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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uest
Sep 18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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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발자는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재능이 없어서 작가도 락스타도 과학자도 영화 감독도 못하고 이곳에 떠밀려온 나는, 종종 이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밖에서 보면 이과충은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겠지. 실은 개발자의 일이란 이과충이라기엔 너무도 문과스럽고, 문과에 가깝다기엔 조금 복잡한 단순 노동에 가까우며, 단순 노동이라기엔 논리사고를 많이 요한다. 말하자면 개발자란, 학습 만화들이 대 유행을 타서 학습 만화만 그리면 월급을 잘 주는 시대에 태어난 만화가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유행하는 <만화로 배우는 XXX> 시리즈 같은 것들이 백만 부씩 팔리는 시대. 판매 부수는 만화가의 실력보다는 설명하는 대상에 더 크게 좌우되고, 그렇다고 졸라맨으로 대충 그려 놓으면 회사에서 잘리고, 어쩌다 레드 오션에 배정된다면 (예: 만화로 배우는 중학수학) 다른 만화가랑 비교당하니 잘 그리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데, 또 창작자의 고뇌를 잔뜩 넣어서 퀄리티를 높이자니 "그 월급 받으면서 왜 이렇게 퍼포먼스(=속도)가 안 나오냐" 같은 소리를 듣질 않나, '월급 받고 노동하는 건데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있나?' 같은 회의감이 들지를 않나 하는, 그런 시대의 월급쟁이 만화가 말이다. 그래서 홧김에 사퇴하고 창작을 하자니 월급 숫자가 머리에서 빙글빙글, 때로는 떠오른 기발한 연출에 스스로 뿌듯해하기도 하는 그런 직장 생활. 너무 많은 학습 만화가 양산된 나머지, 세상에는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이런 컷으로 표현하세요!" 같은 가이드가 넘쳐나고, 가이드도 수요가 많아 자꾸 발전하다 보니 점점 퀄리티가 좋아져서 웬만해서는 그 가이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고, 어느새 그리는 그림의 90% 가량은 가이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다 보면, "내가 로봇이랑 다른 게 뭐지?"자문하게 되는,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로봇한테 이 일을 시키자니 할 수 있는 로봇이 없고, 아무한테나 재하청을 주려고 해도 그림 기초가 없는 사람은 가이드조차 못 따라하는 상황. 그러니 가이드를 따라서 만들 수 있는 나는 나름 전문성이 있는 인력인 것도 맞고, 가이드가 없는 특수 상황도 웬만하면 아이디어를 새로 내서 대처할 수 있으니 단순 노동이 아닌 것도 같은데, 실상 업무시간의 대부분은 가이드를 베끼고 있으니, 가끔 나오는 큰 돈을 벌었다는 비월급쟁이 동종업계 인물을 보면 기분이 아주 묘해지는 것이다. 속이 쓰리진 않고 입맛이 씁쓸하기만 한 걸 보니, "시발 그게 무슨 배부른 개소리냐?"고 누가 말한다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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