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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c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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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8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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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억 (1)
  2.  
  3.  
  4. Episode 55. 행복한 기억
  5.  
  6. 언젠가 한수영은 말한 적이 있었다.
  7.  
  8. ―처음 [아바타]를 썼을 때 만든 분신이 있는데······ 기억을 너무 많이 줘버렸는지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어서 회수를 못했어.
  9.  
  10. “······재미있네. 그 얘긴 어디서 들었지?”
  11.  
  12. [등장인물 ‘한수영’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가집니다.]
  13.  
  14.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15.  
  16. 한수영의 분신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17.  
  18. 그 눈빛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순간 이 존재가 정말 분신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실제의 한수영이었더라도 저렇게 태연하진 못할 텐데.
  19.  
  20. “네 본체랑 친분이 좀 있어서. 걔가 입이 좀 가벼워.”
  21.  
  22. “흠······ 유치한 도발이지만 이번만은 넘어가 줄게. 네 생각은 틀렸어. 나는 한수영의 ‘분신’이 아니라 진짜 한수영 그 자체야.”
  23.  
  24. “뭐?”
  25.  
  26. 생긋 웃는 녀석의 입 모양은, 정말 영락없이 한수영의 그것이었다.
  27.  
  28. “나는 걔가 가지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거든.”
  29.  
  30. “기억? 무슨 기억?”
  31.  
  32. “게다가 걔완 다르게 입도 아주 무거워.”
  33.  
  34. 나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었다.
  35.  
  36. “내가 듣기로 분신은 머리를 잘려도 살아있다고 하더군.”
  37.  
  38.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39.  
  40. 오른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칠게 울음을 토했다.
  41.  
  42.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43.  
  44. 내가 발출한 설화급 ‘격’에 스위트 룸 전체가 둔중하게 흔들렸다.
  45.  
  46.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수영은 전혀 긴장한 눈치가 아니었다.
  47.  
  48. “······마왕이라. 생각보다 거물이네.”
  49.  
  50.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의 여유를 깨달았다.
  51.  
  52. 츠츠츠츠츳!
  53.  
  54. 방 전체에 드리워진 개연성의 그물.
  55.  
  56. 내가 발출한 격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57.  
  58. [해당 지역은 ‘시한부 불가침 구역’입니다.]
  59.  
  60. [앞으로 한 시간 동안 해당 지역에서의 전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61.  
  62. ‘시한부 불가침 구역’ 설정이라······.
  63.  
  64. “······도깨비와 거래를 했나?”
  65.  
  66. “유중혁을 통제할 수 있는 녀석이 왔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67.  
  68. 나는 더 이상 눈앞의 존재가 단순한 ‘분신’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69.  
  70. 어쩌면, 이 녀석의 말대로 이쪽이 진짜 ‘한수영’일지도 모른다.
  71.  
  72.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73.  
  74. [등장인물 ‘한수영’이 ‘진실의 눈동자’를 발동하였습니다!]
  75.  
  76. 진실의 눈동자.
  77.  
  78. 적어도 ‘특성 간파’에 한해서는 안나 크로프트의 ‘대악마의 눈동자’에 비견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79.  
  80. 그 짧은 사이, 한수영은 내 정보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81.  
  82.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83.  
  84. [‘제4의 벽’이 ‘진실의 눈동자’를 완전히 파훼······.]
  85.  
  86. 튀어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이 황급히 스킬을 취소했다.
  87.  
  88.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네.”
  89.  
  90. 한수영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유중혁처럼 억지로 [제4의 벽]을 뚫으려 하지도 않았고, 안나 크로프트처럼 당황하는 모습도 없었다.
  91.  
  92. 그런 침착함조차, 내가 알던 한수영에겐 없던 것이었다.
  93.  
  94. 한수영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95.  
  96. “내 머리는 나중에 자르고, 우리 게임 하나 할까? ‘신성한 삼문답’이라고 알아?”
  97.  
  98. 그것은 언젠가 내가 올림포스의 ‘아리아드네’와 했던 문답 교환이었다.
  99.  
  100. “나나 그쪽이나 서로한테 궁금한 게 있잖아? 하나씩 교환해보자고.”
  101.  
  102.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103.  
  104. 하지만, 이것이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105.  
  106.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7.  
  108. “좋아.”
  109.  
  110. “대신 규칙을 하나 만들자. ‘거짓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야.”
  111.  
  112. “······그러면 ‘삼문답 교환’이 무슨 소용이 있지?”
  113.  
  114. “재미있잖아.”
  115.  
  116. 한수영의 고양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117.  
  118.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19.  
  120.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121.  
  122. “그래, 좋아.”
  123.  
  124. 내 대답과 함께, 허공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125.  
  126.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127.  
  128.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129.  
  130.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131.  
  132.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133.  
  134. “내가 먼저 하지.”
  135.  
  136.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137.  
  138. “네가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한 ‘이계의 언약’의 내용을 말해.”
  139.  
  140. 내 첫 질문에, 한수영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141.  
  142.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143.  
  144. 이 문답의 핵심은 상대방이 피해가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넘겨 짚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145.  
  146. 한수영이 토라진 듯 말했다.
  147.  
  148. “거기까지 알고 있었어? 쉽지 않네.”
  149.  
  150. “물은 말에나 대답해.”
  151.  
  152. “그렇다는 건 그쪽도 ‘이계의 언약’을 맺었다는 뜻인가.”
  153.  
  154.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155.  
  156. 그건 3회차의 한수영과 비슷하군.
  157.  
  158.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159.  
  160. “나는 ‘어떤 세계’의 완성을 걸고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했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쪽도 내가 원하는 세계의 완성을 도와주기로 했지.”
  161.  
  162.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163.  
  164. 직관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영양가가 없는 대답은 아니었다.
  165.  
  166. 중요한 것은 저 대답의 진위 여부다.
  167.  
  168.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6’을 발동합니다!]
  169.  
  170. [등장인물 ‘한수영’이 ‘포커페이스 Lv.10’를 발동하였습니다!]
  171.  
  172.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173.  
  174. 역시, 그 스킬을 쓸 줄 알았다.
  175.  
  176. ‘등장인물 일람’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스킬 목록에는 포커페이스가 있었으니까.
  177.  
  178. 저 스킬이 있는 한, ‘거짓 간파’를 통해 대답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179.  
  180. 물론, 내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1.  
  182.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183.  
  184.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충족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185.  
  186. 녀석이 ‘등장인물’이 된 이상, 나는 질문을 한 것만으로도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순간.
  187.  
  188. ······.
  189.  
  190. 「그럴 줄 알았어」
  191.  
  192. 「내가 말했지」
  193.  
  194. 「왁, 내 발 밟지 마!」
  195.  
  196. 「뭘 훔쳐 보는 거야?」
  197.  
  198. ······.
  199.  
  200. 순간적으로 들려온 수백 개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경악성을 내뱉을 틈도 없이, 나는 황급히 스킬을 취소해야 했다.
  201.  
  202.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해제됩니다!]
  203.  
  204. 멍한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녀석은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5.  
  206.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런 스킬 있을 것 같더라.”
  207.  
  208. “······방금 그건 뭐였지?”
  209.  
  210. “그거, 두 번째 질문으로 쳐도 될까?”
  211.  
  212.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213.  
  214. 한수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215.  
  216. “뭐, 이건 서비스로 대답해 줄게. ‘아바타’ 스킬을 응용한 거야.”
  217.  
  218.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219.  
  220. 방금 한수영은 ‘분신’을 이용해 자신의 자아를 수백 개로 쪼갠 것이었다.
  221.  
  222.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간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223.  
  224. 이제껏 이런 적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225.  
  226.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227.  
  228. “이번엔 내가 묻지.”
  229.  
  230. ―화신 ‘한수영’이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231.  
  232. “너 ‘멸살법’이라는 소설 쓴 적 있지?”
  233.  
  234. 어떤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235.  
  236.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237.  
  238. 여기선 내 특기를 좀 발휘해야겠군.
  239.  
  240. “맞아. 내가 쓴 거야.”
  241.  
  242. [등장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0’을 사용합니다!]
