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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데터-2 >
-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 이성민은 다섯 번의 습격을 받았다. 연거푸 이어진 습격에서 이성민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 습격한 놈들은 모두 다 라이칸슬로프, 그들 중에서도 웨어 울프였다.
- ‘귀랑문.’
- 여관 주인이 죽기 전에 말했던 문파 이름을 떠올린다. 이 근방을 지배하고 있는 무림 문파. 하는 짓을 보면 사파 문파일 테지만, 전생의 이성민은 귀랑문이라는 문파에 대해 들
- 어 본 적이 없었다. 습격한 놈들은 그리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지만, 라이칸슬로프의 강인한 육체는 무공의 수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 “언제까지 덤벼 올 셈이냐?”
- 마을의 끝에서. 이성민은 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성민의 앞에는 양 다리가 끊어진 라이칸슬로프가 엎어져 있었다. 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성민을 올려 보았고, 이성민은
- 눈바람을 손으로 밀어내면서 다시 질문했다.
- “너희가 덤비지 않는다면 나도 굳이 너희를 찾아 싸울 생각은 없어. 그러니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떠냐.”
- “개소리.”
- 남자가 내뱉었다.
- “이런 망신을 당했는데 그만두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 “처음에 먼저 덤벼 온 것은 너희잖아.”
- “너는 우리가 다스리는 마을에서 분란을 일으켰다.”
- 그 말에 이성민은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분란? 그것이 분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인가. 거기서 그냥 독에 당했어야 깔끔하게 끝났다는 말인가?
- “우리는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는다. 네놈이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귀랑문은 너를 추격해 죽일 것이다. 늑대는 집요…”
- 이성민은 더 이상 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려 놓은 창을 손으로 튕겼다. 퍼억! 쌓인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성민은 남자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 “곧 있으면 밤이 될 거예요.”
- 루비아가 조언했다.
-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는 대표적인 인외종이면서 밤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죠.”
- [그건 대부분의 인외종이 그래.]
- 허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된 이들은 밤과 달의 어여쁨을 받는다. 보다 강인해지고 흉포해지지. 오늘이 만월이던가?]
- “아닙니다.”
- [그건 다행이로군. 일이 꽤 귀찮아질 것 같아.]
- “…그렇게 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덤벼 온 놈들의 실력은 이성민님과 비교해서 한참 떨어져요. 만월의 밤도 아닌데, 밤이 된다고 해서 그들이 이성민님을 위협할 만
- 큼 강해질 것 같지는…”
- [놈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허주가 웃는 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성민의 침묵 속에서 허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 놈들은 하나의 로드를 두고서 하위 개체를 만들어내지. 로드의 힘이 강할수록 그에 비롯된 개체의 힘이 강해진다.]
- “…혈족血族이죠. 클랜이라고도 하고.”
- [호칭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내가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가 되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느냐?]
- “로드에게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추천하지 않았었지. 될 생각도 없었지만.”
- [그래.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의 혈족 내 상하관계는 절대적이다. 로드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로드를 완전히 압도할 힘을 비축해야 해.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 혈족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모든 것이 로드에게 통제되고 노출되니까.]
-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당시 이성민과 함께 검귀를 쫓았던 흑마법사 김종현은, 검귀를 보고서 ‘뱀파이어로서의 격은 낮다’라고 평가했었다. 어쩌면 그
- 것은 검귀를 뱀파이어로 변이시킨 로드가, 초절정 고수인 검귀를 견제하기 위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 [로드는 다양한 곳에서 혈족에게 관여한다. 특히 ‘충성심’은 로드의 강함을 상징하는 것이지. 죽음조차 네게 덤빈 웨어 울프들 중에 죽음을 겁냈던 놈들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 공포로 각인한 충성이 아닌, ‘격’으로 새겨 넣은 충성이야. 저 놈들을 이끌고 있는 로드가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쉬운 상대는 아닐 게다.]
- 허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이성민도 귀랑문의 문주가 어떤 놈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성민은 네블을 불러 귀랑문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고, 네블이 정보를 가져오는 동안 마을을
- 완전히 벗어났다.
- [산으로는 들어가지 마라.]
- 마을에 인접한 곳에는 높지 않은 설산이 있었다. 허주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산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웨어 울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놈들은 인간과 짐승을
- 뒤섞은 놈들이다. ‘산’이라는 곳에서는 인간보다 짐승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 산을 돌아서 방향을 잡는다. 향하는 곳은 트라비아다. 얼마 걷지 않아 네블에게서 귀랑문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 귀랑문은 이 근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파 문파로, 그리 세력은 크지 않다고 했다. 트라비아를 비롯한 북쪽의 도시가 아닌, 크고 작은 마을들을 향해 영향을 펼치고 있었다.
- 특징은 귀랑문에 소속된 전원이 웨어 울프라는 것. 귀랑문의 문주를 맡고 있는 것은 주원이라는 남자로,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주원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 ‘프레데터.’
- 얽힌 정보를 파악하고서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렸다.
- 프레데터. 그것은 인간이었으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존재. 그런 인외종 중에서도 특히나 포악하고 강력한, 인외종의 안에서 정점에 가까운 괴물들의 집단. 이성민은 관자놀이를 꾹
- 눌렀다. 전생의 이성민은 프레데터에 대한 소문은커녕 그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성민에게 전해 진 정보에는 프레데터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 [재수가 없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로 안절부절하였다.
- “…위험한 놈들입니까?”
- “그걸 말이라고 해요?!”
- 루비아가 꽥하고 비명을 질렀다.
- “프레데터는 양지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음지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괴물들의 모임이에요. 설마 귀랑문이 그 프레데터와 연결되어 있었다니…!”
-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이 프레데터에 소속되었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다만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죠.”
- [프레데터는 위험한 놈들이야.]
- 허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치 프레데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그들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허주가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 [인외라는 것들은 오래 산다. 인간을 포기한 만큼 인간보다 오래 살아. 400년 전에도 놈들은 있었지.]
- ‘…너도 프레데터에 소속되어 있었나?’
- [말하지 않았냐. 요괴는 인외이면서 아인이고 몬스터라고. 요괴의 태생은 다양해. 이 어르신의 경우에는 그 근원을 인간으로 두지 않은 탓에 프레데터에 소속되지는 않았어. 하지
- 만 놈들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
- “…저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 루비아가 귀를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성민은 머리를 좌우로
- 흔들었다.
- “이 주변은 귀랑문의 영역입니다. 마을을 들르지 않았더라도 이 지역을 지났더라면 귀랑문과 시비가 붙었겠죠.”
- “맞아.”
-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민은 표정을 굳히고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눈바람은 시야를 가로막고 바람소리가 청각을 집어 삼킨다. 이성민은 감각을
- 열었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를 넘고, 몰아치는 눈발을 넘는다.
- 그 너머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추위에 어울리는 두터운 털옷을 입고 있었다. 이성민은 말없이 창을 쥐었다. 시선만으로도 남자는 짐승 같은 난폭함을 전하고 있었다.
- 주원.
- 귀랑문의 문주. 남자는 자기 이름을 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민은 저 남자가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런 괴물이 문주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문주의 자
- 리에 앉을 수 있다는 말인가.
- “그 마을에 들르지 않았더라도 너 정도로 뛰어난 놈이라면 포착하였겠지. 건드려 볼까, 말까는 고민했겠지만. 그래서… 넌 누구냐?”
- 먼 거리였지만 주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 “이성민.”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기억났다. 네가 귀창이라는 놈이군. 나는 주원이다.”
- 주원은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난폭한 눈동자와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씨는 조곤조곤했다. 주원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주원은 눈바람을 넘
- 어 이성민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 “귀창은 정파라고 들었는데.”
-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원은 피곤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권태로워 보인다는 말이 옳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이성민이 보았던 웨어울프들은 모두가 강인해
- 보이는 육체를 가진 거구였으나, 주원은 체격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축 쳐진 눈매 안쪽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무시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빛을 담고 있었다.
- “실제로 보니 정파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 군.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사파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외에 가까워 보여.”
- 요력의 잔재 때문일까? 이성민은 등 뒤로 넘긴 창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원을 보았다. 주원은 턱을 긁적거리면서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나?”
- “모르겠는데.”
- “너를 죽일까 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 주원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이성민은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알았다. 인간이 아닌 인외, 어쩌면 수백 년을 살았을 지도 모르는 저 웨어울프는 짐작조차 할
-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이름을 바꿨었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이성민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마갑이 웅웅거리면서 허주의 요력이 풀려 나왔다. 주원은 치솟는 불길한 요력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 “익숙한데…”
- [광랑狂狼.]
- 공기가 웅웅거린다. 마갑에 빙의된 허주의 목소리가 주원에게 전해졌다. ‘광랑’이라는 이름에 주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 “…하하!”
- 주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 “잊을 수가 없는 요력이로군. 허주. 400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 [봉인되었었다.]
- “몸뚱이는 어디다 버리고 갑옷따위에 깃들어 있나?”
- [내 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몰라. 소멸되었을 지도 모르지.]
- “안쓰러운 처지가 되었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모습을 보인 거냐?”
- 주원이 눈을 번뜩거리며 물었다.
- [괜한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있었던 문제라고 해 봐야 대단한 일도 아니잖나.]
- “그러니 그냥 보내 달라고?”
- [그래.]
- 그 말에 주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서 이성민과 허주의 요력을 번갈아 보았다.
- “…400년이 긴 시간이기는 한가 보군. 그 허주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 [싸우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다.]
-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주원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아니. 네 말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도록 하지. 웨어 울프 몇이 죽기는 했지만 큰 손해는 아니니까.”
- 주원은 그 말을 남기고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주원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성민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루비아가 크게 숨을 토해냈다.
- 이성민은 창을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 “싸웠다면 내가 졌을까?”
- [도대체 뭔 바람이 불어 문파 따위를 굴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원… 아니, 광랑은 라이칸슬로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물이다. 프레데터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 네가 싸워 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 “…하하!”
- 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귀랑문. 대단한 소문도 들리지 않은 중소 사파인데, 그 사파의 문주인 주원이 프레데터 중 한 명이자 라이칸슬로프 중에서 손에
- 꼽히는 괴물이란다. 주원을 쓰러 트리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 ‘과연. 세상은 넓어.’
-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는 주원이 떠난 곳과 정 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이 넓은 세상에는 이성민 이상 가는 강자는 아직 많았
- 다. 이성민은 그것에 한탄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거대한 벽을 맞닥트리는 것보다는 갈 수 있는 길이 더 이어져 있다는 것이 이성민을 즐겁게 만들었다.
- ‘북쪽.’
- 인외와 마인들에게 점령된 땅. 저곳에서 만날 수 있는 귀인은 대체 누구인 것일까. 이성민은땀에 젖은 손을 옷깃에 문질러 닦았다. 주원과 대치하던 중에… 고여 버린 땀이었다.
- ‘없었던 일로 한다.’ 주원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다. 설원을 넘는 동안 웨어 울프들의 습격은 없었다. 마을이 몇 개 보이기는 했지만, 전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루비아는
- 마을에 들르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 덕분에 오늘도 노숙이었다. 이성민은 능숙하게 눈밭을 파헤쳐 굴을 파고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멀리 하고서, 이성민은 웅크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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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데터-3 >
- 귀랑문으로 돌아 온 주원은 곧바로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조명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방 한 가운데에 서서, 주원은 놓여 진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불어넣은 힘을 받아먹은 수정
- 구가 몇 번 웅웅거렸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수정구의 진동이 멈추었다.
- “허주를 만났다.”
- 주원이 그렇게 말한 순간. 방 안에 희끄무레한 빛들이 나타났다. 잠깐의 침묵 끝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
- “허주? 400년 전에 죽은 것 아니었나?”
- “자기 말로는 봉인되어 있었다고 하던데.”
- “하하! 봉인이라… 그래. 남쪽의 악몽이라 불리던 허주였지만, 400년 전의 토벌대는 그 허주로서도 극복하기는 힘겨웠었지. 그래도 목숨은 부지했다니 놀라운 걸.”
- “허주가 살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왜 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 “허주는 육체를 갖지 못한 상태였어.”
- 주원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의외였던 것인지 다들 침묵했다. 말로는 설명이 귀찮았기 때문에, 주원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주원은 자신의 기억
- 을 뽑아다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 “호오.”
- 누군가가 작은 감탄성을 흘렸다. 주원의 부름에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은 프레데터에 소속된 괴물들. 주원을 비롯한 오래 된 존재들은 남쪽의 악몽으로 군림하던 허주를 기억하고 있
- 었다.
- “육체를 잃고 혼만이 남았나. 요력은 건재한 듯 싶은데… 기묘하군. 그러면서도 고작해야 인간. 아니, 인간도 아니고 갑옷에 빙의되어 존재하고 있다니.”
- “귀창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어. 제니엘라가 몇 년 전에 혈족으로 삼았던 장난감을 죽인 놈이 그 귀창이었지.”
- “맞아.”
- 여성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 “아끼던 장난감은 아니었지만. 부서져서 짜증은 났었지.”
- “허주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 귀창이라는 놈. 느낌이 기묘해. 분명 인간인데 인간 같은 느낌이 연하단 말이야.”
- 그것은 주원도 느꼈던 것이었다. 그는 틀림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미묘하면서도 확실하게, 인간과 동 떨어진 느낌이 있었다.
- “우선 지켜보도록 하지.”
- 주원은 그렇게 판단을 내려 이성민을 보내 주었다. 거기서 이성민을 죽이려 들 수도 있었지만, 이성민이 가진 꺼림칙한 기운이나 허주의 존재도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느꼈기
- 때문이다.
- 갑작스레 괴물들을 부른 이유는 허주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당장 허주나 허주와 함께 있는 귀창을 건드릴 생각은 없다.
- “아마 놈들은 트라비아로 향하는 것 같던데.”
- “트라비아? 이곳에는 무슨 볼 일이지?”
- 그렇게 반응한 것은 ‘제니엘라’라고 불렸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흡혈귀 중에서도 특히나 강력한 존재로서, 몇 년 전에 검귀를 혈족으로 거둔 장본인이었다.
- “괜히 접촉하지는 마. 육체가 없다고는 했지만 허주의 요력은 진짜였다.”
- 주원이 경고했다. 하지만 그 말에 제니엘?라는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 회동이 끝나고서.
- 프레스칸은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원이 보여 준 기억을 통해 보게 된 귀창이라는 놈.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은 어디까지나 기억일 뿐, 주원이 귀창
- 을 맞닥트리면서 느낀 ‘기묘한 기운’ 까지는 모두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니 프레스칸으로서는 주원이 대체 무엇을 느낀 것인지 알지 못했다.
- “그래. 기억났다.”
- 프레스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프레스칸은 분노와 환희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빌어먹을 심장 도둑!”
- 몇 년 전이었나. 던전에서 용병의 습격을 받았다. 그래, 그것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용병이라는 놈들은 머릿수는 많지만 그리 대단한 놈들이 아니다. 물론 모든 용병이
- 그런 것은 아니고, 용병들 중에서도 진정 괴물로 취급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때 던전에 왔던 용병들은 프레스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퀴벌레보다 조금 나은 버러지들 뿐
- 이었다.
- 아무 문제 없었다. 인과율이 비틀어진 혼과, 금색 마탑의 마탑주인 로이드만 없었어도. 프레스칸은 아무런 위험과 굴곡 없이, 그 안락한 던전에서 즐거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
- 을 것이다.
- ‘놈이 이곳에 오고 있다고?’
- 프레스칸이 만들었던 심장은 두 개. 그 중 하나는 아이네가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소실되었다. 처음에는 로이드가 부숴놓았을 것이라 생각해 포기하였으나, 아이네의 이야기를
- 들어 그 심장을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몸에 박아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분에 겨웠던가. 리치가 되면서까지 바라여 추구하던 비원, 간신히 창조한 심장이 누군지도 모를 놈의 가슴에 박혀 있다니.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되었다.
- 그 심장을 도둑질한 녀석이, 던전에 들어왔던 인과율이 비틀어진 용병이었다는 것을.
- “잡아 죽여야지.”
- 프레스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주의 존재? 알 바가 아니었다. 400년 전에 이름을 날린 대요괴라고는 하지만 프레스칸은 400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프레데터에 소속
- 된 괴물들이 허주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애초에 프레스칸은 프레데터라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로이드를 피해 도주한 북쪽. 사마외도와 인외가 넘쳐난다
- 는 인외마경 트라비아. 설마 이곳
- 트라비아에, 프레데터의 오랜 괴물인 뱀파이어 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뱀파이어 퀸에게 붙잡혀 강제로 프레데터에 가입하게 되었지만, 프레스칸은 기회가 된다면
- 언제든지 프레데터를 탈퇴할 용의가 있었다.
- “오기만 해 봐라.”
- 프레스칸은 있지도 않은 이빨을 가는 것을 의식하며 내뱉었다.
- “심장을 뽑아 버릴 테니.”
- *
- 주원과 헤어지고서 한 달. 이성민은 트라비아를 목전에 두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트라비아의 성벽과 성문은 크고 웅장했으나,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성민은 그것이 착각임
- 을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문은 박살나 있었고, 그 주변에는 문의 잔해와 원형을 알 수 없는 시체, 그리고 핏물 따위가 눈에 파묻히거나 얼어붙어 있었다.
- “윽…”
- 빛의 구체가 되어 이성민의 품 안에 몸을 숨긴 루비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서 성문의 안으로 들어갔다.
- 도시는 폐허와 닮아 있었다. 그나마 기능은 하고 있는 듯 했지만, 힐긋 보이는 사람들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저분한 부랑자와 질 나쁜 양아치들. 그들은 성문 안
- 으로 들어오는 이성민을 힐긋거리면서도 섵불리 접근하지는 않았다.
- “트라비아는 북쪽 제일의 대도시인데…”
- “예전에는 그랬겠죠.”
- 위지호연이 혈천마의 팔을 자르고서 고작해야 2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 2년 동안 대도시 트라비아는 인외마경이 되었다.
- 이곳까지 오면서, 이성민은 트라비아라는 도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두었다.
- 트라비아에 도착하기 전에 이성민은 귀랑문과 마찰을 빚었고, 귀랑문의 문주인 주원은 인외의 집단인 프레데터에 소속된 오랜 괴물이었다. 트라비아에는 그런 주원과 비교해서 결코
- 부족하지 않은 늙은 괴물이 존재한다.
- [뱀파이어 퀸과는 부딪히지 마라.]
- 허주가 몇 번이나 했던 경고를 되풀이했다.
- [주원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였어. 놈은 한 번 빡 돌면 통제불능의 난폭함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이성적이야.]
- “그래 보이더군.”
- 이성민은 조곤조곤 말을 해오던 주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 [하지만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는 그렇지 않아. 그년은 미쳤어.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야.]
- “이미 나를 포착하고 있지 않을까.”
- [아마 그렇겠지. 제니엘라가 미쳤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너를 어찌 하겠다고 미쳐 날뛰지는 않을 거야.]
- “너 때문에?”
- [이 어르신이 육체를 잃었다고는 하나 요력은 건재하다는 것을 주원에게 보여 주었다. 제니엘라가 미치기는 했지만 제 몸 보신은 철저하게 하는 년이야. 제니엘라가 너를 감시하려
- 고는 할지 몰라도, 정말로 너를 어찌 하려고 들지는 않을 거다.]
- 허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제니엘라가 간섭하려 들어도 제니엘라와 적대해서는 안 된다. 그 미치광이 뱀파이어 퀸은 제 몸 보신을 철저하게 한다고는 하여도, 이성민
- 이 마찰을 일으킨다면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 [어쩌면 제니엘라가 신령이 네게 알려준 귀인일지도 모르지.]
- 허주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매달릴 생각은 없다. 신령이 말한 ‘운명’이라는 것은 이성민이 나서서 행동하지 않아도, 북쪽에 있는 한 반드시 찾아온다.
- 문제인 것은 이성민이 맞닥트린 만남에서 이것이 신령이 말한 운명인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우선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 “트라비아의 중심지로 갈 생각입니다.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상, 그곳이 그나마 발전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 이 거대한 도시가 모조리 마비된 것은 아니다. 트라비아의 중심지. 그곳에는 아직까지 대도시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런 만큼, 인외마경에 걸 맞는 괴물들이 활
- 보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 엉망인 거리를 걸으면서 시비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성민은 반박귀진을 완성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에 들어오고서는 의도적으로 기세를 내
- 비치고 있었다. 불필요한 시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곳, 성문의 근처에 살아가는 이들은 대단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양아치와 부랑자들 뿐이다.
- “마차.”
-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 “도시 중앙 지구로 향하는 듯한데. 걸어서 가는 것을 수고스러울 거요. 그러니 마차를 타시오.”
- 그렇게 말을 건 것은 지저분한 몰골의 남자였다. 이성민은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입을 열었다.
- “개수작을 부린다면 나한테 죽을 텐데.”
- “흐흐!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마침 나도 중앙 지구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을 거는 것 뿐이니까.”
-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성민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평범하지는 않았다. 시선 너머에서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 남자가 요구한 돈은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값을 지불하고서 남자를 따라갔다. 그것은 낡은 짐마차였다. 남자는 마부석 위에 오르면서 짐칸을 턱으로 가리켰다.
- “타시오.”
- “짐이 없는데. 중앙 지구에는 왜 가는 겁니까?”
- “할 일이 있어서.”
-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도로를 말이 달린다. 마차가 덜그럭거려 승차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라, 이럴 것이
- 라면 마차를 타느니 차라리 이성민이 직접 경공으로 달리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 “트라비아에는 왜 오셨수?”
- “대답해야 합니까?”
- “까탈스런 분이시군. 거 대답해주기 싫으면 대답하지 마쇼.”
-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이성민은 로브의 앞섬을 여미고서 몸을 웅크렸다. 마차가 움직이면서 눈바람이 그대로 덮쳐 왔지만 이성민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 마차를 탄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두 발로 걸어서 도시 중앙지구로 향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남의 마차를 얻어 타서 들어가는 것이 이목이 덜 끌릴 것 같았다. 게다가
-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이마차를 탐으로서 귀인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연결 될 수도 있었다.
- “거처는 정하셨소?”
- “가서 정하면 되겠지요.”
- “괜찮다면 우리 집은 어떠신가? 훌륭한 저택이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묵을 만한 곳이오.”
- “됐습니다.”
- “여관은 위험할 텐데. 그곳에는 버러지와 양아치들이 많거든. 괴물도 많고.”
- 남자가 낄낄 웃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남자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 “말 참 많네요.”
- 이성민의 로브 안 쪽에서 루비아가 웅웅거리면서 투덜거렸고, 이성민도 그 말에 공감했다.
- *
- 비록 지금의 중앙 지구는 세찬 바람은 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북쪽이 북쪽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살을 에는 추위에도 여인은 겉옷 없이 기모노만을 입었다.
-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올려 긴 비녀로 고정했고, 새하얀 목덜미를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 “술 냄새.”
- 벌컥 문을 열고 들어 온 여인이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외풍에 흔들리는 문을 손끝으로 밀어 닫았다. 그리고 여인이 몸을 돌렸을 때, 콰삭! 집어 던진 술병이 여인
- 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벽과 부딪친 술병이 산산조각 나 파편이 튀었지만, 여인은 그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 “꺼져.”
- 지저분한 침대 위에 앉은 남자가 여인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여인은 일그러진 남자의 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어때요?”
- 여인은 기모노의 끝자락을 잡아 올리면서 물었다.
- “이계의 옷이라고 하던데. 예쁘지 않아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
- “꺼지라고.”
- 남자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내뱉는다. 그 숨결에는 술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그것은 멀찍이 떨어진 여인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으나, 여인은 그 냄새에 코를 찡그
- 리기보다는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 한때, 남자는 혈천마 백무선이라 불렸다. 2년 전만 해도 트라비아를 장악하여 군림하던 그였지만,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혈천마와 혈천맹은 몰락해 버렸다. 그 패
- 배는 패배만으로 남지 않았다. 백무선은 패배의 증거로서 왼 팔이 잘린 병신이 되었다.
- 그리고 여자는.
- “그런 폭언으로 내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 뱀파이어 퀸이라고 불리는 괴물이었다.
- ======================================
- < 프레데터-4 >
- “…꺼지라고 했을 텐데. 괴물.”
- 백무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렇게 내뱉었다. 그 말에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기만 할 뿐이지 백무선의 바람대로 꺼져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
- 다란 기모노 자락을 흔들면서 백무선에게 다가왔다.
- “귀여우셔라.”
- 살의가 줄줄이 묻어나오는 시선을 보내는 백무선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이 잘렸다고는 하나 백무선은 초절정, 그것도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는 격이 다
- 른 강함을 가진 고수였다. 위지호연이라는 터무니없는 괴물이 상대가 아니었다면,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를 우습게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갖춘 것이 혈천마 백무선이라는 남자였다.
- 하지만 지금 백무선 앞에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살아 온 인외의 괴물이었다. 인외종 중 하나인 뱀파이어라는 종에 있어서 정점에 선 괴물, 그것이 바로
- 뱀파이어 퀸인 혈혹血惑의 제니엘라였다.
- “지독한 패배감과 잘려서 있지도 않은 팔의 고통을 취기로 버텨내는 삶.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한때 이 대도시를 아우르던 혈천맹은 이름조차 남지 않아 흩어졌
- 고, 그럼에도 당신을 따르던 충직한 자들은 망가져버린 당신에게 질려서 사라져버렸죠.”
- 백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백무선을 향해 제니엘라가 다가왔다.
- “나는 그때의. 혈천맹의 정점에서 혈천마로 날뛰던 백무선보다, 지금의 당신이 좋아요.”
- “…하하!”
- 제니엘라의 소곤거림에 백무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속이 비어 축 늘어진 왼팔 소매를 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 “혈천맹? 혈천마? 결국에는 꼭두각시였을 뿐이지.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로 영광스러운 기억이 아니다.”
- “꼭두각시라니.”
- “틀렸나? 이… 괴물아.”
- 내뱉는 목소리에는 회한과 원독이 담겼다. 혈천마는 손을 더듬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술병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입으로 마개를 뽑아내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키고서, 혈천마는
- 크게 숨을 내뱉었다.
- “…혈천맹이 건재하고, 내가 혈천마라고 불렸을 때. 나는… 너라는 괴물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 “겉으로 보여주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너는 나를 내버려 두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를 치워버릴 수 있었으면서. 후후…! 그러니 꼭두각시인 것이지. 위에서 누가 줄을 흔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 잘났
- 다 생각하여 꼴깝을 떨어댔으니…!”
- 백무선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런 백무선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인외종은 한때 인간이었고, 인간이 아니게 되어 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에 걸맞는 필연적인
- 광기를 가지고 있다.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백무선이 보이는 적의와 망가져가는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 “몸을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 백무선의 코앞까지 다가 온 제니엘라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백무선이 쥐고 있던 술병을 잡았고, 백무선은 두 눈에 살광을 번뜩거리며 술병을 놓았다. 그 즉시 뻗은 손이 제니엘
- 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 제니엘라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을 꿰뚫고 들어 온 백무선의 손을 내려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 “만족하셨나요?”
- “…괴물 같으니…”
- 순식간에 뻗은 백무선의 공격은 틀림없는 살초였다. 백무선은 제니엘라의 등으로 튀어나온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에 잡혀 있던 제니엘라의 심장이 퍽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 “항상 술을 마시고. 식사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러다가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요.”
-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백무선의 손이 천천히 뽑혔다. 그 즉시 제니엘라의 가슴에 난 구멍이 메워진다. 제니엘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백무선의
- 어깨를 끌어안았다.
- “복수하고 싶잖아요?”
-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악마의 것인가. 백무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런 유혹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제니엘라는 매일, 백무선을 찾아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 “당신은 약해져 가고 있어요. 당신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다른 무엇을 더 한다고 해 봐야, 소천마 그 계집을 당해낼 수는
- 없어요.”
- 백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다른 누구보다 백무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2년 전에 백무선이 상대했던 소천마는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괴물이었다. 사실 그
- 것만이라면 백무선이 이리도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무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라고 떠받들어지던 몸이니까.
- 하지만 다르다. 그 괴물은, 소천마는… 다르다. 2년 전. 공수를 한 번 교환한 순간 백무선은 그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서로가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진짜 천재. 부
- 조리적일 정도의 재능을 가진 천재는 맞서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절망을 전해준다.
- 백무선은 절망감에 먹혀 있었다. 복수… 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리 술을 퍼마셔도, 매일 꾸는 악몽은 변하지 않는다. 아
- 무리 발악해도 그 괴물을 상대로 어찌할 수는 없다. 꿈 속이니까 바람대로 될 법도 한데, 꿈에서의 승부는 언제나 백무선의 처참한 패배로 끝을 맞는다. 백무선의 무의식이 ‘절
- 대로’ 위지호연을 이길 수 없다고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 “잘린 팔. 뱀파이어가 된다면 새로 생길 거예요.”
- 제니엘라의 손이 백무선의 등을 더듬는다. 길게 세운 두 개의 손가락이 백무선의 등을 걸어 올라가 어깨까지 오른다.
- “당신이 가진 약함. 인간으로서의 약함이죠. 뱀파이어가 된다면…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어요. 백무선. 나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이 내 혈족이 된다면, 약속해 드리죠
- . 나는 당신에게 소천마 이상가는 강함을 줄 수 있어요.”
- “…싫다.”
- 백무선이 입을 열어 답한다. 그 말에 제니엘라는 웃음을 삼켰다. 매일매일 백무선에게 흡혈귀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마다 백무선은 거절하고 있었지만, 제니엘라는 알 수 있
- 었다. 처음의 거절과 지금 말하는 거절에는 많은 차이가 생겨버렸음을. 절망에 먹혀 허덕거리는 백무선은 망가져가고 있었고, 머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 ‘그게 너무 좋아.’
- 제니엘라는 몸 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웃음을 삼켰다.
- 혈족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을 보는 것이 좋다.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해가면서 망가져가는 것이 좋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피를 빨아마시는 괴물이 되는 것을 선택
- 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즐겁다.
-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후의 선택을 내렸을 때, 그때 품은 비통함과 무언가에 대한 결의를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 ‘딱 거기까지야.’
-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귓가를 혀로 핥으면서 생각했다.
- ‘그 이후는 재미가 없어.’
- 몇 년 전에 거두었던 늙은이도 그랬다. 검귀라고 했던가. 혈족으로 삼기 위해 제법 공을 들였지만… 막상 혈족으로 들이고 나니 재미가 없었다.
-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제니엘라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에 넣기 전까지가 좋다. 막상 손에 넣고 나면 재미가 없어 질려버린다. 그래서 내버려 두는
- 것이다.
- ‘하지만 기분은 나빴지.’
- 제니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 질려버렸다고는 해도 손에 넣은 장난감이었는데. 그것이 망가져 버렸다. 장난감을 망가트린 장본인이 이곳 트라비아에 오고 있다고 한다.
- ‘뭐하는 놈인지 봐둘까.’
- 주원이 신경쓰인다고 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 *
- ‘하오문.’
- 마차가 중앙지구로 들어 온다. 짐칸에 웅크리고 앉은 이성민은 그 문파에 대해 떠올렸다.
- 하오문은 개방과 함께 꼽히는 대표적인 정보 문파다. 개방이 거지를 눈과 귀로 쓰고 있다면, 하오문은 다양한 직업군을 눈과 귀로 쓰고 있다. 마부, 기녀, 좀도둑 등. 천대받는
- 직업의 종사자들을 문도로 둔 것이 하오문이다. 개방은 구파일방에 소속되어 있지만 하오문은 아니다. 무림의 잣대를 들이밀어 구분한다면, 하오문은 사파에 속한다.
- 마부가 하오문도인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부는 무공을 익혔고, 겉모습 이상 가는 실력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수상쩍었
- 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자신의 집에 묵으라고 권하는 것이 단순한 호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 트라비아는 썩어버린 인외마경의 도시이며, 다가오는 자들은 무
- 언가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 “도착했수.”
- 마차가 멈춘다. 중앙지구는 외곽 성벽만큼은 아니어도 높은 성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본래 트라비아의 중앙지구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 중산층 이상의 평민들이 살아가던 곳
- 이다. 이 척박한 북쪽의 땅은 빈부격차가 심했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대우가 크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치안과 복지가 나쁜 중앙 성벽 밖에서 살아가고, 가진 자들
- 은 성벽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다. 2년 전 혈천마의 패배를 기점으로 하여 트라비아에서 ‘가진 자’의 구분은 돈이 아닌 ‘힘’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폭력을 통제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 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모든 것이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만 많다고 해서는 그것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 지금의 트라비아 중앙지구는, 가진 것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가진 자들과 인외의 괴물들, 사마외도의 무리들, 흑마법의 관련자들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 “여관보다는 내 집에서 묵는 것이 나을 텐데.”
