 했지만 제 몸 보신은 철저하게 하는 년이야. 제니엘라가 너를 감시하려고는 할지 몰라도, 정말로 너를 어찌 하려고 들지는 않을 거다.]
  6326.  
  6327. 허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제니엘라가 간섭하려 들어도 제니엘라와 적대해서는 안 된다. 그 미치광이 뱀파이어 퀸은 제 몸 보신을 철저하게 한다고는 하여도, 이성민이 마찰을 일으킨다면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6328.  
  6329. [어쩌면 제니엘라가 신령이 네게 알려준 귀인일지도 모르지.]
  6330.  
  6331. 허주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매달릴 생각은 없다. 신령이 말한 ‘운명’이라는 것은 이성민이 나서서 행동하지 않아도, 북쪽에 있는 한 반드시 찾아온다. 문제인 것은 이성민이 맞닥트린 만남에서 이것이 신령이 말한 운명인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6332.  
  6333. “…우선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6334.  
  6335. “트라비아의 중심지로 갈 생각입니다.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상, 그곳이 그나마 발전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6336.  
  6337. 이 거대한 도시가 모조리 마비된 것은 아니다. 트라비아의 중심지. 그곳에는 아직까지 대도시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런 만큼, 인외마경에 걸 맞는 괴물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6338.  
  6339. 엉망인 거리를 걸으면서 시비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성민은 반박귀진을 완성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에 들어오고서는 의도적으로 기세를 내비치고 있었다. 불필요한 시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곳, 성문의 근처에 살아가는 이들은 대단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양아치와 부랑자들 뿐이다.
  6340.  
  6341. “마차.”
  6342.  
  6343.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6344.  
  6345. “도시 중앙 지구로 향하는 듯한데. 걸어서 가는 것을 수고스러울 거요. 그러니 마차를 타시오.”
  6346.  
  6347. 그렇게 말을 건 것은 지저분한 몰골의 남자였다. 이성민은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입을 열었다.
  6348.  
  6349. “개수작을 부린다면 나한테 죽을 텐데.”
  6350.  
  6351. “흐흐!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마침 나도 중앙 지구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을 거는 것 뿐이니까.”
  6352.  
  6353.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성민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평범하지는 않았다. 시선 너머에서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6354.  
  6355. 남자가 요구한 돈은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값을 지불하고서 남자를 따라갔다. 그것은 낡은 짐마차였다. 남자는 마부석 위에 오르면서 짐칸을 턱으로 가리켰다.
  6356.  
  6357. “타시오.”
  6358.  
  6359. “짐이 없는데. 중앙 지구에는 왜 가는 겁니까?”
  6360.  
  6361. “할 일이 있어서.”
  6362.  
  6363.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도로를 말이 달린다. 마차가 덜그럭거려 승차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라, 이럴 것이라면 마차를 타느니 차라리 이성민이 직접 경공으로 달리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6364.  
  6365. “트라비아에는 왜 오셨수?”
  6366.  
  6367. “대답해야 합니까?”
  6368.  
  6369. “까탈스런 분이시군. 거 대답해주기 싫으면 대답하지 마쇼.”
  6370.  
  6371.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이성민은 로브의 앞섬을 여미고서 몸을 웅크렸다. 마차가 움직이면서 눈바람이 그대로 덮쳐 왔지만 이성민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6372.  
  6373. 마차를 탄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두 발로 걸어서 도시 중앙지구로 향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남의 마차를 얻어 타서 들어가는 것이 이목이 덜 끌릴 것 같았다. 게다가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이마차를 탐으로서 귀인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연결 될 수도 있었다.
  6374.  
  6375. “거처는 정하셨소?”
  6376.  
  6377. “가서 정하면 되겠지요.”
  6378.  
  6379. “괜찮다면 우리 집은 어떠신가? 훌륭한 저택이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묵을 만한 곳이오.”
  6380.  
  6381. “됐습니다.”
  6382.  
  6383. “여관은 위험할 텐데. 그곳에는 버러지와 양아치들이 많거든. 괴물도 많고.”
  6384.  
  6385. 남자가 낄낄 웃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남자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6386.  
  6387. “말 참 많네요.”
  6388.  
  6389. 이성민의 로브 안 쪽에서 루비아가 웅웅거리면서 투덜거렸고, 이성민도 그 말에 공감했다.
  6390.  
  6391. *
  6392.  