  243.  
  244. [전용 스킬, ‘포커페이스 Lv.5’를 발동합니다!]
  245.  
  246. 미안하지만 ‘포커페이스’ 스킬은 나도 가지고 있다.
  247.  
  248. 이 회차로 넘어오기 직전에, [도깨비 보따리]에서 필요한 스킬을 잔뜩 구입했거든.
  249.  
  250.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251.  
  252. 그 메시지에, 한수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253.  
  254. “너 진짜 재밌네.”
  255.  
  256. 재미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257.  
  258. *
  259.  
  260. “······이 자가 정말 유중혁인가요?”
  261.  
  262.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던 이설화가 물었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말로만 듣던 ‘철혈의 패왕 유중혁’. 마치 등신대처럼 서 있는 유중혁은 그녀를 본 체 만 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263.  
  264. 그 짧은 새, 유중혁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먼저 핀잔을 준 것은 이지혜였다.
  265.  
  266. “다들 구경이라도 났어? 화면으로 자주 봤으면서 왜들 그래?”
  267.  
  268. “신기해서 그러지······. 이렇게 가만히 있는건 처음 보잖아. 어떻게 한 거지? 독을 쓴 건가?”
  269.  
  270. 심지어는 상황실에 앉아 있던 한동훈도 패널창을 띄워 유중혁을 관찰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김남운은 유중혁의 곁에 서서 미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271.  
  272. 찰칵. 찰칵.
  273.  
  274.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275.  
  276. “······너 지금 뭐하냐?”
  277.  
  278. 화들짝 놀란 김남운은 어차피 들킨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폰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자 김남운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손이 김남운을 대신해 스마트폰을 쥐었다.
  279.  
  280. “야, 너도 같이 찍자. 이런 기회 흔치 않다고.”
  281.  
  282. “뭐야, 이거 안 놔? 사진을 왜 찍어?”
  283.  
  284. 손목을 잡힌 이지혜가 으르렁거렸다.
  285.  
  286.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사진 속엔 무표정의 유중혁과 낄낄 웃는 김남운, 그리고 성질을 부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287.  
  288. “거기 군인! 옆에 서 있지 말고 비켜! 우리 사진 찍고 있잖아!”
  289.  
  290. 멀뚱히 서 있던 이현성이 한소리를 듣자, 다가온 이설화가 김남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291.  
  292. “남운이 너 현성 씨한테 존댓말 하라고 했지?”
  293.  
  294. “아 싫어, 나한테 잔소리 좀 하지 마!”
  295.  
  296. 찰칵.
  297.  
  298. “근데 이 사람 진짜 안전한 거 맞니?”
  299.  
  300. “내가 한 번 찔러 볼까?”
  301.  
  302. “그딴 짓 하지마. 아까 올라간 놈이 이상한 트리거 걸고 갔어. 자칫하면 몰살이야.”
  303.  
  304. 찰칵.
  305.  
  306. “트리거? 무슨 트리거?”
  307.  
  308. “이 녀석한테 위해를 가하면 폭주하도록 지시한 것 같아.”
  309.  
  310. “흠, 위해라······ 그럼 이건 어때?”
  311.  
  312. 김남운이 씩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313.  
  314. 유중혁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315.  
  316. “뭐야,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그럼 이건?”
  317.  
  318. 텅 빈 유중혁을 둘러싼 채, 사람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319.  
  320. 찰칵.
  321.  
  322. 몇 번이나 찍히는 사진 속에서,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텅 빈 동공의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아주 희미한 감정. 어쩌면 유중혁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 어귀가 답답한 것 같기도 한 마음.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이 없는 유중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323.  
  324. “어, 뭐야. 방금 움직인 것 같은데?”
  325.  
  326. “······잘못 본 거 아냐?”
  327.  
  328. “아냐! 진짜로······.”
  329.  
  330. 그가 아는 것은, 김독자가 남긴 말뿐이었다.
  331.  
  332.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333.  
  334. ―경고! 경고! ‘염화의 대천사’가 근접하고 있습니다!
  335.  
  336. 허공에서 들려온 경고음에, 유중혁에게 붙어 있던 일행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소리친 것은 김남운이었다.
  337.  
  338. “뭐? 시발! 그 미친년이 여길 왜 와?”
  339.  
  340. “엿 됐다. 다들 준비해. 현성 아저씨는 빨리 올라가서 사부한테 알려줘요!”
  341.  
  342. 흩어지는 일행들 속에서, 유중혁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방해된다는 듯 그를 치고 지나갔다.
  343.  
  344.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345.  
  346.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유중혁은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패널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홍염 속에 불타오르는 눈부신 천사가, 귀기 어린 안광을 빛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천사의 불타는 검이 움직일 때마다, 일대의 폐허가 불바다에 휩싸이고 있었다.
  347.  
  348. 유중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349.  
  350. 텅 빈 기억 속에서, 유중혁은 그 천사를 본 적이 있다.
  351.  
  352. 행복한 기억.
  353.  
  354.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낯설면서도 기꺼웠다.
  355.  
  356. 마치 중간에 두터운 벽이 드리워진 것처럼, 멀고 차가운 기억들.
  357.  
  358.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작은 인형이었다.
  359.  
  360.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 웃습니다.
  361.  
  362.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363.  
  364. 그것은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365.  
  366. 그것은 누군가의 벽에 남겨진 기록일 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훔쳐 보았을 뿐이었다. 그 기억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일. 허구(虛構)였다.
  367.  
  368.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369.  
  370. 그럼에도 어째서, 그 허구를 이토록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유중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371.  
  372.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볼을 부빕니다.
  373.  
  374. 불타는 대천사가 화면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375.  
  376. 유중혁은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377.  
  378. “······우리엘.”
  379.  
  380.  
  381. # 292
  382.  
  383. Episode 55. 행복한 기억 (2)
  384.  
  385.  
  386. 한수영과의 대담이 시작되고 약 이십여 분이 흘렀다.
  387.  
  388. 나는 삼문답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
  389.  
  390. 하나, 1863회차의 ‘한수영’은 ‘이계의 언약’을 통해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했다.
  391.  
  392. 둘, 1863회차의 ‘한수영’은 3회차의 분신이 아닐 수도 있다.
  393.  
  394. 셋, 1863회차의 ‘한수영’은 3회차의 한수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그리고 조금 더 똑똑하다).
  395.  
  396. 그것들을 조합해서 몇 가지 정보들을 더 추론해 볼 수 있었다.
  397.  
  398. 가령, 이 한수영은 나와 같은 ‘3회차’에서 이곳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내가 모르는 방법을 통해 미래에 대한 정보들을 계측하고 있다는 것······.
  399.  
  400. 나는 한수영에게 말했다.
  401.  
  402. “덕분에 좋은 정보들을 알았군. 이제 남은 건 내 마지막 질문인가?”
  403.  
  404. “흠, 그건 대답 안 하면 안 될까? 난 이제 너에 대해 충분히 알았거든.”
  405.  
  406. “······그래? 알아낸 게 뭐지?”
  407.  
  408. “그게 세 번째 질문?”
  409.  
  410. “아니.”
  411.  
  412. 한수영이 쩝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413.  
  414. “3회차에서 온 김독자. 그곳의 ‘나’는 어땠지?”
  415.  
  416. 네 질문권은 끝났다고 말하려는 순간, 서늘한 감각이 스쳐갔다.
  417.  
  418. ······내가 어떻게 3회차에서 온 걸 알았지?
  419.  
  420. “아, 표정을 보니 맞았나 보네? 찍은 건데.”
  421.  
  422. “거짓말 하지마. 알고 말한 거잖아.”
  423.  
  424. “아하하, 안 속네.”
  425.  
  426. 허공에서 한수영과 나의 눈빛이 부딪쳤다.
  427.  
  428. 아랫입술을 축인 한수영이 물었다.
  429.  
  430. “3회차의 나······ 조금 나사가 빠져 있지 않아? 내가 기억을 너무 많이 가져가서 말야.”
  431.  
  432. “나름대로 잘 하고 있어.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433.  