- “괜찮습니다.”
- 이성민은 마차에서 내렸다. 중앙지구의 성문은 개방되어 있었다. 그곳에도 경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외곽성문과는 다르게 문이 박살나지는 않아 있었다.
- “뭐… 그러시다면야. 죽지 않도록 조심하시구랴.”
- 마부는 그렇게 말하고서 큰 소리로 웃었다. 마부와 마차가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민은 마부를 먼저 보내고서 성문으로 향했다.
- [무슨 일로 왔는가?]
- 성문을 지나려던 순간. 이성민의 머릿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천장의 그림자에 누군가가 은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법 높은
- 은신술이었지만, 육감을 가지고 있는 이성민의 이목을 숨길 수는 없었다.
- “넌 누구냐.”
- [읏.]
- 이성민의 질문에 은신하고 있던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은신술을 그만두고서 이성민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 [흡혈귀로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이성민의 앞에 선 남자는 새빨간 두 눈과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성민은 남자를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 “누구냐고 물었다.”
- “…눈치가 빠른 놈이로군.”
-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지?‘
- “피차 대답하지 않을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너무 경계하지는 마라. 처음 보는 놈이라 궁금하여 물어본 것뿐이니.”
- 흡혈귀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성민은 그 말의 진위를 굳이 판가름하지는 않았다. 트라비아에는 프레데터의 오랜 괴물인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가 있다. 저
- 남자가 제니엘라의 휘하에 있는 흡혈귀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여기서 질문할 생각은 없었다.
- “…그러면 그냥 들어가도 될까?”
- “얼마든지.”
- 흡혈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묘하다는 듯이 시선을 보냈다.
- “너는 흡혈귀가 아니겠지?”
- “아니야.”
- “그렇다면 라이칸슬로프인가? 짐승 냄새는 나지 않는데…”
- “그냥 인간이다.”
- “하하하!”
- 이성민의 대답에 흡혈귀가 웃음을 터트렸다.
- “너 스스로는 모르는 듯하지만. 너에게는 기묘한 느낌이 있어. 같은 인간이라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겠지만 인외라면 알아차릴 그런 느낌이.”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뭐… 스스로 인간이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인외마경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
- 흡혈귀는 그 말과 함께 씩 웃었다. 그리고 흡혈귀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이성민은 흡혈귀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멈췄던 걸음을 옮겨 성문을 통과했다.
- ‘흡혈귀였던 검귀는 나에게 그런 느낌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었어. 그렇다는 것은…’
-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원이나 방금 전의 흡혈귀가 느꼈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은 검은 심장 때문은 아니다.
- ‘너냐?’
- [아마 네 단전 밑바닥에 고여 있는 내 요력 때문인 듯 하군. 하긴… 인간이 요력을 가지고 있으니 묘한 느낌이 날 수밖에. 모르는 놈이라면 너를 반요라고 착각할 지도
- 모른다.]
- ‘귀찮아졌잖아.’
- 이성민은 짜증을 담아 마음 속으로 내뱉었다. 그 말에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인간이 요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본래라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야.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한 값이라고 생각해라.]
- “제기랄.”
-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그는 아직까지 허주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허주의 도움 덕분에 치명적인 위기에서 목숨을 몇 번 건졌다고는 해도,
- 이런 식으로 알 듯 모르게 구는 허주의 태도는 이성민을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 [자, 계속해서 가자.]
- 그런 이성민의 짜증을 느끼면서도 허주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개새끼.”
- 허주의 웃음소리가 얄미웠다.
- ======================================
- < 뱀파이어 퀸-1 >
- 제니엘라는 술에 취해 잠든 백무선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본래 초절정 고수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 아무리 술을 들이켜도 취기가 올라오기도 전에 알코올을 분해해버리기 때문이
- 다. 하지만 일부러 취할 수는 있다. 그렇게 취한다고 해도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취기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이 초절정 고수다.
- 하지만 지금의 백무선은 무방비였다. 절망에 먹혀 망가져 버린 백무선은, 제 몸의 안위를 무시하고 미치광이처럼 술을 마셔대면서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 제니엘라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의 백무선이 무방비라고 하여도 제니엘라는 백무선의 목을 물지 않는다. 제니엘라가 백무선을 유혹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섞는 것도
- 아니다. 제니엘라는 그런 미묘한 줄다리기 관계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아직까지 인간으로서 남고자 하는 백무선이, 절망감에 먹혔다고는 하나 한때 혈천마라 불리며 혈천맹의 정
- 점에 섰던 백무선이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고한 행세를 떠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 그리고 결국에 절망에 완전히 물들었을 때. 인간임을 포기하고, 시답잖은 고고함을 버리고서 주저앉아 애걸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제니엘라는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
- 다.
- ‘그리고 질려 버리겠지.’
-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니엘라는 풋하고 웃었다. 목이라면 언제든지 물 수 있다. 하지만 혈족으로 삼기 위해서는, 인간이 흡혈귀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흡혈귀에게 ‘물린
-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혈족으로 삼고자 흡혈한 로드의 피를 다시 마시면서 맹세해야 한다.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을.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피를 마시며 살아갈 것을 맹세해야만 인간이 흡혈귀로 변이한다
- .
- [로드.]
- 제니엘라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혈족으로 삼은 많고 많은 흡혈귀 중 하나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어차피 잠든 백무선의 얼굴을 보고 있어 봤자 재미는 없으니, 제
- 니엘라는 백무선의 방을 나왔다.
- “뭐야?”
- [묘한 놈이 트라비아로 들어왔습니다.]
- 이게 누구더라… 제니엘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카만 어둠 앞에 붉은 빛들이 화악하고 떠올랐다. 암전 된 시야에 비춰지는 붉은 빛들은 제니엘라의 혈족에 소속된 권속들이
- 었다. 제니엘라는 그 중에서 웅웅거리면서 떨리고 있는 붉은 빛 중 하나를 의식했다. 그러자 그 권속에 대한 정보가 제니엘라의 머리에 깃들었다.
- “아, 그래. 무카이. 너구나.”
- 제니엘라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에는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이런 식으로 의식하게 되니 바로 누구인지 알게 된다. 분명히 중앙지구의 성문에서 감시를
- 맡긴 권속이었다.
- “묘한 놈이 트라비아로 들어왔다. 어떻게 묘한 놈이었지?”
- [이 녀석입니다.]
- 무카이가 보았던 모든 것이 제니엘라에게 전해진다. 이것이 흡혈귀와 라이칸슬로프 같은, 권속을 혈족으로 삼는 인외종들이 갖는 유리함이었다. 혈족에 소속된 권속들은 모두가 혈
- 족의 정점에 있는 로드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로드는 권속으로 삼은 모든 혈족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며 언제든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 “…아핫.”
- 제니엘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무카이가 보여 준 얼굴은 제니엘라도 보았던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한 달 전. 주원이 보여 준 놈의 얼굴이다. 제니엘라는 어깨를 들썩거
- 리며 웃었다.
-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 제니엘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본 이성민의 얼굴을 트라비아에 있는 모든 권속들에게 보여주었다.
- “이 녀석을 찾도록 해.”
- 제니엘라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찾아서 나한테 알려. 알았지?”
- 예, 로드. 수백의 목소리가 제니엘라의 머릿속에서 공명되었다.
- *
- 이성민은 거리를 걸었다. 인외마경의 도시. 트라비아 중앙지구의 거리는 뭔지 알 수 없는 불쾌한 기색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느낀다’라는 표현 보다는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 “…기분 나빠.”
- 이성민의 품 안에 몸을 숨긴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수인은 아니었지만, 고양이 귀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기고는 있었지만, 이 거
- 리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은 루비아도 느끼고 있다.
- [인외의 농도가 높군.]
- 허주가 말했다.
- [아무리 인외마경의 도시라고는 하여도, 도시 중앙지구에 이만큼의 인외가 모여있다니. 남쪽이라면 모를까 북쪽에 말이야…]
- ‘이유가 있는 것일까? 에레브리사 쪽에는…’
- [에레브리사의 정보라고 해 봐야 정보 길드와 정보 상인, 정보 문파의 것을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지는 마라. 유통되지 않는 정보는 에레브리사
- 를 통해 구입할 수가 없어.]
- 허주가 그렇게 조언했다.
- [에레브리사는 어디까지나 중개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물건이라면 몰라도 ‘정보’는 무조건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아.]
-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트라비아의 정보.
- 혈천마가 패배하고 혈천맹이 와해되면서, 혈천맹이 통제하고 있던 사마외도가 머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온갖 인외종들이 유입되어 인외마경이 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 [이 많은 인외와 사마외도를 혈천마와 혈천맹이 통제했다고? 으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만약 정말로 혈천마가 그러고 있었던 것이라면, 놈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일 것이다.
- 그런 역량을 가진 놈이 그 소천마
- 란 계집에게 패배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 허주가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 [마魔는 마를 끌어 들인다. 또 요妖는 요를 끌어들이고, 괴怪는 괴를 끌어 들인다. 비틀어진 놈은 시커먼 구멍이 본다면 들어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법이야. 고양이가 상
- 자에 몸을 처박는 것처럼 말이지. 이 도시에는 뭔가가 있다. 뭔가가 있기에 끌려오는 것이다.]
- 허주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 도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있어. 인외의 괴물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말이야.]
- 그것이 무엇인지는 허주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을 살폈지만, 크게 신경쓰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민이 트라비아로 온 것은 이 도시에 큰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북쪽 중 가장 큰 면
- 적과 가장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 있으면서, 언젠가 올 귀인과의 만남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 그러니 트라비아에는 긴 시간 동안 체류해야만 했다. 수중에 돈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체류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호사스러운 곳에 묵
- 을 생각은 없었다.
- “노숙만 아니라면야!”
- 여관에 간다는 것을 말하자 루비아가 기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성민이야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루비아는 그간 해온 장기적인 노숙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 이성민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특징이 없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었을 때, 이성민은 겉모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 이성민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시체‘들’이었다.
- 여관 구석에 처박힌 시체들은 인테리어의 하나처럼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곳에 있었다. 1층의 주점에서 떠드는 이들 중 누구 하나 그 시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루비아는 시체를
- 본 것에 놀라 침묵했지만, 이성민도 그 시체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 “뭘 주문할 거요?”
- 여관 주인은 우락부락한 근육의 사내였다. 이성민은 그가 외공을 익힌 고수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이성민은 바의 빈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 “가볍게 먹을 식사. 그리고 방을 구하고 싶은데.”
- “며칠이나 묵을 생각이쇼?”
- “예정은 없습니다.”
- “장기 투숙객은 환영이지. 방값은 일당으로 쳐서 선불이요. 이 도시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 “저 구석에 처박힌 시체들처럼?”
- “저런! 봐버렸나? 뭐 너무 신경은 쓰지 마시오. 지금의 이 도시에는 흔한 일이야.”
-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낄낄 웃었다.
- “가벼운 시빗거리에도 살인인 벌어지는 곳이 지금의 트라비아요. 저기 죽은 놈들은… 뭐였더라. 무림맹의 뭐시기들이라고 했는데. 크크! 다른 도시라면 모를까 이 도시에서 무림맹
- 의 이름은 등을 받쳐주지 못해.”
- “하지만 건드린다면 골치 아파질 텐데.”
- 누가 뭐라 한들, 무림맹은 이곳 에리아에 존재하는 최대의 정파 세력이다. 구파일방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파 문파들이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다. 무림맹에 소속된 자를 건드린다는
- 것은 무림맹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 “나는 아무 것도 못 봤수.”
- 여관 주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모두가 그렇지. 우리는 죄다 눈멀고 귀먹고 말 못하는 병신들이거든. 저?기 저… 무림맹의 뭐시깽이들이 죽기는 했는데. 저 놈들이 왜 죽은지는 모르겠다는 말이지.”
- 여관 주인은 낄낄 웃으면서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도대체 이 도시에 무엇이 있기에 대도시 트라비아가 이렇게까지 비틀어져 버린 것일까.
- 문이 열린다.
- 시간이 멈췄다.. 순간 만들어진 정적 속에서 또각거리는 발소리만이 울린다. 그녀의 존재는 순식간에 공간을 압도했다. 이성민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그것은 오직 이성민에게만 집중된 시선이 전한 불길함이었고, 존재만으로 전한 압도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 “와우!”
- “아가씨, 얼마야?!”
- 1층의 망나니들이 환호하며 떠든다. 그 시점에서 이성민은 뒤를 돌아 볼 것인지 말 것인지 갈등하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돌아보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저쪽에서 와
- 버릴 것이다.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 “시끄럽게.”
- 이성민이 뒤를 보았을 때. 이성민을 제외한 여관의 모든 이들의 머리가 돌아갔다. 한 바퀴 빙글 돌아간 머리가 힘없이 떨어지고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느낌을 전해주는 상대를 만나 본 경험은 없다. 저 여자는 앞으로 걷기만 할 뿐 그 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
- 았다.
- 그것만으로 여관에 있는 수십 명의 목을 꺾어 버렸다.
- “여기는 너무 지저분한 곳이야.”
- 여자가 이성민을 향해 다가오면서 입꼬리를 올린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도. 그것을 틀어 올려 고정하고 있는 비녀와, 몸에 걸치고 있는 화려한 기모노도 아
- 름답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자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 “너만 괜찮다면… 이런 곳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데.”
-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서 이성민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어때? 같이 식사라도 할까?”
- 뱀파이어 퀸. 혈혹의 제니엘라. 그녀는 이성민을 향해 고혹적인 시선을 보내며 그렇게 권유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이성민의 머리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괴물이 세상에
- 존재한단 말인가. 이성민은 ‘진짜’ 위지호연이 보이는 전력을 본 적은 없었으나, 맞닥트린 것만으로도 전하는 위압감만 본다면 제니엘라는 위지호연 이상이었다.
- [정신 차려라.]
-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허주의 목소리였다.
- [제니엘라는 600년 이상 살아 온 흡혈귀의 여왕이다. 이 세상에서 제니엘라 이상가는 힘을 가진 흡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
- 허주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도 설마 이렇게 갑작스레 제니엘라와 맞닥트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 [최상위종의 흡혈귀는 존재만으로 먹잇감을 압도한다. 개구리가 뱀을 보면 얼어붙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정신을 잡아라. 자칫하다가는 네놈의 뇌와 무의식이 공포를 이겨내지 못
- 하고 자살을 택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 “…괜찮아.”
- 허주의 외침에 이성민은 호흡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조금 놀랐을 뿐이다. 이성민의 정신은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과는 다르다. 600년을 살아 온 흡혈귀의 여왕이라고? 이성민은
- 정신 세계에서만 2100년을 보냈다.
- 이미 몇 번이나 미쳐서 망가지고 수복되어 온 이성민의 정신은 제니엘라가 정면으로 쏘아내는 위협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에 성공했다.
- “어머나.”
- 그런 이성민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빙긋 웃었다.
-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네에… 얌전히 대답한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 “…이미 식사를 주문했는데.”
- “이런 곳에서 내오는 음식이라고 해 봐야 돼지 밥 수준이야.”
- “그건 먹어보고서 판단하죠.”
-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구나.”
- 제니엘라의 웃음이 진해진다. 올라간 입 꼬리만큼 제니엘라의 이가 드러난다. 존재만으로 위협을 전하는 송곳니. 제니엘라는 입을 벌리며 말을 덧붙였다.
- “안 갈 거야?”
- “…어쩔 수 없군.”
-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 “갑시다.”
-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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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뱀파이어 퀸-2 >
- “잘 선택했어.”
- 제니엘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 후에 제니엘라는 눈동자를 굴려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과, 걸친 로브의 안쪽을 보았다.
- “재밌는 것들을 들고 다니고 있네에. 하나는 사역마… 인가? 아니, 일반적인 사역마와는 느낌이 조금 다른데.”
- “으으…”
- 제니엘라의 시선이 닿자 루비아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구체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성민의 로브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루비아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 헐떡거렸다.
- “고양이 귀… 아인은 아니네. 하지만 인간도 아니야. 묘한 녀석이구나.”
- 제니엘라의 눈동자가 번뜩거린다. 그것은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마안 중 하나로서, 상대의 존재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진 직시直視의 마안이다.
- 존재 자체가 간파되는 감각에 루비아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몸을 떨었다.
- “인간의 육체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혼은 인간의 것이 아니야. 뼈가 있고 장기가 있고 피가 있지만 모두가 자기만족 수준이군. 누구를 위한 만족인 것일까? 너를 만든 창조주?
-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한? 잘 만들어진 인형… 아니, 인공 정령이로군. 신진대사는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구애되지는 않아. 그런 너를 생명이라고 해야 할까?”
- “그… 그만…”
- “간파되는 것이 불쾌해? 누구나 그럴 거야. 이 마안은 모든 것을 보고 마니까.”
- 제니엘라가 짓궂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눈을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을 보았다.
- “허주. 남쪽의 악몽이라는 당신도 정말 추하게 몰락하셨군. 아니… 그런 식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하나?”
- [으하하하!]
- 제니엘라의 소곤거림에 허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성민이 입은 갑옷에서 허주의 요력이 솟구친다.
- [자그맣던 계집이 머리가 굵어졌군. 이래서 안 되는 거야… 꼬맹이는 교육을 잘 시켜야 해. 어린 시절부터 말이야. 그래야 예의가 제대로 박히는 것인데…]
- “그래서? 지금이라도 나를 교육시키겠다고?”
- 제니엘라의 웃음이 진해진다. 직시의 마안을 통해 제니엘라는 허주의 처지를 꿰뚫어 보았다.
- “육체와 혼이 완전히 떨어졌군. 그런 주제에 혼이 워낙 강렬하여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례적인 경우라는 것은 인정할게. 하지만 전성기의 당신과 비교하자면 한참 부족
- 해…”
- 제니엘라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다. 전성기의 허주라면 몰라도, 육체를 잃고 혼과 요력만이 남은 허주의 힘은 제니엘라를 위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니엘라는
- 에리아라는 땅에 존재하는 흡혈종의 정점이었고, 프레데터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함을 가진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한때 광랑이라고 불렸던 귀랑문의 문주, 웨어울프 주원조차도
- 제니엘라와 비교한다면 몇 수 밀릴 정도였다.
- “그리고 너는…”
- 직시의 마안이 이성민에게 향한다.
- “…너는…”
- 제니엘라의 입이 뻐끔거린다. 조금의 침묵 끝에, 제니엘라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두 눈을 손으로 부비고서 다시 이성민을 보았다.
- “너는?”
- 제니엘라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황이 어렸다. 그것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제니엘라가 드러낸 동요의 증거였다. 제니엘라는 눈가를 다시 한 번 부비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하지만
- ‘보이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 “이상하네에…”
- 제니엘라의 손가락이 세워졌다.
- “왜 안 보이지?”
- 푸욱. 길게 세운 손가락 두 개가 제니엘라의 눈을 꿰뚫는다.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 돌려 시신경을 끊어내고 눈동자를 뽑아냈다. 그러더니 입을 벌려 자신이 뽑은 한 쌍의 눈동자
- 를 집어 삼켰다. 씹지 않고 삼킨 즉시, 제니엘라의 두 눈이 다시 만들어졌다. 그녀는 새로이 만들어낸 직시의 마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 [이 녀석은 묘한 놈이야.]
- 허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 [네가 가진 직시의 마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다… 후후! 즐겁지 않나?]
- “…확실히.”
- 제니엘라는 우물거리던 것을 퉤하고 뱉었다. 눈동자에서 딸려 나온 시신경의 줄기였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것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다시 이성민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 “실례.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 제니엘라의 말투가 바뀌었다.
- “강압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권유하고 싶군요.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서 삐걱거리는 복도를 걷고 바퀴벌레와 쥐새끼가 나오는 방 안에서 곰팡내 나는 침대에
- 서 자고…”
- 제니엘라의 말이 빨라진다. 그녀는 숨조차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 “먹다 남은 음식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고 또 그것이 먹다 남아 음식이 되고 그것이 반복되고 돼지 새끼도 줘도 안 처먹을 끔찍한 음식을 먹으면서 버러지 기생충과 같은 먹잇감들
- 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 보다는.”
- 제니엘라의 말이 멈춘다. 그녀는 호흡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뱉고 나서 이성민을 향해 웃어 보였다.
- “저와 함께 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 속내를 알 수가 없다.
- 이성민은 제니엘라와 마주친 순간부터 계속해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남. 그런 것이라면 여태까지 수없이 존재했다. 제니엘라가 발하고 있는 위
- 화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뭔지 알 수 없어 꺼림칙하면서도 밀어내고 싶지 않는.
- “…좋습니다.”
- 이성민은 루비아를 부축해 세우고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 어쩌면 제니엘라가 북쪽에서 만나게 될 귀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서.
- [아니야.]
- 그런 이성민의 정신을 환기시킨 것은 허주의 목소리였다.
- 허주는 더 이상 요력을 발화하지 않고서 마갑 안에 얌전히 힘을 감추고 있었다. 제니엘라를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때. 허름한 여관의 앞에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 정도의 화려한 마차가 보였다. 제니엘라가 다가가자 마차의 문이 열렸고, 제니엘라는 먼저 타지 않고서 이성민을 향해 권했다.
- “오르시죠.”
-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서 루비아와 함께 마차를 탔다. 둘을 태우고 나서야 제니엘라는 마차에 올라, 이성민의 맞은 편에 앉았다.
- [네가 느끼는 감정은 상위종의 흡혈귀가 가진 ‘매혹’이다. 흡혈귀의 먹잇감은 인간이다. 흡혈귀라고 해서 무조건 힘으로 찍어 눌러 먹잇감을 사냥하는 것은 아니야. 친밀하게 다
- 가가서… 조용히, 아무런 소란 없이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것이 흡혈귀의 주된 사냥법이지. 매혹은 흡혈귀가 가진 편리한 사냥의 도구다.]
- 정신을 집중하고 의식을 세운다. 흐리멍덩해 졌던 정신에 날이 선다. 그러자 제니엘라에게서 풍기던 기묘한 위화감이 희미하게 변하여 사라진다. 이성민은 두 눈을 빛내며 제니엘
- 라를 노려보았다. 그런 이성민의 시선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 “확실히 특이하군요.”
- 제니엘라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뽑았다.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아래로 쏟아졌다.
- “보통은 알아차려도 바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흡혈귀의 매혹은 무의식에 거는 암시와 같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정신력은 특별하군요. 보통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 .”
-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왜 나에게 접근한 겁니까?”
- “허주와 붙어 있는 인간이라는 것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서도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인 볼 일이 있었어요.”
- 데니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 “검귀.”
- 상상하지도 못했던 의외의 이름이 제니엘라의 입에서 나왔다.
- “제법 마음에 들었던 아이였죠. 손에 넣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아주 끈질기고… 열정적이고… 그러면서도 절망하고… 포기하려 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였지만요… 후후!
-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요. 나는 그런 이들을 좋아하거든요.”
- 혈천마를 좋아하는 것처럼.
- “많이 챙겨주지는 못했지만… 아. 알아요? ‘로드’에게 있어서 혈족에 속한 권속은 자식과 같은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검귀는 내 자식이었어요. 몇 년 전에 거둔 나의 막내 아
- 이.”
- 제니엘라의 목소리는 낮다. 이성민은 그 말을 얌전히 들었다. 제니엘라가 하는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검귀를 흡혈귀로 만든 장본인은 제니엘라다.
- “그렇군.”
-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흡혈귀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은 검귀다. 전생에도 검귀는 흡혈귀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전생에서 흡혈귀가 된 검귀를 죽인 것이 이성민이 아닌 위지호연이었다고는 해도, 검귀가
- 흡혈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 검귀를 흡혈귀로 만들었다고 해서 이성민이 제니엘라에게 모종의 감정을 품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 하지만 제니엘라는 다르다.
- “내가 검귀를 죽여서. 나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은 겁니까?”
- “조금은 그러고 싶었어요.”
- 제니엘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장난감이야 뭐… 망가질 수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죠.”
- 제니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았다.
- “…당신. 흡혈귀가 될 생각은 없나요?”
- 이것은 무척이나 이레적인 경우였다. 제니엘라는 무수히 많은 권속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니엘라가 무분별하게 권속을 늘려 온 것은 아니다. 혈족의 정점에 있는 로드
- 에게 있어서 권속을 늘린다는 것은 그만큼 본신의 힘이 분산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흩어 놓은 힘은 권속이 흡혈귀로서의 힘을 쌓으면서 그 일부가 로드에게 전
- 해지지만, 권속에게 나누어 준 ‘피’의 부재는 권속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치명적인 공백을 만들어 낸다.
- 그렇기에 권속을 만들고 혈족을 꾸릴 능력을 가진, 순수한 피를 가진 흡혈귀들은 신중히 권속을 선택한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을 많게 해 줄 권속으로. 그것은 제니엘라도 마찬
- 가지였다. 하지만 제니엘라가 보는 것은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그녀의 시커먼 즐거움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조건이었다.
- 검귀와 혈천마가 그랬던 것처럼.
- “당신이 원한다면 흡혈귀로 만들어 줄게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네에? 흡혈귀는 지금 바로 될 수 있다고요. 뱀파이어 퀸인 나 혈혹의 제니엘라의 권속이 되는 거예요. 어때
- 요?”
- 제니엘라가 소곤거리며 재촉했다. 제니엘라는 지금의 이성민에게 진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이례적인 감정이라고. 제니엘라는 자기 스스로 결론을 지었다. 검귀는 늙어가
- 는 육체에 절망했다.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는 결국 인간인 상태로 극복하지 못하고, 시간을 얻기 위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을 선택했다. 혈천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 그는 팔이 잘린 사실과 압도적인 패배에 절망하였고 망가져가고 있다. 머지 않아 혈천마도 흡혈귀를 선택할 것이다.
- 반면에 이성민은 어떤가.
- 제니엘라가 보기에는 이성민은 기묘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무공은 중요하지 않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에는 부조리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가 즐비하여, 젊은 나이에도 수십 년
- 수행한 무인이나 마법사를 뛰어넘는 괴물이 드물지 않다. 그것은 제니엘라가 살아 온 600년 동안 언제나 반복되어 왔다.
- 가진 힘에서 끌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이끌렸다. 제니엘라는 이성민을 모른다. 이성민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모른다. 직시의 마안으로 꿰뚫어 보지 못하는 점? 그
- 래, 그거도 제법 흥미가 일기는 하다.
- 하지만 권속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 ‘위태로워.’
- 제니엘라는 이성민의 눈을 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눈. 제니엘라로서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기나 긴 무언가가 쌓여 온 눈. 제니엘라는 그 눈에 이끌렸다. 동시에 그 안에
- 존재하는 위태로움에도. 계기만 생긴다면 산산이 조각 나 박살나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제니엘라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 “거절하겠습니다.”
- 이성민이 대답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성민은 인외가 될 생각도 없었거니와, 제니엘라에게 통제될 수밖에 없는 흡혈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정 인외가
- 되고자 한다면 이성민에게는 다른 방법도 있다. 허주가 제안했던 것처럼 요괴가 되는 방법이.
- “그래요?”
- 제니엘라는 이성민의 대답을 듣고서 빙그레 웃었다.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 제니엘라는 더 이상 이성민에게 권유하지 않았다. 여기서 바로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제니엘라는 이성민이 거절해 준 것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 ‘계속해서 거절해.’
- 제니엘라는 몸 안쪽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 ‘나는 그게 좋거든.’
- 굳건하다고 생각하는 의지를 모래성처럼 허물어트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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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뱀파이어 퀸-3 >
- 트라비아의 중앙 지구는 본래부터 부유한 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비록 그들 대부분은 트라비아가 인외마경이 되면서 도시를 떠나거나 살해되었지만, 그들이 살았던 저택은 그
- 대로 남아 있다.
- 마차가 달리면서 풍경은 그렇게 바뀌었다. 드문드문 세워진 대저택과 대저택의 부지들.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흡혈귀가 되는 것을 권유한 후로 제니엘라는 더 이상
- 이성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단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민을 볼 뿐이었고, 이성민은 그녀의 시선에 거북함을 느꼈다.
-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 허주가 중얼거렸다.
- [제니엘라는 강력한 흡혈귀야. 지금의 네가 뭔 수를 써도 제니엘라를 상대할 수는 없다. 지난 번 던전에서처럼, 내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제니엘라를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야
- .]
- 허주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이었다. 이성민이 정신 세계에서 해 온 수행의 성과를
- 그대로 가져 온다고 해도 제니엘라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 이성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제니엘라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엿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확실하게 말하자면. 제니엘라는 던전에서 네가 보았던 ‘진짜’ 소천마보다 강하다.]
- 허주가 답을 주었다.
-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소천마는… 내가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 부조리해도 너무 부조리할 정도로 말이야. 그 계집은 계속해서 강해질 거다. 하루가
- 지나갈수록 이미 완숙에 접어 든 강함은 더욱 완전해 질 것이고 그 이상으로 나아겠지. 이 어르신이 엿 보았던 그 계집의 재능과 가능성이라면, 몇 년의 세월이 더 흐르게 되었
- 을 때 제니엘라의 힘을 초월하게 될 지도 몰라.]
- 그렇게 말하는 허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이성민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손을 쥐었다가 폈다. 2100년 동안 정신 세계에서 해 온 수행. 그 수행은,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 재능과 가능성, 그것을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끌어 올려 아득한 경지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 하지만 그곳에서 얻은 모든 성취를 현실로 끌어 와 작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알면서도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렇기에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미 도달한 곳에도 제대로 닿지 못했는데. 정신 세계의 성취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상 그보다 높은 곳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 반면에 위지호연은 어떤가. 그녀는 계속해서 강해진다. 그녀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던전의 끝에서… 위지호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1년 후의
-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져 있을 것이라고.
- ‘차이가 벌어져.’
- 계속해서.
- ‘나는 기어가고 있어. 천천히… 천천히. 하지만 위지호연은 뛰고 있다. 아니, 날고 있나.’
- 그러니 벌어진다. 간신히 따라잡았다고 생각해도. 위지호연이 나아가는 속도를 따를 수가 없다.
- [어찌 되었든. 제니엘라의 저택으로 가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아. 저 요망한 계집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니까. 만약의 사태가 되었을 때 네 몸을 보호할
- 수단이 부족하다.]
- ‘그럴 지도 모르지.’
-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 ‘귀인’이라는 애매모호한 존재와의 만남. 그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성민으로서는 이런 식의 만남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제니엘라가 정말로 신령이 말한 귀
- 인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신령이 말했던 5년 후의 겨울. 이제 10월이니 슬슬 겨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신령의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운명을 말한 것이라면, 두 달
- 안에 이성민은 귀인과 만남을 갖게 된다.
- ‘그리고. 내가 거절했다면… 제니엘라는 나를 죽였을 거야.’
- [그렇겠지.]
- 허주가 껄껄 웃었다.
- [외통수라고 해야 하나? 뭐… 목숨 부지는 열심히 하도록 해라. 정 안 된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
- ‘무슨 방법?’
- [요괴가 되는 것이지.]
- 허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요괴가 되면 제니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 이런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야.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 ‘개소리 하지 마.’
- 이성민은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이성민의 곁에 앉은 루비아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이성민은 그런 루비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비아는 흠칫 놀라 이성민의 옆 얼
- 굴을 올려 보았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시선을 느꼈으나, 그녀에게 그 어떤 안도의 말도 전해주지는 않았다.
- “귀여워라.”
- 침묵하고 있던 제니엘라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 “내가 많이 무서운가 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들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맹세는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약속을 어지간하면 지키는 편이에요.”
- 마차가 멈췄다.
- “도착했네요.”
- 제니엘라가 닫힌 마차의 문을 힐긋 본다. 부름 없이도 마차가 열렸다.
- “어서오세요.”
- 마차에 탈 때는 가장 늦게 탄 제니엘라였지만, 내릴 때에는 가장 먼저였다. 어느 틈이었을까. 마차에서 걸어 내린 제니엘라는 더 이상 기모노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풍
- 스러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서 붉은 장미가 가득 피어난 정원의 앞에 섰다. 그 뒤에는 아름다운 저택이 솟구쳐 있었으며, 아직 밤이 아닐 텐데도 저택 부지는 밤의 어둠에 물들어
- 있었다.
- “뱀파이어 퀸의 저택에.”
- 요염할 정도로 붉은 장미의 정원 앞에서 제니엘라는 흡혈귀의 여왕이자 저택의 주인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인간이 아닌 기척들이 꿈틀거린다. 은밀히 걸어 나온 이들은 창백한 피
- 부와 붉은 눈을 가진 제니엘라의 권속들이었다.
- “예의를 갖추어 대접해 드리도록 하렴.”
- 다가 온 흡혈귀가 이성민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 “로브를.”
- “…음.”
- 이성민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흡혈귀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흡혈귀가 루비아가 입고 있던 로브도 받아냈다. 제니엘라는 한 발 앞서 정원을 가로 질렀다. 이성민과 루비아는 흡
- 혈귀들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으로 향했다.