  6393. 비록 지금의 중앙 지구는 세찬 바람은 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북쪽이 북쪽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살을 에는 추위에도 여인은 겉옷 없이 기모노만을 입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긴 비녀로 고정했고, 새하얀 목덜미를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6394.  
  6395. “술 냄새.”
  6396.  
  6397. 벌컥 문을 열고 들어 온 여인이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외풍에 흔들리는 문을 손끝으로 밀어 닫았다. 그리고 여인이 몸을 돌렸을 때, 콰삭! 집어 던진 술병이 여인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벽과 부딪친 술병이 산산조각 나 파편이 튀었지만, 여인은 그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6398.  
  6399. “꺼져.”
  6400.  
  6401. 지저분한 침대 위에 앉은 남자가 여인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여인은 일그러진 남자의 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6402.  
  6403. “어때요?”
  6404.  
  6405. 여인은 기모노의 끝자락을 잡아 올리면서 물었다.
  6406.  
  6407. “이계의 옷이라고 하던데. 예쁘지 않아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
  6408.  
  6409. “꺼지라고.”
  6410.  
  6411. 남자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내뱉는다. 그 숨결에는 술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그것은 멀찍이 떨어진 여인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으나, 여인은 그 냄새에 코를 찡그리기보다는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6412.  
  6413. 한때, 남자는 혈천마 백무선이라 불렸다. 2년 전만 해도 트라비아를 장악하여 군림하던 그였지만,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혈천마와 혈천맹은 몰락해 버렸다. 그 패배는 패배만으로 남지 않았다. 백무선은 패배의 증거로서 왼 팔이 잘린 병신이 되었다.
  6414.  
  6415. 그리고 여자는.
  6416.  
  6417. “그런 폭언으로 내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6418.  
  6419. 뱀파이어 퀸이라고 불리는 괴물이었다.
  6420.  
  6421. ======================================
  6422. < 프레데터-4 >
  6423.  
  6424.  
  6425.  
  6426. “…꺼지라고 했을 텐데. 괴물.”
  6427.  
  6428. 백무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렇게 내뱉었다. 그 말에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기만 할 뿐이지 백무선의 바람대로 꺼져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다란 기모노 자락을 흔들면서 백무선에게 다가왔다.
  6429.  
  6430. “귀여우셔라.”
  6431.  
  6432. 살의가 줄줄이 묻어나오는 시선을 보내는 백무선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백무선은 초절정, 그것도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는 격이 다른 강함을 가진 고수였다. 위지호연이라는 터무니없는 괴물이 상대가 아니었다면,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를 우습게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갖춘 것이 혈천마 백무선이라는 남자였다.
  6433.  
  6434. 하지만 지금 백무선 앞에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살아 온 인외의 괴물이었다. 인외종 중 하나인 뱀파이어라는 종에 있어서 정점에 선 괴물,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 퀸인 혈혹血惑의 제니엘라였다.
  6435.  
  6436. “지독한 패배감과 잘려서 있지도 않은 팔의 고통을 취기로 버텨내는 삶.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한때 이 대도시를 아우르던 혈천맹은 이름조차 남지 않아 흩어졌고, 그럼에도 당신을 따르던 충직한 자들은 망가져버린 당신에게 질려서 사라져버렸죠.”
  6437.  
  6438. 백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백무선을 향해 제니엘라가 다가왔다.
  6439.  
  6440. “나는 그때의. 혈천맹의 정점에서 혈천마로 날뛰던 백무선보다, 지금의 당신이 좋아요.”
  6441.  
  6442. “…하하!”
  6443.  
  6444. 제니엘라의 소곤거림에 백무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속이 비어 축 늘어진 왼팔 소매를 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6445.  
  6446. “혈천맹? 혈천마? 결국에는 꼭두각시였을 뿐이지.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로 영광스러운 기억이 아니다.”
  6447.  
  6448. “꼭두각시라니.”
  6449.  
  6450. “틀렸나? 이… 괴물아.”
  6451.  
  6452. 내뱉는 목소리에는 회한과 원독이 담겼다. 혈천마는 손을 더듬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술병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입으로 마개를 뽑아내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키고서, 혈천마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6453.  
  6454. “…혈천맹이 건재하고, 내가 혈천마라고 불렸을 때. 나는… 너라는 괴물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6455.  
  6456. “겉으로 보여주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6457.  