  434. “걜 감싸 주는 거야? 그럼 정보 좀 나눠 주지 그랬어? 소설을 다 읽었으니 그 정도 아량은 보여줄 수 있잖아?”
  435.  
  436.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437.  
  438. “그런 소설을 다 읽은 녀석은 어떤 녀석일지 정말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이야. 김독자.”
  439.  
  440. 3회차의 한수영도 만만치 않지만, 이 녀석은 정말 보통이 아니다.
  441.  
  442. “난 작가라고 말했을 텐데.”
  443.  
  444. 한수영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445.  
  446. “넌 작가가 아냐. 넌 그 소설을 쓰기엔 너무 명석하거든. 날 속이기엔 너무 멍청하지만 말이야.”
  447.  
  448. “겨우 그런 이유로······.”
  449.  
  450. “그리고 난 ‘멸살법’의 작가가 어떤 존재일지 짐작하고 있어.”
  451.  
  452. 하마터면 그 ‘작가’가 누구인지 물어볼 뻔했다.
  453.  
  454. 하지만 함정일지 아닐지 모르는 판국에 섣불리 이쪽의 허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455.  
  456.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457.  
  458. “내가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그 질문은 왜 한 거지?”
  459.  
  460. “글쎄, 왜 그랬을까?”
  461.  
  462. 한수영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였다.
  463.  
  464.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465.  
  466. 한수영은 내게 멸살법을 쓴 적이 있냐고 물었다.
  467.  
  468.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답함으로써 내가 ‘멸살법’을 알고 있다고 시인해버린 셈이었고······ 젠장.
  469.  
  470. 나는 이쯤에서 이야기를 끊고,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471.  
  472.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473.  
  474. ―세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475.  
  476. “너는 어떻게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거지? 넌 분명 ‘멸살법’을 99화까지 밖에 읽지 못했을 텐데―”
  477.  
  478. 아래층에서 굉음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479.  
  480. 경고음과 함께, 스위트룸의 비상 계단으로 허겁지겁 올라온 이현성이 고함을 질렀다.
  481.  
  482. “대장님! 큰일났습니다!”
  483.  
  484. 이현성의 목소리와 동시에, 품 속에 있던 두 천사가 간접 메시지를 토했다.
  485.  
  486.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뭔가에 경악합니다!]
  487.  
  488.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489.  
  490. 한수영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491.  
  492. “너 그 꽃······.”
  493.  
  494.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외창 쪽으로 달려갔다.
  495.  
  496.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497.  
  498.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499.  
  500. 고오오오오!
  501.  
  502. 창 밖으로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날아 올랐다.
  503.  
  504. 설마 누군가 묵시룡을 깨운 걸까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505.  
  506. 창공에서 날갯짓을 하는 거대한 드래곤을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507.  
  508. 그래, 왜 안 보이나 싶었지.
  509.  
  510. “모두 피해요! 나 혼자서는 무리야!”
  511.  
  512. 새하얀 털코트에 휩싸인 여자가 그곳에서 거대한 드래곤을 이끌고 있었다.
  513.  
  514. 비스트로드 신유승.
  515.  
  516. 이젠 아이의 티를 완연히 벗은 그녀가, 95번 시나리오에서 일행들을 지키고 있었다. 1급 괴수종을 넘어 특급 괴수종으로 진화한 ‘키메라 드래곤’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517.  
  518. 콰아아아아아!
  519.  
  520. 그러나 덮쳐오는 불길은 브레스에도 꺼지지 않았다.
  521.  
  522. 오히려 독기를 제물 삼아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불길.
  523.  
  524. 나는 저 불길을 알고 있었다.
  525.  
  526. <에덴>의 가장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불꽃, 지옥염화(地獄炎火).
  527.  
  528. 한수영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뀐 것은 알고 있었다.
  529.  
  530. 하지만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와 비슷한 점도 있었다.
  531.  
  532. 가령 이 타락한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대천사의 이름 같은 것.
  533.  
  534. “우리엘.”
  535.  
  536.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노합니다!]
  537.  
  538. 폭발하는 기류와 함께, 건물의 외창이 통째로 깨어져 나갔다.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추락하고 있었다.
  539.  
  540. 나는 창을 타넘어, 바람을 꿰뚫고 도약했다.
  541.  
  542. 힘없이 추락하는 신유승이 내 품에 들어왔다.
  543.  
  544. 깜짝 놀란 신유승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545.  
  546. “누구······.”
  547.  
  548. “잠시 지혈 좀 하겠습니다.”
  549.  
  550. 나는 [점혈] 스킬을 발동해 설화가 새어나오는 신유승의 목과 팔을 점혈했다. 그런데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투명한 문자열이 손 끝에 떠올랐다.
  551.  
  552. 「‘제4의 벽’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553.  
  554. 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555.  
  556. ‘하지마.’
  557.  
  558. 「‘제4의 벽’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쳇’」
  559.  
  560.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내 회차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561.  
  562. 분통하고, 억울했지만.
  563.  
  564.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했다.
  565.  
  566. 탓.
  567.  
  568. 나는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후 신유승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569.  
  570. 조금 늦게, 한수영을 어깨에 태운 이현성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신유승이 한수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571.  
  572. “······대장, 미안해요.”
  573.  
  574. “괜찮아.”
  575.  
  576. 이현성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한수영이 신유승의 어깨를 탁 두들기며 앞으로 나왔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577.  
  578. 원래 저 자리에 있어야 했던 존재는 유중혁이었다.
  579.  
  580. “코트.”
  581.  
  582. 한수영이 손을 내밀자, 달려온 이지혜가 김남운에게서 빼앗은 하얀색 코트를 쥐어주었다.
  583.  
  584. “여기요, 사부.”
  585.  
  586. 휘리릭 하며 감긴 코트가 한수영의 체형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587.  
  588.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코트 보다 멋있는 것 같았다.
  589.  
  590. 한수영은 코트의 깃을 세우며 광화문을 바라보았다.
  591.  
  592. 자욱한 먼지 속에서 타오르는 지옥도.
  593.  
  594. 염화에 불타는 성좌들이 무력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595.  
  596. 별들의 잔해가, 하나 둘 재가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597.  
  598. 이것이 멸악의 대천사, 우리엘이 강림한 현장이었다.
  599.  
  600. 나는 넘실거리는 먼지 너머의 불꽃을 보며 한수영에게 물었다.
  601.  
  602. “······설마 내가 아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엘이 여기로 온 건가?”
  603.  
  604. “네가 아는 이유가 뭐지?”
  605.  
  606. “<에덴>의 멸망.”
  607.  
  608. “그럼 맞는 것 같네.”
  609.  
  610. 오고가는 대화에, 품속의 꽃들이 부르르 떨었다.
  611.  
  612.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613.  
  614.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615.  
  616. 물론 대천사들은 모를 것이다.
  617.  
  618. 1863회차에서, <에덴>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619.  
  620. 사실은 계속 몰랐으면 했다.
  621.  
  622. 새하얀 불꽃이 넘실대는 광화문 곳곳에서 다가오는 괴생물체들이 보였다.
  623.  
  624. 이름 없는 것들.
  625.  
  626. 우리엘의 격에 부나방처럼 이끌린 존재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한수영에게 물었다.
  627.  
  628. “도움이 필요한가?”
  629.  
  630. “도와주면 고맙지. 아무래도 염화의 대천사는 상대하기가 까다롭거든.”
  631.  
  632. 내 명령을 기다리는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633.  
  634.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635.  
  636. “이대로라면 하나쯤 죽을 수도 있고.”
  637.  
  638.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639.  
  640. 이 회차는 나의 회차가 아니었고.
  641.  
  642. 유중혁은, 이 회차에서 어떤 동료도 갖지 않았다.
  643.  
  644. “유중혁. 우리엘을 막아.”
  645.  
  646. 내 말에 유중혁의 신형이 움직였다.
  647.  
  648. 사실 이런 짓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649.  
  650. 유중혁을 발견한 우리엘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651.  
  652. 아아아아아아아!
  653.  
  654.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655.  
  656. 이 회차의 <에덴>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657.  