- “인간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서 말이야.”
-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제니엘라가 가까이 있는 흡혈귀에게 명령했다. 흡혈귀는 머리를 깊이 숙이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 “방은 넘치도록 있어요. 원하시는 방을 쓰도록 하세요. 이 저택의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별관을 통째로 드리도록 하죠.”
- “아니… 그건 괜찮습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식사’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요.”
- “저택의 방은 모두 훌륭해요. 트라비아의 어느 여관을 가더라도 이곳만큼 훌륭한 방은 없을 거예요.”
-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 “흐으응…”
- 이성민의 대답에 제니엘라가 기다란 콧소리를 흘렸다. 붉은 눈을 번뜩거리며 이성민을 응시하던 제니엘라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 “좋아요. 거절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다만…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아까 마차에서 드린 제안의 대답도. 마음이 바뀐다면 대답해 주세요.”
- 그 대화를 끝으로 이성민과 루비아는 제니엘라와 함께 저택 안의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 “이… 인육이 나오는 건 아닐까요?”
- 루비아가 몸을 떨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녀 딴에는 소리를 죽여 한 말이었지만, 제니엘라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제니엘라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머리를 흔
- 들었다.
-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내가 명령한 것은 ‘인간의 식사’니까요. 그리고… 뱀파이어는 인육을 즐기지 않아요. 뱀파이어가 즐기는 것은 인간의 피 뿐이죠. 인육을 즐겨 먹는
- 것은 야만스러운 라이칸슬로프들이에요.”
- 제니엘라는 머리를 돌려 루비아를 보았다.
- “당신의 말은 뱀파이어에게는 굉장히 큰 모욕이에요. 내가 만약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당신의 목을 뽑아 버렸
- 을 거예요.”
- “죄, 죄, 죄… 죄송합니다…!”
- 루비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신진대사는 존재하지만 크게 기능하지 않는 몸. 루비아는 자신이 이런 몸인 것에 드물게도 감사를 느꼈다. 만약 그녀의 몸이 이런 몸이 아
- 니었더라면, 루비아는 제니엘라의 경고에 오줌을 지려버렸을 것이다.
- “요리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테니.”
- 커다란 테이블의 끝에 앉고서, 제니엘라가 이성민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권하면서 키득거렸다.
- “그때까지 대화나 하도록 할까요?”
- 길고, 하기 싫고, 실수가 커진다면 죽을 지도 모르는 대화.
- “그러도록 하죠.”
- 이성민은 무표정을 가장하고서 제니엘라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 *
- 놈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지금쯤이면 트라비아에 도착해야만 한다.
- 프레스칸은 리치. 마법사다. 마법사는 직접 몸을 사용해 움직이는 멍청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마법사란 것들은 대게 게으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 에 게으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마법사를 대신해 줄 무수히 많은 마법들이 존재한다.
- 사역마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마법이다. 수준 낮은 마법사라면 쥐나 참새같은 자그마한 동물을 사역마로 삼는 것이 고작이지만, 프레스칸은 그런 저급한 마법사들과는 비교가 안
- 될 정도로 고등한 위치에 있는 마법사였다.
- 그렇다고 해서 프레스칸이 참새나 쥐 같은 자그마한 동물을 사역마로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작은 동물은 흔하고, 작기에 많은 이점을 갖는다. 여기서 고등한 마법사와 저
- 급한 마법사의 차이가 벌어진다.
- 사역마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사역마의 숫자. 사역마를 통해 거둬들인 정보를 얼마나 잘 종합하는가.
- 프레스칸은 수많은 작은 짐승들을 써서 트라비아의 성문을 감시하고 있었다. 성문 뿐만이 아니다. 중앙지구의 성문, 중앙지구 전체. 굉장히 수고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
- 는 있었다. 그 빌어먹을 심장 도둑을 잡기 위해서라면 프레스칸은 그 어떤 무리도 감수할 결의에 차 있었다. 그만큼 프레스칸이 만들어 낸 심장은 그가 리치까지 되어가면서 이루
- 고자 했던 비원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금은.
- “…뱀파이어 퀸…!”
- 프레스칸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프레스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둠의 마력이 그의 감정적 동요에 따라 크게 흔들렸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년! 왜 네 년이! 그 빌어먹을 심장 도둑을!”
- 제니엘라가 심장 도둑이 들어간 여관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들은 함께 여관을 나왔고, 같은 마차를 탔다. 마차가 향한 곳은 중앙 지구의 중심에 있는 저택.
- 붉은 장미가 가득 핀 뱀파이어 퀸의 저택이다.
-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프레스칸이 평생을 이루어 만들어 낸 심장을 몸에 박은 놈이… 뱀파이어 퀸의 저택으로 들
- 어갔다.
- ‘어떡하지?’
- 프레스칸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프레스칸이 광기에 절어 있다고 하여도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은 안다. 라이프 포스 배슬만 건재하다면 몇 번이고 부활이 가능한 리치라
- 해도, 뱀파이어 퀸 같은 강력한 인외와 맞서는 것은 망설이게 될 수밖에 없다.
- 그래.
- 프레스칸은 뱀파이어 퀸과 맞서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소중한 심장을 되찾기 위해서다. 뱀파이어 퀸이 그 용병 놈을 왜 데리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놈이 뱀파이어
- 퀸의 권속이 된다면… 프레스칸은 절대로 심장을 되찾을 수가 없게 된다.
- 그렇기에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맞서고 되찾아야 한다. 당연했다. 그 심장의 창조주는 프레스칸이므로.
- 생각은 거기까지 갔지만.
- 프레스칸은 갈등했다. 두려웠다. 뱀파이어 퀸은 자비가 없는 괴물이다. 프레스칸이 그녀와 맞서려 든다면, 그녀는 용서 없이 프레스칸을 소멸시킬 것이다.
- “…일단은 지켜보자…”
- 결국 프레스칸은 투쟁보다는 타협을 택했다. 까놓고 말해서 죽는 것은 싫었다. 시간은 넘치도록 있으니까 심장은 또 만들면 되는 것이다.
- 하지만 미련은 남아서. 프레스칸은 계속해서 수정구 앞에 서서 뱀파이어 퀸의 저택을 들여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올
- 때는 마차를 타고 왔으나 나올 때는 걸어 나왔다. 프레스칸은 저택에서 나오는 이성민과 루비아를 보고서 눈을 부릅 떴다. 그는 사역마의 시야를 확장시켜 이성민과 루비아를 가까
- 이 보고자 했다.
- “…뱀파이어가 되지는 않았어.”
- 프레스칸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오, 신이시여. 그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고, 곧 이어 환희와 격정에 가득 차 의미모를 고함을 질렀다.
-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다면 프레스칸에게 기회는 있다.
- “죽이지는 않아. 그래… 그래, 좋아. 죽지 않게 만든 다음에 뽑아 주마.”
- 하지만 당장은 안 된다. 중앙지구는 제니엘라의 영역이다. 제니엘라의 의중을 모르는 이상, 중앙지구에서 놈을 습격할 수는 없다.
- 그러니 기다려야만 했다.
- “차라리 언데드로 만들어 버릴까…”
- 프레스칸은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흐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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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쪽-1 >
- 탄생 이후로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네는 다양한 것을 학습했다. 아이네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간은 절대로 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아이네가 보낸 5년은 보통의
- 존재가 보내 온 5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 그것은 아이네가 가진 포식과 학습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심장을 씹어 포식하는 것으로 심장 주인의 능력을 손쉽게 학습할 수가 있었다. 프레스칸이 아이네를 데리고
- 서 북쪽으로 온 것은, 아이네를 손쉽게 학습시키기에는 치안이 엉망인 북쪽이 최적의 지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 거대한 에리아의 북쪽. 그곳의 대도시인 트라비아에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그랬나.
- 아니, 그곳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 에리아의 북쪽이 인외마경의 땅이라면 남쪽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땅이다. 그곳에는 야만스러운 원주민들과 다양한 요괴와 귀신이 활보한다. 북쪽에도 인외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뱀파이어나 라이칸슬로프, 리치 등의 인외종과 비교한다면 요괴와 귀신은 더욱 질이 나쁘다. 그들은 자제라는 것을 모르기에 행동에 주저가 없고 폭력에 익숙하다.
- “아이네.”
- 프레스칸은 아이네의 문 앞에 서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실제로 프레스칸은 아이네를 자신의 친 딸로 여기고
-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프레스칸이 직접 낳은 것이 아니더라도, 아이네의 심장과 몸뚱이는 프레스칸이 직접 만든 것이다.
- “응.”
- 문이 열렸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이네는 그 침대에 걸터 앉아 프레스칸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기 위해 길게 뻗었던 촉수를 자
- 신의 몸 안으로 들여 보냈다.
-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이네의 몸은 성장하지 않아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는 크게 경계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보통의 사람은
- 어린 소년과 소녀를 경계하지 않는다. 호랑이나 표범이 몸을 숨기기 위한 무늬를 가지고 있 듯이, 아이네의 어린 모습은 먹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냥하기 위한 포식자로서의 위장
- 이었다.
- “그 심장 도둑이 이 도시에 온 모양이다.”
- 그 말에 아이네의 눈이 번뜩하고 떠졌다.
- *
- 제니엘라와의 대화는 의외로 싱거웠다. 그녀는 대단한 것을 묻지 않았다. 돌이켜보아 더듬어 볼 필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식사 중에 나눈 대화에 큰 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 “…맛있었죠?”
- 이성민의 곁에 붙은 루비아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이성민도 마찬가지인 감정을 느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니엘라가 자신있게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저택에서 나눈
- 식사는 훌륭했다. 곁들인 포도주의 색이 너무 붉어서, 피를 섞은 것이 아닐까 처음에는 의심하였지만 그것도 그냥 포도주였다.
- ‘다음에 또 만나요.’
- 배웅하면서 제니엘라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의례적인 말로 치부하고는 싶었어도, 그것을 말한 것이 뱀파이어 퀸이니 마냥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제니엘라가 가진 폭력은
- 이성민의 모든 행동을 강제할 수 있을 정도다. 저택에서 숙식하지 않겠다고 거절하기는 했지만, 제니엘라가 정말로 원했더라면 이성민을 강제로 저택에 묵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
- 다.
- ‘하지만 보내줬어. 왜지…?’
- [네놈이 마음에 든 거야.]
- 허주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 [그 계집은 돌아버렸거든. 손에 넣을 수 있으면서도 넣지 않아. 그 계집이 바라는 것은 원하는 장난감을 제 힘으로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 쪽에서 애걸하며 손으로 들
- 어와 주는 거야.]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그 계집은 네놈에게 흡혈귀가 되지 않겠냐고 권유했었지. 그리고 네놈은 그것을 거절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그 계집의 불쾌한 취미가 말이지.]
- ‘…내가 스스로… 흡혈귀로 만들어달라고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다. 요괴가 되었으면 되었지 흡혈귀가 될 생각은 없다.
- 기왕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이성민은 중앙 지구의 숙박 시설을 사용하기로 했다. 굳이 외곽지역까지 나가는 것도 귀찮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 ‘시선.’
- 살피는 시선이 많다. 드문드문 섞인 시선들은 나름의 위장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나 이성민이 느끼기에는 노골적이기만 했다.
- ‘거지… 는 보이지 않아.’
- 대도시, 그것도 가장 발달되어 있는 중앙지구에 거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짐작이 된다. 무림맹의 단원들도 때려죽이는 미친 도시인데, 개방에 소속된 거지들이 쉽사리
- 돌아다닐 리가 없다.
- “오.”
- 가까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가 이성민의 걸음을 붙잡았다.
- “당신과는 의외의 순간에 자주 만나는 군요.”
- 그 말에 이성민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 김종현은 로브의 후드를 머리 뒤로 넘기고서 이성민을 향해 웃음을 보여주었다. 드리무어에서 검귀를 죽인 이후로 김종현과 재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그때에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를 버리고 사라졌었죠. 가볍게 말 한 마디라도 건네주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 “…갑작스레 해야 할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이해해 드려야죠.”
- 김종현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설마 트라비아에서 김종현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성민은 김종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 이후로 2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기는 했
- 지만, 김종현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김종현은 5년 전 처음 보았을 때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 “2년 전의 일을 이후로 트라비아에는 다양한 사정을 가진 괴물과 사정 있는 질 나쁜 자들이 모여 들었죠. 그런 트라비아는 흑마법사가 활동하기 좋은 지역입니다.”
- “…그래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당신은 흑색 마
- 탑주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마탑주라고 해서 마탑에 틀어박혀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 실적만 꾸준히 내면 되는 것이에요.”
-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 “트라비아라는 도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긴 휴가까지 내고서 이곳에 온 겁니다. 설마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 “…저 사람은 누군가요?”
- 이성민의 곁에 붙어 있던 루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김종현도 루비아 쪽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수인이군요. 노예입니까?”
- “아닙니다.”
- “아… 실례. 제가 잘못 판단하였군요. 수인이 아니라… 흐음…”
- 김종현의 눈이 탐구자의 것으로 변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루비아를 훑어 보았고, 루비아는 그 시선이 민망한 듯이 이성민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 “…인공 생명… 이것 참… 신기하군요. 인공 생명을 만드는 것을 비원으로 삼는 마법사는 많지만, 진짜로 인공 생명을 만들어낸 것은 정점에 가까운 극히 일부의 마법사뿐입니다.
- 대체 저런 것을 어디서 구한 겁니까?”
- “…초면에 실례되는 말만 잔뜩 하는 사람이네요.”
- 루비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김종현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 “물건 취급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버릇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
- 그렇게 말하면서 김종현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 “이것도 인연인 듯싶은데. 어떠십니까? 가볍게 식사라도 하시는 것이.”
-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식사를 해서요.”
- “묵으실 곳은 있습니까?”
- “아니오. 오늘 트라비아에 들어와서 아직 숙소는 잡지 못했습니다.”
- “그렇다면 제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 김종현이 웃으며 권했다. 이성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김종현과는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그 몇 번의 만남으로 김종현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생각은
- 하고 있지 않다.
-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김종현이 북쪽에서 만나게 될 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 김종현과는 그리 멀리 이동하지는 않았다. 제니엘라의 저택과는 비교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김종현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외곽 지역의 허름한 집과는 훨씬 나은 2층 주택이었
- 다.
- “꽤 좋은 집이지요.”
- 김종현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벗은 로브는 스르륵 움직여 벽에 붙은 옷걸이에 걸렸다.
- “괜찮은 값으로 나와 있기에 구입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언제까지 체류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여관을 쓰는 것보다는 집을 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요.”
- “그렇습니까?”
- “그간 뭘 하고 지내셨던 겁니까?”
- 김종현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러면서 김종현은 이성민이 입고 있는 마갑을 한 번 보았고, 거기서 시선을 올려 이성민의 눈을 들여 보았다.
- “…2년 전에 보았을 때와는 많은 것이 변하셨군요. 강함도 그렇고. 특히 그 마갑…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가 힘들 정도의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 [눈썰미가 좋은 놈이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허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대답했다.
- “우연한 기회가 있어서요.”
-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운명은 있을 테지만요. 어쩌면 이곳에서 당신과 제가 재회하게 된 것도 운명일지도 모르지요.”
- 김종현은 그런 말을 하면서 웃었다. 운명. 이성민은 아직까지 운명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의 존재를 진정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 “트라비아에는 관광차 오셨다고 했었지요?”
- “예.”
- “…이 도시에 관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흥미롭지 않습니까?”
-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전자와 컵이 날아왔다.
- “트라비아에 인외가 모여들고 있습니다.”
- 김종현이 입을 열었다.
- “모여드는 인외는 대부분이 프레데터… 아. 프레데터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 “알고 있습니다.”
- “흠. 그렇군요. 어쨌든… 트라비아에 모여 든 인외는 대부분이 프레데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두려운 힘을 가진 괴물들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몇은 이 세계 전체어도
- 손에 꼽힐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들이에요.”
- 600년 이상 살아 온 뱀파이어 퀸. 한때 광랑이라 불리며 라이칸슬로프, 그 중에서 웨어울프 중 최강이라 꼽히던 웨어울프. 그 둘을 필두로 한 프레데터에 소속 된 많은 인외들
- .
- “뱀파이어 퀸은 트라비아를 장악했고, 웨어울프는 트라비아 외곽을 장악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꽤 오래 전부터 그랬던 일입니다. 혈천마와 혈천맹이 건재했던 시절에도 그들은 트
- 라비아에 있었습니다. 다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지.”
-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종현이 덧붙였다.
- “뱀파이어 퀸은 대외적으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권속인 뱀파이어들은 트라비아를 감시하고 있지요. 웨어울프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랑문이라는 문파는
- 그리 세력이 크지 않은 중소문파 정도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귀랑문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귀랑문의 문주인 광랑은 마음만 먹는다면 구파일방 중 하나
- 를 단독으로 전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뱀파이어 퀸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왜 혈천맹 따위가 트라비아에 군림하게 내버려 둔 것일까요?”
- “…주목받고 싶지 않아서?”
-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사실은… 의미가 없었던 겁니다. 혈천맹이 군림하건 말건. 그들은 원한다면 혈천맹과 혈천마를 쓸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단지 그렇게 하지
-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혈천맹이 위지호연에게 무너지면서, 트라비아는 그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겁니다.”
- 인외마경의 도시. 군림하던 혈천마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마인들이 트라비아의 주인이 되고자 머리를 들었다. 치안이 엉망이 되고 통제가 사라지면서 수많은 인외들이 트라비아로 모
- 여 들었다.
- “나는 프레데터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미가 일어요… 몇 백 년 동안 준동하지 않던 인외
- 종의 정점에 선 괴물들이 무언가를 하려 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하나의 역사가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 그렇게 말하는 김종현의 얼굴이 황홀함으로 물들었다.
- “나는 그것을 보고 싶습니다.”
- ======================================
- < 광천마-1 >
- 이성민은 김종현이 느끼는 환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성민은 침묵했고, 결국 김종현과 이성민의 대화는 끝났다. 조금의 침묵이 지난 후에 김종현은 이성민과 루비아
- 에게 2층의 방을 안내해 주었다.
- “저는 당신들의 생활에 간섭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제 생활에 간섭하지는 말아주십시오.”
-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로브를 입었다.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이성민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으나, 질문하지는 않았다. 생활에 간섭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먼저 들어버렸
- 기 때문이다.
- “오늘 파티에 초대받아서요.”
- 이성민은 묻지 않았으나, 김종현 쪽에서 먼저 대답해 주었다.
- “흑마법사들의 파티죠. 함께 가시겠냐 권하고 싶기는 하지만… 이성민님은 흑마법사가 아니니까요.”
- 김종현은 걸친 로브를 손으로 털면서 웃었다.
- “원하신다면 기초적인 흑마법은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만. 흥미가 있으십니까?”
- “괜찮습니다.”
- “저런.”
- 이성민의 빠른 거절에 김종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 “흑마법은 아주 흥미로운 학문인데… 언제고 생각이 바뀌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김종현은 그 말을 남기고서 주택을 나갔다. 이성민은 루비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 김종현이 써도 좋다고 말한 방을 살폈다.
- [수작은 부려 놓지 않았군.]
- “마법으로 감지해 봤지만 수상쩍은 것은 없어요. 주택 전체가 그렇네요. 보통 마법사의 거처라면 경계 마법 한 둘 쯤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 루비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 “말도 안하고 떠나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그냥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죠.”
- “…알았어요.”
- 김종현은 언제나 수상쩍은 인물이었다. 여태까지 김종현이 이성민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이런 도시에 온 이상 이미 알던 사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믿을
- 수는 없었다. 김종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른다. 어쩌면 김종현은 정말로, 단순한 호의만으로 이성민을 집에 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존재한다. 이성민은 그런 만약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애초에부터 배제해 버리는 것이 낫다. 이 집에 있다가 일에 휘말려 버린다
- 면, 김종현에게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만약’의 경우에 당해버리는 것이 된다.
- 그러니 집을 떠난다.
- 중앙지구를 떠날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제니엘라는 중앙 지구 뿐만이 아니라 트라비아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중앙 지구를 떠난다고 해도 트
- 라비아라는 도시에 있는 한 제니엘라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 ‘성령이 말했던 것은 북쪽. 꼭 트라비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북쪽…’
- 이성민은 북쪽을 보았다. 트라비아는 최북단에 있는 대도시. 하지만 이곳이 정녕 북쪽의 끝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북쪽으로 가볼까. 이성민은 북쪽을 향해 발을 돌
- 렸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 “북쪽으로.”
- “…설마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것은 아니겠죠?”
- 루비아가 불안섞인 목소리로 물었고,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비아는 이성민과 제법 오랜 시간을 붙어 다녔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질문에서의 침묵은 ‘그렇다’
- 라는 대답이라는 것을.
- “침대가… 목욕이…”
- 루비아가 귀를 축 늘어트리면서 한탄했다. 이성민은 그런 루비아를 향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맛있는 식사를 먹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 *
-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 남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고, 정신을 차릴 때면 끊겨 있을 때의 기억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정
- 신을 차리고 기억을 연결했을 때의 그는 언제나 피투성이였다.
- ‘또로군. 또… 여기는 또 어디인지…’
- 광천마狂天魔 벽원패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 이례적인 경우였다. 정신이 들었음에도 피투성이가 아니다. 주화입마에 들은 이후로 광천마는 주기적으로 기억과 이성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광천마는 언제나 피투성이인 상태로
- 돌아왔다. 일신의 무공이 워낙에 비범한 탓에,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기분은 더러웠어도 통증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그의 몸을 적셨던 피는 언제나 타인의
- 것이었기 때문이다.
-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인지 짐작이 안 되는 군. 눈… 겨울… 여기는 어디지?’
- 광천마는 멍한 머리를 붙잡고서 신음을 흘렸다. 보이는 것은 눈밭. 바람은 거셌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광천마는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산을 보았다. 거기서 다시 머리를 돌리
- 니, 머지 않은 곳에서 도시의 성벽이 보였다.
- ‘북쪽… 도시… 설마 여기는 트라비아인가?’
- 설마. 그 먼 곳까지 와버렸다고? 광천마는 혹시나 싶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볍게 운기조식을 해보았다.
- “이런 미친…”
-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이 간다. 설마 이 먼 도시까지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쳤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광천마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여태까지 주화입마의 부작용
- 으로 이성을 잃었을 때. 광천마는 무분별한 학살을 벌여왔다. 그런 학살은 익숙했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 비록 기억할 수는 없다고는 하나 광천마는 무인이다. 그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운기조식을 통해 몸에 펼쳐진 무공의 흔적을 확인해 본다. 전투의 흔적은 없다. 사용한
- 무공은 경공 뿐. 대체 이성을 잃었을 때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말인가?
- 콰앙.
- 멀찍이서 들린 소리에 광천마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연달아 퍼진다. 근처에서 싸움이 진행 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
- 나, 광천마는 주저 없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 ‘우선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봐야겠군.’
- 트라비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답이 필요했다.
- 아이네는 이성민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전면으로 육박해 오는 다섯 가닥의 촉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꽈아앙! 폭음과 함께 아이네의 촉수가 뒤로 튀어 오른다. 하지만
- 이성민도 아무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의 창을 덮고 있던 강기가 공방을 주고 받으면서 입은 타격으로 끄트머리가 조금 흩어졌다.
- 북쪽을 목적지로 삼고 도시를 나오고서 그리 오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런 중에 습격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뛰어나온 것은 이성민이 몇 년 전에 맞닥트렸고, 강기의 사용
- 법을 깨달아 물리칠 수 있었던 아이네였다.
-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 이성민은 손아귀의 저릿거림을 무시하면서 창을 크게 휘둘렀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아이네의 촉수가 다시 한 번 튕겨나간다. 아이네의 공격은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 덤벼오지 않고 이런 식으로 촉수만 휘두르면서 이성민의 대응을 보고 있었다.
- [대체 뭔가요 저 꼬맹이는…?!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저런 꼬맹이한테 원한을 산거예요?!]
- 이성민의 머릿속에 대고 루비아가 비명을 지른다. 그녀는 수인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빛의 구체로 화하고서 이성민의 품 안에 숨어 있었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외침을 무시하고서
-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아이네의 촉수가 꿈틀거리면서 다시 이성민을 덮친다. 이성민은 그 즉시 분뢰추살을 사용해 아이네의 촉수를 요격했다.
- “프레스칸은 어디에 있지?”
- 이성민은 흩어지는 촉수의 파편을 보면서 물었다. 아이네는 노란 눈동자로 이성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도시에.”
- 프레스칸은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에게 포착되어 있다. 제니엘라는 프레스칸을 프레데터에 가입시킨 후로 어떤 행동들을 강제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레스칸으로서는 뱀파이어 퀸
- 의 이목을 무시하고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 그러니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아이네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레스칸이 이 전장을 살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중에 떠돌고 있는 몇 마리의 새들이 아래를 주시
- 하고 있었다.
- ‘차라리 잘 되었군.’
- 운이 좋다고. 이성민은 그렇게 판단하기로 했다. 프레스칸과의 재회를 바라고 있던 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다. 찾아다닐 수고를 줄였다. 여기서 아이네를 제압한다면 프레스칸을
- 끌어낼 수 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사역마의 시선은 이성민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놈이 왜 이곳에 직접 행차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 일지도 모른다.
- 그것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성민은 마갑을 전개했다. 상체만 감싸고 있던 마갑이 크게 확장되더니 이성민의 몸 전체를 감쌌다. 그는 양 손으로 창을 잡고서 자세를 잡
- 았다.
- 5년 전에 아이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스칼렛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이성민은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 당시의 이성민은 절정고수이기는 했으나 여러모로 부족했고 불
- 안한 점도 많았었다.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5년. 하지만 이성민에게 축적된 시간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 아이네는 탐색을 그만두었다. 이성민이 본격적으로 하려 드는 이상, 아이네도 더 이상 장난 같은 탐색을 이어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길게 늘어트렸던 촉수
- 를 몸 안으로 거두었다.
- [기분 나쁜 년이군.]
- 허주가 중얼거리는 말에 이성민도 동감했다. 아이네의 몸에서 솟구치는 촉수는 터트리고 끊어놓아도 끝없이 재생된다. 아이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성민을 노려 보았다. 그녀의
- 양 손이 시커먼 갑각으로 뒤덮이고서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다섯 개의 칼날이 된다. ‘우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네의 등 뒤에서 시커먼 줄기들이 솟구친다. 그것은 기형적인 형
- 태를 한 날개가 되었고, 남은 줄기는 흐느적거리는 촉수가 되었다.
- 아이네는 아버지인 프레스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 개인적으로 이성민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 ‘처음이었어.’
- 그렇게 제대로 된 아픔을 느낀 것은. 아이네는 강기에 뒤덮인 공격에 몸이 관통되던 때를 기억하면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5년 전에 느꼈던 기묘한 동질감은 그대로다.
- 아버지는. 프레스칸은 아이네에게 이성민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었다. 팔다리 몇 개는 없어도 좋으니, 일단 목숨이 붙은 상태로 데려오라고 했었다.
- 아이네는 그 명령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마주친 순간부터… 아이네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5년 전에 보았을 때에도 지금과 같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 는 이 충동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것은 식욕이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다. 그럼에도 먹고 싶다.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가능하다면 토해서 먹은 것을 다 게워놓고서라도 먹고 싶다.
- 아이네는 입 안 가득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먹고 싶은 것은 심장뿐만이 아니었다.
- ‘어디부터 먹을까?’
- 역시 발끝부터 먹으면서 올라가는 것이 좋을까?
- 아이네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군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아이네의 발이 땅을 박찼다. 그녀는 체구와 이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이성민을 향해 쇄도했다.
- [먹이를 보는 눈이로군.]
- 허주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네의 눈이 식욕으로 꿈틀거린다는 것은 이성민도 느끼고 있었다. 빠아앙! 아이네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른다. 그녀의 발 아래에 있던 눈
- 무더기가 폭발이라도 당한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서 아이네는 커다란 손톱을 이성민을 향해 내리 찍었다.
- 이성민은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뻗었다. 공격에 정면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걸어나가는 것은 이형환위로 만들어 낸 환영이다. 이성민은 일보무흔을 펼쳐 아이네의 옆으로
- 뛰었다. 공중에 떠있던 아이네는 날개를 크게 펼치더니 공중에서 빠르게 자세를 바꾸었다. 휘두른 촉수가 이형환위로 만들어낸 잔상을 꿰뚫고, 다른 촉수가 옆으로 다가오는 이성
- 민을 견제한다.
- 이성민은 창 전체로 원을 그렸다. 외전 하는 란의 격류에 닿은 촉수들이 통째로 뜯긴다. 하지만 아이네의 양 손은 건재하다.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이성민의 가슴을 꿰뚫
- 으려 했다. 이성민은 눈밭을 박차 뒤로물러서면서 내지르던 창을 회수했다.
- ‘반응이 빨라.’
- 자하신공이 운용되면서 호신강기가 솟구친다. 오리하르콘을 코팅한 마갑은 내공 소모 이상의 호신강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이성민이 쥐고 있는 창도 마찬가지였다. 불꽃처럼 강렬
- 한 강기가 창 전체를 덮는다.
- 이윽고 그것은 천천히 잦아들어 응축된다.
- “뭔지 알아.”
- 이성민이 사용하는 강기를 보고서 아이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도 호신강기가 솟구쳤다.
- “나도 할 줄 알아.”
- 아이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
- < 광천마-2 >
- 아이네가 호신강기를 쓴다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검은 심장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이성민도 잘 알지 못했지만, 이성민은 아이네가 백보신권을 사용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동시에 심장이 뽑혀 죽었던 제온의 시체도 기억한다.
- 당시의 아이네도 까다로운 상대였던 것은 똑같았지만, 지금은 더욱 상대가 까다로웠다. 5년 전의 아이네는 강력한 상대이기는 했어도 여러모로 미숙했다. 싸움 자체에 익숙하지 않
- 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네의 공격법이나 몸놀림은 인체의 움직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움직일 수 없는 각도로 비틀어지고 몸에서 튀어나오는 촉수나 칼날은
- 변칙성이 너무 강했다.
- 다시 충돌한다. 강기와 강기가 서로 부딪혀 흩뿌려진다. 아이네는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촉수가 이성민을 덮친다. 이성민의 손
- 안에서 창이 빙그르 돌았다. 구룡살생이 터져 나왔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창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맹렬하게 아홉의 용이 되어 아이네를 덮쳤다.
- 아이네의 손이 꿈틀거린다. 인체 비례에 맞지 않게 커다랗게 변한 손이 진한 강기를 머금었다. 꽈아앙! 아홉의 용이 아이네의 손과 함께 폭사했다. 오른 팔이 통째로 뜯겨져 날
- 아갔지만 아이네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 팔을 대신하여 왼 팔을 찔렀다. 찌른 손은 내지른 순간에 손이 아닌 커다란 송곳이 되었다. 이성민은 찌른 창을 회수했
- 다가 곧바로 내질렀다. 추혼일살과 아이네의 손이 부딪혔다. 빠드드득! 힘과 힘이 부딪힌다. 이성민은 몸 전체에 전해지는 힘의 압박을 이겨내면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 한 걸음, 두 걸음. 이보겁살이 펼쳐졌다. 전신을 두른 강기가 폭발하면서 폭풍을 만들어낸다. 살기가 강기로 형체화 되어 아이네의 전신을 짓누르려 했다.
- 거기서 아이네의 단순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은 형形을 갖춘다. 그것은 완전하게 체득한 체술이고 보법이었다. 파바박! 아이네의 몸이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며 이보겁살을 벗어났다
- . 그리고 흩어졌던 아이네의 잔상들이 다시 하나로 뭉친다. 그녀는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면서 다시 이성민에게 뛰어들었다.
- 아이네의 촉수는 수십 개의 칼이었고 창이었다. 그 외에 온갖 종류의 날붙이, 그들이 갖는 예리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공간 전체를 덮어오는 살기의 예리함에 이성민은 양
- 팔에 힘을 불어 넣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구룡살생. 단전에는 넘쳐흐를 정도의 내공이 있었고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창은 가진 내공을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주고
- 있었다.
- 이성민과 아이네가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은 몸뚱이의 질김이었다. 아이네의 몸은 아무리 파괴되어도 무리 없이 재생을 반복했지만, 이성민은 아니다. 아이네야 팔이 뜯어져도 다시
- 재생해 버리지만 이성민은 팔이 뜯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 그것이 서로의 과감함에 차이를 만든다. 이성민은 중상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고 아이네는 제 몸뚱이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다. 아이네는 주저 없이 구룡살생을
- 향해 뛰어들었다. 콰콰콰콰! 눈밭을 휩쓸며 쏘아낸 구룡살생이 아이네의 몸을 집어 삼킨다.
- 심장만 지키면 된다.