  6458. “너는 나를 내버려 두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를 치워버릴 수 있었으면서. 후후…! 그러니 꼭두각시인 것이지. 위에서 누가 줄을 흔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 잘났다 생각하여 꼴깝을 떨어댔으니…!”
  6459.  
  6460. 백무선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런 백무선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인외종은 한때 인간이었고, 인간이 아니게 되어 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에 걸맞는 필연적인 광기를 가지고 있다.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백무선이 보이는 적의와 망가져가는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6461.  
  6462. “몸을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6463.  
  6464. 백무선의 코앞까지 다가 온 제니엘라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백무선이 쥐고 있던 술병을 잡았고, 백무선은 두 눈에 살광을 번뜩거리며 술병을 놓았다. 그 즉시 뻗은 손이 제니엘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6465.  
  6466. 제니엘라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을 꿰뚫고 들어 온 백무선의 손을 내려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6467.  
  6468. “만족하셨나요?”
  6469.  
  6470. “…괴물 같으니…”
  6471.  
  6472. 순식간에 뻗은 백무선의 공격은 틀림없는 살초였다. 백무선은 제니엘라의 등으로 튀어나온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에 잡혀 있던 제니엘라의 심장이 퍽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6473.  
  6474. “항상 술을 마시고. 식사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러다가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요.”
  6475.  
  6476.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백무선의 손이 천천히 뽑혔다. 그 즉시 제니엘라의 가슴에 난 구멍이 메워진다. 제니엘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백무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6477.  
  6478. “복수하고 싶잖아요?”
  6479.  
  6480.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악마의 것인가. 백무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런 유혹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제니엘라는 매일, 백무선을 찾아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6481.  
  6482. “당신은 약해져 가고 있어요. 당신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다른 무엇을 더 한다고 해 봐야, 소천마 그 계집을 당해낼 수는 없어요.”
  6483.  
  6484. 백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다른 누구보다 백무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2년 전에 백무선이 상대했던 소천마는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괴물이었다. 사실 그것만이라면 백무선이 이리도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무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라고 떠받들어지던 몸이니까.
  6485.  
  6486. 하지만 다르다. 그 괴물은, 소천마는… 다르다. 2년 전. 공수를 한 번 교환한 순간 백무선은 그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서로가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진짜 천재. 부조리적일 정도의 재능을 가진 천재는 맞서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절망을 전해준다.
  6487.  
  6488. 백무선은 절망감에 먹혀 있었다. 복수… 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리 술을 퍼마셔도, 매일 꾸는 악몽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발악해도 그 괴물을 상대로 어찌할 수는 없다. 꿈 속이니까 바람대로 될 법도 한데, 꿈에서의 승부는 언제나 백무선의 처참한 패배로 끝을 맞는다. 백무선의 무의식이 ‘절대로’ 위지호연을 이길 수 없다고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6489.  
  6490. “잘린 팔. 뱀파이어가 된다면 새로 생길 거예요.”
  6491.  
  6492. 제니엘라의 손이 백무선의 등을 더듬는다. 길게 세운 두 개의 손가락이 백무선의 등을 걸어 올라가 어깨까지 오른다.
  6493.  
  6494. “당신이 가진 약함. 인간으로서의 약함이죠. 뱀파이어가 된다면…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어요. 백무선. 나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이 내 혈족이 된다면, 약속해 드리죠. 나는 당신에게 소천마 이상가는 강함을 줄 수 있어요.”
  6495.  
  6496. “…싫다.”
  6497.  
  6498. 백무선이 입을 열어 답한다. 그 말에 제니엘라는 웃음을 삼켰다. 매일매일 백무선에게 흡혈귀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마다 백무선은 거절하고 있었지만, 제니엘라는 알 수 있었다. 처음의 거절과 지금 말하는 거절에는 많은 차이가 생겨버렸음을. 절망에 먹혀 허덕거리는 백무선은 망가져가고 있었고, 머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6499.  
  6500. ‘그게 너무 좋아.’
  6501.  
  6502. 제니엘라는 몸 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웃음을 삼켰다.
  6503.  
  6504. 혈족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을 보는 것이 좋다.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해가면서 망가져가는 것이 좋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피를 빨아마시는 괴물이 되는 것을 선택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즐겁다.
  6505.  
  6506.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후의 선택을 내렸을 때, 그때 품은 비통함과 무언가에 대한 결의를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6507.  