  658. 분노한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파도를 이루자,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빛살을 뿌리며 파도를 베어냈다. 무시무시한 격과 격의 충돌이 창공에 어마어마한 진동파를 발생시켰다.
  659.  
  660. 3회차의 유중혁이나 우리엘이 저 광경을 본다면 믿지 못하겠지.
  661.  
  662. 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663.  
  664. 저 광경은, 줄곧 내 머릿속에만 있기를 바랐다.
  665.  
  666. 품 속의 꽃의 진동이 한결 심해졌다.
  667.  
  668. 기어코, 참다 못한 가브리엘이 진언을 토해냈다.
  669.  
  670. [우리엘이 왜 저 녀석을 공격하는 건데!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671.  
  672.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73.  
  674. [빨리 말해! 말하지 않으면―]
  675.  
  676. “말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677.  
  678.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679.  
  680. 아니, 어쩌면 바꿔서도 안 된다.
  681.  
  682. 저 싸움은 1863회차의 인과로 인해 발생한 싸움이다.
  683.  
  684. 우리엘의 분노는 정당했고, 유중혁은 그 분노를 마땅히 감내해야 했다.
  685.  
  686. 나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한수영이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687.  
  688. “······유중혁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진짜였네. 솔직히 안 믿었는데.”
  689.  
  690. “나머지는 막을 수 있는 거냐?”
  691.  
  692. “문제 없어. 아, 그리고 도와준 보답을 하나 할까 하는데.”
  693.  
  694.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695.  
  696. “아까 나한테 물었지? 어째서 내가 이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697.  
  698. [등장인물 ‘한수영’이 설화 ‘예상표절(豫想剽竊)’을 이야기합니다.]
  699.  
  700. “이게 그 대답이야.”
  701.  
  702. 한수영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다가오는 괴수들의 패턴을 읽어내고 있었다.
  703.  
  704. ······미래시?
  705.  
  706. 틀림없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틀림없는 미래시와 흡사한 능력이었다. 그것도 원작에는 없던 능력.
  707.  
  708.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무엇도 없으니. 앞으로 쓰여질 것은 모두 이미 쓰여진 것의 변용이다.」
  709.  
  710. 한수영에게서 흘러나오는 설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711.  
  712.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발동해 다가오는 괴수들의 목을 가볍게 날려버린 녀석이 웃었다.
  713.  
  714. “나는 일류 작가야. 그리고 ‘멸살법’은 기껏해야 클리셰를 집합한 소설일 뿐이지. 전개를 예측하는 게 뭐 어렵겠어? 결국은 패턴의 반복일 뿐인데.”
  715.  
  716. 그 말을 실천하듯, 한수영은 다가오는 괴수들의 패턴을 능숙하게 읽어 사냥을 거듭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짓씹듯 말했다.
  717.  
  718. “겨우 그 정도로 살아남았다고?”
  719.  
  720. 분명 뛰어난 능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721.  
  722. “멸살법은 복잡한 설정들로 가득 찬 이야기야. 네가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어.”
  723.  
  724. “그래, 네 말이 맞아.”
  725.  
  726. 다음 순간, 한수영의 몸에서 하얀 빛이 솟으며 무수한 분신들이 뛰쳐 나왔다. 열, 스물, 삼십······ 순식간에 일백 명을 넘긴 분신들이, 모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고 있었다.
  727.  
  728. “내가 하나였다면 그랬겠지.”
  729.  
  730. 한수영이 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수백 명의 한수영이 동시에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름 없는 것들’을 차분히 베어 나갔다. 한수영은 계속해서 분열했다.
  731.  
  732. “하지만 그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733.  
  734. 한 사람의 인간과 백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735.  
  736. 백 사람의 인간과, 천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737.  
  738. “그거 알아?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을, 만 명의 사람은 이틀이면 해낼 수 있다는 거.”
  739.  
  740.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741.  
  742.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743.  
  744. 들려온 목소리들은 이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745.  
  746. 나는 그것이 한수영의 머릿속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747.  
  748. 무수한 한수영들이 그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세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749.  
  750. .
  751.  
  752. .
  753.  
  754. 「이건 틀렸어.」
  755.  
  756. 「다음 전개는 이거야. 분명 녀석이 등장할 거라고.」
  757.  
  758. 「아니, 이쪽이 맞아. 대천사 우리엘은······.」
  759.  
  760. 「다수결로 하자.」
  761.  
  762. .
  763.  
  764. .
  765.  
  766. 무수한 한수영들이 그려낸 세계의 시뮬레이션들.
  767.  
  768. 어쩌면, 회귀자는 유중혁만이 아니었다.
  769.  
  770.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수백만 개의 세계가 쉴 새 없이 태어나고 또 부서지고 있었다.
  771.  
  772. 아주 작은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773.  
  774. 혹은, 아주 작은 흠결이 있다는 이유로.
  775.  
  776. 극도의 결벽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나가는 광경.
  777.  
  778. 나는 한순간 한수영이 그리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779.  
  780. 그 이야기의 생멸(生滅)이 너무나 안타깝고, 또 너무나 아름다워서.
  781.  
  782. 어떤 것은 동의할 만한 전개였고.
  783.  
  784. 또 어떤 것은, 나조차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785.  
  786.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787.  
  788. 어떤 복제(複製)는, 원작을 넘어선다.
  789.  
  790. 오직, 완벽한 ‘단 하나의 전개’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
  791.  
  792.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한수영이 계획한 결과물이었다.
  793.  
  794. 나는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상의가 찢어지고, 살갗에 피가 튀어도 무심히 칼질을 반복하는 유중혁. 그리고 그런 유중혁에 맞서 싸우는 우리엘.
  795.  
  796. 그 어떤 동료도 죽지 않고.
  797.  
  798. 그 어떤 멸망도 찾아오지 않으며.
  799.  
  800. 모두가 힘을 모아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할 수 있는 세계.
  801.  
  802. 빌어먹게도,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803.  
  804. 그리고 이 세계가 완성되기 위해서, 유중혁은······.
  805.  
  806. 한수영이 나를 보았다.
  807.  
  808. 마치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809.  
  810. “너도 지금쯤 알았겠지. 이 세계에 녀석은 필요 없다는 걸.”
  811.  
  812. 원작을 넘어선 세계를 꿈꾸는 표절 작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813.  
  814. “나는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어.”
  815.  
  816.  
  817. # 293
  818.  
  819. Episode 55. 행복한 기억 (3)
  820.  
  821.  
  822.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다.
  823.  
  824. 한수영은, 방금 그렇게 말했다.
  825.  
  826.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827.  
  828. “······꼭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완벽한 이야기가 최고의 이야기는 아니야.”
  829.  
  830. 멀리서 유중혁과 우리엘의 충돌로 한바탕 굉음이 터져 나왔다.
  831.  
  832. 창공에서 터지는 빛이 한수영의 두 눈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833.  
  834.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에서 죽어야 해. 그래야, 내가 바라던 세계가 완성되니까.”
  835.  
  836. “네가 바라는 세계는 대체 무슨······.”
  837.  
  838. “내 머릿속을 들여다 봤잖아? 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
  839.  
  840. 다시 한 번 터진 굉음에 내 목소리가 묻혔다.
  841.  
  842. 애초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843.  
  844. 한수영의 말대로, 나는 녀석이 꿈꾸는 세계의 단면을 보았으니까.
  845.  
  846. 한치의 빈틈도 없는 이상향.
  847.  
  848. 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원작을 소화해낸 존재만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
  849.  
  850.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엘과 유중혁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851.  
  852. 한수영이 꿈꾸는 세계에서, 이 전투의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853.  
  854. 「이곳에서 염화의 대천사는 죽는다.」
  855.  
  856. 기다렸다는 듯, 일행들이 우리엘과 유중혁의 격전지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순살을 준비하는 이지혜, 태산 부수기를 충전하는 이현성. ‘심연의 흑염룡’을 불러내려는 듯 붕대를 푸는 김남운도 보였다.
  857.  
  858.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859.  
  860. 내 움직임을 눈치챈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861.  
  862. “잠깐, 너······!”
  863.  