- 아이네는 5년 동안 많은 것을 학습했다. 마법만큼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많은 무공을 학습했다. 사실 그것은 학습이라기보다는 포식에 걸맞는 성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 그런 성장 외에도, 아이네는 다른 것들도 학습해왔다.
- 통증도 학습했다.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효율적인지도 학습했다.
- 아이네의 몸은 심장의 존재로 유지되고 있다. 팔다리가 날아가도, 머리가 박살나도. 심장만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
- 아홉의 용이 아이네의 팔다리를 뜯어냈다. 사지를 잃은 아이네의 몸은 공중에서 휘청거리더니 등 뒤의 날개를 활짝 폈다. 순식간에 잘린 팔다리가 재생된다. 반쯤 날아갔던 머리도
- 마찬가지였다. 아이네는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그 즉시 이성민을 향해 뛰어들었다.
- 그 순간에.
- “으하하하!”
-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힘의 폭풍이 덮쳐왔다. 그것은 아이네의 대응을 경계하던 이성민과,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아이네를 물러서게 하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둘은 흠칫
- 굳어서 동시에 물러섰다.
- ㅡ꽈아앙!
- 그 주변의 눈이 모조리 증발했다. 하얗게 올라오는 수증기의 격류 사이에서 광천마가 몸을 일으켰다.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버렸다. 상관없다. 광천마는 몸
- 안의 피를 뜨겁게 만드는 흥분과 충동에 주저없이 몸을 던졌을 뿐이다.
- “이곳은 어디냐?”
- 광천마가 양 팔을 펼치며 묻는다. 아이네는 대답하지 않고 광천마를 노려보았고, 이성민은 광천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감 없이 당황을 느꼈다.
- “당신은…?”
- “질문한 것은 본좌다!”
- 광천마가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웅혼한 내력을 가진 거대한 사자후였다. 수증기가 죄다 흩어지면서 땅을 뒤흔들었다. 그 외침은 아이네와 이성민의 몸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거든 본좌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라!”
- 광천마가 다시 외친다. 안하무인의 태도였지만 광천마의 몸에서 솟구치는 투기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 “…북쪽… 트라비아입니다만…”
- “역시 그렇군!”
- 눈이 쏟아지고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도시 성벽이 보이기에 짐작은 했다. 거기에 확답까지 들었으니 광천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 사실 그렇게 웃기는 했어도 광천마의 속내는 그리 둥글지는 않았다. 이성을 잃은 중에 이 눈 쏟아지는 북쪽의 땅까지 와버렸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광천마는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
- 았다.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그냥 이곳이 어디인지만 물어 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 정도의 격한 싸움을 본다면 동하지 않던 마음도 동해 버린
- 다. 광천마는 끌어 오르는 투기를 감추지 않고서 성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자아. 본좌랑도 놀아보자!”
- 그렇게 외치기는 했지만 이성민과 아이네는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정체모를 사내가 대뜸 투기를 발산하면서 다가오니 대체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
- 었던 것이다. 이성민은 아이네 쪽을 힐긋 보았다.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아이네도 지금 상황에서는 행동을 개시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 사실 가장 당황하고 있는 것은 공중에서 사역마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프레스칸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빼앗긴 심장을 되찾아 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정체모
- 를 사내 때문에 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
- “…일단 당신은 누구입니까?”
- “본좌는 광천마 벽원패다!”
- 광천마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 외침에 이성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광천마 벽원패. 소천마, 혈천마와 함께 현 에리아에서 천마라는 별호를 가진 셋 중 하나로 꼽히는 괴물이다
- . 언제나 떠돌아다니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는 마인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그 광천마와 이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 ‘광천마를 만나면 도망쳐라.’
- 몇 년 전. 소림에서 남궁희원이 했던 조언을 떠올린다. 그때의 남궁희원은 광천마야말로 천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덧붙였었다.
- 아이네는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야 재미있게 놀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광천마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 …아니. 그래도 괜찮다.
- 아이네는 두 눈 가득 살기를 담고서 몸에 담은 힘을 개방시켰다. 통제하지 않는 거대한 힘이 아이네의 몸을 집어 삼켰다. 광천마가 그것을 보며 껄껄거리며 웃었다.
- “좋구나!”
- 광천마의 외침에 화답하듯이 아이네가 앞으로 뛰었다. 광천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펼쳤던 양 팔을 아이네를 향해 내질렀다. 미증유의 거력이 꿈틀거리더 거대한 장력이 되어 아이네
- 의 몸을 덮쳤다. 거기까지는, 아이네도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제 몸을 파괴하여 상대의 틈을 강제로 파고드는 것이야 익숙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다르다.
- 장력의 코앞에서ㅡ 아이네는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죽는다. 이것은 몸을 던져 뚫을만한 그런 공격이 아니다. 몸을 던져 넣는다면 그대로 박살나 죽어버릴 것이다. 아이네는 급
- 히 촉수를 끌어다가 앞을 향해 쏘아냈다. 광천마의 장력과 맞닿은 아이네의 촉수는 그 끄트머리부터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날개를 펼쳤고, 허리를
- 180도 비틀었다. 보통 인간의 관절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관절의 기동이었지만 아이네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서는 주저없이 광천마의 장력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 ㅡ꽈아앙! 폭음의 크기와 폭발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광천마의 장력은 땅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를 뒤흔들었다.
- [도망쳐라!]
- 광천마의 공격이 상상 이상의 위력을 가졌다는 것은 프레스칸도 보았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네에게 명령했다. 그 외침에 아이네는 잠깐 동안 주저했다. 광천마의 공격 위력
- 이 상상 이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아이네는 숨겨둔 것이 많았고, 가진 것을 모조리 끌어낸다면 광천마와도 대등한 싸움
- 을 벌일 자신이 있었다.
- [안 돼! 지금 당장 도망쳐!]
- 하지만 프레스칸의 명령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이네가 숨긴 몇 수가 존재하듯이 광천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경계해야 할 것은 광천마 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아이네의
- 목적은 광천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성민이 가진 검은 심장을 다시 빼앗는 것이다. 광천마의 심장도 욕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민과 광천마 둘 모두를 상대해서 아이네
- 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어서!]
- 프레스칸이 고함을 지른다. 아이네는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몸을 뒤로 뺐다. 내키지 않는 일이기는 했지만 아이네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녀에게 그리 좋지 않다는
- 것은 스스로 판단해 행동할 수 있었다. 날개를 크게 펼친 아이네는 공중으로 뛰어 오르기 전에 이성민을 힐긋 보았다.
- 시선이 짧게 오가고서 아이네는 하늘로 뛰어 올랐다. 광천마는 뛰어 오르는 아이네를 향해 장력을 날리려다가 그만 두었다. 함께 놀아보자고 나이도 잊고 뛰어 들었는데, 저렇게
- 등 돌리고 도망치는 꼴을 보니 흥이 싸늘하게 식었기 때문이다.
- “흠.”
- 광천마는 시큰둥한 신음을 흘리고서는 이성민을 홱하고 돌아보았다. 상관없다. 도망친 년과 놀아보는 것도 재미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 광천마가 진정으로 흥미를 느낀 대상은
- 아이네가 아닌 이성민이었다.
- 그건 참 묘한 기분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놈인데… 가슴 깊이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만든다. 그것은 긴 세월을 살아 온 광천마도 낯선 감정이었다.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
- 나 광천마는 개의치 않았다. 언제 또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뛸지 모른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 “너도 도망칠 테냐?”
- “당신이 왜 싸움을 거는 것인지 모르겠…”
- “우문愚問이로다!”
- 이성민이 침착하게 내뱉은 말에 광천마가 고함으로 화답했다. 그 쩌렁쩌렁한 외침은 던전에서 만났던 역발산 장득수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나, 광천마의 목소리에 실린 힘은 장득수와
- 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남궁희원이 말했었다. 광천마는 초절정을 넘어선 초월적인 경지에 발을 딛은 무인이라고. 과연 그 말대로였다. 광천마가 내비치는 투기는 호흡조차 어렵게
- 할 정도로 농밀했고 안광이 번쩍거리는 두 눈은 전신 털을 모조리곤두서게 만들고 있었다.
- “강자와 강자가 만났다. 무인과 무인이 만났단 말이다. 싸우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 이성민은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광천마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광천마가 크게 발을 뻗었다. 그런 광천마의 움직임은 ‘빠
- 르다’라고는 할 수 없었다.
- 단지 무거웠다.
- 쿠우우웅! 발구름만으로 지진이 일어난다. 흔들림을 대비한 이성민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광천마는 이성민이 선 곳을 향해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아이네에게 죽음을 느끼게 만
- 들었던 거대한 장력 대신에 광천마의 양 손이 이성민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이성민은 급히 창을 회전시키면서 광천마의 장력을 걷어내려 했다.
- 그러고 싶었으나. 쿠우웅! 맞닿은 충격이 이성민의 몸 안을 뒤흔들었다. 직격당한 것도 아니고 공격을 걷어내려 했을 뿐인데도 내장을 뒤흔든다. 공격의 무게만을 따지고 본다면
- 광천마의 장력에 실린 힘은 위지호연 도플갱어의 이상이었다.
- [이건…]
- 허주가 놀란 소리를 낸다. 놀란 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중수법으로 몸 안에 스며들어온 광천마의 장력은 이성민의 내장을 흔들기는 했지만 파괴하지는 못했다. 단전 깊
- 은 곳에 고여 있는, 이성민의 것이 아닌 허주의 요력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 [도망치지 마라. 사로잡아!]
- 허주가 급히 외쳤다.
- [저 새끼! 뭔데 내 요력을 쓰고 있는 거야?!]
- 허주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 ======================================
- < 광천마-3 >
- 허주의 외침도 당황스러웠고, 광천마의 공세도 당황스러웠다. 광천마가 허주의 요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짓누르는 공격이 무겁다. 이성민은 숨을 삼키
- 면서 전신 근육에 힘을 주었다.
- 투우웅!
- 맞닿아 있던 창과 손이 밀려난다.
- “흐음!”
- 광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성민이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심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다.
- ‘뭐야 이건…?’
- 기와 기가 충돌했을 때, 이쪽으로 전해져오는 느낌이 기묘하기 짝이 없다. 반탄강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내공을 접해 온 광천마였지만, 여태까지 광천마
- 와 싸워 온 무인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기묘하고 인상적인 내공을 가진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좋구나!”
- 그렇다고 해서 광천마가 주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전신으로 호신강기를 터트렸다. 그 강렬한 호신강기의 출력에 이성민은 놀라서 뒤로 물러설
- 수밖에 없었다.
- “와라!”
- 광천마가 고함을 지른다. 그렇게 외친 주제에 먼저 뛰어 온 것은 광천마 본인이었다. 전신에 호신강기를 두른 광천마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는 폭력 자체였다. 이성민은 주저
- 하지 않고 구천무극창의 오초인 절명섬을 펼쳤다.
- 보이지 않는 극쾌의 죽음이 광천마의 중심을 꿰뚫는다. 아니, 꿰뚫을 것 같았다. 광천마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더니 가슴 앞으로 끌어 온 오른 손을 강하게 내뻗었다. 꽈아앙!
- 폭음이 울리며 일수와 일수가 교환된다. 공격을 나눔을 통해, 이성민은 광천마가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는 무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는 상당한 여유를
- 두고 그녀에게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었으나, 광천마에게는 아니었다.
- 설원에서 주원과 마주쳤을 때. 트라비아에서 제니엘라와 만났을 때. 그리고 던전에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만났을 때. 강적을 앞두고 느꼈던 긴장과, 어렴풋한 죽음의 예감이 이
- 성민의 감각을 달구었다.
- [저 개새끼!]
- 이성민의 머릿속에서는 허주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 [어디서 굴러 온 말 뼈다귀 같은 새끼가 내 요력을!]
- 허주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허주가 봉인당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어마어마한 요력은, 그가 토벌대와의 전투 끝에 무릎 꿇고 육체를 잃어 봉인당하면서 흩어져 버렸다. 허
- 주는 그것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나, 광천마가 사용하는 힘은 틀림없는 허주의 요력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허주 본인이 자신의 요력을 알아보지 못할 리
- 가 없었다.
- [죽이지는 마라 놈을 잡아서 추궁해야 해!]
- ‘무책임한 말 좀 집어 치워…!’
-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머릿속으로 내뱉었다. 죽이지 말라고?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다. 광천마가 내뿜는 투기와 호신강기의 밀도는 죽이지 말고 제압하기는커녕 이성민 본인을 죽
- 여버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 이성민은 허주의 외침을 무시하고 창을 내질렀다. 수십 개로 분영한 분뢰추살이 광천마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 “잡기雜技!”
- 광천마가 외침을 토했다. 그는 구천무극창의 현란한 창술을 잡스럽다고 폄하하면서 쌍장을 내질렀다. 분뢰추살의 창영이 모조리 박살났다. 이성민은 발 빠르게 두어걸음 물러선 뒤
- 에 다시 앞으로 튀어나갔다. 일보무흔과 일보무영이 섞인다. 수십 개의 잔상이 광천마의 시야를 어지럽히면서 이성민 본인은 잔상 속에 잔상을 남기고 광천마의 옆을 찔렀다.
- “허튼 수작!”
- 광천마는 이성민이 펼치는 무공을 볼 때마다 추임새를 넣듯이 외쳤다.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광천마의 표정은 즐거웠다. 주화입마 이후로 ‘스스로’ 강적을 앞두고 싸우는 것이 얼
- 마만이던가? 이성을 잃지 않고 본인의 의지로 싸우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광천마는 미친 듯이 웃음 소리를 흘리면서 양 팔을 들어 올렸다.
- ‘위험…!’
- 추혼일살로 광천마의 옆구리를 찌르려던 이성민은 위험을 직감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광천마를 중심으로 시뻘건 강기가 폭발했다. 그것은 광천마 본인을 보호하는 호신강기이면서
- 다가오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강기의 폭풍이었다.
- “판단이 좋구나!”
- 광천마는 껄껄거리며 이성민을 향해 홱하고 오른 손을 뻗었다. 그를 마주하고서 이성민의 양 손에 쥔 창이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빠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찰이 광
- 천마의 오른 손을 뒤로 밀어냈다.
- 이성민은 내지른 창을 품 안으로 회수하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뭉툭한 창준이 광천마의 얼굴을 노린다.
- 광천마는 상체를 크게 뒤로 젖히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양 손으로 땅을 짚은 광천마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이성민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이성민은 기겁하여
- 걸음을 뒤로 빼어 광천마의 발길질을 피해냈다. 장법만 능한 줄 알았더니 임기응변과 체술 자체에 능하다. 하긴, 이렇게 강하지 않았더라면 천마라는 별호를 가지지도 못했으리라.
- ‘천마라는 놈들은 다 괴물 뿐인가…!’
- 소천마 위지호연, 광천마 벽원패. 혈천마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소천마와 광천마가 이리도 강하니 혈천마라는 인물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 [뭐하는 거냐! 내 요력을 써!]
- ‘닥쳐…!’
- 허주의 외침에 이성민은 급히 대답했다. 요력은 꺼림칙한 힘이다. 사용 시의 반동도 커서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성민은 란과 나의 수법으로 광천마의 쌍장을 걷어 낸다.
- 직격당한 것도 아닌데 손이 저릿 거린다. 이성민은 아낌없이 내공을 쏟아냈다. 던전에서 대환단과 마석을 흡수한 덕에 이성민이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의 양은 광천마와 비교해서도
-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 ‘이 놈 봐라…?’
- 힘대결을 하자는 것인가. 광천마는 칠성 공력을 담은 쌍장을 내지르며 이성민의 대응을 살폈다. 구룡살생이 펼쳐진다. 광천마는 양 팔에 덜컥하고 실려오는 저항감에 눈을 부릅떴
- 다. 그는 주저없이 공력을 더 쏟아냈다. 콰아아앙! 둘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성민은 폭발의 충격을 피해 스스로 물러섰고, 광천마 역시 양 손을 거두었다.
- “네놈이 소천마냐?”
- 광천마가 내뱉었다.
- “그 유명한 소천마가 네놈이냐? 즐겁기는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군. 그리 늙어보이지도 않는데 이만한 공력과 무공을 가지고 있다니… 아니면 반로환동한 놈인가?”
- “소천마도 아니고 반로환동하지도 않았습니다.”
- 광천마가 말을 걸어오니 이때다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성민은 더 이상 광천마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낌없이 내공을 퍼부어대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광천마는 아직 여유가
- 남아 보였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했다가는 허주의 요력을 빌어야 할 텐데, 이성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 “나는 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싸워야 할 이유도 못 느끼겠고. 그러니 이쯤해서…”
- “말도 안 되는 소리!”
- 이성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광천마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버럭 고함을 질 렀다. 단순히 외친 것만이 아니라, 광천마는 발을 크게 들어 땅을 내리 찍었다. 이
- 미 이 공간의 눈은 모조리 증발해 버려서, 광천마의 한 걸음에 땅이 쩍하고 갈라지며 파편이 튀어 올랐다. 광천마는 양 손을 크게 휘둘러 허공을 때렸다. 그러자 떠있던 파편들
- 이 시뻘건 강기에 먹히더니 그대로 이성민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졌다.
- 이런 식으로 강기를 쓸 수도 있구나. 광천마의 수법은 매서웠지만 이성민은 솔직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기를 다루는 광천마의 수법은 수준이 높았다.
-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그것은 즐거우면서도 두려운 고민이었다. 머릿속에서 허주가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성민은 더 이상 허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광천마를 설득하고자 하는 것도 그만
- 두었다. 2100년 동안 정신세계에서 했던 수행. 그 지옥같고, 좆같던. 단지 기계처럼 무공을 펼치고 수정하고 고뇌하고.
- 왜 그랬을까. 얼마든지 도중에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붙잡고 있던 이유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약하게 남고 싶지 않아서?
- 무공이 좋아서.
- 전방으로 폭사한 창끝이 파편을 격추시킨다. 이성민은 어지럽게 보법을 밟아가며 광천마를 향해 뛰어 들었다. 광천마는 이성민이 품 안으로 날 듯이 들어오자 즐거워졌다. 그는 양
- 팔을 크게 펼치며 마중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성민을 반겼다.
- 호흡이 끊긴다. 조금의 실수가 틀림없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격을 받아 넘긴다. 흘리고, 방어하고, 밀치고, 멀어지고, 파고든다. 광천마는 양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이성민의
- 공격을 받아 넘겼다. 이성민의 창은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바꾸어가며 광천마의 틈을 노렸으나, 광천마가 두른 호신강기와 빠른 발, 그리고 큼직한 손은 이성민이 이득을 보는
- 것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 ‘어디를 보는 거지?’
- 광천마는 이성민의 눈을 들여 보았다. 마주해서 싸우는 것은 틀림없는 나 자신. 그러나 이성민의 눈은 광천마가 아닌 그 너머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광천마는 그것조차 즐거
- 웠다.
- ‘생사결 중에도 먼 곳을 보느냐. 하하!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
- 그것은 이성민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위지호연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괴물인가. 어쩌면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일지도 모르고 광랑 주원일지도 모른다.
- 사실 누구라 해도 좋았다. 이성민이 광천마를 통해 투영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강자였고, 이성민은 그 대적大敵을 뛰어넘고 싶었다.
- 허주는 침묵했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허주는 얼마든지 이성민에게 요력을 더해줄 수 있었다. 던전에서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싸울 때처럼, 허주가 직접 나서서 요력을 뿜어낸
- 다면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려드는 이성민의 몸뚱이는 그 요력을 삼킬 것이다.
- 하지 않는다. 허주는 침묵을 계속했다. 살떨리는 공방, 유리한 것은 광천마다. 이성민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나 광천마는 아직 여유가 있다. 몇 십 년 동안 에리아에서 천마로
- 군림해 온 것이 바로 광천마 벽원패다. 소천마가 에리아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또 혈천마가 에리아에 오기 전부터. 광천마는 에리아에서 천마로 살아왔다. 그 둘이 있기 전에는
- 광천마야말로 에리아 유일의 천마라고 할 수 있었다.
- ‘놈은 강하다. 얼마나 여력을 두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집의 도플갱어보다 강해.’
- 불과 반 년 전의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허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던전에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이성민은
- 위지호연 도플갱어 이상의 강함을 가진 광천마를 상대로, 비록 광천마가 여유를 두고 있다고는 하여도 밀리지 않고 맞서고 있다.
-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해. 아니, 이건 성장 속도라고 할 수 없겠지. 이미 겪은 것을, 왔던 길을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 놀라웠다. 허주는 이성민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이성민이 시간의 신인 데니르에게서 2100년의 미치광이 수행을 받았다는 것도 안다. 솔직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허주
- 는 내심 웃을 수밖에 없었다. 2100년이라는 시간을 갈아넣었음에도 고작해야 그 수준이란 말인가! 진정한 재능을 가진 천재라면 이성민이 210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도달한 무
- 위에 닿는 것에 100년… 아니, 5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고는 해도. 그 2100년. 정신 세계라고는 해도 210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얕지 않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집념은 경악스러울 정도다.
- 무아無我가 지금인가. 이것이 무아인가. 아니다. 의식은 또렷하다.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평소보다는 위화감이 짙다. 비유하
- 자면… 한 걸음 뒤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 ‘그래서는 안 돼.’
- 이성민은 스스로에게 지적했다. 찰나를 쪼개어 나누고 그 파편 사이사이에 이어지는 공방. 의식과 무의식을 모조리 사용해 공격과 방어와 회피 등, 모든 반응을 통제한다.
- 뇌가 타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거기서는 방어가 아니야. 조금 더 앞으로…’
- 몸은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정신의 일부분은 뒤로 물러서서 공방을 보고 있다. 훈수를 둬 본다. 하지만 훈수가 전해지는 것이 늦어서, 몸은 이미 방어를 해버린다.
- 답답하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더 자연스럽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성민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어느새 이성민의 입술은 달싹거리며 ‘아니야’라는 말을 육
- 성으로 내뱉고 있었다.
- ‘뭐가 아니라는 거냐.’
- 광천마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그것을 물을 수는 없다. 8성 공력으로도 슬슬 안된다는 느낌이 든다.
- ‘놀라운 놈이로군. 본좌와 싸우는 중에도 성장하고 있어… 아니. 이게 성장인가?’
- 생사결 도중에 심득을 얻는 놈들.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갑작스런 심득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심득이라는 것은 애매하고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 것. 순간 얻은 심득을 통해 상대를 절명시키지 않는 한 갑작스레 얻은 심득은 오히려 심, 기, 체의 조화를 깨트려 버린다. 그렇게 되면? 죽음 뿐이다. 살초와 살초를 쉼없이
- 나두는 생사결 중에 얻은 심득은 그러한 양날의 검이다.
- 그런데 놈은 어떤가.
- ‘이건… 심득이 아니야. 그냥 강해지고 있는 거다. 대체 어떻게?’
- 광천마는 모른다. 이성민이 정신세계에서 보낸 2100년을. 이성민이 그곳에서 도달한 무위를. 지금의 육체가 너무 약해서. 심, 기, 체가 어그러진 육체가 정신세계에서 한 수행
- 의 결과를 올곧이 받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 ‘안 되겠군. 조금 더 힘을…’
- 차라리 처음부터 극성 공력으로 몰아쳤더라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광천마는 공력을 북돋았다. 광천마 정도의 고수라면 공방 중에 내공을 더하는 것 정도
- 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 하지만 이성민은 광천마의 ‘틈’을 보았다.
- ‘앞으로.’
- 관조 중에 내지른 외침이 육체에 닿았다. 이성민의 발이 앞으로 뻗어진다. 그것은 곧바로 무영탈혼의 삼식인 이보겁살로 이어진다. 전신에서 폭사한 강기가 광천마를 위협한다. 광
- 천마는 그 기묘하기 짝이 없는 강기의 흐름에 당황하면서도 최적의 대응을 했다. 유유하게 흐른 손길이 강기의 파도를 받아 넘긴다. 그것을 완만하게 돌려 흩뿌리려 할 때.
- 이성민의 손에서 창이 회전했고, 내지른 창이 길을 만든다. 구천무극창의 육초, 공도. 광천마가 휘두르던 강기가 공도의 회전에 휘말려 팡하고 흩어졌다. 일직선으로 뚫린 길을
- 향해 이성민의 창이 쏘아졌다.
- “허억!”
- 광천마가 놀란 소리를 냈다. 더 이상 여유를 둘 수는 없었다. 광천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았다. 단전의 내공이 모조리 끌려 나오면서 광천마를 중심으로
-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 혈환신마공血環神魔攻 오의奧義, 혈환광풍血環狂風. 광천마에게 광천마라는 별호를 붙여 준 혈환신마공 최고의 초식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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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천마-4 >
- 강기의 폭풍이 서로 이어져 고리를 만든다. 그것이 수십개로 늘어나더리 하나로 이어진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수십 개의 고리가 사방을 휩쓴다. 양 손을 치켜 들고서 혈환광풍의
- 중심에 서있던 광천마는 내심 아차 싶었다.
-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 단지 흥겹게 싸워보고 싶었을 뿐이다. 둘이 나눠 온 공방이 스치는 것이 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정도로 강맹하기는 하였어도, 광천마가 끝까지 여유를 두고 있었던 것은 살초
- 를 살초가 아니게 거두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늦어버렸다. 광천마는 혈환신마공의 오의인 혈환광풍을 펼쳐버렸고, 이 죽음의 폭풍은 이성민을 갈기갈기 찢어 수백 조각의 육편으로 만들어 버릴 것
- 이다. 여태까지 혈환광풍이 펼쳐졌을 때에는 언제나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다.
- ‘아깝군. 그 무공… 이대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워. 10년만 더 흘렀어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을…’
- 광천마의 탄식이 멈춘다. 그는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쏘아지는 예리한 살의를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푸확! 광풍의 외곽에서 뚫고 들어 온 일직선의 창로가 길을 연다. 공도
- . 구천무극창의 육초가 혈환광풍의 외곽을 뚫어버린 것이다.
- ‘말도 안 돼!’
- 광천마는 기겁하여 양 손을 움직였다. 광풍의 흐름이 거세지며 뚫린 부분을 메운다. 하지만 공도로 만들어난 일직선의 길은 곧바로 메워지지 않았다. 열어 놓은 길을 통해 구룡살
- 생이 뿜어진다. 하지만 그 아홉 마리의 용은 혈환광풍을 정면으로 뚫지 못했다.
- 틈이 메워지기 전. 광천마는 이성민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미치광이의 바람 속에서 이성민은 창을 쭉 뻗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호흡과 차갑게 가라앉은 눈. 어
- 디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던 그 눈은 어느새 광천마를 직시하고 있었다.
- “…하하!”
- 광천마가 웃었고, 혈환광풍이 폭발했다. 흩어진 붉은 강기는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광천마는 붉게 물든 하늘을 가만히 올러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 멀지 않은 곳에서 이성민이 쓰러져 있었다. 혈환광풍을 정면으로 받았음에도 이성민의 사지는 멀쩡했다. 아무리 갑옷을 입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거센 강기공의 중심에 있었다면
- 내가중수법에 의해 내장이 터졌어야 한다. 광천마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까운 녀석을 죽여 버렸구나.”
- 광천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성민에게 다가갔다. 흥미와 욕심으로 싸움을 걸기는 했지만 이성민을 죽이게 된 것에 광천마는 조금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되살
- 릴 방법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 하지만 시체라도 수습해 주고 싶었다.
- 광천마가 몇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이성민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살아 있었다는 말인가? 광천마의 눈이 움찔 떨렸다. 들썩거리던 이성민의 몸의 떨림이 잦아 든다. 그리고
- 갑자기 이성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이 무슨…”
- 혈환광풍을 정면으로 맞고도 상처 하나 없다고? 광천마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광천마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기묘한 ‘위화감’이 갑작스레 짙어졌음을 깨달았다
- .
- 이성민은 입을 벌렸다. 아, 아.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내던 이성민은 홱하고 몸을 돌렸다. 광천마는 부릅 뜬 눈으로 이성민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다르다… 너무나도 다르다,
- 방금 전까지 공방을 나누었던 놈과 본인이란 말인가. 타오르는 불꽃을 통째로 박아 넣은 것 같은 저 눈동자가 과연 인간의 것이란 말인가?
- “…우윽…”
- 가슴 속이 꿈틀거린다. 광천마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세차게 뛰고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 광천마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 감정을 알지 못하여 당황했다.
- “시건방진 새끼…”
- 이성민은 입술을 짓이겨 씹고서 내뱉었다. 그 목소리는 이성민의 것이었으나 이성민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이성민을 대신하여 허주가 몸뚱이를 차지한 것이다. 그 증
- 거로 이성민이 입은 마갑에서는 불길한 자색의 요력이 꿈틀거리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 “너한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 허주가 내뱉었다. 광천마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성민의 몸을 차지한 허주를 노려 보았다. 허주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허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 인물이라는 것을. 허주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광천마를 향해 성큼거리며 다가갔다. 그는 오른 손에 쥔 창을 힐긋 보더니 미련없이 그것을 내려 놓았다. 본래 그는 창을 사용하
- 지 않기 때문이었다.
- 허주의 전신에서 요력이 폭사했다. 그것은 이성민이 사용하던 호신강기보다 훨씬 불길했고 호신강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했다. 뒷걸음질치던 광천마의 얼굴이 일그러진
- 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광천마 본인도 알 수가 없었으나,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분노했다.
- “놈!”
- 광천마가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린다. 맨 손으로 성큼거리며 나서던 허주는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쿠오오오! 어마어마한 요력이 허주의 오른 손을 휘감았다. 이성민
- 의 몸은 받아내지 못했던 요력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허주가 이성민의 몸을 장악하면서 그의 요력은 아무 문제없이 허주의 의지에 따라 사용되고 있었다.
- 광천마는 고함과 함께 쌍장을 내질렀다. 혈환신마공이 극성으로 발휘되면서 붉은 폭풍을 만들었다. 허주는 몰아치는 강기의 폭풍을 향해 비웃음을 흘리더니 오른 손을 휘둘렀다.
- 그것은 아무런 기교없이 대충 휘두른 것처럼 보였으나, 허주의 손을 휘감고 있던 요력은 끈적하게 늘어지더니 혈환신마공의 폭풍을 모조리 찍어 눌러 버렸다.
- “허억!”
- 두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광천마가 비명을 터트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광천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 뜨고서 연이어 무공을 펼쳤다. 광천마가 선택한 무공은 이성
- 민을 쓰러트린 혈환신마공의 오의, 혈환광풍이었다. 붉은 강기가 넘실거리며 일어나더니 고리와 고리를 만든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었다.
- 허주는 위협적인 혈환광풍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허주의 몸을 덮은 요력이 연기처럼 위로 솟구치더니 크게 확장되었다. 꽉 쥔 오른 주먹을 앞으로 한 번 던졌을 때. 혈환광
- 풍이 박살났다. 입을 쩍 벌린 광천마를 향해 허주는 앞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광천마의 앞으로 뛰어 온 허주의 손이 광천마의 멱살을 잡았다. ㅡ꽈아앙! 곧이어 광천마의 몸이
- 땅에 내리 꽂혔다.
- “어디서 난 것이냐?”
- “커흐윽!”
- 광천마의 몸을 땅에 처박은 허주가 으르렁거리며 내뱉었다. 광천마는 혼미해진 정신을 붙잡고서 발버둥쳤으나 허주는 광천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 “네가 쓰는 힘. 내 요력. 그것을 대체 어디서 손에 넣은 것이냐?”
- “무슨… 말을…”
- “모르는 척 하지 마라!”
-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광천마를 잡은 허주의 손에서 요력이 꿈틀거리더니 광천마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광천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몸 안으로 들어 온 요
- 력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결코 받아낼 수가 없다. 인간의 몸뚱이는 요괴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요괴의 요력이라는 것은 피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 종류의 피를 몸 안에 받으
- 면 죽게 되듯이, 요력도 똑같다.
- 하지만 광천마는 아니었다. 온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광천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입을 쩍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허주는 발버둥치는 광천마의 몸을
- 붙잡고서 계속해서 요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광천마의 단전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반응했다.
- “끄으으…!”
- 광천마의 눈이 뒤집어진다. 새하얗게 물든 두 눈이 시뻘건 빛에 젖어갔다. 단전 깊은 곳에 있는 요력의 정수가 허주의 요력에 의해 깨어났다. 광천마가 겪고 있는 주화입마와 광
- 증은 단전 밑바닥에 있는 요력에 의한 부작용이었다. 광기에 물든 광천마가 이 먼 북쪽 트라비아까지 쉼없이 달려 온 이유가 바로 이곳으로 향하는 허주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 .
- “네놈이 이 녀석의 귀인이었던가.”