  6508. ‘딱 거기까지야.’
  6509.  
  6510.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귓가를 혀로 핥으면서 생각했다.
  6511.  
  6512. ‘그 이후는 재미가 없어.’
  6513.  
  6514. 몇 년 전에 거두었던 늙은이도 그랬다. 검귀라고 했던가. 혈족으로 삼기 위해 제법 공을 들였지만… 막상 혈족으로 들이고 나니 재미가 없었다.
  6515.  
  6516.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제니엘라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에 넣기 전까지가 좋다. 막상 손에 넣고 나면 재미가 없어 질려버린다. 그래서 내버려 두는 것이다.
  6517.  
  6518. ‘하지만 기분은 나빴지.’
  6519.  
  6520. 제니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6521.  
  6522. 질려버렸다고는 해도 손에 넣은 장난감이었는데. 그것이 망가져 버렸다. 장난감을 망가트린 장본인이 이곳 트라비아에 오고 있다고 한다.
  6523.  
  6524. ‘뭐하는 놈인지 봐둘까.’
  6525.  
  6526. 주원이 신경쓰인다고 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6527.  
  6528. *
  6529.  
  6530. ‘하오문.’
  6531.  
  6532. 마차가 중앙지구로 들어 온다. 짐칸에 웅크리고 앉은 이성민은 그 문파에 대해 떠올렸다.
  6533.  
  6534. 하오문은 개방과 함께 꼽히는 대표적인 정보 문파다. 개방이 거지를 눈과 귀로 쓰고 있다면, 하오문은 다양한 직업군을 눈과 귀로 쓰고 있다. 마부, 기녀, 좀도둑 등. 천대받는 직업의 종사자들을 문도로 둔 것이 하오문이다. 개방은 구파일방에 소속되어 있지만 하오문은 아니다. 무림의 잣대를 들이밀어 구분한다면, 하오문은 사파에 속한다.
  6535.  
  6536. 마부가 하오문도인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부는 무공을 익혔고, 겉모습 이상 가는 실력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수상쩍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자신의 집에 묵으라고 권하는 것이 단순한 호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 트라비아는 썩어버린 인외마경의 도시이며, 다가오는 자들은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6537.  
  6538. “도착했수.”
  6539.  
  6540. 마차가 멈춘다. 중앙지구는 외곽 성벽만큼은 아니어도 높은 성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본래 트라비아의 중앙지구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 중산층 이상의 평민들이 살아가던 곳이다. 이 척박한 북쪽의 땅은 빈부격차가 심했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대우가 크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치안과 복지가 나쁜 중앙 성벽 밖에서 살아가고, 가진 자들은 성벽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6541.  
  6542.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다. 2년 전 혈천마의 패배를 기점으로 하여 트라비아에서 ‘가진 자’의 구분은 돈이 아닌 ‘힘’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폭력을 통제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모든 것이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만 많다고 해서는 그것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6543.  
  6544. 지금의 트라비아 중앙지구는, 가진 것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가진 자들과 인외의 괴물들, 사마외도의 무리들, 흑마법의 관련자들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6545.  
  6546. “여관보다는 내 집에서 묵는 것이 나을 텐데.”
  6547.  
  6548. “괜찮습니다.”
  6549.  
  6550. 이성민은 마차에서 내렸다. 중앙지구의 성문은 개방되어 있었다. 그곳에도 경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외곽성문과는 다르게 문이 박살나지는 않아 있었다.
  6551.  
  6552. “뭐… 그러시다면야. 죽지 않도록 조심하시구랴.”
  6553.  
  6554. 마부는 그렇게 말하고서 큰 소리로 웃었다. 마부와 마차가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민은 마부를 먼저 보내고서 성문으로 향했다.
  6555.  
  6556. [무슨 일로 왔는가?]
  6557.  
  6558. 성문을 지나려던 순간. 이성민의 머릿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천장의 그림자에 누군가가 은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법 높은 은신술이었지만, 육감을 가지고 있는 이성민의 이목을 숨길 수는 없었다.
  6559.  
  6560. “넌 누구냐.”
  6561.  
  6562. [읏.]
  6563.  
  6564. 이성민의 질문에 은신하고 있던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은신술을 그만두고서 이성민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6565.  
  6566. [흡혈귀로군.]
  6567.  