  864. 분명 이 세계를 만든 것은 나나 유중혁이 아닌 한수영이다.
  865.  
  866. 근데······ 그래서 뭐?
  867.  
  868.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869.  
  870. 애초에,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871.  
  872. 쿠드드드득.
  873.  
  874. 마왕의 격을 상징하는 작은 뿔이 머리 위로 도드라졌다. 날개까지 현신하고 싶었지만 불완전한 ‘마계의 봄’으로는 그만한 격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한수영은 놀란 눈치였지만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 힘만으로 저 싸움을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것이겠지.
  875.  
  876. 나도 알고 있다.
  877.  
  878. 그런데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879.  
  880. “가브리엘, 요피엘.”
  881.  
  882.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883.  
  884.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885.  
  886. “도와주십시오.”
  887.  
  888. [대천사가 이번 현현에는 전보다 많은 개연성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889.  
  890. “상관없습니다.”
  891.  
  892. 파츠츠츠츠츳!
  893.  
  894. 내 허락과 동시에, 두 천사의 격이 내 배후에 들어섰다. 날개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부를 찢고 뭔가가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895.  
  896. [대천사의 ‘격’이 당신과 함께 합니다.]
  897.  
  898. 성좌들을 해치웠을 때처럼, 어깻죽지를 뚫고 자라난 여섯 장의 날개.
  899.  
  900. 콰아아아아아!
  901.  
  902. [마왕의 ‘격’과 대천사의 ‘격’이 당신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903.  
  904. 상성이 맞지 않는 설화들이 내 안에서 섞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905.  
  906. 마왕의 힘에 덧입혀진 대천사의 격.
  907.  
  908.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격의 파장이 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909.  
  910. “뭐야, 저 격은······!”
  911.  
  912.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913.  
  914. 지금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대천사는 오직 우리엘뿐.
  915.  
  916. 그런데 지금 내게서 느껴지는 ‘격’은 정확히 대천사의 그것이었다.
  917.  
  918.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보며 완악합니다!]
  919.  
  920.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921.  
  922. 마왕과 대천사의 격이 하나의 존재에게 깃들었으니, 놀랄 법도 했다. 내가 알기로 ‘멸살법’의 세계에서 이런 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제껏 하나뿐이었으니까.
  923.  
  924. [마. 왕······!]
  925.  
  926. 내 존재를 느낀 우리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927.  
  928. 내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내게 강림한 가브리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929.  
  930. [우리엘! 멈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931.  
  932. 웅장한 대천사의 진언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우리엘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933.  
  934. [······가브리엘?]
  935.  
  936. [정신 차렸어? 뭐야, 너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건데!]
  937.  
  938. 화색을 띤 가브리엘이 나를 통해 진언을 이어갔다.
  939.  
  940. 차갑게 가라앉는 우리엘의 눈을 보며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941.  
  942. [이것 봐, 네가 좋아하던 녀석들이라고! 유중혁이랑 김독자! 나한테 맨날 떠들어댔잖아!]
  943.  
  944. 현신한 가브리엘의 격이 우리엘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우리엘의 입술이 열렸다.
  945.  
  946.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아.]
  947.  
  948. 당황한 가브리엘의 몸이 허공에서 굳었다.
  949.  
  950. 우리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951.  
  952. [살아 있었구나, 가브리엘. 그것도 마왕 놈한테 빌붙어서.]
  953.  
  954. [뭐, 뭔 소리야?]
  955.  
  956. 아아아아아아아!
  957.  
  958. 폭주한 우리엘의 마력이 광화문 일대에 폭풍을 불러왔다. [지옥염화]가 폭주하며 일대를 지옥도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고열에 닿은 유중혁의 코트가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959.  
  960. 그어어어어어!
  961.  
  962. 후폭풍에 휩쓸린 ‘이름 없는 것들’이 고깃조각이 되어 흩날렸다.
  963.  
  964. 나는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
  965.  
  966. “가브리엘!”
  967.  
  968. 얼빠져 있던 가브리엘이 뒤늦게 내게 자신의 힘을 돌려주었다.
  969.  
  970. [······이 설명은 나중에 반드시 듣겠어.]
  971.  
  972. 솔직히 말해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973.  
  974. 1863회차에 <에덴>에서 벌어진 전사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3회차에서 온 대천사가 그 정보를 알았을 때 어떤 후폭풍에 휩싸일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가브리엘이 받을 정신적 충격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975.  
  976. 왜냐하면······ 1863회차의 가브리엘은 <에덴>을 배신했으니까.
  977.  
  978. “유중혁!”
  979.  
  980. 땅을 박차는 순간, 유중혁이 [파천검도]로 날아드는 지옥염화의 불길을 베어냈다. 나는 불길의 틈새로 뛰어들었다.
  981.  
  982. 츠츠츠츠츳!
  983.  
  984. 품속에 있던 가브리엘과 요피엘의 꽃잎이 각각 세 장씩 허공에 흩날렸다. 엄청난 격의 충전이 이루어지며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충돌하는 마력의 반탄력을 이용해, 나는 단숨에 우리엘을 향해 접근했다.
  985.  
  986. 미안합니다, 우리엘.
  987.  
  988. 나는 양손으로 우리엘의 머리를 붙잡았다. 대천사의 격과 마왕의 격이 함께 깃든 백청강기의 마력이 우리엘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우리엘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전혀 주눅든 기세가 아니었다.
  989.  
  990. 오히려 그녀의 불꽃이 조금씩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991.  
  992. 아득한 고열에 날갯죽지와 뿔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먼저 신음을 뱉은 것은 내쪽이었다.
  993.  
  994. 이것이 에덴 최강의 전투 천사가 가진 힘이다.
  995.  
  996.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우리엘이 손에 [업화의 불꽃]을 불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꽃의 정수. 날카롭게 빚어진 불꽃의 칼날이 내 심장을 노리고 쏘아지는 순간.
  997.  
  998. “요피엘!”
  999.  
  1000. 내 손끝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며, 우리엘의 전신이 헤일로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구속구로 묶였다. 경악한 우리엘이 뭐라고 외치는 순간, 새하얀 구속구가 그녀를 꽉 죄어들었다.
  1001.  
  1002. 츠츠츠츠츠츳!
  1003.  
  1004. 우리엘의 ‘격’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주변을 뒤덮었던 불길도 급격하게 꺼져갔다.
  1005.  
  1006. 우리엘은 <에덴> 내에서도 손에 꼽게 강한 대천사. 다른 어떤 천사도 악마 퇴치에 있어서는 그녀의 격을 따라갈 수 없다.
  1007.  
  1008. 하지만, 상대가 같은 대천사라면 어떨까.
  1009.  
  1010. 대천사 요피엘.
  1011.  
  1012. 악마 퇴치를 업으로 삼는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요피엘은 특수한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1013.  
  1014. [선악의 구속구]
  1015.  
  1016. 타락한 천사들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요피엘의 성흔이, 우리엘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1017.  
  1018. 꽈드드드드득!
  1019.  
  1020. 우리엘이 격을 발출하려 할수록, 구속구는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옥죄어왔다. 끅끅거리며 힘을 발산하던 우리엘이, 마침내 반항을 그만두고 쓰러졌다. 구속구에 갇힌 대천사는 일주일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1021.  
  1022. 나는 잠든 우리엘을 안아들고 유중혁과 함께 불길 밖으로 나섰다. 자욱한 연기 밖으로 나서자, 일행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경악한 눈으로, 또 누군가는 감탄한 얼굴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희미한 적의가 깃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1023.  
  1024. 나는 한수영을 보며 말했다.
  1025.  
  1026. “이건 네가 그리던 세계에는 없던 일이겠지.”
  1027.  
  1028. “······여기서 우리엘이 죽든 안 죽든 큰 그림에는 영향 없어. 너도 봤으니 알 잖아? 내 구상은 완벽하다는 걸.”
  1029.  
  1030. 하얀 코트를 흩날리며, 한수영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1031.  
  1032. 이윽고 내 코앞까지 다가온 한수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불타버린 천사의 날개와, 뭉그러진 마왕의 뿔을 보며 물었다.