- 허주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내뱉었다. 광기에 물든 광천마는 언제나 주변 모든 것을 다 죽여 버리는 학살을 해왔었으나, 지금의 광천마는 아니었다. 그는 광기에 정신을
- 넘겼음에도 이성민의 몸을 장악한 허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주는 그런 광천마의 눈을 들여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 이해할 수 없어 내뱉던 허주의 중얼거림이 우뚝하고 멈추었다. 홱하고 솟구친 손이 목을 붙잡는다. 그렇게 행동한 것은 허주의, 아니, 이성민의 손이었다. 허주는 목을 죄여오는
- 우악스런 손아귀 힘을 느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 ‘이 미친 놈…!’
- 이성민이다. 의식을 잃었던 이성민이 정신을 차리고서, 허주가 장악하고 있는 몸을 다시 되찾으려 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허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민의 정신력이 다
- 른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야
-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도 영향력을 보일 줄이야.
- “아니, 이 어르신이 네놈의 몸을 빼앗으려 든 것이 아니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
- 허주가 빠르게 내뱉었지만 이성민은 허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목을 죄어오는 손의 힘이 거세어진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몸뚱이임에도, 이성민의 손은 제 목을 죄어 부러트리기
- 라도 할 것처럼 강한 힘을 끌어내
- 고 있었다.
- “알았다. 알았어!”
- 허주는 결국 그렇게 내뱉고서 이성민의 몸에서 물러섰다. 이성민의 몸을 휘감고 있던 요력이 마갑으로 빨려 들어가고서, 붉게 타오르던 이성민의 두 눈이 제 색을 되찾았다.
- “허억!”
- 이성민은 목을 움켜 잡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 감각이 드문드문 끊기는 것 같았고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방금 전까지 강하게 목을 쥐고
- 있던 탓에 호흡까지 가쁘다. 숨을 몰아쉬던 이성민은 아찔한 두통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 [개새끼… 생명의 은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 “알아.”
- 이성민은 답답한 목을 어루만지며 내뱉었다. 이번에도 허주의 도움이 있었음은 안다. 혈환광풍에 휘말렸을 때, 그 미세한 틈을 꿰뚫은 것은 이성민의 능력이었으나, 그 이후에 혈
- 환광풍이 폭발했을 때에는 허주가 요력을 꺼내 이성민의 몸을 보호해 주었다. 그렇기에 정신을 잃는 것에 그쳤던 것이지, 그 강맹한 강기의 폭풍을 정면으로 받아냈었다면 몸이 산
- 산조각났었을 것이다.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 이성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허주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주가 멋대로 몸을 빼앗아 움직인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단지… 이성민
- 은 씁쓸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 이성민이 정신을 차린 것은, 허주가 손짓 한 번으로 혈환광풍을 박살냈을 때였다. 그것을 해낸 것은 이성민 본인의 몸이었는데… 같은 몸이라고 해도 허주가 보여준 수법은 이성민
- 이 결코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 강렬한 요기. 혈환광풍의 고리가 이어지는 그 극히 짧은 찰나에 힘을 밀어넣어 강제로 연결을 끊어내는 수법. 이성민이 느끼
- 는 감정에 공감한 허주가 이죽거렸다.
- [요괴가 된다면 네놈도 할 수 있다.]
-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했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광천마를 힐긋 보았다. 격발된 요기에 정신을 잡아 먹힌 광천마는 난동을 부리지 않고 정신을 잃어 누워있었다.
- “…대체 뭐지?”
- [이 어르신도 모르겠군. 하지만 저 놈이 쓰는 것은 틀림없이 내 요력이었어. 놈의 단전 깊은 곳에… 내 요력의 정수가 있다. 400년 전에 봉인되면서 힘의 일부가 소멸한 것이
-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 허주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동안 침묵했다.
- [이 어르신이 보기에는 저 망나니 새끼야 말로 네가 북쪽에서 만나게 될 귀인인 것 같다. 놈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요력을 다루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정신이 가끔 맛이 가는
- 모양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인간임을 유지하면서 요력을 다룬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허주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런 이성민을 향해 허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 [저 망나니 새끼가 어떻게 인간이면서 요력을 다루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네가 저 망나니의 방법을 배운다면. 저 망나니보다 훨씬 잘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요괴가 되지
- 않으면서 요력을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내 힘의 일부를 가진 저 망나니와는 다르게 네놈에게는 이 어르신이 직접 연결되어 있으니까.]
- “…으으…”
- 허주의 말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광천마가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 [우선 놈의 말을 들어 봐라.]
- 광천마가 번쩍 눈을 떴다.
- ======================================
- < 광천마-5 >
- 눈을 뜬 광천마는 잠깐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뚱히 하늘을 올려 보던 광천마는 자신이 광기에 몸을 맡겨 이성을 잃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끔벅거리던 눈동자가 이성민에게 향하고 나서야 광천마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 “허억!”
- 광천마가 기겁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튕겨 올렸다. 비틀거리며 물러 선 광천마는 경계심이 가득한 태도로 이성민을 보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은 또렷하다. 광증에 몸을
- 맡기긴 했어도 그리 오랜 시간도 흐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광천마는 손짓 한 번으로 혈환광풍을 파훼하고 두 눈을 번뜩거리며 목을 죄어오던 이성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 “…아니, 다르군…”
- 그때의 이성민과 지금의 이성민이 동일인물은 아니다. 광천마는 이성민의 눈동자와 흘러나오는 기도를 통해 그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완전히 누그러트릴 수는
- 없었다. 언제 또 그 알 수 없는 괴물같은, 그리고 또 두려운 기운이 자신을 덮쳐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너는… 대체 뭐냐?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 광천마가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이성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는 허주가 내려 놓았던 창을 다시 주워 들고 광천마에게 다가왔다.
- “조금 진정이 되십니까?”
- “으음…”
- 광천마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아까처럼 이성민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성민과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의
- 식하지 않은 무의식의 충동이었으나, 확실하게 광천마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 [놈의 단전에는 내 요력이 있다. 저 망나니 놈은 그 영향을 받고 있으니, 나와 직접 연결 된 너를 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 허주의 목소리와 함께 광천마의 질문이 날아왔다. 이성민은 그것을 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깐 동안 고민했다.
-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으름장을 놓아라. 아마 잘 들을 테니까. 안 들으면 조금 패 놓던가.]
- ‘능력이 되어야 패지.’
- [이해를 못하는 군. 쉽게 설명하자면 저 망나니 놈과 네놈의 관계는 혈족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혈족의 최하위에 있는 놈이 모체인 로드에게 거스를 수 없는 것
- 처럼, 저 놈도 너에게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상하 관계에 복종이 딸린 것은 아니겠지만… 네가 두들겨 팬다고 해서 저 놈이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렇게 하려 한다면 놈의 단전에 박힌 요력이 미쳐 날뛸 테니.]
- 과연 말처럼 그렇게 쉬울까? 이성민은 광천마의 눈을 들여 보면서 말했다.
-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중요하지 않기는.”
- 광천마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 “그러니까… 광천마 어르신.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 “…끄응…”
- 평소 같았으면 제대로 들을 이야기도 아니었으나, 광천마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지 모를 감정이 계속해서 충동질을 해대고 있었다. 결국 광천마는 한숨을 쉬
- 면서 주저앉아 머리를 끄덕거렸다.
- “무엇이 궁금한 건가?”
- “어르신의 단전에 요력의 정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 “…본좌의 단전에 뭔가가 있다고?”
- 광천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바로 앞에 이성민이 있었음에도 광천마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한동안 운기행공을 한 광천마가
-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본좌의 단전에는 내공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광천마가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 [재미있군.]
- 광천마의 대답에 허주가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 [저 망나니는 자기 단전에 요력이 있다는 것도, 자기 자신이 요력을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남아 있지.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 보는데… 흐음.]
- ‘뭐냐?’
- [짚이는 것이 있다.]
- 그렇게 말하고서 허주는 잠깐 동안 침묵했다. 아무래도 떠오른 생각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광천마는 이성민이 입을 다물자 덩달아 침묵하면서 이성민의 눈치를 보았다
- . 그러면서 광천마는 왜 자신이 이성민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본좌가 왜 저런 애송이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 광천마는 광오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광천마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고 나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기는 했었지만, 광천마가 대부분의 경우에서 강자로 군림하기 이전. 광천마가
- 약했던 시절에는 몇 번이나 자신보다 강한 자와 맞닥트린 적은 있었다. 그런 강자를 상대한다고 해서 광천마는 머리를 숙이고 눈치를 보았던 적은 없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계속 눈치를 보게 된다.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광천마는 그 복잡한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침묵을 이어가던 허주가
- 입을 열었다.
- [놈에게 남쪽에 대해 물어 봐라.]
- ‘뭐?’
- [남쪽에 간 적이 있었냐고 물어보란 말이다. 그리고 그 남쪽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묻고.]
- 이성민은 그 말을 그대로 옮겨 광천마에게 질문했다. 광천마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머리를 끄덕거렸다.
- “남쪽… 인상 깊은 곳이었지.”
- “남쪽에서 무슨 일을 겪었습니까?”
- “…으음.”
- 광천마가 앓는 소리를 냈다. 솔직히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광천마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 10년 전의 일이다. 광천마는 무공을 수행하던 중에 거대한 벽을 맞닥트렸다. 수행 중에 벽을 맞닥트리는 경우야 많이 있던 일이고, 광천마는 언제나 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 벽을 돌파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반복된 수련과 좌절 끝에, 광천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겸 여행에 나섰다.
- “발길 따라 가다 보니 남쪽 땅에 도착했지. 뜨거운 태양과 울창한 밀림, 사막… 많은 것들을 보았어. 그러던 중에 밀림의 어떤 부족과 인연을 맺었지. 이상한 놈들이었어. 부족
- 의 전사라고 하는 놈들 중에서 쉬워보이는 상대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지. 으스댈 줄만 아는 구파일방의 제자들 중에 그 부족의 어린 전사들보다 강한 놈은 없어 보였고, 좀 나이
- 먹은 전사들은 구파일방의 장문인 급이었다.”
- 그렇게 말하는 광천마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 “본좌가 그들 부족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부족의 전사들이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까워 본좌의
- 무공 몇 가지를 부족 전사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지. 그리고 그들은 무공을 전수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며, 본좌에게 부족의 영약과 호흡법을 알려
- 주었지.”
- [그거다!]
-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 [남쪽은 과거 이 어르신이 이름을 떨치던 곳이다. 남쪽의 일부 부족이 이 어르신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었으니, 아무래도 그곳에 내 요력과 요력을 다루는 방법이 남아 있던 모양
- 이로군.]
- 그렇게 말하는 허주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 “그 호흡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 “처음에는 내공심법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직접 내공을 쌓을 수는 없었거든. 하지만 정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는 하여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 호흡법을 통해
- 그들 부족의 영약을 흡수하였고 내력에 많은 진전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로 막힌 벽을 뚫는 것에 성공했지.”
- 광천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벽을 넘으면 초월지경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초월지경은 본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있었다. 근접하기는 하였어도 아직 초월지경에 닿지는 못했어. 남쪽을
- 떠나 떠돌면서 계속해서 무공을 수행했고… 욕심이 과한 탓에 주화입마에 들었지.”
- [멍청한 놈.]
- 광천마의 말을 들으면서 허주가 이죽거렸다.
- [호흡법이고 뭐고, 요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쉽게 통제할 수 있을만한 힘이 아니야. 놈이 겪은 주화입마는 인간이 요력을 사용한 반동이다. 그래도 광증을 앓는 것에 그쳤다는 것
- 이 놀랍군. 보통이라면 터져 죽던가 완전히 요괴로 바뀌던가 할 터인데.]
- 허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이성민에게 말을 붙였다.
- [저 호흡법이라는 것을 익히도록 해라. 그것만 익힌다면 네놈의 인간성을 유지하면서도 요력을 사용할 수 있어.]
-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 [힘을 갈망하던 것은 네놈이다. 선택은 언제나 네놈의 몫이라는 것이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해 두마. 현재 네 몸뚱이로, 네가 도달하고자 하는 소천마에게 닿기 위해서는 못
- 해도 수십 년이요 길면 수백 년이 필요할 것이다.]
- ‘나는 성장하고 있어.’
-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광천마와의 싸움에서 이성민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헤이스트와 스트렝스까지 사용했더라면 광천마와의 싸움을 보다 쉽게 이끌어갈 수 있
- 었을 지도 모르나, 이성민은 의도적으로 두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생사결을 통해 강제로 심득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성민이 얻은 것은 심득이라기보다는 앞서 있는
- 정신의 높이에 뒤늦게 육체가 따른 것에 불과하였으나, 경우가 어찌 되었든 이성민이 바라는대로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 [너무 위험한 방법이야.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생사결에서 상황 좋게 네가 심득을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요력 역시 위험한 것은 똑같잖아.’
- [이 씨발놈의 새끼. 좋은 것 퍼서 먹여주려고 들이 밀어도 안 처먹겠다고 발악을 하는 구나. 야 이 개새끼야. 이 어르신이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것인데 왜 알아듣지를 않는 것
- 이냐?]
- 듣다 못한 허주가 답답하여 욕설을 내뱉었다. 이성민은 허주의 욕설을 시큰둥히 받아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요력이라는 힘에 욕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 파괴적인 힘은 이성
- 민의 육체를 훨씬 강인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정신 세계에서의 도달한 무위를 보다 쉽게 육체로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번에도 얕았어.’
- 혈환광풍이 펼쳐지기 직전. 이성민의 창은 이성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얕게 들어갔다. 그 순간에 헤이스트와 스트렝스를 펼쳤더라면 광천마가 혈환광풍을 펼치기 전에 그의 몸을 관
- 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조차 늦었고, 이성민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답답하기도 했다. 자신의 몸뚱이가 기대만큼, 아는 것만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하다. 차근차근 나아간다고 해서 정신세계의 무위를 체득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 현
- 실이다. 2100년이 걸렸는데, 비록 도달해 본 경험이 있다고 한 들 빠르게 그때의 무위를 손에 넣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그 호흡법. 저에게도 알려줄 수 있습니까?”
- “불가능하네.”
- 광천마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 “그 부족에게서 호흡법과 영약을 받았을 때. 영약이야 이미 처먹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호흡법의 경우에는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기 때문이지. 구
- 두로만 한 약속이 아니라 언령을 빌어 한 약속이기에 절대로 어길 수가 없어.”
- [귀찮게 구는 군.]
- 허주가 투덜거렸다.
- “언령?”
- “남쪽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주술 중 하나지. 언령으로 약속한 이상 그것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본좌가 아무리 강력한 무인이라고 하여도, 언령으로 심장을 바친 이상 그것을
- 깰 수는 없지.”
- [마법사들이 하는 마나의 맹세와 비슷한 것이다. 주술사의 도움을 빌어 언령의 약속을 하고 심장을 바친다면, 그 약속을 어기게 되었을 때 심장이 터지게 돼.]
- “그 남쪽 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 “본좌가 아무리 기억이 좋다고 해도 밀림 속을 헤매어 도착한 부족의 위치를 기억할 수는 없지.”
- 진이 빠지는 대답이었다. 기껏 마음먹고 요력을 써볼까 싶었는데 광천마에게서 요력을 사용하는 호흡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으니 진이 빠지는 것이 당연했다.
- [남쪽으로 가자.]
- 하지만 허주는 오히려 신이 나서 그렇게 말했다.
- [애초에 네놈에게 약속하지 않았더냐. 이 어르신을 데리고 나온다면 어르신이 모아 놓은 보물을 주겠다고. 그것이 있는 곳도 남쪽이니 오히려 잘 되었다.]
- ‘하지만 위치를 모르는데?’
- [네놈은 머저리 천치로구나. 저 망나니를 길잡이로 데려가면 되지 않겠느냐?]
- ‘뭐?’
- [광증의 치료법을 알려준다고 해라.]
- 허주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 [놈의 광증은 요력을 사용한 반동이고, 놈이 여기까지 온 것은 이 어르신을 쫓아 온 것이다. 이 어르신이 잠자는 숲에 봉인되었을 때에는 저 망나니의 광증이 자주 도졌겠지만,
- 내가 네놈과 함께 숲을 나오고 북쪽으로 왔을 때는 광증도 심하게 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것은 사실이었다. 본래 광천마의 광증은 한 번 도질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학살하고 파괴하였는데, 허주가 잠자는 숲을 나서게 되면서 광증의 폭력성은 사라졌다. 대신 광천
- 마가 단전에 품은 허주의 요력이 본래 주인인 허주를 찾아 광천마의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광천마가 수개월 동안 정신을 잃고 북쪽까지 오게 된 것은, 허주와 이성민이 던전에
- 들렀다가 북쪽으로 오면서 광천마도 먼 곳에서 함께 움직인 덕분이었다.
- “광증의 치료법을 알려 줄 테니 저와 함께 남쪽으로 갑시다.”
- “뭐라?”
- 이성민의 말에 광천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긴 세월 동안 품고 있던 광증에 대한 치료법을 알려주겠다니! 사실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광천마는 이성민의 말을 거역하고자 하는
- 마음이 들지 않았다.
- “어떻게 내 광증을 치료해 주겠다는 건가?”
- “음…”
- 이성민은 답할 말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허주가 대답해 주었다.
- [대충 둘러대라. 어차피 이 어르신과 함께 있는 한 광증이 도지는 일은 없을 터이니.]
- “…우선… 매일 도막사라무라는 주문을 백 번 외우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에게 따귀를 한 대씩 맞으면 됩니다.”
- 주문은 대충 갖다 붙였고, 따귀라는 조건을 붙인 이유는 갑작스레 싸움을 건 광천마를 그냥 때려주고 싶은 이유가 전부였다.
- “도막사라무라니. 뭔진 모르겠지만 굉장히 주술적인 울림이로군… 그런데 따귀라니? 어째서 따귀를 맞아야 하지?”
- “못 믿겠으면 하지 마십시오.”
- “으음!”
- 배째라는 식으로 내뱉은 이성민의 말에 광천마가 신음을 흘렸다. 전혀 믿음이 안 가는 조건이었지만 왜일까. 광천마는 이성민의 말을 마음 속으로는 믿고 있었다.
- “알겠다.”
- “그럼 우선 한 대.”
- 광천마가 대답한 즉시 이성민은 광천마의 뺨을 갈겼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광천마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 “억!”
- 광천마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고는 해도 부지불식간에 때린 따귀는 광천마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주문을 외우십시오.”
- 광천마가 따지기 전에, 이성민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광천마는 벌개진 뺨을 손으로 붙잡고 이를 갈더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 “도막사라무… 도막사라무…”
- 이성민은 광천마가 외는 주문 소리를 들으면서 웃음을 삼켰다.
- ======================================
- < 천외천 >
- 남쪽으로 방향을 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남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우선 북쪽에서의 볼 일이 전부 끝나지도 않았고, 북쪽에서 만나게 될 귀인이라는 것이 광천마라는
-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일단 올해까지는 북쪽에 있어야만 했다. 올해만 끝난다면 성령이 말한 기간이 끝이 나니, 그 이후에는 북쪽을 떠나도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 내년이 된다고 해서 바로 남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내년이 되면… 위지호연과 약속했던 10년이 모두 채워진다. 3월 14일, 대 도시 루베스의 중앙 광장. 그 날 이성민은 위
- 지호연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 ‘위지호연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 모른다. 몇 달 전에 위지호연과 던전에서 만나기는 했으나, 그때에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위지호연이 했던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다. 함께 여행하자
- 는 이야기. 몇 달 뒤에 위지호연과 재회하게 되면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위지호연과 함께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것일까?
- 그에 대한 생각은 우선 가슴에 묻어 둔다.
- 이성민은 광천마와 함께 다시 트라비아로 향했다. 올해 동안은 트라비아를 거점으로 삼고 지낼 생각이었고, 트라비아에는 개인 적인 볼 일도 남아 있었다. 아이네의 습격을 통해
- 프레스칸이 트라비아에 똬리를 틀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이성민으로서는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루베스의 대광장에서 위지호연과 만나고, 그 후
- 에는 허주의 보물과 요력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만해도 일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를 텐데,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프레스칸과 만나게 될지 모
- 르는 일이었다.
-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껄끄러운 것은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다. 이성민은 프레스칸과 제니엘라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니엘라가 다스리는 트라비아에
- 서 프레스칸과 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 “도막사라무… 도막사라무…”
- 이성민의 뒤를 따르는 광천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성민이 알려 준 주문을 외고 있었다. 저 무의미한 주문을 계속해서 외우고 따귀까지 맞는 것을 보면, 광천마는 그 별호와 소
- 문에 걸맞지 않게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었다. 이성민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광천마에게 물었다.
- “어르신. 어르신이 생각하기에, 어르신의 강함은 이 세계에서 몇 번째라고 생각하십니까?”
- “응?”
- 주문을 외우던 광천마가 머리를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이 느낀 광천마의 강함은 진짜였다. 강기를 다루는 수법이나 임기응변 등을 보면, 광천마의 무위는 위지호연 도플갱
- 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던전에서의 이성민이 광천마와 싸웠더라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 "우문이군."
- 이성민이 기대했던 것은 광천마의 오만한 대답이었으나, 광천마는 되려 헛웃음을 흘렸다.
- “세상은 넓네.”
- 그렇게 중얼거리는 광천마의 말에는 씁쓸한 자조가 섞여 있었다. 오만한 대답을 기대하였기에, 광천마의 대답은 이성민을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광천마는 당황함이 여실히 드러
- 나는 이성민의 얼굴을 보면서 끌끌 웃었다.
- “그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궁금할 만도 하지. 천하제일이 무엇인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네. 나이가 몇이지?”
- “…스물 셋입니다.”
- “하하! 스물 셋에 초절정을 넘어 초월지경을 멀리서나마 보고 있다니… 자네의 나이를 말하여 순순히 믿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군. 그래. 자네의 경지라면 천하제일을
- 논하기에 충분하지.”
- 광천마는 그렇게 내뱉고서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 “천하제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곳에 있는지 깨닫기에도 충분하고.”
- “…무슨 말입니까?”
- “누구나 자기만의 산을 가지고 있겠지. 그 산의 정상에 서기 전에는 몰라. 그냥 막연하게, 혹은 확신에 차서 생각하는 것이지. 나는 꽤 높이 올라왔다고. 그리고 그 산의 정상
- 에 서고서야 깨닫는 거야. 내가 오른 산이 그리 높지도 않은, 산맥의 봉우리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 광천마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이성민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면서 광천마 스스로에게 내뱉는 것이기도 했다.
- “세상은 넓어. 어쩌면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이 세계… 인간이 아닌 자들이 활보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닐세. 인간의 수 배에서 수십 배의 세
- 월을 살아가는 자들. 나는 육십 년의 세월을 무공에 매진해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네. 인간으로서 육십 년 동안 무공을 수행했다면 어디서 꿀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수백 년의 세
- 월을 살아가는 존재가 생의 대부분을 무공 수행에 매진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무공 수행에 매진한 존재가 천재적인 재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 그 말에서, 이성민은 북쪽에서 만난 인외종의 정점들을 떠올렸다.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는 60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다. 광랑이라 불렸던 주원도 수백 년은 살았을 것이다.
- “그들이 바로 천외천天外天일세. 인간이면서 수백 년을 살아 온 자들도 있고,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들도 있어.”
- 광천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대뜸 웃옷을 벗었다. 벗어제낀 광천마의 몸에는 길쭉한 검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 “10년 전. 천외천의 육존자六尊者 중 하나인 검존劍尊에게 당한 상처일세. 지금의 본좌라 하여도 검존을 상대로 백 초나 버틸지 자신할 수가 없어. 아마… 머지 않아 자네도 천
- 외천과 만나게 될 것이야. 그들은 새로이 나타난 강자를 시험하려 드니까.”
- 천외천과 육존자. 이성민은 광천마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삼류 용병이던 시절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당시 이성민이 속해 있던 세계의 정점은 코로나 용병단의 단
- 장인 제온이었다. 하지만 그 제온은 프레스칸에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 생각해 보면 베헨게르 이후에서부터 이성민의 세계는 크게 확장되었다. 전생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대단한 인물들을 연달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성민은 자신의
- 세계가 얼마나 작고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되었다. 광천마의 말대로다. 비록 그것이 봉우리라고 해도, 그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야만 다른 산이 얼마나 높은지
- 볼 수 있는 것이다.
- ‘너는 얼마나 높이 있을까?’
- 위지호연은.
- 다리를 꼬고 앉아 맞은편에 앉은 상대를 보았다. 그는 낡은 피풍의에 큼지막한 삿갓을 쓰고 있었다. 던전에서 취한 새카만 옷과 흑룡포를 몸에 휘감은 위지호연은 아직 나이는 어
- 렸어도, 존재 하나만으로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서 그녀는 은밀한 기세를 내비치며 상대를 피풍의의 사내를 위협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는 위지호연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손님 하나 없는 낡은 객잔의 중앙에 마주 앉은 둘은 한참 동안 그런 식으로 침묵을 나누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 사내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탁자 위의 찻잔을 잡았다.
- “차가 식었군.”
- 남자가 중얼거렸다. 남자의 손이 찻잔을 어루만졌을 때. 차갑게 식은 차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다시 뜨겁게 식은 차를 후룩 마시면서 삿갓 아래의 눈동자로 위지호연의
- 얼굴을 응시했다.
- “장고長考 할 만한 일인가?”
- 남자가 묻는다. 팔짱을 끼고 있던 위지호연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내뿜던 기세를 거두었다.
- “갑작스러운 일이라.”
- “대부분의 만남이 그런 법이지.”
-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내려 놓았다. 삿갓에 말아 넣었던 은발이 출렁거리며 쏟아진다. 위지호연은 길쭉하게 뻗은 남자의
- 귀를 힐긋 보았다. 남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와 길고 뾰족한 귀. 남자는 엘프였다.
- “천외천.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체인데.”
-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는 실존하고 있어.”
- “왜 나를 천외천에 들이고 싶다는 것이지?”
- “너에게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 남자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이 객잔. 위지호연으로서는 우연히 들어 온 것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말라서, 배도 고파서.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객잔
- 으로 들어왔는데, 그 시점에서부터 남자는 이미 객잔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는 위지호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천외천과 함께 하자는 말.
- “장고한 것은 아니야. 그냥 심드렁했을 뿐이지.”
- 위지호연이 입을 열었다.
- “그리고 불쾌하기도 해. 너는… 나를 알고 있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 “그렇지.”
- “하지만 나는 너를 몰라. 천외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심드렁하고 불쾌한 거야.”
- “자기 소개가 늦어 불쾌한 것이라면 사과하지.”
-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천외천의 육존자, 그 중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는 권존拳尊이라고 한다.”
- 천외천, 육존자, 권존. 위지호연은 입술을 벌려 그것들을 중얼거렸다. 태연해 보이지만 위지호연은 조금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천외천이라는 단체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 육
- 존자라는 이들도, 또 권존이라는 별호도 처음 들어 본다.
- ‘놀라워.’
- 에리아에서 살아 온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위지호연은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어려움이라는 것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위지호연이
- 만난 자들은 모두 다 위지호연보다 약했다.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대단한 강자였지만, 그 몬스터도 위지호연보다는 약했다.
- 하지만 눈 앞의 사내는 어떠한가. 엘프라는 종족은 처음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지호연이 엘프에 대해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엘프. 숲의 가호를 받아 길게는 1000년을 살아
- 가는 종족. 위지호연은 삐딱하니 머리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 불쾌했던 것이 아니야. 육존자, 권존…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천외천이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는 것이지.”
-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지는 않아. 그냥… 적적하지 않은가? 한 분야의 정점에 서게 되면 필연적으로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지. 그 고독은 대부분 광기를 불러 오고.”
- 권존은 웃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나만 해도 벌써 사백 년을 살아왔어. 사백 년의 대부분은 권법에 매진했고… 후후! 미쳐버릴 수밖에 없지. 엘프라는 종족은 너무 오래 살아. 사백 년을 살아 온 나도, 지금까
- 지 살아 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아 가야 할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말이지.”
- “꺼져.”
- 위지호연은 권존의 말에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권존이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 “…내가 잘못 들었나?”
- “아니. 바로 들었어. 꺼져.”
-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을 잡았다. 그녀는 차게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 “그깟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모인 놈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따위는 없어. 그리고 말이야. 그런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대답을 회피하려는 놈들은 속내가 구리기 마련이고.”
-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잖나?”
- 권존이 표정을 고치면서 말했다. 그 말에 위지호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 “봐봐. 대놓고 말해줄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 너… 구린내가 나. 아주 심한 구린내가.”
- “접근 방법이 잘못 되었던 모양이군.”
- 권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권존이 걸치고 있던 피풍의가 사납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얌전하게 느껴지던 기도가 미쳐 날뛰면서 권존을 중심으로 태산같은 기세가 일
- 어났다.
- “가능성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여 어르고 달래려 하였는데… 너는 너무 무례해. 말석으로 들이기 전에 예의범절을 가르쳐 두는 것도 좋겠군.”
- “너는 참 이상하구나.”
- 위지호연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싫다고 했고, 이렇게 모욕하였는데. 네가 생각하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천외천에 들이겠다는 말이군. 왜일까… 왜 그렇게까지 나를 천외천으로 들이려 하는
- 것이지?”
- 권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지호연은 힘을 내보이는 권존을 향해 쿡쿡거리며 웃더니 손을 들어 코를 잡았다.
- “말했잖아. 악취가 난다고.”
- 피 냄새도 난다. 객잔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냄새. 위지호연이 객잔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 객잔에는 권존을 제외하고서 아무도 없었다. 두 명 분의 찻잔만 덩그러니 놓여있었을
- 뿐. 죄없는 객잔 주인과 그 식솔을 죽였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속박하려 드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 “그리고 말석?”
- 위지호연이 손을 들어 올렸다. 흑룡포가 위지호연의 팔을 휘감았다.
- “무례한 건 너로구나.”
- 높은 웃음소리와 함께 객잔 건물이 무너졌다.
- ======================================
- < 혈천마-1 >
- 이성민은 아까 전에 빠져나왔던 북쪽 성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성민의 뒤를 따라오던 광천마는 헛웃음을 흘리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 “이게 트라비아란 말인가.”
- 직접 와 본 적은 없지만 북쪽의 제일가는 대도시, 트라비아에 대해서는 광천마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광천마는 지금의, 폐허처럼 변해 버린 트라비아를 보고서 놀랄 수밖
- 에 없었다.
- “북쪽에 와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무던히도 들었지. 혈천마… 멍청한 무선이 녀석.”
- 광천마가 중얼거리는 말에 이성민을 그를 힐긋 보았다. 그 말은 꼭, 광천마가 혈천마를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혈천마와 만났던 적이 있습니까?”
- “오래 전에.”
- 광천마가 내뱉었다.
- “거의 십 년도 전이지. 본좌가 광증을 앓던 이전의 일이고, 무선이 놈이 트라비아를 터전으로 잡기도 전의 일이니까 말이야.”
- 광천마는 그때의 혈천마를 떠올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의 혈천마는 찬란한 재능으로 빛나는 어린 고수였다. 광천마는 당시의 혈천마를 보고서, 머지않아 좋은 적수가
-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 “넌 북쪽에 볼 일이 남아 있나 보지?”
- 광천마가 이성민에게 물었다.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 “그렇다면 본좌도 볼 일을 보고 싶은데.”
- “혈천마를 만나려는 겁니까?”
- “오래 전이라 해도 인연이 있었던 놈이고, 소문만 들었을 뿐이지만 놈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선배 되는 몸이니 한 번 만나 이야기 정도는 나누고 싶군.”
- 광천마와 굳이 같이 다닐 필요는 없어 보였다. 프레스칸과 다투게 되었을 때 광천마가 곁에 있어 준다면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허주가 말했다.
- [이 도시가 제니엘라의 영역이고, 네놈은 제니엘라의 관심을 받고 있어. 그 프레스칸이라는 리치가 얼마나 강할지 몰라도 제니엘라만큼은 아니겠지.]
- 이성민은 위를 힐긋 보았다. 프레스칸의 사역마는 아직까지 머리 위를 떠돌고 있었다. 굳이 이성민 쪽에서 찾아 갈 필요는 없었다.
- 광천마와는 사흘 후, 북쪽 성문 근처의 여관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 이후 광천마는 곧바로 떠났다. 광천마가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혈천마를 찾을 생각인지는 알
- 수 없었으나, 그것은 광천마의 문제였다.
- 이성민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왔고, 하늘 높이 떠있는 프레스칸의 사역마는 이성민을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 “보고만 있을 건가?”
- 이성민이 위를 올려 보며 물었다. 그러자 사역마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이성민은 사역마 너머에 있는 프레스칸을 뚫어져라 보았다.
- “피차 만나고 싶은 것은 똑같은 것 같은데. 어때? 네가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면, 바로 찾아가도록 하지.”