  6568. 허주가 중얼거렸다. 이성민의 앞에 선 남자는 새빨간 두 눈과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성민은 남자를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6569.  
  6570. “누구냐고 물었다.”
  6571.  
  6572. “…눈치가 빠른 놈이로군.”
  6573.  
  6574.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지?‘
  6575.  
  6576. “피차 대답하지 않을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너무 경계하지는 마라. 처음 보는 놈이라 궁금하여 물어본 것뿐이니.”
  6577.  
  6578. 흡혈귀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성민은 그 말의 진위를 굳이 판가름하지는 않았다. 트라비아에는 프레데터의 오랜 괴물인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가 있다. 저 남자가 제니엘라의 휘하에 있는 흡혈귀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여기서 질문할 생각은 없었다.
  6579.  
  6580. “…그러면 그냥 들어가도 될까?”
  6581.  
  6582. “얼마든지.”
  6583.  
  6584. 흡혈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묘하다는 듯이 시선을 보냈다.
  6585.  
  6586. “너는 흡혈귀가 아니겠지?”
  6587.  
  6588. “아니야.”
  6589.  
  6590. “그렇다면 라이칸슬로프인가? 짐승 냄새는 나지 않는데…”
  6591.  
  6592. “그냥 인간이다.”
  6593.  
  6594. “하하하!”
  6595.  
  6596. 이성민의 대답에 흡혈귀가 웃음을 터트렸다.
  6597.  
  6598. “너 스스로는 모르는 듯하지만. 너에게는 기묘한 느낌이 있어. 같은 인간이라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겠지만 인외라면 알아차릴 그런 느낌이.”
  6599.  
  6600.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6601.  
  6602. “뭐… 스스로 인간이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인외마경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
  6603.  
  6604. 흡혈귀는 그 말과 함께 씩 웃었다. 그리고 흡혈귀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이성민은 흡혈귀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멈췄던 걸음을 옮겨 성문을 통과했다.
  6605.  
  6606. ‘흡혈귀였던 검귀는 나에게 그런 느낌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었어. 그렇다는 것은…’
  6607.  
  6608.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원이나 방금 전의 흡혈귀가 느꼈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은 검은 심장 때문은 아니다.
  6609.  
  6610. ‘너냐?’
  6611.  
  6612. [아마 네 단전 밑바닥에 고여 있는 내 요력 때문인 듯 하군. 하긴… 인간이 요력을 가지고 있으니 묘한 느낌이 날 수밖에. 모르는 놈이라면 너를 반요라고 착각할 지도 모른다.]
  6613.  
  6614. ‘귀찮아졌잖아.’
  6615.  
  6616. 이성민은 짜증을 담아 마음 속으로 내뱉었다. 그 말에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6617.  
  6618.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인간이 요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본래라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야.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한 값이라고 생각해라.]
  6619.  
  6620. “제기랄.”
  6621.  
  6622.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그는 아직까지 허주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허주의 도움 덕분에 치명적인 위기에서 목숨을 몇 번 건졌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알 듯 모르게 구는 허주의 태도는 이성민을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6623.  
  6624. [자, 계속해서 가자.]
  6625.  
  6626. 그런 이성민의 짜증을 느끼면서도 허주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6627.  
  6628. “개새끼.”
  6629.  
  6630. 허주의 웃음소리가 얄미웠다.
  6631.  
  6632. ======================================
  6633. < 뱀파이어 퀸-1 >
  6634.  
  6635.  
  6636.  
  6637. 제니엘라는 술에 취해 잠든 백무선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본래 초절정 고수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 아무리 술을 들이켜도 취기가 올라오기도 전에 알코올을 분해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취할 수는 있다. 그렇게 취한다고 해도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취기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이 초절정 고수다.
  6638.  
  6639. 하지만 지금의 백무선은 무방비였다. 절망에 먹혀 망가져 버린 백무선은, 제 몸의 안위를 무시하고 미치광이처럼 술을 마셔대면서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6640.  
  6641. 제니엘라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의 백무선이 무방비라고 하여도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목을 물지 않는다. 제니엘라가 백무선을 유혹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섞는 것도 아니다. 제니엘라는 그런 미묘한 줄다리기 관계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아직까지 인간으로서 남고자 하는 백무선이, 절망감에 먹혔다고는 하나 한때 혈천마라 불리며 혈천맹의 정점에 섰던 백무선이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고한 행세를 떠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6642.  