  1033.  
  1034. “김독자, 네가 바라는 세계는 뭐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너라면, 분명 바라는 세계가 있을 텐데 말이야.”
  1035.  
  1036. 방금 한수영의 말은, 내가 아주 잘 아는 대사였다.
  1037.  
  1038. 「“네가 원하는 세계는 뭐지?”」
  1039.  
  1040. 그것은 유중혁이 새로운 동료를 영입할 때 늘 하는 대사였다.
  1041.  
  1042.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1043.  
  1044. “난 네 동료 따윈 되지 않아.”
  1045.  
  1046.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려면 네가 필요해.”
  1047.  
  1048. 한수영은 유중혁 쪽을 일별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1049.  
  1050. “그리고 너도, 새로운 이야기의 완성이 필요할 텐데?”
  1051.  
  1052. 마치, 내가 이 세계에 왜 왔는지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1053.  
  1054. 나는 살아남은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1055.  
  1056.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신유승, 김남운······.
  1057.  
  1058. 이제껏, 이들이 모두 살아 남아서 여기까지 온 회차는 없었다.
  1059.  
  1060. 하지만.
  1061.  
  1062. “이 이야기의 무엇이 새롭다는 거지?”
  1063.  
  1064. 나는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1065.  
  1066.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한 인물.
  1067.  
  1068. 세계를 구하기 위해 수천 번의 회차를 반복했으나, 이번에는 그 세계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인물.
  1069.  
  1070. 한수영의 세계 또한, 결국엔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세계일 뿐이다.
  1071.  
  1072. 그리고 그런 세계는, 굳이 한수영의 세계가 아니라도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1073.  
  1074. “너는 원작을 가져와서, 전개의 순서를 바꾸고 주인공의 자리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 넣었을 뿐이야.”
  1075.  
  1076. 어떤 복제는 원작을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
  1077.  
  1078. 하지만, 결코 원작(原作)은 될 수 없다.
  1079.  
  1080. “그런 행위를 두고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1081.  
  1082. 여유 있는 미소라도 보일까 싶었지만, 지금은 나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1083.  
  1084.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1085.  
  1086. “이곳은 네가 있던 ‘회차’가 아냐. 건방지게 지껄이지 마.”
  1087.  
  1088. 한수영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섰다.
  1089.  
  1090. “사흘의 시간을 주겠어. 그때까지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날 도울지, 돕지 않을지.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전부야.”
  1091.  
  1092. 한수영을 따라, 일행들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을 이송하는 이설화와 그녀를 돕는 이현성. 이지혜와 김남운이 내쪽을 흘끗거리며 멀어지는 게 보였다.
  1093.  
  1094. 이곳은 내 회차가 아니었다.
  1095.  
  1096. 내 회차의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이곳의 유중혁을 죽여야만 내 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
  1097.  
  1098.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코트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여전히 미련한 눈으로 서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1099.  
  1100. ······하지만, 정말 그게 방법의 전부일까?
  1101.  
  1102. *
  1103.  
  1104.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1105.  
  1106. 츠츠츠츠츠······.
  1107.  
  1108. 한수영은 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허겁지겁 스마트폰을 켜 자신의 소설 파일을 열었다. SSSSS급 무한회귀자.
  1109.  
  1110. 「유준현은 생각했다.」
  1111.  
  1112. 「······두려워.」
  1113.  
  1114. 「그냥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
  1115.  
  1116. 하필 저장된 페이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꿋꿋이 그것을 읽었다. 읽지 않으면 그 모든 내용이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1117.  
  1118. 츠츠, 츳······.
  1119.  
  1120.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조금씩, 그녀의 곁에서 튀던 스파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한숨이 나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존재 자체가 스파크 속에 삼켜질 뻔했다.
  1121.  
  1122.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1123.  
  1124. 기억 전체를 갉아먹는 개연성의 후폭풍. 이것이 과도한 [아바타] 사용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멸살법’과 관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125.  
  1126. [‘스타 스트림’이 화신 ‘한수영’을 지켜봅니다.]
  1127.  
  1128. 한수영은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몸을 풀었다. 부작용으로 굳었던 어깨와 손목을, 관절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녀를 훔쳐 보는 무수한 성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1129.  
  1130. 한수영은 생각했다. 볼 테면 얼마든지 봐라. 난 겨우 여기서 끝나기 위해 시작한 게 아냐.
  1131.  
  1132. 한바탕 몸을 풀고 나자, 뼈를 아리던 추위는 한결 가셨다. 한수영은 코트를 입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1133.  
  1134. 김독자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1135.  
  1136. 첫날만 해도 서먹서먹하던 그들은, 고작 며칠 사이 말을 트는 사이가 됐다. 기이한 일이었다. 아흔 네 개의 시나리오를 거치며 불신으로 가득찼던 사람들이, 유독 저 녀석한테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1137.  
  1138. 김독자.
  1139.  
  1140. 이 계획의 마지막에 나타난 변수.
  1141.  
  1142. ······어째서 ‘은밀한 모략가’는 이 시점에 또 다른 언약자를 보낸 것일까.
  1143.  
  1144. 한수영은 답을 알 수 없었다.
  1145.  
  1146. 다만 확실한 것은, 저 김독자란 녀석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47.  
  1148. 광장의 한쪽 구석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유중혁이 서 있었다.
  1149.  
  1150.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한수영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1151.  
  1152. 가벼운 몸놀림으로 유중혁 바로 곁에 착지한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1153.  
  1154. “이제 이틀 뒤네.”
  1155.  
  1156.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1157.  
  1158. 한수영은 천천히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다.
  1159.  
  1160.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 텅 빈 눈동자.
  1161.  
  1162. 그 눈을 보던 한수영이 유중혁에게 성큼 다가갔다.
  1163.  
  1164. “······너 진짜 의식이 없는 거야?”
  1165.  
  1166. 홱 쏘아진 한수영의 손이 유중혁의 턱끝을 잡았다.
  1167.  
  1168. 유중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1169.  
  1170. “우습네. 하필 지금 와서 그런 꼴이 되다니······ 죽어주기로 약속했던 것까지 잊은 건 아니지?”
  1171.  
  1172. 가까이서 본 유중혁의 얼굴에는 상흔들이 도드라져 있었다.
  1173.  
  1174.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 더 외로운 싸움의 흔적들.
  1175.  
  1176.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1177.  
  1178. 마치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
  1179.  
  1180. 유중혁의 턱을 놓은 한수영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1181.  
  1182. 츳, 하며 튀는 불꽃과 함께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
  1183.  
  1184. 멀리서 김독자를 둘러싸고 뭐라뭐라 소리치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1185.  
  1186. 한수영이 후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1187.  
  1188. “세상도 참 불공평하지. 누군 말 몇 마디로 저렇게 쉽게 친해지는데, 누구는 그렇게나 많이 회귀를 해도 겉돌기만 하고 있으니.”
  1189.  
  1190. “······.”
  1191.  
  1192. “나한테 준 기억들을 좀 잘 써보지 그랬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됐다. 네가 가능할 턱이 없지.”
  1193.  
  1194. 후두둑 떨어진 담뱃재를 한수영이 자근자근 밟았다.
  1195.  
  1196. “기억 못해도 죽일 거니까 나 원망하진 마. 난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줬어.”
  1197.  
  1198.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수영은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1199.  
  1200. 유중혁은 텅 빈 눈으로 멀어지는 한수영을 보았다.
  1201.  
  1202. 텅 빈 유중혁의 동공에, 조금씩 희미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1203.  
  1204.  
  1205. # 294
  1206.  
  1207. Episode 55. 행복한 기억 (4)
  1208.  
  1209.  
  1210. 한수영의 본부에 머무른 지도 이틀이 지났다.
  1211.  
  1212. 그 사이, 나는 몇 가지 일들을 골몰해야 했다.
  1213.  
  1214. 하나는 한수영이 말한 ‘유중혁의 죽음’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내는 것.
  1215.  
  1216. 둘은 한수영이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뭘 얻고자 하는가를 알아내는 것.
  1217.  