- 그 말에 사역마가 홱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이성민의 눈높이까지 내려 온 까마귀가 부리를 연다. 딱딱거리며 부리가 몇 번 부딪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저귐 대신에 새어나왔
- 다.
- “시건방진 새끼.”
- 까마귀가 사나운 투로 내뱉었다.
-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당당한 것이냐? 남이 평생을 바쳐 만든 심장을 도둑질한 주제에…!”
-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네 잘못이잖아. 그리고 나도 갖고 싶어서 갖게 된 것이 아니야.”
- “그걸 말이라고…!”
- “너한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 이성민은 까마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까마귀의 부리가 닫혔다.
- “내 몸에 있는 심장. 이게 대체 뭔지 난 도저히 모르겠거든. 그래서 이걸 만들어낸 너에게 직접 듣고 싶거든.”
- “그렇게 말하면, 내가 당연히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 “만나서 얘기하던가.”
- 이성민이 내뱉자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웃었다.
- “성문 밖으로 나가 있어라. 그러면 내가 찾아가도록 하겠…”
- “아니. 안 나가.”
- 이성민이 빠르게 대답했다.
- “그냥 이 도시에서 몇 달 동안 묵을 생각이거든. 아니면 뱀파이어 퀸의 저택으로 가던가.”
- “뭐라고…?”
- “퀸이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나 봐. 언제든지 저택에 들러서 사용해도 좋다고 말해주더군. 마땅히 묵을 곳도 없으니, 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지.”
- “이 놈…!”
- 사역마 너머로 프레스칸이 부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놈의 반응을 통해 이성민은 확신을 얻었다. 트라비아 안에서 프레스칸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다. 트라비아 밖이라면 아
- 이네를 통해 습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한 모양이었지만, 도시 안에서는 그럴 수 없다.
-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
- 프레스칸의 표정이 움찔 떨렸다.
- “이 심장을 몸에 넣게 되었을 때. 던전 바닥에서 죽어가던 로이드를 내가 구해줬었지.”
- “쓸데없는 짓을 했군.”
- 프레스칸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 “어쨌든 말이야. 그때 내 몸에 심장이 박혀있었는데… 로이드는 그를 알지 못하더군. 이것에 대해 로이드에게 알려주면 어찌 될까?”
- “미친놈!”
- 이성민의 이죽거림에 프레스칸이 꽥하고 비명을 질렀다. 프레스칸으로서는 제니엘라와 대적하는 것보다 로이드에게 검은 심장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이 더욱 끔찍하고 싫은 일이었다.
- 오랜 마법사인 로이드는 심장의 가치를 알아 볼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저 심장을 연구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프레스칸으로서는 평생 연구해 도달한 비원을 다른 마법사에
- 게 멀뚱히 빼앗기는 꼴이 되어 버린다.
- “싫지? 네가 심장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준다면, 로이드에게 심장에 대해 말할 일은 없을거야.”
- “이 미친놈. 나랑 거래라도 하자는 거냐?”
- “아니. 협박이지.”
- 이성민은 빠르게 내뱉었다. 까마귀가 발작하듯이 몸을 뒤튼다. 더 이상 날개를 퍼덕거리지도 않고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른다.
- “개자식.”
- 까마귀가 부리를 쩍 벌리더니 내뱉었다.
- “맹세할 수 있나? 로이드에게, 그리고 다른 마법사에게 그 심장의 존재를 말하지 않겠다고.”
- “맹세하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 이성민이 곧바로 대답했다. 까마귀의 눈을 통해 이성민을 노려보던 프레스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검은 심장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포식’과 ‘진화’다.”
- “알기 쉽게 말해.”
- “…다른 존재의 심장을 먹는 것으로 심장 주인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영약 같은 힘을 정제한 덩어리를 먹을 때에도 정제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지.”
- 그 말을 통해 이성민은 아이네가 쓰던 백보신권과 무공, 강기. 그리고 대환단을 복용했을 때 정제 과정 없이 곧바로 단전에 힘을 쌓던 것을 이해했다.
- “그를 통해 심장은 계속해서 진화한다. 더 강하게, 더 뛰어나게. 내 사랑스러운 딸, 아이네는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육체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심장이 가진 진화의 가능성을
- 그대로 펼칠 수 있지. 하지만 네놈에게는 불가능하다. 네놈은 인간의 육체에 심장을 박은 것뿐이니까.”
- 팔다리의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고, 몸에서 촉수와 날개 따위를 만들어내던 아이네의 모습. 그것을 보고 이성민도 혹시나 싶어 촉수를 꺼내려 시도해 보았었지만, 이성민은 촉수를
-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의몸뚱이가 아이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그 외에 다른 것은?”
- “…심장이라는 것은 극한의 가능성을 담은 것이야. 포식을 거듭하여 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담고 있고, 내가 그를 통해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은 모든 존재보다 우월한 궁극의 생
- 명이다. 심장을 창조한 나조차도 그 궁극이 어떤 곳에 있는지 모른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애매모호한 것이니까.”
- “결국은 너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군.”
- 그렇게 답하는 이성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담겼다. 그런 이성민의 대답에 프레스칸이 까마귀의 부리를 딱딱 부딪히면서 외쳤다.
- “네놈의 가슴으 갈라 심장을 확인한다면 보다 자세한 것을 알 수 있겠지!”
- “그렇게 해 줄 생각은 없어.”
- “트라비아를 나가기만 해 봐라. 내가 반드시 너를…!”
- “그러시던지.”
- 이성민은 원독에 찬 목소리로 외치는 프레스칸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발을 들어 까마귀의 몸을 밟아버렸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의 몸뚱이가 마력이 되어 흩어졌다.
- ‘결국 제대로 된 답은 못 얻었어.’
- 포식과 진화, 그리고 가능성. 포식이라는 것에는 그리 시선이 가지 않았다. 인간의 심장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 온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
- 만 진화와 가능성 쪽에서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 처음으로 아이네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리고 이후에 검귀와 싸웠을 때.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이성민은 강기를 깨달았고, 검귀와의 싸움에서 당시의 이성민에게는 불가능한 창로에
- 도달했다.
-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어져 심장이 몸을 진화시킨 것인가?
-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결국 휘둘렸을 뿐인가.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부할 수 있었다. 정신세계에서의 수련. 거기서의 2100
- 년 동안 이성민은 심장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그곳에 가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민 본인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 “이제 어디로 가나요?”
- 이성민의 품 안에 숨어 있던 루비아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 “중앙 지구로 돌아갑시다.”
- 북쪽으로 나가 광천마와 만났다. 그런 만남을 겪은 이상 더 이상 북쪽으로 나가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다시 중앙지구로 돌아가 올해의 남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 .
- 이성민이 중앙지구로 향하고 있을 때, 광천마는 눈에 거슬리는 놈들을 죄다 붙잡고서 두들겨 패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부랑자를 두들겨 패고, 그 뒤에는 시끌벅적한 식당과 주점으
- 로 들어가 다시 두들겨 패는 것을 반복했다.
- “혈천마는 어디에 있느냐?”
- 광천마는 꾸준히 그것을 물었다. 막무가내인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왠 놈을 된통 두들겨 패주고, 곁에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아 주먹을 든 순간. 놈이 바로 혈천마 백무선
- 이 어디에 있는지 불어버렸기 때문이다.
- 사실 그것은 대단한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광천마는 혈천마의 거처에 대해 말한 놈의 멱살을 쥐고서 안내를 맡겼다.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죽여버리겠노라고 엄포를 놓는
- 것도 잊지 않았다.
- 놈이 안내한 혈천마의 거처는, 중앙 지구 외곽의 낡은 주택이었다.
- “음.”
- 대뜸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 온 광천마는 풍기는 진한 술 냄새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안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들뜬 신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광천마는 얼
- 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성큼거리며 소리가 난 방으로 들어갔다.
- 가관이었다.
- 방 바닥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방 안에는 이상야릇한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광천마는 연기를 내뿜는 향로를 힐긋 보았다.
- “마약에 술, 여자까지. 완전히 망가져 버렸구나.”
- 광천마의 중얼거림에 백무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밑에 깔려 신음을 내지르던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백무선을 보던 여자는, 백무선의 손에 짓눌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 “…누구신가 했더니…”
- 백무선은 킬킬 웃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지만 그는 부끄러움 하나 느끼지 않았다. 광천마는 짜증으로 일그러진 눈으로 백무선을 보았다.
- 어깨 죽지부터 잘려 있는 백무선의 왼 팔을 보고서 광천마는 작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 “대체 뭐하고 있는 것이냐?”
- “대충… 10년 만 아닙니까?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 놓고서는 훈수까지 두려 하십니까.”
- “뭐하고 있는 것이냐 물었다.”
-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 백무선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는 손을 적신 핏물을 침대보에 대충 닦으면서 깊이 숨을 마셨다. 광천마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닫힌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 닫힌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광천마의 손길에 따라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약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 “너무하시는군.”
- 백무선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 “10년 만에 만나 반갑기는 한데…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닙니까?”
- “본좌의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는 네가 훨씬 더.”
- “여긴 내 집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무엇을 하던 간에 어르신이 알 바는 아니지요.”
- “대체 왜 그렇게 망가져 버린 것이냐?”
- “10년 전과 똑같으시군.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궁금한 것만 묻는 것은.”
- 백무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술병이 둥실 떠오르더니 백무선의 손아귀로 날아갔다.
- “가진 자질에 절망하고 현실에 절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 해서 무엇 하느냔 생각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로는 재미가 부족하여 마약도 해보았지요. 여자도 안고.”
-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전락했다는 것이냐…!”
- “권장법을 쓰는 내가 왼 팔을 잃었습니다. 절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 “외팔이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 “나는 아닌 모양입니다.”
- 백무선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소천마 위지호연과 만난다면 어르신도 내 말에 공감하게 될 겁니다.”
- “이 미친놈!”
- 광천마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백무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무선은 광천마의 장력을 피하지 않았다. 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백무선의 몸이 침대 위를 뒹굴었다.
- “고작 한 번의 패배 가지고!”
- “누구에게 패배 당했냐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 “북쪽 도시에 처박혀 있으면서 세상이 넓음을 잊고 있던 모양이구나. 이 우물만큼 작은 곳에서 왕처럼 군림하다 보니 진정으로 천하제일이 된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냐?”
- “분수를 알았다고 해둡시다.”
- 백무선이 잘린 팔을 손으로 감싸며 대답했다.
- “나는 말입니다, 어르신. 북쪽에서 그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남하하여 정말로 천하제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무인
- 중에서 나보다 나은 놈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고작해야 스물 둘 먹은 계집애에게 패배한 겁니다. 그냥 패배한 것이라면 극복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소
- 천마, 그 괴물이 가진 부조리할 정도의 재능과 강함은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던 나 자신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지요.”
- “이 병신 같은 놈.”
- 광천마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 “소천마, 그 계집이 스물 둘이라 했느냐? 에라이 등신같은 놈아. 나이가 대체 뭐라고! 당장 나는 아까 전에 스물 셋 처먹은 놈에게 뒈질뻔 했는데!”
-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 혈천마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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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천마-2 >
- 사흘이 지나고서, 이성민은 광천마와 다시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잡았던 북쪽 성문 근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숙식할 예정은 없었기 때문에 1층의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
- 아 앉아 있으니, 품 안에 들어가 있던 루비아가 슬며시 몸을 빼내더니 빛의 구체에서 수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 “안 오는 것 아닌가요?”
- “올 겁니다.”
- 그에 대해서 이성민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광천마는 이성민의 말을 완전히 거역할 수가 없다. 그것은 광천마의 몸 안 깊이 새겨진 허주의 요력 때문이고, 광천마가 오겠다고
- 한 이상 그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다.
- [그럴 수밖에 없지. 놈이 도망친다면 놈의 몸 안에 있는 내 요력이 발작할 거야.]
- 허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성민도 그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 사흘 동안, 이성민은 중앙 지구의 여관에서 숙식했다. 제니엘라의 저택에 가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가지 않았고, 김종현의 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 둘은 이성민으로서는 속내도 알
- 수가 없었고 통제도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종현의 속내가 신경쓰였지만, 괜히 얽히고 싶지 않아 아예 접근하지도 않았다.
- 그렇게 사흘을 보냈다. 그 사흘 동안 이성민은 광천마와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을 갈무리했다.
- 사실 그것은 심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 알고는 있었어도 펼치지 못했던 것들을 확실하게 체득한 것뿐이다. 정신세계에서 도달했던 무위까지는 아직 까마
- 득했지만, 느릿하게 성장하던 몸뚱이가 광천마와의 생사결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이게 진화인가.’
- 이성민은 왼쪽 가슴을 꾹 누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프레스칸에게 들었던 심장의 능력은 포식을 통한 진화. 그 중 포식은 도저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진화는 이성민
- 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몸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그 진화하는 방향의 끝에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점이었다.
- 현재 이성민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성민 자신이었다.
- 루비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1층 식당의 문이 열린다. 이성민은 머리를 돌려 문을 보았다. 광천마가 성큼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 “…뭡니까?”
- 이성민은 광천마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보면서 물었다. 남자는 큼직한 옷을 입어 체구를 알 수가 없었으나, 왼 팔 소매가 부는 바람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에 외팔이라는
- 것은 알 수 있었다.
- “…크흠.”
- 광천마는 이성민에게로 다가오면서 헛기침을 뱉었다. 이 갑작스런 만남에 대해 이성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스스로도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광천마를 보지
- 않고,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백무선을 빤히 보았다. 외팔이라는 것도 그렇고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그것을 통해 이성민은 상대가 그 유명한 백무선이라는 것을 알고
- 있었다.
- “…어이가 없군.”
- 먼저 입을 연 것은 백무선 쪽이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성민을 보다가, 광천마를 돌아보았다.
-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겁니까?”
- “무슨 거짓말 말인가?”
- “나는 어르신을 죽일 뻔 했다는 젊은 고수에게 흥미가 있던 겁니다.”
- 백무선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 “저 놈. 제법 뛰어나다는 것은 알겠지만 어르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나를 기만하신 겁니까?”
- “본좌는 사실을 말 했을 뿐이다. 나는 틀림없이 저 녀석의 창에 죽을 뻔 했다.”
- 광천마가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움켜 쥐었던 이성민이, 평소의 이성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을 둘째치고서라도 이성민의
- 창이 광천마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위협에 놀라 혈환신마공의 오의를 펼쳤고, 만약 오의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의 창이 광천마를 죽였을 것이다
- .
-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비견되는 천재.”
- 백무선이 힘을 주어 말했다.
- “어르신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금을 잔뜩 칠하셨군.”
-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서 광천마는 헛기침을 뱉었고, 백무선은 다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삐딱하니 머리를 기울이고서 백무선을 보았다.
- “당신이 그 유명한 혈천마 백무선입니까?”
- “한때는 유명했겠지. 아니면 지금도 나쁜 의미로 유명하던가.”
- 백무선은 광천마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여 불쾌한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성민의 맞은편에 앉고서는 식당 종업원을 불러
- 세웠다.
- “술.”
- 백무선이 짤막한 주문을 명령하는 동안 광천마는 냉큼 백무선의 곁에 앉았다.
- [대체 뭐하는 겁니까?]
- 이성민은 광천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광천마는 백무선의 눈치를 힐긋 살피더니 대강의 상황에 대해 이성민에게 알려 주?었다. 백무선이 위지호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으로 인해
-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 무인으로서 완전히 망가져서 처참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 [그게 나랑 뭔 상관입니까?]
- [놈은 세상이 넓다는 것에 절망해 버렸네. 그러니까 자네가 좀…]
- [내가 그에게 뭘 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 [사실 자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
- 광천마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백무선이 주문한 술이 나왔다. 잔조차 쓰지 않고 벌컥거리며 술을 마시는 백무선을 힐긋거리며 광천마가 말했다.
- [친구라도 하는 것이 어떤가?]
- “이런 미친.”
- 광천마의 말에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내뱉고야 말았다. 친구는 무슨. 대뜸 이렇게 마주앉혀 놓고서는 친구를 하라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 [아 그런데… 사흘 동안 자네에게 따귀를 못 맞았는데. 괜찮은 것인가?]
- 광천마가 내심 불안해 하던 것에 대해 물었다. 그것에 이성민은 냉큼 대답했다.
- [매일 주문은 틀림없이 외웠겠지요?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따가 저한테 밀린 따귀를 한꺼번에 맞으십시오.]
- [알겠네.]
- 이성민과 광천마가 그런 전음을 나누는 사이에 백무선은 술 한 병을 통째로 비웠다. 그는 술냄새 가득한 숨을 내뱉고서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듣지 못했군.”
-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 “처음 듣는 이름인데.”
- 귀창이라는 별호는 제법 유명한 것일 텐데도 백무선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위지호연에게 패배를 겪고서 백무선이 바깥의 소문 따위에게 완전히 관심을 거둔 탓이었다.
- “네가 광천마 어르신을 죽일 뻔 하였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 “어르신이 그랬다고 말했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 “웃기는 군.”
- 이성민의 대답에 백무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성민은 백무선에게서 느껴지는 짜증과 삐딱한 태도에 내심 짜증을 느꼈다. 그는 손을 쥐었다 펴면서 물었다.
- “뭐가 웃기다는 겁니까?”
- “네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야. 실력은 뛰어나지… 그건 인정해. 하지만 광천마 벽원패를 죽일 정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군.”
- “그래서?”
- “운이 좋았거나. 어르신이 방심했거나.”
- 백무선이 이죽거렸다. 백무선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이성민이 입을 열었다.
- “그러면 당신은 방심해서 소천마에게 팔이 잘렸습니까?”
- 그것은 백무선의 역린이었다. ‘소천마’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백무선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광천마도 뺨을 움찔 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하지만 이성민의 표정은 평온했다.
- 자신이 말한 것이 백무선의 역린이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짜증을 숨기지 않고 시비 걸 듯이 말하는 백무선이 엿 같은 것은 이성민도 똑같았다.
- “…죽고 싶으냐?”
- “아니. 정말 궁금해서 물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자유인데… 나는 반 년 전쯤에 소천마와 만났었거든요.”
- “뭐?”
- 백무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란 것은 광천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민은 자신을 보는 광천마를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
- “예전에,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에리아에는 세 명의 천마가 있다고. 소천마 위지호연. 혈천마 백무선. 광천마 벽원패. 어쩌다 보니 나는 그 세 명을 모두 만나게
- 되었군요. 소천마는 의심할 여지 없는 괴물이었고, 광천마 어르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 “닥쳐라.”
- 백무선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성민이 뒤 이어서 할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성민은 혈천마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면서 말을 이었다.
- “둘과 비교해서 가장 떨어지는 군요.”
- 광천마는 둘을 말리지 않았다. 광천마는 내심 지금의 상황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백무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은 압도적인 존재에 대한 열등감이다. 광천마는 위지호연을 직
- 접 만나 본 적이 없었으나, 그 백무선이 저리도 절망할 정도이니 위지호연이 어느 정도의 괴물인가에 대해서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 가장 좋은 것은 위지호연과 다시 한 번 싸워보는 것일 테지만. 위지호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상 그런 방법은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상이 넓다는 것을 확실하
- 게 알게 만드는 편이 좋을 것이다. 위지호연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고수와 비등한 싸움을 벌인다면 백무선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광천마다운 무식한 고육지책이기는 했지만, 백무선은 광천마가 바라던 대로 움직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성민을 노려 보았다. 백무선의 발 아래에서 시뻘건 안개가
- 몽글거리며 솟구쳤다. 백무선에게 혈천마라는 별호를 주어 준 혈무유야공血霧幽夜功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 “한 팔로 괜찮으시겠습니까?”
- 이성민은 백무선을 올려 보면서 물었다. 그 질문은 도발이었다. 호기심과 욕심이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위지호연은 백무선과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그의 왼 팔을 잘랐다. 그 몇
- 년 전의 위지호연. 지금의 위지호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위지호연이 혈천마의 팔을 잘랐단 말이다.
- 그때의 혈천마와 지금의 혈천마를 비교해 본다면. 왼 팔이 잘린 혈천마가 몇 년 전의 혈천마보다 약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 온 것일까.’
- 위지호연과 싸워 본 혈천마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면 어디까지 온 것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성민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생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일들이다.
- 과거로 회귀한 이후로 전생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과 만남을 맞닥트리고 있다. 13년의 세월을 살아 C급 용병에 그쳤던 이성민이라는 인간이, 지금은 북쪽 트라비아에
- 군림했던 혈천마 백무선과 싸우려 한다. 그 뿐인가. 이미 광천마와도 싸워 보아 살아남았다. 이성민은 감정이 고양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못 살아, 정말…!”
- 이성민의 곁에서 귀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루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살기가 줄줄 묻어나오는 눈으로 이성민을 노려보던 혈천마는, 식탁 위의 술병을 낚아 챈 뒤에
- 홱하고 몸을 돌렸다.
- “밖으로 나와라.”
- 열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대뜸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면 백무선은 제법 이성적인 성격인 모양이었다. 성큼거리며 식당을 나서는 백무선의 뒤를 보던 이성민은 광천마 쪽을
- 힐긋 보았다.
- “따귀 맞을 준비나 하고 계십시오.”
- “크흠!”
- 광천마가 모르는 척 헛기침을 뱉었다.
- 이성민은 창을 꺼내 쥐고서 밖으로 식당 밖으로 나왔다. 거리 중앙에 선 혈천마는 붉은 안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부랑자와 양아치 따위를 제외하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북쪽
- 지역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저거… 혈천마 아닌가?”
-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무선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서 식당에서 나오는 이성민을 노려 보았다.
- “헛소리를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 백무선이 이성민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이성민은 창을 들어 올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 “할 수 있다면야.”
- “시건방진 놈…!”
- 백무선이 거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가 오른 팔을 번쩍 들어올리자 혈무유야공의 붉은 안개가 크게 부풀었다. 그것은 백무선의 손길에 따라 죽음의 행진이 되어 이성민을 향해 덮
- 쳤다. 이성민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무영탈혼의 일보무흔은 몰아치는 안개를 뛰어넘고서 백무선과의 거리를 좁혔다.
- 백무선은 코웃음을 치면서 발을 크게 들어 올렸다. 쏘아졌던 안개가 흩어져 사라지더니 다시 그를 중심으로 붉은 안개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성민은 창을 내지르는 것을 그만두
- 고서 상체를 홱하고 돌렸다.
- 꽈앙!
- 휘둘러 친 창준과 붉은 안개가 충돌했다. 안개라 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저항감. 이성민은 백무선의 혈무유야공이 어떤 무공인지 대
- 충 깨달았다.
- ‘안개 자체가 강기로군.’
- 강기공이라는 점에서는 광천마의 혈환신마공과 같았지만, 추구하는 바는 완전히 다른 것 같았다. 안개의 중심에 선 백무선이 이성민을 노려 보면서 이죽거렸다.
-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 “…뭘 얼마나 보여줬다고.”
-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쥐고 있는 창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지금의 이성민은 꽤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 광랑 주원. 뱀파이어 퀸 제니엘라.
- 광천마 벽원패. 연달아 마주쳤던 저 괴물들과 마주했을 때에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긴장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
- ‘편하군.’
-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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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천마-3 >
- 떠도는 안개의 중심에서 백무선은 이성민을 노려 보았다. 창을 앞으로 세우고서 정지한 이성민에게서 파고 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 ‘몸이 굳었군.’
- 백무선은 새삼 그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3년이 흘렀다. 위지호연에게 한 팔이 잘린 후로. 처음에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무공 수행에 박차를 가했으나, 그로부터 그리 오랜
- 시간이 흐르지 않아 백무선은 무공의 수행을 그만두었다. 해봤자 소용없다는… 그 현실을 마주해 버린 탓이다.
- 그 이후로는 술에 빠져 살았다. 마약도 해보았고, 여자도 물리도록 안았다. 이렇게 될 것임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마음을 다잡고 무공을 다시 펼치려 할 때. 그간의
- 게으름과 절망으로 무뎌지고 굳어진 몸뚱이가 원망스러울 것임을.
- ‘아니. 오늘은 아니야.’
- 백무선은 스스로에게 내뱉으면서 오른 손을 꽉 쥐었다. 이성민이라고 했던가. 나이에 비해서 눈 부실 정도로 높은 성취라는 것은 인정한다. 10년 쯤 전, 백무선이 이성민의 나
- 이였을 때에도 저 정도의 성취는 거두지 못했다.
- 하지만 경악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부조리할 정도도 아니었다. 무뎌지고 둔해졌다고 하나 백무선은 혈천마였다. 왼 팔이 잘린 외팔이라고 해도 그는 혈천마 백무선이었다.
- 떠돌던 안개가 더욱 크게 확장한다. 백무선은 이성민을 얕게 보았다. 완성된 반박귀진은 성취를 숨기지만, 백무선이 이성민을 얕게 본 것은 반박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 자존심이었다.
- 위지호연을 만나기 전의 백무선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동년배의 고수 중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 초월지경에 들어설 것이라고
-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지호연에게 패배를 겪어 절망하게 되었고, 그 높았던 자존심이 백무선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 그것은 위지호연이 특출 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부조리할 정도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 ‘너는 위지호연이 아니야.’
- 그런 섣부른 판단.
-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빠른 공격이었고, 백무선의 섣부름을 질책하는 듯 한 매서운 쾌快였다. 그 시점에서도 백무선은 자신의 혈무유야공을 믿고 있었으며, 이성민의
- 얕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 쿠우우우웅!
- 극쾌의 절명섬은 소리보다 빠르다. 눈으로 쫓는 것도 힘든 그 극쾌의 찌르기는 일격으로 혈무유야공의 방어를 뒤흔들었다. 찌름이 얕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 ‘일격에 파훼하기는 힘들어.’
- 절명섬은 극쾌만을 추구한다. 두터운 방어를 꿰뚫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성민은 미련 없이 창을 회수하고서 발을 움직였다. 무영탈혼의 삼식인 이보겁살은 단 두 걸음
- 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것을 추구한다. 이성민은 강기만을 다루는 강기공은 배우지 않았으나, 무영탈혼은 걸음만으로 자연스럽게 강기를 유도하는 보법이다.
- 이보겁살의 강기가 사납게 폭사했다. 백무선은 휩쓸어 오는 강기의 거셈에 흠칫했다. 이보겁살과 혈무유야공이 충돌했다. 백무선은 안개가 흐트러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 그는 급히 오른 손을 휘둘러 이성민의 진로를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백무선의 손이 휘둘러지기 전에 쏘아진 창이 백무선의 가슴팍으로 쏘아졌다.
- “놈!”
- 백무선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는 휘두르던 오른 손을 가슴 앞으로 당기더니 활짝 펼친 손을 반 바퀴 돌렸다. 흐트러지던 안개가 회전하더니 그 흐름에 이성민의 창이 휘말린다.
- 창을 쥔 손이 회전에 휘둘린다. 이성민은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창로를 바꿔버렸다. 회전과 회전이 더해지고, 이성민의 발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백무선은 두어
-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꽈아앙! 엉킨 강기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 방금의 초수 교환을 통해 백무선이 본 이성민의 경지는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력 싸움에서 조금의 이득도 보지 못했다. 그것에 백무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 이를 악물고서 내력을 더욱 끌어 올린다. 혈무유야공이 극성으로 펼쳐졌다. 사방으로 뿜어지는 붉은 안개의 색이 더욱 진해졌다. 그것은 이제는 안개가 아니라 공중에 붉은 물감을
- 들이 부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백무선은 과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왼 팔 소매를 펄럭거리며 이성민에게 뛰어들었다. 꽝꽝 내리 찍는 발이 땅을 밟을 때마다 지진이라도
- 난 것처럼 주변이 뒤흔들리고 안개가 들끓었다. 활짝 펼친 백무선의 일장이 이성민의 몸으로 쏘아졌다.
- 광천마의 장법만큼 거친 묵직함은 덜했으나 뒤따르는 안개의 기묘함이 거슬린다. 이성민은 손 안에서 창을 빙글 돌리면서 구천무극창의 일초, 추혼일살을 뻗었다. 절명섬처럼 빠르
- 지는 않지만 다른 준비동작 없이 바로 펼칠 수 있어 범용성이 좋은 초식이다.
- 꽈앙! 창과 손바닥이 충돌했다. 서로 강기를 덧칠했다고는 하나 울려퍼지는 소리는 살로 이루어진 손과 창이 부딫힌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백무선은 반사적으로
- 왼쪽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왼 손을 써서 장법을 더하려는 것이었으나, 지금의 백무선에게 왼 손은 없다. 일상생활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무공을 겨루는 것에서 왼 팔이 없다는
- 것은 아직까지 백무선에게는 어색했다.
- ‘무뎌졌어…!’
- 그런 뒤늦은 후회. 백무선은 왼 팔이 없음을 새로이 자각하고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온 몸을 사용한 무투에 능했고, 그의 장기는 양 손을 사
- 용하는 권법이나 장법만이 아니었다. 이성민은 꺾어 차오는 발뒤꿈치를 피해 자세를 낮추었다. 동시에 창을 잡은 양 손을 아래로 깊이 내려 백무선의 하체를 노렸다. 창이라고 해
- 서 찌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찌르고 회수할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휘둘러 때리면 될 뿐이다.
- 스스로 무뎌졌다고 자책하기는 했어도 백무선은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한때 혈천마라는 별호로 불리던 백무선은 여전히 뛰어난 고수였다. 그는 다리를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땅
- 을 딛고 있던 왼 발을 튕겨 공중으로 도약했다. 백무선은 디딜 곳 하나 없는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면서 자세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더니 높이 들어 올린 오른 발을 이성민의
- 정수리를 향해 내리 찍었다.
- 일보무흔을 펼쳐 백무선의 공격을 피한다. 잔상을 머리 위부터 짓누른 백무선의 발은 땅 전체를 뒤흔들고 금이 가게 만들었다. 백무선은 홱하고 몸을 돌려 이성민은 쫓아 일장을
- 때렸다. 붉은 안개가 길게 쏘아지면서 이성민을 덮치려 들었다. 이성민은 즉시 분뢰추살을 펼쳐 백무선의 장법을 밀어냈다.
- 백무선은 뻗어낸 장법에 미련을 두지 않고서 이성민과의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창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게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성민은 백무선이 뛰어 들어오는 것
- 을 보며 호흡을 멈추었다. 창을 잡은 양 팔에 내력이 유입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성민이 찌르는 창에 수많은 변화가 깃들었다. 백무선은 시야를 가득 덮는 창을 보면서 혈
- 무유야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 꽈아앙! 무식한 육탄 돌격과 이성민의 창격이 충돌한다. 호신강기이자 공격기로 삼았던 안개가 흩어진다. 일반적인 호신강기와 강기라면 저렇게 흩어져 버린다면 그대로 소멸해 버
- 리겠지만, 백무선의 혈무유야공은 다르다.
- 흩어진 안개가 멀찍이서 다시 백무선을 향해 이어진다.
-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성민의 등 뒤로 돌아갔다. 어느새 이성민은 안개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것이 백무선의 노림수였다. 그는 오른 손을 크게 펼치더니 주먹으로 쥐었다. 그러
- 자 이성민의 주변을 휘감은 안개가 틈없이 이성민을 향해 덮쳐왔다.
- “혈무폭살血霧爆殺!”
- 백무선이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소리 없는 죽음의 예고였다. 틈은 없다. 공도로 길을 뚫어 볼까? 아니, 그것보다는. 이성민은 발을 들었?다. 이 몸뚱이로 펼치는 것은 처음이
- 었으나, 지금은 사용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느껴졌다. 아니, 근거는 있었다. 증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 할 수 있다는 믿음.
- 무영탈혼 사식四式, 이보유련二步柔漣.
- 연달아 뻗은 두 걸음이 풍경을 일그러트린다. 덮쳐오는 안개가 이보유련이 만들어 낸 걸음의, 그 기묘한 힘의 휘두름에 엉킨다. 이성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센 흐름이 원을 그
- 린다. 붉은 안개가 원의 흐름에 엉키더니, 백무선이 의도했던 공격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 파아앙! 안개가 흩어진다. 그것은 이전처럼 백무선에게 이어지지 않고서 완전히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파훼되어 버린 것이다. 백무선은 이성민이 혈무폭살을 파훼할 것이
-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을 쩍 벌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이성민의 창이 사납게 쏘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오른 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꽉 쥔 주먹은 일권. 이성민은 백무선의 주먹과 정면으로 충돌하
- 는 것보다는 손목을 약간 틀었다. 창의 궤적이 위로 바뀌면서 백무선의 주먹을 비껴 올라간다. 그러면서 이성민은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창두는 하늘로 올라갔지만 창준은 이성
- 민이 손으로 밀어내면서 둔기가 되었다.