  6643. 그리고 결국에 절망에 완전히 물들었을 때. 인간임을 포기하고, 시답잖은 고고함을 버리고서 주저앉아 애걸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제니엘라는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6644.  
  6645. ‘그리고 질려 버리겠지.’
  6646.  
  6647.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니엘라는 풋하고 웃었다. 목이라면 언제든지 물 수 있다. 하지만 혈족으로 삼기 위해서는, 인간이 흡혈귀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흡혈귀에게 ‘물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6648.  
  6649. 혈족으로 삼고자 흡혈한 로드의 피를 다시 마시면서 맹세해야 한다.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을.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피를 마시며 살아갈 것을 맹세해야만 인간이 흡혈귀로 변이한다.
  6650.  
  6651. [로드.]
  6652.  
  6653. 제니엘라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혈족으로 삼은 많고 많은 흡혈귀 중 하나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어차피 잠든 백무선의 얼굴을 보고 있어 봤자 재미는 없으니,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방을 나왔다.
  6654.  
  6655. “뭐야?”
  6656.  
  6657. [묘한 놈이 트라비아로 들어왔습니다.]
  6658.  
  6659. 이게 누구더라… 제니엘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카만 어둠 앞에 붉은 빛들이 화악하고 떠올랐다. 암전 된 시야에 비춰지는 붉은 빛들은 제니엘라의 혈족에 소속된 권속들이었다. 제니엘라는 그 중에서 웅웅거리면서 떨리고 있는 붉은 빛 중 하나를 의식했다. 그러자 그 권속에 대한 정보가 제니엘라의 머리에 깃들었다.
  6660.  
  6661. “아, 그래. 무카이. 너구나.”
  6662.  
  6663. 제니엘라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에는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이런 식으로 의식하게 되니 바로 누구인지 알게 된다. 분명히 중앙지구의 성문에서 감시를 맡긴 권속이었다.
  6664.  
  6665. “묘한 놈이 트라비아로 들어왔다. 어떻게 묘한 놈이었지?”
  6666.  
  6667. [이 녀석입니다.]
  6668.  
  6669. 무카이가 보았던 모든 것이 제니엘라에게 전해진다. 이것이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 같은, 권속을 혈족으로 삼는 인외종들이 갖는 유리함이었다. 혈족에 소속된 권속들은 모두가 혈족의 정점에 있는 로드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로드는 권속으로 삼은 모든 혈족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며 언제든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6670.  
  6671. “…아핫.”
  6672.  
  6673. 제니엘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무카이가 보여 준 얼굴은 제니엘라도 보았던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한 달 전. 주원이 보여 준 놈의 얼굴이다. 제니엘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6674.  
  6675.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6676.  
  6677. 제니엘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본 이성민의 얼굴을 트라비아에 있는 모든 권속들에게 보여주었다.
  6678.  
  6679. “이 녀석을 찾도록 해.”
  6680.  
  6681. 제니엘라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6682.  
  6683. “찾아서 나한테 알려. 알았지?”
  6684.  
  6685. 예, 로드. 수백의 목소리가 제니엘라의 머릿속에서 공명되었다.
  6686.  
  6687. *
  6688.  
  6689. 이성민은 거리를 걸었다. 인외마경의 도시. 트라비아 중앙지구의 거리는 뭔지 알 수 없는 불쾌한 기색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느낀다’라는 표현 보다는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6690.  
  6691. “…기분 나빠.”
  6692.  
  6693. 이성민의 품 안에 몸을 숨긴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수인은 아니었지만, 고양이 귀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기고는 있었지만,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은 루비아도 느끼고 있다.
  6694.  
  6695. [인외의 농도가 높군.]
  6696.  
  6697. 허주가 말했다.
  6698.  
  6699. [아무리 인외마경의 도시라고는 하여도, 도시 중앙지구에 이만큼의 인외가 모여있다니. 남쪽이라면 모를까 북쪽에 말이야…]
  6700.  
  6701. ‘이유가 있는 것일까? 에레브리사 쪽에는…’
  6702.  
  6703. [에레브리사의 정보라고 해 봐야 정보 길드와 정보 상인, 정보 문파의 것을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지는 마라. 유통되지 않는 정보는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할 수가 없어.]
  6704.  
  6705. 허주가 그렇게 조언했다.
  6706.  
  6707. [에레브리사는 어디까지나 중개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물건이라면 몰라도 ‘정보’는 무조건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아.]