  1218. 어느 쪽이든 알아내기는 쉬운 정보는 아니었다.
  1219.  
  1220. ······게다가 골치 아픈 문제는 그것만도 아니었다.
  1221.  
  1222. [정말 멸망했다고? 우리 <에덴>이?]
  1223.  
  1224. 나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가브리엘을 보며 되물었다.
  1225.  
  1226. “그렇습니다. 3회차의 메타트론한테 아무런 언질도 못 들으셨습니까?”
  1227.  
  1228. [······서기관이 <에덴>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1229.  
  1230.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231.  
  1232. “돌아가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1233.  
  1234. 그 말에 가브리엘과 요피엘의 줄기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내게 화를 내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1235.  
  1236. 나는 품속에서 우리엘의 인형을 꺼냈다. [선악의 구속구]에 의해 금제가 걸린 우리엘의 화신체는, 앞으로 닷새 간은 힘을 사용할 수 없다.
  1237.  
  1238. 「‘제4의 벽’이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1239.  
  1240. 어쩌면, ‘제4의 벽’의 힘을 빌려서 3회차의 기억을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보고서 감동한 우리엘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판타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1241.  
  1242. 아마 그 기억을 다 보고난 후, 우리엘은 이렇게 말하겠지.
  1243.  
  1244. 「■■, 그래서 어쩌라고?」
  1245.  
  1246. 내가 가진 3회차의 기억은, 끔찍한 1863회차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엘에게 그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1247.  
  1248. “김독자 씨, 같이 사냥 가기로 하셨었죠?”
  1249.  
  1250. 고개를 들자, 강철 건틀렛을 낀 이현성이 서 있었다.
  1251.  
  1252. “제가 같이 가도 괜찮습니까?”
  1253.  
  1254. “예, 뭐······ 주운 탄환에 피아 식별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으니까요.”
  1255.  
  1256.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는 이현성. 3회차든 1863회차든, 저 이상한 비유는 여전하다.
  1257.  
  1258. 나는 속으로 이현성이 지금까지 영창을 몇 번이나 다녀왔을지 계산해 보았다.
  1259.  
  1260.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1261.  
  1262.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미약한 호의를 드러냅니다.]
  1263.  
  1264. 이렇게 되고 보니 첫 번째 시나리오 생각도 나고,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1265.  
  1266. 나는 이현성의 경계심을 덜어주기 위해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1267.  
  1268. “너무 경계심 없으신 것 아닙니까? 저는 유중혁의 동료인데요.”
  1269.  
  1270. “음······ 대장께서도 딱히 언질이 없으셨고, 그리고······ 뭐랄까, 독자 씨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듭니다. 아흔 네 번의 시나리오를 거치는 동안 얻은 직감이랄까요.”
  1271.  
  1272. 원작 내내, 이현성의 저 직감은 대부분 빗나간다.
  1273.  
  1274. 나는 이현성이 저런 소리를 할 때마다 이제 곧 유중혁이 뒤통수를 맞아 뒈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1275.  
  1276. “여, 왔어? 어디 실력 좀 보자고.”
  1277.  
  1278. 함께 사냥을 나가는 이들은 김남운과 이지혜였다. 큰 회색 후드를 덮은 이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일별했다.
  1279.  
  1280. “빨리 와. 출발할 거야.”
  1281.  
  1282. 나는 일행을 따라 본부를 나섰다.
  1283.  
  1284. 이번 사냥의 목적은 본부 주변에 잔재하는 ‘이름 없는 것들’을 청소하고 아이템들을 수거하는 것이었다.
  1285.  
  1286. 물론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고, 나는 한수영이 왜 이 사냥을 지시했는지 알고 있었다.
  1287.  
  1288. ―전방에 두 마리 옵니다. 하나는 촉수종, 하나는 복합종이에요.
  1289.  
  1290. 허공에서 들려오는 한동훈의 메시지와 함께, 이지혜가 칼을 빼들었다.
  1291.  
  1292. 발동한 [순살]이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내자, 이어서 달려든 김남운이 [흑염]을 발동해 촉수종의 본체를 불태웠다.
  1293.  
  1294. 원작을 볼 때도 느꼈지만, 저 둘은 손발이 굉장히 잘 맞는 편이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괴물이 산화하자, 김남운이 이죽거리며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1295.  
  1296. “나이스 어택.”
  1297.  
  1298. 김남운이 짐짓 쿨한 얼굴로 이지혜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차가운 눈빛의 이지혜가 김남운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검풍은 김남운의 뺨을 스쳐 [흑염] 속에서 촉수를 재생하던 ‘이름 없는 것들’의 본체를 꿰뚫었다.
  1299.  
  1300. 이지혜는 다음 사냥감을 향해 움직였다. 김남운이 그 뒤를 쫓았다.
  1301.  
  1302. “야, 같이 가!”
  1303.  
  1304. 길영이랑 유승이가 자란다면 저런 콤비가 될까.
  1305.  
  1306. 돌아간다면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307.  
  1308. “독자 씨?”
  1309.  
  1310. “아, 네. 저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1311.  
  1312. 나는 황급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고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쐐액거리며 날아드는 촉수들이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전인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없는 것들’을 상대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1313.  
  1314. “크큭, 약하잖아?”
  1315.  
  1316. 양손에 [흑염]을 거머쥔 김남운이 꺼림칙한 미소를 지은 채 ‘이름 없는 것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1317.  
  1318. “잘 보고 배우라고!”
  1319.  
  1320. 확실히, 대단한 전투력이었다. 지금의 김남운이라면 ‘심연의 흑염룡’의 힘을 절반 정도는 끌어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1321.  
  1322. 나는 그런 김남운을 조용히 응원해줬다.
  1323.  
  1324. “잘 하네. 저기 또 온다.”
  1325.  
  1326. “하하핫, 내게 맡기라고!”
  1327.  
  1328. 콰아아아아!
  1329.  
  1330. “와우, 아무리 그래도 저기 쟤는 힘들겠지?”
  1331.  
  1332. “무슨 소리! 하하하핫! 죽어라!”
  1333.  
  1334. “이야, 그렇다면 저기 저 녀석도······.”
  1335.  
  1336. 뒤늦게 뭔가를 눈치 챈 김남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1337.  
  1338. 곁에서 이현성이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괴수를 잡던 이지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표정이 일그러진 김남운이 나를 향해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나는 녀석에게 일러주었다.
  1339.  
  1340. “이지혜는 허세부리는 거 안 좋아해.”
  1341.  
  1342. 김남운의 얼굴이 놈의 머리카락처럼 희게 변했다. 녀석의 동공은 거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1343.  
  1344. 사실 제일 가관인 것은 곁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이현성이었다.
  1345.  
  1346. ······이 양반 눈치 없는 건 어느 회차나 마찬가지군.
  1347.  
  1348. 멀리 떨어진 이지혜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알을 굴리던 김남운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1349.  
  1350.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1351.  
  1352.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머리부터 염색하고 붕대도 풀어. 반장갑을 끼려면 양쪽을 다 끼든가. 사냥 후에 ‘나이스 어택’ 같은 소리도 하지마.”
  1353.  
  1354.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싫어합니다.]
  1355.  
  1356. “저 뒤에 쟤처럼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1357.  
  1358. 얼굴이 시뻘게진 김남운이 내 뒤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1359.  
  1360. 그곳에는 멍한 얼굴의 유중혁이 있었다.
  1361.  
  1362. 꼬질꼬질한 코트에 씻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녀석의 잘생김까지 가리진 못했다.
  1363.  
  1364. “저 녀석은 ‘악’이다. 멋있긴 하지만.”
  1365.  
  1366. 라고 ‘망상악귀’ 김남운이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1367.  
  1368. “너무 나쁜 놈으로 몰고 가진 마. 좋은 구석도 있는 놈이야.”
  1369.  
  1370. “하, 누가 한 패거리 아니랄까봐. 그러고 보니 넌 어쩌다 유중혁이랑 같이 다니게 된 거냐?”
  1371.  
  1372. 김남운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자, 이현성이 말했다.
  1373.  
  1374. “독자 씨가 다른 세계선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1375.  