- 꽈아앙! 백무선의 몸을 감싼 혈무유야공의 안개가 흩어졌다. 백무선은 내장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괜찮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버틸 수
- 있다. 하지만 흩어진 안개를 다시 끌어오기 전에 이성민의 창이 재차 움직였다. 이성민은 찌르는 것보다는 휘두르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창간 전체를 무기로 삼았다.
- “크으읍!”
- 왼쪽 어깨를 때려오는 공격에 백무선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왼 팔을 쓸 수 있다면 어떻게 잡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왼 팔은 없다. 없는 왼 팔을 대신에 백무선은
- 허리를 비틀었다. 오른 손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성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뒤로 빼냈다.
- ‘미숙해.’
- 백무선의 혈무유야공은 뛰어난 무공이었지만, 백무선은 외팔이로서의 싸움에 미숙했다. 왼 팔의 틈을 메우는 것을 할 줄 모른다. 팔이 잘리고서는 제대로 싸움을 해 본 적도 없는
- 것인지, 싸울 때마다 왼팔의 틈이 부각된다.
- 그것을 중점으로 노리기 시작하니 백무선은 맥을 추지 못했다. 혈무유야공을 제대로 펼치기 전에, 창을 창으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공격을 몰아치니 백무선은 오른 팔을 허우적거리
- 면서 비틀거렸다.
- “이 자식…!”
- 치명적인 공격은 없다. 하지만 얕게 끊어 치는 공격은 백무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격정적으로 동요하는 백무선과는 다르게 이성민은 평온했다. 크게 뻗던 백무선의 다리 틈 사이
- 로 이성민은 창을 밀어냈다. 백무선이 흠칫 놀라 다리를 빼내려 했지만, 이성민은 밀어 낸 창을 백무선의 오금 쪽으로 비틀어 당겼다. 그러자 백무선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리
- 에 주저앉아 버렸다.
- “다리를 꿰뚫을 수도 있었습니다.”
- 이성민은 주저앉은 백무선을 내려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백무선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성민을 올려 보았다.
- “왼쪽 어깨를 뚫을 수도 있었고, 가슴이나 옆구리… 머리까지. 나는 몇 번이고 당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고, 당신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 “이… 이…”
- “소천마와 비교해서 나는 어떻습니까?”
- 이성민의 질문에 백무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랫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 “…지렁이와… 용이 비교가 된다고 보느냐?”
- “그렇다면 당신은 지렁이보다 못하는 군.”
- 백무선이 내뱉은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백무선의 몸이 덜덜 떨렸다. 살기가 가득 담긴 시선이 이성민에게 쏘아진다. 이성민은 그런 백무선의 시선을 무시하
- 고서 몸을 돌렸다.
- 광천마는 착잡한 눈으로 하고서 이성민과 백무선을 보았다. 이성민의 승리를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무선이의 왼 팔이 잘려서… 그것도 있겠지만.’
- 사흘 전에 싸웠을 때보다 더욱 수법이 좋아졌다. 특히나 혈무폭살을 파훼시킨 수법은 대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보법… 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한 지도 모르겠다.
- 분명 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인데도 제대로 확신할 수가 없다니.
- “들어가 있겠습니다.”
- 이성민은 백무선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용과 지렁이… 백무선이 악에 받쳐 내뱉은 말이 귓가에 남았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 ‘지렁이라도 되어서 다행이로군.’
-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루비아가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성민과 함께 식당으로 돌아가자, 광천마는 한숨을 쉬면서 백무선에게 다가갔다.
-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단지 세상이 넓을 뿐이니까.”
- “…하하…”
- 백무선은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세상이 넓어서 뭐 어쩌라는 겁니까. 나라는 존재가 이리도 하찮고 작다는 것을 절감했을 뿐인데.”
- 백무선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몸을 돌렸다. 광천마는 백무선을 붙잡고 싶었으나, 여기서 백무선을 붙잡아 봐야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 패배를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3년 동안 망가져 있었고, 그로 인해 패배함을 알았다면… 극복하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할 수 있을 것이야.’
- 광천마가 기억하는 백무선은 그런 무인이었다. 백무선은 비틀거리며 걸으면서 주변을 노려 보았다. 이성민과의 싸움을 보았던 사람들은, 백무선의 사나운 표정을 보고서 움찔하여
- 시선을 피했다.
- 살의가 끓어오른다. 저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무선은 이를 악물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것은 백무선이 패배감과 더불어 품은 최후의 자제심이었다.
- ‘빨리.’
-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 그렇지 않다면 이곳의 모두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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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천마-4 >
- 백무선은 발을 질질 끌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낡아빠진 집은 한때 혈천맹의 정점에 섰던 혈천마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 백무선은 이를 악물고서 하나밖에 남지
- 않은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 분노와 살의, 그리고 수치심이 백무선의 가슴 안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걸음 전부가 무거웠다. 힐긋거리며 이쪽을 보는 시선 전부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
- 기 때문이다.
- “…괴물…”
- 백무선이 입을 벌려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집 안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술 냄새, 마약 냄새. 그런 것들이 아닌 다른 익숙한 냄새. 백무선은 이를 악물고서 냄새가
- 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 피투성이의 침대에 제니엘라가 앉아 있었다. 기모노를 입었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오늘의 제니엘라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다리를 꼬고 있던
- 제니엘라는 걸어 들어오는 백무선을 보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 “추해라.”
- 제니엘라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 “4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 트라비아에서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 소곤거리는 말을 통해 백무선은 깨달았다. 제니엘라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트라비아에는 제니엘라의 눈과 귀가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제니엘라가
- 거주하는 중앙 지구가 아니라고 해도, 북쪽 지구에서 그런 소란을 부렸으니 제니엘라가 모를 리가 만무했다.
- “어떤 기분인가요?”
- 제니엘라가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며 물었다. 백무선은 몇 번이나 씹었던 아랫입술을 다시 씹었다. 짓이겨진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으나 백무선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제니엘라의
- 말을 무시하려 하면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 “4년 전에 당신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이 팔이 잘리지 않았다면? 절망하지 않고서 4년 동안 정진했다면, 오늘 당신은 패배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 듣고 싶지 않았다. 백무선은 떨리는 손을 뻗어 술병을 들어 올렸다. 반조차 남지 않은 술병이기는 하였어도 백무선은 그것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 “당신은 계속해서 주저앉아 있겠지요. 그러는 동안 당신의 팔을 자른 소천마는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고. 오늘 당신에게 패배를 준 남자 또한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에요. 그건 어
- 떤 기분인가요? 혼자 주저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앞서 가는 이들의 뒤를 보는 기분은?”
- “…닥쳐…”
- 백무선은 술병을 내려 놓았다. 덜덜 떨리는 몸과 목소리는 백무선이 느끼는 비참함을 대변해 주었다. 제니엘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 “아니. 그들의 뒷모습도 볼 수 없으려나?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테고, 당신은 주저앉아 있을 테니… 머지않아 그들은 당신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갈 거에요. 그리고
- 당신은 언제나 패배자로 남을 것이고.”
- 듣고 싶지 않았다. 꽉 눌러 참고 있던 자괴감과 패배감, 절망감이 솟구친다. 백무선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텅 비어버린 술병과, 힘없이 쳐진 왼쪽 소매를 보았다.
- 이성민과의 싸움에서 백무선은 왼 팔의 부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왼 팔이 온전했더라면 그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 다시 무공 수행을 시작한다고 해도 잘린 왼 팔이 돋아날 방법은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 어떤 마법이나 포션 따위를 사용한다고 해도 잘린 팔은 다시 돋아나지 않는다.
- “방법은 알고 있잖아요?”
- 침대에 앉은 제니엘라는 유혹하는 악마처럼 소곤거렸다. 그 말에 백무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몇 년 전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백무선은 개소리하지
- 말라 일축했었다.
-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백무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팔이 없어도 괜찮다. 지금은 이렇게 주저앉아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된다면 아무 문
- 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어렴풋한 믿음과 자신감이 백무선을 지탱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잘린 팔의 부재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 지금. 백무선이 이전까지
- 품고 있던 근거없는 믿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뱀파이어가 된다면…”
- 백무선의 입이 열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제니엘라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다. 몇 년 동안 백무선을 유혹하면서 느꼈던 즐거움의 끝이 다가온다. 더 이상 백무선은 고민하
- 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가졌고, 완전히 절망했다.
- ‘고맙게도.’
- 그리고 아쉽게도. 제니엘라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성민에게 감사를 느꼈다. 이성민이 백무선을 패배시키지 않았더라면 백무선이 인외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선택하기
- 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조금 더 즐기고 싶었는데.
- ‘즐거운 건 언제나 끝이 나는 법이야.’
- 제니엘라는 백무선을 바라보았다. 주저앉은 백무선은 제니엘라를 보고 있었다. 저 간절한 눈. 갈망과 망설임이 뒤섞인 눈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 ‘그래도 괜찮아. 다음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
- 사실 백무선보다는 이성민에게 더욱 흥미가 간다. 지금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계기만 있다면 인간을 포기할 것 같은
- 데.
- “나를… 흡혈귀로 만들어 줘.”
- 백무선의 입이 열린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제니엘라는 어깨를 살짝 떨면서 전율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모두 져버리고 결국 내뱉는 저 말. 그것을 듣기 전까지의 갈등을
- 지켜보고, 거듭된 유혹을 통해 그것을 무너트리는 것이 제니엘라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제니엘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흡혈귀가 된다면 뭘 하실 생각이죠?”
- “…그 새끼를 죽여 버리겠어.”
- “아하하하!”
- 백무선은 자신의 바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제니엘라가 이성민을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죽음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절망은 백무선을 통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
- 다. 어쩌면 그것이 계기가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 “이쪽으로 와요.”
- 제니엘라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백무선이 몸을 일으키려했다. 아니, 그렇게 말고. 제니엘라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 “기어서.”
-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백무선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 *
- 광천마는 퉁퉁 분 뺨을 양 손으로 잡고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이성민은 삐딱하게 앉아서 광천마를 노려 보았다. 광천마는 자신을 쏘아보는 이성민의 시선을 힐긋거리다가 한
- 숨을 푹 내쉬었다.
- “거,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본좌가 다 무선이를 아끼는 마음에…”
- “내가 혈천마보다 약했다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 “…그랬다면 이곳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야.”
- “혈천마와 대등했다고 치고. 대결 도중에 내가 혈천마에게 죽었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네. 본좌가 본 자네의 강함은 무선이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어.”
- “어쨌든 죽을 뻔 했으면 어쨌으려고.”
- “아, 거참!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본좌가 적절하게 개입하여 막을 생각이었네!”
- 광천마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성민은 광천마의 외침을 심드렁하니 넘기면서 빵을 집었다. 이성민의 옆에서는 루비아가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낑낑거리며 고기를 썰고
- 있었다.
- “볼 일은 다 보신 모양이고. 내년까지는 이 근처에서 머무를 겁니다.”
- “내년이라니. 몇 달은 꼼짝없이 이 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 광천마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눈을 빛내며 이성민을 응시했다.
- “자네. 본좌의 제자가 될 생각은 없나?”
- 갑작스런 말에 빵을 씹던 이성민의 턱이 멈추었다. 멀뚱거리는 이성민의 눈을 보면서 광천마가 말을 계속했다.
- “본좌의 무공은 혈환신마공이라 하는데,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신공절학일세. 에리아에는 신공절학이 많기는 하지만, 본좌가 자신하건데 혈환신마공 같은 무공은 흔치 않아
- .”
- “…딱히 무공을 더 익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무공은 많이 익힐수록 좋은 것이야.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해도, 감춰 둔 무공은 비장의 한 수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지!”
- 이성민이 익힌 무공은 셋이다. 자하신공과 구천무극창, 무영탈혼. 무영탈혼이 보법이자 강기공의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혈환신마공이라는 뛰어난 강기공과 비교하자면 아무래
- 도 전문성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 강기공을 익히는 것은 이성민도 욕심이 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썩 받을 수도 없었다.
- ‘내 재능이 처참한 것이라.’
- 이성민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구천무극창과 자하신공, 무영탈혼의 성취는 데니르의 시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부족한 재능에 끔찍한 시간을 때려박는 식으로 말
- 이다. 그런데 여기서 혈환신마공까지 익힌다면? 신공절학인 혈환신마공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지.]
- 허주가 끼어들었다.
- [네놈의 재능이 그리 잘나지 않다는 것은 뭐, 네놈이 그렇게 말하니 믿겠다만… 무공이고 마법이고 결국은 만류귀종이라는 거야. 네놈 정도의 경지라면 새로이 익힌 무공도 금세
-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 ‘말이야 쉽지.’
- [해서 나쁠 것은 없는 일 아니냐? 강기공은 범용성이 좋은 무공이다. 모든 무공에도 응용할 수 있지. 네놈이 선 경지라면 실전에 응용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빠르게 체득할 수
- 있을 것이고, 쓸 수 있는 수법이 많아지는 것도 좋은 일이야. 마침 네 눈앞에는 무공을 지도해 줄 놈도 있지 않으냐!]
- 살살 꼬셔대는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성민이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이성민은 백보신권을 익혔었지만, 아직까지 제
- 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백보신권과 구천무극창을 비교한다면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뛰어
- 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 “제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면?”
- “그냥 무공을 알려주면 안 됩니까?”
- “이런 뻔뻔한 자식을 보았나…”
- 넌지시 던진 이성민의 말에 광천마가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내뱉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광천마는 제법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천마가 머리를 끄덕
- 거렸다.
- “…뭐. 상관없겠지. 광증을 극복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자네는 본좌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
- “그건 뭐, 남쪽으로 함께 가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해주는 것인데.”
- “유랑 삼아서 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보답해 줄만한 일은 아니야.”
- 광천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아공간 포켓이었는데, 이성민은 광천마가 아공간 포켓을 들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놀란
- 표정을 지어 버렸다.
- “그 표정은 뭔가?”
- “어르신이 그런 물건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 “자네는 본좌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 본좌라는 호칭도 그렇고 무식해 보이는 태도도 그렇고. 골수부터 무인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광천마는 아공간 포켓 안에 손을 넣더니 깨끗한 서책을 꺼냈다.
- “혈환신마공의 비급일세.”
- “왜 비급을 들고 다닌 겁니까?”
- “광증을 앓기 시작한 후로, 정신이 멀쩡할 때마다 비급을 적었지. 본좌의 심득도 추가해서 말이야. 언제 죽을지 모를 때였고… 이 세상에 광천마 벽원패라는 무인이 있었다는 증
- 거를 남기고 싶었네.”
- 광천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혈환신마공의 비급을 이성민에게 건네주었다.
- “본좌는 중원 무림에서 태어났고, 몇 십 년 전에 이 세상으로 넘어왔지. 처음에는 당황했었으나 중원 무림보다 세상이 넓다는 것에 감탄했고, 그것이 좋았네.”
- 이성민은 광천마의 말을 들으면서 혈환신마공의 비급서에 손을 올렸다.
- “이 넓은 세상에는 수많은 강자들이 있었지. 본좌는 여태까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언제까지고 운이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언젠가는 죽을 지도 모르고. 광증을
- 앓게 되면서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커졌지. 본좌는 본좌라는 무인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혈환신마공의 비급을 만들었네.”
- 광천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인연이 닿는 자가 혈환신마공을 익혀 그것으로 천하를 독보한다면 멋진 일이라 생각했지. 설마 이런 식으로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 “자네는 뛰어난 고수야. 소천마 위지호연이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본좌는 소천마를 직접 본 적이 없네. 그러니 본좌가 본 어린 고수 중에서는 자네가 제일이지. 자네라면 혈환신
- 마공을 빠르게 익힐 수 있을 것이네.”
- 광천마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한숨을 삼켰다. 과연 그럴까. 그런 자그마한 걱정 속에서 이성민은 혈환신마공의 비급서를 펼쳤다.
- [혈환신마공을 익히시겠습니까?]
- 오랜만에 들린 목소리에,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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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천마-5 >
- 12월이 되었다.
- 이성민은 12월이 되는 동안 광천마에게 혈환신마공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사실 그것은 혈환신마공에 대한 지도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대련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무공에
- 숙달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 “자네는…”
- 광천마는 주저앉아 쉬고 있는 이성민을 보면서 할 말을 골랐다. 잠깐 동안 말을 망설이던 광천마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 “새로운 것을 쓰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못하군.”
- “그냥 까놓고 말하십시오. 멍청하다고.”
- 이성민은 투덜거리면서 대답했다. 광천마의 심득이 들어간 혈환신마공은 구천무극창에 비견될 정도의 신공절학이었다. 그것을 익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성민이 무인으로서 도달한 위치가 높은 탓에 혈환신마공의 성취가 빠르게 오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공의 성취는 빠르게 올라
- 간다고 해도, 이성민은 실전을 통해 그것을 제대로 녹일 수가 없었다.
- “차라리 창수가 아니라면 좋았을 것을!”
- 광천마가 탄식을 흘렸다. 그는 무기를 쓰지 않고 혈환신마공만 펼쳐 싸움을 하지만, 이성민은 아니다. 전체적인 내공 조율은 자하신공을 쓰고, 창법은 구천무극창을 쓰며, 보법은
- 무영탈혼을 쓴다. 그 세 가지 무공은 정신세계의 수행을 통해 완전히 숙달되었다. 사실상 이성민은 그 세 개 무공에 대해서는 대성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
- 야 무공을 조화적으로 쓸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육체가 따르지 못한다고 해도 임기응변을 통해 수법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 하지만 혈환신마공은 다르다. 강기공이라는 무공은 강기만을 다루는 무공이다. 혈환신마공은 자하신공과 충돌하지 않는다. 구천무극창이나 무영탈혼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숙달된다면
- 구천무극창의 초식에 혈환신마공의 강기를 더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이성민의 재능은 그것을 쉽게 만들지 않는다. 말이야 쉽지, 두 개 세 개 네 개의 무공을 동시에 펼치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다. 거기에 보조적인 마법까지 더한다면 찰
- 나의 순간에 동시에 펼쳐야 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싸움이라는 것이 꼭 예상대로 되는 법만은 아니라, 임기응변이나 의식,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정
- 말이지 피똥을 줄줄 싸댈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 “자네는 멍청하지는 않아.”
- 광천마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이성민을 응시했다.
- “단지 익숙해지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느린 것이지.”
- “그게 멍청하다는 뜻 아닙니까?”
-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자네가 아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라면 지금처럼 어려움을 겪지 않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이미 기존의 무공들을 대가의 경지까지 익혔어. 기존의
- 무공들을 통해 초월지경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무공까지 더한 것이니 손발이 잘 맞지 않는 것일 뿐.”
-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성민은 자신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성민이 혈환신마공에 적응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집중적으로 이성민을 지도하는 광천마와 허주의 존재
- 때문이었다. 광천마가 눈으로 보이는 이성민의 수법에 대해 지도를 한다면, 허주는 이성민의 내면에서 조언을 해 주었다.
- [요력을 쓴다면 더 편할 텐데.]
- ‘그 편한 것이 꺼려지는 거야.’
- 요력을 쓴다면 요괴가 될 가능성이 컸고, 요괴가 된다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성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요괴가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변하게 될
- 것인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은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인간다운 행동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이성민은 흡혈귀가 된 검귀를 기억하고 있다. 인간이었음에도 피를 마시던 그 모습을. 흡혈귀와 요괴가 다르다고는 하나, 이성민은 온전한 요괴의 모습을 모른다. 허주의 말만 냉
- 큼 믿고서 요력을 써대다가 요괴로 변하게 되었을 때.
- 과연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 만약 변하게 된다면, 그 이전의 ‘나’는 어떻게 되는가. 백소고를 기억하고, 위지호연을 기억하는 ‘나’가 온전히 남아
- 있을까?
- 이성민이 느끼는 것을 전해 느끼고 있기에, 허주도 이성민을 강하게 재촉하지는 않았다. 이런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무엇을 추구하기 위한 선택일지. 선택의 결과를 통해 무엇을
- 얻고, 무엇을 잃게 될 지도.
- “심심하게.”
- 루비아는 투덜거리면서 이성민과 광천마를 보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노숙 생활과 쉴 틈 없던 여정에서 휴식하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여
- 관에 투숙하고 있으니 몸이 근질거렸다.
- ‘주인님은 언제쯤 찾아 오시는 거야?’
- 루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따뜻한 우유를 홀짝거렸다. 처음 잠자는 숲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만 해도, 이성민과 만나면 금세 주인인 엔비루스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그 이후로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다 되어가는데 엔비루스가 찾아 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설마 진짜 버림받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단순히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인거야.’
- 그런 걱정과 더불어 루비아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민과 함께 하는 여정이 제법 즐거웠기 때문이다. 엔비루스와 함께 다닐 적에는 겪지 못했던 사건들과 거듭해 충돌
- 하는 것이 루비아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 ‘슬슬 또 뭔가 일어날 것 같은데.’
- 루비아은 조금의 설렘을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 하지만 12월이 끝나가는 동안, 루비아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그렇다고 해서 트라비아가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는 수면 아래에서, 또 그 위에서 계속해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 흑마법사들의 파티는 계속된다.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파티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을 쓴 남자는 많은 말을 하
- 지 않았으나,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다.
- “욕심 많은 인간.”
- 오늘의 파티는 특별했다. 트라비아에 모인 많은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엄선된 이들만이 파티에 참가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의 파티가 특별한 것은,
- 뱀파이어 퀸의 참가 때문이었다.
- 제니엘라는 홀이 그대로 내려 보이는 2층의 별실, 그곳의 넓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제니엘라의 주변에는 그녀에게 비롯된 뱀파이어들이 앉아 있었다. 문 앞에 선 김종현은 손을
- 들어 얼굴 반을 가리는 가면을 벗어 내렸다.
- “욕심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 “뻔뻔하기도 하구나.”
- 제니엘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김종현은 제니엘라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선명한 붉은 눈을 가진 남자는 이 방 안에서, 제니엘라를 제외한다면 가장 짙은 존재감을
- 과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피를 섞은 독한 술을 쉼 없이 마시고 있었다.
- 한때, 남자는 혈천마라는 별호로 불렸다. 인간이었을 적의 이야기다. 소천마와 싸움에서 잘렸던 왼 팔은 이제는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 “많은 흑마법사를 보아 왔지만 너만큼 특별했던 인간은 없다.”
- 제니엘라가 중얼거렸다.
- “너는 흑마법사이면서도 마왕에게 종속되지 않았구나. 마왕이 소멸하는 것이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있는 일이기는 한데… 그럴 경우에는 혼을 저당잡힌 흑마법사는 소멸한 마왕과
- 같은 운명을 맞지.”
-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친 탓에.”
- 김종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본래 김종현은 마왕 칼라드라와 계약하여 흑마법사가 되었고, 칼라드라가 소멸하면서 함께 소멸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김종현이 에리아로 소환되면서,
- 그는 칼라드라와 같은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 “변종이 되었군.”
- 제니엘라가 중얼거렸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변종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 “그래서 너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이렇게 자리까지 마련해 만남을 바라였으니,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겠지.”
- “저를 프레데터에 넣어 주십시오.”
- 김종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부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처럼 들렸다. 그런 김종현의 태도가 제니엘라를 웃게 만들었다.
- “리치도 아닌 네가 인외의 집단에 투신하고자 하는 것이냐?”
- “리치가 될 필요가 없기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겁니까?”
- “아하하!”
- 제니엘라가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 “거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거절하고자 했다면 대화를 나누고자 하지도 않았겠지. 프레데터에 들어오고 싶다고? 좋아. 너를 프레데터의 일원으로 받아 주지. 헌데… 너는 무엇
- 을 하고 싶은 것이지?”
- 즐거운 웃음을 흘리던 제니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김종현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이 예리한 시선을 보냈다.
- “너는 프레데터를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 “인간이었으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의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맞아.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이지. 인간을 배척하고 인간을 잡아먹는 그런 괴물들이다. 네가 프레데터에 들어오겠다면 너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
- “인육이라도 먹으라는 겁니까?”
- “꼭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너는 너의 괴물성을 무엇을 통해 증명하겠느냐?”
- 일종의 시험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김종현은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것임을 직감했다. 제니엘라는 이 넓은 세상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 괴물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뱀파이어 퀸은 불가사의한 힘과 끔찍할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김종현이 변종으로서 마왕의 힘을 다룬다고 하여도 제니엘라와 견
- 주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 “…술은 만족스러우십니까?”
- 김종현이 입을 열었다.
- “순결한 처녀의 피는 물론이고 갓난아기, 임산부 등… 저는 뱀파이어가 아지니만, 뱀파이어의 취향에 맞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하였습니다만.”
- “아하하! 이러한 공양으로 괴물성이 증명된다고 보느냐?”
- “설마요.”
- 김종현은 그렇게 말하며 아래를 내려 보았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 흑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보인다. 그들을 위한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은 정신이 제압된 아름다운 처녀와 청년들이었
- 다. 저들은 에레브리사를 통해 중개 받아 구입한 노예들이다.
- “저들 모두가 당신에게 올리는 제물입니다.”
- “하찮구나.”
- 제니엘라는 깔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저러한 제물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받아 낼 수 있다. 하지만… 후후! 만족해 주도록 하지. 부족한 점이 많고 너의 괴물성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나, 네 미침을 증명할 정도
- 는 되는 듯하니.”
- 제니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공간이 갈라지더니 역으로 뒤집힌 시커먼 오망성을 문양을 매단 목걸이를 꺼냈다.
- “프레데터의 일원을 증명하는 검은 별이다. 네게 주도록 하마.”
- 김종현은 양 손을 벌려 검은 별을 받았다. 뒤집힌 다섯 개의 별은 악마숭배의 상징이며 프레데터의 정점에 선 다섯 괴물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를 비
- 롯한 라이칸슬로프의 왕, 데스 나이트의 왕, 리치의 왕, 요괴의 왕. 흑마법사인 김종현은 리치의 왕의 관리를 받게 될 것이다.
- “그러면 공양을 즐겨보도록 할까.”
- 제니엘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파티를 즐기는 흑마법사와 마녀들, 그리고 시종들은 곧이어 벌어질 학살
- 과 식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퀸이시여.]
- 홀로 내려가는 제니엘라의 머릿속에서 혈족 중 누군가가 목소리를 보냈다.
- [퀸이 어여뻐하시는 인간이 트라비아를 떠나려 합니다.]
- “아핫.”
- 언제나 듣던 보고의 내용이 달라졌다. 제니엘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쿡쿡 웃었다. 제니엘라는 함께 따라 내려오던 백무선을 힐긋 보았다.
- ‘너는 지금 당장 프레스칸에게 가서,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말고 침묵하라 전하여라. 만약 내 말을 어긴다면 아르베스를 거치지 않고 당장에 소멸시킬 것이라고도 전하고.’
- 아르베스는 제니엘라와 함께 검은 별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리치의 왕이다. 본래 뱀파이어 퀸인 제니엘라는 리치인 프레스칸의 소멸 여부에 관여 할 수가 없었으나, 아르베스의
- 눈치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프레스칸의 소멸 여부에 관여할 수 있다. 사실 제니엘라가 프레스칸을 소멸시킨다고 하여도 아르베스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 “너를 패배시킨 그 아이가 트라비아를 떠나려 한다는 구나.”
- 제니엘라가 백무선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백무선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 “명심해라. 죽이지는 마라. 죽이지만 않는다면 네가 어찌 하여도 나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야.”
- “…예, 여왕님.”
- 백무선이 붉은 눈에서 살기를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인간이었을 적이라면 제니엘라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무선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뱀파이어가
- 되고 나서 근 두 달 동안 백무선은 움직이지 못했다. 제니엘라의 명령 때문이었다.
- 백무선은 이성민을 죽이지 말라는, 제니엘라의 명령에 대한 불만조차 느끼지 못했다. 제니엘라에게 품었던 모든 감정은 뱀파이어로 거듭나면서 완전히 거세되었다. 그럼에도 이성민
- 에 대한 살의와 증오는 남아 있엇다. 백무선은 머리를 꾸벅 숙이면서 몸을 돌렸다.
- “절망은 나눠야지.”
- 제니엘라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네가 저 남자를 떠밀었듯이, 저 남자도 너를 떠밀어야 해.”
- 제니엘라는 이성민을 떠올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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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천마-6 >
- 12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혈천마와의 싸움 이후?로 북쪽에서 특별한 만남은 없었다. 두 달 동안 이성민은 트라비아 북쪽 지구에서 광천마에게 무공 지도를 받았고, 어느 정도의
- 성과를 거두는 것에는 성공했다.
- 올해가 끝난다면 더 이상 북쪽에 남을 이유는 없어진다. 3월이 되기 전까지 위지호연과 만나기로 한 대도시 루베스로 향해야만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여정은 빠듯했다. 그렇기에
- 아직 올해가 끝나지는 않았어도 슬슬 남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 “빨리 가도록 하죠!”
- 이성민은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 루비아의 태도가 의아하였으나, 괜히 묻지는 않았다. 처음 북쪽으로 올 때는 루비아와 허주와 함께였으나, 남하할 때는 광천마가 추가 되어
- 넷이 되었다. 그 중 허주는 이성민의 마갑 속에 들어가 있었기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도막사라무, 도막사라무…”
- 광천마가 주문을 외는 소리가 사나운 북쪽의 눈바람과 섞인다. 빠듯하기는 했지만 여유를 둬서 출발하기는 했고, 아직 올해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정의 초반부터 서두를 필
- 요는 없었다.
- 바람에 피비린내가 섞인다.
-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피비린내를 감지한 것은 이성민 뿐만이 아니었다. 쉼 없이 외던 광천마의 주문이 멈춘다. 루비아도 걸음을 멈추고서 앞쪽을 보았다.
- 눈바람의 너머에 백무선이 서있었다. 그는 마시고 있던 술병을 눈밭 위에 던져두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세찬 바람 너머로 보이는 백무선의 눈동자가 붉다.
- “…무선이냐?”
- 광천마가 놀라 앞으로 나왔다. 이성민은 머지 않은 곳에 선 백무선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무선이 내비치는 존재감은 구토감을 이끌어 낼 정도로 불길했고, 눈동자가 쏟아내는 살기
- 는 전신에 오한이 들게끔 만들고 있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서 허주가 혀를 찼다.
- [괴물이 되었군.]
- 광천마는 백무선이 뱀파이어가 된 것을 모른다. 그는 이성민의 곁에 서서 멍하니 백무선을 보았고, 백무선은 자신이 괴물이 된 것에 대해 광천마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백무선이
- 뱀파이어가 된 것은 광천마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만약에 백무선의 곁에서 제니엘라가 유혹을 거듭하지 않았더라면 백무선은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광
- 천마가 기대했던 것처럼, 무인으로서 절망을 딛고 정진하여 극복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 하지만 백무선이 택한 것은 무인으로서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인외의 길을 택했고, 인외가 되었다. 광천마는 새로 생긴 백무선의 왼 팔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 “뱀파이어.”
- 이성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광천마가 경악했다. 광천마가 뱀파이어에 대해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혈광을 줄줄 흘려대는 백무선을 보면서 광천마는 입술을 뻐끔
- 거렸다.
- “멍청한 놈…!”
- 광천마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입술 근처의 피를 손등으로 닦던 백무선이 입을 열었다.
- “어르신.”
- 백무선이 광천마를 불렀다.
- “어르신이 나를 존중한다면, 나와 저 녀석의 싸움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 백무선의 눈이 광천마에게 향했다.
- “진정으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관여하지 마십시오.”
- 광천마는 어깨를 떨면서 침묵했다. 이성민은 광천마를 힐긋 보았다. 뭐라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광천마가 내비치는 태도를 볼 때 이 문제에 광천마가 개입하지 않을 것은 분명
- 해 보였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 “잘린 팔을 새로 달고 왔군.”
- 백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 “뭘 위해서 뱀파이어가 된 겁니까? 나를 죽이고 싶어서?”
- “그것도 있었지.”
- 닫혀 있던 백무선의 입이 열렸다. 뭐라고 말을 더하기 위해 입을 벌렸던 백무선은, 피식 웃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입을 다물었다.
- “지금 와서 이유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들지 않아… 나는 너를 죽이고 싶고… 소천마 그 계집도 죽여 버리고 싶다.”
- “그래서 여기에 왔고?”
- “아니.”
- 백무선이 성큼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백무선이 걸을 때마다 시뻘건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안개는 두 달 전에 보았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색이 진했고, 뭐라 말할
- 수 없는 강렬한 불길함을 흘리고 있었다.
- “나의 여왕이 바라신다.”
- 여왕.
- [제니엘라로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 “여왕께서 네가 절망하기를 바라신다.”
- 백무선은 맹목적인 투로 그렇게 말했다. 망가졌다. 뱀파이어가 된 백무선은 제니엘라의 혈족이 되면서 그녀의 명령에 절대적이 되었다. 다가오는 백무선은 이성민으로 하여금 많은
-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니엘라가 바라는 절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뱀파이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해주었다.
- “…나는…”
- 광천마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성민은 광천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 “루비아를 보호해 주십시오.”