  6708.  
  6709.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트라비아의 정보.
  6710.  
  6711. 혈천마가 패배하고 혈천맹이 와해되면서, 혈천맹이 통제하고 있던 사마외도가 머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온갖 인외종들이 유입되어 인외마경이 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6712.  
  6713. [이 많은 인외와 사마외도를 혈천마와 혈천맹이 통제했다고? 으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만약 정말로 혈천마가 그러고 있었던 것이라면, 놈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일 것이다. 그런 역량을 가진 놈이 그 소천마
  6714.  
  6715. 란 계집에게 패배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6716.  
  6717. 허주가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6718.  
  6719. [마魔는 마를 끌어 들인다. 또 요妖는 요를 끌어들이고, 괴怪는 괴를 끌어 들인다. 비틀어진 놈은 시커먼 구멍이 본다면 들어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법이야. 고양이가 상자에 몸을 처박는 것처럼 말이지. 이 도시에는 뭔가가 있다. 뭔가가 있기에 끌려오는 것이다.]
  6720.  
  6721. 허주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6722.  
  6723. [이 도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있어. 인외의 괴물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말이야.]
  6724.  
  6725. 그것이 무엇인지는 허주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6726.  
  6727.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을 살폈지만, 크게 신경쓰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민이 트라비아로 온 것은 이 도시에 큰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북쪽 중 가장 큰 면적과 가장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 있으면서, 언젠가 올 귀인과의 만남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6728.  
  6729. 그러니 트라비아에는 긴 시간 동안 체류해야만 했다. 수중에 돈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체류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호사스러운 곳에 묵을 생각은 없었다.
  6730.  
  6731. “노숙만 아니라면야!”
  6732.  
  6733. 여관에 간다는 것을 말하자 루비아가 기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성민이야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루비아는 그간 해온 장기적인 노숙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6734.  
  6735. 이성민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특징이 없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었을 때, 이성민은 겉모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6736.  
  6737. 이성민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시체‘들’이었다.
  6738.  
  6739. 여관 구석에 처박힌 시체들은 인테리어의 하나처럼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곳에 있었다. 1층의 주점에서 떠드는 이들 중 누구 하나 그 시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루비아는 시체를 본 것에 놀라 침묵했지만, 이성민도 그 시체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6740.  
  6741. “뭘 주문할 거요?”
  6742.  
  6743. 여관 주인은 우락부락한 근육의 사내였다. 이성민은 그가 외공을 익힌 고수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이성민은 바의 빈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6744.  
  6745. “가볍게 먹을 식사. 그리고 방을 구하고 싶은데.”
  6746.  
  6747. “며칠이나 묵을 생각이쇼?”
  6748.  
  6749. “예정은 없습니다.”
  6750.  
  6751. “장기 투숙객은 환영이지. 방값은 일당으로 쳐서 선불이요. 이 도시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6752.  
  6753. “저 구석에 처박힌 시체들처럼?”
  6754.  
  6755. “저런! 봐버렸나? 뭐 너무 신경은 쓰지 마시오. 지금의 이 도시에는 흔한 일이야.”
  6756.  
  6757.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낄낄 웃었다.
  6758.  
  6759. “가벼운 시빗거리에도 살인인 벌어지는 곳이 지금의 트라비아요. 저기 죽은 놈들은… 뭐였더라. 무림맹의 뭐시기들이라고 했는데. 크크! 다른 도시라면 모를까 이 도시에서 무림맹의 이름은 등을 받쳐주지 못해.”
  6760.  
  6761. “하지만 건드린다면 골치 아파질 텐데.”
  6762.  
  6763. 누가 뭐라 한들, 무림맹은 이곳 에리아에 존재하는 최대의 정파 세력이다. 구파일방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파 문파들이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다. 무림맹에 소속된 자를 건드린다는 것은 무림맹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6764.  
  6765. “나는 아무 것도 못 봤수.”
  6766.  
  6767. 여관 주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6768.  
  6769. “모두가 그렇지. 우리는 죄다 눈멀고 귀먹고 말 못하는 병신들이거든. 저?기 저… 무림맹의 뭐시깽이들이 죽기는 했는데. 저 놈들이 왜 죽은지는 모르겠다는 말이지.”
  6770.  
  6771. 여관 주인은 낄낄 웃으면서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도대체 이 도시에 무엇이 있기에 대도시 트라비아가 이렇게까지 비틀어져 버린 것일까.