  1376. 아마 한수영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1377.  
  1378. 깜짝 놀란 김남운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1379.  
  1380. “다른 세계서언? 그건······ 평행우주······?”
  1381.  
  1382. “비슷해.”
  1383.  
  1384. 간단한 생물 지식도 없는 김남운이 평행우주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탄복했다.
  1385.  
  1386. 확실히 이 회차는 내가 기억하는 회차와는 다른 데가 있다.
  1387.  
  1388. “뭐야, 그래서 지금까지 안 보였던거구나. 그래서? 여긴 왜 온 거냐?”
  1389.  
  1390. “신났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알려줄 수가 없네.”
  1391.  
  1392. “쳇, 그럼 그 세계에서 난 뭐 하고 있어? 혹시 내가 리더라든가?”
  1393.  
  1394. “넌 죽었어.”
  1395.  
  1396. 김남운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탈색되었다.
  1397.  
  1398. “농담이야. 넌 거기서 건프라 만들고 있어. 되게 행복해하던데.”
  1399.  
  1400. “건프라? 오오······.”
  1401.  
  1402. 어느샌가 다가온 이지혜가 김남운의 뒤통수를 갈겼다.
  1403.  
  1404. “뭘 헤죽거리고 있어? 아이템 주워.”
  1405.  
  1406. “어, 어.”
  1407.  
  1408. 이지혜를 따라 허겁지겁 아이템을 줍는 김남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1409.  
  1410. 어쩌면 나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녀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1411.  
  1412. 이지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템을 줍던 김남운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1413.  
  1414. “저기.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1415.  
  1416. “뭐.”
  1417.  
  1418. “나중에 코트 잠깐만 빌려주면 안돼?”
  1419.  
  1420. ······뭔 소린가 했더니.
  1421.  
  1422. “너 하는 거 봐서.”
  1423.  
  1424. 김남운이 투덜거리며 다시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1425.  
  1426. 잔소리를 늘어 놓는 이지혜와 껄껄 웃는 이현성.
  1427.  
  1428.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1429.  
  1430. 하지만 그 평화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곳이 내 세계가 아니라는 것만을 강하게 상기할 뿐이었다.
  1431.  
  1432. 이곳에는 정희원이 없고.
  1433.  
  1434. 유상아도, 이길영도 없다.
  1435.  
  1436. ······그래, 한명오도.
  1437.  
  1438. 그러니 나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1439.  
  1440.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주변의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했다.
  1441.  
  1442. 나는 수거한 아이템들을 살피다가 미소를 지었다.
  1443.  
  1444. 역시 있었군.
  1445.  
  1446. 9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마, 한수영은 이 근방에 그 검들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447.  
  1448. 그런데 검을 뽑아든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1449.  
  1450. “저기, 현성 씨.”
  1451.  
  1452. “예?”
  1453.  
  1454. “한수영이 이 검을 구해오라고 한 겁니까?”
  1455.  
  1456. 내 말에 검을 들여다보던 이현성이 대답했다.
  1457.  
  1458. “아, 맞습니다. 우리가 찾던 검입니다.”
  1459.  
  1460. 95번 시나리오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열쇠가 되는 시나리오였다.
  1461.  
  1462.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검을 통해, 봉인된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시나리오.
  1463.  
  1464. 하지만 이 검은······.
  1465.  
  1466. 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1467.  
  1468. 하늘을 올려다 보자, 거대한 [묵시룡의 봉인구]가 이쪽을 오시하고 있었다.
  1469.  
  1470. 새카만 구체 속에 잠들어 있는 ‘멸살법’ 최대 최악의 파멸룡(破滅龍).
  1471.  
  1472. 본래 유중혁은 저 용을 해방시키며 거대 설화인 ‘묵시룡의 해방자’를 얻고 마지막 시나리오로 진출하게 되어 있었다.
  1473.  
  1474. 「그 순간, 김독자는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깨달았다.」
  1475.  
  1476. 강하게 쥔 칼자루가 파르르 떨렸다.
  1477.  
  1478. 「그리고, 한수영이 자신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1479.  
  1480. *
  1481.  
  1482. 김독자는 그날 내내, ‘멸살법’을 읽고 또 읽었다.
  1483.  
  1484. 이미 읽었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며, 혹시나 자신이 놓친 행간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김독자는 뭔가를 찾는 듯했다. 혹은, 찾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스마트 폰을 내려다 보며 몇 번이나 머리를 감싸쥐었고,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1485.  
  1486. “······시끄러워. 그만 떠들어.”
  1487.  
  1488. 그리고 가끔은 [제4의 벽]을 욕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독자는 노력했다. 그것은 뭔가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고, 어쩌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노력이었다.
  1489.  
  1490. 이윽고 김독자의 눈빛에 작은 결의가 깃들었다.
  1491.  
  1492. 하루이틀만에 쌓인 결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읽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결의였다. 그 결의로, 김독자는 계속해서 ‘멸살법’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1493.  
  1494. 그렇게 얼마나 더 읽었을까. 별처럼 빛나던 김독자의 눈은 조금씩 흐려졌다. 김독자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1495.  
  1496. 유중혁은 텅 빈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1497.  
  1498. 지친 김독자의 등.
  1499.  
  1500.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
  1501.  
  1502. 츠츳, 츳.
  1503.  
  1504. 아주 작은 스파크와 함께, 유중혁의 눈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텅 비었던 동공에는 사나운 살의가 깃들었고, 그 살의는 정확히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1505.  
  1506. 스르릉.
  1507.  
  1508. 고요한 검명과 함께 유중혁의 등에서 [진천패도]가 뽑혔다. 그는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김독자를 향해 다가가, 김독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1509.  
  1510. 츠츠츳.
  1511.  
  1512. 「하 하 그런 짓 은곤 란해」
  1513.  
  1514.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김독자를 깨울 듯, [제4의 벽]이 불안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음]으로 허상의 ‘벽’을 겨냥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1515.  
  1516. ―녀석을 깨울 생각은 마라. 그런 짓을 하면 즉시 목을 날려버릴 거니까.
  1517.  
  1518. 「흐 음」
  1519.  
  1520. [제4의 벽]이 생성하던 스파크의 세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1521.  
  1522. 유중혁은 검을 물리지 않았고, [제4의 벽]은 허공에 활자들을 토해내며 유중혁을 마주보았다.
  1523.  
  1524. 「원하 는 게 뭐 야?」
  1525.  
  1526.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1527.  
  1528. 말을 찾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1529.  
  1530. 그때, [제4의 벽]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1531.  
  1532. 「아 하 알겠 다」
  1533.  
  1534. “······.”
  1535.  
  1536. 「궁금 한 거 지 ?」
  1537.  
  1538. 유중혁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제4의 벽]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웃어댔다.
  1539.  
  1540. [제4의 벽]의 활자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1541.  
  1542. 허공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활자들이 이윽고 방을 한가득 덮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활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활자들도 그의 손에 반응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1543.  
  1544. 「“저는 독자입니다.”」
  1545.  
  1546.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1547.  
  1548. 그것은 그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
  1549.  
  1550. [제4의 벽]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1551.  
  1552. 「아주 재 밌을 거 야」
  1553.  
  1554. 유중혁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1555.  
  1556. 밤이 깊고, 다시 깊은 밤이 저물어 희미한 새벽이 찾아들 때까지.
  1557.  
  1558. .
  1559.  
  1560. .
  1561.  
  1562. .
  1563.  
  1564. 이윽고 잠에 들었던 김독자가 깨어났을 때, 유중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텅 빈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1565.  
  1566. “······잠들었네, 젠장.”
  1567.  
  1568. 머리를 헝클어트린 김독자가 비틀대며 일어나 스마트폰과 검을 챙겼다.
  1569.  
  1570. 창밖을 내다보자, 벌써 도열을 마친 본부의 병력들이 보였다.
  1571.  
  1572. 95번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위해 모인 일행들.
  1573.  
  1574. 일행들의 중심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하얀 코트의 한수영이 보였다.
  1575.  
  1576. 오늘은, 화신 ‘유중혁’이 죽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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