- 마갑이 전개되며 이성민의 몸을 감싼다. 그는 등에 비껴 맸던 창을 꺼내 쥐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백무선과 다시 싸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 달 전에 이성민은
- 백무선을 상대로 제법 수월한 승리를 거두었다.
- 마법도 쓰지 않고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백무선은 쉬운 상대였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무선의 존재에서 발해지는 요악함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 [제니엘라가 제법 힘을 실어 준 모양이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뱀파이어가 된 검귀도 강하기는 했으나 백무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만월의 밤이었다. 지금은 만월도 아닌데 백무선이 발하는 요악함은 검
- 귀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무선은 뱀파이어가 되기 이전부터 검귀보다 뛰어난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고, 거기에 검귀 이상으로 제니엘라에게 뱀파이어로서
- 의 힘을 받았다. 지금의 백무선은 몇 년 전 그의 전성기 때 이상의 힘을 가진 괴물이었다.
- [조심해라.]
- 허주가 경고했다.
- [두 달 전에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자만하지 마라.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 그 말에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만?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자만할 그릇도 아닌데 자만은 무슨. 이성민은 무덤덤한 기분을 느끼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 . 이성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마법을 외었다.
- 단전의 내공이 마력으로 치환되어 마법을 펼친다. 이성민은 전신이 가벼워지고 힘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
- 푸확!
- 눈밭이 크게 터진다. 질주한 백무선은 양 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이성민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혈무유야공의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이성민은 빠르게
- 창을 휘둘렀다. 꽈아앙! 시뻘건 장력과 자색의 강기가 충돌한다. 몸에 밀려오는 압박감에 이성민은 눈을 부릅 떴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를 사전에 펼쳐두는 것은 옳았다. 저 둘
- 의 보조가 없었더라면 이번 일격에서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 백무선은 이전보다 빠르고 매서웠다. 혈무유야공의 시뻘건 안개는 공간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백무선의 존재를 알렸다. 이성민은 곧바로 구천무극창의 사초인 구룡살생을 펼쳤다.
-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하신공과 더불어 혈환신마공이 운용되었다. 자색 강기와 시뻘건 강기가 얽힌다. 극서은 회전하는 고리가 되어 이성민이 쥔 창 전체를 뒤덮었다.
- 혈환신마공 일초, 혈환파쇄血環破碎.
- 구천무극창 사초, 구룡살생九龍殺生.
- 두 개의 무공이 동시에 펼쳐졌다. 시뻘건 회전이 더해진 아홉의 용이 쏘아졌다. 혈환신마공이 더해진 구룡살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
- 지만 백무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니엘라의 명령에 복종하는 백무선은 죽음에 대해 무감각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백무선은 이성민의 공격에 죽음을 아예 느끼지 못하
- 고 있었다. 백무선은 앞으로 뻗은 발을 높이 들어 땅을 내리 찍었다. 콰아아아! 두껍게 쌓인 눈이 통째로 증발하고 붉은 연무가 솟구쳤다. 혈환파쇄에 뒤덮인 구룡살생은 그 붉
- 은 연무를 뚫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그 너머에서 백무선은 호흡을 삼키며 꽉 쥔 주먹을 허리춤에 갖다 붙였다.
- 쿠구구궁! 불길한 마력이 백무선의 주먹을 휘감았다. 백무선이 삼킨 호흡을 끊어내며 주먹을 내질렀을 때. 구룡살생을 가로막았던 안개의 성질이 변하며 무형의 권력을 붉은 색으
- 로 물들였다. 꽈아앙! 번개가 치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백무선의 일권이 공간을 꿰뚫었다.
- [피해!]
- 허주가 기겁하여 고함을 질렀다. 이성민은 급히 일보무흔의 이형환위를 펼쳤다. 콰아아아! 백무선의 권격이 눈밭에 기다란 상흔을 만들었다. 이형환위가 조금만 늦었어도 정면으로
- 권격을 얻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주변을 물들인 붉은 안개의 너머에서 소름끼치는 시선이 느껴진다. 육감의 경고에 이성민은 충실하게 움직였다.
- 허리를 비틀며 들어 올린 창과 백무선의 손바닥이 부딪혔다.
- “큭…!”
- 이성민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백무선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흔들렸다. 안개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춘 백무선을 쫓아 이성민은 보
- 법을 밟았다. 일보무영이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낸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성민은 무영탈혼의 삼식인 이보겁살을 펼쳤다. 연이어 뻗은 두 걸음이 강기를 폭사한다.
- 혈환신마공 이초, 혈류추살血流追殺. 이보겁살의 강기와 혈류추살의 강기가 엉키면서 사방을 휩쓸었다. 하지만 붉은 안개는 조금 흐트러졌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제니엘라, 이 미친 년 같으니!]
- 허주가 답답하여 외쳤다. 허주가 경악할 정도로 뱀파이어가 된 백무선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뛰어난 무인인 백무선에게 제니엘라의 사이한 힘까지 더해졌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 괴물의 탄생했다. 경악한 것은 허주 뿐만 이 아니었다. 광천마조차도 백무선의 힘에 경악했다. 인간을 포기하고 얻은 인외의 힘은 그토록 강력했다.
- [앞!]
- 허주가 고함을 지른다. 이성민은 창로를 틀어 올리며 창 전체로 원을 그렸다. 콰드드득! 이성민의 발이 땅으로 파묻힌다. 내장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이성민은 이를 악물었다. 란
- 의 수법으로 공격을 흘려내려 했으나 온전히 흘려내지 못했다. 이성민은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함에 헐떡거리며 계속해서 창을 움직였다.
- 파바바박! 근접해 다가 온 백무선의 양 팔과 이성민의 창법이 격돌했다. 서로의 강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성민은 호흡을 멈추고 두 눈을 부릅 떴다. 머릿속에서 허주가 계속
- 해서 떠들고 있었으나 그에 귀를 기울일 틈은 없었다. 단지 들리는 것은, 백무선의 커다란 웃음 소리 뿐이었다.
- “봐라!”
- 백무선이 기쁨의 외침을 질렀다. 양 팔을 통해 장법과 권법을 펼친다. 그것에 틈은 없다. 이성민의 창은 거리의 이점을 가졌으나 그것으로 백무선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
- 에서 백무선이 앞서고 있었다. 무공의 조예?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된 백무선은 이성민보다 빨랐고 강했으며 날카로운 감각과 반응속도마저
- 겸비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못해 예측하고 대응하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백무선은 보고, 대응하고 있었다.
- “하하하!”
- 창로의 틈이 뚫린다. 빠르게 들어 온 백무선의 주먹이 이성민의 몸을 때렸다. 마갑의 방어력과 호신강기, 내가중수법에 대항하는 반탄강기까지 동원했음에도 이성민의 입에서 피가
- 뿜어졌다.
- “죽이지는 않아. 죽이지는…!”
- 백무선의 눈에서 광기가 흘러나왔다. 제니엘라에 의해 숙여져 있던 이성민에 대한 증오가 머리를 든다. 너만 아니었다면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 따위에게 패배해
- 서는 아니 되었다. 백무선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런 말들을 빠르게 내뱉었다.
- “뭐라고 떠드는 거야…!”
- 발이 끌리며 뒤로 밀려난 이성민이 내뱉었다. 그는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를 다시 중첩시키면서 백무선을 향해 뛰었다. 심장이 쾅쾅거리면서 뛰고 감각에 날이 섰다.
- [요력을 써라.]
- 허주가 외쳤다. 하고 싶지 않았다. 백무선의 존재가 이성민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주고 있었다. 인외의 길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남쪽에서 요력을 통제할 수단을 얻었다면 또 모
- 를까, 인간의 몸으로 요력을 다루려 하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 이성민은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밀어 넣으며 땅을 박찼다. 백무선은 이성민을 향해 양 손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주변을 흐르던 붉은 안개가 거센 힘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것
- 이 어떤 기술인지는 이성민도 알고 있었다.
- 혈무폭살.
- 백무선이 입술을 비틀며 내뱉었다. 안개가 몰아치기 전에 이성민은 급히 발을 뻗었다. 두 달 전 혈무폭살을 파훼했던 이보유련이 펼쳐졌다.
- [무리다.]
- 허주가 중얼거렸다. 안개가 폭발했을 때. 이보유련은 이전처럼 안개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했다.
- “하하하!”
- 백무선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 안개의 중심에 서있던 이성민은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 ======================================
- < 혈천마-7 >
- 백무선은 피투성이로 주저앉은 이성민을 즐거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백무선의 머릿속에는 제니엘라의 명령이 맴돌고 있었다. 죽여서는 안 된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백
- 무선은 그것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이성민에게 다가갔다.
- “꺄아아악!”
- 루비아가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서도 루비아가 시끄럽게 비명만 지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루비아를 구성하는 마력이 요동치면서
- 그녀의 양 손에 새파란 번개가 어렸다. 하지만 루비아가 공격하기 전에 광천마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안 돼.”
- 딱딱하게 굳은 광천마의 얼굴을 보며 루비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 “그러면 두고만 보라는 건가요?! 정말 죽을지도 모른…”
- “본좌가 나설 것이다.”
- 광천마가 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이성민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광천마가 나서지 않
- 는다면 백무선은 이성민을 죽일 것이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백무선이 중얼거리는 말은 광천마도 듣고 있었으나, 그 말을 무조건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죽이지만 않으면 된
- 다니. 그것은 꼭, 목숨만 붙어 있다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실제로 백무선은 그럴 생각이었다. 우선 놈의 왼 팔을 뜯어내고, 그 다음에는… 어디가 좋을까. 귀찮은 보법을 밟아대던 다리를 뽑아 줄까?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괜찮
- 을 것이다.
- 광천마가 앞으로 나섰다.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성민의 죽음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다른 경우였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광천마는 이성민에게 혈환신마공을 전수
- 했다. 사승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하여도 직접 무공을 전수해 준 이상, 이성민의 죽음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광천마는 이성민의 가능성이 여기서 꺾이는
-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콰아앙! 광천마가 땅을 박찼다. 그는 단숨에 이성민과 백무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성민에게 다가가던 백무선이 눈동자를 움찔 떨면서 광천마를 노려 보았다.
- “나서지 않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다.”
- “크흐흐! 아무래도 저 애송이가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 혈환신마공을 쓰던데… 제자로 들인 겁니까?”
- “아니.”
- 광천마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 “본좌의 후인이다.”
- “하하하!”
- 광천마의 대답에 백무선이 웃음을 터트린다. 예전의 백무선이라면 광천마와 대적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무선은 아직 제니엘라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
- 했고, 광천마가 그를 가로막는다면 광천마를 죽이면 될 뿐이었다.
- “설마 내 손으로 광천마를 죽이게 될 줄이야!”
- “쉽게 얻은 힘에 자만하고 있구나.”
- 백무선의 외침에 광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광천마는 백무선을 우습게보지 않았다. 극성으로 펼친 혈환신마공이 광천마의 몸에서 솟구쳤다. 이성
- 민에게 죽을 뻔 했던 것은 방심했던 탓.
- 허주에게 쉽사리 제압되었던 것은 광천마의 내공에 허주의 요력이 녹아있던 탓이었다.
- 에리아에서 가장 긴 세월 천마라는 별호를 이어 온 것은 광천마의 자부심이었다.
- “본좌가 광천마 벽원패다!”
- 광천마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백무선의 붉은 안개와 붉은 강기의 고리가 충돌했다. 거센 강기가 충돌하는 와중에 루비아는 후다닥 뛰었다. 그녀는 주저앉은 이성민에게 다가가 손
- 을? 뻗었다.
- “괘, 괜찮아요?!”
-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길에 이성민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루비아는 빛을 잃어 풀린 이성민의 눈을 보고서 흠칫 놀랐다.
- ‘정신을 잃었어…!’
- 설마, 하는 심정에 루비아는 이성민의 맥박을 짚었다. 정신을 잃은 것과는 다르게 이성민의 맥박은 분명했다. 그런 루비아의 머릿속으로 허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 [포션을 먹여라.]
- “뭐, 뭐라고요?”
- [기혈이 꼬이고 장기가 상했어. 이대로 두다가는 죽는다.]
- 허주가 빠르게 내뱉었다. 루비아는 앞뒤 보지 않고 이성민의 아공간 포켓을 잡았다. 그 안에 손을 우겨 넣어 포션을 찾던 중, 루비아가 꺼내 쥔 것은 엘릭서였다. 절단상은 치
- 료할 수 없지만 내상에는 즉효성으로 약효를 보인다. 루비아는 이성민의 입을 벌려 엘릭서를 통째로 부었다.
- [입으로는 안 먹이냐?]
- “이런 때에 왜 개소리를 하는 거야!”
- 루비아가 빽하고 외쳤다. 놀리듯 말하기는 했어도 허주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민의 몸 안으로 침투하여 목구멍으로 넘어 온 엘릭서의 약효를 전신으로 퍼트렸다. 꼬인
- 기혈을 풀어가고 조각난 내장을 끼워 맞춘다.
- [응?]
- 허주가 놀란 소리를 냈다. 엘릭서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돌기도 전인데. 조각난 내장이 이미 재생하고 있었다. 꼬인 기혈도 조금씩 풀려가고 터진 곳은 알아서 재생한다.
- [이미 인간은 아니군…]
- 허주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은 이성민도, 루비아도 듣지 못했다. 그래도 허주의 도움 덕에 엘릭서가 전신으로 퍼지면서 이성민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 끊긴 의식은 시커먼 어둠을 떠돈다. 이성민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이었고, 어느새 이성민은 그것들 전부를 내려
- 보고 있었다.
- 두 개의 삶이 보인다. 14살의 나. 13년 동안 에리아에서 살았고, 던전에서 죽은 나. 그리고 과거로 돌아와 지금까지 살아 온 나.
- 위지호연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좁아 빠진 세상이 넓어졌다. 여태까지 살아 온 모든 삶들이 스쳐지나간다. 므쉬의 산에서, 소림에서, 그리고 정신세계에서. 스
- 쳤던 만남, 깊게 얽힌 인연. 어느 순간부터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의식의 중심에서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아무 것도 쥐지 않았던 손은 어느새 창을 쥐고 있었
- 다.
- 거기서 다시 의식이 확장한다. 넓어진 의식 속에서 이성민은 자신이 배우고 기억하며 체득한 것들을 하나하나 관조하였다. 그것은 기묘하고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여태까지 이성민
- 이 얻은 심득이나 깨달음의 총합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아.”
- 이성민은 멍하니 소리를 냈다. 주저앉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나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곳에 있지? 이성민은
- 머리를 갸웃거렸다. 곁에서 팔다리를 주물러대는 루비아가 보인다. 허주의 모습도… 보였다. 보이지 않아야 할 허주는 정신세계에서 보았던 모습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을 하고서 이
- 성민을 내려 보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이성민은 머리를 돌렸다. 머지않은 곳에서 광천마와 맞서는 백무선의 모습이 보였다.
-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이성민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죽었나? 죽어버렸나? 그래서는 안 된다. 아직 위지호연을 만나지 못했다. 위지호연과의 약속을 지키
- 지 못했다. 백소고와도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냥 죽고 싶지 않았다. 죽어서는 안 되었다. 아직 더 갈 수 있다고. 더 할 수 있다고. 검귀의 죽음이
- 떠오른다. 더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검귀의 말. 검귀가 최후에 미련처럼 내뱉었던 말이 이성민의 의식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 툭.
- 누군가가 이성민의 등을 떠밀었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등을 떠민 것은 확실한데, 그것이 대체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 “허억!”
-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서 호흡을 토해냈다. 울상을 지으며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고 있던 루비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이성민은 가쁜 호흡을 터트리면서
- 목을 붙잡았다.
- “커헉!”
- “꺄아악!”
- 이성민이 뿜어낸 시커먼 피가 루비아의 얼굴을 뒤덮었다. 루비아가 발작하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몇 번 더 피를 내뱉은 이성민은 가슴을 붙잡았다. 피를 토하니 되려 속이 편
- 안했다. 졸지에 피로 세수를 한 루비아만이 바닥에 남은 눈 부스러기를 긁어 모아 박박 얼굴을 문질러댈 뿐이었다.
- [괜찮냐?]
- 허주가 급히 물었다.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고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성민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붙잡았다. 기억은 분명
- 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 확실하게 목격했던 심득들.
- [기연이로군.]
- 허주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틀거리며 일어 선 이성민은 무언가를 느꼈다. 내공의 흐름이 자유롭고 몸이 훨씬 가벼웠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치명적인 내상에서 회복된 것인데, 왜 심, 기, 체가 안정된 것이지?]
- 그것은 허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민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피투성이로 만든 몸의 상처가 없다. 통증도 없다. 의식을 잃기 전에 느꼈던 몸 안의 통증
- 도 사라졌다.
- “…대체 왜… 광천마 어르신이 백무선과 싸우고 있는 거지?”
- “저 미친놈이 당신을 죽이려 했으니까!”
- 마법으로 얼굴을 씻어 낸 루비아가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이성민이 피를 뿜어낸 것에 대해 따지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 “그보다 몸은? 몸은 괜찮은 거예요?”
- “몸은… 개운해.”
- 이성민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대답했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검은 심장의 덕분일까? 아니, 그런 생각은 나중에. 이성민은 양 손으로 창을 잡고서 앞으로 나
- 섰다. 그러자 루비아가 기겁하면서 이성민을 가로 막았다.
- “뭐, 뭐하는 거예요?! 죽다 살아났으면서!”
- “내가 해야 돼.”
- “그러니까 뭐하러…! 여기서 쉬고 있으면 저 할아버지가 알아서 해결해 줄 텐데!”
- “그래서는 안 돼.”
- 이성민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루비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하였으나, 이성민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루비아를 지나쳤다.
- “죽어도 난 몰라!”
- “안 죽어.”
- 루비아의 사나운 외침에 이성민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갑에 웅크린 허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 [뭔지 모를 놈이야. 이런 상황에서 기연을 얻다니…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느껴지는군.]
- 북쪽에서 만나게 될 귀인. 허주는 그것이 광천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허주가 이성민과 함께 다니게 된 이상, 굳이 북쪽이 아니더라도 언제가 되었든 광천마와
-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광천마와의 만남이 신령이 말했던 귀인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네놈의 귀인은 저 뱀파이어였구나.]
- 허주는 그 사실을 깨닫고서 중얼거렸다. 북쪽에서 만난 혈천마 백무선. 그는 이성민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백무선과의 싸움을 통해 이성민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
- 고, 그 와중에 심, 기, 체의 엉킴이 풀리는 기연을 얻었다. 사실 백무선과의 만남이 귀인과의 만남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광천마가 백무선을 막지 않았더라면. 광천마가 백무
- 선과 이성민을 만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운명이군.]
- 허주가 중얼거렸다. 그러한 원인이 쌓여 지금의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신령의 예언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운명을 예지하고, 그 운명에 맞게 행동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 운명을 만들어낸다.
- 이성민은 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이 가볍다. 몸이 가볍다. 그러면서도 충만한 힘이 몸 안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다. 심, 기, 체의 엉킴이 풀린 육
- 체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성민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정신세계에서 도달한 무위는 지금으로서도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도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
- 은 확실하게 제시 받았다.
- “으음!”
- 백무선의 공격을 막아내던 광천마는 뒤에서 다가오는 이성민을 느끼고 공격을 멈추었다. 파죽지세의 공세를 멈춘 것은 백무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부릅 뜨고 걸어 오는 이
- 성민을 보았다.
- “나서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 이성민은 광천마를 향해 말했다. 이성민을 돌아 본 광천마는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내뱉었다.
- “뒈질 뻔한 것을 살려주었더니…!”
- “감사합니다.”
- 이성민은 솔직하게 그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했다.
- “이제는 되었습니다.”
- 이성민은 광천마를 지나치면서 말했다. 스쳐 지나간 순간. 광천마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이성민에게서 느껴지던 존재감이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진했기 때문이다.
- “이런 미친… 뭔 놈의 심득이 뒈질 뻔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 광천마가 어이가 없어서 내뱉었다. 이성민은 광천마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 “그러게 말입니다.”
- 이성민은 창끝을 들어 올렸다.
- “쉽게 죽을 수 없는 몸인 모양입니다.”
- 창끝에 겨눠진 백무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 혈천마-8 >
- 심득은 낯설지 않다. 여태까지 이성민은 몇 번이나 심득을 얻어왔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심 검은 심장 덕분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어쩌면 이번 심득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이성민의 몸에 박힌 검은 심장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몸뚱이를 진화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 하지만 심득은 낯설지 않다고 하여도, 지금과 같은 기분은 낯설었다. 여태까지 쭉 엉켜 있던 심, 기, 체가 안정되었다. 이성민은 이전에도 한 번 환골탈태를 겪어 본 적이 있었
- 으나, 환골탈태한 후의 육체와 지금의 육체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지금의 육체를 겪어 본 이상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어떻게 일어난 거지?”
- 백무선이 이성민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 “엘릭서라도 마셨나? 포션이라는 것은 참 귀찮아… 안 그래?”
- 이성민이 일어나기는 했어도, 백무선은 그것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싸움을 통해 이성민이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오히려 백무선을 짜증스럽게 하는 것
- 은 광천마의 존재였다. 만월의 밤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의 백무선으로서는 광천마를 죽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 이성민은 손에 들고 있는 창이 너무 가볍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 ‘내 등을 떠민 것은 누구지?’
-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분명하게 이성민의 등을 손으로 떠밀었다. 이것도 검은 심장인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어도 분명한 확신이었다. 이 또
- 한 기묘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 ‘마음 같아서는 다 죽이고 싶지만…’
- 그럴 수는 없다. 제니엘라의 명령은 백무선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었다. 흡혈귀가 되어 아득한 힘을 손에 넣기는 하였지만, 인간성을 포기한 대가는 확실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 ‘광천마는 무시한다. 저 놈의 팔 하나만 자르고, 기왕이면 다리도 더 자르고… 그리고 이탈하자.’
- 백무선은 마음을 먹었다. 그는 광천마의 우둔함을 비웃었다. 이성민을 비웃기도 했다. 둘이 합공한다면 훨씬 일이 쉬울 텐데. 왜 굳이 혼자서 싸우려는 것일까?
- “도망치지도 않고 말이야…”
- 백무선은 킬킬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시뻘건 안개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성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백무선이 벌이는 짓을 보았다. 혈무유야공… 그 이름까지
- 는 이성민도 알지 못했지만, 백무선이 펼치는 혈무유야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격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참 이상하지.’
- 이성민은 겨누고 있는 창을 내리지 않으면서 성큼 발을 뻗어 앞으로 향했다.
- ‘저게 뭔지 모르는데… 무섭지가 않아.’
- 반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안다. 그런 것치고는 정신이 평온하다. 여태까지 익혀 온 모든 무공이 완전히 정립된 기분이었다.
- 2100년의 수행은 이성민이 평생을 수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마냥 이익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 그 수행의 결과로 이성민의 심, 기, 체는 더욱 엉켰고, 21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그 덕분에 이성민은 2100년의 수행의 결과를 온전히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심, 기, 체는 안정되었고 여태까지의 경험과 심득을 한 데 모아 다시 정리하는 기연을 얻었다.
- 그렇기에.
- 백무선이 흩뿌린 붉은 안개가 덮쳐왔을 때. 이성민은 당황 없이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창 전체를 감싼 기묘한 기류가 란의 수법을 통해 흐름을 바꾼다. 이성민을 덮치던 붉은
- 안개가 창의 회전에 따라 바깥으로 밀려났다.
- 백무선이 놀란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쭉 뻗은 발이 앞을 딛었을 때. 이성민은 이미 백무선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 “헉!”
- 백무선이 기겁하여 몸을 뒤로 젖힌다. 그는 오른 팔과 왼 팔을 동시에 휘두르며 이성민을 떨쳐내려 했다. 백무선의 손짓에 이성민의 몸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 ‘이형환위!’
- 어디지? 백무선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판단은 옳았다. 이성민은 그곳에 있었다. 이성민의 두 눈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마주친 순간, 백무선은 자신도 모르게
- 그 두 눈에게 의식이 빨려 들어간다고 느꼈다. 백무선의 몸이 움찔 굳는다. 그것은 1초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으나, 이성민이 손을 뻗기에는 1초도 너무 길었다.
- 투욱.
- 활짝 펼친 이성민의 손이 백무선의 가슴을 밀었다. 창이 아니라 손이었다.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
- “쿠엑!”
- 백무선의 입이 쩍 벌어지며 시커멓게 죽은 피가 뿜어졌다. 뒤로 날아간 백무선의 몸이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성민은 펼친 손을 천천히 내렸다. 가슴을 붙잡고 컥컥거리며 기침
- 을 토하던 백무선이 커다란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왜, 왜 창을 쓰지 않은 것이냐?!”
- 백무선이 피범벅인 입을 벌리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이성민은 내린 손으로 다시 창을 쥐면서 대답했다.
- “…아까워서.”
- “뭐…?”
- “해보고 싶은 것이 더 있는데… 창을 쓰면 끝나 버리잖아.”
- 이성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백무선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겠지. 백무선의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터졌다. 제대로 된 장법을 펼친 것도 아닌데
- 이성민의 일장은 백무선의 내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수준 높은 내가중수법이었고, 이성민 본인도 자신의 손바닥에 실린 힘에 내심 놀라워 하고 있었다.
- “으아아아!”
- 백무선은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폭사되는 붉은 안개가 끔찍한 살의를 담아 이성민을 덮친다. 뛰어드는 백무선의 속도보다 앞선
- 안개가 사방을 감싸려 들었다. 이성민은 양손으로 잡은 창을 뒤쪽으로 밀었다. 쿠우웅! 자하신공과 혈환신마공의 강기가 창 전체를 감싼다. 일직선으로 뻗은 창은 추혼일살. 덮치
- 던 안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 “나는!”
- 백무선은 침과 피를 튀기면서 왼 팔을 휘둘렀다. 그것보다 이성민의 창이 더 빨랐다. 혈환파쇄를 담은 창을 쏘아낸다. 자색의 강기가 소용돌이치면서 백무선을 덮쳤다. 백무선은
- 혈환파쇄를 피하지 않고서 붉은 안개에 휘감긴 왼 팔을 내밀었다. 꽈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백무선의 왼 팔이 허공을 날았다.
- “내… 팔…!”
- 백무선이 날아간 팔을 보며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고 오른 팔을 휘두른다. 피를 마시면 된다. 무엇을 위해 흡혈귀가 되었던가? 피만 마시면 그 어떤 상처도 회복
- 하는 불사력을 원했다. 다시는 사지를 잃어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 또 무엇을 위해 흡혈귀가 되었던가?
- 분뢰추살과 혈류추살이 만난다. 이성민의 창이 만들어낸 수십 개의 창영에 수십 개의 강기가 더해진다. 그것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유성군처럼, 자색의 꼬리를 만들며 백
- 무선을 덮친다. 소천마에 대한 원한. 복수심. 그와 마찬가지로 이성민에 대한 살의들. 흡혈귀가 되면서까지 추구하였던 감정들은 제니엘라의 권속이 되며 흐려져 버렸다. 지금의
- 백무선은 제니엘라의 명을 따르는 인형이었다. 인간이 인외가 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 인외가 된다면 무언가를 얻게 되지만,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잃게 된다.
- 백무선은 울부짖으면서 오른 팔을 휘저었다. 혈무유야공의 초식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분뢰추살과 혈류추살을 완전히 막아내는 초식은 없었다.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
- 어졌고, 백무선의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뿜어졌다.
- “으아아악!”
- 백무선의 비명은 길고 높았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더 많은 것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 된 무공들을 모두 펼쳐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성민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 이성민이 펼친 구룡살생은 매끄러웠고 강력했다. 백무선은 필사적으로 안개를 끌어다가 방벽을 만들려 했으나, 구룡살생은 그 안개를 충돌한 즉시 소멸시켰다. 그 다음은? 백무선
- 은 아득한 정신줄을 붙잡고서 연이어 무공을 펼쳤다. 하지만 안 된다. 이성민은 공도를 펼쳤고, 그것은 백무선의 모든 무공을 파훼시켰다. 이성민과 백무선 사이에는 아무 것도
- 남지 않았다. 백무선은 펄쩍 뛰어 공중으로 도약했다.
- “너 따위가!”
- 높은 곳으로 뛰어 오른 백무선이 하나 뿐인 손으로 땅을 내리 찍었다. 붉은 안개가 손짓을 따라 아래로 쏟아진다. 이성민은 창을 아래로 내리고서 복사백탐을 펼쳤다. 그것은 백
- 무선과의 거리를 관통했다. 안개 너머에서 백무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래로 내렸던 오른 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내 팔, 내 팔…!”
- 백무선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본래라면 이 정도의 상처를 입는다면 도주하는 것이 옳다. 흡혈귀인 백무선의 생명력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 제니엘라가 특별히 많은 힘을 부여한 덕분에, 피만 마신다면 치명상에서도 소생할 수 있다.
- 하지만 백무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제니엘라의 명령 때문이었다. 아직 백무선은 이성민을 절망시키지 못했다. 양 팔을 잃은 백무선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 공중에서 떨어졌다. 이성민은 떨어지는 백무선은 향해 창을 뻗었다. 손목에 작은 떨림을 주었을 때, 그 떨림은 창을 수십으로 나누어 백무선의 몸을 꿰뚫었다.
- “끄으으…”
- 떨어진 백무선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떨어지는 도중에 다리 하나는 창에 꿰뚫려 뜯겨져 날아갔고, 사지 중에 그나마 남은 다리 하나도 발목이 꺾여 있었다. 몸뚱이에도 창에 꿰뚫
- 린 상처가 많았다. 저 정도의 상처라면 죽고도 남았지만, 백무선의 목숨은 아직도 붙어 있었다.
- “아… 안 돼…”
- 백무선은 피투성이의 몸을 질질 끌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 “제니엘라… 여왕님의 명령을…”
- 하지만 죽음은 가까웠다. 이곳에는 백무선의 상처를 회복시킬 만한 피도 없었고, 만월도 아니었다. 이성민은 발목이 끊어진 다리로 땅을 밀어내면서 꿈틀거리는 백무선을 무뚝뚝한
- 눈으로 내려 보았다.
- “저런 꼴이 되면서까지 퀸의 명령을 따르려 하는 군.”
- [저 녀석은 제니엘라의 혈족이니까.]
- 허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혈족, 그 안에 있는 피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야.]
-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 […인간이 아니게 되면서까지 얻은 힘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 “더 요괴가 되기 싫어졌어.”
- [뱀파이어와 요괴는 근본적으로 달라. 뭐… 네가 내키지 않다는 것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지금의 너 자신을 포기하고 요괴가 된다는 것은, 너로서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려야 한
- 다는 뜻이다.]
- “그게 무슨 말이냐?”
- [인간으로서의 사고. 인간으로서의 행동. 네가 인간이기에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치환된다는 뜻이다. 인간이던 네가 돼지가 된다면, 돼지의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냐?]
- 허주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 [네가 요력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해 줄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살아 온 너에게 요괴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다. 네가 추구
- 하는 것이 진정으로 간절하다면, 요괴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야. 다만 방법의 차이가 있겠지. 인간으로서 추구하던 목적까지 도달하는 방법과, 요괴의 방법은
- 완전히 다를 테니까.]
- 이성민은 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한숨을 삼켰다. 요력이라는 것은 꺼림칙하고 불길한 힘이었고, 요괴가 된다는 것은 그 불길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되고
- 싶지 않았다. 지금의 백무선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떠나, 제니엘라의 명령만을 수행하려 들고 있었다. 뱀파이어와 요괴는 다르다고 허주가 말했지만, 이성민이 보기
- 에는 똑같았다. 결국에는 인간이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된 것 아닌가.
- “멍청한 녀석…”
- 광천마가 다가왔다. 그는 바닥을 기는 백무선을 내려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간일 적의 백무선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의 백무선이 얼마나 재기 넘치고 야망 넘치던
- 무인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 “보내 주게.”
- 광천마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돌렸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백무선에게 다가갔다. 백무선은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피로 물든 송곳니가 딱딱거리며 서로
- 부딪힌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려 들지 않았고, 이성민은 백무선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 머리가 박살난 백무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이성민은 끈적한 피에 젖은 창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 [남쪽으로 가자.]
- 허주가 유혹하듯 말했다.
-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요력을 다루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으냐. 아무래도 나는 너를 남쪽으로 인도하기 위해 숲에서 나와야 했던 모양이야.]
- “…가야지.”
-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왜 제니엘라는 백무선을 통해 나를 공격한 것일까? 제니엘라가 직접 왔다면, 이성민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이성민은 의구
- 심 어린 눈으로 트라비아를 돌아 보았다. 무너져있는 성벽 너머로 보이는 폐허와 다름없는 도시. 그곳을 응시하며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야.”
- 이성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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