  6772.  
  6773. 문이 열린다.
  6774.  
  6775. 시간이 멈췄다.. 순간 만들어진 정적 속에서 또각거리는 발소리만이 울린다. 그녀의 존재는 순식간에 공간을 압도했다. 이성민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것은 오직 이성민에게만 집중된 시선이 전한 불길함이었고, 존재만으로 전한 압도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6776.  
  6777. “와우!”
  6778.  
  6779. “아가씨, 얼마야?!”
  6780.  
  6781. 1층의 망나니들이 환호하며 떠든다. 그 시점에서 이성민은 뒤를 돌아 볼 것인지 말 것인지 갈등하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돌아보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저쪽에서 와 버릴 것이다.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6782.  
  6783. “시끄럽게.”
  6784.  
  6785. 이성민이 뒤를 보았을 때. 이성민을 제외한 여관의 모든 이들의 머리가 돌아갔다. 한 바퀴 빙글 돌아간 머리가 힘없이 떨어지고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6786.  
  6787.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6788.  
  6789.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느낌을 전해주는 상대를 만나 본 경험은 없다. 저 여자는 앞으로 걷기만 할 뿐 그 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6790.  
  6791. 그것만으로 여관에 있는 수십 명의 목을 꺾어 버렸다.
  6792.  
  6793. “여기는 너무 지저분한 곳이야.”
  6794.  
  6795. 여자가 이성민을 향해 다가오면서 입꼬리를 올린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도. 그것을 틀어 올려 고정하고 있는 비녀와, 몸에 걸치고 있는 화려한 기모노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자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6796.  
  6797. “너만 괜찮다면… 이런 곳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데.”
  6798.  
  6799.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서 이성민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6800.  
  6801. “어때? 같이 식사라도 할까?”
  6802.  
  6803. 뱀파이어 퀸. 혈혹의 제니엘라. 그녀는 이성민을 향해 고혹적인 시선을 보내며 그렇게 권유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이성민의 머리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괴물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이성민은 ‘진짜’ 위지호연이 보이는 전력을 본 적은 없었으나, 맞닥트린 것만으로도 전하는 위압감만 본다면 제니엘라는 위지호연 이상이었다.
  6804.  
  6805. [정신 차려라.]
  6806.  
  6807.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허주의 목소리였다.
  6808.  
  6809. [제니엘라는 600년 이상 살아 온 흡혈귀의 여왕이다. 이 세상에서 제니엘라 이상가는 힘을 가진 흡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
  6810.  
  6811. 허주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도 설마 이렇게 갑작스레 제니엘라와 맞닥트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6812.  
  6813. [최상위종의 흡혈귀는 존재만으로 먹잇감을 압도한다. 개구리가 뱀을 보면 얼어붙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정신을 잡아라. 자칫하다가는 네놈의 뇌와 무의식이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택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6814.  
  6815. “…괜찮아.”
  6816.  
  6817. 허주의 외침에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조금 놀랐을 뿐이다. 이성민의 정신은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과는 다르다. 600년을 살아 온 흡혈귀의 여왕이라고? 이성민은 정신 세계에서만 2100년을 보냈다.
  6818.  
  6819. 이미 몇 번이나 미쳐서 망가지고 수복되어 온 이성민의 정신은 제니엘라가 정면으로 쏘아내는 위협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에 성공했다.
  6820.  
  6821. “어머나.”
  6822.  
  6823. 그런 이성민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빙긋 웃었다.
  6824.  
  6825.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네에… 얌전히 대답한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6826.  
  6827. “…이미 식사를 주문했는데.”
  6828.  
  6829. “이런 곳에서 내오는 음식이라고 해 봐야 돼지 밥 수준이야.”
  6830.  
  6831. “그건 먹어보고서 판단하죠.”
  6832.  
  6833.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구나.”
  6834.  
  6835. 제니엘라의 웃음이 진해진다. 올라간 입 꼬리만큼 제니엘라의 이가 드러난다. 존재만으로 위협을 전하는 송곳니. 제니엘라는 입을 벌리며 말을 덧붙였다.
  6836.  
  6837. “안 갈 거야?”
  6838.  
  6839. “…어쩔 수 없군.”
  6840.  
  6841.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6842.  
  6843. “갑시다.”
  6844.  
  6845.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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